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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1.5-6.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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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전선의 대의를 추구한 좌익 민족주의자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1958?)

정희찬 | 회원
의열단(義烈團)의 조직

김원봉은 독립달성의 방안으로 상정하고 있던 군대양성을 실현하기 위해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일어를 배우면서 독일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대독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간 후 서간도에서 농토를 구입하여 둔전(屯田: 군대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로서 중국 한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고 한국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 제도화되었다)을 설치하고 군대를 양성함으로써 독립전쟁을 준비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바뀐다. 김원봉은 민중의 폭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끊임없는 폭력”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김원봉은 고모부 황상규를 비롯한 민족해방운동의 선배들과 상의한 끝에 1919년 11월 길림에서 13인이 회합한 가운데, 공약의 첫 번째 항으로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천하기로” 다짐한다는 의미에서 의열단으로 명명된 단체를 결성하였다. 창설 회합에서 ①조선총독부 고관, ②군부수뇌, ③매국적(敵), ④친일파 거두, ⑤적의 밀정, ⑥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지방유지)에 더하여 일제의 압제에 놓여있는 대만 주민에 대한 후의와 동정의 차원에서 대만 총독을 포함하는 암살대상,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이 결정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일제의 중요 기관을 포함하는 파괴대상이 선정되었다.
이후 의열단은 1920~23년 동안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암살·파괴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사전에 발각되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특히 다량의 폭탄과 총기, 탄약 등을 조선으로 밀반입하여 거사를 도모하려던 제2차 암살·파괴운동이 적발되어 불발에 그친 이후 그 활동력은 점차 쇠퇴하였고 김원봉의 지도력 역시 손상되었다. 물론 부산·밀양경찰서 폭탄투척(1920년), 조선총독부 관내 폭탄투척(1921년), 도쿄 황궁 폭탄투척 시도(1923년)와 의열단의 검거소식은 대중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결코 민중의 폭동을 촉발한다는 애초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1924년 이후 조선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고조되는 사회주의 사상과 계급대중운동의 열기 속에서 개인적인 암살·파괴 행동이 지니는 분명한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김원봉은 기존의 아나키즘적인 암살·파괴노선을 폐기하였다.
그는 기존 민족운동의 논리( “계급사회 이전부터 존재하던 종족운동”)를 유지하면서도 계급해방의 임무를 지니는 민중운동으로서 민족운동의 성격을 규정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관점의 변화는 의열단의 위상과 노선상의 변화로 이어졌다.


반제국주의 투쟁과 황포군관학교에서의 군사교육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1925년 상해에서 전개된 반제국주의 투쟁이었다. 5월 15일 상해 공동조계 내의 일본인 기업에서 공장폐쇄에 항의하던 노동자집회에 일본 및 영국경찰이 발포하여 노동조합 간부가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인해 개별 기업의 노사분쟁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중국 민중의 반일·반제운동(5·30운동)으로 비화하였다. 당시 중국에 체류하던 조선인들은 이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의열단 역시 중국의 새로운 정세에 적극 동참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상해 임시정부 내 다수파가 열강의 동정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로 반제투쟁을 방관할 것을 주장한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 제국주의 본국의 피압박민중, 사회주의 소련 등으로 구성되는 세계적 규모의 반제통일전선을 제창하고 중국의 국민혁명을 그 속에 위치지은 중국국민당의 선언에 호응하였다. 김원봉 등은 의열단을 독립투쟁을 이끄는 정치단체(정당)로 탈바꿈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체계적인 군대양성을 위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였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이 당시 군벌과 대치하고 있던 상태에서 이들을 타도하고 국민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혁명군 양성 기관이었다. 김원봉의 입학은 단지 군사교육으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이들이 국민당의 북벌전쟁을 조선의 민족해방과 직결된 과제로 인식하고 직접 중국의 혁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당시 여운형도 국민당과 협력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중국통일=조선해방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김원봉 등의 판단은 중국 내 조선인 혁명가들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황포군관학교 경험을 통해 김원봉은 이후의 활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몇 가지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는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이수한 우수한 조선인 청년을 확보한 것이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조직사업을 전개하여 의열단을 확장시켜나갔다. 이들은 이후 중일전쟁 시기 조선의용대의 근간으로서 의열단의 조직적 기반이 된다. 둘째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에 걸친 인맥과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핵심적 군사교육기관으로서 교장이 장개석이었으며, 정치부 부주임은 바로 중국공산당의 주은래였다(당시는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재학 시절 쌓았던 국민당계 인물들과의 관계는 이후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정당 형태로 정비하고 조선의용대라는 조선인의 군대를 창설할 당시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물적 지원을 받는 데 유용한 것이었다. 주은래를 위시한 군관학교 교관 및 학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은 식민지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코민테른의 초기 노선, 즉 반제민족운동의 중요성과 그 조직형태로서 중국국민당과 같은 민족혁명당의 건설 필요성을 습득하고 유일당(唯一黨)운동, 민족통일전선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김원봉은 중국에서 그 자신이 공산당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또한 계급정당을 추구하지는 않았던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민중에 의한 혁명, 국제연대를 통한 혁명이라는 사회주의의 핵심요소를 수용했던 젊은 청년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전면에 등장했을 때 자연
스럽게 그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민족통일전선을 중시한 민족주의자 김원봉

김원봉과 의열단은 사회주의 많은 요소를 수용했으나 동시에 조선혁명의 민족적 성격을 항상 강조하면서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민족유일당의 건설을 자신들의 주된 과제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정치적 입장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 장개석 등 국민당 우파가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을 상대로 한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이 결렬되는 데 대한 위기감으로 상해의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유일독립당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의 반동적 분위기에 편승하는 상해임정의 반공적 태도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의열단의 활동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의열단은 일제 타도 및 봉건제도 타파와 더불어 대지주의 토지몰수, 중요 산업의 국가경영을 골간으로 하는 강령과 슬로건을 발표하면서 조직을 재정비하게 된다. 강령의 주된 내용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표방한 1926년 조선공산당의 강령과 거의 유사했다. 또한 김원봉은 1928년 3,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상해로 망명한 안광천 등의 공산주의자와 함께 조선의 계급대중운동을 조직·지도하기 위해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당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인해 지부자격을 박탈당한 상태였다)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하였다. 코민테른과 무관하게 활동하였던 ‘재건동맹’ 계열 활동가들은, 1933년 경성지역 파업의 지도를 둘러싼 이재유 등과의 알력과 대립에서 보이듯이 여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배척받았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중국에서 ‘재건동맹’의 조직은 일국일당 원칙을 위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김원봉의 행적은 무엇보다 그가 국공합작의 결렬 이후 공산당 토벌과 반일을 동일시했던 국민당과의 합작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중국 내에서 한껏 고조된 항일구국의 목소리 속에서 김원봉은 지금이 국민당의 자금과 지원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황포군관학교 동기이자 국민당정부의 군부 핵심기관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서기였던 등걸(滕傑)의 협력을 얻어 의열단의 반일투쟁에 대한 지원(비록 소극적이었지만)을 이끌어내었다. 김원봉 자신이 장개석의 반공 쿠데타에 맞서 싸웠고 일부 의열단원들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이 국민당과 합작을 추진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다른 어떤 과제보다도 항일민족운동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자로서 김원봉의 정치적 입장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1932년 의열단이 중국 국민정부에 제출한「 중한합작에 관한 건의서」는 중국의 만주 수복과 조선의 독립, 일본의 사회혁명이라는 과제를 일본제국주의 타도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위치짓고 일제타도를 통해 동양삼국의 영구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항일이라는 공통의 과제에 합의한다면 합작과 협력의 대상이 반드시 공산당으로 제한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1930년대 중국대륙에서 민족주의자로서 김원봉의 면모는 다른 어떤 과제보다도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역량을 집중하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는 해방정국 및 월북한 이후의 활동에서도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김원봉은 1932년 ‘장래 통일전선 촉성을 매개할 의의가 있는 현재 필요한 조직’으로서 사실상 각 단체의 협의체 수준의 위상에 머무르긴 했으나 한국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재중국 각민족단체(김구의 한인애국단은 불참)를 묶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35년 6월에는 김구를 제외한 모든 재외 항일운동단체(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재미 대한독립당, 뉴욕 대한민단, 미주국민회, 하와외 국민회, 하와이 국민동지회 등)를 망라하는 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 건설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비록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 혁명가들은 참여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었으나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반파시즘 인민전선 및 반제국주의 민족통일전선 방침이 통과됨으로써 향후 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 전망도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 민혁당과 조선의용대가 이후 북한에서 ‘연안파’로 분류되는 일군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투쟁 경험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민혁당의 역사적 중요성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민혁당은 불과 2년 만에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자금문제과 당운영을 둘러싼 갈등을 계기로 이탈함으로써(이들은 김구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게 된다) 민족통일전선당으로서의 위상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의 발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김원봉의 숙원이었던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활로를 제공하게 된다.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임정개조투쟁

중일 간의 확전은 그동안 항일보다 공산당 토벌에 주력해온 중국국민당으로 하여금 공산당을 인정하고 중국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성립되는 계기였으며 그간 국민당 정부의 반공노선과 소극적 항일의지 속에서 제약받던 중국내 조선인 혁명가들로서는 활동반경을 대폭 확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민혁당은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 속에서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고 항일 무장부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전자는 민족혁명당 외부의 사회주의자(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와 아나키스트(조선혁명자연맹)을 규합하여 공통 강령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민족전선연맹(1937년 11월)을 결성하는 것으로, 후자는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조선인 무장부대로서 조선의용대의 결성(1938년 10월)으로 가시화되었다.3) 김원봉이 총대장으로 취임한 조선의용대는 주로 선전·교양 사업을 담당했다. 직접적인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선전공작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대원도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정세가 김원봉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만은 아니었다.
일단 국민당 통치구역 내 전황이 대치상태에 접어들게 되면서 김구 등의 임정 세력을 당적으로 규합하려는 김원봉의 통일전선 사업에 대한 불만이 민혁당 및 ‘전선연맹’ 내부의 일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이탈함으로서 김원봉의 지도력은 손상되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조선의용대에 대한 통제가 크게 이완되었던 것도 김원봉의 입지를 좁히는 요인이었다. 일본과의 전투가 격렬해지던 화북지역(여기에는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활동하는 구역이었다)으로 북상하여 직접 전투에 가담해야 한다는 조선의용대 청년들의 여론이 고조되면서 화북행이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용대의 다수(역량의 80%) 부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들이 팔로군과 함께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고 대장에 팔로군 포병사령관 조선인 무정이 취임하면서 중국공산당에 더욱 밀접해졌다. 이와 반비례하여 조선의용대 총대장 김원봉과는 완전한 관계의 단절까지는 아니었으나 소원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변화한 조건에서 민혁당의 당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김원봉은 통일전선운동의 초점을 임정으로 맞추어 임정참여를 선언하고 임정의 문호를 김구의 한국독립당 이외의 운동세력에게 개방하기 위한 개조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원봉은 임정의 군무부장으로서 광복군의 지휘·운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임정의 2인자로서 활동하였고 민족혁명당은 젊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활동력이 왕성한 당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구 등의 한독당은 김원봉과 민혁당을 끊임없이 견제하였다.
당시 김원봉은 임정의 틀을 이후 화북의 ‘독립동맹’ 및 조선의용군, 그리고 재외의 모든 운동단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바꾸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임정의 약헌(約憲)을 개정하는 한편 기존의 의사결정 기구인 임시의정원과 국무위원회의 중심의 의사결정과정을 바꾸고자 하였는데 이는 이들 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별다른 성과를 도출하지 못하였다. 민혁당에서 대안으로 중경에서 전조선의 독립운동가가 참여하는 독립운동가대회에서 임정개조를 포함하여 제반문제를 논의하는 방안을 임정에 제안하여 관철시킨 후 그 실행을 모색하던 중 김원봉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원봉의 임정 참여와 개조투쟁은 그 자체로 뚜렷한 해결을 보진 못했으나, 임정의 위상문제가 해방공간에서 초기 좌우대립의 핵심쟁점이었던 ‘임정봉대론’으로 불거지면서 계속되었다.


해방공간에서의 민족통일전선운동과 월북, 그리고 의문의 숙청(?)

해방이 되었지만 중국 내륙의 중경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어떤 승전국도 임정을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민혁당의 임정 개조투쟁이 그 결실을 보게 될 독립운동가대회가 급작스런 종전으로 추진되지도 못했다. 또한 임정이 어떤 자격으로 귀국하는가를 둘러싼 한독당과 민혁당의 입장 차이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한독당은 국내로 돌아가 과도정부 수립과정에서 우선권을 행사하면서 정국을 주도할 요량으로 임정법통론을 내세다. 민혁당은 임정이 권위를 내세울만한 성과도 없고 대외적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민주 당파 대표회의를 통해 전국 통일임시연합정부를 건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민혁당의 구상은 좌우합작 및 민주적 개혁(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친일파 반동분자의 처벌)을 전제한 것으로서 모택동의 연합정부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공간에서 당면과제인 민족통일전선의 상 역시 이러한 구상의 틀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1945년 12월 제2진으로 귀국한 김원봉과 민혁당계 인물들은 임정 내 5당과 미국의 단체, 조선공산당을 아우르며 “좌우 각 진영, 각정당, 명망 있는 혁명투사들을 총망라하는 삼천만의 통일전선 결성”하기 위한 특별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또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우익의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1945년 연말에는 반탁투쟁을 주도하면서 영향력이 확대된 임정측과, 좌익이 주도하던 인민공화국 사이에 민족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합의를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좌우를 정치적 협상의 테이블로 불러내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시도는 우익측의 완고한 임정법통론과 반공적 언사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조선공산당·인민당·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 좌익 정치세력과 대중조직들은 우익 정치세력과의 민족통일 사업을 포기하고 1946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하였다.
함께 임정을 구성하는 김구의 한독당은 이승만, 한민당 등과 비상국민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여기에서 임정 국무위원회를 계승하는 최고정무회의가 구성되었으나 이는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불과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변질되었다. 이로써 3·1운동 이후 독자적인 정부로서 유지해왔던 전통을 임정 스스로 폐기한 셈이었다. 이에 분노한 김원봉을 비롯한 민혁당계는 한독당 사람들과 서로 고함과 욕설을 주고받으며 찻잔을 집어던지는 등 난장판이 되어버린 국무위원회 석상을 마지막으로 임정과 결별하였다.
이후 김원봉은 본격적으로 좌익진영에 가담하여 정치활동을 계속해나갔다. 김원봉은 해방공간의 정치인들 중 보기 드물게 ‘군인출신’으로서 항일운동의 경력뿐 아니라 좌우를 망라하는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중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좌익진영 내부에서의 신망이 대단히 컸다. 이를 바탕으로 여운형, 허헌, 박헌영, 백남운과 함께 민전 공동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민전 의장으로서 김원봉은 1946년 좌우합작운동과 10월 인민항쟁의 수습에 노력했고, 남로당이 불법화된 이후 1947년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위를 지지하는 투쟁의 유일한 합법주체로서 민전을 이끌어나가는 등 격동의 해방정국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그러나 임정의 마지막 국무회의 이후 민족통일전선을 염원하던 김원봉의 정치적 구상은 점차 요원한 것이 되어버렸다. 1947년 8월 이후 김원봉은 월북하여 1948년 9월 9일 수립된 북한의 인민공화국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이른바 ‘모시기작전’으로 납북된 구(舊)임정 요인들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협의회’)로 조직하여 통일전선운동에 동원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수백만의 사상자를 남긴 전쟁 직후 남한의 반공주의와 적대적 대북정책 속에서 그 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56년 대대적인 ‘사회주의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1958년 8월 사회주의 개조의 완수를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세력( ‘협의회’)에 대한 북한 당국의 시선은 차가워졌고 결국 성원 일부를 반당?반혁명 행위에 대한 혐의로 연행하기에 이른다. 그해 9월 김원봉은 전해 선출되었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뚜렷한 행적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원봉의 종적에 대해서는 ‘처형설’, ‘옥중 자살설’, ‘명예로운 은퇴설’ 등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 중 첫째나 둘째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보인다. 당시 정황을 감안할 때 사실상 김원봉의 최고인민회 부위원장 해임은 숙청인 것으로 판단되며 자살이나 처형은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미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가 ‘공화국의 전복을 꾀한 미제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고, 무엇보다 김일성에 반대하는 연안파(이들은 대부분 김원봉의 옛 부하들이다) 역시 ‘8월 종파사건’(1958년)으로 몰락하였기 때문에 김원봉의 숙청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독립전쟁을 구상했던 김원봉은 당시 북한에서 가장 투쟁경력이 길었을뿐 아니라(김원봉이 망명할 때 김일성은 고작 7살이었다) 의열단, 중국내전 참가, 조선의용대 조직, 민족혁명당의 지도자로서 그 항일이력 또한 굵직굵직한 노장이었다. 또한 해방정국에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민족통일전선의 대의를 지지하고 이에 헌신하였으며 좌익의 강력한 우군으로서 활동하였다.
이처럼 일생을 민족해방운동에 바친 노혁명가가 숙청당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마쳐야 했던 까닭을 누가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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