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30주년, 열사들의 이야기
* 들불의 초상 윤상원 평전, 도서출판 풀빛, 1991
* 광주의 넋 박관현, 사계절, 1987
1980년의 정세와 광주 민중 항쟁
1980년은 중요한 정세적 전환기였다. 세계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앞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었고, 남한에서도 냉전에 바탕을 둔 수출지향적 발전주의 전략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79년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을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정책 개혁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유신독재는 그저 박정희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기득권과 자본의 토대였고, 전 세계적인 자본의 축적 전략과 맞물린 것이었다. 남한의 자본은 냉전 하에서 미국의 원조와 시장개방을 약속 받아 외자 의존적, 수출 지향적 산업화를 추진했다. 국내적으로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농촌을 배후지로 삼아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감행하면서,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철저한 억압과 착취에 근거하여 이윤을 획득했다. 유신독재는 민중의 분노에 대한 일시적인 방패막이 되어 주었지만 경제위기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1979년 더 이상 기존의 체제가 자본의 이윤을 보장해주지 못함이 명백해졌다. 재벌 중심의 중화학 공업은 거대한 고정자본의 규모로 인해 이윤율의 급락과 무역수지 적자를 불러왔다. 중화학 공업 육성과 무역 수지를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채는 더욱 누적될 수밖에 없었는데, 국제경제적인 상황이 급변하면서 외채위기로 폭발하게 된다. 당시 세계는 금융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이자율과 달러 가치의 상승, 그리고 중동의 불안정에 기인한 유가의 상승이 겹치면서 이른바 3고 현상이 이어졌고 이는 더 이상 외자에 의존하면서 수출 지향적 산업을 육성하는 발전주의가 지속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위기와 혼란의 와중에 독재자는 죽었지만, 역 쿠데타를 감행한 신군부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계승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1990년대 IMF 위기를 통해 전면화되는 신자유주의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5월 광주의 혁명은 다시 태동하는 독재의 망령과 신군부에 대한 저항이었고, 동시에 막 뿌리내리려 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더 먼 길을 걸어왔어야 할 것이다.
들불야학과 광주의 민중운동
광주민중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산물이 아니며 부단히 그 생명력을 키워나갔던 광주의 민중운동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사건이다. 특히 들불야학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역운동, 문화운동을 매개하며 광주의 민중운동에 큰 획을 그었고 항쟁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각종 ‘지하유인물’과 ‘투사회보’ 발행, 항쟁 지도부 참여 등 광주민중항쟁의 중심에 서있었다.
들불야학은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세력과 당시 광주, 전남 최대의 공단지역인 광천동 공단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이다. 노학연대를 강조하며 학당의 존재와 방향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중간세대’로 정의했다. 들불야학의 기초를 쌓은 박기순과 윤상원은 광주, 전남 지역의 최초 위장취업자였으며, 학생출신 노동자와 현장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강하게 주장했다. “끝까지 민족민중해방, 인간해방의 새날을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 강학들의 선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들불야학은 단순히 교육 기회의 제공이 아니라,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매개하면서 변혁적인 전망을 조직해내는 민중교육운동이었다.
광주민중항쟁 시기, 들불야학과 출신 강학들은 언론의 침묵을 뚫고 민중의 눈과 귀가 되는 선전홍보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투사회보’로 이어지는 이러한 활동은 광주민중항쟁의 다양한 양상을 민중들에게 알려내는 것에서부터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고 대중을 조직하는 ‘지하신문’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또한 항쟁 말기에는 적극적으로 도청지도부에 참여하면서 끝까지 항쟁을 사수하였다.
들불야학은 노동계급성 강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한 지향을 고수하며 양심적 지식인운동 수준에 머물렀던 학생운동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 전후 기간을 거치며 활동가와 노동계급이 조직적으로 결합하는 경험을 습득하였고 광주, 전남 민중운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광주민중항쟁 이후 극심한 탄압에 시달리며 들불야학은 문을 닫게 되지만 역사적 경험과 교훈은 ‘무등야학’, ‘샛별야학’등으로 이어졌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양자 모두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들불로 산화한 윤상원
광주민중항쟁 이후, 투쟁의 곳곳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1950~1980). 들불야학의 기둥이자 광주 민중항쟁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도청 최후 항쟁에서 산화한 윤상원은 시골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교육을 위해 광주로 이사를 온 그는 삼수를 하며 전남대학교에 입학한다. 입학 후 군 생활까지 마치고 돌아온 윤상원은 연극과 테니스를 좋아하고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이미 정국은 민청학련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 내에서는 사회과학적 이론의 밑바탕 위에서 현실과 역사인식을 깨쳐나가고자 하는 욕구들이 다양한 학습모임의 창설로 이어졌고 윤상원 또한 사찰기관의 집요한 감시를 피하며 이 모임에 함께 했다.
대학을 졸업한 윤상원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은행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 시절의 고민과 실천을 이어가기 위해 결국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고, 29세의 나이로 들불 야학의 강학이 된다. 노동자로서의 삶과 강학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가며 윤상원은 박관현에게 민중운동의 계기를 심어주게 되는 노동자실태조사 사업이나 지역 주민, 빈민운동을 지원하며 들불 야학을 이끌었다.
유신의 막바지,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들불 야학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당국과 학교는 강학들의 부모님들까지 동원해가면서 강학들의 탈퇴를 종용하였고, 강제 휴학의 협박이 이어졌다. 많은 강학들이 집에 발이 묶이거나 연행되었다. 그 가운데 윤상원은 남은 소수의 강학을 추슬러 고군분투하였고 “들불인으로서 끝까지 민족민중해방, 인간해방의 새날을 위해” 싸우겠다는 신념을 공고히 해나갔다.
민중의 투쟁은 거센 탄압 속에서도 박정희의 죽음과 짧으나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1980년의 봄을 이끌어냈다. 1980년의 봄. 안개정국 속에서 학내 민주화 투쟁은 곧 공장으로, 농촌으로 번져나갔다. 윤상원은 현장론에 입각한 노동운동 쪽으로 기반을 굳혀나가고 있었고, 박관현을 설득하여 학내민주화를 위한 총학생회를 다시 세우는 한편 어용 노총에 맞선 새로운 전국노동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흔들리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 세력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지만, 이에 맞서는 전태일 열사의 후예들인 청계피복 노조의 투쟁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권, 생존권 투쟁이 뜨거운 4월을 극한적인 상황으로 달구었다. 그리고 4월 30일, 변혁 운동의 흐름을 대중 운동과 결합하고자 한국노총에 맞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이 결성되었고 윤상원은 광주 전남 지역을 대표해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5월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전국에서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집회와 충돌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광주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하나로 모여 14일부터 연 사흘간 대규모 대중 집회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신군부는 ‘5.17 계엄확대조치’를 통과시키고 군을 동원하여 재야인사들을 검거하고 대학을 점거해 나갔다.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5.17 계엄확대조치’ 등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에 전남대생들은 자연스럽게 학교로 모여들었으나 이미 학교를 점거하고 있던 계엄군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곧 거리에서는 학생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민주주의를 외치는 민중과 계엄군 사이의 일진일퇴 공방전을 펼쳤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이었다.
곤봉과 총칼을 앞세운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인해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광주에서 윤상원은 변혁적 전망과 체계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들불야학을 설득하여 조직 차원에서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하게 된다.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의 강학들은 시위 곳곳을 누비며 상황을 수집한 후 지하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하였고, 항쟁이 격해지기 시작하자 ‘투사회보’라는 제목의 지하신문을 배포하며 대중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항쟁의 방향설정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1970년대 시위에서 사라졌던 화염병을 제작, 공급하며 계엄군에 맞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첫 발포와 함께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거리, 이 끔찍한 비극과 동지의 시체 앞에서, 민중은 할 말을 잃은 채 자체적으로 무장을 해나갔다. 발포는 민중의 의지를 꺾고 두려움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분노와 용기로 이어졌다. 거리는 무장한 시민군과 쏟아져 나오는 민중으로 가득 찼다. 결국, 다시 하룻밤이 지나면서 계엄군은 광주 밖으로 완전히 후퇴했다. 윤상원은 해방광주에서 도청의 안팎을 오가며 투사회보를 배포하고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서 투쟁을 의미와 중요성을 독려하고 스스로 앞장서 민중 사이에서 총을 들고 도청을 사수했다. 사실상 지도부가 없었던 항쟁은, 항쟁 자체를 뒤로 돌릴 무조건적인 무장 해제를 추진하던 지역유지와 몇몇 학생대표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 사이에서 윤상원은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를 지켜내기 위해 지도부 내외에서 고군분투하였다. 그리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 순간 “역사 앞에 부끄럼 없이 서기 위해서 누군가가 목숨을 걸어야”한다며 피신 권유를 마다하고 도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윤상원. 그는 결국, 최후항전 중 투쟁의 들불이 되어 산화한다.
광주의 넋 박관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열사(1953~1982) 또한 영광군 시골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 동안 장기하사관으로 군인 생활을 하였지만,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박관현은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식 교육은 도시에서 시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을 따라 함께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어린 시절을 광주에서 보낸 박관현은 계엄령과 유신체제에 분노하며 법조인으로서의 사회봉사를 목표로 삼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원서를 내지만 2년 연속 낙방한 후 3년의 군 입대를 하게 된다. 1977년 여름, 군을 제대한 박관현은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대학입시에 몰두하고, 결국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합격한다.
두 손이 부르트도록 고생하신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수년 동안 노력하여 어렵게 합격한 법대였기에 박관현은 치기어린 신입생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느끼는 노장 신입생이었다. 현실에 대한 분노는 고시 합격 이후로 애써 미룬 채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파묻혀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박관현에게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학생운동에 몰입해있던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들과의 논쟁 속에서 자신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던 박관현은 결국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광주공단실태조사단에 들어가게 된다.
단순한 실태조사가 아니라 두 달여 동안 합숙하며 광천동 지역 노동자들과 밀접히 결합하고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조사단이었기에, 그동안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던 박관현은 초기에 많은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사단의 의의, 목적,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 수행 방법 등등에 대해 박관현과 여타 성원과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관현은 논쟁 속에서 합의를 받아들였고 그 누구보다도 조사단에 열성적으로 끝까지 참여하며 당시 광주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여나갔다. 당시 광주 지역 노동자들의 삶은 시대의 아픔 그 자체였다. 박관현의 동생, 친구들이 거기에 있었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조사단에서의 경험은 박관현을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이끌었다. 들불야학은 지역주민운동과의 밀접한 결합을 추진하며 공장노동자들을 만났고, 그들이 거주하는 광천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반상회나 청년회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들불 야학의 강학 박관현은 막 입학했던 당시의 고시 준비생의 박관현과는 상당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더 이상 민중운동을 타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법조인이 되어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막연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생 전체를 고스란히 야학과 노동자들의 투쟁에 쏟아 붓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은 대학에서 학원자율화 바람으로 이어졌다. 전남대에서도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총학생회 결성, 학도호국단과 학생상담지도관실 무력화 등이 추진되었다. 당시 박관현은 학원자율화를 위한 공청회에서 공술을 맡게 되었는데, 2~300명만이 공청회에 참석했음을 알고서 분노하며, 즉석에서 1시간 동안 시작을 미루고 학우들을 설득하자고 제안한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학원민주화에 이미 동의하고 있는 당신들이 아니다. 우리가 만나서 설득해야하는 1만 2천 전남대생이다. 박관현의 결연한 주장은 캠퍼스의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1시간 이후 다시 시작된 공청회에는 예정된 장소였던 대강당에 수용하기에 벅찬, 믿기 힘들 정도의 인파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결국 공청회는 옥외에 연단을 설치하고서야 재개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박관현은 학내민주화의 필연성과 민중해방의 시대적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여 큰 박수갈채를 받았고 전남대학교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학원 민주화의 흐름에 관여하던 박관현은 윤상원의 제안으로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 당선된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어용교수 퇴진 투쟁을 전개하고 민주적 권리 쟁취,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섰다. 5월에 들어서자 전남대 민족민주화성회를 지속적으로 교내에서 진행하고 5월 14일 경찰의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뚫고 도청으로 향했다. 1980년 들어 광주에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민주주의 쟁취를 요구하던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경찰은 그 행진을 막아내지 못한 채 지켜보아야만 했고 도청 앞 광장에 도착한 시위대는 노동자 농민의 구조적 수탈 정책 철회, 민주적 노동조합 설치 보장, 민족통일 논의, 민주일정 제시 등의 요구를 담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시위대의 열기는 하루 이틀에 꺼지지 않았고 5월 16일, 광주시 전역을 휩쓰는 거대한 횃불의 대행진이 진행되었다. 사흘 동안 도청 앞 광장은 민중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고 그동안 억눌렸던 민중의 분노 앞에서 공권력은 허무하게 꼬리를 내린 듯 했다.
그러나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미 5월 15일 무장한 군인들이 통행이 제한되던 교정을 통과해 갔고 17일 전국총학생회장단 회의가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대학은 완전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장악 당했고 박관현을 비롯한 학생회 지도부는 사태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몸을 숨겨야 했다. 18일 오전 화급히 은신처로 피했다가 잠시 광주를 빠져나갔던 박관현은 믿을 수 없는 참사를 전해 들으며 가슴을 쥐어 뜯어야만 했다. 박관현은 다시 광주로 잠입해보려 노력했으나, 이미 광주는 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고, 당국은 5월 18일 이전까지 광주의 봄을 이끌었던 그를 사로잡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다. 결국 그는 전국을 떠돌며 2년간의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박관현은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태조사단에서부터 야학 생활, 학원민주화 투쟁, 거리 시위 등은 그가 광주민중항쟁의 든든한 밑거름이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박관현은 1982년 체포되었지만 그 후에도 굽힘없이 교도소내의 만연하던 폭행, 민주투사의 의문사, 정치범에 대한 부당 차별에 초인적인 단식 투쟁으로 맞섰고 공판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를 역설했다. 결국 박관현은 1982년 10월 12일 쇠약해진 건강으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1980년 광주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탄식 투쟁 끝에 옥사했다는 소식은 광주 전역에 퍼졌고 경찰은 부검을 핑계로 박관현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그리고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와 추모가 일주일간 광주를 가득 매웠다.
우리의 5월
윤상원과 박관현. 이 둘 뿐만이 아니라 광주의 5월을 위해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총을 들었던 무수한 투사들 없는 광주 민중항쟁은 상상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은 이들이 희생으로 일군 민중운동의 분출구였다. 이 땅의 주인으로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며 노동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운동들. 험난한 탄압을 뚫고 광주, 전남 지역에 막 뿌리 내린 들불야학을 비롯해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광주민중항쟁의 산모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다시 새로운 사회운동의 순환으로 거듭 태어나 1987년 투쟁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 정세 속에서 억눌렸던 민중의 요구를 모아내고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했던 의식적인 노력들을 주목해야 한다. 들불야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민중항쟁 전후 기간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성장하며 서로 결합되어 갔다. 그리고 준비된 역량을 가지고 민중항쟁의 선두에서 투쟁했다. 그 노력들이 없었다면 광주민중항쟁의 패배는 우리에게 더욱 크나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새롭게 성장하던 민중운동의 역량은 억압을 뚫고 나아가기에는 많은 부분 부족했고, 결국 역량의 한계로 인해 철저한 패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정권의 잔인한 본질을 폭로했으며, 투쟁 역량을 쌓기 위한 의식적인 준비와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사건이었다. 그 패배 속에서 1980년대 운동의 노력들이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의 5월은 30년 전 광주에 붙들려 있어서도, 매년 열리는 호화로운 정부 공식기념행사에 매여 있어서도 안 된다. 우리의 5월은 민중해방을 위해 산화해간 열사들의 삶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늘 노래해왔던 것이 아닌가? “앞서서 나가리 산자여 따르라.” 열사들이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거리로 나선 그 순간, 패배는 영원히 유예되었다.
* 광주의 넋 박관현, 사계절, 1987
1980년의 정세와 광주 민중 항쟁
1980년은 중요한 정세적 전환기였다. 세계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앞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었고, 남한에서도 냉전에 바탕을 둔 수출지향적 발전주의 전략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79년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을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정책 개혁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유신독재는 그저 박정희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기득권과 자본의 토대였고, 전 세계적인 자본의 축적 전략과 맞물린 것이었다. 남한의 자본은 냉전 하에서 미국의 원조와 시장개방을 약속 받아 외자 의존적, 수출 지향적 산업화를 추진했다. 국내적으로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농촌을 배후지로 삼아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감행하면서,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철저한 억압과 착취에 근거하여 이윤을 획득했다. 유신독재는 민중의 분노에 대한 일시적인 방패막이 되어 주었지만 경제위기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1979년 더 이상 기존의 체제가 자본의 이윤을 보장해주지 못함이 명백해졌다. 재벌 중심의 중화학 공업은 거대한 고정자본의 규모로 인해 이윤율의 급락과 무역수지 적자를 불러왔다. 중화학 공업 육성과 무역 수지를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채는 더욱 누적될 수밖에 없었는데, 국제경제적인 상황이 급변하면서 외채위기로 폭발하게 된다. 당시 세계는 금융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이자율과 달러 가치의 상승, 그리고 중동의 불안정에 기인한 유가의 상승이 겹치면서 이른바 3고 현상이 이어졌고 이는 더 이상 외자에 의존하면서 수출 지향적 산업을 육성하는 발전주의가 지속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위기와 혼란의 와중에 독재자는 죽었지만, 역 쿠데타를 감행한 신군부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계승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1990년대 IMF 위기를 통해 전면화되는 신자유주의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5월 광주의 혁명은 다시 태동하는 독재의 망령과 신군부에 대한 저항이었고, 동시에 막 뿌리내리려 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더 먼 길을 걸어왔어야 할 것이다.
들불야학과 광주의 민중운동
광주민중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산물이 아니며 부단히 그 생명력을 키워나갔던 광주의 민중운동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사건이다. 특히 들불야학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역운동, 문화운동을 매개하며 광주의 민중운동에 큰 획을 그었고 항쟁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각종 ‘지하유인물’과 ‘투사회보’ 발행, 항쟁 지도부 참여 등 광주민중항쟁의 중심에 서있었다.
들불야학은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세력과 당시 광주, 전남 최대의 공단지역인 광천동 공단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이다. 노학연대를 강조하며 학당의 존재와 방향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중간세대’로 정의했다. 들불야학의 기초를 쌓은 박기순과 윤상원은 광주, 전남 지역의 최초 위장취업자였으며, 학생출신 노동자와 현장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강하게 주장했다. “끝까지 민족민중해방, 인간해방의 새날을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 강학들의 선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들불야학은 단순히 교육 기회의 제공이 아니라,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매개하면서 변혁적인 전망을 조직해내는 민중교육운동이었다.
광주민중항쟁 시기, 들불야학과 출신 강학들은 언론의 침묵을 뚫고 민중의 눈과 귀가 되는 선전홍보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투사회보’로 이어지는 이러한 활동은 광주민중항쟁의 다양한 양상을 민중들에게 알려내는 것에서부터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고 대중을 조직하는 ‘지하신문’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또한 항쟁 말기에는 적극적으로 도청지도부에 참여하면서 끝까지 항쟁을 사수하였다.
들불야학은 노동계급성 강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한 지향을 고수하며 양심적 지식인운동 수준에 머물렀던 학생운동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 전후 기간을 거치며 활동가와 노동계급이 조직적으로 결합하는 경험을 습득하였고 광주, 전남 민중운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광주민중항쟁 이후 극심한 탄압에 시달리며 들불야학은 문을 닫게 되지만 역사적 경험과 교훈은 ‘무등야학’, ‘샛별야학’등으로 이어졌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양자 모두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들불로 산화한 윤상원
광주민중항쟁 이후, 투쟁의 곳곳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1950~1980). 들불야학의 기둥이자 광주 민중항쟁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도청 최후 항쟁에서 산화한 윤상원은 시골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교육을 위해 광주로 이사를 온 그는 삼수를 하며 전남대학교에 입학한다. 입학 후 군 생활까지 마치고 돌아온 윤상원은 연극과 테니스를 좋아하고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이미 정국은 민청학련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 내에서는 사회과학적 이론의 밑바탕 위에서 현실과 역사인식을 깨쳐나가고자 하는 욕구들이 다양한 학습모임의 창설로 이어졌고 윤상원 또한 사찰기관의 집요한 감시를 피하며 이 모임에 함께 했다.
대학을 졸업한 윤상원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은행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 시절의 고민과 실천을 이어가기 위해 결국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고, 29세의 나이로 들불 야학의 강학이 된다. 노동자로서의 삶과 강학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가며 윤상원은 박관현에게 민중운동의 계기를 심어주게 되는 노동자실태조사 사업이나 지역 주민, 빈민운동을 지원하며 들불 야학을 이끌었다.
유신의 막바지,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들불 야학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당국과 학교는 강학들의 부모님들까지 동원해가면서 강학들의 탈퇴를 종용하였고, 강제 휴학의 협박이 이어졌다. 많은 강학들이 집에 발이 묶이거나 연행되었다. 그 가운데 윤상원은 남은 소수의 강학을 추슬러 고군분투하였고 “들불인으로서 끝까지 민족민중해방, 인간해방의 새날을 위해” 싸우겠다는 신념을 공고히 해나갔다.
민중의 투쟁은 거센 탄압 속에서도 박정희의 죽음과 짧으나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1980년의 봄을 이끌어냈다. 1980년의 봄. 안개정국 속에서 학내 민주화 투쟁은 곧 공장으로, 농촌으로 번져나갔다. 윤상원은 현장론에 입각한 노동운동 쪽으로 기반을 굳혀나가고 있었고, 박관현을 설득하여 학내민주화를 위한 총학생회를 다시 세우는 한편 어용 노총에 맞선 새로운 전국노동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흔들리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 세력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지만, 이에 맞서는 전태일 열사의 후예들인 청계피복 노조의 투쟁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권, 생존권 투쟁이 뜨거운 4월을 극한적인 상황으로 달구었다. 그리고 4월 30일, 변혁 운동의 흐름을 대중 운동과 결합하고자 한국노총에 맞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이 결성되었고 윤상원은 광주 전남 지역을 대표해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5월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전국에서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집회와 충돌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광주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하나로 모여 14일부터 연 사흘간 대규모 대중 집회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신군부는 ‘5.17 계엄확대조치’를 통과시키고 군을 동원하여 재야인사들을 검거하고 대학을 점거해 나갔다.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5.17 계엄확대조치’ 등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에 전남대생들은 자연스럽게 학교로 모여들었으나 이미 학교를 점거하고 있던 계엄군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곧 거리에서는 학생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민주주의를 외치는 민중과 계엄군 사이의 일진일퇴 공방전을 펼쳤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이었다.
곤봉과 총칼을 앞세운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인해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광주에서 윤상원은 변혁적 전망과 체계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들불야학을 설득하여 조직 차원에서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하게 된다.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의 강학들은 시위 곳곳을 누비며 상황을 수집한 후 지하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하였고, 항쟁이 격해지기 시작하자 ‘투사회보’라는 제목의 지하신문을 배포하며 대중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항쟁의 방향설정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1970년대 시위에서 사라졌던 화염병을 제작, 공급하며 계엄군에 맞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첫 발포와 함께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거리, 이 끔찍한 비극과 동지의 시체 앞에서, 민중은 할 말을 잃은 채 자체적으로 무장을 해나갔다. 발포는 민중의 의지를 꺾고 두려움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분노와 용기로 이어졌다. 거리는 무장한 시민군과 쏟아져 나오는 민중으로 가득 찼다. 결국, 다시 하룻밤이 지나면서 계엄군은 광주 밖으로 완전히 후퇴했다. 윤상원은 해방광주에서 도청의 안팎을 오가며 투사회보를 배포하고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서 투쟁을 의미와 중요성을 독려하고 스스로 앞장서 민중 사이에서 총을 들고 도청을 사수했다. 사실상 지도부가 없었던 항쟁은, 항쟁 자체를 뒤로 돌릴 무조건적인 무장 해제를 추진하던 지역유지와 몇몇 학생대표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 사이에서 윤상원은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를 지켜내기 위해 지도부 내외에서 고군분투하였다. 그리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 순간 “역사 앞에 부끄럼 없이 서기 위해서 누군가가 목숨을 걸어야”한다며 피신 권유를 마다하고 도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윤상원. 그는 결국, 최후항전 중 투쟁의 들불이 되어 산화한다.
광주의 넋 박관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열사(1953~1982) 또한 영광군 시골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 동안 장기하사관으로 군인 생활을 하였지만,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박관현은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식 교육은 도시에서 시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을 따라 함께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어린 시절을 광주에서 보낸 박관현은 계엄령과 유신체제에 분노하며 법조인으로서의 사회봉사를 목표로 삼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원서를 내지만 2년 연속 낙방한 후 3년의 군 입대를 하게 된다. 1977년 여름, 군을 제대한 박관현은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대학입시에 몰두하고, 결국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합격한다.
두 손이 부르트도록 고생하신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수년 동안 노력하여 어렵게 합격한 법대였기에 박관현은 치기어린 신입생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느끼는 노장 신입생이었다. 현실에 대한 분노는 고시 합격 이후로 애써 미룬 채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파묻혀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박관현에게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학생운동에 몰입해있던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들과의 논쟁 속에서 자신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던 박관현은 결국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광주공단실태조사단에 들어가게 된다.
단순한 실태조사가 아니라 두 달여 동안 합숙하며 광천동 지역 노동자들과 밀접히 결합하고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조사단이었기에, 그동안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던 박관현은 초기에 많은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사단의 의의, 목적,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 수행 방법 등등에 대해 박관현과 여타 성원과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관현은 논쟁 속에서 합의를 받아들였고 그 누구보다도 조사단에 열성적으로 끝까지 참여하며 당시 광주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여나갔다. 당시 광주 지역 노동자들의 삶은 시대의 아픔 그 자체였다. 박관현의 동생, 친구들이 거기에 있었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조사단에서의 경험은 박관현을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이끌었다. 들불야학은 지역주민운동과의 밀접한 결합을 추진하며 공장노동자들을 만났고, 그들이 거주하는 광천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반상회나 청년회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들불 야학의 강학 박관현은 막 입학했던 당시의 고시 준비생의 박관현과는 상당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더 이상 민중운동을 타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법조인이 되어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막연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생 전체를 고스란히 야학과 노동자들의 투쟁에 쏟아 붓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은 대학에서 학원자율화 바람으로 이어졌다. 전남대에서도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총학생회 결성, 학도호국단과 학생상담지도관실 무력화 등이 추진되었다. 당시 박관현은 학원자율화를 위한 공청회에서 공술을 맡게 되었는데, 2~300명만이 공청회에 참석했음을 알고서 분노하며, 즉석에서 1시간 동안 시작을 미루고 학우들을 설득하자고 제안한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학원민주화에 이미 동의하고 있는 당신들이 아니다. 우리가 만나서 설득해야하는 1만 2천 전남대생이다. 박관현의 결연한 주장은 캠퍼스의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1시간 이후 다시 시작된 공청회에는 예정된 장소였던 대강당에 수용하기에 벅찬, 믿기 힘들 정도의 인파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결국 공청회는 옥외에 연단을 설치하고서야 재개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박관현은 학내민주화의 필연성과 민중해방의 시대적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여 큰 박수갈채를 받았고 전남대학교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학원 민주화의 흐름에 관여하던 박관현은 윤상원의 제안으로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 당선된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어용교수 퇴진 투쟁을 전개하고 민주적 권리 쟁취,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섰다. 5월에 들어서자 전남대 민족민주화성회를 지속적으로 교내에서 진행하고 5월 14일 경찰의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뚫고 도청으로 향했다. 1980년 들어 광주에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민주주의 쟁취를 요구하던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경찰은 그 행진을 막아내지 못한 채 지켜보아야만 했고 도청 앞 광장에 도착한 시위대는 노동자 농민의 구조적 수탈 정책 철회, 민주적 노동조합 설치 보장, 민족통일 논의, 민주일정 제시 등의 요구를 담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시위대의 열기는 하루 이틀에 꺼지지 않았고 5월 16일, 광주시 전역을 휩쓰는 거대한 횃불의 대행진이 진행되었다. 사흘 동안 도청 앞 광장은 민중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고 그동안 억눌렸던 민중의 분노 앞에서 공권력은 허무하게 꼬리를 내린 듯 했다.
그러나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미 5월 15일 무장한 군인들이 통행이 제한되던 교정을 통과해 갔고 17일 전국총학생회장단 회의가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대학은 완전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장악 당했고 박관현을 비롯한 학생회 지도부는 사태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몸을 숨겨야 했다. 18일 오전 화급히 은신처로 피했다가 잠시 광주를 빠져나갔던 박관현은 믿을 수 없는 참사를 전해 들으며 가슴을 쥐어 뜯어야만 했다. 박관현은 다시 광주로 잠입해보려 노력했으나, 이미 광주는 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고, 당국은 5월 18일 이전까지 광주의 봄을 이끌었던 그를 사로잡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다. 결국 그는 전국을 떠돌며 2년간의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박관현은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태조사단에서부터 야학 생활, 학원민주화 투쟁, 거리 시위 등은 그가 광주민중항쟁의 든든한 밑거름이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박관현은 1982년 체포되었지만 그 후에도 굽힘없이 교도소내의 만연하던 폭행, 민주투사의 의문사, 정치범에 대한 부당 차별에 초인적인 단식 투쟁으로 맞섰고 공판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를 역설했다. 결국 박관현은 1982년 10월 12일 쇠약해진 건강으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1980년 광주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탄식 투쟁 끝에 옥사했다는 소식은 광주 전역에 퍼졌고 경찰은 부검을 핑계로 박관현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그리고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와 추모가 일주일간 광주를 가득 매웠다.
우리의 5월
윤상원과 박관현. 이 둘 뿐만이 아니라 광주의 5월을 위해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총을 들었던 무수한 투사들 없는 광주 민중항쟁은 상상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은 이들이 희생으로 일군 민중운동의 분출구였다. 이 땅의 주인으로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며 노동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운동들. 험난한 탄압을 뚫고 광주, 전남 지역에 막 뿌리 내린 들불야학을 비롯해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광주민중항쟁의 산모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다시 새로운 사회운동의 순환으로 거듭 태어나 1987년 투쟁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 정세 속에서 억눌렸던 민중의 요구를 모아내고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했던 의식적인 노력들을 주목해야 한다. 들불야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민중항쟁 전후 기간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성장하며 서로 결합되어 갔다. 그리고 준비된 역량을 가지고 민중항쟁의 선두에서 투쟁했다. 그 노력들이 없었다면 광주민중항쟁의 패배는 우리에게 더욱 크나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새롭게 성장하던 민중운동의 역량은 억압을 뚫고 나아가기에는 많은 부분 부족했고, 결국 역량의 한계로 인해 철저한 패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정권의 잔인한 본질을 폭로했으며, 투쟁 역량을 쌓기 위한 의식적인 준비와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사건이었다. 그 패배 속에서 1980년대 운동의 노력들이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의 5월은 30년 전 광주에 붙들려 있어서도, 매년 열리는 호화로운 정부 공식기념행사에 매여 있어서도 안 된다. 우리의 5월은 민중해방을 위해 산화해간 열사들의 삶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늘 노래해왔던 것이 아닌가? “앞서서 나가리 산자여 따르라.” 열사들이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거리로 나선 그 순간, 패배는 영원히 유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