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를 내걸고 싸우는 이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복지가 아니다
민중의 복된 삶을 향한 열망과 그들의 노동, 그리고 투쟁들
농성을 접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출입을 거부합니다”
때 이른 날치기로 국회 문이 닫힌 다음 날인 12월 9일, 농성 해단식을 갖고 나오던 조계사 정문에 내걸린 현수막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농성 며칠 더 할 걸 그랬네...’ 하는 헛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활이 어려운 국민에게 필요한 급여를 행하여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기초법) 시행 10년을 맞아 전개하였던 법 개정을 위한 농성은 한나라당의 기습 날치기 예산안 통과를 통해 그렇게 끝이 났다. 10년 동안 가난한 이들을 복지의 사각지대를 내몰아온 부양의무자 기준, 생계를 보장하지 못하는 절망적 빈곤선 최저생계비, 이제 제발 바꿔보자는 열망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2002년 죽음으로 기초법의 실상을 알린 최옥란 열사의 명동성당 농성, 2005년 기초법 전면 개정을 위한 국회 앞 농성에 이어, 2010년 기초법 개정을 위한 조계사 천막농성을 11월 15일부터 25일간 전개하였지만, 그 노력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마무리된 것이다. 이번 농성은 가장 기초적인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410만 가난한 이들에 대해 ‘친서민 복지’ 운운하는 이명박 정부와 국회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를 가늠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결과는 “생계급여 축소, 사각지대 해소 계획 없음. 최저생계비 이만하면 살만하다” 였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러든 말든’이었다. 날치기 그 난리 통에 ‘형님예산’, ‘사모님예산’ 챙길 정신은 있어도 복지예산 챙길 정신은 없었다. 오죽 정신이 없었으면 조계종 총무원장과 약속했다던 템플스테이 예산도 못 챙겨 빈축을 샀겠는가?
빈곤에 대한 기초법의 해답
이번 농성은 빈곤사회연대가 출범 당시부터 강조해왔던 기초법의 중요성과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직하려 한 일련의 시도들을 중간 결산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 생산적 복지의 대표적 정책 중 하나였던 기초법은 복지정책의 획기적 진전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으며, 빈곤문제-사회정책과 관련한 중대한 쟁점을 내포한 것이었다. 쟁점들에 대한 기초법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가난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초법 : 정하기 나름이지만, 전문가와 정부가 정하면 된다.
둘째, 빈민이란 누구인가?
기초법 : 소득과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금액)을 모두 합쳐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 소득이 전혀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사람. 수급자에서 탈피하면 ‘탈수급, 탈빈곤’이니까.
셋째, 빈민에 대한 부양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기초법 : 가족.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부모를 완전히 부양할 수 있다. 부양의무자 가구 소득이 최저생계비의 130%만 넘으면 부모 또는 자식의 생계를 완전히 책임질 만큼 ‘살만하다’는 것이다.
넷째, 빈곤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기초법 : 없다.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은 죽지 않을 정도의 생계지원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고 조금이라도 일할 수 있다면 (자활을 이룰 수 없는) 자활사업에 참여하거나, 아마도 일하고 있을 테니 추정소득을 매기겠다.
조그마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빈민
기초법은 기존 생활보호제도가 65세 이상 노인인구과 18세 미만의 아동, 임산부 및 노동능력이 완전히 없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국한되어 지원되던 것을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최저생계비 개념을 도입하여 빈곤선의 지표로서 기능하는 제도로 도입되었으며,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수급권자로 권리개념을 도입한 획기적인 제도로 선전되어 왔다. 그러나 낮은 최저생계비와 빈곤의 책임을 개인과 가족에게 남겨두는 부양의무자 기준, 노동을 강제사항으로 전제하는 조건부수급조항 등 진입장벽과 거름장치를 동시에 고안하였다.
현행 최저생계비는 3년마다 한 번 계측조사를 실시하여 중앙생활보장위원회를 통해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한 달 식비, 광열·수도비, 주거비, 보건의료비 얼마얼마 등 연구자들이 책정하는 기준을 절대적인 지표로 삼아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균소득 같은 상대 지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기초법 상 최저생계비는 한국사회의 빈곤선이자 복지제도 수급의 중요한 기준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1년부터 적용되는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 532,583원 4인 가구 1,439,413원이며 이는 도시근로자가구 평균소득의 30% 수준이다. 이는 제도 도입 당시 40% 수준에서 10년간 10% 이상 그 상대적 수준이 뚝뚝 떨어진 결과다.
부양의무자 기준과 비현실적인 재산기준 등은 2009년 발표된 정부 공식 통계로 410만 명에 달하는 사각지대를 낳았다. 수급자로 살아온 이들의 일상은 아주 조그만 희망마저 가질 수 없는 빈곤고착상태에 빠져있었다. 한 번 넘어진 삶은 일어설 줄을 몰랐다. 급작스러운 실직과 질병, 개발로 인한 삶의 터전 붕괴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만들어냈지만, 진입장벽을 뚫고 기초생활수급자 된 이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일을 해서 재기의 기반을 만드는 것도 제대로 된 일자리 지원을 통해 빈곤의 감옥을 벗어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빈곤에 맞선 주체 조직과 연대
빈곤사회연대는 기초법 연석회의에서 출발하였다. 내가 빈곤사회연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2006년 당시, 빈곤에 맞선 투쟁과 빈민들의 조직-재조직화를 위한 운동은 노동권-생활권이라는 화두로 전개되었다. 빈곤에 대한 해법은 복지국가가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실업)노동자들 자신이 노동권을 쟁취해내는 운동 속에서, 부동산 투기와 철거폭력에 무너져온 민중들이 생활권을 쟁취하는 운동에서 쟁취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정책사업이나 구제사업보다는 연대운동을 지향했다. 최저임금 현실화가 시급했고, 막개발과 강제철거가 없어지는 것이 시급했고, 공공서비스, 보건의료가 시장화 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시급했다. 무려 41개 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 왔다.
또한 무엇보다 실업-빈곤에 맞선 대중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체 형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연대운동과 동시에 주체를 조직하는 운동이 필요했다.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직하기 위한 실태조사, 서명, 선전전, 토론회, 증언대회, 집회, 문화제, 영화제, 선언대회를 했다. 철거민-노점상이 사회운동과 조우할 수 있도록 만나고 연결하고 소통하고 연대하였다. 스스로의 사안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서는 주체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었다.
그 사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했고, 노점상이 목을 맸고, 철거민이 불타 죽었다. 죽음을 막을 수 없었고,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죽음들을 우리 모두에 대한 생명의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못 했다.
우리가 진정 말하고 싶고, 싸우는 것은 민중의 삶과 노동이다
너도 나도 복지를 얘기하고 있다. 전면무상급식이 현금폭탄과 같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으로 파업의 근거를 대는 오세훈의 논리는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가 떠드는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은 일견 타당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간 복지의 외피를 쓴 노동유연화, 복지와 나란히 세워진 사회서비스 시장화, 복지를 핑계로 한 투기성 개발을 보지 못했는가? 그런데도 ‘복지국가를 향한 진보대연합’이란다. 한나라당의 복지예산 삭감 날치기를 규탄하는 이상의 무슨 실천을 할 것인가? 폐허 위에 휘황찬란한 복지국가 깃발을 꽂아, 온갖 철학과 담론을 동원해 세상이 바뀌는 것 같은 호들갑이 지나간 뒤에, 그 알량한 사회안전망이 후두둑 균열을 내며 뜯어지던 일들을 모두 잊었는가?
복지를 내걸고 싸우는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복지가 아니다. 오세훈이 복지를 내걸고 파업투쟁을 벌이는 게 복지가 핵심 이슈가 아니듯 말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도 복지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며 노동이다. 한편에서는 소실된 민중연대운동을 복원하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하지만 소실된 것은 민중연대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다. 숱한 죽어간 이들이 몸에 새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썩어 없어지기도 전에, 이렇게 급속하게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 놀랍다.
끝
기초법 관련 활동이 많아지면서 사무실로 걸려오는 상담전화가 잦다.
“대학생 아들이 휴학하고 알바를 몇 달 뛰었는데, 아들이 휴학했으니 부양의무가 있다며 그 때문에 수급권이 박탈될 상황에 놓였다” - 인천에 사는 중증장애인 어머니.
“허리디스크로 동사무소에 한 번 가기 어려운데 근로능력평가 결과 근로능력자로 분류되어 다음 달부터 추정소득을 매기겠다는 공무원의 전화를 받았다” - 서울에 사는 61세 할머니.
“60만 원을 받는 인구주택총조사 알바를 했는데 수급비에서 근로소득을 깎아서 지급하겠다고 한다” - 학교에 다니는 아이 한 명과 함께 사는 수급자 어머니 가장.
다시 한번! 우리가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순간들이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복지를, 복된 민중의 삶을 향한 열망을 모르면 곤란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민중을 빈곤의 나락으로 내몬 죄, 민중 생존을 외면한 채 정치놀음과 투기행위를 일삼은 죄를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많은 이들이 2011-12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저들의 정치놀음에 또다시 휘말린다면 그걸로 끝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출입을 거부합니다”
때 이른 날치기로 국회 문이 닫힌 다음 날인 12월 9일, 농성 해단식을 갖고 나오던 조계사 정문에 내걸린 현수막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농성 며칠 더 할 걸 그랬네...’ 하는 헛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활이 어려운 국민에게 필요한 급여를 행하여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기초법) 시행 10년을 맞아 전개하였던 법 개정을 위한 농성은 한나라당의 기습 날치기 예산안 통과를 통해 그렇게 끝이 났다. 10년 동안 가난한 이들을 복지의 사각지대를 내몰아온 부양의무자 기준, 생계를 보장하지 못하는 절망적 빈곤선 최저생계비, 이제 제발 바꿔보자는 열망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2002년 죽음으로 기초법의 실상을 알린 최옥란 열사의 명동성당 농성, 2005년 기초법 전면 개정을 위한 국회 앞 농성에 이어, 2010년 기초법 개정을 위한 조계사 천막농성을 11월 15일부터 25일간 전개하였지만, 그 노력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마무리된 것이다. 이번 농성은 가장 기초적인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410만 가난한 이들에 대해 ‘친서민 복지’ 운운하는 이명박 정부와 국회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를 가늠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결과는 “생계급여 축소, 사각지대 해소 계획 없음. 최저생계비 이만하면 살만하다” 였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러든 말든’이었다. 날치기 그 난리 통에 ‘형님예산’, ‘사모님예산’ 챙길 정신은 있어도 복지예산 챙길 정신은 없었다. 오죽 정신이 없었으면 조계종 총무원장과 약속했다던 템플스테이 예산도 못 챙겨 빈축을 샀겠는가?
빈곤에 대한 기초법의 해답
이번 농성은 빈곤사회연대가 출범 당시부터 강조해왔던 기초법의 중요성과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직하려 한 일련의 시도들을 중간 결산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 생산적 복지의 대표적 정책 중 하나였던 기초법은 복지정책의 획기적 진전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으며, 빈곤문제-사회정책과 관련한 중대한 쟁점을 내포한 것이었다. 쟁점들에 대한 기초법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가난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초법 : 정하기 나름이지만, 전문가와 정부가 정하면 된다.
둘째, 빈민이란 누구인가?
기초법 : 소득과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금액)을 모두 합쳐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 소득이 전혀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사람. 수급자에서 탈피하면 ‘탈수급, 탈빈곤’이니까.
셋째, 빈민에 대한 부양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기초법 : 가족.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부모를 완전히 부양할 수 있다. 부양의무자 가구 소득이 최저생계비의 130%만 넘으면 부모 또는 자식의 생계를 완전히 책임질 만큼 ‘살만하다’는 것이다.
넷째, 빈곤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기초법 : 없다.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은 죽지 않을 정도의 생계지원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고 조금이라도 일할 수 있다면 (자활을 이룰 수 없는) 자활사업에 참여하거나, 아마도 일하고 있을 테니 추정소득을 매기겠다.
조그마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빈민
기초법은 기존 생활보호제도가 65세 이상 노인인구과 18세 미만의 아동, 임산부 및 노동능력이 완전히 없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국한되어 지원되던 것을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최저생계비 개념을 도입하여 빈곤선의 지표로서 기능하는 제도로 도입되었으며,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수급권자로 권리개념을 도입한 획기적인 제도로 선전되어 왔다. 그러나 낮은 최저생계비와 빈곤의 책임을 개인과 가족에게 남겨두는 부양의무자 기준, 노동을 강제사항으로 전제하는 조건부수급조항 등 진입장벽과 거름장치를 동시에 고안하였다.
현행 최저생계비는 3년마다 한 번 계측조사를 실시하여 중앙생활보장위원회를 통해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한 달 식비, 광열·수도비, 주거비, 보건의료비 얼마얼마 등 연구자들이 책정하는 기준을 절대적인 지표로 삼아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균소득 같은 상대 지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기초법 상 최저생계비는 한국사회의 빈곤선이자 복지제도 수급의 중요한 기준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1년부터 적용되는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 532,583원 4인 가구 1,439,413원이며 이는 도시근로자가구 평균소득의 30% 수준이다. 이는 제도 도입 당시 40% 수준에서 10년간 10% 이상 그 상대적 수준이 뚝뚝 떨어진 결과다.
부양의무자 기준과 비현실적인 재산기준 등은 2009년 발표된 정부 공식 통계로 410만 명에 달하는 사각지대를 낳았다. 수급자로 살아온 이들의 일상은 아주 조그만 희망마저 가질 수 없는 빈곤고착상태에 빠져있었다. 한 번 넘어진 삶은 일어설 줄을 몰랐다. 급작스러운 실직과 질병, 개발로 인한 삶의 터전 붕괴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만들어냈지만, 진입장벽을 뚫고 기초생활수급자 된 이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일을 해서 재기의 기반을 만드는 것도 제대로 된 일자리 지원을 통해 빈곤의 감옥을 벗어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빈곤에 맞선 주체 조직과 연대
빈곤사회연대는 기초법 연석회의에서 출발하였다. 내가 빈곤사회연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2006년 당시, 빈곤에 맞선 투쟁과 빈민들의 조직-재조직화를 위한 운동은 노동권-생활권이라는 화두로 전개되었다. 빈곤에 대한 해법은 복지국가가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실업)노동자들 자신이 노동권을 쟁취해내는 운동 속에서, 부동산 투기와 철거폭력에 무너져온 민중들이 생활권을 쟁취하는 운동에서 쟁취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정책사업이나 구제사업보다는 연대운동을 지향했다. 최저임금 현실화가 시급했고, 막개발과 강제철거가 없어지는 것이 시급했고, 공공서비스, 보건의료가 시장화 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시급했다. 무려 41개 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 왔다.
또한 무엇보다 실업-빈곤에 맞선 대중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체 형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연대운동과 동시에 주체를 조직하는 운동이 필요했다.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직하기 위한 실태조사, 서명, 선전전, 토론회, 증언대회, 집회, 문화제, 영화제, 선언대회를 했다. 철거민-노점상이 사회운동과 조우할 수 있도록 만나고 연결하고 소통하고 연대하였다. 스스로의 사안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서는 주체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었다.
그 사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했고, 노점상이 목을 맸고, 철거민이 불타 죽었다. 죽음을 막을 수 없었고,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죽음들을 우리 모두에 대한 생명의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못 했다.
우리가 진정 말하고 싶고, 싸우는 것은 민중의 삶과 노동이다
너도 나도 복지를 얘기하고 있다. 전면무상급식이 현금폭탄과 같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으로 파업의 근거를 대는 오세훈의 논리는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가 떠드는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은 일견 타당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간 복지의 외피를 쓴 노동유연화, 복지와 나란히 세워진 사회서비스 시장화, 복지를 핑계로 한 투기성 개발을 보지 못했는가? 그런데도 ‘복지국가를 향한 진보대연합’이란다. 한나라당의 복지예산 삭감 날치기를 규탄하는 이상의 무슨 실천을 할 것인가? 폐허 위에 휘황찬란한 복지국가 깃발을 꽂아, 온갖 철학과 담론을 동원해 세상이 바뀌는 것 같은 호들갑이 지나간 뒤에, 그 알량한 사회안전망이 후두둑 균열을 내며 뜯어지던 일들을 모두 잊었는가?
복지를 내걸고 싸우는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복지가 아니다. 오세훈이 복지를 내걸고 파업투쟁을 벌이는 게 복지가 핵심 이슈가 아니듯 말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도 복지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며 노동이다. 한편에서는 소실된 민중연대운동을 복원하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하지만 소실된 것은 민중연대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다. 숱한 죽어간 이들이 몸에 새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썩어 없어지기도 전에, 이렇게 급속하게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 놀랍다.
끝
기초법 관련 활동이 많아지면서 사무실로 걸려오는 상담전화가 잦다.
“대학생 아들이 휴학하고 알바를 몇 달 뛰었는데, 아들이 휴학했으니 부양의무가 있다며 그 때문에 수급권이 박탈될 상황에 놓였다” - 인천에 사는 중증장애인 어머니.
“허리디스크로 동사무소에 한 번 가기 어려운데 근로능력평가 결과 근로능력자로 분류되어 다음 달부터 추정소득을 매기겠다는 공무원의 전화를 받았다” - 서울에 사는 61세 할머니.
“60만 원을 받는 인구주택총조사 알바를 했는데 수급비에서 근로소득을 깎아서 지급하겠다고 한다” - 학교에 다니는 아이 한 명과 함께 사는 수급자 어머니 가장.
다시 한번! 우리가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순간들이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복지를, 복된 민중의 삶을 향한 열망을 모르면 곤란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민중을 빈곤의 나락으로 내몬 죄, 민중 생존을 외면한 채 정치놀음과 투기행위를 일삼은 죄를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많은 이들이 2011-12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저들의 정치놀음에 또다시 휘말린다면 그걸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