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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0.1-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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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이인화 | 공공노조 사회연대연금지부 교육국장
고등학교 시절 늦은 밤이면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를 들었던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 또한 밤의 디스크 쇼의 애청자였는데 그중에서도 사이먼&가펑클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이 나온 후 굵직한 목소리의 ‘당신이 지치고 괴로움에 빠졌을 때’로 시작하는 노래와 시낭송은 녹음해놓고 들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년도 더 지난 지금 이 노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노동조합 활동을 제대로 해보자고 결심한 이후로 누군가가 내게 ‘너는 무었을 목표로 운동을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때마다 ‘언제 나 자신이 변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치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을 내 다음의 누군가에게 이어주는 다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답을 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 노래가 나름의 저항을 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조금 힘들다고 느껴질 땐 한 번씩 들으며 ‘그래 다리만 되면 되는데 뭐가 힘들어! 아무것도 아니야!’ 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돌이켜보면 나와 운동은 너무 늦게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87학번이면 누구나가 최루탄 매운 분말을 뒤집어 썼을 것이고 다들 학생운동의 언저리라도 가봤을 터인데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1987년 6월 열심히 최루탄을 맞으며 대구의 아스팔트를 걸었지만 누구의 권유도 없이 그렇다고 무슨 생각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당연히 가야하나보다 하고 가투를 나갔었다. 그리고는 6.29 선언이 있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서클(당시엔 동아리라는 말이 없었음)동기들과 엠티를 갔다. 1988년 5월 학교 축제 때 광주의 사진과 영상기록을 보며 치를 떨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그렇게 아주 평범한 일생을 살다가 고민 없이 생을 마치는 게 내 운명이었다.

노동조합과의 만남

1999년에 들어간 국민연금공단에 노동조합이 있었다. 당시엔 노동조합이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한국노총이 있는지는 아예 모르고 있었고 TV에 나오던 민주노총이라는 곳이 노동조합인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한두 달 지나고 나니 다들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곤 내게도 종이 한 장을 주며 가입원서를 쓰라고 했다. 내게 노동조합가입원서를 쓰라고 권했던 기억나지 않는 어느 선배한테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가입원서를 후다닥 써서 준 기억만 남아있다. 그렇게 1999년은 노동조합에 가입해 놓고도 가입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가 버리고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2000년이 되었다.
누군가가 분회장을 하겠다고 자임을 하고 다들 나보고 사무장을 하라고 했다. 역시나 뭐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한다고 했다. 2000년의 사무장 활동을 생각해보면 분회회의를 한번인가 했던 것 같고 수련회를 준비한 것이 활동의 다였으며, 그해 임단협때 하루 농성파업을 준비하고 분회원들을 챙겼던 기억이 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농성파업때 내가 몸담고 있는 조합이 한국노총 소속이라는 것도 알고 연금노동조합의 역사가 10년이 넘는다는 것도 알았다.
2000년 10월 서울에서 인천으로 왔는데 처음 생기는 지사라서 분회조직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환영식후 삼삼오오 술자리에서 노동조합 얘기가 나오고 누군가가 분회간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왔다. 거기서 나는 ‘간부를 해야 할 나이와 순서가 되면 누구나 당연히 한 번씩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 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게 화근 이었다. 총회를 하고 나는 또다시 사무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2001년 새로이 분회장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내가 후보로 추천되고 있었고 ‘사무장을 1년 더해서 경험을 쌓은 후 분회장을 하겠다’ 는 나의 유세는 날아가 버리고 분회장이 되어 있었다. 분회장이 되고나서 내가 했던 말은 ‘조합원들이 원하는 곳에 항상 있겠다’ 라는 말로 당선 소감을 대신했는데 지금까지도 이때 했던 결심은 유효한 것 같다. 2001년 분회장을 하며 결심한 것은 나도 모르고 분회원들도 모르니 노동일보를 스크랩해서 분회원들 한테 알려주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다보면 조합 활동에 관심도 가지고 단결력도 강해질 것만 같았다. 1년 중 두 번인가 세 번을 빼고 매일아침 일곱 시 사십분쯤 출근해 노동일보를 읽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를 요약해서 분회원들에게 사내메일로 뿌렸다. 그렇게 2001년 분회장을 하며 풍물패 활동을 하고 2003년 2004년은 평조합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다시 2004년 분회장을 하고 2005년엔 분회장을 다른 동지한테 넘겼다.
이때까지의 나의 생각은 ‘사무실 일도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도 열심히’였다. 일 잘한다는 인정을 받아 승진도 하고 조합 활동은 분회장을 두 번 했으니 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이었다.

조합활동으로…

2005년 분회장을 이어받은 동지가 2개월 만에 덜커덕 해고가 되었다. 그것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우리분회장 혼자 해고가 된 것이었다. 분회장이 해고된 분회를 누군가는 중심을 잡아야 했고 직전 분회장이었던 내게 그 역할이 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해고된 분회장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분회는 분회장이란 호칭대신 ‘분회장 직무대행’을 쓰기로 하고 분회장 직을 다시 수행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다. 나 자신부터 달라져 있었고 분회원들도 달라져 있었다. 전국의 많은 분회 중에서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게 선봉! 투쟁! 분회가 되어있었고 상황이 질문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가진 질문들을 풀지 못했고 분회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질문들을 풀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욕구가 강해졌다.
여름이 지날 즈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냥 평범하게 살 것인가? 제대로 조합 활동을 해 볼 것인가?’ 선택의 고민을 했다. 답은 ‘그래! 나 하고 싶은 대로 살자’였다. 그렇게 나의 활동은 시작되고 있었다.
2006년이 되며 나의목표는 ‘일단 알고보자’였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지회 교육국장을 자임하고 노동조합 교육을 들을 수 있는 곳이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쫓아 다녔다. 휴가를 내고 다른 조합의 조합원 교육시간에 들어가기도 하고 같은 사람의 같은 강의를 세 번 듣기도 했다. 그렇게 한 1년만 더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지회와 분회에서 사업으로 펼쳐보면 뭔가 답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분회장이 아닌 준비된 분회장 들을 만들어서 그들이 분회장직을 쉽게 훌륭하게 해나가게 하고 싶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되어

2007년 공공노조가 출범하고 지역본부를 꾸려야 하는데 임원후보를 결의하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역시나 이때도 조직이 원하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거에 출마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신생 산별노조 지역본부, 그것도 비전임에 다른 조직의 상황도 전혀 모른 채 지역본부 임원선거에 나선 것이 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때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지역에서 지역본부를 출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뜸 출마를 했고 애초 약속이었던 1년짜리 임기를 연장에 연장을 해서 3년을 꼬박 채웠다. 겁 없는 시작이어 힘도 들고 내가 감당할 자리가 아니라는 판단에 그만두고도 싶었지만 내개는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산별노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역운동을 알게 되었고 힘들었던 시간들은 그 때마다 나를 한 단계씩 올라가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지역본부가 출범한 2007년은 공공부분의 노동자들이 적어도 인천지역에서는 하나 되고자 하는 분위기가 강했었다. 그 힘으로 지역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모이는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했으며, 당시 핵심 투쟁이었던 이랜드 투쟁에 공공노조가 모범적으로 연대할 수 있었다.
2007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한 해인데 단위조직에서의 활동을 넘어 산별노조의 활동과 지역운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과 사회진보연대를 만났다는 것이다. 산별노조 운동과 지역운동은 현재의 숙제를 풀고 미래를 개척해야하는 구체적인 활동의 공간이고 사회진보연대는 내 생각의 틀을 정리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게 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회진보연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07년 초 무렵이다. 당시 투쟁사업장이던 콜트나 대우차 판매지회 집회 때 보았었고 뚜렷이 기억나는 건 2007년 6월 인천 구월동 뉴코아 앞이었는데 사회진보연대 동지들이 이랜드 집회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누군가가 준비를 하고 있구나 하고 지나갔지만 계속되는 이랜드 투쟁에 항상 선두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회진보연대를 보며 어떤 조직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 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뒤풀이에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알게 되었다.
2008년 초 진행한 사회운동학교는 학습에의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었고 금융세계화로 시작된 토론은 국민연금 기금과 제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하였다. 특히, 연금기금이 금융세계화의 첨병이라는 것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부터 주장하였고 그 자료들을 접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 토론과 자료들 덕택으로 올해 초 우리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 강의교안을 쓸 수 있었다.
2009년 12월 내가 속한 공공노조 사회연대연금지부(국민연금공단)는 임단협이 결렬된 상태이다. 예년엔 노동조합이 요구하고 사측이 답하는 구조였으나 올해는 처음부터 사측이 임단협 개악안(전임자 축소, 연봉제 도입, 고용보장 조항 삭제, 사용자부서 조합원 배제, 성과급 차등지급 확대)을 제시하고 노동조합은 방어하는 싸움이 진행 중이다. 사회분위기가 노동조합에 우호적이지 않고 특히 정부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상황이라 노동조합이 대폭 양보하는 안을 제시 하였으나 사측은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위해 이마저도 거부하고 노동조합의 백기투항을 요구하고 있다.
올해의 임단협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내년 상반기에는 국민연금 기금을 투기자본화 하는 연금기금 지배구조 개편법안을 저지해야하는 투쟁을 해야 하고, 6-7월경엔 4대보험 징수통합에 따른 전출자선정, 전출조건에 대한 싸움과 전출후 남은 인력에 대한 고용보장 투쟁이 놓여있다. 각각 하나의 투쟁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세 가지의 싸움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놓여 있지만 지부는 충실히 준비해서 슬기롭게 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교육국장으로서 각각의 싸움의 의미를 잘 전달해서 조합원들이 힘 있게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을 안고 있다.
연금, 인천, 공공노조, 이 세단어가 2010년 나의 계획을 결정하는 핵심이다.
연금. 기본적 조합 활동을 하는 곳이며 내가 속한 조직이 좀 더 민주적이며 활동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내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고, 더하여 욕심을 낸다면 활동을 하겠다는 동지를 만나도록 노력해야겠다.
인천. 내 활동의 토대이며 미래 활동의 근거지이기에 이제껏 만났던 동지들을 좀 더 깊게 만나고 좀 더 많은 동지들을 만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겠다.
공공노조. 공공노조 인천본부 3년의 경험이 유실되지 않게 잘 전달하고 공공노조가 발전하는 길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이어주는 다리가 되겠다는 나의 바램을 이루기 위해 나를 이어줄 동지들을 많이 만나야겠지만, 되짚어 보면 나를 만들기 위해 항상 좋은 동지들이 애를 썼었고 쓰고 있다. 2000년 인천에서 사무장을 할 때 시작을 이끌어준 동지, 2001년부터 지금까지 풍물패를 같이했던 동지들, 2005년 해고돼서 나를 다시 활동하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동지, 2006년 배우겠다는 의지만 있을 때 이곳저곳에서 도와준 사람들, 지역본부를 같이하며 싸우기도 하고 토론도하며 사업을 같이했던 동지들, 그리고 생각의 준거를 제공하고 활동을 이끌어준 소중한 동지들. 이 자리를 빌려 고맙고 감사함을 표한다. 그리고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고맙고 감사한 동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주제어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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