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안보위기와 2010년 천안함 사태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 벌어진 군사적 충돌 회수는 놀랄 만큼 많다. 혹자는 지극히 불완전한 정전협정 체제에서 남과 북의 전면전이 발발하지 않은 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맞는 올해, 우리는 한반도의 ‘끝나지 않은 전쟁’이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남과 북이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무엇일까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3월 26일 천안함 침몰과 그 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 놓은 듯하다. 5월 20일 합동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발표하자 전쟁불사를 외치는 격앙된 목소리가 곳곳에서 쏟아졌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북한에 대한 ‘제한적 무력응징’을 원칙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칼럼을 발표했다. 동해와 서해에 항공모함 전단을 배치하고 전폭기 수십 대를 상공에 띄워놓은 후 북한의 비파곶 잠수함 기지를 폭파한다는 위협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이러한 위협이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비화하면 오히려 3일 내에 통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말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서 즉각적인 군사적 보복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다. 하지만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재연될 위험성은 상존한다.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동북아시아 수석연구원 브루스 크링그너는 북방한계선 이남에서 북한 잠수함이 탐지되면 경고 없이 폭파할 것이라고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해의 교전 사태는 현재진행형으로 간주해야 할 듯하다.
현재까지 남한 정부와 언론의 태도를 보면 북한은 일방적 가해자고 남한은 수동적 피해자다. 북한은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은 북한의 일방적 도발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시각이다. 과연 이러한 시각은 정당한 것인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현재 사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1968년 한반도 안보위기는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 유일한 요인이 북한의 공격적 군사전략이라고 설명하는 대표적 사례이기 때문에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968년 안보위기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침투부대(일명 김신조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한 사건과 1월 23일 미국의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부각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위기의 원인이 북한의 공세적 전략 변화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남한은 자신이 그 과정에서 단지 수동적 행위자였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가 어느 순간에 불현듯이 출현한 것도 아니었고 남한이 단지 수동적으로만 대응한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 전투병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 1966년부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하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1966년에 한국정부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전투병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남한에 대규모 지원을 약속한 브라운 각서를 제공했다. 또한 1966년 11월에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다. 그는 한국이 더 많은 전투병을 베트남에 파병하도록 요청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고 1967년부터 개시될 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방한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인상을 주었고 대통령 선거를 6개월 앞둔 박정희는 미국의 전폭적 지지라는 대단한 정치적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주한미국대사 브라운은 존슨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벌어진 비무장지대의 무장충돌 사태에 대해 우려했다. 이 사건으로 그의 방한 마지막 날인 1966년 11월 2일 미군 6명과 한국군 1명이 북한군의 급습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음 날 한국군은 보복공격을 가해 15명의 북한군이 피살되었다. 이는 미국 대통령 방한 기간 중에 벌어진 사건이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였다. 주한미군사령관 본스틸은 사건 조사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미군 정보기관이 내린 결론은 북한의 UN군 공격이 10월 26일 남한의 북한 전초기지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었다. 존슨이 귀국한 후 브라운은 10월 26일에 벌어진 남한의 북한 공격을 문제 삼으며 정일권 총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이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충돌은 1967년에 더욱 극적으로 증가했다. 1967년 10월 본스틸 장군은 북한의 침입 횟수가 10배 이상 증가했다고 국제연합에 보고했다. 실제로 1966년 이후로 남북의 전초전이 급증하여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967년에 비무장지대에서 충돌이 423건 발생했고 북한군 사망자가 423명, UN군 사망자가 122명에 달했다. 1968년 위기는 그 해에 불현듯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67년 남과 북의 전초전을 통해 점차 고조되어 온 것이었다.
1967년 시점에 UN 사령부는 북한이 더욱 공세적인 전략을 취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전략이 전면전이나 한반도에서 제2전선을 창출할 정도로 위험하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간주했다. 특히 미국은 남한 정부의 공격적 보복과 도발을 더욱 심각하게 우려했다. 미국은 남한의 정전협정 위반이 UN에서 미국과 한국의 입지를 좁힐 수 있고 한반도에서 긴장 고조가 베트남전 수행에 불리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강경한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국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으나 남한은 1966년 10월과 12월 사이에도 11차례의 대북 선제공격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되길 원했나? 표면적 이유는 남한 군대의 사기 진작이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다른 요인이 존재했다. 박정희 정부는 안보위기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것을 얻기를 원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침투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미국으로부터 군사장비의 현대화와 군대 규모의 확대를 위한 지원을 원했다. 한국은 미국의 군사지원이 확대되어야만 전투병 파병 확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한 정부의 강경노선이 미국의 정책과 일치되지 않지만 존슨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시급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요구를 수용했다. 결국 1966-67년 안보위기는 한국정부가 대미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1968년 안보위기는 1967년 남한 정부가 취한 공세적 대북공격과 보복 없이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한국의 공격적 전략은 위기가 고조되는 데 원인을 제공했던 한 요인이었다.
이처럼 남과 북의 무장충돌은 보복공격, 예방적 선제공격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고 상호 상승작용을 통해 폭력의 악순환을 형성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의 사기 진작이라는 명분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획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북한은 호전적, 공격적 가해자고 남한은 방어적, 수동적 피해자라는 등식이 진실인가? 이미 1990년대 이후로 서해에서 세 차례의 교전사태가 발생했다. 1999년 6월에 벌어진 첫 번째 교전사태(1차 연평해전), 2002년 6월에 벌어진 두 번째 교전사태(2차 연평해전), 2009년 11월 세 번째 교전사태(대청해전)로 남과 북 모두 수십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서해 교전사태가 반복되는 일차적인 원인은 남과 북이 인정하는 군사분계선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53년 체결된 휴전협정이 육상에 관한 경계는 설정했지만 해상에 관한 경계는 정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남북 간에 서해경계선에 관한 어떤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일차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함에도 현재 남한 정부는 서해교전 사태를 북한의 일방적 도발로 규정하고 군사적 대응을 한층 강화했다.
나아가 현재 한미 양국이 채택하고 있는 대북 군사전략과 무기체계도 북한에 심각한 현실적 위협을 가한다. 작전계획 5027은 북한의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선제공격을 가하고 전쟁 후 90일 내로 미군 병력 69만 명, 항공모함 5대, 함정 160척, 항공기 2500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전면적으로 점령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워놓고 있다. 이에 더하여 최근 한미 양국은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작전계획 5029를 수립하여 북한을 한층 더 자극하고 있다. 북한의 권력승계 불안과 같은 급변사태가 발생할 때 한미 양국이 공군력을 활용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시설 30곳을 일거에 파괴하고 해병대를 북한에 강습 상륙시킨다는 작전계획 5029의 세부 내용이 일부 공개된 바 있다. 이처럼 한미양국이 언제라도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북한을 공격,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언론에 공개하며 서해상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반복하는 것을 호전적, 공격적 행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따라서 한미양국은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군사훈련을 더욱 호전적, 공격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남북 군사대결 구도가 더욱 악화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당사자의 한 편임이 분명하다. 또한 남한 정부가 정전협정의 불완전성을 방치하거나 활용하고 그 정치적 책임을 방기함으로써 한반도 위기는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기하고자 하는 현 사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책임은 사회운동 일각에서 제기하는 천안함 사건의 은폐, 조작 의혹을 넘어선다.
이번 <사회운동>은 ‘6ㆍ2 지방선거 평가와 향후 과제’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2010년 지방선거는 ‘반이명박연합’이 전면화되어 여러 지역의 진보정당 후보가 민주당, 국민참여당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고, 민주노총 역시 여러 지역에서 지지 후보를 확정하지 못했다. ‘반이명박연합의 승리’라는 인식은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민중운동의 정치전망을 지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 특집은 사후적인 평가가 아니라 향후 민중운동의 사활을 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0년 NPT 평가회의와 세계평화운동의 모색’과 ‘이명박 정부의 의료민영화와 보건의료운동’도 기획으로 담았다.
하지만 3월 26일 천안함 침몰과 그 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 놓은 듯하다. 5월 20일 합동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발표하자 전쟁불사를 외치는 격앙된 목소리가 곳곳에서 쏟아졌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북한에 대한 ‘제한적 무력응징’을 원칙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칼럼을 발표했다. 동해와 서해에 항공모함 전단을 배치하고 전폭기 수십 대를 상공에 띄워놓은 후 북한의 비파곶 잠수함 기지를 폭파한다는 위협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이러한 위협이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비화하면 오히려 3일 내에 통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말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서 즉각적인 군사적 보복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다. 하지만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재연될 위험성은 상존한다.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동북아시아 수석연구원 브루스 크링그너는 북방한계선 이남에서 북한 잠수함이 탐지되면 경고 없이 폭파할 것이라고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해의 교전 사태는 현재진행형으로 간주해야 할 듯하다.
현재까지 남한 정부와 언론의 태도를 보면 북한은 일방적 가해자고 남한은 수동적 피해자다. 북한은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은 북한의 일방적 도발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시각이다. 과연 이러한 시각은 정당한 것인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현재 사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1968년 한반도 안보위기는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 유일한 요인이 북한의 공격적 군사전략이라고 설명하는 대표적 사례이기 때문에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968년 안보위기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침투부대(일명 김신조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한 사건과 1월 23일 미국의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부각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위기의 원인이 북한의 공세적 전략 변화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남한은 자신이 그 과정에서 단지 수동적 행위자였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가 어느 순간에 불현듯이 출현한 것도 아니었고 남한이 단지 수동적으로만 대응한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 전투병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 1966년부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하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1966년에 한국정부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전투병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남한에 대규모 지원을 약속한 브라운 각서를 제공했다. 또한 1966년 11월에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다. 그는 한국이 더 많은 전투병을 베트남에 파병하도록 요청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고 1967년부터 개시될 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방한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인상을 주었고 대통령 선거를 6개월 앞둔 박정희는 미국의 전폭적 지지라는 대단한 정치적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주한미국대사 브라운은 존슨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벌어진 비무장지대의 무장충돌 사태에 대해 우려했다. 이 사건으로 그의 방한 마지막 날인 1966년 11월 2일 미군 6명과 한국군 1명이 북한군의 급습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음 날 한국군은 보복공격을 가해 15명의 북한군이 피살되었다. 이는 미국 대통령 방한 기간 중에 벌어진 사건이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였다. 주한미군사령관 본스틸은 사건 조사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미군 정보기관이 내린 결론은 북한의 UN군 공격이 10월 26일 남한의 북한 전초기지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었다. 존슨이 귀국한 후 브라운은 10월 26일에 벌어진 남한의 북한 공격을 문제 삼으며 정일권 총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이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충돌은 1967년에 더욱 극적으로 증가했다. 1967년 10월 본스틸 장군은 북한의 침입 횟수가 10배 이상 증가했다고 국제연합에 보고했다. 실제로 1966년 이후로 남북의 전초전이 급증하여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967년에 비무장지대에서 충돌이 423건 발생했고 북한군 사망자가 423명, UN군 사망자가 122명에 달했다. 1968년 위기는 그 해에 불현듯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67년 남과 북의 전초전을 통해 점차 고조되어 온 것이었다.
1967년 시점에 UN 사령부는 북한이 더욱 공세적인 전략을 취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전략이 전면전이나 한반도에서 제2전선을 창출할 정도로 위험하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간주했다. 특히 미국은 남한 정부의 공격적 보복과 도발을 더욱 심각하게 우려했다. 미국은 남한의 정전협정 위반이 UN에서 미국과 한국의 입지를 좁힐 수 있고 한반도에서 긴장 고조가 베트남전 수행에 불리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강경한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국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으나 남한은 1966년 10월과 12월 사이에도 11차례의 대북 선제공격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되길 원했나? 표면적 이유는 남한 군대의 사기 진작이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다른 요인이 존재했다. 박정희 정부는 안보위기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것을 얻기를 원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침투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미국으로부터 군사장비의 현대화와 군대 규모의 확대를 위한 지원을 원했다. 한국은 미국의 군사지원이 확대되어야만 전투병 파병 확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한 정부의 강경노선이 미국의 정책과 일치되지 않지만 존슨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시급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요구를 수용했다. 결국 1966-67년 안보위기는 한국정부가 대미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1968년 안보위기는 1967년 남한 정부가 취한 공세적 대북공격과 보복 없이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한국의 공격적 전략은 위기가 고조되는 데 원인을 제공했던 한 요인이었다.
이처럼 남과 북의 무장충돌은 보복공격, 예방적 선제공격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고 상호 상승작용을 통해 폭력의 악순환을 형성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의 사기 진작이라는 명분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획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북한은 호전적, 공격적 가해자고 남한은 방어적, 수동적 피해자라는 등식이 진실인가? 이미 1990년대 이후로 서해에서 세 차례의 교전사태가 발생했다. 1999년 6월에 벌어진 첫 번째 교전사태(1차 연평해전), 2002년 6월에 벌어진 두 번째 교전사태(2차 연평해전), 2009년 11월 세 번째 교전사태(대청해전)로 남과 북 모두 수십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서해 교전사태가 반복되는 일차적인 원인은 남과 북이 인정하는 군사분계선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53년 체결된 휴전협정이 육상에 관한 경계는 설정했지만 해상에 관한 경계는 정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남북 간에 서해경계선에 관한 어떤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일차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함에도 현재 남한 정부는 서해교전 사태를 북한의 일방적 도발로 규정하고 군사적 대응을 한층 강화했다.
나아가 현재 한미 양국이 채택하고 있는 대북 군사전략과 무기체계도 북한에 심각한 현실적 위협을 가한다. 작전계획 5027은 북한의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선제공격을 가하고 전쟁 후 90일 내로 미군 병력 69만 명, 항공모함 5대, 함정 160척, 항공기 2500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전면적으로 점령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워놓고 있다. 이에 더하여 최근 한미 양국은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작전계획 5029를 수립하여 북한을 한층 더 자극하고 있다. 북한의 권력승계 불안과 같은 급변사태가 발생할 때 한미 양국이 공군력을 활용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시설 30곳을 일거에 파괴하고 해병대를 북한에 강습 상륙시킨다는 작전계획 5029의 세부 내용이 일부 공개된 바 있다. 이처럼 한미양국이 언제라도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북한을 공격,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언론에 공개하며 서해상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반복하는 것을 호전적, 공격적 행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따라서 한미양국은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군사훈련을 더욱 호전적, 공격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남북 군사대결 구도가 더욱 악화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당사자의 한 편임이 분명하다. 또한 남한 정부가 정전협정의 불완전성을 방치하거나 활용하고 그 정치적 책임을 방기함으로써 한반도 위기는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기하고자 하는 현 사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책임은 사회운동 일각에서 제기하는 천안함 사건의 은폐, 조작 의혹을 넘어선다.
이번 <사회운동>은 ‘6ㆍ2 지방선거 평가와 향후 과제’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2010년 지방선거는 ‘반이명박연합’이 전면화되어 여러 지역의 진보정당 후보가 민주당, 국민참여당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고, 민주노총 역시 여러 지역에서 지지 후보를 확정하지 못했다. ‘반이명박연합의 승리’라는 인식은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민중운동의 정치전망을 지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 특집은 사후적인 평가가 아니라 향후 민중운동의 사활을 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0년 NPT 평가회의와 세계평화운동의 모색’과 ‘이명박 정부의 의료민영화와 보건의료운동’도 기획으로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