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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0.9-10.96.호

이명박 정부의 통일세 논의 제안

임필수 | 정책위원장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8ㆍ15 경축사에서 이례적으로 통일세를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통일은 반드시 온다. 그날을 대비해 이제 통일세 등 현실적인 방안도 준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우리 사회 각계에서 폭넓게 논의해 주시기를 제안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는데다가 천안함 사태로 극한 대결로 치닫고 있는 중에 통일비용과 통일세 문제가 화두가 되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의아스럽다.

통일비용이라는 개념은 동서독 통일과정에서 처음 등장하여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서독 정부는 통일비용 개념을 10년 내에 동독지역이 서독 연방의 중하위권 주 수준의 경제력과 소득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경비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남북한 통일을 상정할 때 통일비용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통일비용 논의가 본격화되고 구체적인 비용 추산이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한 시점은 김영삼 정부 후반인 1996년을 전후로, 북한붕괴론이 한국과 미국에서 극성을 부렸던 때였다. 즉 통일비용 논의가 북한의 붕괴와 흡수통일을 가정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이 내놓은 통일세 논의의 의도가 무엇인지 더욱 미심쩍다.

하지만 정부연구소인 통일연구원은 이명박 정부의 통일세 제안이 과거 햇볕정책에 비해 더욱 적극적인 통일의지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 연구원에 따르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이 실질적인 통일보다는 분단을 관리한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는 남북한 상호체제 인정, 평화정착과 교류협력이라는 ‘사실상의 통일’이 더 바람직하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통일 비전이 모호해졌고 통일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인식마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통일세 제안은 오히려 통일 논의의 족쇄를 푸는 화두이고 통일방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계기가 된다. 연구원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야말로 실종된 통일담론을 부활시키고 통일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회복시키면서 소극적 대북정책에서 탈피해 진정한 통일정책을 추진하려는 적임자가 된다.

반면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장관을 지냈던 이종석 씨는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미 정부는 매년 1조 원이 넘는 남북협력기금을 국회로부터 승인받아 놓고 있지만 2008년 18.1%, 2009년 8.6% 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꾸준한 교류협력사업을 펼치는 게 통일비용을 줄이는 첩경인데 돈이 없어서 남북협력사업을 확대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협력사업을 올스톱시켰기 때문에 돈이 남아 돌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지금처럼 북한의 대남 적대의식이 높다면 그런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중국의 주도권이 관철될 수밖에 없고, 통일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현 정부 하에서는 통일세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명박 정부와 그의 통일세 논의 제안을 지지하는 논자들은 현재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원인을 전적으로 현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게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2차 핵실험이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천안함 사태처럼 북한발 돌발변수가 남북관계에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북한이 핵포기와 개혁개방이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리도록 국민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잘 닦아 놓은 남북교류협력의 틀을 현 정부가 부정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으므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인 비핵개방 3000을 폐기해야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편의 주장이 진실에 가까울까.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첫째, 과연 햇볕정책은 최선의 정책이었고 최선의 결과를 낳았나. 현재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펼칠 때가 좋았다는 식으로 과거를 미화하기 쉽다. 하지만 북한이 1차 핵실험을 단행한 2006년은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시기다. 1999년과 2002년의 서해교전 사태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반복해서 벌어졌다. ‘좋았던 과거’에도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나 북한 핵실험과 유엔제재라는 중대한 사태가 생겼다. 즉 한반도 핵 문제는 최고조로 악화되었고 서해교전이 상징하듯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는 거의 진척이 없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햇볕정책의 내적 모순 때문이다.
미국은 냉전이 붕괴하자 소련과 같은 세계강국은 사라졌지만 상대적으로 대규모의 재래식전력과 핵무기나 생화학무기를 포함해 초보적인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갖추었거나 갖추리라 예상되는 ‘지역강국’에 주목하면서 이들이 소련을 대체하는 새로운 위협이라고 묘사하기 시작했다. (지역강국에 대비한 미국의 전쟁 개념이 바로 중강도전쟁이다. 냉전시기에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상정하는 고강도전쟁과 제3세계에서 반혁명전략을 뜻하는 저강도전쟁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바로 이런 지역강국에는 미국이 ‘악당국가’라고 불렀던 북한이나 이라크가 포함되었다. 미국은 이들 국가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내세웠다. 한국의 햇볕정책은 미국의 전략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서 북한을 완전히 정치경제적으로 봉쇄하거나 붕괴를 유도할 경우 북한사회의 불안정성이나 불확실성이 더욱 높아지고 대량살상무기 위협이 오히려 증폭될 수 있기 때문에 대량살상무기(핵, 미사일)를 제거하기 위한 대화와 협상에 나서면서 동시에 북한에 대한 군사적 봉쇄를 강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한반도 핵우산은 유지될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부는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김대중 정부 때도 미사일방어망(MD) 계획에 따라 한국에 최신 미사일이 배치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이나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 3000은 미국의 대북전략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두 번째 의문은 햇볕정책이 제시하는 한반도 미래상이 과연 남북 민중에게 유일한 대안이냐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통일정책이 아니라 분단관리 정책이라는 통일연구원의 지적은 객관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햇볕정책은 무역자유화 시나리오를 관철하여 북한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해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만약 개성공단 사업이 초기 계획대로 확장된다면 개성 주변에 관련 산업지대가 형성되고 이는 북한 전역에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침투시켜 북한의 개혁개방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다는 구체적 계획으로 실행되었다. 이것이 즉각적인 흡수통일이 수반할 수 있는 비용을 절약하는 ‘사실상의 통일’인 셈이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은 북한의 핵 포기 이후 지원이라는 점에서 선제적 지원을 억제하고 명확한 정경분리 원칙을 상대화한다는 점에서는 결정적 차이가 있으나 대규모 지원과 협력을 통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자 한다는 점에서 햇볕정책과 공통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통일세 제안이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햇볕정책의 주창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햇볕정책으로 되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미화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이 제시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통합’이라는 한반도 미래상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무엇일까. 어찌 보면 최근 통일 논의가 실종되었다는 지적은 타당할 수 있다. 민중운동 진영에서 통일 논의가 과거에 모든 쟁점 중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다는 사실을 회고해보면 놀라운 면도 있다. 그리고 민중운동의 대다수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햇볕정책의 지지자가 되었다는 것도 놀랍다. 왜 그런가. 필자는 그 이유가 남한사회의 변혁전망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한 사회의 변혁전망과 통일 문제에 대한 입장은 항상 쌍을 이뤘다. 남한 사회의 변혁전망이 소실되면 통일 문제에 대한 입장도 소실될 수밖에 없고, 햇볕정책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경축사에서 통일세 논의 제안과 함께 개헌 문제도 제기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사회의 변화 방향에 대한 뚜렷한 입장이 없다면 답하기 곤란한 지극히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출발점은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사회진보연대는 노동자운동연구소의 출범을 준비하며 <경제위기 대응평가와 노동자운동의 과제>라는 제목의 사회운동학교를 진행했다. 그 결과물을 이번 특집으로 묶었다. 비슷한 이름의 특집이 이전에도 있었으나 논점을 가다듬어 활동가들의 토론을 촉발시키려는 의도로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질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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