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10.96.호
우리는 왜 G20에 반대하는가
11월 11-12일에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패권과 경제ㆍ금융질서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G20을 규탄하는 운동 역시 준비되고 있다. 그런데 G20에 대해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다는 입장부터 몇몇 분야에서는 비판적인 개입이 가능하지 않으냐는 의견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 근거로 G20이 세계 경제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면서 등장했다는 점, 한국을 포함하여 개도국이 포함되었다는 점, 몇 가지 개혁조치를 실제로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제기된다. 그러나 우리는 G20이 세계자본주의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 패권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대변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대안세계화를 주장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G20과 관련된 두 가지 쟁점을 검토하고 민중운동의 투쟁 방향을 제안한다.
G20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표성, 정당성, 민주주의의 결여
G20에는 대표성, 정당성, 민주주의가 없다. 경제규모를 중심으로 선택된 20개국이 전 세계 190여 국가를 대표할 수 없고,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강요해서 현재의 위기를 발생시킨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정당성이 없고, 회의 참가가 봉쇄되어 있고 내용과 진행절차도 철저히 비공개라는 점에서 민주적이지 않다.
2008년 하반기 경제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자 미국과 유럽의 패권국들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G20 정상회의를 열었다. 지금까지 4차례 열린 회의를 통해서 G20은 스스로 세계경제에 관한 최고 기구로 규정했고, 경제뿐만 아니라 발전, 빈곤, 환경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루면서 국제패권에 관한 중심적인 논의기구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G8과 마찬가지로 G20에는 아무런 국제법적인 지위가 없다. 왜 20개국인지에 관한 기준도 없다. G7에 경제규모와 지정학적인 고려에 따라 12개 신흥개도국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이루어진 조정의 결과였고 최종 승인은 G7이 했다. 누가 7개국에, 20개국에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했나? 경제규모가 참가 여부와 발언력을 뒷받침한다는 측면에서 G20은 기업의 주주총회나 이사회의 구성 원리와 같다.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도국이 포함되었으나 각 지역 경제의 강자들로서 대부분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 질서의 옹호자들이다. G20에 배제된 170여 개국의 입장은 대변될 길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주빌리사우스, 아탁 등 115개 국가 900여 개 사회운동단체가 서명한 <국제금융체계 개혁을 위한 ‘세계정상회의’ 성명>은 현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G20이 아니라 민주적인 참여와 토론이 보장되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www.choike.org/bw2/ 참고.) 이들은 세계 경제구조를 개혁하기 위해서 G20이 아니라 유엔이 주최하는 국제회의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제안한 유엔의 회의는 ①세계 모든 정부가 참여하고, ②시민사회, 시민조직, 사회운동의 대표자가 참여하고, ③현재 위기로 큰 영향을 받는 지역들이 협의하기 위한 분명한 시간표와 절차를 마련하고, ④포괄적인 범위로 모든 문제와 기구들을 다루고, ⑤투명성이 보장되어 제안서와 결과 문서의 초고가 공개되고 토론될 수 있어야 한다. 유엔 역시 역사적ㆍ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수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이 이 성명서에 서명한 까닭은 G20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필리핀의 대안세계화운동가 월든 벨로는 “누가 그들에게 위기를 해결할 권한을 부여했나?”라는 질문이 매우 중요하며, 이것이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G20 반대 투쟁의 전제라고 강조한다.
한국을 포함한 일부 개도국이 G20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실체도 의심스러운 배타적인 국가적 이해관계보다는 세계 민중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보편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운동에 있어서 국제주의가 다시 제기되는 지점이다. 현재의 위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G20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보편적인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틀은 제국주의의 역사적 토대 위에서 발전을 이루었고 현 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이 있는 북반구보다는 남반구 민중의 권리를 대폭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변화가 아니라 관리, 행동이 아니라 말
G20은 경제위기를 해결하겠다고 모였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위기 극복을 정책 조율의 차원으로 다루고 있다. 정작 중요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 금융자본의 권력문제, 전 세계적인 불평등과 사회적 위기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공분의 대상이었던 IMF의 권력을 강화시켜 기술관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다. 결국 G20이 목표로 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침해받지 않는 정도에서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폐지할 생각도, 금융세계화를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 의지도 없다. 현재 존재하는 체제의 원만한 관리와 패권유지가 G20이 공유하고 있는 목표다.
G20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기가 심각해지자 사르코지와 같은 각국 정상이나 스티글리츠나 크루그먼 같은 경제학자들마저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의 위기가 훨씬 더 깊고 넓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1970년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었다. 금융화를 통해서 실물부문의 수익성 문제를 우회하고자 했던 자본의 전략이 주식, 채권, 부동산 투기로 이어지다가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새로운 거품으로 금융적 축적을 이어갈 방법이 분명하지 않고, 그렇다고 실물부문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는 지난 수십 년과는 달리 장기적인 저성장과 불안에 휩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빈곤, 기후변화, 에너지, 농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심화되고 있는 위기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의 질서와 단절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은 것이다.
하지만 G20은 행동이 아니라 말로 이러한 문제를 감추고 자신을 멋지게 포장한다. 2009년 하반기부터 경제위기가 한풀 꺾이는 것처럼 보이자 G20은 고용, 발전, 환경 등 다양한 문제를 언급하는 여유를 보여줬다. 하지만 우리는 주목을 받는 국제회의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각국 정상들은 자신들의 친목과 단합을 뽐내고, 언론을 상대로 멋진 말을 늘어놓고 좋은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약속은 휴짓조각이 된다. G8이 대표적인 사례다. G8이 신자유주의 추진기구로 비판을 받자 그들은 외채탕감이나 개발원조와 같은 문제도 주요한 의제로 다룬다고 선전했다. 이러한 행동은 G8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행된 것은 얼마 없고 대부분은 말 잔치로 끝났다.
G20도 마찬가지다. G20은 노동권, 환경, 발전에 관한 모호한 공약을 내놓지만 알맹이는 없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기존에 하던 것을 좀 더 잘하겠다는 말뿐이다. 새천년개발목표(MDG) 달성에 힘을 쓰겠다, 기후변화 대응에 관심을 기울이겠다, 화석연료보다 재생에너지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을 펴겠다,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노동권을 존중하겠다 등등. 그런데 각국에서는 이런 말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진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G20은 피츠버그 정상회의에서 “국제노동기준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노조법을 개악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고 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금융규제에 합의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금산분리 완화 등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런 일은 비단 한국에 그치지 않는다.
금융통제의 요구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보다 강력한 규제와 세금 부과
G20은 첫 회의부터 금융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G20에서 추진하는 것보다 한층 강력한 금융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이 제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08년 10월에 발표된 아탁(금융과세연합)의 <때가 왔다. 금융 카지노를 폐쇄하자: 금융위기와 민주적 대안에 관한 성명서>에 이러한 주장이 잘 드러나 있다. 아탁은 네 가지 요구를 제기한다. 첫째, 민주적인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금융자본의 권력을 해체하고 실물부문과 사회적 필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셋째, 경제위기로 인한 비용을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지불해야 한다. 넷째, 금융 시스템의 핵심 부분을 개혁하기 위해서 금융통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G20에서 실제 추진되고 있는 금융규제 개혁은 네 번째 요구 중의 일부분인데, 그 정도가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G20의 의제에 초점을 맞추고 각 금융규제를 강화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의 경우에는 투자 중인 자산의 세부내역과 차입금 규모가 상세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금융상품에 관한 포괄주의 규제를 열거주의 규제로 개혁함으로써 모든 개별 신금융상품에 대한 공적감독을 시행해야 한다, 투기자본의 천국인 조세도피처나 역외금융센터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등의 요구들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모든 금융거래에 금융거래세(일명 로빈후드세)를 부과하자는 운동이 힘을 얻고 있다. 금융거래세는 주식, 채권, 외환거래 등 모든 금융거래에 0.001~0.05%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운동이다. 외환거래에 세금을 부과하자던 토빈세를 모든 금융시장으로 확장시킨 아이디어다. 모든 상품 거래에서 발생하는 이득에 대해서 과세가 이루어진다는 원칙이 금융부문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금융거래에 세금이 부과되면 단기적인 금융거래의 규모가 상당한 정도로 줄어들 것을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 금융거래세로 인해 조달되는 막대한 재원의 일정부분을 기후변화 대응, 빈곤국의 발전 등에 할당하자고 주장하면서 이를 로빈후드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변화를 추동할 힘
다양한 금융통제의 요구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먼저 아탁에서 제안한 네 가지 개혁 요구에 비추어 본다면 다수의 금융통제 요구안이 가장 미시적인 부분인 금융규제 정책 도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G20을 대체하는 새로운 논의 틀 구성, 금융자본의 권력 통제를 위한 근원적 정책 전환, 위기 비용에 대한 책임 부과라는 나머지 과제는 상대화되어 있다. 이 중 하나인 금융자본의 권력 통제를 위한 근원적 정책 전환에는 금융거래세 도입, 거대 금융복합기업 금지, 공기업과 연금 민영화 금지, 분배정책의 전환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었을 때에 변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회운동단체는 G20이라는 틀에 효과적으로 개입한다는 목적에서, 처음에 제기된 전체적인 변화라는 과제를 상대화하고 G20에서 제기되는 개혁 정책을 좀 더 급진화하거나 금융거래세와 같은 한두 가지 과제를 중심으로 한 이슈파이팅 및 로비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금융정책 개혁이라는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금융자본의 권력을 제어할 수 없다. 각국의 입장이 다르고 금융자본의 권력이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이해관계 조정과정에서 정책왜곡이 발생한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는 G20이 스스로 변화를 추진할 리가 없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에 대한 발본적인 평가와 이에 대한 반성에 근거를 둔 포괄적인 방향 전환이 없이는 하나의 정책을 온전히 시행할 수 없다. 따라서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의 ‘실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은 스스로의 목표도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은 새로운 대중운동의 구성으로 사회변화를 꾀했던 대안세계화운동의 구상에 미달한다. 우리가 금융통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그 자체를 달성할 수 있는 목표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쟁점을 매개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대안세계를 향한 운동의 동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전면적인 금융통제의 요구를 대안세계화 운동의 맥락 하에서 파악해야 한다.
G20 투쟁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당면한 G20 투쟁의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민중운동 내의 과제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첫째, G20 투쟁은 무엇보다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위기와 복합적인 사회적 위기의 현실을 폭로하고 교육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G20에 대한 기대가 존재하는 이유, G20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라는 관념이 힘을 얻는 이유는 현재의 위기를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일련의 정책 조합으로 사고하고, 이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그러하다. 기후변화의 위기를 정책과 새로운 기술과 탄소거래의 문제로 간주할 때,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새천년개발목표 달성의 문제로 간주할 때 그러한 사고와 실천은 체계적으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점에서 G20을 계기로 현재의 정세와 관련된 교육과 토론이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추구하고, 어떠한 운동을 건설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과제다.
둘째, G20의 실체에 대한 폭로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다. 각 부문별 과제와 요구를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투쟁의 대상은 정확하게 G20과 관련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을 동원하고 선전하는 것도 바로 G20과 한국의 발전 전망을 결부시키는 데 있다. G20이 망가진 자본주의 경제를 관리하는 기구라는 점, 진정한 변화를 회피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점, G20에서 한국이 맡고 있는 역할이 개도국 입장에서 미국의 패권을 지지하는 데 있다는 점이 폭로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을 제정하는 등 각종 제도와 엄포를 동원해서 강력한 탄압으로 대중적인 집회를 봉쇄할 것이기 때문에 조직된 대중운동단체의 결의와 노력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에 관해서 회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해야 한다.
셋째, 대안세계화 담론과 운동을 확산시켜야 한다. 2000년대 대안세계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과 토론이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위기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이러한 주장이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G20 투쟁과정에서 대안세계화의 문제의식을 다시 운동의 과제로 제기해야 할 것이다.
G20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표성, 정당성, 민주주의의 결여
G20에는 대표성, 정당성, 민주주의가 없다. 경제규모를 중심으로 선택된 20개국이 전 세계 190여 국가를 대표할 수 없고,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강요해서 현재의 위기를 발생시킨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정당성이 없고, 회의 참가가 봉쇄되어 있고 내용과 진행절차도 철저히 비공개라는 점에서 민주적이지 않다.
2008년 하반기 경제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자 미국과 유럽의 패권국들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G20 정상회의를 열었다. 지금까지 4차례 열린 회의를 통해서 G20은 스스로 세계경제에 관한 최고 기구로 규정했고, 경제뿐만 아니라 발전, 빈곤, 환경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루면서 국제패권에 관한 중심적인 논의기구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G8과 마찬가지로 G20에는 아무런 국제법적인 지위가 없다. 왜 20개국인지에 관한 기준도 없다. G7에 경제규모와 지정학적인 고려에 따라 12개 신흥개도국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이루어진 조정의 결과였고 최종 승인은 G7이 했다. 누가 7개국에, 20개국에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했나? 경제규모가 참가 여부와 발언력을 뒷받침한다는 측면에서 G20은 기업의 주주총회나 이사회의 구성 원리와 같다.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도국이 포함되었으나 각 지역 경제의 강자들로서 대부분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 질서의 옹호자들이다. G20에 배제된 170여 개국의 입장은 대변될 길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주빌리사우스, 아탁 등 115개 국가 900여 개 사회운동단체가 서명한 <국제금융체계 개혁을 위한 ‘세계정상회의’ 성명>은 현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G20이 아니라 민주적인 참여와 토론이 보장되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www.choike.org/bw2/ 참고.) 이들은 세계 경제구조를 개혁하기 위해서 G20이 아니라 유엔이 주최하는 국제회의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제안한 유엔의 회의는 ①세계 모든 정부가 참여하고, ②시민사회, 시민조직, 사회운동의 대표자가 참여하고, ③현재 위기로 큰 영향을 받는 지역들이 협의하기 위한 분명한 시간표와 절차를 마련하고, ④포괄적인 범위로 모든 문제와 기구들을 다루고, ⑤투명성이 보장되어 제안서와 결과 문서의 초고가 공개되고 토론될 수 있어야 한다. 유엔 역시 역사적ㆍ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수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이 이 성명서에 서명한 까닭은 G20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필리핀의 대안세계화운동가 월든 벨로는 “누가 그들에게 위기를 해결할 권한을 부여했나?”라는 질문이 매우 중요하며, 이것이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G20 반대 투쟁의 전제라고 강조한다.
한국을 포함한 일부 개도국이 G20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실체도 의심스러운 배타적인 국가적 이해관계보다는 세계 민중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보편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운동에 있어서 국제주의가 다시 제기되는 지점이다. 현재의 위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G20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보편적인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틀은 제국주의의 역사적 토대 위에서 발전을 이루었고 현 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이 있는 북반구보다는 남반구 민중의 권리를 대폭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변화가 아니라 관리, 행동이 아니라 말
G20은 경제위기를 해결하겠다고 모였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위기 극복을 정책 조율의 차원으로 다루고 있다. 정작 중요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 금융자본의 권력문제, 전 세계적인 불평등과 사회적 위기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공분의 대상이었던 IMF의 권력을 강화시켜 기술관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다. 결국 G20이 목표로 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침해받지 않는 정도에서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폐지할 생각도, 금융세계화를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 의지도 없다. 현재 존재하는 체제의 원만한 관리와 패권유지가 G20이 공유하고 있는 목표다.
G20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기가 심각해지자 사르코지와 같은 각국 정상이나 스티글리츠나 크루그먼 같은 경제학자들마저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의 위기가 훨씬 더 깊고 넓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1970년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었다. 금융화를 통해서 실물부문의 수익성 문제를 우회하고자 했던 자본의 전략이 주식, 채권, 부동산 투기로 이어지다가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새로운 거품으로 금융적 축적을 이어갈 방법이 분명하지 않고, 그렇다고 실물부문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는 지난 수십 년과는 달리 장기적인 저성장과 불안에 휩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빈곤, 기후변화, 에너지, 농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심화되고 있는 위기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의 질서와 단절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은 것이다.
하지만 G20은 행동이 아니라 말로 이러한 문제를 감추고 자신을 멋지게 포장한다. 2009년 하반기부터 경제위기가 한풀 꺾이는 것처럼 보이자 G20은 고용, 발전, 환경 등 다양한 문제를 언급하는 여유를 보여줬다. 하지만 우리는 주목을 받는 국제회의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각국 정상들은 자신들의 친목과 단합을 뽐내고, 언론을 상대로 멋진 말을 늘어놓고 좋은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약속은 휴짓조각이 된다. G8이 대표적인 사례다. G8이 신자유주의 추진기구로 비판을 받자 그들은 외채탕감이나 개발원조와 같은 문제도 주요한 의제로 다룬다고 선전했다. 이러한 행동은 G8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행된 것은 얼마 없고 대부분은 말 잔치로 끝났다.
G20도 마찬가지다. G20은 노동권, 환경, 발전에 관한 모호한 공약을 내놓지만 알맹이는 없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기존에 하던 것을 좀 더 잘하겠다는 말뿐이다. 새천년개발목표(MDG) 달성에 힘을 쓰겠다, 기후변화 대응에 관심을 기울이겠다, 화석연료보다 재생에너지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을 펴겠다,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노동권을 존중하겠다 등등. 그런데 각국에서는 이런 말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진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G20은 피츠버그 정상회의에서 “국제노동기준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노조법을 개악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고 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금융규제에 합의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금산분리 완화 등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런 일은 비단 한국에 그치지 않는다.
금융통제의 요구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보다 강력한 규제와 세금 부과
G20은 첫 회의부터 금융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G20에서 추진하는 것보다 한층 강력한 금융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이 제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08년 10월에 발표된 아탁(금융과세연합)의 <때가 왔다. 금융 카지노를 폐쇄하자: 금융위기와 민주적 대안에 관한 성명서>에 이러한 주장이 잘 드러나 있다. 아탁은 네 가지 요구를 제기한다. 첫째, 민주적인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금융자본의 권력을 해체하고 실물부문과 사회적 필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셋째, 경제위기로 인한 비용을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지불해야 한다. 넷째, 금융 시스템의 핵심 부분을 개혁하기 위해서 금융통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G20에서 실제 추진되고 있는 금융규제 개혁은 네 번째 요구 중의 일부분인데, 그 정도가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G20의 의제에 초점을 맞추고 각 금융규제를 강화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의 경우에는 투자 중인 자산의 세부내역과 차입금 규모가 상세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금융상품에 관한 포괄주의 규제를 열거주의 규제로 개혁함으로써 모든 개별 신금융상품에 대한 공적감독을 시행해야 한다, 투기자본의 천국인 조세도피처나 역외금융센터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등의 요구들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모든 금융거래에 금융거래세(일명 로빈후드세)를 부과하자는 운동이 힘을 얻고 있다. 금융거래세는 주식, 채권, 외환거래 등 모든 금융거래에 0.001~0.05%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운동이다. 외환거래에 세금을 부과하자던 토빈세를 모든 금융시장으로 확장시킨 아이디어다. 모든 상품 거래에서 발생하는 이득에 대해서 과세가 이루어진다는 원칙이 금융부문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금융거래에 세금이 부과되면 단기적인 금융거래의 규모가 상당한 정도로 줄어들 것을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 금융거래세로 인해 조달되는 막대한 재원의 일정부분을 기후변화 대응, 빈곤국의 발전 등에 할당하자고 주장하면서 이를 로빈후드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변화를 추동할 힘
다양한 금융통제의 요구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먼저 아탁에서 제안한 네 가지 개혁 요구에 비추어 본다면 다수의 금융통제 요구안이 가장 미시적인 부분인 금융규제 정책 도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G20을 대체하는 새로운 논의 틀 구성, 금융자본의 권력 통제를 위한 근원적 정책 전환, 위기 비용에 대한 책임 부과라는 나머지 과제는 상대화되어 있다. 이 중 하나인 금융자본의 권력 통제를 위한 근원적 정책 전환에는 금융거래세 도입, 거대 금융복합기업 금지, 공기업과 연금 민영화 금지, 분배정책의 전환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었을 때에 변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회운동단체는 G20이라는 틀에 효과적으로 개입한다는 목적에서, 처음에 제기된 전체적인 변화라는 과제를 상대화하고 G20에서 제기되는 개혁 정책을 좀 더 급진화하거나 금융거래세와 같은 한두 가지 과제를 중심으로 한 이슈파이팅 및 로비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금융정책 개혁이라는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금융자본의 권력을 제어할 수 없다. 각국의 입장이 다르고 금융자본의 권력이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이해관계 조정과정에서 정책왜곡이 발생한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는 G20이 스스로 변화를 추진할 리가 없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에 대한 발본적인 평가와 이에 대한 반성에 근거를 둔 포괄적인 방향 전환이 없이는 하나의 정책을 온전히 시행할 수 없다. 따라서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의 ‘실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은 스스로의 목표도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은 새로운 대중운동의 구성으로 사회변화를 꾀했던 대안세계화운동의 구상에 미달한다. 우리가 금융통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그 자체를 달성할 수 있는 목표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쟁점을 매개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대안세계를 향한 운동의 동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전면적인 금융통제의 요구를 대안세계화 운동의 맥락 하에서 파악해야 한다.
G20 투쟁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당면한 G20 투쟁의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민중운동 내의 과제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첫째, G20 투쟁은 무엇보다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위기와 복합적인 사회적 위기의 현실을 폭로하고 교육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G20에 대한 기대가 존재하는 이유, G20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라는 관념이 힘을 얻는 이유는 현재의 위기를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일련의 정책 조합으로 사고하고, 이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그러하다. 기후변화의 위기를 정책과 새로운 기술과 탄소거래의 문제로 간주할 때,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새천년개발목표 달성의 문제로 간주할 때 그러한 사고와 실천은 체계적으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점에서 G20을 계기로 현재의 정세와 관련된 교육과 토론이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추구하고, 어떠한 운동을 건설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과제다.
둘째, G20의 실체에 대한 폭로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다. 각 부문별 과제와 요구를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투쟁의 대상은 정확하게 G20과 관련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을 동원하고 선전하는 것도 바로 G20과 한국의 발전 전망을 결부시키는 데 있다. G20이 망가진 자본주의 경제를 관리하는 기구라는 점, 진정한 변화를 회피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점, G20에서 한국이 맡고 있는 역할이 개도국 입장에서 미국의 패권을 지지하는 데 있다는 점이 폭로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셋째, 대안세계화 담론과 운동을 확산시켜야 한다. 2000년대 대안세계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과 토론이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위기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이러한 주장이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G20 투쟁과정에서 대안세계화의 문제의식을 다시 운동의 과제로 제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