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의 재건 없는 정치우선-정당중심론은 공허하고 위험하다
『정치의 발견』을 읽고
『정치의 발견』(폴리테이아, 2011)은 후마니타스 출판사 박상훈 대표의 강의를 책으로 엮어낸 소책자다. 2010년 11월에 진보신당 심상정 전대표가 운영하는 <정치 바로 아카데미>에서 한 5번의 강의를 짧게 풀어서 옮겼다. 박 대표는 최장집 교수의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유주의적인 정당 민주주의론을 지론으로 삼는 소장 논객이다.
그는 이 강연에서 “정치 우선”과 “정당 중심”의 민주주의를 주창한다. 경제가 정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정치적 의지가 경제보다 우월한 힘을 지닌다는 것이고,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당과 선거, 국가 통치의 정치가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지난 촛불 시위의 예를 들면서, 사회운동이란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불모의 흥분상태”에 불과하고, 현대 정치는 곧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선거, 대의제 민주주의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과연 어쩌자는 것일까? 그가 진보정당과 진보운동진영에게 결론적으로 던지는 훈수는 운동정치론과 사회운동적 진보정당론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또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는 반정치적인 무정부주의이거나 한낱 비정치적인 사회 문화 이론에 불과하다. 어느 대목 하나하나가 그냥 듣고 넘기기 어려운 주장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의 설명은 매우 짧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몇 마디 언급들이어서, 이 책만 읽고 어떤 체계적인 비판으로 대응하기란 난감한 일이다.
다만 그는 강의 중에 “진보에게 말 걸기”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박 대표가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에 당혹해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던 진보정치 내부의 활동가들과 그들의 고민이다. 서평이라는 지면의 제약 아래, 몇몇 핵심적인 주제들에 대한 단상을 오늘날 어려움에 처한 진보정치 운동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낡디 낡은 정치의 재발견
박 대표는 대중의 정치혐오와 무관심을 언급하면서, 대중을 비웃거나 정치가들을 욕하는 것으로 반정치 정서에 편승하지 말고, 좋은 정치, 유능한 정당과 힘 있는 지도자를 대표로 세우는 것만이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그가 이상적인 지도자의 상이라고 제시하는 이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다. 갑자기 제국주의 국가 수장의 어록과 위인전이 불쑥불쑥 등장하는 통에, 도무지 박 대표의 주장을 진지하게 살펴볼 기운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주장은 상대적 진보성을 갖춘 흑인 지도자에 대한 칭송이 아니라, 베버의 정치지도자론, 카리스마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카리스마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옹립하고, 그의 의지 아래 (자발적으로 지도자를 옹립한) 대중의 운명을 위탁할 때에만, 정파적 갈등과 관료화로 무력해진 국가의 번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베버의 이론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의 전쟁을 끝까지 지지하고, 제국 패망 이후에는 히틀러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박 대표는 (이런 역사적 교훈에는 아랑곳없이) 민주주의를 대중의 자기통치와 인민주권의 실현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비웃고 폄하하면서, 다시 또다시 대중을 수동적인 거수기로 전락시키고, 위대한 지도자와 정당만이 모든 문제의 해법이라는 낡디 낡은 주장을 무슨 대단한 새로운 정치의 발견인 것처럼 굴며 호들갑이다.
경제위기 분석의 공백과 정당에 대한 종교적 신념
반정치주의를 극복해야하는 것은 박 대표와 그가 기다리는 정치지도자-정당만의 소명이 아니라, 노동자정치운동의 주된 관심사이고 민중 민주주의 실현의 중심 과제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반정치주의를 양산하는 정치위기의 구조적 원인 분석이다. 하지만 박 대표에게 그런 분석은 없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규정은 있지만, 그것은 그저 민주주의가 어려움에 처했고, 그 책임은 진보의 무능과 보수 독점적 정치체제 때문이라고 개탄하는 수준의 현상묘사에 불과하다. 애당초 정치적 의지가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독일 관념론적인 정치철학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정치위기를 경제위기의 산물로 보지도 않고, 경제위기 비판의 관점과 과학적 분석의 필요성도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해결 방안은 현대 민주주의는 고대의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라는 단순한 개념규정 명제로부터 손쉽게 도출되어 버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설명과 주장은 정당 민주주의론 자체가 어떤 문제를 지니는지를 따지기 전에조차,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것이 하나의 논리적 모순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현대정치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위기에 빠진 마당에 그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대정치의 본질은 정당정치라는 개념규정만을 되뇐다. 그러고 나서는 정당정치가 본질이니, 정치를 되살릴 대안은 ‘좋은 정당’과 강한 리더십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제까지 통치정당과 선거정당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온 현대정치가 오늘날 대중의 지탄을 받으며 무능력해진 것이 현실 정치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정당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꾸거나, 정당 외부의 사회운동과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어떻게 결합시켜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 안에는 사회운동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정당에 대한 맹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현재의 위기가 어떤 정세적 역사적 조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지, 또 실제로 무엇을 바꿔야하는 것인지, 의미도 내용도 알 길이 없는 주장이다. 촛불시위 평가로부터 노무현 정권 평가, 이명박 정권 등장과 이후 전망까지, 무슨 질문을 해도 언제나 ‘좋은 정당’이 없는 것이 원인이고, 그걸 만드는 것이 답이라는 건, 어떤 문제해결 방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당과 선거정치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적 포교활동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경제위기 비판과 정치위기 극복의 지점
박 대표가 묘사하는 정치 위기의 상황인식은 매우 불철저하고 부분적인 현상 묘사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정치 위기의 관점이 없다. 그는 다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민주정권으로 오인하고, 이들 정권의 실패와 이명박 보수정권의 재등장으로 인한 대중의 정치적 실망과 이탈을 (정당)민주주의의 위기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단순히 진보진영의 통치(및 선거)정치 기술적 미숙함이나 사회운동의 순진함이 보수 독점적인 정당체제에게 패배를 자초했는데, 좌파는 대중의 보수화를 비난하고 있다고 장탄식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정치위기의 시대를 분석하는 것은 대중을 비난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박 대표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내놓는 현대 정치정당이야말로 위기에 빠진 현대 정치(민족국가)가 내장해온 핵심적인 정치제도이며, 그것이야말로 대중의 정치적 배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작금의 민족국가의 위기를 근본적인 정치의 위기로 이끄는 매개이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위기의 주인공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게 된 정치위기, 곧 정당, 민족국가,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현대정치의 근간인 민족국가의 대중적 토대가 잠식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원한다. 그로인해 민족국가가 더 이상 보편적인 정치공동체로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적대적 행위와 사회 현상들은 여기저기서 분출되고 있지만, 이것들이 저항의 연대 속에서 연계점을 형성하지 못한 채, 낮은 투표율과 정치혐오로 드러나는 대중의 탈정치적 이탈과 반정치적 정서를 키우고 있다. 위기는 전례 없는 규모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차원에서 커져가고 있지만, 그것을 돌파할 정치는 실종되거나 외면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처럼 정치에 대한 대중적인 통념이 위기에 빠지고 좌우파를 불문하고 모든 정치정당의 무능이 드러나고 대중적 반감이 고조되는 현실은 근원적인 정치위기, 즉 경제위기와 결합되는 현대 정당(민족국가)정치의 구조적 위기를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정치를 소생시키고, 사회운동을 재활성화 하는 것만이, 오작동과 정지를 반복하고 있는 현대 정당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출발점일 따름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반정치주의인가?
박 대표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구조 비판에 이론적인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활용할 뿐이라던가, 급진적인 예술비평이나 어울리는 이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집단적인 실천들은 (정치를 포기하거나 반대하는) 자족적인 사회운동일 뿐 정치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위기와 그것의 객관적 원인에 대한 분석은 위기를 전화시키고자 하는 집단적 실천의 전제조건이고, 그러한 결합과 실천을 통해 대중이 자기 해방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곧 본연의 정치다. 사회변혁의 집단적 실천과 대중 주체화 과정이 정치(권력)로부터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로부터 배제되고, 그것에 저항하고 그 같은 지배/피지배관계를 역전시켜가는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전체 역사를 추동하는 계급투쟁의 정치다. 이것을 정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자본주의의 역사를 모른다고 하거나, 노동자 정치운동을 배제하려는 의도라고 볼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박 대표의 주장이나 바람과는 달리, 오늘날 위기에 빠진 정치를 개조하고자 하는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운동과 결합되는 과학적 이론으로 여전히 우회할 수 없는 살아있는 대안이념, 대중의 사상이념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는 애초에 현대 정치비판의 기획으로 출발했다.4)
다만 문제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현대 정치비판의 기획으로 출발한 마르크스주의가 스스로 민족국가의 이념, 통치정당의 이념으로 변질되면서, 정작 현대 정치 위기의 한복판에 위치해버렸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비판과 변질적 동화, 붕괴와 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현대 정치가 직면한 위기를 변혁하고자하는 문제 해결의 단서를 가장 풍부하게 지니는 대안이념 또한 마르크스주의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로 대표되는 비판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자신의 개조 시도임과 동시에, 이런 면에서 (현대) 정치의 개조 작업으로 불리어 왔다.
정치 우선? 다수파 전략? 진정한 다수파전략은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전략이다
박 대표는 근본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적인 개량을 외면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치를 불러들였다고 단언한다. 혁명이 아니라면 안 된다는 식의 혁명적 대기주의, 좌익적 경제주의를 벗어나서, 정치지도자와 정당의 의지를 추동력으로 현실(경제)을 돌파하는 가능주의와 점진적 개량주의로 나가자고 주장한다. 참으로 세월의 변화를 절감케 하는 궤변이다. 공산주의·사회주의 운동 역사에 대한 망각이 만연해진 오늘날의 세태가 이런 주장이 역사 날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려주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먼저 간단해 보이지만 개념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짚자. 혁명적 대기주의니 경제주의니 하는 비판은 레닌이 독일의 집권 사민당의 원조인 카우츠키를 향해 던졌던 비판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던 것은 혁명진영이 아니라, 개량주의, 점진주의 세력이었다. 반면 혁명운동 진영은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이 야기하는 혼란과 무기력의 상황을 현실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통해 맞서 이겨 내야할 객관적 조건으로 분석했다. 이로써 비로소 그들은 위기라는 객관적 조건을 변혁하기위한 주체적 행동, 즉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 대표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아닌 점진주의적인 실천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좌파를 향해 혁명적 대기주의라는 낙인을 던지는 것이다. 그건 한낱 언어도단일 따름이다.
다음으로, 혁명세력의 무능, 특히 정치를 우선시 하지 못한 무능이 나치를 불러들였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는 매우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집권 사민당은 1919년 독일 혁명부터 1933년 나치 집권 전야인 10년 동안 아래로부터의 대중주체 형성과 사회변혁에 힘쓰던 공산주의자를 제거하고 평의회 운동을 해체시켰다. 그러면서 집권 사민당은 정치를 우선시했다. 자기 완결적인 노동 친화적 분배, 복지 헌법체제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통치가 노동자 평의회의 정치를 대신한 것이다. 혁명이 아니라 선거와 의회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되도록 생산현장의 정치, 거리의 정치를 제거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면서, 점진적인 사회 개혁의 효과보다는 계급내부 분할과 경쟁으로 나타났다. 대중운동적인 토대를 잃어버린 노동자계급은 경제위기가 닥치자 각 부문별, 계층별로 끊임없이 분열되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가운데 지배 계급조차 수출자본가와 내수 보호무역지향 자본가로 갈라졌다. 계급 대중운동과 과학적 이념의 결합이 해체된 이후, 한정된 자원을 각각의 이익집단화된 계급집단들이 행정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 정치가 변질된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는 와중에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회운동에 대한 정치우선’의 의회정치, 경제위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 없는 탈이념화된 분배(행정) 정치우선을 추구했다. 그 결과 대중들은 점점 더 정치자체를 불신하게 되고, 위기는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치는 이런 정치 경제적 토양위에서 등장한 것이다. 경제위기 비판이니 변혁이니 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과학이론에 대한 제거가 완료된 뒤에야, 이제는 돈이 없으면 전쟁을 해서라도 돈을 마련해주겠다는 식의 진짜 ‘정치 우선’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그것의 생산체계이자 권력기관인 평의회운동이 철저히 조롱받고 제거된 뒤에야, 사회운동에 대한 확실한 우위에 입각한 강한 정치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나치가 독일제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일찍이 앞서서 공고히 다져온 과학적인 경제 비판에 대한 ‘정치 우선’주의, 사회운동에대한 국가(정당) ‘정치 우선’론이 나치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다만 부족했던 것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고, 국가 관료주의를 대신할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의 지도력이었을 따름이다.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서, 좋은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현 시기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사회운동의 활성화이고, 대중적인 사회운동의 우위 아래에서 정당 정치가 재결합되는 새로운 방식이 창출될 수밖에 없다. 당장의 성과가 더딜지 몰라도 대안은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길속에서 아래로부터 계급적 통일성을 재형성하는 과정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박 대표도 비슷한 맥락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다수파 전략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대체로 선거득표력이 더 높은 보수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선거연합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계급적 원칙, 이념적 중심을 지키려는 세력은 소수파 근성에 찌든 집단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다수파는 노동자계급대중이다. 다수 노동자대중을 주체화시키지 못하고 투표 거수기로 동원할 뿐인 대의제 정치에게 합당한 이름은 다수파 정치는커녕 소수 정상배 정치가 적절할 따름이다.
견강부회하는 논리로 사회운동,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비하하고, 과학적 이념에 대한 조롱과 어설픈 반지성주의를 대중성이라고 강변하기 전에 대중의 지성을 고취하는 정치활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고,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일렁이는 현장의 대중들과 함께 되살려 내야할 진정한 노동자 정치 말이다.
그는 이 강연에서 “정치 우선”과 “정당 중심”의 민주주의를 주창한다. 경제가 정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정치적 의지가 경제보다 우월한 힘을 지닌다는 것이고,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당과 선거, 국가 통치의 정치가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지난 촛불 시위의 예를 들면서, 사회운동이란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불모의 흥분상태”에 불과하고, 현대 정치는 곧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선거, 대의제 민주주의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과연 어쩌자는 것일까? 그가 진보정당과 진보운동진영에게 결론적으로 던지는 훈수는 운동정치론과 사회운동적 진보정당론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또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는 반정치적인 무정부주의이거나 한낱 비정치적인 사회 문화 이론에 불과하다. 어느 대목 하나하나가 그냥 듣고 넘기기 어려운 주장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의 설명은 매우 짧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몇 마디 언급들이어서, 이 책만 읽고 어떤 체계적인 비판으로 대응하기란 난감한 일이다.
다만 그는 강의 중에 “진보에게 말 걸기”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박 대표가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에 당혹해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던 진보정치 내부의 활동가들과 그들의 고민이다. 서평이라는 지면의 제약 아래, 몇몇 핵심적인 주제들에 대한 단상을 오늘날 어려움에 처한 진보정치 운동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낡디 낡은 정치의 재발견
박 대표는 대중의 정치혐오와 무관심을 언급하면서, 대중을 비웃거나 정치가들을 욕하는 것으로 반정치 정서에 편승하지 말고, 좋은 정치, 유능한 정당과 힘 있는 지도자를 대표로 세우는 것만이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그가 이상적인 지도자의 상이라고 제시하는 이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다. 갑자기 제국주의 국가 수장의 어록과 위인전이 불쑥불쑥 등장하는 통에, 도무지 박 대표의 주장을 진지하게 살펴볼 기운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주장은 상대적 진보성을 갖춘 흑인 지도자에 대한 칭송이 아니라, 베버의 정치지도자론, 카리스마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카리스마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옹립하고, 그의 의지 아래 (자발적으로 지도자를 옹립한) 대중의 운명을 위탁할 때에만, 정파적 갈등과 관료화로 무력해진 국가의 번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베버의 이론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의 전쟁을 끝까지 지지하고, 제국 패망 이후에는 히틀러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박 대표는 (이런 역사적 교훈에는 아랑곳없이) 민주주의를 대중의 자기통치와 인민주권의 실현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비웃고 폄하하면서, 다시 또다시 대중을 수동적인 거수기로 전락시키고, 위대한 지도자와 정당만이 모든 문제의 해법이라는 낡디 낡은 주장을 무슨 대단한 새로운 정치의 발견인 것처럼 굴며 호들갑이다.
경제위기 분석의 공백과 정당에 대한 종교적 신념
반정치주의를 극복해야하는 것은 박 대표와 그가 기다리는 정치지도자-정당만의 소명이 아니라, 노동자정치운동의 주된 관심사이고 민중 민주주의 실현의 중심 과제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반정치주의를 양산하는 정치위기의 구조적 원인 분석이다. 하지만 박 대표에게 그런 분석은 없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규정은 있지만, 그것은 그저 민주주의가 어려움에 처했고, 그 책임은 진보의 무능과 보수 독점적 정치체제 때문이라고 개탄하는 수준의 현상묘사에 불과하다. 애당초 정치적 의지가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독일 관념론적인 정치철학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정치위기를 경제위기의 산물로 보지도 않고, 경제위기 비판의 관점과 과학적 분석의 필요성도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해결 방안은 현대 민주주의는 고대의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라는 단순한 개념규정 명제로부터 손쉽게 도출되어 버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설명과 주장은 정당 민주주의론 자체가 어떤 문제를 지니는지를 따지기 전에조차,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것이 하나의 논리적 모순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현대정치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위기에 빠진 마당에 그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대정치의 본질은 정당정치라는 개념규정만을 되뇐다. 그러고 나서는 정당정치가 본질이니, 정치를 되살릴 대안은 ‘좋은 정당’과 강한 리더십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제까지 통치정당과 선거정당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온 현대정치가 오늘날 대중의 지탄을 받으며 무능력해진 것이 현실 정치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정당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꾸거나, 정당 외부의 사회운동과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어떻게 결합시켜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 안에는 사회운동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정당에 대한 맹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현재의 위기가 어떤 정세적 역사적 조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지, 또 실제로 무엇을 바꿔야하는 것인지, 의미도 내용도 알 길이 없는 주장이다. 촛불시위 평가로부터 노무현 정권 평가, 이명박 정권 등장과 이후 전망까지, 무슨 질문을 해도 언제나 ‘좋은 정당’이 없는 것이 원인이고, 그걸 만드는 것이 답이라는 건, 어떤 문제해결 방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당과 선거정치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적 포교활동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경제위기 비판과 정치위기 극복의 지점
박 대표가 묘사하는 정치 위기의 상황인식은 매우 불철저하고 부분적인 현상 묘사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정치 위기의 관점이 없다. 그는 다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민주정권으로 오인하고, 이들 정권의 실패와 이명박 보수정권의 재등장으로 인한 대중의 정치적 실망과 이탈을 (정당)민주주의의 위기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단순히 진보진영의 통치(및 선거)정치 기술적 미숙함이나 사회운동의 순진함이 보수 독점적인 정당체제에게 패배를 자초했는데, 좌파는 대중의 보수화를 비난하고 있다고 장탄식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정치위기의 시대를 분석하는 것은 대중을 비난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박 대표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내놓는 현대 정치정당이야말로 위기에 빠진 현대 정치(민족국가)가 내장해온 핵심적인 정치제도이며, 그것이야말로 대중의 정치적 배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작금의 민족국가의 위기를 근본적인 정치의 위기로 이끄는 매개이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위기의 주인공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게 된 정치위기, 곧 정당, 민족국가,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현대정치의 근간인 민족국가의 대중적 토대가 잠식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원한다. 그로인해 민족국가가 더 이상 보편적인 정치공동체로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적대적 행위와 사회 현상들은 여기저기서 분출되고 있지만, 이것들이 저항의 연대 속에서 연계점을 형성하지 못한 채, 낮은 투표율과 정치혐오로 드러나는 대중의 탈정치적 이탈과 반정치적 정서를 키우고 있다. 위기는 전례 없는 규모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차원에서 커져가고 있지만, 그것을 돌파할 정치는 실종되거나 외면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처럼 정치에 대한 대중적인 통념이 위기에 빠지고 좌우파를 불문하고 모든 정치정당의 무능이 드러나고 대중적 반감이 고조되는 현실은 근원적인 정치위기, 즉 경제위기와 결합되는 현대 정당(민족국가)정치의 구조적 위기를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정치를 소생시키고, 사회운동을 재활성화 하는 것만이, 오작동과 정지를 반복하고 있는 현대 정당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출발점일 따름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반정치주의인가?
박 대표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구조 비판에 이론적인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활용할 뿐이라던가, 급진적인 예술비평이나 어울리는 이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집단적인 실천들은 (정치를 포기하거나 반대하는) 자족적인 사회운동일 뿐 정치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위기와 그것의 객관적 원인에 대한 분석은 위기를 전화시키고자 하는 집단적 실천의 전제조건이고, 그러한 결합과 실천을 통해 대중이 자기 해방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곧 본연의 정치다. 사회변혁의 집단적 실천과 대중 주체화 과정이 정치(권력)로부터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로부터 배제되고, 그것에 저항하고 그 같은 지배/피지배관계를 역전시켜가는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전체 역사를 추동하는 계급투쟁의 정치다. 이것을 정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자본주의의 역사를 모른다고 하거나, 노동자 정치운동을 배제하려는 의도라고 볼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박 대표의 주장이나 바람과는 달리, 오늘날 위기에 빠진 정치를 개조하고자 하는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운동과 결합되는 과학적 이론으로 여전히 우회할 수 없는 살아있는 대안이념, 대중의 사상이념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는 애초에 현대 정치비판의 기획으로 출발했다.4)
다만 문제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현대 정치비판의 기획으로 출발한 마르크스주의가 스스로 민족국가의 이념, 통치정당의 이념으로 변질되면서, 정작 현대 정치 위기의 한복판에 위치해버렸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비판과 변질적 동화, 붕괴와 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현대 정치가 직면한 위기를 변혁하고자하는 문제 해결의 단서를 가장 풍부하게 지니는 대안이념 또한 마르크스주의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로 대표되는 비판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자신의 개조 시도임과 동시에, 이런 면에서 (현대) 정치의 개조 작업으로 불리어 왔다.
정치 우선? 다수파 전략? 진정한 다수파전략은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전략이다
박 대표는 근본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적인 개량을 외면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치를 불러들였다고 단언한다. 혁명이 아니라면 안 된다는 식의 혁명적 대기주의, 좌익적 경제주의를 벗어나서, 정치지도자와 정당의 의지를 추동력으로 현실(경제)을 돌파하는 가능주의와 점진적 개량주의로 나가자고 주장한다. 참으로 세월의 변화를 절감케 하는 궤변이다. 공산주의·사회주의 운동 역사에 대한 망각이 만연해진 오늘날의 세태가 이런 주장이 역사 날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려주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먼저 간단해 보이지만 개념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짚자. 혁명적 대기주의니 경제주의니 하는 비판은 레닌이 독일의 집권 사민당의 원조인 카우츠키를 향해 던졌던 비판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던 것은 혁명진영이 아니라, 개량주의, 점진주의 세력이었다. 반면 혁명운동 진영은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이 야기하는 혼란과 무기력의 상황을 현실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통해 맞서 이겨 내야할 객관적 조건으로 분석했다. 이로써 비로소 그들은 위기라는 객관적 조건을 변혁하기위한 주체적 행동, 즉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 대표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아닌 점진주의적인 실천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좌파를 향해 혁명적 대기주의라는 낙인을 던지는 것이다. 그건 한낱 언어도단일 따름이다.
다음으로, 혁명세력의 무능, 특히 정치를 우선시 하지 못한 무능이 나치를 불러들였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는 매우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집권 사민당은 1919년 독일 혁명부터 1933년 나치 집권 전야인 10년 동안 아래로부터의 대중주체 형성과 사회변혁에 힘쓰던 공산주의자를 제거하고 평의회 운동을 해체시켰다. 그러면서 집권 사민당은 정치를 우선시했다. 자기 완결적인 노동 친화적 분배, 복지 헌법체제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통치가 노동자 평의회의 정치를 대신한 것이다. 혁명이 아니라 선거와 의회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되도록 생산현장의 정치, 거리의 정치를 제거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면서, 점진적인 사회 개혁의 효과보다는 계급내부 분할과 경쟁으로 나타났다. 대중운동적인 토대를 잃어버린 노동자계급은 경제위기가 닥치자 각 부문별, 계층별로 끊임없이 분열되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가운데 지배 계급조차 수출자본가와 내수 보호무역지향 자본가로 갈라졌다. 계급 대중운동과 과학적 이념의 결합이 해체된 이후, 한정된 자원을 각각의 이익집단화된 계급집단들이 행정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 정치가 변질된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는 와중에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회운동에 대한 정치우선’의 의회정치, 경제위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 없는 탈이념화된 분배(행정) 정치우선을 추구했다. 그 결과 대중들은 점점 더 정치자체를 불신하게 되고, 위기는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치는 이런 정치 경제적 토양위에서 등장한 것이다. 경제위기 비판이니 변혁이니 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과학이론에 대한 제거가 완료된 뒤에야, 이제는 돈이 없으면 전쟁을 해서라도 돈을 마련해주겠다는 식의 진짜 ‘정치 우선’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그것의 생산체계이자 권력기관인 평의회운동이 철저히 조롱받고 제거된 뒤에야, 사회운동에 대한 확실한 우위에 입각한 강한 정치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나치가 독일제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일찍이 앞서서 공고히 다져온 과학적인 경제 비판에 대한 ‘정치 우선’주의, 사회운동에대한 국가(정당) ‘정치 우선’론이 나치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다만 부족했던 것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고, 국가 관료주의를 대신할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의 지도력이었을 따름이다.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서, 좋은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현 시기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사회운동의 활성화이고, 대중적인 사회운동의 우위 아래에서 정당 정치가 재결합되는 새로운 방식이 창출될 수밖에 없다. 당장의 성과가 더딜지 몰라도 대안은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길속에서 아래로부터 계급적 통일성을 재형성하는 과정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박 대표도 비슷한 맥락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다수파 전략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대체로 선거득표력이 더 높은 보수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선거연합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계급적 원칙, 이념적 중심을 지키려는 세력은 소수파 근성에 찌든 집단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다수파는 노동자계급대중이다. 다수 노동자대중을 주체화시키지 못하고 투표 거수기로 동원할 뿐인 대의제 정치에게 합당한 이름은 다수파 정치는커녕 소수 정상배 정치가 적절할 따름이다.
견강부회하는 논리로 사회운동,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비하하고, 과학적 이념에 대한 조롱과 어설픈 반지성주의를 대중성이라고 강변하기 전에 대중의 지성을 고취하는 정치활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고,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일렁이는 현장의 대중들과 함께 되살려 내야할 진정한 노동자 정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