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숍 <공단조직화 운동의 쟁점>
구미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공단조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직적 원하청 관계는 공단 노동자를 쥐어짜고 있고, 이에 저항하려는 노동자들을 물량협박과 공장이전 위협으로 좌절시킨다. 만연한 불법파견은 일상적 고용 불안과 저임금을 강요하고 있다. 최악의 노동 조건에서도 노동조합으로 단결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조차없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노동자운동은 공단조직화를 주목하고 있다. 노동자운동 연구소는 지난 4월 13일 배태선 민주노총 구미지부 사무처장을 모시고공단 조직화의 경험과 전망을 듣는 자리를 가졌다.
85년 처음으로 구미에 발 디뎠을 때, 출근하는 수많은 통근버스를 바라보며 모두가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서게 될 미래를 꿈꾸며 설레어 했다는 배태선 사무처장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구미지역 민주노조 운동을 일구어왔다. 벅찬 감동과 쓰라린 패배의 시간을 함께해온 배태선 사무처장에게서 구미공단의 특징과 투쟁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회원들과 공단조직화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워크숍에 함께했다.
번져가는 민주노조의 물결, 강화되는 지역연대
구미공단은 계획된 산업단지다. 노동자 구성을 보면 구미지역에 살던 사람들보다 공단이 없는 인근 경북지역 노동자들이 몰려와 정착한 수가 더 많다. 산업별로 노동조건과 임금수준도 비슷했고, 이는 자연스레 노동자들 간의 동질성을 높였다. 80년대 다른 지역처럼 차고 올라오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공단지역 노동자들 간의 동질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정적 승리가 공단 분위기를 바꾸고 다른 투쟁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왔다.
구미지역에서 90년대 초 노조가 설립되기 시작하자 당시 상당한 규모였던 일본 자본들이 대거 철수하면서 노동자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공단에서 100명 모아서 집회하는 것이 활동가들의 소원일 정도로 구미지역 노동운동의 암흑기였는데 이것을 걷어내는 투쟁이 96년 한국합섬에서 시작되었다. 질소탱크 관리 노동자 두 명이 산재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고 유령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공권력이 투입되고 무자비한 폭행과 연행이 자행되자 이에 분신으로 항거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투쟁이 전국화되었다. 한국노총 구미지부와 민주노총 준비위가 공동투쟁을 위해 한국합섬에 모였다. 오리온전기 노동자들은 한국합섬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했고, 그 결과 역사적으로 어용강성이던 오리온전기에서 민주노조 지향 위원장이 당선되었다. 지역적 연대투쟁으로 사측을 굴복시키고 이후 대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KEC 역시 연대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노총의 양심적 위원장들과 지역의 운동단위들이 모여서 민주노총 건설 투쟁으로 가는데 한국합섬 투쟁이 핵심적이었던 것이다.
한국합섬 투쟁은 대하투쟁으로 이어졌다. 투쟁전술은 농성돌입해서 선전 타격하는 것이었다. 250여 명의 대하합섬 노동자들을 금오공대에 모아두고 노조설립교육을 했다. 다음 날 농성 돌입을 위해 노래도 배우고, 구호도 외치고, 늦은 밤까지 교육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노동자들의 눈빛이 퇴근하면서 가담하는 동료들이 계속 늘어나자 자신감으로 바뀌어갔다. 자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날이 거듭될수록 조합원들은 늘어났다. 동네 반상회에 전 조합원이 돌아다닐 정도로 시민에게 선전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도록 투쟁했다. 이후 노동조합 사무실에 전화가 빗발쳤는데, 대하투쟁을 구미지역 노동자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공세적인 노조결성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 지역연대의 기풍을 세워나갔다. 한국노총 사업장이었던 KEC가 파업에 돌입하자 구사대가 노동자들을 기숙사에 가둬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하합섬 노동자들은 구사대를 돌파하고 들어가 KEC 노동자들과 연대집회를 진행했다. 3일 만에 KEC 투쟁에서 승리하고, 대하합섬 역시 이기면서 이후 다른 파업투쟁들 역시 승기를 잡아갔다. 연대는 연대를 부르고 하나의 투쟁도 모두의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기풍 역시 계속되었다. 보광노동조합 투쟁 역시 그러했다. 농성 돌입 직전에 삼성이 조합원을 납치하려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곧바로 공장점거투쟁 돌입을 결정하고 전 간부 결집 지침을 내렸다. 다리 건너 공장에 있는 노동자, 도로 맞은편에 있는 공장 노동자들은 출퇴근하면서 연대집회 참석하는 것이 일과였다. 단위노조 간부수련회를 농성장에서 실시하고 농성장 물품도 전 노조가 분담지원해가며 싸워서 결국 자본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결정적 패배와 복구되지 못한 운동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련이 시작되었다. 새한의 워크아웃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고, 남겨진 상처와 패배감은 매우 컸다. 오웬스코닝과 두산전자에 노조를 설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이후 오리온전기, 코오롱, 금강화섬에서 대규모 구조조정과 폐업이 이어졌고, 이제 맞서는 투쟁을 벌였으나 결정적 패배 이후 운동이 복구되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구미지역 노동운동이 위기에 직면하게 된 배경에는 산업구조적 변화가 있었다. 구미지역 제조업은 화섬산업과 전자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90년대 초중반 화섬산업 시장으로 진입하는 자본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구미지역에 공장이 대거 들어섰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자본과의 경쟁 격화와 과잉설비투자로 화섬산업이 위기에 직면하면서 98년 이후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새한, 코오롱, 금강화섬, 한국합성 등의 규모 있는 사업장 대부분에서 대량 정리해고가 자행되었다. 화섬산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영역을 탈피해 전자소재 자동차 부품으로 업종 다각화했다. 전자산업의 경우 삼성과 LG로 대표되는 대기업을 원청으로 백여 개가 넘는 중소영세사업장들이 수직적 하청화되는 구조가 고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주요 사업장들이 폐업 또는 정리해고로 노조가 깨지거나 활동이 위축되었다. 경영실패로 폐업하는 기업들이 생겨나자 지역 자본가들은 ‘민주노총 있는 공장 문 닫는다’는 악의적 이념공세를 펴며 고립화전략을 펴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깃발 하나 빼앗기면 두 개 올리고 두 개 빼앗기면 네 개 올린다! KEC 투쟁
구미지역은 대다수가 대공장이었고 최저임금이랑도 상관없는 분위기였는데 최근에는 달라졌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버렸고, 구조조정으로 해고 한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했으며, 더 이상 쥐어짤 수도 없을 정도의 원하청 고리를 만들어 최저임금 인상도 반영되지 못하도록 몰아가는 열악한 상항이다. 화섬사업장은 소규모가 되고 전자산업은 삼성과 LG의 하청업체들이 주를 이루면서 구미공단의 재편이 완료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KEC 투쟁의 배경이다. 천명 이상의 대공장이 줄어서 KEC는 지역에서 여섯 번째로 크고, 금속구미지부에서는 최대 규모 사업장이다. 게다가 경비아저씨만 빼고 모두 정규직인데다 근속연수도 높고 임금도 다른 공장에 비해 높은 편이라 구미지역 민주노조 운동에서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은 사업 조정에 따른 대규모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에 저항할 노조를 제거하기 위해 맹렬하게 공격했다. KEC 투쟁은 구미지역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중요했다. 타임오프가 도입되면서 전임자 문제로 시작된 투쟁이기 때문에 전국적인 싸움으로 만들어 금속노조 투쟁의 구심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금속 총파업은 선언에 불과했음이 드러났고, 회사는 협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조합원들은 생계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합원들은 공장점거 이후 많이 힘들어했지만 집단토론을 지속하면서 투쟁이 발생한 원인이 구조적인 것에서 기인한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 전망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는 KEC 계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조차 시도하지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지역 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되었고, 구미공단 곳곳을 다니면서 미조직 노동자를 만날 것을 결의했다. 민주노총 깃발 하나 빼앗기면 두 개 올리고, 두 개 빼앗기면 네 개를 올리겠다는 것을 자본에 보여주자고 결심한 것이다.
공단 조직화 경험 나누기
배태선 사무처장으로부터 구미지역 상황을 듣고 난 후, 참석자들이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로지역에서 공단조직화 사업을 하고 있다는 한 참석자는 수직적 하청 구조 속에서 물량협박이나, 공장이전 위협이 만연하여 조직화가 쉽지 않은데 구미지역의 경험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LG하청 세 군데가 한꺼번에 찾아와서 노조설립 상담을 요청한 사례를 얘기해 주었다. 상담을 요청한 노동자들끼리 서로가 모르는 상태였지만 노동조합 건설을 함께하자고 합의를 했다고 한다. 협업단지에서 여러 하청을 묶어서 조직하면 원청에 타격도 크게 입힐 수 있고 교섭력도 커지기 때문에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같이 되지 않았다. 각각의 사업장이 동일한 속도로 조직되지 않았고 보안이 깨지기도 하는 어려움 속에서 결국 좌초됐기 때문이다. 사실 패배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조직화를 주저해서는 안 되고 패배의 경험을 딛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구미지역에서 운동이 잘되면 노조 가입 여부를 떠나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향상되고 운동이 후퇴하면 모두가 열악해져 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전자산업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고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은 조직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일반적인데 역시 여성이 많은 사업장인 KEC 투쟁은 어떻게 조직하고 투쟁을 만들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이어졌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우선 구미지역 여성노동자 비중이 예전같이 높지 않다고 했다. KEC가 예외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은 곳이었다. 그리고 젊은 노동자들이 예전 세대와 다르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으며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젊은 여성들 같은 경우 구미지역에 정착한 여성 노동자들의 2세들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 사측의 탄압에 분노하면서 맞서는 분위기라고 한다. 같은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이라 서로 간에 동질감이 높아서 응집력이 생기는 것 같다고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삼사십 대 여성들은 생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잘 움직이지 못하는 편이다. 젊은 남성들 같은 경우 일하는 곳에 대한 애착이 없고 언제든 다른 곳으로 옮길 거란 생각에 단결을 통해서 무엇을 쟁취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신뢰가 적은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이어서 구미지역의 현재 과제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현재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했다. 구미지역은 민주노총 조합원이었다가 공장 문 닫아서 다른 공장에 재취업한 노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열패감이 매우 크다고 한다. 다수가 우리 사업장이 민주노총이라서 문 닫았다고 생각한단다. 자본가들도 악의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퍼트리고 있는데 반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정규직 비정규직을 갈라치기 하는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들을 함께 조직하기 위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미지역의 우선 삼성이나 LG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기를 뚫어야 하청업체들을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점 사업장이 승리하면 다른 공간이 열린다는 것이 구미지역의 이전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바임을 덧붙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단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선전전을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워낙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으므로 ‘올리자 임금! 만들자 노동조합!’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공단조직화에 임하는 데 있어 노동자를 왜 조직하려는 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량적으로 사람을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간 함께하면서 동지라고 믿어왔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총대를 거꾸로 메는 경우를 숱하게 봐오면서 더욱 사람을 바꾸는 조직화가 중요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구미지역 노동운동이 열심히는 해왔지만 양심적인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반성하게 된다고 했다. 노조를 당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혁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서 자본의 본질을 보고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투쟁은 노동자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힘든 난관을 함께 넘을 수 있는 동지에 대한 신뢰, 집단적으로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KEC 조합원들이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투쟁의 전망을 능동적으로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그 단초들을 찾아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배태선 사무처장은 반전의 계기도 자신감이 있을 때 가능하다며 주눅 들어 있는 민주노조 운동이 주저 없이 싸워 반격의 기회를 잡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열 번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패배의식이 자리 잡으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11번 째 승리의 계기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에 힘을 모을 것을 당부하면서 워크샵을 마무리했다.
85년 처음으로 구미에 발 디뎠을 때, 출근하는 수많은 통근버스를 바라보며 모두가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서게 될 미래를 꿈꾸며 설레어 했다는 배태선 사무처장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구미지역 민주노조 운동을 일구어왔다. 벅찬 감동과 쓰라린 패배의 시간을 함께해온 배태선 사무처장에게서 구미공단의 특징과 투쟁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회원들과 공단조직화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워크숍에 함께했다.
번져가는 민주노조의 물결, 강화되는 지역연대
구미공단은 계획된 산업단지다. 노동자 구성을 보면 구미지역에 살던 사람들보다 공단이 없는 인근 경북지역 노동자들이 몰려와 정착한 수가 더 많다. 산업별로 노동조건과 임금수준도 비슷했고, 이는 자연스레 노동자들 간의 동질성을 높였다. 80년대 다른 지역처럼 차고 올라오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공단지역 노동자들 간의 동질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정적 승리가 공단 분위기를 바꾸고 다른 투쟁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왔다.
구미지역에서 90년대 초 노조가 설립되기 시작하자 당시 상당한 규모였던 일본 자본들이 대거 철수하면서 노동자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공단에서 100명 모아서 집회하는 것이 활동가들의 소원일 정도로 구미지역 노동운동의 암흑기였는데 이것을 걷어내는 투쟁이 96년 한국합섬에서 시작되었다. 질소탱크 관리 노동자 두 명이 산재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고 유령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공권력이 투입되고 무자비한 폭행과 연행이 자행되자 이에 분신으로 항거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투쟁이 전국화되었다. 한국노총 구미지부와 민주노총 준비위가 공동투쟁을 위해 한국합섬에 모였다. 오리온전기 노동자들은 한국합섬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했고, 그 결과 역사적으로 어용강성이던 오리온전기에서 민주노조 지향 위원장이 당선되었다. 지역적 연대투쟁으로 사측을 굴복시키고 이후 대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KEC 역시 연대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노총의 양심적 위원장들과 지역의 운동단위들이 모여서 민주노총 건설 투쟁으로 가는데 한국합섬 투쟁이 핵심적이었던 것이다.
한국합섬 투쟁은 대하투쟁으로 이어졌다. 투쟁전술은 농성돌입해서 선전 타격하는 것이었다. 250여 명의 대하합섬 노동자들을 금오공대에 모아두고 노조설립교육을 했다. 다음 날 농성 돌입을 위해 노래도 배우고, 구호도 외치고, 늦은 밤까지 교육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노동자들의 눈빛이 퇴근하면서 가담하는 동료들이 계속 늘어나자 자신감으로 바뀌어갔다. 자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날이 거듭될수록 조합원들은 늘어났다. 동네 반상회에 전 조합원이 돌아다닐 정도로 시민에게 선전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도록 투쟁했다. 이후 노동조합 사무실에 전화가 빗발쳤는데, 대하투쟁을 구미지역 노동자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공세적인 노조결성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 지역연대의 기풍을 세워나갔다. 한국노총 사업장이었던 KEC가 파업에 돌입하자 구사대가 노동자들을 기숙사에 가둬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하합섬 노동자들은 구사대를 돌파하고 들어가 KEC 노동자들과 연대집회를 진행했다. 3일 만에 KEC 투쟁에서 승리하고, 대하합섬 역시 이기면서 이후 다른 파업투쟁들 역시 승기를 잡아갔다. 연대는 연대를 부르고 하나의 투쟁도 모두의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기풍 역시 계속되었다. 보광노동조합 투쟁 역시 그러했다. 농성 돌입 직전에 삼성이 조합원을 납치하려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곧바로 공장점거투쟁 돌입을 결정하고 전 간부 결집 지침을 내렸다. 다리 건너 공장에 있는 노동자, 도로 맞은편에 있는 공장 노동자들은 출퇴근하면서 연대집회 참석하는 것이 일과였다. 단위노조 간부수련회를 농성장에서 실시하고 농성장 물품도 전 노조가 분담지원해가며 싸워서 결국 자본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결정적 패배와 복구되지 못한 운동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련이 시작되었다. 새한의 워크아웃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고, 남겨진 상처와 패배감은 매우 컸다. 오웬스코닝과 두산전자에 노조를 설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이후 오리온전기, 코오롱, 금강화섬에서 대규모 구조조정과 폐업이 이어졌고, 이제 맞서는 투쟁을 벌였으나 결정적 패배 이후 운동이 복구되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구미지역 노동운동이 위기에 직면하게 된 배경에는 산업구조적 변화가 있었다. 구미지역 제조업은 화섬산업과 전자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90년대 초중반 화섬산업 시장으로 진입하는 자본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구미지역에 공장이 대거 들어섰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자본과의 경쟁 격화와 과잉설비투자로 화섬산업이 위기에 직면하면서 98년 이후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새한, 코오롱, 금강화섬, 한국합성 등의 규모 있는 사업장 대부분에서 대량 정리해고가 자행되었다. 화섬산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영역을 탈피해 전자소재 자동차 부품으로 업종 다각화했다. 전자산업의 경우 삼성과 LG로 대표되는 대기업을 원청으로 백여 개가 넘는 중소영세사업장들이 수직적 하청화되는 구조가 고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주요 사업장들이 폐업 또는 정리해고로 노조가 깨지거나 활동이 위축되었다. 경영실패로 폐업하는 기업들이 생겨나자 지역 자본가들은 ‘민주노총 있는 공장 문 닫는다’는 악의적 이념공세를 펴며 고립화전략을 펴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깃발 하나 빼앗기면 두 개 올리고 두 개 빼앗기면 네 개 올린다! KEC 투쟁
구미지역은 대다수가 대공장이었고 최저임금이랑도 상관없는 분위기였는데 최근에는 달라졌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버렸고, 구조조정으로 해고 한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했으며, 더 이상 쥐어짤 수도 없을 정도의 원하청 고리를 만들어 최저임금 인상도 반영되지 못하도록 몰아가는 열악한 상항이다. 화섬사업장은 소규모가 되고 전자산업은 삼성과 LG의 하청업체들이 주를 이루면서 구미공단의 재편이 완료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KEC 투쟁의 배경이다. 천명 이상의 대공장이 줄어서 KEC는 지역에서 여섯 번째로 크고, 금속구미지부에서는 최대 규모 사업장이다. 게다가 경비아저씨만 빼고 모두 정규직인데다 근속연수도 높고 임금도 다른 공장에 비해 높은 편이라 구미지역 민주노조 운동에서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은 사업 조정에 따른 대규모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에 저항할 노조를 제거하기 위해 맹렬하게 공격했다. KEC 투쟁은 구미지역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중요했다. 타임오프가 도입되면서 전임자 문제로 시작된 투쟁이기 때문에 전국적인 싸움으로 만들어 금속노조 투쟁의 구심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금속 총파업은 선언에 불과했음이 드러났고, 회사는 협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조합원들은 생계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합원들은 공장점거 이후 많이 힘들어했지만 집단토론을 지속하면서 투쟁이 발생한 원인이 구조적인 것에서 기인한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 전망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는 KEC 계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조차 시도하지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지역 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되었고, 구미공단 곳곳을 다니면서 미조직 노동자를 만날 것을 결의했다. 민주노총 깃발 하나 빼앗기면 두 개 올리고, 두 개 빼앗기면 네 개를 올리겠다는 것을 자본에 보여주자고 결심한 것이다.
공단 조직화 경험 나누기
배태선 사무처장으로부터 구미지역 상황을 듣고 난 후, 참석자들이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로지역에서 공단조직화 사업을 하고 있다는 한 참석자는 수직적 하청 구조 속에서 물량협박이나, 공장이전 위협이 만연하여 조직화가 쉽지 않은데 구미지역의 경험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LG하청 세 군데가 한꺼번에 찾아와서 노조설립 상담을 요청한 사례를 얘기해 주었다. 상담을 요청한 노동자들끼리 서로가 모르는 상태였지만 노동조합 건설을 함께하자고 합의를 했다고 한다. 협업단지에서 여러 하청을 묶어서 조직하면 원청에 타격도 크게 입힐 수 있고 교섭력도 커지기 때문에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같이 되지 않았다. 각각의 사업장이 동일한 속도로 조직되지 않았고 보안이 깨지기도 하는 어려움 속에서 결국 좌초됐기 때문이다. 사실 패배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조직화를 주저해서는 안 되고 패배의 경험을 딛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구미지역에서 운동이 잘되면 노조 가입 여부를 떠나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향상되고 운동이 후퇴하면 모두가 열악해져 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전자산업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고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은 조직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일반적인데 역시 여성이 많은 사업장인 KEC 투쟁은 어떻게 조직하고 투쟁을 만들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이어졌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우선 구미지역 여성노동자 비중이 예전같이 높지 않다고 했다. KEC가 예외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은 곳이었다. 그리고 젊은 노동자들이 예전 세대와 다르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으며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젊은 여성들 같은 경우 구미지역에 정착한 여성 노동자들의 2세들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 사측의 탄압에 분노하면서 맞서는 분위기라고 한다. 같은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이라 서로 간에 동질감이 높아서 응집력이 생기는 것 같다고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삼사십 대 여성들은 생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잘 움직이지 못하는 편이다. 젊은 남성들 같은 경우 일하는 곳에 대한 애착이 없고 언제든 다른 곳으로 옮길 거란 생각에 단결을 통해서 무엇을 쟁취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신뢰가 적은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이어서 구미지역의 현재 과제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현재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했다. 구미지역은 민주노총 조합원이었다가 공장 문 닫아서 다른 공장에 재취업한 노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열패감이 매우 크다고 한다. 다수가 우리 사업장이 민주노총이라서 문 닫았다고 생각한단다. 자본가들도 악의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퍼트리고 있는데 반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정규직 비정규직을 갈라치기 하는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들을 함께 조직하기 위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미지역의 우선 삼성이나 LG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기를 뚫어야 하청업체들을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점 사업장이 승리하면 다른 공간이 열린다는 것이 구미지역의 이전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바임을 덧붙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단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선전전을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워낙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으므로 ‘올리자 임금! 만들자 노동조합!’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공단조직화에 임하는 데 있어 노동자를 왜 조직하려는 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량적으로 사람을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간 함께하면서 동지라고 믿어왔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총대를 거꾸로 메는 경우를 숱하게 봐오면서 더욱 사람을 바꾸는 조직화가 중요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구미지역 노동운동이 열심히는 해왔지만 양심적인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반성하게 된다고 했다. 노조를 당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혁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서 자본의 본질을 보고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투쟁은 노동자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힘든 난관을 함께 넘을 수 있는 동지에 대한 신뢰, 집단적으로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KEC 조합원들이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투쟁의 전망을 능동적으로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그 단초들을 찾아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배태선 사무처장은 반전의 계기도 자신감이 있을 때 가능하다며 주눅 들어 있는 민주노조 운동이 주저 없이 싸워 반격의 기회를 잡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열 번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패배의식이 자리 잡으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11번 째 승리의 계기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에 힘을 모을 것을 당부하면서 워크샵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