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조끼를 입으면 힘이 난다는 그녀들과 함께
이화여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이화여대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조직하겠다고 노동조합, 학생, 지역의 단체들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즈음이었다. 학교와 용역회사는 우리 활동을 알아 차렸는지 현장의 큰 바람이었던 주 5일제를 시행하겠다며 사람들을 흔들기 시작했고, 막판 조직화 사업은 탄력을 잃은 채 휘청거렸다. 그러나 2010년 1월 재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관리자의 말이 ‘사탕발림’이었음이 드러나자 현장은 술렁였다. 그리고 더 이상 관리자와 학교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며 8명이 첫 주체모임에 참가하기로 했다.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곳에 모임장소를 잡았지만, 그녀들은 관리자의 눈을 피해, 퇴근하는 동료들의 눈을 피해, 빙글빙글 같은 길을 맴돌다 30분 늦게 모임장소에 나타났다. 반신반의하는 그녀들을 설득한 끝에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가입원서를 받기로 했다. 8명은 금세 2배로 늘어났고, 그 2배는 또 금세 배로 불어났다. 하지만 그 뒤로 주체모임을 두서너 차례하고, 가입자가 30명이 되자 더 이상 조합원은 늘지 않았다. 비밀리에 조직 확대가 어렵겠다는 판단 하에 우리는 1월 27일을 디데이로 잡고 출범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입 통보와 함께 출범식 공문을 보냈다. 보통 ‘무시’로 일관하는 다른 학교와 달리 원청인 이화여대는 이례적으로 일일이 공문에 회신하며 “학교와 상관없는 용역회사 노동자들이기에 일체의 장소사용을 금하며 행사 강행 시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출범식 당일 원래 실내 장소로 준비하고 있던 곳은 학교 측에 의해 이미 봉쇄됐고, 우리는 할 수 없이 야외 출범식을 준비했다. 학교는 교직원들을 총동원하여 음향 등의 집회 장비를 물리력으로 철수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격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용역회사 현장소장들은 퇴근 시간 이전부터 출범식 장소에 나와 매서운 눈초리로 행사에 참가하려고 하는 조합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날씨는 비가 오는 것도 모자라 급격한 기온 저하와 함께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주춤거렸다. 모든 상황이,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궂은 날씨에도 서경지부 조합원들은 눈과 비를 뚫고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여줬다. 출범 당시 이대 조합원들은 30여 명뿐이었지만 지부와 여러 연대 대오로 학생문화관 앞 광장은 3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연대대오의 규모에 자신감을 얻은 조합원들이 가장 앞자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잠시도 앉아 있기 힘든 추위였지만, 1시간이 넘게 결연하게 그리고 절박하게 출범식을 진행했다. 출범식 이후 분회장님은 용역회사 소장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며 신이 났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많이 받았다. 조합원들은 궂은 날씨에 자신들을 야외로 내몬 학교와 용역회사에 점차 분노하기 시작했다.
교섭을 둘러싼 투쟁은 쉽지 않았다. 학교는 ‘용역회사와 협의할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용역회사는 ‘이미 학교와의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교섭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출범식 이후에도 학교는 계속해서 총회 장소를 불허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본관 앞 계단이나 학생문화관 로비에 앉아 총회를 진행했고, 총회는 매번 학교와 용역회사를 규탄하는 결의대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조직률이 취약했던 한 업체의 부당노동행위는 노동조합의 강력한 항의에도 멈출 줄 몰랐다. 교섭이 7차례쯤 진행되고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던 즈음 우리는 조금 더 잘 준비된 조합원 총회를 하기로 했다. 총회를 마치고, 학교를 한 바퀴 돌며 선전전도 진행하기로 했다. 최저임금 집회 때 볼 수 있는 빨간 조끼도 입었다. 구호도 더 많이, 더 열심히 외쳤다. 총회를 마치고 본관 앞으로 행진했다. 이화여대가 책임지고 우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이번엔 현장소장실 앞으로 갔다.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용역회사를 규탄한다고 소리쳤다. 원래 여기까지가 사전에 논의된 계획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소장을 잡으러 가자고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쳐들어갈 기세였다. 잠시 당황했지만, 조합원들의 투쟁의 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대오는 현장소장실로 들어갔고 이미 현장소장은 자리를 피한 뒤였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조합원들이 자리를 깔고 앉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투쟁을 정리했다.
그다음 주, 교섭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현장소장의 부당노동행위도 계속됐다.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우리는 이번에도 본관 앞을 거쳐 현장소장실로 항의방문을 갔다. 현장소장은 자리에 없었고, 조합원들 역시 이번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우리는 현장소장실 옆 잔디밭에 앉아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현장소장을 기다렸다. 현장소장은 비조합원들과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 했으나 현장소장은 목을 빳빳이 세우며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이었다. 분노에 찬 조합원들은 ‘이런 용역회사와는 계약을 해지해야 한다’며 본관으로 달려가자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합원들은 앞다투어 본관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또 예정에 없던 본관 점거 농성이 됐다. 퇴근시간만 되면 가족들 밥해주러 가야 한다며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던 그녀들이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 되도록 흐트러짐 없이 대오를 지키며 투쟁을 즐기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구호를 외쳤고, 그동안 ‘너무 높으신 분들이라 눈 한번 못 마주쳤다’던 교직원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녀들에게 그 순간은 너무나 절박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몇 번의 투쟁은 적당한 선에서 투쟁전술을 고민하던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용역회사 이사와 현장소장에게 재발방지 약속을 받고 투쟁을 정리하는데, 한 조합원이 다가왔다.
“다음에도 이 조끼 꼭 입어요. 희한하게 이 빨간 조끼를 입으니깐 구호도 더 크게 외쳐지고, 힘이 나네. 진짜 힘이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통쾌하고 신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집에 돌아가는 조합원의 뒷모습을 보며 오히려 더 큰 반성을 하게 됐다.
얼마 전 청소노동자 행진 선포 기자회견에서 이화여대 분회장님은 이런 말을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유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슬프다고. 노조 만들기 전에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했어요. 유령처럼 살았지만 유령인지도 몰랐던 거죠. 근데 이렇게 알고 나서 보니깐 우린 진짜 유령이었고, 투명 인간 취급받았던 거예요. … 내가 10년만 젊었으면 이런 활동 진짜 열심히 할 텐데, 아직도 권리를 찾지 못하고 유령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지금은 그게 너무 아쉬워요…”
미화 조합원들은 언제나 조직적인 투쟁에서 모범을 보인다. 어느 집회에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가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표현대로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며 노동조합을 만났고, 노동조합을 만나서 일하는 게 너무 즐겁다는 그녀들에게 노동조합은 삶의 활력소이다. 또한 가장 절박한 순간 노동조합을 만났기 때문에 누구보다 노동조합의 소중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기에 구구절절한 연설과 교육 없이도 몸소 연대투쟁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활동가들이 가끔 관성적인 태도로 그녀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부에서 미화 간부교육을 준비하며 이런 집중적이고 장기간의 교육 프로그램은 ‘아줌마들이라 안 된다, 힘들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실제로 생계를 책임지기도 하고, 가사도 도맡아 해야 하는 그녀들의 조건 속에서 8개월짜리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익숙지 않은 토론과 발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데에도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육은 한 회, 한 회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큰 감동을 얻어갈 만큼 생동감 있게 진행됐고, 교육을 이수한 간부들은 현장에서 훌륭히 자기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다.
이제 그녀들을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희망으로 바라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보다 능동적으로 우리의 투쟁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얼마 전 있었던 청소노동자행진에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았다. 발언을 준비하고, 노래를 직접 개사해서 공연을 준비하고, 그 순간 누구보다 집회를 즐기고 있는 그녀들 하나하나 참으로 진정한 활동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대분회 간부들은 이번엔 어느 학교 조직하러 가냐며 우리가 할 일은 없냐며 항상 묻는다. 더 많은 청소노동자를 조직하여 제대로 된 싸움을 준비하자는 그녀들. 나에게 항상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만, 나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워 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들로부터 우리 투쟁의 새로운 희망을 마음껏 상상해본다. 빨간 조끼를 입고,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투쟁을 외치는 그녀들과 함께 오늘도… 투쟁!!!
학교에 가입 통보와 함께 출범식 공문을 보냈다. 보통 ‘무시’로 일관하는 다른 학교와 달리 원청인 이화여대는 이례적으로 일일이 공문에 회신하며 “학교와 상관없는 용역회사 노동자들이기에 일체의 장소사용을 금하며 행사 강행 시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출범식 당일 원래 실내 장소로 준비하고 있던 곳은 학교 측에 의해 이미 봉쇄됐고, 우리는 할 수 없이 야외 출범식을 준비했다. 학교는 교직원들을 총동원하여 음향 등의 집회 장비를 물리력으로 철수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격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용역회사 현장소장들은 퇴근 시간 이전부터 출범식 장소에 나와 매서운 눈초리로 행사에 참가하려고 하는 조합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날씨는 비가 오는 것도 모자라 급격한 기온 저하와 함께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주춤거렸다. 모든 상황이,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궂은 날씨에도 서경지부 조합원들은 눈과 비를 뚫고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여줬다. 출범 당시 이대 조합원들은 30여 명뿐이었지만 지부와 여러 연대 대오로 학생문화관 앞 광장은 3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연대대오의 규모에 자신감을 얻은 조합원들이 가장 앞자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잠시도 앉아 있기 힘든 추위였지만, 1시간이 넘게 결연하게 그리고 절박하게 출범식을 진행했다. 출범식 이후 분회장님은 용역회사 소장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며 신이 났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많이 받았다. 조합원들은 궂은 날씨에 자신들을 야외로 내몬 학교와 용역회사에 점차 분노하기 시작했다.
교섭을 둘러싼 투쟁은 쉽지 않았다. 학교는 ‘용역회사와 협의할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용역회사는 ‘이미 학교와의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교섭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출범식 이후에도 학교는 계속해서 총회 장소를 불허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본관 앞 계단이나 학생문화관 로비에 앉아 총회를 진행했고, 총회는 매번 학교와 용역회사를 규탄하는 결의대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조직률이 취약했던 한 업체의 부당노동행위는 노동조합의 강력한 항의에도 멈출 줄 몰랐다. 교섭이 7차례쯤 진행되고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던 즈음 우리는 조금 더 잘 준비된 조합원 총회를 하기로 했다. 총회를 마치고, 학교를 한 바퀴 돌며 선전전도 진행하기로 했다. 최저임금 집회 때 볼 수 있는 빨간 조끼도 입었다. 구호도 더 많이, 더 열심히 외쳤다. 총회를 마치고 본관 앞으로 행진했다. 이화여대가 책임지고 우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이번엔 현장소장실 앞으로 갔다.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용역회사를 규탄한다고 소리쳤다. 원래 여기까지가 사전에 논의된 계획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소장을 잡으러 가자고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쳐들어갈 기세였다. 잠시 당황했지만, 조합원들의 투쟁의 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대오는 현장소장실로 들어갔고 이미 현장소장은 자리를 피한 뒤였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조합원들이 자리를 깔고 앉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투쟁을 정리했다.
그다음 주, 교섭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현장소장의 부당노동행위도 계속됐다.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우리는 이번에도 본관 앞을 거쳐 현장소장실로 항의방문을 갔다. 현장소장은 자리에 없었고, 조합원들 역시 이번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우리는 현장소장실 옆 잔디밭에 앉아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현장소장을 기다렸다. 현장소장은 비조합원들과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 했으나 현장소장은 목을 빳빳이 세우며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이었다. 분노에 찬 조합원들은 ‘이런 용역회사와는 계약을 해지해야 한다’며 본관으로 달려가자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합원들은 앞다투어 본관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또 예정에 없던 본관 점거 농성이 됐다. 퇴근시간만 되면 가족들 밥해주러 가야 한다며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던 그녀들이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 되도록 흐트러짐 없이 대오를 지키며 투쟁을 즐기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구호를 외쳤고, 그동안 ‘너무 높으신 분들이라 눈 한번 못 마주쳤다’던 교직원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녀들에게 그 순간은 너무나 절박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몇 번의 투쟁은 적당한 선에서 투쟁전술을 고민하던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용역회사 이사와 현장소장에게 재발방지 약속을 받고 투쟁을 정리하는데, 한 조합원이 다가왔다.
“다음에도 이 조끼 꼭 입어요. 희한하게 이 빨간 조끼를 입으니깐 구호도 더 크게 외쳐지고, 힘이 나네. 진짜 힘이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통쾌하고 신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집에 돌아가는 조합원의 뒷모습을 보며 오히려 더 큰 반성을 하게 됐다.
얼마 전 청소노동자 행진 선포 기자회견에서 이화여대 분회장님은 이런 말을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유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슬프다고. 노조 만들기 전에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했어요. 유령처럼 살았지만 유령인지도 몰랐던 거죠. 근데 이렇게 알고 나서 보니깐 우린 진짜 유령이었고, 투명 인간 취급받았던 거예요. … 내가 10년만 젊었으면 이런 활동 진짜 열심히 할 텐데, 아직도 권리를 찾지 못하고 유령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지금은 그게 너무 아쉬워요…”
미화 조합원들은 언제나 조직적인 투쟁에서 모범을 보인다. 어느 집회에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가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표현대로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며 노동조합을 만났고, 노동조합을 만나서 일하는 게 너무 즐겁다는 그녀들에게 노동조합은 삶의 활력소이다. 또한 가장 절박한 순간 노동조합을 만났기 때문에 누구보다 노동조합의 소중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기에 구구절절한 연설과 교육 없이도 몸소 연대투쟁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활동가들이 가끔 관성적인 태도로 그녀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부에서 미화 간부교육을 준비하며 이런 집중적이고 장기간의 교육 프로그램은 ‘아줌마들이라 안 된다, 힘들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실제로 생계를 책임지기도 하고, 가사도 도맡아 해야 하는 그녀들의 조건 속에서 8개월짜리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익숙지 않은 토론과 발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데에도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육은 한 회, 한 회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큰 감동을 얻어갈 만큼 생동감 있게 진행됐고, 교육을 이수한 간부들은 현장에서 훌륭히 자기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다.
이제 그녀들을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희망으로 바라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보다 능동적으로 우리의 투쟁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얼마 전 있었던 청소노동자행진에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았다. 발언을 준비하고, 노래를 직접 개사해서 공연을 준비하고, 그 순간 누구보다 집회를 즐기고 있는 그녀들 하나하나 참으로 진정한 활동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대분회 간부들은 이번엔 어느 학교 조직하러 가냐며 우리가 할 일은 없냐며 항상 묻는다. 더 많은 청소노동자를 조직하여 제대로 된 싸움을 준비하자는 그녀들. 나에게 항상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만, 나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워 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들로부터 우리 투쟁의 새로운 희망을 마음껏 상상해본다. 빨간 조끼를 입고,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투쟁을 외치는 그녀들과 함께 오늘도…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