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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1.5-6.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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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경과, 현황, 과제>

오세용 전 경북일반노조 정책교육국장 초청

한지원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경주지역 노동운동은 90년대부터 최근까지 수차례의 지역 총파업으로 지역연대 운동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모범으로 꼽혀왔었다. 작년 발레오만도 투쟁 패배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많은 활동가들은 경주 지역이 조만간 예전의 활력을 되찾고 민주노조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일으킬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어떤 문제점으로 현재의 침체를 겪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노동운동의 끝 모를 침체 속에서도 여전히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에 대해 많은 기대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자운동연구소는 지난 3월 18일 경북일반노조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을 초청하여 “경주 사례로 보는 노동자운동의 지역연대”를 주제로 두 번째 월례워크숍을 열었다.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20년 넘는 시간 동안 경주지역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일궈온 경주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이 정리한 경주지역의 민주노조 운동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암흑기로 민주노조 운동이 태동하기 이전인 1987년 이전이다. 두 번째 시기는 민주노조 운동의 시작기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 1996년 민주노총 경주시협의회 출범 전까지다. 세 번째 시기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로 민주노조 운동이 지역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던 시기다. 네 번째 시기는 금속노조 경주지부와 경북일반노조를 중심으로 조직확대가 크게 이뤄지고 지역 민주노조 운동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2006년부터 2009년까지다. 마지막 시기는 2010년 이후 현재로 민주노조 운동의 정권과 자본의 집중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내부적으로도 양적 성장을 질적 전화로 발전시키지 못한 한계가 드러나는 시기다.


민주노조 운동의 시작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1989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첫 출발은 자동차부품사업장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이었다. 89년 1월 경주 안강 풍산금속 공권력 투입에 따른 구속 해고자가 발생하고 같은 해 5월 전교조 결성에 따른 해직자가 대량 발생하면서 해고·해직자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8월 울산 현대자동차에 민주 집행부가 출범하여 경주지역 노동자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한 것 역시 중요한 힘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90년 1월 경주지역 최초의 지역노동조직인 ‘경주노동자회’가 건설된다. 경주노동자회는 한국노총과 단절한 민주노조 대표자들의 모임으로 자동차부품 6개 노조와 전교조, 2개 택시노조가 함께 했다. 경주노동자회는 이후 자동차부품사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쳐 91년 10월에는 경주지역노조대표자회의로 발전, 10개 노조 2천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한다. 한편 이들은 90~91년 전노협에 함께 하고자 경노협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정권의 거센 탄압으로 전노협에 직접 가입하지는 못했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이후 1993년 5월 문민정권 최초의 공권력 투입 사업장인 아폴로 산업 투쟁을 계기로 더욱 강한 연대투쟁을 발전시키며 1995년 1월에는 자동차부품노조 ‘지역집단교섭’을 추진하기도 했다. 산별노조가 건설되기 한참 전인 95년에 이미 경주지역에서는 집단교섭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여러 한계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이러한 공동교섭-공동투쟁의 기풍은 계속 발전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1996년 4월에는 민주노총 경주시협의회가 출범하며 그동안 자동차부품사 10개 노조 3천여 명이었던 지역 민주노조 운동 연대를 16개 노조 4천여 명으로 확대했다.
90년대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한 편에서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계속됐지만 동시에 매년 4~5개 노조가 시기 집중 임단투 파업을 돌입해 큰 마찰 없이 3~4일 만에 노조별로 타결을 보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주노조 운동의 정착기

경주의 세 번째 민주노조 운동 시기는 96년 노동법개정 총파업 투쟁으로 시작했다. 노개투는 경주지역 노동운동의 단결력을 다시금 확인하던 계기였는데 12월부터 1월 수요 총파업 전환 전까지 10개 노조가 2천여 명 파업 및 지역집회로 전국적 투쟁에 함께했다. 이 밖에도 96년부터 97년까지 힐튼호텔, 동아산업, 금아교통, 한일 등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한편 경주 자동차부품 6개 노조는 1998년 5월에, 1995년 이후 중단되었던 지역집단교섭을 재추진하는데 그 해 출범한 금속산업연맹의 영향과 IMF 경제위기로 인한 정세를 함께 돌파해내기 위한 주체적 노력이었다. 11차례 교섭과 공동파업, 경고파업, 천막농성 등을 진행했으나 결국 집단교섭을 성사시키지 못한 채 개별교섭으로 전환했다. 집단교섭 실패는 경주지역에서 자동차부품사 노조 운동 이후 강고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맛본 첫 좌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은 이후 1999년 현대차의 부품사 구조조정에 맞서기 위해 자동차부품 노조 통합 추진위를 구성하며 극복된다. 당시 현대차는 부품사들을 인수합병하는 한편 모듈화를 통해 부품 공급 시스템을 개편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조정에 맞선 부품사 노조 공동투쟁은 2000년 4월 경주금속노조 출범으로 이어졌다. 금속산업연맹 소속 8개 노조 1천여 명의 통합노조인 경주금속노조는 일종의 지역산별노조 형태였는데, 상근자와 재정을 통합하고 임금 요구안까지 공동으로 내거는 높은 수준의 통합을 지향했다.
전국금속노조가 추진되던 중에 당시 경주금속노조의 앞선 출발은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전국금속노조의 조직 체계와 충돌하며 연맹 중앙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도 경주금속노조는 2개월에 걸친 16차례 교섭을 통해 2001년부터 집단교섭을 추진하는 것을 사측으로부터 이끌어내 금속 산별의 지부 집단 교섭의 첫 사례를 만들어 낸다.
2001년 2월에는 금속노조 건설에 따라 현재와 같은 금속노조 경주지부가 출범한다. 금속노조 경주지부에는 11개 노조 1,6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그리고 바로 6월에는 다스의 위장 계열사인 세광공업 위장 폐업 사태를 계기로 금속노조 경주지부의 첫 연대파업이 진행되었다.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약 10개월에 걸쳐 투쟁을 전개하는데 경주-울산을 잇는 7번 국도를 점거하는 가두 시위까지도 불사하며 금속노조의 지역연대투쟁이 무엇인지를 자본에게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7명의 활동가가 구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위장폐업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이 투쟁을 통해 다수의 훌륭한 활동가들이 지역에 배출되었고, 경주지역 자본이 이후 금속노조에 대해 함부로 탄압을 자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광공업 투쟁 이후 2010년 이전까지 경주지역에서는 큰 투쟁이 없었는데 이는 이후 노사타협, 담합구조가 점차 노조 내에서 확산되는 역효과도 가져오게 된다.
2002년부터는 비정규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노동법률상담소가 개설되고, 미조직특위가 구성되어 경주지역 비정규사업이 본격화되었다. 2004년에는 자동차 부품 8개 사업장 300여 명 사내하청에 대한 불법 판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을 노동자 투쟁으로 현실화시켜내는 것은 실패했는데 사업장 내 정규직들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부담이 투쟁을 확대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법원의 불법 판정이 있을 때만 해도 비정규직 투쟁이 크게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으나 현실의 정규직·비정규직 장벽은 생각보다 컸다.
2005년 6월에는 민주노총 경북본부 사무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경북일반노조가 출범했다. 경북일반노조는 민주노총 경북본부의 비정규 조직화 사업단위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출발 초기에는 민주노총의 산별 방침과 어긋나며 인력 재정 등에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근 10년의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여러 점에서 체계화되었고 세광공업을 제외하면 큰 투쟁 없이 전국적 투쟁에 헌신적으로 복무했다. 2000년 롯데호텔 사회보험 투쟁, 대우차 투쟁, 2002년 주5일제 투쟁, 2003년 열사 투쟁에 이르기까지 전국적 투쟁 전선에 경주지역은 선두에서 함께 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 속에서 한계도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금속노조 출범 이후 지역의 중심이었던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지역’보다도 ‘산별’ 중심성이 강화되기 시작했고,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 활성기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점차 극복해가며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계속 발전했는데 2006년에서 2009년까지 4년간은 지역 민주노조 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였다. 금속노조 경주지부와 경북일반노조의 조직화와 투쟁은 지역연대 투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2006년 통합산별노조 출범에 따라 지역지부에 결합하지 못했던 오리엔스와 에코플라스틱이 산별체계로 전환되었고, 2007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조직화 운동으로 대림플라스틱, 디에스씨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고 2008년에는 외동지역에서 대동산업, 다스, 인지컨트롤스, 청우가 조직되었다. 2009년에도 대진공업, 영진기업, 고려산업 등이 추가로 조직되며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2001년 1,600명에서 2009년 말 3,200명으로 두 배 이상 규모가 성장했다. 지역 민주노조 운동에서 금속 부품사 조직에 불을 댕긴 것은 2008년 다스 조직화였는데, 다스는 지역에서 가장 큰 사업장 중 하나면서도 번번이 조직화에 실패했었던 자본의 철옹성 중 하나였었다. 경주 민주노조 운동은 대규모 선전전을 통해 지역에서 민주노조 조직화 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다스 조직화를 위해 계엄 상황을 방불케 하는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다스에서 노조를 건설하고자 하는 활동가들과 연대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의 활동가들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조직화 노력은 3년간 8개 이상의 사업장을 조직하는 성과로 남았다.
2006년 이후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다른 한 축은 경북일반노조였다. 경북일반노조는 2006년 경주CC 투쟁을 시작으로 2009년 430명의 조직으로 발전해나갔다. 경북일반노조의 조직화는 금속 경주지부와 마찬가지로 강고한 지역연대 투쟁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는데 경주CC투쟁, 동국대학교미화투쟁 등이 대표적이다. 경주CC 투쟁에서는 금속노조경주지부가 총파업 집회를 함께 진행하며 승리했고, 동국대미화노동자 투쟁은 확대간부들의 학내 3보1배투쟁, 1,500명이 참여한 연대파업 투쟁으로 승리했다. 이러한 지역연대 기풍은 2009년까지도 이어져 경주재활용선별장 민간위탁 저지 투쟁에 금속노조경주지부가 지역총파업을 통해 연대했다. 이 밖에도 세천향예술단,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경주교육문화회관, 경주드림센터, 토비스콘도, 동국대학교병원미화 등이 투쟁과 지역연대를 통해 조직화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자본은 촛불 정국 이후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그 포문은 보수언론들이 열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은 2009년 하반기가 되자 ‘경주는 노조 천국’, ‘민주노총 막가파식 파업’ 등의 제목으로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을 매도하기 시작했고,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회복 국면으로 진입한 2010년이 되자 집중 탄압을 시작했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현황과 과제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사실상 자본이 2010년 탄압을 준비하는 첫 시작이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의 우려대로 2010년 봄부터 시작된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기획 탄압은 발레오만도 투쟁부터 시작했다. 외주화 비정규직에 맞서 파업한 발레오만도에 대해 자본은 직장폐쇄, 용역깡패와 검경의 합동작전으로 노조를 몰아붙였다. 발레오만도지회는 경주지역에서 가장 큰 사업장 중 하나이자 오랜 기간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노조였다. 2001년 세광공업 이후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노사타협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인데 문제는 민주노조 운동 진영이 의외로 이러한 탄압에 쉽게 패배했다는 것이었다. 2010년 3월 영진기업이 원청의 물량 협박으로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한국펠저가 공장을 이전하는가 하면, 6월에는 발레오만도가, 11월에는 광진상공이, 올해 2월에는 전진산업이 금속노조를 탈퇴했다. 경북일반노조 역시 작년 10월 531일간 투쟁한 재활용선별장 투쟁이 패배하고, 11월에는 토비스콘도가 부도나며 노조가 해산했다. 이 밖에도 지역 직가입 노조였던 320명 규모의 경신공업이 희망퇴직을 수용하며 이탈했다. 발레오만도, 재활용선별장 투쟁이 패배한 후유증에 지난 몇 년간 조직한 수에 육박하는 노조들이 도미노 노조 탈퇴를 계속하며 많은 지역 활동가들이 무력감에 빠졌다.


주체적 원인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이러한 현실은 정권의 탄압이 드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주노조 운동 내부적으로도 몇 가지 문제점들을 그동안 혁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진단했다. 우선 그동안의 양적 성장을 질적 전화로 발전시켜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집행부 중심의 해결사 자판기적 노조활동이 계속되었고, 지침파업, (노사)담합파업이 계속되며 탄압에 대한 내성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속에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건강한 활동가들을 키워내는 일을 게을리하고, 지침만 수행하는 일회성, 실무적 간부들만 양성했다.
다음으로는 시나브로 진행된 민주노총의 중심성 약화와 정파운동의 폐해다. 금속노조로의 집중성이 강화되면서 지역으로의 집중성이 약화되었고, 여기에 일부 정파가 경주지역 조직화를 시도하며 곳곳에서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노총, 금속노조, 민주노동당 등 주요 조직 지도부 선거를 중심으로 계속 문제가 발생하면서 지역연대 기풍이 약화되었다. 이 밖에 비정규 미조직 조직화 사업 정체, 노동문제에만 갇힌 활동 등도 민주노조 운동을 약화시켰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과제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민주노조 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방법은 새로운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기존에 이야기되어 왔던 것들을 착실하게 실천해나가는 길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첫 번째는 당연히 공세적 조직화로 다시 나서는 것이다. 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의 주요과제라는 측면에서도, 복수노조(교섭창구단일화) 시대 대응이라는 측면에서도, 수세에 몰린 경주지역 노동운동의 돌파라는 측면에서도 공세적인 비정규·미조직노동자 조직화가 요구되고 있다. 경주지역은 금속노조경주지부와 경북일반노조를 두 축으로, 이전의 상담을 통한 개별사업장 조직화라는 한계를 넘어 집단적·집중적 조직화로 나가야 한다.
두 번째는 집단적으로 활동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단지 양적·기능주의적 조직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곳에서 이후 민주노조 운동을 새롭게 이끌어나갈 주체(계급의식으로 무장한 활동가)들을 집단적으로 양성해내지 않으면 운동의 미래는 없다. 지역차원의 활동가 양성은 실리화되고 취약해지는 현장조직력을 복원시켜낼 주체로서, 사업장을 넘어서고 정파를 넘어서고 노조활동을 넘어서는 방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다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조 운동의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사업장 따로, 산별조직 따로, 민주노총 지역조직 따로가 아니라 ‘지역’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투쟁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복수노조 시대로 접어들며 기업별회귀와 담합(反산별의식)이 확대되는 것의 대안으로서 ‘지역 중심성’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 이상의 과제를 정리하면 민주노조 운동 본래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정신인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도덕성)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방향이 요구되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정규직/대기업/남성/정주/비장애/취업/조직노동자 중심의 운동에서 비정규직/중소영세/여성/이주/장애/실업/미조직노동자 중심의 운동으로 변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역운동과의 결합으로 나가야 한다.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내용은 상급조직 지침수행, 소속사업장 관리, 투쟁사업장 지원·연대는 기본이 되면서(현재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님), 비정규·미조직노동자 조직화, 활동가 양성 교육, 불안정노동자 사업과 함께 삶과 생활의 영역인 지역운동과의 결합과 실천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의제를 포함한 지역운동의 의제를 중심으로, 관변시민단체나 개량적 시민단체를 넘어 지역에서 대안운동을 모색하는 단체들과 함께 지역운동으로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2011년 민주노조 운동, 새 도약을 위해 다시 초심으로!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의 발표는 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후 발제에 대한 몇 가지 질의와 응답이 이루어졌다. 여러 질문들이 있었지만 오세용 동지가 강조한 것은 '이전에 없던 특별한 것에서 답을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조 운동이 원래 해왔던, 조직되어 있지 않던 노동자를 조직하고,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고, 계급적 전망을 가지고 운동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노조 운동의 발전 동력이었고 현재 민주노조 운동이 수세에 몰리며 잃어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노조 탄압은 올해도 계속될 것이고, 개악 노조법에 따라 자본은 현장에서부터 민주노조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쓸 것이다. 이미 작년 경주, 창원, 대구 등에서 많은 지역의 금속노조 핵심 사업장들이 무너졌고, 올해도 여러 사업장들이 곤란함을 겪고 있다. 정권의 탄압을 뚫고 다시 민주노조 운동을 되살리는 길은 오세용 동지의 말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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