[혁명운동과 여성] 엘러너 마르크스
19세기 영국의 사회주의혁명가 엘러너 마르크스, 그녀를 기억하는 법
[편집자 주] 여성위원회는 총 네 차례에 걸쳐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는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이번 호, 엘리노어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상과 활동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이 기획연재는 여성위원회가 상반기 동안 진행한 ‘혁명운동과 여성’ 세미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다. 여성위원회는 이 세미나를 통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적 운동을 변혁운동, 혁명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보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삶과 사상을 개괄함으로써 현재의 여성 활동가들이 전범으로 삼을 수 있는 역할 모델을 발견하고자 한다.
연재를 통해 소개할 네 명의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사회 변혁을 목표로 하는 운동에 자신의 삶을 헌신했고 당대의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녀들은 여성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녀들 자신이 여성으로서 겪는 문제를 인식했거니와, 혁명운동의 당연한 주체로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여성 문제의 고유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당시에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자유주의적 여성운동은 여성억압과 여성의 종속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었다. 당시 노동자계급의 여성들은 경제적 독립의 기회를 차단당하거나 저임금 노동력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여성운동은 이런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을 바꾸려는 운동이 아니었고, 단지 여성노동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여성 사회주의자들에게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노동권과 여성권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그녀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면서 여성해방을 그 운동의 이념으로 각인시키고자 노력했다.
물론 사회주의 운동에 여성해방의 이념을 결합시키려는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이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그녀들의 삶과 운동 자체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녀들의 헌신, 굳은 의지, 지적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강한 책임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게 한다. 우리는 사회의 변혁과 여성의 해방을 결합시키려 했던 그녀들의 계보를 오늘에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번 기획연재가 여성해방운동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여러 활동가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엘러너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노동자 사랑과 진심을 기억합니다. 엘러너만큼 사회주의 진영에서 노동자를 위해 수고한 사람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 영국 노동조합의 제임스 모슬리
엘러너 마르크스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있다 해도 흔히 칼 마르크스의 딸이라거나 비극적으로 죽은 여성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리아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등 여성사회주의자들이 이름을 남긴 것과는 다른 점이다. 아마도 그녀의 독립적 활동보다는 아버지인 마르크스의 이름과 엘러너의 극적인 죽음의 무게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국 사회주의를 이야기 할 때 엘러너는 빠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동료이자 정통성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고, 마르크스 사후에도 일관되게 노동자운동에 헌신했다. 또 당시 여성의 삶과 사랑에 변화와 자유가 필요함을 깨닫고 실천했다. 그런데도 엘러너는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엘러너뿐만 아니라 대다수 여성혁명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가려진 삶을 드러내 기억해야 한다. 특히 여성 혁명가가 겪는 결혼, 가족, 사랑, 출산이 남성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여성이 운동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이렇게 여성혁명가를 되살리는 것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탄생할 많은 여성혁명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생애는 단편적이지 않아서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 상황과 관계, 내면의 심리 등을 입체적으로 고려할 때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엘러너에게도 많은 이름을 붙이며 시작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의 막내 딸, 19세기 영국 노동자운동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마르크스주의자, 뛰어난 연극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배우이자 기획가, 자유로운 사랑을 꿈꿨지만 결국 그 사랑 속에 파묻혀버린 여성. 적어도 이런 이름들을 다 기억할 때 엘러너 마르크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꼬마 정치가의 탄생과 성장
“물론 어제는 『뉴욕 트리뷴』에 기고할 원고를 쓸 수 없었소. 오늘도 쓸 수 없고, 어쩌면 내일도, 앞으로 한동안 쓰지 못할 것 같소. 왜냐하면 어제 아침 6시부터 7시 사이에 아내가 또 한 명의 나그네에게 마르크스라는 성을 물려줬기 때문이라오. 유감스럽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아이인 듯싶소.”
엘러너는 1855년 1월 16일 런던에서 칼 마르크스와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잃은 마르크스는 남자 상속자를 낳지 못했다는 생각에 깊은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딸 엘러너가 자신을 똑 닮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투시(엘러너의 애칭)가 바로 나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엘러너를 죽은 아들과 동일시해 사내아이처럼 키웠다. 어느 정도 성장한 엘러너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의 가정에서 식사 시간과 차 시간에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의견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엘러너의 학습을 지도하는 데 엄청난 힘을 쏟았고, 그녀 역시 정치 공부에 놀라운 의욕을 보여주었다. 아래의 재미있는 일화는 어린 시절 그녀의 영특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엘러너는 여덟 살 때 만나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숙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할아버지가 위대한 정치가라는 이야기를 아빠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요. 그러니 우린 반드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폴란드가 어떻게 될 건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나는 이 용감하고 사랑스런 폴란드인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거든요.”
이렇게 맹랑한 꼬마인 엘러너는 “아브라함 링컨이 전쟁에 관해 내 조언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갖기에 이르렀고, 결국 미국 대통령에게 긴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아버지 마르크스는 매번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엘러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여행을 하거나 집회에 참가하여 국제사회주의의 많은 지도자들과 만났다. 독일 사회주의자 리프크네히트가 평생 그녀의 친구였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시 엘러너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이러한 일상적인 만남은 살아있는 정치교육이었다. 또 그녀의 어머니 예니와 가정부였던 헬레네 데무트, 아일랜드 태생의 공장 소녀 리지 번즈는 여성인 엘러너의 역할 모델이었다. 이 세 명은 통찰력 있는 지성과 정치력을 갖고 있었고, 자기희생적이었다. 이런 특성은 엘러너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엘러너의 정치력은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더욱 단련된다. 1871년 3월 파리코뮌은 마르크스 집안 전체에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자본가 계급과 그 국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파리의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고.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세계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새로운 출발점에 도달한 것 같아 무척 흥분되오”라고 쿠겔만에게 쓴 마르크스의 편지에는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있다. 1848년 혁명 이후 처음으로 마르크스는 혁명적 정치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 엘러너 역시 마르크스의 비서 활동을 하며 코뮌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 런던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녀는 마르크스 집의 문을 두드리는 파리 망명객들 덕에 코뮌에 대한 관심을 지속한다.
한편 이 시기 처음으로 엘러너와 마르크스가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망명가 중 한 사람인 리사가레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리사가레는 엘러너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34세의 저널리스트로 코뮌에 참가했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집을 드나들며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지니고 있던 개인주의의 면모를 벗을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그들의 관계에 반대했다. 정치적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진 것도 미래도 없음이 분명한 망명가와 자신의 딸이 교제하는 것이 탐탐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러너는 리사가레와 실질적인 약혼관계를 9년 동안 이어간다. 리사가레와의 관계로 생긴 갈등과 반항은 엘러너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립을 찾으려는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엘러너의 갈등은 격렬하게 드러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마르크스는 둘의 관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리사가레와의 9년간의 관계는 조용하게 끝나고, 엘러너는 1884년에 에이블링을 만난다.
에이블링과 만남
1881년 12월 2일 엘러너의 어머니 예니가 간암에 걸려 죽는다. 아내의 투병으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마르크스도 몸져 눕는다. 미완의 『자본』을 완성하기 위해 건강을 되찾으려 노력했던 그는 결국 15개월 후 아내 예니를 뒤따랐다. 그 때부터 엘러너는 진정으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한다. 남겨진 유산으로 그녀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나 정신적으로 혹독할 정도로 외로웠다. 그녀가 에드워드 에이블링 박사를 친구로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84년 여름 엘러너는 자신의 나머지 생애의 동반자이자 끊임없이 그녀를 지치게 했던 에이블링과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다. 엘러너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의견이 같았다. 연극을 사랑했고 돈에 구애받지 않았다. 내 아버지도 그를 좋아했다. 우리는 능률적으로 협동할 수 있었다.” 둘 사이의 친화력은 즉각적이었고 강력했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지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던 에이블링은 어린 시절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신경성 질환에 시달려온 엘러너에게 활력을 주었다. 에이블링은 사회주의자이며 자유사상가로 무신론자였다. 에이블링은 당시 영국의 지적 주류 중 하나였던 정교(政敎) 분리주의 운동에 가담해 국교를 공격하며 사회복지를 강조하고, 사상의 자유를 주장했기 때문에 영국 사회주의 확산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 에이블링의 이러한 활동과 사상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엘러너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위대한 사상에 대한 헌신이었다.
하지만 에이블링이 엘러너에게 기쁨과 환희만을 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끼게 했고, 끊임없는 감정노동과 희생을 쏟아 붓게 만들었다. 애당초 엘러너와의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에이블링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에이블링의 부인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엘러너의 자유로워 보이는 이 결혼은 전통적 결혼보다 더 억압적이고 불행한 것이었다. 게다가 에이블링에 대한 평판은 끔찍했다. 당시 사람들이 남긴 그에 대한 기록에는 그의 도덕적 타락, 재정적 낭비, 무책임함, 알코올 중독, 방탕한 여자관계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둘의 관계를 마르크스의 ‘성실하고 착한 딸’과 ‘악명 높은 방탕아’의 결혼이라 부르며 경악했다. 엘러너는 에이블링과의 결혼으로 자유와 활력을 얻었지만, 주변의 동료들이 떠나갔으며 둘의 관계는 종종 운동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엘러너는 에이블링을 떠날 수 없었고 에이블링을 만난 후 그녀의 활동은 항상 그와 함께였다. 에이블링은 엘러너의 삶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두 남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물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아버지 마르크스다.
사회민주주의연맹의 결성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1880년대 후반 들어 변모하기 시작한다. 1878년 리프크네히트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편지에 그 비판이 담겨 있다. “영국의 노동자 계급은 매우 미약하기는 하지만, 1848년 이후 부패한 시기를 겪으며 타락해갔고 마침내 자본가들이 만든 위대한 자유당의 맹목적인 꼬리, 즉 그들의 노예가 되기를 소망할 정도로 타락해 버렸다.” 이 무렵 인터내셔널의 영국인 멤버들도 차츰 자유주의로 이전한다. 또 숙련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도 1871년 제정한 조합법으로 법적 지위를 획득하자 더 이상 국제조직에 관심을 갖지 않기에 이른다. 엘러너는 “정치적인 운동은 이제 완전히 끝났습니다”며 절망을 토로한다.
한편 1880년대 들어 중간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이 급진주의 조직을 만든다.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던 헨리 메이어스 힌드먼은 영국에서 최초로 사회주의적 정치조직을 만든다. 힌드먼은 칼 히르쉬를 통해 몇 차례 마르크스를 만났다. 그는 과거의 차티스트 운동가와 급진적 클럽들을 결합해 혁명조직을 만들려는 계획에 마르크스가 주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힌드먼을 ‘자기도취적’인 ‘약한 그릇’으로 평가했고 엘러너도 이에 동의했다. 힌드먼은 1881년 6월 스스로 사회주의 단체임을 자임하는 민주연합(훗날 사회민주주의연맹)을 결성한다. 이 민주연합은 영국 사회주의 발전의 초석이자 당시 사회주의 세력들의 결집체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와 힌드먼에 대한 불신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요 발기인이 되기를 계속 거부했다. 이런 감정은 힌드먼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요약한 자신의 저서 『만인을 위한 영국』을 발간하며 더욱 심화된다. 마르크스는 중산층 민주주의자가 주축인 당을 위한 강령과 힌드먼이 인용한 자본주의적 착취에 관한 자신의 이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을 주요하게 인용하고도 저자를 밝히지 않은 점은 마르크스의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엘러너의 불신과는 상관없이 민주연합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부상한다. 이 때문에 엘러너는 에이블링과 함께 민주연합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접촉을 시도한다. 1884년 사회민주주의연맹으로 개칭한 민주연합의 4차 연차대회에서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집행부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연합에서 탈퇴한다. 힌드먼이 마르크스주의 인터내셔널의 부활에 반대함으로 써 입장 차이와 감정적 갈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또 연합의 이념이 점차 의회주의로 변모되고 힌드먼의 고압적 태도 역시 변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혁신을 위한 사회주의자동맹 건설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족했으며, 지금으로서는 힌드먼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엥겔스와 협의한 후 개인의 사조직으로 전락한 사회민주주의연맹을 버리고, 보다 혁신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새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1884년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윌리엄 모리스, 벨 포트 맥스 등과 함께 사회민주주의연맹에서 탈퇴하여 사회주의자동맹이라는 독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연맹이 물들어 있는 기회주의, 개혁주의, 의회주의를 공격했다. 그리고 혁명적 국제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엘러너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자동맹에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동맹은 국제적인 명성과 신뢰를 얻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단체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회원이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아 전국 조직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들은 교육, 조직 활동, 당내 민주주의를 3대 활동 강령으로 채택했으며, 특히 교육을 중시 여겼다. 대학가의 강연과 민중을 위한 무료 예술을 제공했고 여성 문제에도 앞장섰다. 특히 엘러너는 여성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들 여성은 이제 분노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죄악과 사악함을 깨끗이 지워 버리기 위해 대홍수가 - 가령 그것이 피의 홍수가 될지언정 - 필요한 것이다.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 의무는 사회를 혁명하려는 자들을 돕는 것뿐이다.”
엘러너는 모든 여성문제의 근원이 성 지배에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자본주의에서 결혼이 상거래의 일종이며, 여성에게 그러한 결혼은 매춘보다 나을 것이 없는 종속적 관계라 규정했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들이 사회가 부과한 여성적 관습을 깨고 새로운 여성상으로 나아갈 것을 설파했다. 사회주의 혁명시에도 애정과 존경, 지적 친근성, 생활의 균등이 이루어질 때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 것이라 보았다. 또 진보적 여성의 사상은 여성 참정권과 고등교육 같은 시민의 기본권뿐 아니라 사유재산 및 여성의 육체 또는 정신적인 특수한 문제, 그리고 전문 직종에 대한 관심 등 모든 일반적인 분야를 총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태생부터 분파주의에 휘말릴 위험이 있던 사회주의자동맹은 결국 실패한다. 평의회에 이미 많은 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침투해 있었으나 엘러너를 비롯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더군다나 힌드먼의 독단적 행동에 혐오감을 느낀 동맹의 설립자들은 중앙집권적 통제를 통한 당의 통일을 모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사회주의자동맹 내부의 주도권 쟁탈과 이념논쟁이 그치지 않았고, 동맹의 지도부는 점차 폭력행위에 열중하는 아나키스트들의 파벌집단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새로운 방도를 찾고자 했던 엘러너는 이러한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동맹에서 손을 떼고 다른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신노조주의에 대한 헌신
엘러너는 신노조주의에 기대를 걸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당시 영국 노동자운동의 상황을 보자. 19세기 말에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기존의 노조주의는 숙련 노동자들 주도하에 확립된 것으로 제도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873~1896년 동안 유럽 전역은 대불황을 경험했고, 이에 자본은 기계화와 노동강도의 강화로 대응하며 노동자들 내부의 불안을 키우고,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려 했다. 숙련 노동자들은 방어적 전략에 입각해 고용주와 타협했지만 반숙련이나 미숙련 부문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반숙련, 미숙련 노동자들이 숙련 노동자들과는 달리 노동조합에 속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고용의 불안정성에 직면해야 했다. 따라서 기존의 노조주의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기존 노조를 통한 단체 협상보다는 직접행동에 대한 호소가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숙련 노동자들은 보다 급진적 이념과 새로운 노조주의를 제시하며 스스로 조직하려는 주체적 조건을 만들었다. 영국에서 이러한 신노조주의는 1889년의 파업들을 계기로 폭발했다.
엘러너는 신노조주의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지도적 인물이 된다. 동맹에서 활동하며 지칠 대로 지친 그녀가 새롭게 결심한 것은 영국의 노동자, 빈민들을 조직, 선동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노동자들과 밀착한 운동을 하면서 지난 사회주의 정치활동에서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을 얻었다. 엘러너는 영국의 산업체제 속에 인간의 삶이 경멸당하고 있음을 보고 사회주의야말로 불평등과 비참함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1889년 3월 ‘브리튼 및 아일랜드 가스공업과 일반노동자의 전국조합’이 결성됨으로써 신노조주의 운동의 서막이 열렸다. 그리고 그 시작에 엘러너 역시 동참한다. 계급적 성격을 강조하는 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시 지도부인 윌 도운에게 읽기를 가르쳐주며 전반적 지식을 넓히는데 도움을 준다. 엘러너는 사려 깊은 행동과 조합원에 대한 헌신적인 행동 덕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당시 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한 가스 노동자들의 파업이 승리를 거두었고 연이어 런던 항만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강경파업과 예상 밖의 성공에 엥겔스 역시 감격해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지난날의 무수한 시행착오와 분열을 딛고, 우리는 마침내 가장 미래지향적인 운동을 발견했다. 내 생애를 통해 이번 파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또한 기쁘게 생각한다. 만약 마르크스가 살아서 자신의 눈으로 이런 광경을 봤더라면, 그는 나와 함께 지금 당장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한편 엘러너는 실버타운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생사가 걸려 있는 이 10주간, 나는 매일 그들과 함께 뒹굴며 비바람을 맞고 다녔다”라고 엘러너는 당시를 추억했다. 이 시기는 엘러너가 노동자들의 삶과 맞대며 사회주의 운동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시기였다. 그녀는 실버타운에 가스공조합 여성지부를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으로 취임한다.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의 조직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여성들이 남성들 이상으로 분기해야 하며 당면한 임금인상을 위해 단결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같은 계급의 남성들과 더불어 투쟁하게 될 미래에 대비하여 단결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어서 엘러너의 활약은 계속된다.
“5월 4일이 지나면 영국의 운동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의 귀에도 엘러너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들릴 것입니다.”
소르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5월 4일은 다름 아닌 영국에서의 첫 번째 메이데이였던 것이다. 8시간 노동준수 입법 요구와 법률 개입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약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였고 역사상 유례없는 대성공을 이뤘다. 메이데이 시위로 엘러너는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었다. 5월 중순에는 가스공조합의 서기장으로 추대되고, 새로운 조합 규약은 대부분 엘러너의 의사에 따라 채택되었다. 규약에는 모든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하나임을 강조하며 여성을 위한 평등임금에 관한 조항 및 노동자 계급의 생활향상을 위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새로운 기구인 ‘8시간 노동준수 입법을 위한 국제노동연맹’에 핵심이 되어 인터내셔널에서 영국 사회주의를 대표할 독자적인 노동당의 수립을 목표로 선전, 선동을 벌였다. 이렇게 1890년대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이 활기를 띠며 엘러너의 활동도 빛을 발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국가와 자본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유지가 최대의 목표가 된다. 처음에 신노조주의가 가졌던 이념의 통일성, 혁명성은 점차 상실되어가고 엘러너가 공들였던 국제노동연맹 역시 붕괴되어 갔다. 게다가 1895년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방황하게 된다. 제2인터내셔널이 쇠락의 길을 걷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탄생했다. 엘러너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수많은 정치적 논쟁 속에 지쳐갔다.
여성혁명가의 안타까운 죽음
엘러너가 절망에 빠진 것은 정치적 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런던 극장가를 배회하던 에이블링에 대한 환멸 역시 늘어만 갔다. 사실 이 시기에 엘러너는 자신에게 닥친 일만으로도 벅차 에이블링에게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강연활동과 대영박물관에서의 조사, 국제 노동자대회 및 탄광노동자 대회 통역, 게다가 죽은 제니 언니의 아이들에 대한 걱정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하지만 에이블링은 엘러너를 신경쇠약 지경까지 몰고 갔다. 엘러너는 마지막까지 병든 에이블링을 간호하고 헌신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한 통의 편지는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1898년 3월 31일 오전 그녀는 에이블링이 이미 오래전에 비밀리에 여배우와 혼인신고를 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엘러너는 그동안 에이블링과의 관계가 진실한 부부라 믿었고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주장하곤 했다. 친구들의 비난에도 연애는 형식일 뿐이라 변명했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이라 믿었던 마음이 무참히 짓밟히자 그녀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졌다고 느꼈다. 그녀는 에이블링과의 마지막 대화 후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에이블링에게 짧은 편지를 남겼다.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여,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날 겁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지막 말은 이 길고도 슬픈 세월 내내 입술로 되뇐 말, 사랑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엘러너의 죽음을 에이블링의 배신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시 엘러너는 노동자운동이 곤란함에 빠지면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 에이블링의 배신이었던 만큼 그 지점에서 우리의 평가가 필요하다. 한 여성 혁명가의 생애가 사랑의 배신을 계기로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은 비극이다. 특히 여성들의 삶에 주목했고 여성해방에 관심을 쏟았던 엘러너의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 엘러너는 여성들이 부르주아적인 결혼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센의 『인형의 집』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만났을 때도 그녀는 반가워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현실의 사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활력 있고 매력적이며 능동적이던 그녀가 왜 수동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함께 혁명운동에 동참하였으나 사랑과 결혼에서는 오롯이 엘러너 혼자일 때가 더 많았다. 그녀는 고독과 절망을 느낄 때에도 자유롭게 선택한 사랑이므로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연애를 빌미삼아 무책임한 연애들을 정당화하며 성적 해방감을 만끽하던 에이블링과는 전혀 다른 점이다.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더욱 사랑에 의존하고 충실했다. 결국 그녀의 견고했던 믿음이 깨지는 순간, 삶의 전부가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갈등과 절망을 이해해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으로는 그녀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또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도 그녀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은 그녀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엘러너를 기억하는 법
종종 여성들의 삶은 남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엘러너 역시 마르크스의 딸, 에이블링으로 인해 죽음을 택한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엘러너에게는 무궁무진한 자신의 삶이 있었다. 영민한 판단과 예민한 감수성, 타인에 대한 헌신성, 운동에 대한 정열로 19세기 영국 사회주의 운동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던 엘러너 마르크스. 이제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엘러너가 가졌던 원칙과 입장, 노동자운동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배우자. 그리고 엘러너가 살았던 당시 운동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넘어서자. 페미니즘과 결합한 사회운동으로 여성의 경험을 풀어낼 이념과 실천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그녀가 간 길,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후세대인 우리가 엘러너를 기억하는 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