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정치세력화와 연대운동 진단
민주노총 제2의 정치세력화, 정당 간 통합을 넘어 사회운동정당으로 나아가자
2009년 정세는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두 전직 대통령의 사망, 쌍용차 공권력투입,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세종시 사업 수정 등 집권세력에게 악재로 작용할 수 있는 각종 현안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정권의 의도가 관철된 형세로 볼 수 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전통적인 보수세력 결집에 우선순위를 두고 강경한 대북정책과 사회운동 및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주요 이슈로 활용한 결과 이명박 정부는 30% 수준의 안정적 지지선을 확보했다. 더욱이 올 하반기부터 경기 회복이 가시화되면서 한층 자신감을 얻은 정권이 친서민 중도실용 행보를 전면화하면서 그 지지율은 40%를 상회하고 있다. 최근 정권이 큰 저항 없이 철도파업,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을 가하고 노조법 개악이나 4대강 예산심의를 밀어붙이는 것은 자신감을 상당히 회복한 징후로 볼 수 있다.
반면 민중운동은 용산 투쟁이나 쌍용차 파업 등의 계기에서 끈질긴 투쟁을 이어왔지만, 대개는 압도적인 힘의 열세 속에 정권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해야 했다. 정권은 2010년에도 각종 법 제도 개악을 통해 노동신축화를 강화하고 노동조합 활동의 근간을 뒤흔드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민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던 민주노동당이 대선 이후 분열하면서 그 정치적 입지가 대폭 축소된 것도 중요한 패인이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각각 5석과 1석의 의석에 5%와 3%를 밑도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향후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진보정당의 암울한 미래를 점치는 전망이 곳곳에서 제출되고 있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공식적 결의와 지원에 바탕을 둔 노동자 대중정당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에 있다. 분당을 계기로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가 개시되면서 배타적 지지 방침으로 근간으로 하는 정치세력화 운동의 하나의 순환이 극적으로 마감된 것이다. 진보정당운동을 둘러싼 세력구도가 고착화되면서 민주노총의 통합력은 크게 저하하고 있으며, 현장 조합원들의 무기력과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힘 관계의 역전을 위해 진보대연합이나 민주대연합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진보정당들 간의 통합을 촉구하거나 민주당이나 시민단체와의 연대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6기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간 민주노총이 추진해온 정치세력화와 민중연대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2009년 민주노총이 진행한 정치사업, 연대사업에 대한 평가를 통해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한 뒤, 이와 결부된 진보정당들의 민주대연합 또는 진보대연합 노선을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민주노총 1기 정치세력화를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론적으로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적 토대의 혁신과 개조를 통해 역으로 정당운동과 민중연대전선을 통합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9년 민주노총 정치사업 경과
민주노총은 “제 진보세력의 대단결을 요구하고 있는 정세적 측면과, 당분열 이후 조합원들 속에 확산되고 있는 정치세력화운동에 대한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불식하고 노동자민중의 집권운동에 대한 진일보한 전망을 세워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민주노총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 하에 지난 1월 열린 정기대의원대회 2009년 정치 사업계획으로 진보정당 세력의 통합추진 건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3월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민주노총 추진위원회’(통추위) 구성 건을 확정하고, ①제 진보정당 방문 및 간담회 개최 ②단결과 통합을 위한 추진 논의 기구(TFT) 구성 ③토론회 개최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민주노총 내부적으로도 ①단위노조 간부 여론조사, ②진보정당 통합촉구 선언문 채택(9월 임시대의원대회 만장일치 결정), ③진보정당 통합촉구 조합원 10만 선언 서명운동 ④지역본부 순회 토론회 등의 일정을 밟고 있다.
민주노총 통추위는 5월에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내부 의견을 조율한 뒤, 7월과 8월에 각각 현장조직과 진보4당 및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러한 의견 수렴 절차와 병행하여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사노준)과 진보4당 TFT를 구성하여 협의를 진행해왔다.
그런데 민주노총-진보4당 TFT는 시작부터 난항을 겪으며 당초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잠정 실패하고 말았다. 우선 ‘진보정당의 단결과 통합이 필요하다’는 기본 취지에 대해 정당들 간의 이견이 표출되었다. 진보신당, 사회당, 사노준은 TFT의 명칭에서 ‘단결과 통합’이라는 표현을 ‘연대와 혁신’으로 수정할 것을 제기했다. 또 이들 3당은 “정파나 정치세력의 분립 자체가 노동현장을 갈라놓는다는 해석은 정치적 차이에도 민주노조 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진보정치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원칙한 대동단결주의”라며 민주노총 통합촉구 선언문 채택에 대한 유감 성명서를 발표했다.
문제제기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민주노총이 기존 배타적 지지 방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당간 통합을 촉구하는 것이 모순이라며 민주노총 세액공제 방침에 대한 유감을 전달하고 진보신당에 대한 세액공제 방침을 협조 요청하였다. 사노준은 “민주노총의 진보정당통합운동은 (…) 진보정당 주체와의 실질적 논의가 생략된 채 나온 ‘폭력’이자 ‘월권’행위이며, 민주노총의 결정은 TFT에 참여한 각 정당과 민주노총 간의 실질적 연대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TFT에서 탈퇴하였다.
민주노총은 11월 초 TFT를 확장하여 ‘제진보진영 간담회 및 논의기구 구성을 위한 사전모임’을 진행하고 이 틀을 통해 공동의 정치선언문 발표를 추진하였다. 여기서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통합선언(약속)→2010년 지방선거에서 제 진보진영의 공동 대응→큰 틀의 진보정당 건설의 로드맵 제시→2012년 총선 대선 필승전략 수립’ 경로를 설정했다. 그러나 정치선언문 성안 과정에서 또다시 조직간 이견이 표출되어, 선언문 작성은 유예되고 대신 2010년 초 ‘대토론회’를 추진하기로 한 상태다.
진보정치세력 통합을 둘러싸고 표류하는 논란 1: 진보대연합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는가? 일단 2009년 민주노총의 정치사업이 진보정당이 분화하게 된 근본적 이유에 대한 폭넓은 진단 없이 주어진 선거일정에 긴박당해 성급히 정당 간 조직통합을 촉구한 것이 문제였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 민주노동당의 경우, 민주노총의 ‘단결과 통합’ 제의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하면서 지방선거에 즈음하여 ‘선 통합선언 후 선거연합’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당의 진로와 관련하여 당 정체성 강화론과 진보정치세력 통합론이 경합하고, 연대연합과 관련하여 반MB연합론과 진보대연합론이 경합하는 양상을 띠어왔다. 이러한 내부 논란을 일소하는 취지에서 민주노동당은 최근 확대간부회의를 개최하여, 당의 정체성 강화를 제일의 과제로 설정하는 한편 ‘반MB 전선의 주도성을 확보하면서 진보대연합을 강화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한 상태다.
여기서 ‘당 정체성 강화’론은 민주노동당 주류파, 그중에서도 분당 사태를 진보신당의 분열주의로 평가하는 강경한 세력의 인식이 투영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용대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은 최근 당 기관지 <진보정치> 기고를 통해, “당을 모욕하고 파괴한 분열주의자들에게 아무런 절차 과정의 매개 없이 당선 가능성과도 무관한 ‘진보대연합’ 명분 때문에 면죄부를 주고 지지까지 해야 하는가”라며 “허구적 ‘진보대연합’에 매달리는 것에 우려한다”고 강하게 통합론을 비판했다. 이러한 기류는 지난 4월 울산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이후 여론조사에서 패배한 민주노동당의 대변인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한 사례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의식한 듯 진보신당의 경우 ‘민주노총의 통합 제의의 진정성은 이해하지만, 지방선거 전 통합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분당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지방선거 전에 무리하게 조직통합을 추진하는 것은 실질적인 연대마저 가로막을 공산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진보신당은 ‘선 통합선언 후 선거연합’의 논리가 자칫 선거연합을 회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즉 민주노동당 내에서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이 오히려 민주노총의 통합 요구에 편승하여 진보신당을 통합에 반대하는 분열세력으로 낙인찍은 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 방침을 추수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진보신당은 지난 4월 재보선 당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후보가 단독 출마한 인천과 전주에서 양당이 교차로 지지선언하자는 일각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전북본부가 배타적 지지방침을 근거로 진보신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불허함으로써 연대의 계기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도 불신의 근거로 들고 있다.
진보정치세력 통합을 둘러싸고 표류하는 논란 2: 민주대연합
앞으로도 한동안 논란은 지속되겠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민주노동당은 진보대연합은 기본적으로 추진하되 민주대연합도 민주노동당의 명분과 실리가 보장되는 선에서 병행 추진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신당의 경우에도,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연합과는 구별되는 사회 경제적 민주화연합(민들레연대)을 중심으로 선거연합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한다고 하지만, “‘반MB 대안 연대’를 기준으로 선거연대를 추진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둔 상황이다. 여기에는 개혁세력 내지는 범진보개혁세력의 통합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진영의 ‘반MB 선거연합’ 흐름이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반MB 선거연합’을 주창하는 여러 흐름이 형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전 집권세력과 시민사회단체 상층부, 일부 민중운동 출신 명망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제일 먼저 창립된 <민주통합시민행동>의 경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재야 출신 인사들과 현재 민주당, 국민참여당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민주세력이 대동단결하자는 민주대연합을 제안하고 있다. 뒤이어 창립된 <시민주권모임> 역시 이해찬 전총리를 대표로, 참여정부 인사와 현재 민주당 인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개혁세력의 승리를 위해 <승리 2010, 시민의 힘>이라는 정당-시민사회 연대기구를 제안한 상황이다.
이상과는 다른 맥락에서 박원순 변호사와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박순성 동국대 교수, 백승헌 민변 회장 등 시민사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희망과 대안>의 경우, 지방선거를 앞두고 좋은 정치세력 형성에 기여하고 정치권과 시민사회, 시민사회 내부소통, 정책 생산 등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창립 취지를 밝혔다. 끝으로 지방선거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연대를 모색하는 노동·시민사회 진영의 연대체인 <2010연대(준)>가 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 간부 출신 인사들도 상당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일부 진보 학계에서도 이런 흐름에 관여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반MB’라는 국민적 정치전선과 ‘반신자유주의’라는 민중적 정치전선의 이중적 존재와 상호 긴장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국민정치적 공간에 반신자유주의적 세력이 어떻게 헤게모니적 개입전략을 구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에 관한 권리가 신장되었지만 경제적 민주주의에 관한 권리가 미흡했으므로, 민주당의 진보파와 진보정당들이 제휴하여 사회권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한 주요 방안으로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축소된 시민사회와의 협력, 즉 거버넌스를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반MB연합 비판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이명박 정부를 악마화하며(예를 들어 이명박 파시즘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제반 민주적 권리의 침해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면죄부를 부여한다. 설령 전 집권세력을 비판하더라도 압도적인 힘 관계의 열세 속에서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현실적으로 민주당을 활용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러한 수세적 태도는 이른바 MB악법을 저지하기 위한 대국회 투쟁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한미FTA, 금융자유화 등 금융세계화를 촉진하는 현안과 관련하여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거니와, 국회에서 벌어지는 여야 간의 충돌 역시 실제로는 권력 분점을 둘러싼 당파적 마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 집권세력들의 경우 민주당의 재집권 프로젝트나 또는 국민참여당으로 결집한 친노세력의 부활을 위해 시민사회와 민중운동이 외곽에서 지원을 담당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반면 여기에 마지못해 동참하는 진보정당은 여전히 민주당의 2중대라는 국민적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반MB 선거연합 역시 해법이 묘연하기는 마찬가지다. 논자들마다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시민단체 인사들은 대개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어느 세력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민심을 대표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차기 정권교체를 위해 새로운 정치연합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이전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던 시민단체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진보정당 스스로 이런 흐름과 분명히 단절하며 정치적 독자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보정당이 자신의 전망을 사회운동보다는 선거정당에 두기 때문에 선거 시기 중도파와의 연합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진보정당 역시 선거 시기 지지층의 외연을 확대할 것인가 또는 내부 결속력을 강화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대개는 전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진보정당은 정치공학에 근거한 선거기법에 몰두한다. 이때 새로운 지지층의 확대를 위해 대중적 조직망을 구축하는 방안은 비효율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고 만다. 핵심 지지층의 동원은 기정사실로 간주되거나, 이 역시 선거 기법상의 문제로 접근된다. 그 결과 진보정당 스스로 자신의 계급적 기반인 민중운동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고 궁극적으로는 민중운동의 토대를 약화시킨다.
진보정당의 전략 비판
이러한 문제는 현실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는 △10만 당원 확보 △2010년까지 지지율 20% 확보 △진보적 지방자치 실현으로 지역집권의 축 형성 △2012년 원내교섭단체 발전 △2017년 집권을 발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반이명박 정부 투쟁에서 주도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범개혁세력의 분화로 발생한 균열과 공백을 잠식함으로써 자주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전통적 전략의 변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기대와 달리 10월 보궐선거에서 반 정권 민심은 여전히 민주당의 자장에 속해 있었고, 친노세력이 규합한 국민참여당은 창당과 동시에 지지율 3등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무엇보다 범진보개혁세력에 대한 구 집권세력의 헤게모니를 대체한다는 민주노동당의 장기적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응당 두 가지 전제, 즉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급진적 대중운동의 실존과 함께 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내적 성장이라는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분당 이후 퇴보적 정체 상태에 빠져 있고, 그 대중적 토대인 민주노총 역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있다.
진보신당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창당 당시부터 공공연히 ‘탈 민주노총’을 선언한 진보신당은 전통적인 조직 노동자운동을 상대화하는 대신 비정규직이나 수도권, 고학력, 화이트칼라 중심의 ‘핵심 타겟’(표적집단) 공략을 표방하며 선거주의를 심화하고 있다. 진보신당 창당과정에 즉각 동참하지 않은 세력이 외곽에서 진보신당을 노동자 중심 정당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은 이에 대한 나름의 비판인 셈이다. 이러한 궤도 수정의 결과, 진보신당은 ‘추상적인 이념대신 구체적인 현실분석과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생활진보와 민생정치’를 당노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에 대한 무비판적인 접근도 여기에 한 몫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진보신당 자체 진단처럼 한 석의 국회의원과 3% 미만의 지지율로는 당의 존립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고심일 것이다. 현재 진보신당은 일상적인 지역 활동의 부재를 조직적 약점으로 지적하며 지방선거 대응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중장기 지역 활동의 토대를 마련할 것을 목표로 설정한 상태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정당 브랜드가 약한 상황에서 유력 정치인의 출마 선언을 통한 대중적 관심을 집중한다”거나 “소위 ‘노심 쌍포론’을 중심으로 인물이 정당을 키우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한다는 등 스타 정치인 한두 명에게 의존하는 한계를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선거공학이나 선거시기 득표전략에 매몰된 진보정당들이 동일한 기법을 채택하는 지배정당들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될 가망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또한 분당 이후 양당 간 외적 경쟁구도가 작동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보다는 기득권을 분점하기 위한 악무한적인 대립을 낳을 우려가 크다. 민주노총 내부의 정파적 대립구도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과정에서 기층에서의 운동이 혼란과 무기력에 빠지고 있다. 한국진보연대 구축과정은 이러한 경향을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그 자체가 분열의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현 집행부가 진보정치세력의 통합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일단 기존 집행부가 배타적 지지 방침을 고수하던 것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진보양당의 재통합에 초점이 맞춰진 현 집행부의 제안은 1기 정치세력화 운동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대증요법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노총 1기 정치세력화의 문제점
그렇다면 비판의 초점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운동으로 모아진다. 1996년 총선에서 노동자후보를 출마시킨 민주노총은 1997년부터 정치세력화 운동을 본격화한다. 1996-97년 총파업 실패의 교훈을 ‘의회에 노동자 대표가 있어야 한다’는 데서 찾은 민주노총은 다가올 대선에서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국민후보로 추대하고 정치조직을 결성한다는 방침을 수립한다. 그 결과 민주노총을 필두로 진보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대선대책기구의 위상을 지닌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이 결성되고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후보’의 이름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이는 여러 굴곡에도 불구하고 향후 민주노동당의 모태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1990년대 진보정당 건설 운동은 민주노총 건설 이전부터 진보정당을 주장했던 이념지향적, 정당지향적 세력의 주도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실현되었다. 애초 진보정당 운동을 주도하던 정치세력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고, 이런 의미에서 <국민승리21>의 결성은 모든 운동세력의 결집이라는 외양을 띠었지만, 그 결합은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상당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 정치세력화 방침은 이미 노동자운동이 수세적 노선으로 전환한 이후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반 좌파정치운동 일각에서 제기한 ‘신노선’은 정치조직과 대중조직 분리 구축을 주장하며 정당과 노조의 역할을 규정하였지만, 이는 사실상 노동조합 활동을 경시하거나 노동조합의 이념 지향적 활동을 방기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제기되었고, 민주노총 출범을 기화로 진보적 조합주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기치로 하는 실제적 노선 변화가 발생했다.
게다가 IMF 경제위기를 경과하며 노동조합의 내적 분열과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김대중정권이 제안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에 합의한 뒤 사퇴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으로 출범한 2, 3기 지도부 역시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철폐하지 못한 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와 탈퇴를 반복하는 악순환에 빠졌고, 2003년에는 변형근로제 도입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신자유주의 노동신축화에 굴하고 말았다.
이렇듯 민주노총이 만성적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10석에 이르는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급작스러운 성공을 거둔다. 이는 민주노총의 공식적 결의와 지원에 기반을 둔 노동자정당인 동시에 다양한 정파들이 공존하는 정치연합으로서 성격이 공존해온 민주노동당의 진로에 역설적인 효과를 낳았다.
첫째, 민주노동당이 점점 더 ‘원내정당’을 지향하면서 민주노총으로부터 자립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의 정치방침에 근거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한계가 고스란히 당 내부로 이전되어 당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경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 자신의 지지기반인 민주노총과 사회운동의 혁신이나 정치적 재조직화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민주노총으로부터 당 활동의 자원을 확충하는 데 치중했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은 선거 시기 인적 물적 동원으로 이해되기 일쑤였고, 당원의 지속적인 충원에도 불구하고 당원을 포함한 조합원들을 의식화, 조직화하기 위한 당이나 민주노총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은 매우 취약했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실현 가능한 정책대안’과 입법 활동에 주력하면서 스타 정치인들에 의한 사당화(私黨化)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민주노총당’을 탈피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즉 민주노총의 투쟁이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와 열기 속에 진행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적 정당성과 지지도 취약한 마당에 더 이상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이미지를 함께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둘째, 민주노동당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파들의 연합은 민주노총의 공식적 지원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파세력 간에 경쟁과 협력의 계기가 될 수 있으나, 역시 역으로 정파연합의 붕괴는 민주노총의 분할로 이어지게 할 가능성을 내포했다. 민주노동당을 통한 제도권 진출이 가시화되자 민주노총 상층부 인사들이 권력지향적 정치엘리트를 추구할 위험성이 높아졌고 이는 민주노동당 당직, 공직을 둘러싼 정파 간 갈등을 유발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기본적으로 특정 정파의 공직, 당직 독점에 대한 반발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는 결국 민주노총 내부에서 정파 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노총의 분할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이러한 정파 간 갈등을 완화하지 못한다면 정당과 노동조합의 분열은 극단화되거나 파국적인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제2의 정치세력화, 정당 간 통합을 넘어 사회운동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차기 집행부의 과제로 제시되고 있는 제2의 정치세력화는 현존하는 정당들 간의 통합을 촉구하는 수준을 넘어 정당과 노조의 관계와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전제로 추진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운동이 허구적 코퍼러티즘과 노동자 분할 전략에 맞서 계급적 통일성을 강화하는 운동 전략을 통해 대중운동을 재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운동이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한 수세적 반응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면 민주노총이 위기에 빠진 것이 단지 ‘의회에 국회의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포괄적 과제를 은폐하는 알리바이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부정적 수렴점’으로 기능했다고 평가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부정적 수렴점마저 극적으로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고, 최소한의 공동활동의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우선 노동자운동 내 모든 세력은 정당의 분열이 민주노총의 분열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민주노총 운동, 특히 선거를 둘러싼 정파들 간의 갈등을 축소하고 민주노총의 개조와 통합을 추구함으로써 역으로 정당들의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이번 6기 집행부 선거가 그 시금석이 될 것인 바, 정파들 간의 허구적 대립을 지양하고 민주노총 내부 혁신을 통해 공동활동의 토대를 마련하는 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하자.
다른 한편으로 진보정당들은 민주노총을 포함한 대중운동의 통합적 발전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진보정당은 사회운동의 성과를 소진시키는 방식의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을 활성화함으로써 사회적 세력관계의 역전을 촉진하는 정당, 출세주의나 당의 우경화와 직결되는 조급한 집권전략에 몰두하기보다는 당의 근본이 되는 대중운동을 재건,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
사회운동정당으로의 변모를 추동하면서 민주노총은 진보정당과 공조하여 선거와 대중투쟁에서 통합적인 대응을 시도할 수 있다. 우선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시기 노동권에 관한 대중적 요구를 집약하여 진보정당과 공동으로 제도적 대안을 발의하고, 선거 전후 대중투쟁과 선거운동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들의 실질적인 공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노총이 주도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미 현실에서 ‘사문화’되고 있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 방침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유지냐 폐지냐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민주노총이 전개해야 할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총괄적 방향과 경로를 제시하면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사노준 등 정당추진세력의 정치활동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 방침’을 재수립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 스스로 진보정당에 대한 인적 물적 동원으로 조합원들의 정치활동을 수동화한 관행을 탈피함으로써 선거 대응에 경도된 정당운동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무엇보다 조합원들이 일상적인 학습 선전 조직을 통해 대안사회에 대한 이념과 전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민주노총 정치사업 전반을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민주노총은 장기적으로 전선재편을 포함하는 정치세력화 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야 한다.
민주노총, 반MB연합을 넘어 신자유주의 반대 민중연대전선의 선봉에 서자
이러한 과정에 병행하여 민중연대전선을 새롭게 구축하는 데 민주노총이 선도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현재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는 반MB연합의 근저에는 억압적인 보수정권이 등장한 상황에서 과거 집권세력이나 시민단체와의 상층 연대를 통해 활동공간과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있다. 그러나 충족될 수 없는 기대 속에서 민중운동의 주체적 투쟁역량을 키우기 위한 노력은 상대화되고 있다. 민중운동은 허구적인 반MB연합에 휘둘리지 말고 노동자운동의 재건, 민중운동의 독자성 강화, 진보정당의 사회운동적 성격 강화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을 바로 세워야 한다. 한국진보연대는 전국민중연대 해소를 둘러싼 지난한 논란 끝에 반쪽짜리로 출범한 이후 민중운동 내에서 합력을 창출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시민운동 진영이나 민주당과 협력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정 정파의 경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마다 한국진보연대 가입 건을 의안으로 상정하여 분란의 소지를 계속 낳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한국진보연대를 넘어 보다 폭넓은 공동투쟁기구를 추진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렇게 결성된 <이명박 심판, 민주주의 민중생존권 쟁취 공동투쟁본부>(반MB공투본) 역시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제를 설정하거나 그에 적합한 투쟁 태세와 조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향후 반MB공투본을 지역과 부문을 아우르는 상설연대체로 발전시키기에는 내부적 합의도 부족하다.
조만간 예상되는 세계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정권의 노동권에 대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민중운동의 단결의 수준을 한층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시기 노동권을 중심으로 대중투쟁 요구를 정선하여, 전체 노동자계급의 중심으로서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농민, 빈민, 청년학생 등 계급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전체 민중운동의 동맹을 실현하는 데 선도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또한 민주노총은 전국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에 근거한 연대운동을 모색해야 한다. 서울에서 새로운 상설연대체가 결성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며 소지역별(지구협) 단위에서도 지역연대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은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지역 연대운동을 복원하여 지역 정치활동과 미조직사업의 토대를 강화해야 한다.
반면 민중운동은 용산 투쟁이나 쌍용차 파업 등의 계기에서 끈질긴 투쟁을 이어왔지만, 대개는 압도적인 힘의 열세 속에 정권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해야 했다. 정권은 2010년에도 각종 법 제도 개악을 통해 노동신축화를 강화하고 노동조합 활동의 근간을 뒤흔드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민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던 민주노동당이 대선 이후 분열하면서 그 정치적 입지가 대폭 축소된 것도 중요한 패인이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각각 5석과 1석의 의석에 5%와 3%를 밑도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향후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진보정당의 암울한 미래를 점치는 전망이 곳곳에서 제출되고 있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공식적 결의와 지원에 바탕을 둔 노동자 대중정당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에 있다. 분당을 계기로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가 개시되면서 배타적 지지 방침으로 근간으로 하는 정치세력화 운동의 하나의 순환이 극적으로 마감된 것이다. 진보정당운동을 둘러싼 세력구도가 고착화되면서 민주노총의 통합력은 크게 저하하고 있으며, 현장 조합원들의 무기력과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힘 관계의 역전을 위해 진보대연합이나 민주대연합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진보정당들 간의 통합을 촉구하거나 민주당이나 시민단체와의 연대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6기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간 민주노총이 추진해온 정치세력화와 민중연대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2009년 민주노총이 진행한 정치사업, 연대사업에 대한 평가를 통해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한 뒤, 이와 결부된 진보정당들의 민주대연합 또는 진보대연합 노선을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민주노총 1기 정치세력화를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론적으로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적 토대의 혁신과 개조를 통해 역으로 정당운동과 민중연대전선을 통합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9년 민주노총 정치사업 경과
민주노총은 “제 진보세력의 대단결을 요구하고 있는 정세적 측면과, 당분열 이후 조합원들 속에 확산되고 있는 정치세력화운동에 대한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불식하고 노동자민중의 집권운동에 대한 진일보한 전망을 세워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민주노총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 하에 지난 1월 열린 정기대의원대회 2009년 정치 사업계획으로 진보정당 세력의 통합추진 건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3월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민주노총 추진위원회’(통추위) 구성 건을 확정하고, ①제 진보정당 방문 및 간담회 개최 ②단결과 통합을 위한 추진 논의 기구(TFT) 구성 ③토론회 개최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민주노총 내부적으로도 ①단위노조 간부 여론조사, ②진보정당 통합촉구 선언문 채택(9월 임시대의원대회 만장일치 결정), ③진보정당 통합촉구 조합원 10만 선언 서명운동 ④지역본부 순회 토론회 등의 일정을 밟고 있다.
민주노총 통추위는 5월에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내부 의견을 조율한 뒤, 7월과 8월에 각각 현장조직과 진보4당 및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러한 의견 수렴 절차와 병행하여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사노준)과 진보4당 TFT를 구성하여 협의를 진행해왔다.
그런데 민주노총-진보4당 TFT는 시작부터 난항을 겪으며 당초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잠정 실패하고 말았다. 우선 ‘진보정당의 단결과 통합이 필요하다’는 기본 취지에 대해 정당들 간의 이견이 표출되었다. 진보신당, 사회당, 사노준은 TFT의 명칭에서 ‘단결과 통합’이라는 표현을 ‘연대와 혁신’으로 수정할 것을 제기했다. 또 이들 3당은 “정파나 정치세력의 분립 자체가 노동현장을 갈라놓는다는 해석은 정치적 차이에도 민주노조 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진보정치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원칙한 대동단결주의”라며 민주노총 통합촉구 선언문 채택에 대한 유감 성명서를 발표했다.
문제제기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민주노총이 기존 배타적 지지 방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당간 통합을 촉구하는 것이 모순이라며 민주노총 세액공제 방침에 대한 유감을 전달하고 진보신당에 대한 세액공제 방침을 협조 요청하였다. 사노준은 “민주노총의 진보정당통합운동은 (…) 진보정당 주체와의 실질적 논의가 생략된 채 나온 ‘폭력’이자 ‘월권’행위이며, 민주노총의 결정은 TFT에 참여한 각 정당과 민주노총 간의 실질적 연대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TFT에서 탈퇴하였다.
민주노총은 11월 초 TFT를 확장하여 ‘제진보진영 간담회 및 논의기구 구성을 위한 사전모임’을 진행하고 이 틀을 통해 공동의 정치선언문 발표를 추진하였다. 여기서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통합선언(약속)→2010년 지방선거에서 제 진보진영의 공동 대응→큰 틀의 진보정당 건설의 로드맵 제시→2012년 총선 대선 필승전략 수립’ 경로를 설정했다. 그러나 정치선언문 성안 과정에서 또다시 조직간 이견이 표출되어, 선언문 작성은 유예되고 대신 2010년 초 ‘대토론회’를 추진하기로 한 상태다.
진보정치세력 통합을 둘러싸고 표류하는 논란 1: 진보대연합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는가? 일단 2009년 민주노총의 정치사업이 진보정당이 분화하게 된 근본적 이유에 대한 폭넓은 진단 없이 주어진 선거일정에 긴박당해 성급히 정당 간 조직통합을 촉구한 것이 문제였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 민주노동당의 경우, 민주노총의 ‘단결과 통합’ 제의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하면서 지방선거에 즈음하여 ‘선 통합선언 후 선거연합’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당의 진로와 관련하여 당 정체성 강화론과 진보정치세력 통합론이 경합하고, 연대연합과 관련하여 반MB연합론과 진보대연합론이 경합하는 양상을 띠어왔다. 이러한 내부 논란을 일소하는 취지에서 민주노동당은 최근 확대간부회의를 개최하여, 당의 정체성 강화를 제일의 과제로 설정하는 한편 ‘반MB 전선의 주도성을 확보하면서 진보대연합을 강화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한 상태다.
여기서 ‘당 정체성 강화’론은 민주노동당 주류파, 그중에서도 분당 사태를 진보신당의 분열주의로 평가하는 강경한 세력의 인식이 투영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용대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은 최근 당 기관지 <진보정치> 기고를 통해, “당을 모욕하고 파괴한 분열주의자들에게 아무런 절차 과정의 매개 없이 당선 가능성과도 무관한 ‘진보대연합’ 명분 때문에 면죄부를 주고 지지까지 해야 하는가”라며 “허구적 ‘진보대연합’에 매달리는 것에 우려한다”고 강하게 통합론을 비판했다. 이러한 기류는 지난 4월 울산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이후 여론조사에서 패배한 민주노동당의 대변인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한 사례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의식한 듯 진보신당의 경우 ‘민주노총의 통합 제의의 진정성은 이해하지만, 지방선거 전 통합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분당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지방선거 전에 무리하게 조직통합을 추진하는 것은 실질적인 연대마저 가로막을 공산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진보신당은 ‘선 통합선언 후 선거연합’의 논리가 자칫 선거연합을 회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즉 민주노동당 내에서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이 오히려 민주노총의 통합 요구에 편승하여 진보신당을 통합에 반대하는 분열세력으로 낙인찍은 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 방침을 추수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진보신당은 지난 4월 재보선 당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후보가 단독 출마한 인천과 전주에서 양당이 교차로 지지선언하자는 일각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전북본부가 배타적 지지방침을 근거로 진보신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불허함으로써 연대의 계기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도 불신의 근거로 들고 있다.
진보정치세력 통합을 둘러싸고 표류하는 논란 2: 민주대연합
앞으로도 한동안 논란은 지속되겠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민주노동당은 진보대연합은 기본적으로 추진하되 민주대연합도 민주노동당의 명분과 실리가 보장되는 선에서 병행 추진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신당의 경우에도,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연합과는 구별되는 사회 경제적 민주화연합(민들레연대)을 중심으로 선거연합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한다고 하지만, “‘반MB 대안 연대’를 기준으로 선거연대를 추진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둔 상황이다. 여기에는 개혁세력 내지는 범진보개혁세력의 통합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진영의 ‘반MB 선거연합’ 흐름이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반MB 선거연합’을 주창하는 여러 흐름이 형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전 집권세력과 시민사회단체 상층부, 일부 민중운동 출신 명망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제일 먼저 창립된 <민주통합시민행동>의 경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재야 출신 인사들과 현재 민주당, 국민참여당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민주세력이 대동단결하자는 민주대연합을 제안하고 있다. 뒤이어 창립된 <시민주권모임> 역시 이해찬 전총리를 대표로, 참여정부 인사와 현재 민주당 인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개혁세력의 승리를 위해 <승리 2010, 시민의 힘>이라는 정당-시민사회 연대기구를 제안한 상황이다.
이상과는 다른 맥락에서 박원순 변호사와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박순성 동국대 교수, 백승헌 민변 회장 등 시민사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희망과 대안>의 경우, 지방선거를 앞두고 좋은 정치세력 형성에 기여하고 정치권과 시민사회, 시민사회 내부소통, 정책 생산 등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창립 취지를 밝혔다. 끝으로 지방선거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연대를 모색하는 노동·시민사회 진영의 연대체인 <2010연대(준)>가 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 간부 출신 인사들도 상당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일부 진보 학계에서도 이런 흐름에 관여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반MB’라는 국민적 정치전선과 ‘반신자유주의’라는 민중적 정치전선의 이중적 존재와 상호 긴장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국민정치적 공간에 반신자유주의적 세력이 어떻게 헤게모니적 개입전략을 구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에 관한 권리가 신장되었지만 경제적 민주주의에 관한 권리가 미흡했으므로, 민주당의 진보파와 진보정당들이 제휴하여 사회권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한 주요 방안으로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축소된 시민사회와의 협력, 즉 거버넌스를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반MB연합 비판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이명박 정부를 악마화하며(예를 들어 이명박 파시즘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제반 민주적 권리의 침해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면죄부를 부여한다. 설령 전 집권세력을 비판하더라도 압도적인 힘 관계의 열세 속에서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현실적으로 민주당을 활용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러한 수세적 태도는 이른바 MB악법을 저지하기 위한 대국회 투쟁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한미FTA, 금융자유화 등 금융세계화를 촉진하는 현안과 관련하여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거니와, 국회에서 벌어지는 여야 간의 충돌 역시 실제로는 권력 분점을 둘러싼 당파적 마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 집권세력들의 경우 민주당의 재집권 프로젝트나 또는 국민참여당으로 결집한 친노세력의 부활을 위해 시민사회와 민중운동이 외곽에서 지원을 담당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반면 여기에 마지못해 동참하는 진보정당은 여전히 민주당의 2중대라는 국민적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반MB 선거연합 역시 해법이 묘연하기는 마찬가지다. 논자들마다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시민단체 인사들은 대개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어느 세력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민심을 대표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차기 정권교체를 위해 새로운 정치연합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이전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던 시민단체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진보정당 스스로 이런 흐름과 분명히 단절하며 정치적 독자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보정당이 자신의 전망을 사회운동보다는 선거정당에 두기 때문에 선거 시기 중도파와의 연합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진보정당 역시 선거 시기 지지층의 외연을 확대할 것인가 또는 내부 결속력을 강화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대개는 전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진보정당은 정치공학에 근거한 선거기법에 몰두한다. 이때 새로운 지지층의 확대를 위해 대중적 조직망을 구축하는 방안은 비효율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고 만다. 핵심 지지층의 동원은 기정사실로 간주되거나, 이 역시 선거 기법상의 문제로 접근된다. 그 결과 진보정당 스스로 자신의 계급적 기반인 민중운동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고 궁극적으로는 민중운동의 토대를 약화시킨다.
진보정당의 전략 비판
이러한 문제는 현실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는 △10만 당원 확보 △2010년까지 지지율 20% 확보 △진보적 지방자치 실현으로 지역집권의 축 형성 △2012년 원내교섭단체 발전 △2017년 집권을 발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반이명박 정부 투쟁에서 주도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범개혁세력의 분화로 발생한 균열과 공백을 잠식함으로써 자주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전통적 전략의 변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기대와 달리 10월 보궐선거에서 반 정권 민심은 여전히 민주당의 자장에 속해 있었고, 친노세력이 규합한 국민참여당은 창당과 동시에 지지율 3등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무엇보다 범진보개혁세력에 대한 구 집권세력의 헤게모니를 대체한다는 민주노동당의 장기적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응당 두 가지 전제, 즉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급진적 대중운동의 실존과 함께 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내적 성장이라는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분당 이후 퇴보적 정체 상태에 빠져 있고, 그 대중적 토대인 민주노총 역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있다.
진보신당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창당 당시부터 공공연히 ‘탈 민주노총’을 선언한 진보신당은 전통적인 조직 노동자운동을 상대화하는 대신 비정규직이나 수도권, 고학력, 화이트칼라 중심의 ‘핵심 타겟’(표적집단) 공략을 표방하며 선거주의를 심화하고 있다. 진보신당 창당과정에 즉각 동참하지 않은 세력이 외곽에서 진보신당을 노동자 중심 정당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은 이에 대한 나름의 비판인 셈이다. 이러한 궤도 수정의 결과, 진보신당은 ‘추상적인 이념대신 구체적인 현실분석과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생활진보와 민생정치’를 당노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에 대한 무비판적인 접근도 여기에 한 몫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진보신당 자체 진단처럼 한 석의 국회의원과 3% 미만의 지지율로는 당의 존립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고심일 것이다. 현재 진보신당은 일상적인 지역 활동의 부재를 조직적 약점으로 지적하며 지방선거 대응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중장기 지역 활동의 토대를 마련할 것을 목표로 설정한 상태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정당 브랜드가 약한 상황에서 유력 정치인의 출마 선언을 통한 대중적 관심을 집중한다”거나 “소위 ‘노심 쌍포론’을 중심으로 인물이 정당을 키우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한다는 등 스타 정치인 한두 명에게 의존하는 한계를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선거공학이나 선거시기 득표전략에 매몰된 진보정당들이 동일한 기법을 채택하는 지배정당들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될 가망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또한 분당 이후 양당 간 외적 경쟁구도가 작동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보다는 기득권을 분점하기 위한 악무한적인 대립을 낳을 우려가 크다. 민주노총 내부의 정파적 대립구도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과정에서 기층에서의 운동이 혼란과 무기력에 빠지고 있다. 한국진보연대 구축과정은 이러한 경향을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그 자체가 분열의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현 집행부가 진보정치세력의 통합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일단 기존 집행부가 배타적 지지 방침을 고수하던 것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진보양당의 재통합에 초점이 맞춰진 현 집행부의 제안은 1기 정치세력화 운동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대증요법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노총 1기 정치세력화의 문제점
그렇다면 비판의 초점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운동으로 모아진다. 1996년 총선에서 노동자후보를 출마시킨 민주노총은 1997년부터 정치세력화 운동을 본격화한다. 1996-97년 총파업 실패의 교훈을 ‘의회에 노동자 대표가 있어야 한다’는 데서 찾은 민주노총은 다가올 대선에서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국민후보로 추대하고 정치조직을 결성한다는 방침을 수립한다. 그 결과 민주노총을 필두로 진보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대선대책기구의 위상을 지닌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이 결성되고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후보’의 이름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이는 여러 굴곡에도 불구하고 향후 민주노동당의 모태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1990년대 진보정당 건설 운동은 민주노총 건설 이전부터 진보정당을 주장했던 이념지향적, 정당지향적 세력의 주도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실현되었다. 애초 진보정당 운동을 주도하던 정치세력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고, 이런 의미에서 <국민승리21>의 결성은 모든 운동세력의 결집이라는 외양을 띠었지만, 그 결합은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상당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 정치세력화 방침은 이미 노동자운동이 수세적 노선으로 전환한 이후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반 좌파정치운동 일각에서 제기한 ‘신노선’은 정치조직과 대중조직 분리 구축을 주장하며 정당과 노조의 역할을 규정하였지만, 이는 사실상 노동조합 활동을 경시하거나 노동조합의 이념 지향적 활동을 방기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제기되었고, 민주노총 출범을 기화로 진보적 조합주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기치로 하는 실제적 노선 변화가 발생했다.
게다가 IMF 경제위기를 경과하며 노동조합의 내적 분열과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김대중정권이 제안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에 합의한 뒤 사퇴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으로 출범한 2, 3기 지도부 역시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철폐하지 못한 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와 탈퇴를 반복하는 악순환에 빠졌고, 2003년에는 변형근로제 도입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신자유주의 노동신축화에 굴하고 말았다.
이렇듯 민주노총이 만성적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10석에 이르는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급작스러운 성공을 거둔다. 이는 민주노총의 공식적 결의와 지원에 기반을 둔 노동자정당인 동시에 다양한 정파들이 공존하는 정치연합으로서 성격이 공존해온 민주노동당의 진로에 역설적인 효과를 낳았다.
첫째, 민주노동당이 점점 더 ‘원내정당’을 지향하면서 민주노총으로부터 자립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의 정치방침에 근거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한계가 고스란히 당 내부로 이전되어 당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경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 자신의 지지기반인 민주노총과 사회운동의 혁신이나 정치적 재조직화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민주노총으로부터 당 활동의 자원을 확충하는 데 치중했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은 선거 시기 인적 물적 동원으로 이해되기 일쑤였고, 당원의 지속적인 충원에도 불구하고 당원을 포함한 조합원들을 의식화, 조직화하기 위한 당이나 민주노총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은 매우 취약했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실현 가능한 정책대안’과 입법 활동에 주력하면서 스타 정치인들에 의한 사당화(私黨化)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민주노총당’을 탈피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즉 민주노총의 투쟁이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와 열기 속에 진행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적 정당성과 지지도 취약한 마당에 더 이상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이미지를 함께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둘째, 민주노동당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파들의 연합은 민주노총의 공식적 지원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파세력 간에 경쟁과 협력의 계기가 될 수 있으나, 역시 역으로 정파연합의 붕괴는 민주노총의 분할로 이어지게 할 가능성을 내포했다. 민주노동당을 통한 제도권 진출이 가시화되자 민주노총 상층부 인사들이 권력지향적 정치엘리트를 추구할 위험성이 높아졌고 이는 민주노동당 당직, 공직을 둘러싼 정파 간 갈등을 유발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기본적으로 특정 정파의 공직, 당직 독점에 대한 반발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는 결국 민주노총 내부에서 정파 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노총의 분할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이러한 정파 간 갈등을 완화하지 못한다면 정당과 노동조합의 분열은 극단화되거나 파국적인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제2의 정치세력화, 정당 간 통합을 넘어 사회운동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차기 집행부의 과제로 제시되고 있는 제2의 정치세력화는 현존하는 정당들 간의 통합을 촉구하는 수준을 넘어 정당과 노조의 관계와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전제로 추진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운동이 허구적 코퍼러티즘과 노동자 분할 전략에 맞서 계급적 통일성을 강화하는 운동 전략을 통해 대중운동을 재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운동이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한 수세적 반응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면 민주노총이 위기에 빠진 것이 단지 ‘의회에 국회의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포괄적 과제를 은폐하는 알리바이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부정적 수렴점’으로 기능했다고 평가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부정적 수렴점마저 극적으로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고, 최소한의 공동활동의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우선 노동자운동 내 모든 세력은 정당의 분열이 민주노총의 분열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민주노총 운동, 특히 선거를 둘러싼 정파들 간의 갈등을 축소하고 민주노총의 개조와 통합을 추구함으로써 역으로 정당들의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이번 6기 집행부 선거가 그 시금석이 될 것인 바, 정파들 간의 허구적 대립을 지양하고 민주노총 내부 혁신을 통해 공동활동의 토대를 마련하는 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하자.
다른 한편으로 진보정당들은 민주노총을 포함한 대중운동의 통합적 발전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진보정당은 사회운동의 성과를 소진시키는 방식의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을 활성화함으로써 사회적 세력관계의 역전을 촉진하는 정당, 출세주의나 당의 우경화와 직결되는 조급한 집권전략에 몰두하기보다는 당의 근본이 되는 대중운동을 재건,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
사회운동정당으로의 변모를 추동하면서 민주노총은 진보정당과 공조하여 선거와 대중투쟁에서 통합적인 대응을 시도할 수 있다. 우선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시기 노동권에 관한 대중적 요구를 집약하여 진보정당과 공동으로 제도적 대안을 발의하고, 선거 전후 대중투쟁과 선거운동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들의 실질적인 공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노총이 주도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미 현실에서 ‘사문화’되고 있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 방침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유지냐 폐지냐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민주노총이 전개해야 할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총괄적 방향과 경로를 제시하면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사노준 등 정당추진세력의 정치활동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 방침’을 재수립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 스스로 진보정당에 대한 인적 물적 동원으로 조합원들의 정치활동을 수동화한 관행을 탈피함으로써 선거 대응에 경도된 정당운동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무엇보다 조합원들이 일상적인 학습 선전 조직을 통해 대안사회에 대한 이념과 전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민주노총 정치사업 전반을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민주노총은 장기적으로 전선재편을 포함하는 정치세력화 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야 한다.
민주노총, 반MB연합을 넘어 신자유주의 반대 민중연대전선의 선봉에 서자
이러한 과정에 병행하여 민중연대전선을 새롭게 구축하는 데 민주노총이 선도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현재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는 반MB연합의 근저에는 억압적인 보수정권이 등장한 상황에서 과거 집권세력이나 시민단체와의 상층 연대를 통해 활동공간과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있다. 그러나 충족될 수 없는 기대 속에서 민중운동의 주체적 투쟁역량을 키우기 위한 노력은 상대화되고 있다. 민중운동은 허구적인 반MB연합에 휘둘리지 말고 노동자운동의 재건, 민중운동의 독자성 강화, 진보정당의 사회운동적 성격 강화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을 바로 세워야 한다. 한국진보연대는 전국민중연대 해소를 둘러싼 지난한 논란 끝에 반쪽짜리로 출범한 이후 민중운동 내에서 합력을 창출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시민운동 진영이나 민주당과 협력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정 정파의 경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마다 한국진보연대 가입 건을 의안으로 상정하여 분란의 소지를 계속 낳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한국진보연대를 넘어 보다 폭넓은 공동투쟁기구를 추진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렇게 결성된 <이명박 심판, 민주주의 민중생존권 쟁취 공동투쟁본부>(반MB공투본) 역시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제를 설정하거나 그에 적합한 투쟁 태세와 조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향후 반MB공투본을 지역과 부문을 아우르는 상설연대체로 발전시키기에는 내부적 합의도 부족하다.
조만간 예상되는 세계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정권의 노동권에 대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민중운동의 단결의 수준을 한층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시기 노동권을 중심으로 대중투쟁 요구를 정선하여, 전체 노동자계급의 중심으로서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농민, 빈민, 청년학생 등 계급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전체 민중운동의 동맹을 실현하는 데 선도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또한 민주노총은 전국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에 근거한 연대운동을 모색해야 한다. 서울에서 새로운 상설연대체가 결성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며 소지역별(지구협) 단위에서도 지역연대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은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지역 연대운동을 복원하여 지역 정치활동과 미조직사업의 토대를 강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