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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0.1-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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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팍 전쟁, 파키스탄의 딜레마 ㆍ오바마의 딜레마

이유미 | 반전팀
아프팍 전략의 핵심인 파키스탄

9ㆍ11테러를 빌미삼아 시작된 9년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파키스탄으로 확대되었다. 2009년 3월 오바마가 ‘아프팍(Afpak=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합성어)’전략을 발표하게 된 이유도 전선이 파키스탄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궤멸직전까지 갔던 탈레반은 파키스탄 국경지역을 거점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지금도 국경지역을 근거지 삼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넘나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처럼 아프간에서 미군과 점령군에 맞서는 탈레반을 지원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세력이 파키스탄 국경지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의 도움 없이 탈레반을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 지원금을 쏟아 부으며 탈레반 격퇴에 앞장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파키스탄의 상황은 미국의 바람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테러전쟁에 동조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국민들의 외면으로 통치권이 약화되고 있고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세력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인 파키스탄이 이슬람 무장 세력에게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할 지경이다. 파키스탄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미국이 조치를 취하면 취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불안정한 상황은 아프팍 전쟁이 오바마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

이슬람 전사를 양성한 파키스탄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파키스탄은 독립했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과 언어를 가진 국가로서 통합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요소가 이슬람일 정도로 공통의 기반이 취약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정치도 불안정했는데 건국 이후 네 번의 군사독재 정권이 등장해서 총 30년이 넘게 집권할 정도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은 파키스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미국의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미국은 1980년대 아프간에 진주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군사정권을 옹호했고, 현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정권인 무샤라프를 지지했다. 이러한 역사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의가 안착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어 정치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군사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슬람에 호소하는 전략을 썼다. 대표적으로 지아 울 하크 장군은 1977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지한 후, 기존의 법제도를 이슬람 법전에 부합되도록 개조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화 정책은 자연스럽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정치적 영향력 또한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파키스탄의 핵심적인 불안요소로 국경분쟁을 들 수 있다. 탈레반의 거점지역으로서 파키스탄 북서 국경지역도 그 중 하나다. 이 지역은 탈레반과 같은 부족인 파슈툰족 거주 지역이다. 파슈툰족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나눠져 살고 있는데, 영국이 19세기에 아프간을 식민지배할 목적으로 국경인 ‘듀란드 라인’을 설정해 강제 분할했기 때문이다. 결국 파슈툰족이 살고 있는 북서변경주와 연방부족자치지역이 파키스탄에 편입되기는 했으나 일종의 자치구로서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파키스탄의 외교정책 1순위는 파슈툰 영토문제를 쟁점으로 삼지 않는 세력을 지원하는 것이 되었다. 물론 파키스탄 대외정책의 핵심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은 아프가니스탄과의 서부접경지역이 아니라, 인도와의 동부접경지역이다.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인도와 적대 관계가 심화될 때, 파키스탄 정부는 서부 국경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권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실제로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뿌리 깊은 갈등은 여러 차례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독립하던 시기, 카슈미르 지역 귀속문제가 대두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주민의 77%가 이슬람으로 대다수를 차지했는데, 지배계층은 소수의 힌두교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힌두교인들이 인도로 편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대다수의 이슬람 주민들은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파키스탄과 인도가 개입하면서 제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그 이후로도 정전 경계선 주변에서 교전이 끊이지 않다가 1964년 전면전으로 번져 2차 인-파 전쟁이 발생했으며, 1971년 동파키스탄의 분리(현재 방글라데시)로 인해 3차 인-파 전쟁(벵골전쟁)이 발생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1988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세력인 잠무카슈미르 해방전선이 결성된 이후로, 통제선 주변의 교전이 아니라 테러와 게릴라전의 형태로 변화했다. 이들 무장세력의 활동은 파키스탄과 인도를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몰아가기도 했다. 그 예로 2001년 인도 국회의사당 테러를 들 수 있다. 인도는 테러의 배후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는 라슈카르에타이바라는 의혹을 제기했고 양 국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국경지대에 100만의 군대가 배치되었으며 핵무기를 국경선으로 이동시키는 등 극한 대치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내외적으로 불안요소가 산재해있던 파키스탄의 상황은 군부독재가 자리 잡기 좋은 토양이 되었으며, 군사정권은 국민을 호도하고 외교정책의 목적을 추진하기위해 이슬람 전사들의 지하드(성전)을 활용하였다. 1979년 미국과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 소련이 개입하자 이에 저항할 이슬람 무장 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이슬람 블록을 형성함으로써 인도를 견제하는 전략적 힘을 창출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집권하는 세력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기를 바랐고,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원조금과 무기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하였고 표면적으로는 파키스탄 정보부가 이를 지원하는 것으로 포장되었다.
탈레반(파슈툰어로 학생이란 뜻) 역시 난민지역에 있던 마드라사(이슬람 교육기관)를 다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무장조직이었다. 그러나 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자, 소련군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한 전사를 훈련하던 곳은 카슈미르 지역에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한 무장세력 양성장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처럼 공공연하고 긴밀했던 파키스탄 정보부와 이슬람 무장세력과의 관계가 9?11테러 이후 달라진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탈레반과 이슬람 무장 세력을 키워낸 대부라고 할 수 있는 파키스탄 군부가 이제는 이들을 제거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무장 세력은 이미 통제권을 벗어난 상태다. 바로 이 점이 파키스탄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손아귀를 벗어난 이슬람 전사들

파키스탄에는 미군의 추격을 피해 국경지역으로 숨어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07년 북서변경주와 연방부족자치지역에 산개해 있던 13개의 무장 단체들을 규합해 탄생한 파키스탄 탈레반이 있다. 이들이 결성된 계기는 파키스탄 군대가 알카에다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 밀집지역에서 대규모 소탕작전을 펼친 것에서 비롯됐다. 주민들은 아프간 탈레반을 지지하고 있었고 자치지역이나 다름없는 곳에 외세라고 여겨지는 파키스탄 군대가 쳐들어오자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파키스탄 군대는 패배하고 철수했으며 파키스탄 탈레반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파키스탄 탈레반은 신생조직임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2007년 베르나지르 부토 전 총리를 암살한 배후로 파키스탄 탈레반의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가 지목되면서 파키스탄 정부는 그를 공적으로 규정하고 사살명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스와트 일대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지속하면서 2008년에는 스와트 전역의 대부분이 탈레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는 올해 2월 평화협정을 맺었다. 탈레반은 무기를 내리고 파키스탄 정부는 스와트를 비롯한 북서부변경주 일부 지역에서 샤리아(이슬람 율법) 통치를 용인한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미국은 파키스탄이 세계 안보에 치명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비난하며 파키스탄이 보유한 핵무기 안전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파키스탄의 평화협정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탈레반도 무장해제 약속을 무시했고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100km 떨어진 디르와 부네르까지 세를 넓혔다. 결국 4월 26일 파키스탄군은 스와트 계곡에서 탈레반 소탕작전을 재개했다. 파키스탄군은 일부 지역을 탈환했고, 지난 8월 미군의 미사일 요격으로 바이툴라 메수드가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하키물라 메수드는 파키스탄 군 사령부에 잠입하여 20여 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는 등 전 지휘관에 죽음에 대한 보복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와 파키스탄 탈레반이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탈레반은 펀자브 지역까지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탈레반지지 세력과 파키스탄 이슬람 무장 단체들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강화된 계기는 2007년 탈레반의 온상인 랄마스지드(붉은 사원)를 유혈진압한 사건이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랄 마스지드 사원에 대한 공격은 ‘탈레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이슬람 사원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졌고 이슬람 무장 세력들의 결집을 가져왔다. 펀자브지역 무장단체들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카슈미르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지원이 중단되면서 탈레반 활동무대로 점차 이동했다. 내륙지방으로 영향력을 뻗어오는 탈레반은 은신처, 훈련소 등을 지원하고 펀자브 지역 무장단체들은 테러 목표와 병참을 제공하면서 공조하고 있다. 이들은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는데 2009년 3월 펀자브 주도인 라호르에서 발생한 파키스탄 크리켓 국가대표팀에 대한 테러와 2008년 9월 50여 명이 사망한 수도 이슬라마바드 매리어트 호텔 폭탄테러가 대표적이다. 크리켓 대표팀 테러 배후로 2001년 인도 뭄바이 테러 배후로 지목되었던 라슈카 에 타비아가 다시 지목되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딜레마는 오바마의 딜레마

끊이지 않는 테러와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이슬람 무장단체의 영향력은 이들이 더 이상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대테러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파키스탄 정부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키스탄 국민들도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무인폭격기로 인한 오폭 사고와 대규모로 발생한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으로 인해 반정부 정서와 반미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파키스탄 정부가 딜레마에 처해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요구대로 탈레반을 강력하게 진압하면 테러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이슬람 세력의 지지를 상실해 파키스탄 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워 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동맹이자 막대한 지원금을 대고 있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샤라프 전 대통령은 위태로운 줄타기를 했다. 국내에서 암약하는 탈레반 세력을 적당히 눈 감아주며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다. 파키스탄 탈레반과 평화 조약을 맺기도 하고 무장 세력의 움직임이나 지도부의 은신처를 알면서도 방치하기도 했다. 사실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 내에는 여전히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무장 단체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있기도 하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불만을 가지고 압력을 행사했다. 줄타기를 하던 무샤라프는 헌법을 초월해 집권을 연장하려다 지지율이 하락했고, 이슬람 세력은 무샤르프에게 등을 돌렸다. 무샤라프는 붉은 사원 유혈진압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 토벌에 나섰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국내 여론만 악화되어 결국 물러나게 됐다. 무샤라프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자르다리도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가 탈레반 세력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이슬람 세력의 반발 때문만은 아니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인도와의 국경분쟁은 여전히 최대 현안이다. 군사력을 카슈미르 지역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에 병력을 대거 이동시키기 어려울뿐더러, 파키스탄 군부는 인도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할 이슬람 무장 단체의 역할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군부는 인도가 발루치스탄(파키스탄의 한 주)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며 파키스탄 정부를 위협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파키스탄의 전적인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바마가 12월에 3만 명을 아프간에 증파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에도 파키스탄 외교부는 “미군의 아프간 3만 명 증파가 파키스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탈레반이 대거 파키스탄으로 유입되어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도 이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미심쩍은 파키스탄 정부를 교체한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며, 미국의 제스처는 오히려 파키스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오바마는 아프팍의 수렁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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