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금속노조 투쟁과 혁신 방향에 대한 제언
재벌 대기업들의 비용 전가 메커니즘을 보여준 2009년 경제 위기
이번 경제 위기가 보여준 한국 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대기업(주로 재벌 그룹의 계열사)들의 수익성이 국민 경제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경제위기 여파로 한국경제는 2008년 4/4분기부터 2009년 2/4분기까지 3분기 연속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취업자 수 역시 2008년 7월부터 하락하기 시작해 2010년 3월까지도 경제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제조 대기업들은 반대로 사상 유례 없는 이익을 기록했는데, 삼성전자의 경우 2009년 당기순이익이 9조 6천억 원으로 전년보다 74% 증가했고, 현대차 역시 당기순이익이 2조 9천억 원으로 전년보다 104% 상승했다.
이들 대기업들이 경제 위기 와중에서도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던 원인은 환율효과로 인한 수출 증가,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 마케팅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경제 위기를 명분으로 진행한 과감한 비용 절감 운동이 주요했다. 단적인 예로 현대차는 2009년 매출이 전년에 비해 1% 가량 감소했지만, 오히려 과감한 비용 절감을 통해 영업이익(매출액에서 생산 비용과 판매 및 관리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돈)은 19% 가까이 증가했다.
한국은행이 상장 제조업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주로 재벌 그룹의 계열사인 이들 기업들의 2009년 매출액은 0.1% 증가하는데 그쳤지만 매출액영업이익률(이 비율이 1%라면 100원 판매를 했을 때 이윤이 1원이라는 것)은 전년보다 0.2% 포인트 증가하며, 수익성이 전반적으로 좋아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즉, 이들 기업들이 여러 방법으로 생산과 판매에 필요한 비용을 크게 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제조 대기업들의 비용 절감이 생산성 향상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용을 외부로 전가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대기업들의 수익성 향상이 부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중소 하청납품업체에 대한 비용전가를 들 수 있다. 대기업들은 높은 수준의 신축적 납품 물량 조절을 통해 매출 감소로 인한 제고 비용을 납품하청업체에게 떠넘기는 것은 물론, 단가 인하, 결제기간 연장, 부당대금감액 등을 강요했다. 자동차 중소 부품 업체의 생산지수는 대기업들이 제고 조절에 나선 2008년 하반기부터 크게 감소하기 시작해 2009년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월 최고 48%까지 감소했다. 또한 산업연구원이 지난 2009년 6월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소납품업체들의 20.6%가 부당발주취소를 경험했고, 15%내외의 업체들이 지연이자 미지급, 인수 지연, 대금 부당 감액 등을 경험했다.
대기업들의 중소기업에 대한 비용 전가는 중소기업의 수익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감소로 이어진다. 자동차 기업의 예를 보자. 단위생산물 당 노동비용을 나타내는 단위노동비용을 보면 자동차 관련 제조업 기업들은 단위노동비용을 2009년 3/4분기는 전년 동기에 비해 30.4%, 4/4분기에는 20.3% 줄였다. 2009년 완성차 업체들의 노동비용이 지엠대우를 제외하고 모두 오른 것을 감안하면, 이 삭감분 대부분은 부품하청업체들에게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완성차 업체의 경우 지엠대우를 제외하면, 현대자동차의 노동비용은 전년에 비해 3천 4백억 원, 기아차 7백억 원, 르노삼성 2백억 원 늘어났다.
경제 위기는 기회? 국민경제 착취형 재벌과 제조업 노동자
제조업 노동자 중 300인 미만 중소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비율은 76%이며, 재벌 계열사가 아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비중은 90% 이상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재벌 대기업들의 비용 전가로 인한 피해는 제조업 노동자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실 경제위기는 과거에도 재벌 대기업에게는 위기가 아니라 도약의 기회였다. 두 자리 수 경제성장을 계속해오다 성장률이 5%대까지 떨어져 경제위기론이 팽배하던 1992년, 중소기업들은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12% 하락하는 위기에 내몰렸지만, 이 와중에도 대기업들은 16%에 가까운 영업이익 증가를 기록했다. 1998년 경제위기와 극복 과정은 더욱 극적이었다. 재벌들의 무리한 해외차입이 외환 위기의 중요한 이유였지만, 대우, 한보 등 일부 재벌들을 제외하면, 1998년 외환위기는 재벌들에게 정부 돈으로 부채를 털어내는 기회였다. 1998년 위기 이후 대기업들의 매출 규모는 세 배, 이익 규모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2009년 위기 과정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사상 최대의 이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재벌들에게 기회였던 경제위기는 다수 노동자에게 더 많은 착취를 구조적으로 감내하게 하는 경제적 재앙이었다. 특히 중소 제조업 노동자들에게 그러했는데, 위기 때마다 재벌 대기업들의 비용을 흡수하는 완충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300인 이상 제조업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 총액에 비해 300인 미만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총액은 1993년 73% 수준이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2001년 65%까지 하락했다. 그리고 세계금융위기가 닥치기 전 2008년 1/4분기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비율은 68% 수준으로 2001년에 비해 개선되었으나 경제 위기 이후인 2009년 4/4분기 다시 64% 수준으로 하락했다. 대기업들은 자기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약간의 타협을 통한 포섭을 도모했지만, 기업 외부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수탈을 감행했다.
중소 제조업 노동자에 대한 수탈은 공간적으로 보면 산업단지(공단)를 통해 이뤄졌다. 생산 집적을 통해 효율성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산업단지는 실상 재벌 대기업들의 하청 배후지 역할을 한다. 완성차 기업들의 배후지인 남동, 울산, 창원 등의 산업단지들, 전자 대기업의 배후지인 구미, 시화, 반월, 구로 등의 산업단지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산업단지들은 대부분 법정 최저임금에 약간의 수당이 더해지는 정도로 임금 수준이 통제된다. 예를 들면 통계청에서 조사한 2006년 중소규모 사업장의 평균 월 임금 총액은 212만 원인데,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조사한 산업단지 내 월 평균 임금은 남동 127만 원, 반월 131만 원, 시화 119만 원, 구미 177만 원에 불과하다. 국가산업단지 중 통계청 평균 임금 이상을 받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제조 산별을 지향하는 금속노조의 자기 모순
한편 금속노조의 조건은 한국 제조업 산업 구조와 비대칭적이다. 제조업 노동자는 300인 미만 사업장과 이상 사업장에 7:3 정도로 분포되어 있는데 반해 금속노조 조합원의 비율은 역으로 1:9 이다. 제조업 수직 구조의 정점에 있는 완성차 조합원이 전체의 65%에 달하고 노조 사업의 방향 설정 및 투쟁 민감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대의원 비율도 완성차 조합원이 61%를 차지한다. 노조 조직률 역시 제조업 노동자 전체의 4%대에 불과하여 절대적으로 낮다. 특히 완성차 업체의 배후지에 존재한 공단에 대한 조직률이 매우 낮은데, 한 예로 광주 기아 공장 근처에 있는 대불산업단지의 조직률은 0.4%에 불과하다.
이러한 조직 조건으로 인해 금속노조는 산업 내 평등을 위한 투쟁보다 기업 내 타협을 구조적으로 선호한다. 2006년 완성차 노조를 포함한 15만 금속노조가 출범했지만, 대의원대회 결의에도 불과하고 조합 내 65%를 차지하는 완성차 지부들이 기업 지부 이름으로 기업노조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 중 하나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들 완성차 노조가 산별노조 차원의 통제를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산업 내 임금격차 축소, 주간연속2교대제 등의 노동 과정 변화, 산업 차원의 공동 의제를 교섭하기 위한 중앙교섭 쟁취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이들 기업 지부들이 자신의 과제로 진정성있게 투쟁한 적은 없었다. 2007~2009년까지 현대 기아 지엠대우 등의 중앙교섭 참가를 추진했지만, 이들 기업 지부가 실상 얻어낸 것은 기약 없는 참가 확약서에 불과했고 올해 중소사업장 노조의 사활이 걸린 노조법 개악 등에 맞서 결의한 4월 총력투쟁(총파업)에도 이들 완성차 노조들은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변화한 세계 정세, 더 이상 봉합 불가능한 금속노조의 문제점들
문제는 앞으로 제조 산별을 지향하는 금속노조가 지금처럼 내부 문제를 봉합하며 그럭저럭 버틸 여지가 더욱 줄어든다는 것이다. 바로 경제 상황 때문이다.
2009년 세계 경제 위기는 2010년 들어 다소 완화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2009년 위기의 원인이었던 통제 불가능한 금융 자본과 자산 시장 거품을 통한 부채 소비, 달러 발권 이익을 통해 유지되던 미국의 무역수지 재정수지 적자, 생산 기술 혁신을 대체한 노동 수탈형 비용 절감 운동 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탓이다. 세계 경제 회복을 이끌고 있는 신흥 시장에서의 소비 증가는 이들 국가들의 자산 시장 거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 중이고, 중국 인도 등에서 등장한 새로운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세계 주요 제조업 기업들의 이윤을 떠받쳤다. 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은 지난 2년간 미래의 노동자 수입과 복지를 담보로 쏟아 부은 각국 정부의 경기부양, 구제 금융으로 자신들의 부실 자산을 털어냈다. 자산 시장 거품, 정부 재정 적자를 통한 수입 보전, 기술 혁신 없는 노동 수탈형 비용 절감 운동이 형태와 장소만 달리 하여 이전과 똑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하반기와 같은 추락이 아니더라도 장기간의 저성장이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2000년대의 고성장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인데, 금융 시장의 투기성 신용 확장으로 인해 실제 균형보다 높은 수준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근거다. 예를 들면 각종 파생금융상품을 통해 은행이 가계에 대출을 제공하고, 가계는 수익률이 보장된 부동산에 투자를 하면 가계는 아무런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서도 대출금리와 부동산 수익률 격차만큼 소비를 즐길 수 있다. 소비가 이렇게 늘면, 생산도 늘어난다. 하지만 이 소비는 가상의 부동산 가치를 근거로 하고 있는 만큼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가계는 파산하고 소비는 급감한다. 2000년 내내 이런 과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예전과 같은 자산 시장 가격 상승이 불가능하다면, 예전 수준의 소비-생산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제 회복은 이전 수준의 성장이 아니라 저성장 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금속노조의 성장은 2000년대 세계 거품 성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2001년 3만 금속노조 출범, 2005년 중앙교섭 성사와 사용자단체 구성, 2006년 완성차 노조를 포함한 15만 금속노조 출범까지 금속노조는 부족하게나마 조직적 성장을 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은 큰 틀에서 보자면 세계 거품 성장을 덕에 가능했던 한국 제조업의 활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조 대기업들이 연 10~30%에 달하는 수출 증가를 달성했는데, 수출 증가에 힘입어 2002년부터 경제위기 직전인 2007년까지 제조업 매출액 증가율은 연 5~20% 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매출 증가는 파업으로 인한 손해 비용도 높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교섭력 향상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물론 매출 증가로 인한 부의 분배는 매우 불균등했다. 대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은 6%에서 9%까지 상승했지만, 중소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은 매년 감소하여 2002년 5.3%에서 2007년 4.5%까지 하락했다. 같은 기간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 격차도 크게 상승하여 중소기업 노동자의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임금 비율은 2002년에 비해 2007년 6% 포인트 더 벌어졌다.
2009년 경제위기에서 확인했듯이 장기간의 저성장과 위기가 반복된다면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수탈, 금속노조 내 대기업, 중소기업 조합원 간의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다. 지불 능력이 있는 대기업 노조는 임금조건 방어를 위해 더욱 기업 내 타협에 목을 맬 것이고, 지불 능력이 약화된 자본과 대기업들의 각종 비용 삭감 압박에 맞서 싸워야 하는 중소기업 노조는 더욱 힘겨운 투쟁으로 내몰릴 것이다. 옷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금속노조라는 옷이 단결의 고리가 없어진 조합원들을 묶어 세울 수는 없다. 2010년 이후 경제 상황은 금속노조의 문제점을 임계치 너머로 밀어 붙일 것이다.
조직 설계에서 투쟁 의제로 조직 발전 논의를 바꿔야 한다.
2009년 기업지부 해산 실패와 쌍용차 파업 투쟁 패배, 그리고 완성차 업체 참가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2010년 4.28 총파업은 금속노조의 위기가 위험 수위에 올라섰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직 위기는 노조 간부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금속노조 대의원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기업 지부 대의원들 중 46%에 달하는 숫자가 기업별노조가 더 좋았다고 대답했다. 대기업 노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금속노조에 대해 중소제조업 간부들 역시 차라리 4만 금속노조가 나았다는 체념도 심심치 않게 이야기된다. 기업별 종업원 의식을 넘어 계급적 노동자 단결을 위해 만든 금속노조가 오히려 상호간의 불신만 만들어 내고 있는 모양새다.
지금까지 금속노조의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은 완성차 기업들과 중소납품업체 기업들을 한 곳에 모아 공동의 산업 의제를 다루겠다는 중앙교섭 성사 투쟁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현재 보다시피, 중앙교섭은 2003년부터 중소사업장 2만 조합원의 교섭으로 그쳐있고, 완성차 지부들은 여전히 진정성있는 투쟁으로 자본가들을 중앙교섭 장소로 끌고 오겠다는 결의가 부족한 상태다.
이러한 이유로 6기 금속노조 집행부는 2009년 말부터 조직발전특위를 꾸려 조직, 교섭, 교육, 재정체계를 재정비하고 조직 발전의 새로운 경로를 마련하겠다고 결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의 상황은 예전에 제기된 논점을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직체계의 경우 완성차 기업 지부의 지역 지부 편제 문제가 해답없이 공전되고 있고, 교섭 체계 역시 완성차 기업들의 중앙교섭 참가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지,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산별 정신에 걸맞은 교섭 체계를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
사실 위의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을 수는 없다. 조직 체계도, 교섭 체계도 초정세적인 이상적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 교섭은 자본의 상황과 노동자의 주체적 상황이 반영되는 정세적 결과물이지, 순논리적 과정만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 체계와 교섭 체계에 대한 설계는 2010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 변화, 노동자운동의 객관적 상태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예측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세를 논의의 중심에 둔다면 첫 번째 고려 사항은 장기간의 저성장 가능성과 재벌 대기업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수탈 구조일 것이다. 당연히 금속노조가 지금까지 추진해왔고, 일부에서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유럽식 조직, 협약 모델들은 잠시 접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황금기에 성립한 모델이 현재 정세에 적합할 수는 없다. 1990년대 초 경제 위기 기간 독일에서 유행한 고용-생산성-임금감축 협약 역시 마찬가지다. 금융 세계화 방식의 거품 성장 등락 속에서 일시적으로 가능했고, 국내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수탈 구조가 덜 했던 독일 산업구조에서 가능했던 협약이 한국 산업구조에서 작동할 리 없다.
저성장 시대의 금속노조는 현대기아 재벌과 금속노조 양자 간의 대결 구도에 대해 고민을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기아 기업과 현대기아 노조의 싸움이 아니라 산별 금속노조와 현대기아 자본과의 싸움을 사회적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저성장 시대의 노동자 피해를 최소화하고, 수직적 산업 구조에서 금속 노동자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의 중심에 현대기아 자본이 있다. 성장의 열매는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락의 고통은 중소제조업 노동자에게 전가하며, 조그만 실리의 분배로 완성차 노동자들을 포섭하는 현대기아 자본에 대한 싸움은 단순한 한 기업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특히 앞으로 많은 고통 전가가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거래 근절, 자동차 산업 내 노동소득분배율 상향 조정을 위한 사회적 기금 조성, 모비스, 위아, 동희오토 등 무노조 공장에서 노무관리정책 변화, 사내하청노동자의 정규직화 등 지금까지 노조 내에서 이야기되었던 여러 의제들이 있다. 이러한 의제들을 공허한 정책 선전 수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성차지부, 지역지부의 부품업체지회, 금속노조 중앙이 함께 실천적으로 책임지는 투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저성장 국면에서의 손실을 현대기아 자본 스스로가 지게하고, 이 과정 속에서 완성차 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사업장 노동자로 분열되어 있는 금속노조의 단결력을 높여내는 것이다. 현대기아의 문제를 현대기아 기업지부가 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방치하지 않고 금속노조 차원의 대응을 조직하는 것이 형식적 중앙교섭보다 오히려 내용 있는 산업 차원의 교섭,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은 현재 조직발전특위에서 진행 중인 논의의 중심 축을 상층의 조직 교섭 설계가 아니라 명쾌한 투쟁 의제의 개발과 조합원에 대한 동의 지반 확대 방안으로 바꿔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과 교섭은 투쟁의 수준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본과의 실천적 대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번 경제 위기가 보여준 한국 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대기업(주로 재벌 그룹의 계열사)들의 수익성이 국민 경제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경제위기 여파로 한국경제는 2008년 4/4분기부터 2009년 2/4분기까지 3분기 연속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취업자 수 역시 2008년 7월부터 하락하기 시작해 2010년 3월까지도 경제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제조 대기업들은 반대로 사상 유례 없는 이익을 기록했는데, 삼성전자의 경우 2009년 당기순이익이 9조 6천억 원으로 전년보다 74% 증가했고, 현대차 역시 당기순이익이 2조 9천억 원으로 전년보다 104% 상승했다.
이들 대기업들이 경제 위기 와중에서도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던 원인은 환율효과로 인한 수출 증가,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 마케팅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경제 위기를 명분으로 진행한 과감한 비용 절감 운동이 주요했다. 단적인 예로 현대차는 2009년 매출이 전년에 비해 1% 가량 감소했지만, 오히려 과감한 비용 절감을 통해 영업이익(매출액에서 생산 비용과 판매 및 관리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돈)은 19% 가까이 증가했다.
한국은행이 상장 제조업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주로 재벌 그룹의 계열사인 이들 기업들의 2009년 매출액은 0.1% 증가하는데 그쳤지만 매출액영업이익률(이 비율이 1%라면 100원 판매를 했을 때 이윤이 1원이라는 것)은 전년보다 0.2% 포인트 증가하며, 수익성이 전반적으로 좋아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즉, 이들 기업들이 여러 방법으로 생산과 판매에 필요한 비용을 크게 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제조 대기업들의 비용 절감이 생산성 향상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용을 외부로 전가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대기업들의 수익성 향상이 부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중소 하청납품업체에 대한 비용전가를 들 수 있다. 대기업들은 높은 수준의 신축적 납품 물량 조절을 통해 매출 감소로 인한 제고 비용을 납품하청업체에게 떠넘기는 것은 물론, 단가 인하, 결제기간 연장, 부당대금감액 등을 강요했다. 자동차 중소 부품 업체의 생산지수는 대기업들이 제고 조절에 나선 2008년 하반기부터 크게 감소하기 시작해 2009년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월 최고 48%까지 감소했다. 또한 산업연구원이 지난 2009년 6월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소납품업체들의 20.6%가 부당발주취소를 경험했고, 15%내외의 업체들이 지연이자 미지급, 인수 지연, 대금 부당 감액 등을 경험했다.
대기업들의 중소기업에 대한 비용 전가는 중소기업의 수익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감소로 이어진다. 자동차 기업의 예를 보자. 단위생산물 당 노동비용을 나타내는 단위노동비용을 보면 자동차 관련 제조업 기업들은 단위노동비용을 2009년 3/4분기는 전년 동기에 비해 30.4%, 4/4분기에는 20.3% 줄였다. 2009년 완성차 업체들의 노동비용이 지엠대우를 제외하고 모두 오른 것을 감안하면, 이 삭감분 대부분은 부품하청업체들에게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완성차 업체의 경우 지엠대우를 제외하면, 현대자동차의 노동비용은 전년에 비해 3천 4백억 원, 기아차 7백억 원, 르노삼성 2백억 원 늘어났다.
경제 위기는 기회? 국민경제 착취형 재벌과 제조업 노동자
제조업 노동자 중 300인 미만 중소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비율은 76%이며, 재벌 계열사가 아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비중은 90% 이상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재벌 대기업들의 비용 전가로 인한 피해는 제조업 노동자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실 경제위기는 과거에도 재벌 대기업에게는 위기가 아니라 도약의 기회였다. 두 자리 수 경제성장을 계속해오다 성장률이 5%대까지 떨어져 경제위기론이 팽배하던 1992년, 중소기업들은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12% 하락하는 위기에 내몰렸지만, 이 와중에도 대기업들은 16%에 가까운 영업이익 증가를 기록했다. 1998년 경제위기와 극복 과정은 더욱 극적이었다. 재벌들의 무리한 해외차입이 외환 위기의 중요한 이유였지만, 대우, 한보 등 일부 재벌들을 제외하면, 1998년 외환위기는 재벌들에게 정부 돈으로 부채를 털어내는 기회였다. 1998년 위기 이후 대기업들의 매출 규모는 세 배, 이익 규모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2009년 위기 과정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사상 최대의 이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재벌들에게 기회였던 경제위기는 다수 노동자에게 더 많은 착취를 구조적으로 감내하게 하는 경제적 재앙이었다. 특히 중소 제조업 노동자들에게 그러했는데, 위기 때마다 재벌 대기업들의 비용을 흡수하는 완충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300인 이상 제조업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 총액에 비해 300인 미만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총액은 1993년 73% 수준이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2001년 65%까지 하락했다. 그리고 세계금융위기가 닥치기 전 2008년 1/4분기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비율은 68% 수준으로 2001년에 비해 개선되었으나 경제 위기 이후인 2009년 4/4분기 다시 64% 수준으로 하락했다. 대기업들은 자기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약간의 타협을 통한 포섭을 도모했지만, 기업 외부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수탈을 감행했다.
중소 제조업 노동자에 대한 수탈은 공간적으로 보면 산업단지(공단)를 통해 이뤄졌다. 생산 집적을 통해 효율성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산업단지는 실상 재벌 대기업들의 하청 배후지 역할을 한다. 완성차 기업들의 배후지인 남동, 울산, 창원 등의 산업단지들, 전자 대기업의 배후지인 구미, 시화, 반월, 구로 등의 산업단지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산업단지들은 대부분 법정 최저임금에 약간의 수당이 더해지는 정도로 임금 수준이 통제된다. 예를 들면 통계청에서 조사한 2006년 중소규모 사업장의 평균 월 임금 총액은 212만 원인데,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조사한 산업단지 내 월 평균 임금은 남동 127만 원, 반월 131만 원, 시화 119만 원, 구미 177만 원에 불과하다. 국가산업단지 중 통계청 평균 임금 이상을 받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제조 산별을 지향하는 금속노조의 자기 모순
한편 금속노조의 조건은 한국 제조업 산업 구조와 비대칭적이다. 제조업 노동자는 300인 미만 사업장과 이상 사업장에 7:3 정도로 분포되어 있는데 반해 금속노조 조합원의 비율은 역으로 1:9 이다. 제조업 수직 구조의 정점에 있는 완성차 조합원이 전체의 65%에 달하고 노조 사업의 방향 설정 및 투쟁 민감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대의원 비율도 완성차 조합원이 61%를 차지한다. 노조 조직률 역시 제조업 노동자 전체의 4%대에 불과하여 절대적으로 낮다. 특히 완성차 업체의 배후지에 존재한 공단에 대한 조직률이 매우 낮은데, 한 예로 광주 기아 공장 근처에 있는 대불산업단지의 조직률은 0.4%에 불과하다.
이러한 조직 조건으로 인해 금속노조는 산업 내 평등을 위한 투쟁보다 기업 내 타협을 구조적으로 선호한다. 2006년 완성차 노조를 포함한 15만 금속노조가 출범했지만, 대의원대회 결의에도 불과하고 조합 내 65%를 차지하는 완성차 지부들이 기업 지부 이름으로 기업노조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 중 하나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들 완성차 노조가 산별노조 차원의 통제를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산업 내 임금격차 축소, 주간연속2교대제 등의 노동 과정 변화, 산업 차원의 공동 의제를 교섭하기 위한 중앙교섭 쟁취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이들 기업 지부들이 자신의 과제로 진정성있게 투쟁한 적은 없었다. 2007~2009년까지 현대 기아 지엠대우 등의 중앙교섭 참가를 추진했지만, 이들 기업 지부가 실상 얻어낸 것은 기약 없는 참가 확약서에 불과했고 올해 중소사업장 노조의 사활이 걸린 노조법 개악 등에 맞서 결의한 4월 총력투쟁(총파업)에도 이들 완성차 노조들은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변화한 세계 정세, 더 이상 봉합 불가능한 금속노조의 문제점들
문제는 앞으로 제조 산별을 지향하는 금속노조가 지금처럼 내부 문제를 봉합하며 그럭저럭 버틸 여지가 더욱 줄어든다는 것이다. 바로 경제 상황 때문이다.
2009년 세계 경제 위기는 2010년 들어 다소 완화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2009년 위기의 원인이었던 통제 불가능한 금융 자본과 자산 시장 거품을 통한 부채 소비, 달러 발권 이익을 통해 유지되던 미국의 무역수지 재정수지 적자, 생산 기술 혁신을 대체한 노동 수탈형 비용 절감 운동 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탓이다. 세계 경제 회복을 이끌고 있는 신흥 시장에서의 소비 증가는 이들 국가들의 자산 시장 거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 중이고, 중국 인도 등에서 등장한 새로운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세계 주요 제조업 기업들의 이윤을 떠받쳤다. 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은 지난 2년간 미래의 노동자 수입과 복지를 담보로 쏟아 부은 각국 정부의 경기부양, 구제 금융으로 자신들의 부실 자산을 털어냈다. 자산 시장 거품, 정부 재정 적자를 통한 수입 보전, 기술 혁신 없는 노동 수탈형 비용 절감 운동이 형태와 장소만 달리 하여 이전과 똑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하반기와 같은 추락이 아니더라도 장기간의 저성장이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2000년대의 고성장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인데, 금융 시장의 투기성 신용 확장으로 인해 실제 균형보다 높은 수준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근거다. 예를 들면 각종 파생금융상품을 통해 은행이 가계에 대출을 제공하고, 가계는 수익률이 보장된 부동산에 투자를 하면 가계는 아무런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서도 대출금리와 부동산 수익률 격차만큼 소비를 즐길 수 있다. 소비가 이렇게 늘면, 생산도 늘어난다. 하지만 이 소비는 가상의 부동산 가치를 근거로 하고 있는 만큼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가계는 파산하고 소비는 급감한다. 2000년 내내 이런 과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예전과 같은 자산 시장 가격 상승이 불가능하다면, 예전 수준의 소비-생산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제 회복은 이전 수준의 성장이 아니라 저성장 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금속노조의 성장은 2000년대 세계 거품 성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2001년 3만 금속노조 출범, 2005년 중앙교섭 성사와 사용자단체 구성, 2006년 완성차 노조를 포함한 15만 금속노조 출범까지 금속노조는 부족하게나마 조직적 성장을 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은 큰 틀에서 보자면 세계 거품 성장을 덕에 가능했던 한국 제조업의 활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조 대기업들이 연 10~30%에 달하는 수출 증가를 달성했는데, 수출 증가에 힘입어 2002년부터 경제위기 직전인 2007년까지 제조업 매출액 증가율은 연 5~20% 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매출 증가는 파업으로 인한 손해 비용도 높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교섭력 향상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물론 매출 증가로 인한 부의 분배는 매우 불균등했다. 대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은 6%에서 9%까지 상승했지만, 중소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은 매년 감소하여 2002년 5.3%에서 2007년 4.5%까지 하락했다. 같은 기간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 격차도 크게 상승하여 중소기업 노동자의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임금 비율은 2002년에 비해 2007년 6% 포인트 더 벌어졌다.
2009년 경제위기에서 확인했듯이 장기간의 저성장과 위기가 반복된다면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수탈, 금속노조 내 대기업, 중소기업 조합원 간의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다. 지불 능력이 있는 대기업 노조는 임금조건 방어를 위해 더욱 기업 내 타협에 목을 맬 것이고, 지불 능력이 약화된 자본과 대기업들의 각종 비용 삭감 압박에 맞서 싸워야 하는 중소기업 노조는 더욱 힘겨운 투쟁으로 내몰릴 것이다. 옷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금속노조라는 옷이 단결의 고리가 없어진 조합원들을 묶어 세울 수는 없다. 2010년 이후 경제 상황은 금속노조의 문제점을 임계치 너머로 밀어 붙일 것이다.
조직 설계에서 투쟁 의제로 조직 발전 논의를 바꿔야 한다.
2009년 기업지부 해산 실패와 쌍용차 파업 투쟁 패배, 그리고 완성차 업체 참가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2010년 4.28 총파업은 금속노조의 위기가 위험 수위에 올라섰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직 위기는 노조 간부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금속노조 대의원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기업 지부 대의원들 중 46%에 달하는 숫자가 기업별노조가 더 좋았다고 대답했다. 대기업 노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금속노조에 대해 중소제조업 간부들 역시 차라리 4만 금속노조가 나았다는 체념도 심심치 않게 이야기된다. 기업별 종업원 의식을 넘어 계급적 노동자 단결을 위해 만든 금속노조가 오히려 상호간의 불신만 만들어 내고 있는 모양새다.
지금까지 금속노조의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은 완성차 기업들과 중소납품업체 기업들을 한 곳에 모아 공동의 산업 의제를 다루겠다는 중앙교섭 성사 투쟁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현재 보다시피, 중앙교섭은 2003년부터 중소사업장 2만 조합원의 교섭으로 그쳐있고, 완성차 지부들은 여전히 진정성있는 투쟁으로 자본가들을 중앙교섭 장소로 끌고 오겠다는 결의가 부족한 상태다.
이러한 이유로 6기 금속노조 집행부는 2009년 말부터 조직발전특위를 꾸려 조직, 교섭, 교육, 재정체계를 재정비하고 조직 발전의 새로운 경로를 마련하겠다고 결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의 상황은 예전에 제기된 논점을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직체계의 경우 완성차 기업 지부의 지역 지부 편제 문제가 해답없이 공전되고 있고, 교섭 체계 역시 완성차 기업들의 중앙교섭 참가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지,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산별 정신에 걸맞은 교섭 체계를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
사실 위의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을 수는 없다. 조직 체계도, 교섭 체계도 초정세적인 이상적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 교섭은 자본의 상황과 노동자의 주체적 상황이 반영되는 정세적 결과물이지, 순논리적 과정만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 체계와 교섭 체계에 대한 설계는 2010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 변화, 노동자운동의 객관적 상태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예측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세를 논의의 중심에 둔다면 첫 번째 고려 사항은 장기간의 저성장 가능성과 재벌 대기업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수탈 구조일 것이다. 당연히 금속노조가 지금까지 추진해왔고, 일부에서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유럽식 조직, 협약 모델들은 잠시 접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황금기에 성립한 모델이 현재 정세에 적합할 수는 없다. 1990년대 초 경제 위기 기간 독일에서 유행한 고용-생산성-임금감축 협약 역시 마찬가지다. 금융 세계화 방식의 거품 성장 등락 속에서 일시적으로 가능했고, 국내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수탈 구조가 덜 했던 독일 산업구조에서 가능했던 협약이 한국 산업구조에서 작동할 리 없다.
저성장 시대의 금속노조는 현대기아 재벌과 금속노조 양자 간의 대결 구도에 대해 고민을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기아 기업과 현대기아 노조의 싸움이 아니라 산별 금속노조와 현대기아 자본과의 싸움을 사회적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저성장 시대의 노동자 피해를 최소화하고, 수직적 산업 구조에서 금속 노동자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의 중심에 현대기아 자본이 있다. 성장의 열매는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락의 고통은 중소제조업 노동자에게 전가하며, 조그만 실리의 분배로 완성차 노동자들을 포섭하는 현대기아 자본에 대한 싸움은 단순한 한 기업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특히 앞으로 많은 고통 전가가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거래 근절, 자동차 산업 내 노동소득분배율 상향 조정을 위한 사회적 기금 조성, 모비스, 위아, 동희오토 등 무노조 공장에서 노무관리정책 변화, 사내하청노동자의 정규직화 등 지금까지 노조 내에서 이야기되었던 여러 의제들이 있다. 이러한 의제들을 공허한 정책 선전 수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성차지부, 지역지부의 부품업체지회, 금속노조 중앙이 함께 실천적으로 책임지는 투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저성장 국면에서의 손실을 현대기아 자본 스스로가 지게하고, 이 과정 속에서 완성차 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사업장 노동자로 분열되어 있는 금속노조의 단결력을 높여내는 것이다. 현대기아의 문제를 현대기아 기업지부가 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방치하지 않고 금속노조 차원의 대응을 조직하는 것이 형식적 중앙교섭보다 오히려 내용 있는 산업 차원의 교섭,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은 현재 조직발전특위에서 진행 중인 논의의 중심 축을 상층의 조직 교섭 설계가 아니라 명쾌한 투쟁 의제의 개발과 조합원에 대한 동의 지반 확대 방안으로 바꿔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과 교섭은 투쟁의 수준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본과의 실천적 대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