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건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보건의료운동의 과제
위협받는 민중의 건강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보건의료 뿐만이 아닌 주거, 생태, 물, 식량과 같은 건강결정요인 전반에 있어서 불형평성을 야기하고 민중의 건강을 위협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묻는 조사에서 ‘건강하다’, ‘매우건강하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소득 수준 최상위 10%인 사람들의 경우 1998년 52%에서 2005년 56.7%로 증가한 반면, 소득수준 최하위 10%의 경우는 34.7%에서 22.8%로 크게 줄었다. 이것은 객관적인 건강 지표의 불평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위 소득계층에 견줘 하위 소득계층의 사망위험은 2.3배 더 높다. 저소득층일수록 암에 더 많이 걸리고, 치사율도 높다. 그러나 저소득층 대비 고소득층의 의료이용량은 1997년에서 2005년 동안 2배에서 4배로 늘어났다. 반면 저소득층은 같은 의료를 이용해도 입원치료, 3차병원을 통한 치료는 더 적다. 저소득층이 더 많이 아프고 더 적게 치료받고 있지만, 경제위기 속에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노인인구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서 효과적인 사회정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상황이다. 신체적으로 취약한 노인인구의 특성상 보건의료와 사회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 없이 요양비용을 개인, 가족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민중의 고통은 대를 이어가며 가중될 것이고 불형평성은 더욱 고착화될 것이다. 2009년 신종 플루의 유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태파괴와 신종 감염병의 출현도 국경을 넘어 민중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문제
1977년 의료보험제도 도입 이후 의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의료비는 2006년 현재 GDP 대비 6.4%로 OECD 국가 평균인 8.9%에 비해 낮은 편에 속하지만 의료비 증가율은 1992년에서 2003년까지 6.9%로서 2-3%정도인 대부분의 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특히 약제비가 매우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약제비 증가율은 연평균 14.7%로서 OECD 평균의 2.1배에 달한다. 2003년 보건의료비 중 약제비 비중이 28.8%로 OECD 평균인 17.8%보다 높은 수준이다. 김창엽 등에 따르면 현재의 의료비 지출 결정 요인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2020년경부터 노령화와 함께 의료비가 급격히 증가해 2050년경에는 GDP 대비 20-30%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의료비는 증가하고 있지만 보건의료서비스의 질과 안전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불만은 여전하다. 공급자와 소비자 간의 정보 불균형이라는 자본주의 보건의료체계의 보편적 특징에다가 한국의 보건의료제도가 과잉 민간공급구조와 행위별 수가제로 이뤄짐으로써 병원의 영리추구 경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해 빚어진 결과다. 인력이 부족한 응급실, 짧은 외래시간과 같이 환자들은 안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은 고도의 집중과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부족한 인력으로 환자들의 고충을 처리해야하는 현실 속에서 높은 노동강도에 직면하게 된다. 환자들은 이러한 병원 환경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할 것 같다는 불신,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불필요한 시술을 권할지도 모른다는 불신을 가지게 된다. 불만은 더욱 광범위하다. 기본적인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병원 공간이나, 권위적인 진료 속에서 환자들은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불만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재정부담과 공급체계의 문제는 ‘3분 진료’, ‘건강보험 재정 파탄’ 같은 보건의료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리병원 도입과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라는 오래전에 폐기된 대책이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이명박 정부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는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지난 10년 간 진행되어온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완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이는 의료민영화가 지향하는 모델인 미국의 의료제도가 이미 민중 건강의 파탄이라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사회보장 효과를 이미 국민들이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은 총체적 관점에서 의료민영화와 동일선 상에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하면서 보건의료운동진영 내에서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주체를 형성하게 했다. 그러나 심화되는 양극화와 미약한 사회보장제도 속에서 앞에서 지적된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문제에 대한 적합한 대안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자본과 정부의 의료민영화 시도 역시 계속될 것이다. 대안의 모색은 현재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모순과 그것이 형성되어 온 사회적 과정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와 신자유주의적 재편
대중보건의료로서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형성
현대 보건의료의 역사는 인류가 직면한 주요 질병의 역사와 자본주의 축적양식의 역사에 조응한다.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도 20세기 확립된 대중보건의료체계의 한 형태다. 20세기 미국 헤게모니와 법인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질병의 양상도 변하면서 암, 심혈관계 질환과 같은 비감염성, 만성 질병이 주요 질병이 되었다. 20세기 초반 현대의학은 생의학 모형을 확립하면서 치료의학을 발전시켰다. 이에 맞춰 미국에서는 의학교육을 표준화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지식과 교육의 체계화는 의료의 전문직화와 대학을 중심으로 한 병원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간호전문직이 성장하면서 병원이 빈민구호시설이 아닌 진단과 치료의 기능을 수행하는 실질적인 간병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 병원이 급성외래환자 진료에 치중하면서 그 규모가 팽창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늘어나는 의료비를 대공황시기의 중산층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미국에서는 사적보험에 의한 제3자 지불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중산층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까지 병원이용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공황 시기 노동자계급의 보건의료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급진적 노동자운동을 통제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렇게 보험제도를 매개로 병원이용을 대중화하고 병원을 보편적인 의료기관으로 확립하는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되었다.
남한의 대중보건의료 역시 반주변부 국가로서의 특수성과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비슷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의학을 배제하고 서양의학에 기초하여 의학교육과 의료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위생경찰처럼 일제는 식민지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주도 보건의료체계를 만들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미국식 의료제도가 그대로 이식된다. 미국식 전문의제도가 도입되고 치료중심, 민간주도의 보건의료체계가 확립된다. 1950~60년대에는 발전주의 정책 속에서 민중의 건강문제는 과소평가되면서 재정 확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공립 병원 확충이 이뤄지지 않고 의사들은 미국으로 빠져나가거나 대도시에 집중되며 수가도 매우 높아 가난한 민중들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를 시작했다. 이들은 전체인구의 8.6%로서 당시 안정적 소득이 있는 가장 혜택 받은 계층이었다. 이러한 역진적 의료보장제도로서의 출발은 정권이 정치적 정당성의 획득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대중보건의료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후 추가적 확충개혁조치들이 있으면서 1989년에 전 국민이 모두 보험 대상이 되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보험제도가 도입된 1977년 이후 의료수요는 급속히 늘어났지만 정부는 공적 재원을 통해 공적 인프라를 늘리는 대신 민간 중심의 의료 사업을 지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인력 공급 문제에 있어서도 체계적 계획보다는 의과대학을 신설하여 공급량을 늘리는 것에 주력했다.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는 이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의원에서 민간 병원으로 성장의 중심이 바뀌게 되었다. 민간부문 병상수 구성비는 1949년 24.9%에서 1975년 53.7%, 2006년 82.6%로 성장하게 된다. 실질임금의 확대와 의료보험으로 인해 입원 욕구가 유효수요가 되었고 병상 확충을 정부가 지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전국민 건강보험을 통한 공적 의료재정체계가 결합된 한국의 대중보건의료체계가 확립되었다.
대중보건의료의 위기와 신자유주의
대중보건의료의 특징은 계속되는 성장과 비효율성이다. 병원은 계속 확대되고 의료서비스에 대한 요구도 많아지고 의료비도 증가하는데 정작 건강에 대한 만족도는 향상되지 않는 것이다. 비용상승과 건강 증진의 괴리라는 대중보건의료의 위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위기를 반영한다. 20세기 비감염성 질병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생의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대중보건의료의 개인적, 치료적 접근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질병이 의학 외적 요인으로 발생했다고 해서 의료가 유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료는 증상의 완화, 고통의 경감을 도울 수 있고 이를 통해 질병을 발생시킨 사회경제적 원인을 은폐하는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이를 의료의 이중적 기능이라고 한다. 유용한 기능을 통해 통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대중보건의료는 원인을 은폐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더 많은 질병을 발생시키고 증상 완화를 위한 의료 요구를 더욱 증가시킴으로써 모순의 확대를 야기한다.
대중보건의료의 위기는 보건의료가 자본축적의 영역이 될수록 더욱 심화된다. 보건의료가 개입하는 영역이 확대되면서 사회의 의료화 현상이 나타나지만 정작 불건강의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추구를 위한 대증적 치료에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 병원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특히 강하다. 민간 중심의 공급체계와 정부의 책임 방기로 인해 의료인력과 시설의 공급이 불균등해져 농어촌에는 의료시설이 부족한 반면, 대도시에서는 과잉 경쟁이 벌어지는 상황이 나타났다. 시장원리를 기본으로 한 행위별 수가제를 통해서는 이러한 경쟁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수가의 양을 통제하고, 심사를 통해 급여를 보상하면서 병원의 의료행위를 통제하려는 노력은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검증되지 않은 비급여 의료행위의 확대를 가져오고, 이것은 다시 민중의 부담 증가와 건강의 위협을 낳는다.
공급체계에 있어 현저히 낮은 공공병원 비중과 의료전달체계의 미확립, 행위별 수가제와 광범위한 비급여는 지역사회의 평판에 더 신경을 쓰는 외국의 비영리 민간 병원과 달리 한국의 병원으로 하여금 이윤추구에 매달리게 만들었고 재벌기업의 병원산업 진출과 시장점유라는 한국의 특수한 현상을 만들었다. 1989년 현대아산병원이 설립되고 1994년 삼성의료원이 설립되면서 한국의료체계의 구조적 문제는 더 심화된다. 3차 의료기관 간의 병상 수 증가와 고가장비 구입 경쟁이 격화되고, 이 과정에서 3차 기관의 역할이 아닌 경증외래환자들에 대한 고가진료와 서비스 과잉 제공을 통해 수익성을 확보한다. 정부는 이를 규제하기는커녕 1990년 진료권역별 병상수 상한제 폐지와 병상 신증설 절차 완화, 1998년 진료권역 폐지 등 이를 부추기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에 따라 의료비는 증가하게 되었고 의료전달체계는 와해되었으며, 의료 시설의 지역적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재벌기업의 병원산업 진출은 비록 비영리법인이라는 제도적 통제를 받고 있으나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일환으로서 ‘보건의료의 금융화’의 맹아를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말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금융자본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반혁명이 진행되었듯이 대중보건의료의 위기에 대해서도 공적 의료서비스의 비효율성을 그 원인으로 보면서 공적 보건의료영역의 사유화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약자본과 병원자본은 직접투자와 인수합병을 통해 자본을 집적하여 시장지배력을 늘리는 방식으로 이윤축적전략의 금융적 변모를 시도했다. 공급자가 소비지역으로 직접 진출할 수밖에 없는 병원자본의 경우 민족국가의 제도적, 경제적 장벽으로 인해 초민족화가 얼마정도 제한되나 제약자본은 성공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 국제기구를 통해 특허권과 독점권을 보장받아 초국적 제약기업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보험자본의 변화, 성장도 금융화의 또 다른 측면이다. 보건의료의 대중화에 기여했던 보험자본은 이제 보건의료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면서 이를 자본 집중의 계기로 활용한다. 미국의 ‘관리의료’가 대표적 사례다. 보험과 병원이 통합된 형태로 형성된 관리의료조직이 환자가 이용하는 의료서비스를 통제하게 된다. 보험회사는 의료과정 자체에 개입하면서 의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동시에, 양질의 의료에 대한 접근을 제한한다. 이러한 비용절감을 통해 민중의 건강은 과소평가되고 금융자본의 이윤은 극대화된다. 금융자본의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서도 진행 중이다. 삼성생명의 내부전략보고서는 삼성병원을 중심으로 1차, 2차 병원과 협력병원체계를 구축하고 삼성생명, 삼성화재와 계약을 통해 완전히 사적 지배가 가능한 대중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려는 목표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보건의료체계 역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시작한다. 대형 병원의 확대와 함께 제도 역시 재정비된다. 의료보험재정통합과 의약분업이 그 예다. 1988년 농민들의 보험료 납부 거부 투쟁에서 출발한 의료보험통합추진운동은 형식적으로는 직장보험과 지역보험의 재정, 운영통합이라는 제도적 변화를 요구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민중의 보편적 권리로서 건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총체적 사회관계의 변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지역보험의 불안정성과 취약한 보장성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지역보험과 직장보험으로 나뉘어져있던 당시 보험체계에서 지역보험의 재정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고 그로 인해 보장성이 낮았으며 국고의 보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도시노동자를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재정이 여유로운 직장보험이 지역보험과 통합된다면 지역보험 가입자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한편 보험 운영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1988년부터 민중운동의 주요 요구사항이었던 의료보험 통합은 1999년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결정이 되고 각 보험조합은 순차적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통합과정에서 지역보험 가입자 보험료의 50%를 국고로 지원하고, 심사평가제도를 통해 공급체계 통제 기제도 확보하며, 건강보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예방 및 건강증진 사업에도 기금을 활용하기로 하는 등 운동진영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공기업의 효율성, 국고 부담의 감소를 개혁 근거로 내세우며 의료보험통합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용도로 활용하였다. 게다가 여전히 공급체계는 민간 중심적이었으므로 병원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대형화, 고급화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이러한 추세를 재벌 병원들이 주도하면서 의료비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이른바 ‘빅4병원’이 건강보험재정에서 지급 받은 ‘건강보험급여’는 의약분업 다음 해인 2001년 4천 68억 원에서 2006년에는 9천 685억 원으로 5년 만에 2.4배로 늘어났다. 약 10%정도인 연평균 진료비 증가율의 두 배가 넘는다. 43개 종합전문요양기관, 즉 대형 종합병원의 건강보험급여 가운데 4개 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5년 만에 25.3%에서 31.3%로 늘어나 ‘빅4’ 병원으로의 쏠림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화, 고급화를 위한 종합병원의 투자 경쟁은 의료민영화의 핵심적 쟁점 중 하나인 영리법인병원 허용과 의료채권 도입의 동기가 되고 있다.
의약분업을 추진한 근거는 약물 오남용 감소를 통한 국민 건강 증진과 약물 사용 감소를 통한 약제비 절감이었다. 당시에 주로 비판받은 문제는 약제비가 정부고시가상환제로 보상되는 상황에서 고시가보다 저가로 거래를 하면서 획득하게 되는 제약회사의 음성적 약가마진과 이를 분배하기 위해 의사, 약사에게 주는 리베이트였다. 고시가상환제란 정부가 의약품 가격을 정해 놓고, 실제 의료기관이 정해진 가격 이하로 의약품을 구매하더라도 고시된 가격만큼 보상을 해주는 제도다. 정부는 의약분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약제비를 개별실거래가상환제로 바꿨다. 개별실거래가상환제는 개별 의료기관의 실제 구입가격을 취합해 실구매가격만큼만 보상을 해주는 제도다. 이 경우 의료기관이 저가약품을 사용할 동기는 사라지고 의사들이 보다 검증됐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더 비싼 초국적 제약기업의 오리지널 의약품을 처방하게 된다.
의약분업은 결과적으로 약품 남용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초국적 제약기업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실제로 초국적 제약기업들은 연합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인 로비와 압력을 행사하면서 의약품 관련 정책에 개입했다. 의약분업도 그러한 요구 중 하나였다. 그들은 또한 고가 수입의약품의 보험 등재를 요구했고 약가 결정에 있어서 연구개발가치의 인정과 투자비용의 회수가 가능한 가격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면서 선진국 수준과 동일한 약가기준을 요구하는 A-7가격결정제를 도입시켜 폭리에 가까운 약가를 관철시켰다. 한편 비공식적 수입인 리베이트가 줄어든 만큼 의약계의 수입보전을 위해 수가가 인상되었다. 이러한 의약분업의 결과는 초국적 제약기업의 비약적 성장과 건강보험 재정의 악화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추가적 재정분담은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져 그 부담을 민중에 전가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병원자본과 제약자본의 성장이 낭비적인 의료공급체계를 통해 건강보험재정을 위협한다면 민간보험자본의 성장은 건강보험을 통한 보건의료체계의 공적 통제기능 자체를 침식한다. 한국의 민간의료보험자본은 1996년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5년 동안 재원이 4배 가까이 성장했다. 2006년에는 실손형 의료보험 상품이 허용되었다. 실손형 의료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해주지 않는 본인부담금에 대해 보상해주는 보험이다. 실손형 의료보험 상품 가입자가 증가하게 될수록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의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는데 이는 결국 민간 보험에 가입하기 힘든 저소득층의 보장성을 약화시켜 건강양극화를 심화시키게 된다. 또한 실손형 의료보험 상품은 정액보상방식과 달리 환자에게 의료서비스가 얼마나 제공되는지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실손형 의료보험은 개인의 질병정보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고 병원의 의료행위에 개입하는 등 의료공급체계의 왜곡을 심화시키고 있다.
보건의료운동의 과제
개혁의 성격과 운동진영의 대응방안에 대해 많은 논쟁을 야기한 의료보험통합과 의약분업과정은 한국 의료체계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맞서기 위한 보건의료운동의 방향이 어떠해야하는지 보여준다. 개혁에 참여했던 보건의료운동진영은 의료재정체계의 확대를 통해 의료 서비스 이용의 형평성을 확대하고, 의료공급체계에 대한 공적 통제를 확대하여 적은 비용으로 국민의 건강을 확보하는 거시적 효율성도 달성하려 했으나 이것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보건의료운동이 착목하고 대응하지 못한 두 가지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민족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의료공급체계를 왜곡하는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이고 둘째는 노동 불안정화, 규제 완화, 빈곤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건강 자체의 확대다. 결국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개혁 정권 기간 동안 민중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획기적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운동은 새로운 대안을 통해 의료민영화 논쟁의 국면을 바꾸고자 시도하고 있다. 제안 내용은 한국 의료체계의 개혁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저부담-저보장-저수가 체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험료 인상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 과정에서 민중이 헤게모니를 확보해 민간보험 가입 동기를 제어할 만큼 높은 수준의 보장성과 포괄수가제, 지역별 병상 총량제, 주치의 제도 등 공급체계의 개혁을 쟁취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정책의 시장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이러한 요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이고 국민의 보편적 건강을 위해 재정을 확충할 의지가 없는 정부의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시킬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지출비중은 2006년 55.7%로서 OECD평균인 73%에 미달하고 있다. 따라서 공공지출비중의 확대에 있어 개별 보험자가 아닌 국가와 자본의 책임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공적재원으로서 건강보험의 양적 확대는 분명 의료공급체계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의료공급체계의 구조변화와 동반되지 않을 경우 매우 한계적일 수 있다. 지금의 의료공급체계에서는 공적재원이 오히려 대형병원과 민간보험, 그리고 초국적 제약기업의 이윤을 늘려주는 데 집중되기 때문이다. 현재 병원들이 이윤 추구에 몰두하고 민간보험이 활성화되며 초국적 제약기업이 특허권으로 독점을 유지하며 폭리를 취하는 상태에서는 건강보험에 투입한 공적재원이 자본을 키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공적재원의 지원을 받으며 몸집을 불린 병원, 보험, 제약 자본들은 계속 어떻게든 노동자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건강보험과 보건의료의 공공적 성격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앞서 밝힌 의료보험통합운동이 대응하지 못했던 맹점들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결국 현실적으로 병원자본의 이윤추구를 억제하지 않고 민간의료보험 시장을 위축시키지 않는 선에서 이러한 요구가 부분적인 정책 변화로 수렴될 경우 보건의료체계의 이윤추구적 경향은 제어되지 못하고 민중의 부담만 가중될 위험도 있다.
저부담-저보장-저수가 체계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개혁을 가로막는 근본적 원인이 아니다. 저부담-저보장-저수가 체계가 고착될 수밖에 없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이윤추구성이 문제다. 의료제도의 모순은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좌우하는 ‘구조적 본질’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체계가 맞게 된 위기의 ‘현상적 표현’이다. 보험자, 공급자, 소비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보건의료제도란 허상에 불과하다. 보건의료체계에서 자본과 민중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되기 때문이다. 자본은 보건의료체계를 이윤창출의 영역으로 구축하려 하고 민중은 보편적 권리로서 건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체계를 원하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을 예로 들면 자본은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건강보험에는 어떠한 비용부담도 하지 않으려하고 민간의료보험을 통해 이윤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윤추구의 흐름이 제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이명박 정부가 입안하려는 보험업법 개악, 의료채권법, 제주도특별자치도법 등이다.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은 영리법인 도입, 민간보험 활성화와 같은 이윤추구 흐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미 충분히 시장적인 현재 보건의료체계의 모순도 드러낸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는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이 건강을 둘러싼 계급적 대립을 명확히 드러내며 민중의 불만을 조직할 수 있는 중요한 운동이다. 심화되고 있는 건강불형평성에 관한 연구가 보여주듯 건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드러나지 않고 조직되지 않았을 뿐 이미 만연해있다. 경제위기로 인해 가중될 민중의 고통을 폭로하고, 이러한 고통을 전가하는 자본과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만 신자유주의를 저지하고 민중의 단결을 통해 대안 구성해 나갈 운동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보건의료 뿐만이 아닌 주거, 생태, 물, 식량과 같은 건강결정요인 전반에 있어서 불형평성을 야기하고 민중의 건강을 위협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묻는 조사에서 ‘건강하다’, ‘매우건강하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소득 수준 최상위 10%인 사람들의 경우 1998년 52%에서 2005년 56.7%로 증가한 반면, 소득수준 최하위 10%의 경우는 34.7%에서 22.8%로 크게 줄었다. 이것은 객관적인 건강 지표의 불평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위 소득계층에 견줘 하위 소득계층의 사망위험은 2.3배 더 높다. 저소득층일수록 암에 더 많이 걸리고, 치사율도 높다. 그러나 저소득층 대비 고소득층의 의료이용량은 1997년에서 2005년 동안 2배에서 4배로 늘어났다. 반면 저소득층은 같은 의료를 이용해도 입원치료, 3차병원을 통한 치료는 더 적다. 저소득층이 더 많이 아프고 더 적게 치료받고 있지만, 경제위기 속에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노인인구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서 효과적인 사회정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상황이다. 신체적으로 취약한 노인인구의 특성상 보건의료와 사회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 없이 요양비용을 개인, 가족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민중의 고통은 대를 이어가며 가중될 것이고 불형평성은 더욱 고착화될 것이다. 2009년 신종 플루의 유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태파괴와 신종 감염병의 출현도 국경을 넘어 민중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문제
1977년 의료보험제도 도입 이후 의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의료비는 2006년 현재 GDP 대비 6.4%로 OECD 국가 평균인 8.9%에 비해 낮은 편에 속하지만 의료비 증가율은 1992년에서 2003년까지 6.9%로서 2-3%정도인 대부분의 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특히 약제비가 매우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약제비 증가율은 연평균 14.7%로서 OECD 평균의 2.1배에 달한다. 2003년 보건의료비 중 약제비 비중이 28.8%로 OECD 평균인 17.8%보다 높은 수준이다. 김창엽 등에 따르면 현재의 의료비 지출 결정 요인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2020년경부터 노령화와 함께 의료비가 급격히 증가해 2050년경에는 GDP 대비 20-30%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의료비는 증가하고 있지만 보건의료서비스의 질과 안전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불만은 여전하다. 공급자와 소비자 간의 정보 불균형이라는 자본주의 보건의료체계의 보편적 특징에다가 한국의 보건의료제도가 과잉 민간공급구조와 행위별 수가제로 이뤄짐으로써 병원의 영리추구 경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해 빚어진 결과다. 인력이 부족한 응급실, 짧은 외래시간과 같이 환자들은 안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은 고도의 집중과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부족한 인력으로 환자들의 고충을 처리해야하는 현실 속에서 높은 노동강도에 직면하게 된다. 환자들은 이러한 병원 환경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할 것 같다는 불신,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불필요한 시술을 권할지도 모른다는 불신을 가지게 된다. 불만은 더욱 광범위하다. 기본적인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병원 공간이나, 권위적인 진료 속에서 환자들은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불만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재정부담과 공급체계의 문제는 ‘3분 진료’, ‘건강보험 재정 파탄’ 같은 보건의료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리병원 도입과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라는 오래전에 폐기된 대책이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이명박 정부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는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지난 10년 간 진행되어온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완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이는 의료민영화가 지향하는 모델인 미국의 의료제도가 이미 민중 건강의 파탄이라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사회보장 효과를 이미 국민들이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은 총체적 관점에서 의료민영화와 동일선 상에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하면서 보건의료운동진영 내에서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주체를 형성하게 했다. 그러나 심화되는 양극화와 미약한 사회보장제도 속에서 앞에서 지적된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문제에 대한 적합한 대안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자본과 정부의 의료민영화 시도 역시 계속될 것이다. 대안의 모색은 현재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모순과 그것이 형성되어 온 사회적 과정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와 신자유주의적 재편
대중보건의료로서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형성
현대 보건의료의 역사는 인류가 직면한 주요 질병의 역사와 자본주의 축적양식의 역사에 조응한다.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도 20세기 확립된 대중보건의료체계의 한 형태다. 20세기 미국 헤게모니와 법인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질병의 양상도 변하면서 암, 심혈관계 질환과 같은 비감염성, 만성 질병이 주요 질병이 되었다. 20세기 초반 현대의학은 생의학 모형을 확립하면서 치료의학을 발전시켰다. 이에 맞춰 미국에서는 의학교육을 표준화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지식과 교육의 체계화는 의료의 전문직화와 대학을 중심으로 한 병원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간호전문직이 성장하면서 병원이 빈민구호시설이 아닌 진단과 치료의 기능을 수행하는 실질적인 간병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 병원이 급성외래환자 진료에 치중하면서 그 규모가 팽창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늘어나는 의료비를 대공황시기의 중산층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미국에서는 사적보험에 의한 제3자 지불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중산층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까지 병원이용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공황 시기 노동자계급의 보건의료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급진적 노동자운동을 통제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렇게 보험제도를 매개로 병원이용을 대중화하고 병원을 보편적인 의료기관으로 확립하는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되었다.
남한의 대중보건의료 역시 반주변부 국가로서의 특수성과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비슷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의학을 배제하고 서양의학에 기초하여 의학교육과 의료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위생경찰처럼 일제는 식민지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주도 보건의료체계를 만들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미국식 의료제도가 그대로 이식된다. 미국식 전문의제도가 도입되고 치료중심, 민간주도의 보건의료체계가 확립된다. 1950~60년대에는 발전주의 정책 속에서 민중의 건강문제는 과소평가되면서 재정 확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공립 병원 확충이 이뤄지지 않고 의사들은 미국으로 빠져나가거나 대도시에 집중되며 수가도 매우 높아 가난한 민중들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를 시작했다. 이들은 전체인구의 8.6%로서 당시 안정적 소득이 있는 가장 혜택 받은 계층이었다. 이러한 역진적 의료보장제도로서의 출발은 정권이 정치적 정당성의 획득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대중보건의료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후 추가적 확충개혁조치들이 있으면서 1989년에 전 국민이 모두 보험 대상이 되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보험제도가 도입된 1977년 이후 의료수요는 급속히 늘어났지만 정부는 공적 재원을 통해 공적 인프라를 늘리는 대신 민간 중심의 의료 사업을 지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인력 공급 문제에 있어서도 체계적 계획보다는 의과대학을 신설하여 공급량을 늘리는 것에 주력했다.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는 이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의원에서 민간 병원으로 성장의 중심이 바뀌게 되었다. 민간부문 병상수 구성비는 1949년 24.9%에서 1975년 53.7%, 2006년 82.6%로 성장하게 된다. 실질임금의 확대와 의료보험으로 인해 입원 욕구가 유효수요가 되었고 병상 확충을 정부가 지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전국민 건강보험을 통한 공적 의료재정체계가 결합된 한국의 대중보건의료체계가 확립되었다.
대중보건의료의 위기와 신자유주의
대중보건의료의 특징은 계속되는 성장과 비효율성이다. 병원은 계속 확대되고 의료서비스에 대한 요구도 많아지고 의료비도 증가하는데 정작 건강에 대한 만족도는 향상되지 않는 것이다. 비용상승과 건강 증진의 괴리라는 대중보건의료의 위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위기를 반영한다. 20세기 비감염성 질병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생의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대중보건의료의 개인적, 치료적 접근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질병이 의학 외적 요인으로 발생했다고 해서 의료가 유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료는 증상의 완화, 고통의 경감을 도울 수 있고 이를 통해 질병을 발생시킨 사회경제적 원인을 은폐하는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이를 의료의 이중적 기능이라고 한다. 유용한 기능을 통해 통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대중보건의료는 원인을 은폐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더 많은 질병을 발생시키고 증상 완화를 위한 의료 요구를 더욱 증가시킴으로써 모순의 확대를 야기한다.
대중보건의료의 위기는 보건의료가 자본축적의 영역이 될수록 더욱 심화된다. 보건의료가 개입하는 영역이 확대되면서 사회의 의료화 현상이 나타나지만 정작 불건강의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추구를 위한 대증적 치료에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 병원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특히 강하다. 민간 중심의 공급체계와 정부의 책임 방기로 인해 의료인력과 시설의 공급이 불균등해져 농어촌에는 의료시설이 부족한 반면, 대도시에서는 과잉 경쟁이 벌어지는 상황이 나타났다. 시장원리를 기본으로 한 행위별 수가제를 통해서는 이러한 경쟁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수가의 양을 통제하고, 심사를 통해 급여를 보상하면서 병원의 의료행위를 통제하려는 노력은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검증되지 않은 비급여 의료행위의 확대를 가져오고, 이것은 다시 민중의 부담 증가와 건강의 위협을 낳는다.
공급체계에 있어 현저히 낮은 공공병원 비중과 의료전달체계의 미확립, 행위별 수가제와 광범위한 비급여는 지역사회의 평판에 더 신경을 쓰는 외국의 비영리 민간 병원과 달리 한국의 병원으로 하여금 이윤추구에 매달리게 만들었고 재벌기업의 병원산업 진출과 시장점유라는 한국의 특수한 현상을 만들었다. 1989년 현대아산병원이 설립되고 1994년 삼성의료원이 설립되면서 한국의료체계의 구조적 문제는 더 심화된다. 3차 의료기관 간의 병상 수 증가와 고가장비 구입 경쟁이 격화되고, 이 과정에서 3차 기관의 역할이 아닌 경증외래환자들에 대한 고가진료와 서비스 과잉 제공을 통해 수익성을 확보한다. 정부는 이를 규제하기는커녕 1990년 진료권역별 병상수 상한제 폐지와 병상 신증설 절차 완화, 1998년 진료권역 폐지 등 이를 부추기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에 따라 의료비는 증가하게 되었고 의료전달체계는 와해되었으며, 의료 시설의 지역적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재벌기업의 병원산업 진출은 비록 비영리법인이라는 제도적 통제를 받고 있으나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일환으로서 ‘보건의료의 금융화’의 맹아를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말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금융자본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반혁명이 진행되었듯이 대중보건의료의 위기에 대해서도 공적 의료서비스의 비효율성을 그 원인으로 보면서 공적 보건의료영역의 사유화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약자본과 병원자본은 직접투자와 인수합병을 통해 자본을 집적하여 시장지배력을 늘리는 방식으로 이윤축적전략의 금융적 변모를 시도했다. 공급자가 소비지역으로 직접 진출할 수밖에 없는 병원자본의 경우 민족국가의 제도적, 경제적 장벽으로 인해 초민족화가 얼마정도 제한되나 제약자본은 성공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 국제기구를 통해 특허권과 독점권을 보장받아 초국적 제약기업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보험자본의 변화, 성장도 금융화의 또 다른 측면이다. 보건의료의 대중화에 기여했던 보험자본은 이제 보건의료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면서 이를 자본 집중의 계기로 활용한다. 미국의 ‘관리의료’가 대표적 사례다. 보험과 병원이 통합된 형태로 형성된 관리의료조직이 환자가 이용하는 의료서비스를 통제하게 된다. 보험회사는 의료과정 자체에 개입하면서 의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동시에, 양질의 의료에 대한 접근을 제한한다. 이러한 비용절감을 통해 민중의 건강은 과소평가되고 금융자본의 이윤은 극대화된다. 금융자본의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서도 진행 중이다. 삼성생명의 내부전략보고서는 삼성병원을 중심으로 1차, 2차 병원과 협력병원체계를 구축하고 삼성생명, 삼성화재와 계약을 통해 완전히 사적 지배가 가능한 대중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려는 목표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보건의료체계 역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시작한다. 대형 병원의 확대와 함께 제도 역시 재정비된다. 의료보험재정통합과 의약분업이 그 예다. 1988년 농민들의 보험료 납부 거부 투쟁에서 출발한 의료보험통합추진운동은 형식적으로는 직장보험과 지역보험의 재정, 운영통합이라는 제도적 변화를 요구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민중의 보편적 권리로서 건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총체적 사회관계의 변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지역보험의 불안정성과 취약한 보장성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지역보험과 직장보험으로 나뉘어져있던 당시 보험체계에서 지역보험의 재정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고 그로 인해 보장성이 낮았으며 국고의 보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도시노동자를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재정이 여유로운 직장보험이 지역보험과 통합된다면 지역보험 가입자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한편 보험 운영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1988년부터 민중운동의 주요 요구사항이었던 의료보험 통합은 1999년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결정이 되고 각 보험조합은 순차적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통합과정에서 지역보험 가입자 보험료의 50%를 국고로 지원하고, 심사평가제도를 통해 공급체계 통제 기제도 확보하며, 건강보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예방 및 건강증진 사업에도 기금을 활용하기로 하는 등 운동진영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공기업의 효율성, 국고 부담의 감소를 개혁 근거로 내세우며 의료보험통합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용도로 활용하였다. 게다가 여전히 공급체계는 민간 중심적이었으므로 병원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대형화, 고급화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이러한 추세를 재벌 병원들이 주도하면서 의료비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이른바 ‘빅4병원’이 건강보험재정에서 지급 받은 ‘건강보험급여’는 의약분업 다음 해인 2001년 4천 68억 원에서 2006년에는 9천 685억 원으로 5년 만에 2.4배로 늘어났다. 약 10%정도인 연평균 진료비 증가율의 두 배가 넘는다. 43개 종합전문요양기관, 즉 대형 종합병원의 건강보험급여 가운데 4개 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5년 만에 25.3%에서 31.3%로 늘어나 ‘빅4’ 병원으로의 쏠림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화, 고급화를 위한 종합병원의 투자 경쟁은 의료민영화의 핵심적 쟁점 중 하나인 영리법인병원 허용과 의료채권 도입의 동기가 되고 있다.
의약분업을 추진한 근거는 약물 오남용 감소를 통한 국민 건강 증진과 약물 사용 감소를 통한 약제비 절감이었다. 당시에 주로 비판받은 문제는 약제비가 정부고시가상환제로 보상되는 상황에서 고시가보다 저가로 거래를 하면서 획득하게 되는 제약회사의 음성적 약가마진과 이를 분배하기 위해 의사, 약사에게 주는 리베이트였다. 고시가상환제란 정부가 의약품 가격을 정해 놓고, 실제 의료기관이 정해진 가격 이하로 의약품을 구매하더라도 고시된 가격만큼 보상을 해주는 제도다. 정부는 의약분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약제비를 개별실거래가상환제로 바꿨다. 개별실거래가상환제는 개별 의료기관의 실제 구입가격을 취합해 실구매가격만큼만 보상을 해주는 제도다. 이 경우 의료기관이 저가약품을 사용할 동기는 사라지고 의사들이 보다 검증됐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더 비싼 초국적 제약기업의 오리지널 의약품을 처방하게 된다.
의약분업은 결과적으로 약품 남용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초국적 제약기업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실제로 초국적 제약기업들은 연합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인 로비와 압력을 행사하면서 의약품 관련 정책에 개입했다. 의약분업도 그러한 요구 중 하나였다. 그들은 또한 고가 수입의약품의 보험 등재를 요구했고 약가 결정에 있어서 연구개발가치의 인정과 투자비용의 회수가 가능한 가격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면서 선진국 수준과 동일한 약가기준을 요구하는 A-7가격결정제를 도입시켜 폭리에 가까운 약가를 관철시켰다. 한편 비공식적 수입인 리베이트가 줄어든 만큼 의약계의 수입보전을 위해 수가가 인상되었다. 이러한 의약분업의 결과는 초국적 제약기업의 비약적 성장과 건강보험 재정의 악화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추가적 재정분담은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져 그 부담을 민중에 전가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병원자본과 제약자본의 성장이 낭비적인 의료공급체계를 통해 건강보험재정을 위협한다면 민간보험자본의 성장은 건강보험을 통한 보건의료체계의 공적 통제기능 자체를 침식한다. 한국의 민간의료보험자본은 1996년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5년 동안 재원이 4배 가까이 성장했다. 2006년에는 실손형 의료보험 상품이 허용되었다. 실손형 의료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해주지 않는 본인부담금에 대해 보상해주는 보험이다. 실손형 의료보험 상품 가입자가 증가하게 될수록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의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는데 이는 결국 민간 보험에 가입하기 힘든 저소득층의 보장성을 약화시켜 건강양극화를 심화시키게 된다. 또한 실손형 의료보험 상품은 정액보상방식과 달리 환자에게 의료서비스가 얼마나 제공되는지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실손형 의료보험은 개인의 질병정보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고 병원의 의료행위에 개입하는 등 의료공급체계의 왜곡을 심화시키고 있다.
보건의료운동의 과제
개혁의 성격과 운동진영의 대응방안에 대해 많은 논쟁을 야기한 의료보험통합과 의약분업과정은 한국 의료체계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맞서기 위한 보건의료운동의 방향이 어떠해야하는지 보여준다. 개혁에 참여했던 보건의료운동진영은 의료재정체계의 확대를 통해 의료 서비스 이용의 형평성을 확대하고, 의료공급체계에 대한 공적 통제를 확대하여 적은 비용으로 국민의 건강을 확보하는 거시적 효율성도 달성하려 했으나 이것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보건의료운동이 착목하고 대응하지 못한 두 가지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민족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의료공급체계를 왜곡하는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이고 둘째는 노동 불안정화, 규제 완화, 빈곤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건강 자체의 확대다. 결국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개혁 정권 기간 동안 민중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획기적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운동은 새로운 대안을 통해 의료민영화 논쟁의 국면을 바꾸고자 시도하고 있다. 제안 내용은 한국 의료체계의 개혁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저부담-저보장-저수가 체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험료 인상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 과정에서 민중이 헤게모니를 확보해 민간보험 가입 동기를 제어할 만큼 높은 수준의 보장성과 포괄수가제, 지역별 병상 총량제, 주치의 제도 등 공급체계의 개혁을 쟁취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정책의 시장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이러한 요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이고 국민의 보편적 건강을 위해 재정을 확충할 의지가 없는 정부의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시킬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지출비중은 2006년 55.7%로서 OECD평균인 73%에 미달하고 있다. 따라서 공공지출비중의 확대에 있어 개별 보험자가 아닌 국가와 자본의 책임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공적재원으로서 건강보험의 양적 확대는 분명 의료공급체계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의료공급체계의 구조변화와 동반되지 않을 경우 매우 한계적일 수 있다. 지금의 의료공급체계에서는 공적재원이 오히려 대형병원과 민간보험, 그리고 초국적 제약기업의 이윤을 늘려주는 데 집중되기 때문이다. 현재 병원들이 이윤 추구에 몰두하고 민간보험이 활성화되며 초국적 제약기업이 특허권으로 독점을 유지하며 폭리를 취하는 상태에서는 건강보험에 투입한 공적재원이 자본을 키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공적재원의 지원을 받으며 몸집을 불린 병원, 보험, 제약 자본들은 계속 어떻게든 노동자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건강보험과 보건의료의 공공적 성격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앞서 밝힌 의료보험통합운동이 대응하지 못했던 맹점들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결국 현실적으로 병원자본의 이윤추구를 억제하지 않고 민간의료보험 시장을 위축시키지 않는 선에서 이러한 요구가 부분적인 정책 변화로 수렴될 경우 보건의료체계의 이윤추구적 경향은 제어되지 못하고 민중의 부담만 가중될 위험도 있다.
저부담-저보장-저수가 체계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개혁을 가로막는 근본적 원인이 아니다. 저부담-저보장-저수가 체계가 고착될 수밖에 없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이윤추구성이 문제다. 의료제도의 모순은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좌우하는 ‘구조적 본질’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체계가 맞게 된 위기의 ‘현상적 표현’이다. 보험자, 공급자, 소비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보건의료제도란 허상에 불과하다. 보건의료체계에서 자본과 민중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되기 때문이다. 자본은 보건의료체계를 이윤창출의 영역으로 구축하려 하고 민중은 보편적 권리로서 건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체계를 원하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을 예로 들면 자본은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건강보험에는 어떠한 비용부담도 하지 않으려하고 민간의료보험을 통해 이윤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윤추구의 흐름이 제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이명박 정부가 입안하려는 보험업법 개악, 의료채권법, 제주도특별자치도법 등이다.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은 영리법인 도입, 민간보험 활성화와 같은 이윤추구 흐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미 충분히 시장적인 현재 보건의료체계의 모순도 드러낸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는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이 건강을 둘러싼 계급적 대립을 명확히 드러내며 민중의 불만을 조직할 수 있는 중요한 운동이다. 심화되고 있는 건강불형평성에 관한 연구가 보여주듯 건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드러나지 않고 조직되지 않았을 뿐 이미 만연해있다. 경제위기로 인해 가중될 민중의 고통을 폭로하고, 이러한 고통을 전가하는 자본과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만 신자유주의를 저지하고 민중의 단결을 통해 대안 구성해 나갈 운동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