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운동의 역할
올해 초부터 중동ㆍ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시작된 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주화 시위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운명보다도 강고해 보였던 이 지역 독재자들의 카르텔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흔히 언론에서는 이러한 운동을 두고 ‘소셜 네트워크(SNS) 혁명’으로 소개하며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 묘사하곤 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자 운동이 그 속에서 미친 영향이라든가 민주화 시위의 사회운동적 전망에 대한 주류 언론의 분석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이 지역에서의 투쟁은 지역 민중들과 노동자 운동의 진전을 위한 가능성을 열었고, 여기서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적 연대를 위한 계기를 찾아야 한다.
중동ㆍ북아프리카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자면, 석유 산출 여부에 따라 국가 간 빈부격차가 매우 크며(최빈국 예멘에서부터 초부국 카타르, UAE 등), 중동지역 전체 실업률은 13%, 청년실업률은 25%에 달할 정도로 실업률이 높다. 노동자 운동은 1920년대 식민통치 반대 투쟁을 통해 등장하였다. 중동ㆍ북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의 권리는 일반적으로 매우 심각한 제약을 겪고 있다. 또한 법적으로 여성, 이주노동자, 공공부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및 배제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독재자들의 카르텔이 형성된 배경에는 석유산출이라는 지정학적 요인과 이슬람 세력의 존재라는 정치적 요인이 있다. 이 지역의 ‘세속화된’ 독재자들은 이슬람 세력을 이유로 대내외적으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해 왔다. 국가별로 미국에 대한 태도는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민주주의의 억압을 대가로 한 정치적 안정 보장(이슬람 세력 배제)이라는 논리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및 국내적으로 이슬람 반대세력을 억압함으로써 중도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지난 호 『사회운동』의 「이집트의 민주주의 혁명,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에서 이집트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의 역할을 다룬 바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이집트 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튀니지와 대규모 민중투쟁이 발생했던 알제리를 중심으로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튀니지
1) 재스민혁명의 전개
튀니지 민중혁명의 도화선은 한 청년 노점상의 분신이었다.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보우치드(Sidi Bouzid) 거리에서 무허가로 과일을 팔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지난해 12월 경찰 단속에 걸려 청과물을 모두 빼앗겼다. 그는 시청을 찾아가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당국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12월 17일 경찰 청사 앞 도로에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했다.
부아지지의 소식이 퍼지자 시디 보우치드의 거리는 시위대로 뒤덮였고, 1월 3일 그의 사망을 기점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1월 5일 부아지지의 장례가 치러졌고, 다음 날인 1월 6일 수천 명의 노동자가 청년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파업을 벌였다. 튀니지의 유일 공식 노총인 UGTT(Union Generale Tunisienne de Travail)는 총파업을 통해 헌법 개정과 구속된 노동조합 지도부 석방을 요구했다. 식료품값 인상과 최악의 실업난은 시민의 저항 열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시위는 이후 ‘독재 타도’를 전면에 내걸게 됐고 튀니지 국화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에 대해 벤 알리 정부는 철저한 탄압으로 대응했으나, 시위는 수도 튀니스까지 번져 정권을 위협하였다. 벤 알리 대통령은 차기 대선 불출마, 내각 해산 및 조기 총선 실시 등 유화책을 내놓으며 민심 수습에 나섰으나 이것만으로 저항의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월 14일 하야 후 망명을 선택했다. 내무부 추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최대 78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대부분 경찰의 발포에 의한 것이다.
2) 혁명의 원인
1956년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Habib Burqiba) 정권은 1970년대 코포라티즘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랜 식민통치로 내수 기반은 처음부터 미약하였고, 해외직접투자 역시 자본집약 산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고용 창출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중반, 외채위기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르기바 정권은 1986년 가격 자유화, 관세인하, 부채상환비율 및 채무비율 저하, 100억 달러의 외채 상환기간 연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IMF의 안정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부르기바 정권의 코포라티즘은 그 기반이 붕괴한다. 튀니지 정부가 1987년 사유화 정책 도입 후 일부 또는 전부 민영화한 기업은 총 160개에 이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해고로 이후 실업은 청년 인구의 폭발과 함께 튀니지 경제의 큰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사유화 등의 조치를 강제하기 위해 잠재적인 저항의 근원을 파괴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역사적으로 이를 수행한 세력이 바로 당시 등장한 벤 알리 정권이었다. 1987년 벤 알리는 부르기바 정권 아래서 무시되던 법치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며 무혈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벤 알리가 권력을 잡을 당시 했던 약속은 2011년 민중들의 시위 앞에서 취했던 유화적 제스처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점이다.
벤 알리는 집권 여당을 민주헌법회의(RCD)로 쇄신하고, 정치범 석방, 고문금지에 관한 UN헌장 비준, 종신 대통령직 폐지, 정당설립과 결사에 관한 제한 완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1989년 선거조작을 통해 여당이 100%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끝난다. UGTT는 그 이전까지 누리던 예산상의 자율성을 빼앗기고 지도부가 제거되면서 정권에 굴복한다.
벤 알리 정권은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2000년대 들어 관세와 상품수출 규제를 풀면서 EU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1990년대 들어 튀니지는 이라크, 사우디와 함께 ‘테러와의 전쟁’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한다. 벤 알리의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효과는 표면상으로는 놀라웠다. GDP는 유럽 주변부 국가의 그것에 필적했고, 공공부문 부채 비율은 낮은 수준을 유지했으며, 인플레이션은 안정적 수준에서 관리되고, 외채위기로 인해 하락했던 국가신용도가 회복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면적 성공 뒤에 일반 노동계급이 겪는 고통 역시 막대하였다. 높은 실업률, 불평등 심화, 보조금 철폐, 주거비용 상승, 복지 후퇴 등이 그것이다. 부는 일부 경제 엘리트와 그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해외 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 등이 공모하여 노동자 조직을 심각하게 탄압했고, 공교육과 보건의료 시스템은 사유화되어 그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또 실질임금은 인플레이션 상승에 훨씬 미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은 튀니지 정부에 균형재정을 위해 보조금 삭감을 권고하였다.
2011년 초 민심 이반을 일으킨 결정적 요인으로는 높은 실업률과 식료품 가격 상승을 들 수 있다. 특히 15세에서 29세까지 청년 실업률은 2008년 평균 실업률 14%의 두 배가 넘는 31.2%에 달하였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혁명은 아랍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유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리비아, 바레인, 예멘 등이 그 예다.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석유, 가스, 천연광물 산업과 관광산업으로부터 이전되는 ‘지대’를 향유하는 지배계급과 민중들 사이의 불평등이 날로 심각해져 왔다는 것이다.
이들 ‘지대’ 산업은 대개 수출산업으로서 고용 효과는 극히 미미하며, 매우 특수한 경제구조(석유 경제)를 낳게 된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내수산업은 저발전 상태에 머무를뿐더러, 금융과 기술 서비스 산업은 대개 초민족적 자본에 의해 통제된다.
이 중에서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공히 나타나는 ‘관광산업’이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켰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튀니지의 ‘경제 기적’을 이끈 동력 중 하나는 관광산업인데, 이로 인한 경제적 혜택은 관광산업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과 소수 경제 엘리트에게만 전유 되었으며, 이들은 또한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국토가 관광자원으로 개발됨에 따라 주거비용이 상승하고, 농지가 관광지로 전환됨에 따라 농산품의 수입의존도가 높아졌다. 즉 수입농산물 가격 변동에 직접적인 취약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전 세계적인 식료품값 상승에 따른 국민경제의 악화가 이번 혁명의 경제적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혁명에서 튀지니 노동자운동의 역할
튀니지 유일의 공식 노총인 UGTT의 조합원 총수는 약 50만 명 정도로 10~15%가량의 노동자를 포괄하고 있다. 튀니지의 노동법 아래서 노동조합의 권리 보장은 미약한 수준이다. 노조 결성에 허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노총은 허가가 필요하다. 파업권은 보장되어 있으나, 모든 파업은 공식 노총인 UGTT의 승인을 얻어야만 하며, UGTT는 기층 노조의 행동을 과도하게 제약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파업을 하기 위해서는 파업 기간을 사전에 통보해야 하며, 불법 파업에 연루된 노동자는 3~8개월에 이르기까지 수감될 수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노총인 CGT에 대응하여 창립된 UGTT는 설립 당시부터 온건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이후 부르기바 정권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벤 알리 정권에 들어서는 노골적인 친정부 성향을 보였다. 노동운동 전반으로 보자면 대부분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과는 달리 튀니지 노동자 운동은 대정부 투쟁에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투쟁의 경험이 존재하며, 이는 모두 UGTT라는 울타리를 넘나들며 벌어진 일이다. 예를 들어 UGTT는 1977년 크사르 헬랄(Ksar Hellal) 지역의 국영 섬유회사 파업과 동년 인산염 광산 파업 등에서 승리하였으며, 1978년에는 전국적 총파업을 시도하였다. 또 2007년 재스민 혁명에 앞서 가프사(Gafsa) 지역에서 벌어진 투쟁은 국영 인산염 광산에서 벌어지는 부패한 고용 관행에 맞서 청년 실업계층을 중심으로 벌어진 파업이었다. 당시 정부와 유착한 UGTT 중앙 지도부에 절망한 노동자들은 UGTT 가프사 지역 본부를 장악하고 6개월간 투쟁을 이끌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벤 알리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젊은이들이 정치적 자유와 일자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전까지 정권에 충성하던 UGTT의 지도부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UGTT를 중심으로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은 민중봉기 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이 알자지라 방송과 페이스북, 그리고 블로그 등을 통해 알려져 전국적 공분을 얻게 되나, 이를 실제 오프라인에서의 투쟁으로 만든 것은 UGTT 시디 보우치드 지역본부였던 것이다.
14일 벤 알리의 도주 후 과도정부 구성에서도 UGTT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과도정부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UGTT는 애초 집권여당인 민주헌법회의에서 이탈한 모하메드 간노우치가 이끄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통합정부에서 철수한 후 민주헌법회의의 해체와 장관급 퇴진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주도권을 행사하는 벤 알리 추종세력은 모든 야당세력과 협력하겠다고 밝히고 과도내각을 구성하였으나, UGTT는 과도내각에 파견한 노동자 대표자를 사퇴시키고 UGTT의 국회의원들 또한 자리를 내놨다. 이후 구 여당세력의 척결을 주장하는 시위와 함께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튀니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스팍스에서 총파업을 벌였다.
4) 민주화 혁명 이후 튀지니 노동자운동의 전망
비록 약화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튀니지의 지배계급은 권력을 쥐고 있다. 혁명을 이끌었던 조직된 노동자 운동과 튀니지 좌파, 그리고 이슬람 세력은 여전히 투쟁하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혁명 이후 UGTT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나 정국을 주도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벤 알리의 퇴진 이후 열린 새로운 정치적 공간 속에서 다양한 세력이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2월 2일에는 벤 알리 정권 아래서 인정을 받지 못한 튀니지노동총연맹(Federation Generale Tunisienne du Travail, CGTT)이 임시행정부에 법적 승인을 요구하며 출범을 발표했다. CGTT의 성명서를 보면 현 UGTT 집행부의 지난 23년간의 친정부 행태를 비판하며, 정치권력의 ‘일당’ 모델에 조응하는 노동자 운동의 ‘단일노총’ 모델은 종식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간노우치 반대 운동에서도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경향성을 지닌 세력들이 출현하고 있다. 알 나다(Al Nahda)와 1.14 전선이 그 대표적 예이다. 알 나다는 벤 알리 정권 아래 탄압을 당하던 중도 이슬람 조직이며, 1.14 전선은 좌파 정당과 조직의 연합체다. 1.14 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조직은 노동좌파연맹(League of the Labor Left), 나세르 노동자 운동(Movement of Nasserist Unionists), 민주국민운동(Movement of Democratic Nationalists), 민주국민당(Democratic Nationalists, Al-Watad), 독립좌파(Independent Left), 튀니지 공산노동당(Tunisian Communist Workers Party), 그리고 애국민주노동당(Patriotic and Democratic Labor Party) 등이다.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이 앞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민주정부 구성에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서방세계의 리비아 침공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패권 다툼이 향후 어떠한 정치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특히 튀니지 노동자 운동이 이슬람 세력과의 정치적 관계 형성을 두고 어떤 입장을 취할지 역시 초미의 관심사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의 요구가 주로 정권퇴진, 계엄법 철폐, 고문금지, 자유선거 실시 등 정치적 자유에 관한 것임과 동시에 사회경제적 평등과 분배에 대한 요구가 공권력의 힘을 뚫고 정권 전복에 이르게 하였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향후 사회경제적 변화를 만들어갈 책임이 자신들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알제리
튀니지와 이집트에 비해 알제리는 미디어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했는데, 그 이유는 알제리의 시위가 두 국가만큼 고조되지 못하였고, 또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정권의 전복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16위의 석유 생산국인 알제리(리비아는 17위)에서의 사회변화는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더욱이 미국의 오랜 동맹인 부테플리카 정권이 카다피를 지지하면서 알제리와 부테플리카 정권의 운명이 이 지역 전체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 맥락을 고려한다면 현 시점에서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가지는 정세적 중요성 또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는 또한 아랍 국가들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강력한 독립노조가 활동하고 있다.)
1) 2010-2011년 시위의 전개
2011년 초 알제리의 대규모 시위는 2010년 12월 주거공간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초 설탕과 식용유, 밀가루의 국제 시세가 상승하면서 가격이 올랐고, 때마침 암시장에 가해진 규제가 이를 부채질하였다. 이 때문에 시위는 더욱 고조되었고, 1월 초부터 몇 주 동안 알제리 전역에 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소식에 고무된 알제리인들 역시 주거공간의 부족, 청년실업, 정부 부패,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튀니지에서의 시위가 정부를 전복한 뒤, 알제리에서도 수 명의 분신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대규모 시위는 1월 중순을 지나면서 사그라졌다. 그리고 1월 21일 독립노조들과 진보적 사회단체들은 변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 연합(National Coordination for Change and Democracy, CNCD)을 결성하였다. CNCD는 그때까지는 상당히 자연발생적이었던 대중집회를 부테플리카 정권의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모아낼 방안을 강구하였다. CNCD는 실업, 주택부족, 생필품 가격 상승을 이유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알제리의 일부 여당들과 함께 CNCD는 2월 말까지 간헐적인 시위를 조직하였고, 2월 12일 시위에는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 수천의 시위대가 수도 알제의 ‘5월 1일’ 광장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1월 이후 알제리 정부는 유화책과 강경책을 모두 동원해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였다. 알제리 정부는 수만의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고, 2월 12일을 비롯 몇 번의 충돌을 겪으며 수 명의 사상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1월 8일 정부는 설탕과 식용유에 대한 세금을 8월까지 임시로 낮추는 데 동의했지만, 이는 표면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결국 2월 22일 알제리 정부는 지난 19년 동안 시위를 금지하고, 헌법적 자유를 제약하며, 임의 구금을 가능케 했던 계엄법의 철폐를 발표하였다. 계엄법이 철회되었음에도 그 효과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수도 알제에서 시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시위의 원인
1월의 시위가 규모로 따지자면 근래 최대의 시위였으나, 이와 비슷한 시위가 지난 몇 년간 계속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2001년 베르베르족 영토인 카빌리아 지방에서는 대규모의 장기 소요사태가 있었다. 2005년 이후 알제리에서는 거의 2주에 한 번 꼴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통계도 있다. 이러한 소요사태는 국가의 분배 기능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대중들 역시 기존의 정치체계가 너무도 부패한 나머지 공식 정치체계 속에선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할 경로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알제리의 사회위기는 극히 심각하다. 인플레이션은 2011년 11월까지 평균 5.7%였는데, 농산물 가격은 1년 사이 21% 이상 올랐다. 2002년 내전 종식 이후 5년간 정규직 일자리를 얻은 노동자는 전체의 30%에 그쳤다. 비공식 부문이 계속 커지고, 민간 부문은 점점 임시직으로 채워졌다. 평균 실업률은 30%인데, 청년층의 실업률은 35%에 달한다. 최근 시위에 깊이 참여한 베르베르족의 경우, 경제적 고통에 더해 언어적·문화적 차별로 인한 피해를 받아온 역사가 있다.
높은 실업률과 저임금, 생활수준 하락을 겪은 알제리의 청년층은 규제가 없는 길거리 시장의 노점상과 같은 비공식 부문으로 유입되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이들을 잘못된 경제정책의 결과로 인식하기보다는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지난 10월부터 정부는 시장을 폐쇄하고 세금탈루를 이유로 노점상을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공식 부문에 대한 단속은 시위의 또 다른 직접적 원인이었다.
3) 석유경제
알제리인들이 겪는 가난과 실업이라는 문제는 알제리가 탄화수소 경제(석유경제)에 편향적으로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알제리에서 유전이 처음 발견된 해는 1956년이며, 1958년부터 원유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후 알제리 경제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졌으나, 기타 산업은 저발전 상태로 머물러 있다. 탄화수소 경제는 현재 수출의 95%, GDP의 51%, 전체 고용의 13.6%를 차지한다. 알제리는 현재 거의 1,500만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지니고 있으며, 대외부채는 거의 없고, 2011년 4%의 경제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석유산업에서 창출되는 부는 군부와 정부의 일부 엘리트, 그리고 1990년대부터 알제리에 진입한 초국적 석유회사의 손에 떨어질 뿐이다.
알제리는 척박한 토양과 만성적 물 부족, 농업부문 발전을 등한시하는 정책 때문에 농산물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다. 따라서 세계 식량가격 변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지난 6개월간 알제리의 기초 식량 가격은 상승 일로에 있었으며, 일부 식품의 경우 50%까지 인상되기도 하였다. 식료품 가격 상승이 일반 가계에 끼친 부담이 2011년 초부터 일어난 봉기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은 요르단, 수단, 예멘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알제리 경제 전반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유가 상승이 식료품 가격 상승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세계적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기계화된 대규모 농업에는 농기계와 운송수단에 석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유는 또한 살충제, 제초제, 화학비료 등의 제조에 사용된다. 더욱이 유가상승은 지구 온난화 문제 대처를 위한 각국 정부의 시도로 식량이 아닌 바이오연료용 작물 재배에 대한 유인을 강화했고, 이 역시 식료품 가격 상승에 기여했다. 따라서 유가 상승이라는 현상이 알제리 엘리트에게는 부의 원천이었던 반면 민중들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된 것이다.
4) 군부, 내전, 신자유주의 개혁
사회주의 성향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FLN) 정부가 1988년 말 무너진 이후 나타난 정쟁과 신자유주의 개혁 때문에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88년 유가 하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정부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한 불만이 겹쳐 대규모 파업과 학생들의 동맹휴업이 벌어졌다. 정부는 경찰력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충돌이 끝날 때까지 500명이 희생되었고, 3,500명이 투옥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차들리 벤제디드는 내각 대부분을 해임하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다. 1989년 2월 정부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는 새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렇지만 이 법에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양보조치로서 이전 헌법에서는 보장되었던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였다.) 군의 역할은 국방으로 국한되었다.
그렇지만 (남성에게만 주어진) 상대적인 정치적 자유의 시기는 얼마 가지 못해 끝이 났다.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인 이슬람해방전선이 1990년 지방선거에서 62%의 지지를 얻고, 이듬해 전국선거에서는 최대 다수당이 되었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벤제디드 대통령을 사퇴시키고 급격히 급진화된 이슬람 세력과의 내전을 시작하였다. 10년간 계속된 내전에서 약 20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이유로 1992년 계엄법이 발효되었다.
내전 와중에 군부 정권은 IMF와 세계은행에 따라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94년 IMF는 외채 조정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였다. 4년간 지속된 이 프로그램에 따라 알제리 정부는 소비자 보조금 폐지, 부가가치세 인상, 공공지출 삭감, 공공부문 노동자 임금 동결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구조조정, 사유화, 공기업 해체 조치도 취해졌다. 총 450,000명의 공공부문 노동자가 해고당했으며, 이 때문에 불만과 가난이 증대되었다. 1986년부터 1999년까지 1인당 GDP는 2,590달러에서 1,550달러로 하락하였다.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로 채워진 민간부문의 확장과 사유화는 200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정부는 특히 석유산업에 해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슬람주의 지지세력을 민주적 과정에 참여시키는 대신 광범한 탄압을 펼친 것은 해외 투자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2005년 통과된 탄화수소법을 통해 무역과 투자 규제가 해제되었고 석유산업에 자유경쟁이 도입되어 국영 석유회사 역시 경쟁에 노출되었다. 그 결과 미국과 프랑스의 초민족기업이 특히 석유산업에서 더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고, 착취가 심화되었다.
5) 알제리 노동조합법과 노동조합
알제리의 노동조합법은 아랍세계 대부분의 국가보다는 제약이 덜하지만, 노동조합의 권리가 완벽히 보장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법에 따르면 알제리인들은 노동조합 결사와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을 등록하기 위해선 사업장 전체 노동자의 20%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등록 노조는 단체협상의 권리가 보장된다. 파업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매우 심각하게 제약되어 합법 파업을 벌이기란 매우 어렵다. 파업을 결의하기 위해선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비밀투표를 해야 하며 파업 시작 1주일 전에 통보하여야 한다. 정부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파업을 금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계속해서 폐지를 요구해온 조항이기도 하다.
알제리에서 유일하게 승인된 노총은 알제리노총(General Union of Algerian Workers, UGTA)으로, 알제리가 여전히 식민상태에 있던 1956년 FLN에 의해 설립되었다. UGTA의 애초 목적은 프랑스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통치 기간 동안 UGTA의 지도부는 FLN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했으나, 1962년 해방 이후 FLN의 국가구조 안에 포섭되게 된다. 공공부문 파업은 불법화되었고, UGTA 지도부의 임무는 노동쟁의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UGTA 하부조직 활동가들은 FLN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고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할 수 있었다.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일부나마 귀를 기울였으며,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에는 몇 번의 대규모 파업도 기획하였다.
1988년 시위 이후 짧게 지속된 민주화 시기,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1989년 신헌법은 집회의 자유와 파업권을 보장하였고, 복수노조를 가능케 하였다. 1989년 학생운동의 활동을 통해 몇몇 독립노조가 정부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그렇지만 UGTA는 이러한 변화에 저항하였으며, 1991년 군부가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군부를 지지하였다. 정부는 계엄법을 독립노조와 모든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의 도구로 삼았다. 정부는 과거 독립노조를 승인하긴 했지만, 단체협상과 사회적 대화로부터는 배제하였다. 정부는 고의적으로 일부 노조의 등록 신청 심사를 연기하거나, 등록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2004년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UGTA만을 공식 인정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억압적 상황에도 현재 알제리에는 약 20개의 독립노조가 60만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UGTA의 공식 포괄 노동자는 130만 명이다.) 독립노조는 보건 및 교육 부문에서 특히 강력하다.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간 알제리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워 왔다. 1990년대 동안 UGTA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동안 긴축 정책과 고용악화에 항의하여 수차례 파업과 투쟁을 벌였다. 2003년 UGTA의 총파업은 석유산업의 경쟁 심화와 외자 유치를 목적으로 하는 탄화수소법의 시행을 연기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보건의료 및 교사 독립노조는 2003년 파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2008년 임금 인상을 쟁취할 수 있었다. 철도, 트럭, 항만, 철강 노동자들 역시 성공적인 파업을 벌인 바 있는데, 이들이 벌인 파업의 상당수는 비공인 파업이었다. 알제리 약 20개의 초민족적기업 노동자들은 처참한 노동조건과 노동법 회피 등에 맞서 UGTA 안팎을 넘나들며 투쟁을 벌였다.
6) 시위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역할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 노동조합이건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이건 거리시위가 가장 강력하게 펼쳐지던 1월 초의 자연발생적 투쟁에서 큰 역할을 하진 못했다. 이것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알제리의 소규모 독립노조 중 4개 노조가 CNCD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며, 야당과 사회단체와의 공조를 통해 2월 12일 시위를 비롯한 다른 시위를 기획하였다. 그렇지만 CNCD는 1월에 시위를 시작한 대다수 시민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하였으며, 체제 변화를 위한 구체적 요구안 마련이나 알제리의 미래상을 그리지도 못하였다. 2월 말이 되어가면서 CNCD는 ‘운동을 재구성’한다는 명분으로 대중동원 기획을 그만두었다. 제1야당인 문화민주 행동당(Rally for Culture and Democracy, RCD)의 경우 3월 초까지 시위 조직화를 이어나갔지만, 수백 명만이 참석하는 소규모 집회에 그쳤다.
7) 알제리 혁명과 알제리 노동자운동의 전망
CNCD나 어떤 재야세력도 알제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부활시키고 혁명적 열정을 다시 불붙이기란 당분간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면 알제리에서는 무엇이 이집트, 튀니지와 달랐기에 이런 결과가 찾아왔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먼저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12월에서 2월까지 일어난 시위는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이 폭발하면서 이전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창출해낸 반면, 알제리에서 이러한 자발적인 대중동원은 지난 몇 년간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월의 시위는 많은 점에서 그 규모가 컸을 뿐 과거시위와 ‘거의 동일’했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정치적 요구가 부재하였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이집트에서 정치세력은 애초에 경제적 요구와 함께 부패한 국가와 억압적 권력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내걸었다. 반면 알제리에서는 몇 년 동안이나 똑같은 분배문제를 둘러싸고 시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정치적 요구는 부재했다. CNCD는 2월 들어 정치적 요구를 포함하려 노력하였으나, 그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소요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피로감을 고려하여야 한다. 수년에 걸친 내전 때문에 정치적 안정과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광범위한 불만에도 오랫동안 알제리인들의 삶을 위협했던 일상적 폭력을 다시금 불러올지 모르는 장기적 정치 불안정 상태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비록 혁명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알제리의 운동세력은 시위를 통해 비상계엄법이 해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비록 작은 승리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화와 노동자 운동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다. 부테플리카 정권을 압박하여 그가 약속한 정치적 자유를 말이 아닌 현실에서 쟁취하고, 그를 통해 나타날 성장의 공간을 이용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알제리의 사회단체와 노조에 달렸다.
결론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리비아는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리비아에 대한 군사공격이 이 세 나라를 비롯한 아랍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판단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영향이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독재정권을 지원해 왔던 서방세계는 현재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있다. 명확한 것은 서방 강대국들이 ‘인도주의적 개입’을 구실로 변화된 상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재확립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의도가 관철된다면 서방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의존해 온 기초적인 정치경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지역의 사회·정치적 변화를 억누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껏 얻어낸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민주세력과 노동자 운동이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알제리 CNCD에 참가한 독립 노조와 운동조직들은 세력을 늘려 부테플리카를 압박하여 자신이 약속한 개혁을 수행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3국 모두에서 민주화 세력과 노동자 운동 세력은 정치적 제약이 느슨해짐으로써 형성된 정치적 공간을 활용하여 기반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북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이 최근의 시위에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젊은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잠재적 역량이다. 이들 집단은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이 조직률 하락과 영향력 상실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들 부문을 조직해야 한다.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에서 비공식 부문 노동자를 조직하고 그들의 요구에 대응할 방법을 찾는다면 이들 국가의 노동조합은 시위 주요 세력과의 결합을 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시위는 국제 연대를 위한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민주화 시위대와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깃발과 현수막을 통해 서로의 투쟁을 지지하였다. 알제리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무라바크가 퇴임하기 불과 며칠 전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연대집회를 벌였다. 이제 상징적 연대를 넘어 실질적 교류를 할 때이다. 아프리카 노동자들은 독립노조의 설립과 운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 그리고 정치적 참여의 계기를 모색하는 데 있어 서로의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노조와 다른 운동세력은 사회ㆍ경제적 변화를 위한 주장을 이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장기적 관점에서 조직화를 진행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투쟁을 주도해야 한다. 혁명은 진정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중동ㆍ북아프리카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자면, 석유 산출 여부에 따라 국가 간 빈부격차가 매우 크며(최빈국 예멘에서부터 초부국 카타르, UAE 등), 중동지역 전체 실업률은 13%, 청년실업률은 25%에 달할 정도로 실업률이 높다. 노동자 운동은 1920년대 식민통치 반대 투쟁을 통해 등장하였다. 중동ㆍ북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의 권리는 일반적으로 매우 심각한 제약을 겪고 있다. 또한 법적으로 여성, 이주노동자, 공공부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및 배제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독재자들의 카르텔이 형성된 배경에는 석유산출이라는 지정학적 요인과 이슬람 세력의 존재라는 정치적 요인이 있다. 이 지역의 ‘세속화된’ 독재자들은 이슬람 세력을 이유로 대내외적으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해 왔다. 국가별로 미국에 대한 태도는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민주주의의 억압을 대가로 한 정치적 안정 보장(이슬람 세력 배제)이라는 논리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및 국내적으로 이슬람 반대세력을 억압함으로써 중도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지난 호 『사회운동』의 「이집트의 민주주의 혁명,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에서 이집트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의 역할을 다룬 바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이집트 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튀니지와 대규모 민중투쟁이 발생했던 알제리를 중심으로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튀니지
1) 재스민혁명의 전개
튀니지 민중혁명의 도화선은 한 청년 노점상의 분신이었다.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보우치드(Sidi Bouzid) 거리에서 무허가로 과일을 팔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지난해 12월 경찰 단속에 걸려 청과물을 모두 빼앗겼다. 그는 시청을 찾아가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당국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12월 17일 경찰 청사 앞 도로에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했다.
부아지지의 소식이 퍼지자 시디 보우치드의 거리는 시위대로 뒤덮였고, 1월 3일 그의 사망을 기점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1월 5일 부아지지의 장례가 치러졌고, 다음 날인 1월 6일 수천 명의 노동자가 청년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파업을 벌였다. 튀니지의 유일 공식 노총인 UGTT(Union Generale Tunisienne de Travail)는 총파업을 통해 헌법 개정과 구속된 노동조합 지도부 석방을 요구했다. 식료품값 인상과 최악의 실업난은 시민의 저항 열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시위는 이후 ‘독재 타도’를 전면에 내걸게 됐고 튀니지 국화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에 대해 벤 알리 정부는 철저한 탄압으로 대응했으나, 시위는 수도 튀니스까지 번져 정권을 위협하였다. 벤 알리 대통령은 차기 대선 불출마, 내각 해산 및 조기 총선 실시 등 유화책을 내놓으며 민심 수습에 나섰으나 이것만으로 저항의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월 14일 하야 후 망명을 선택했다. 내무부 추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최대 78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대부분 경찰의 발포에 의한 것이다.
2) 혁명의 원인
1956년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Habib Burqiba) 정권은 1970년대 코포라티즘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랜 식민통치로 내수 기반은 처음부터 미약하였고, 해외직접투자 역시 자본집약 산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고용 창출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중반, 외채위기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르기바 정권은 1986년 가격 자유화, 관세인하, 부채상환비율 및 채무비율 저하, 100억 달러의 외채 상환기간 연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IMF의 안정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부르기바 정권의 코포라티즘은 그 기반이 붕괴한다. 튀니지 정부가 1987년 사유화 정책 도입 후 일부 또는 전부 민영화한 기업은 총 160개에 이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해고로 이후 실업은 청년 인구의 폭발과 함께 튀니지 경제의 큰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사유화 등의 조치를 강제하기 위해 잠재적인 저항의 근원을 파괴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역사적으로 이를 수행한 세력이 바로 당시 등장한 벤 알리 정권이었다. 1987년 벤 알리는 부르기바 정권 아래서 무시되던 법치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며 무혈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벤 알리가 권력을 잡을 당시 했던 약속은 2011년 민중들의 시위 앞에서 취했던 유화적 제스처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점이다.
벤 알리는 집권 여당을 민주헌법회의(RCD)로 쇄신하고, 정치범 석방, 고문금지에 관한 UN헌장 비준, 종신 대통령직 폐지, 정당설립과 결사에 관한 제한 완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1989년 선거조작을 통해 여당이 100%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끝난다. UGTT는 그 이전까지 누리던 예산상의 자율성을 빼앗기고 지도부가 제거되면서 정권에 굴복한다.
벤 알리 정권은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2000년대 들어 관세와 상품수출 규제를 풀면서 EU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1990년대 들어 튀니지는 이라크, 사우디와 함께 ‘테러와의 전쟁’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한다. 벤 알리의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효과는 표면상으로는 놀라웠다. GDP는 유럽 주변부 국가의 그것에 필적했고, 공공부문 부채 비율은 낮은 수준을 유지했으며, 인플레이션은 안정적 수준에서 관리되고, 외채위기로 인해 하락했던 국가신용도가 회복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면적 성공 뒤에 일반 노동계급이 겪는 고통 역시 막대하였다. 높은 실업률, 불평등 심화, 보조금 철폐, 주거비용 상승, 복지 후퇴 등이 그것이다. 부는 일부 경제 엘리트와 그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해외 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 등이 공모하여 노동자 조직을 심각하게 탄압했고, 공교육과 보건의료 시스템은 사유화되어 그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또 실질임금은 인플레이션 상승에 훨씬 미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은 튀니지 정부에 균형재정을 위해 보조금 삭감을 권고하였다.
2011년 초 민심 이반을 일으킨 결정적 요인으로는 높은 실업률과 식료품 가격 상승을 들 수 있다. 특히 15세에서 29세까지 청년 실업률은 2008년 평균 실업률 14%의 두 배가 넘는 31.2%에 달하였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혁명은 아랍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유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리비아, 바레인, 예멘 등이 그 예다.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석유, 가스, 천연광물 산업과 관광산업으로부터 이전되는 ‘지대’를 향유하는 지배계급과 민중들 사이의 불평등이 날로 심각해져 왔다는 것이다.
이들 ‘지대’ 산업은 대개 수출산업으로서 고용 효과는 극히 미미하며, 매우 특수한 경제구조(석유 경제)를 낳게 된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내수산업은 저발전 상태에 머무를뿐더러, 금융과 기술 서비스 산업은 대개 초민족적 자본에 의해 통제된다.
이 중에서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공히 나타나는 ‘관광산업’이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켰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튀니지의 ‘경제 기적’을 이끈 동력 중 하나는 관광산업인데, 이로 인한 경제적 혜택은 관광산업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과 소수 경제 엘리트에게만 전유 되었으며, 이들은 또한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국토가 관광자원으로 개발됨에 따라 주거비용이 상승하고, 농지가 관광지로 전환됨에 따라 농산품의 수입의존도가 높아졌다. 즉 수입농산물 가격 변동에 직접적인 취약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전 세계적인 식료품값 상승에 따른 국민경제의 악화가 이번 혁명의 경제적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혁명에서 튀지니 노동자운동의 역할
튀니지 유일의 공식 노총인 UGTT의 조합원 총수는 약 50만 명 정도로 10~15%가량의 노동자를 포괄하고 있다. 튀니지의 노동법 아래서 노동조합의 권리 보장은 미약한 수준이다. 노조 결성에 허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노총은 허가가 필요하다. 파업권은 보장되어 있으나, 모든 파업은 공식 노총인 UGTT의 승인을 얻어야만 하며, UGTT는 기층 노조의 행동을 과도하게 제약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파업을 하기 위해서는 파업 기간을 사전에 통보해야 하며, 불법 파업에 연루된 노동자는 3~8개월에 이르기까지 수감될 수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노총인 CGT에 대응하여 창립된 UGTT는 설립 당시부터 온건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이후 부르기바 정권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벤 알리 정권에 들어서는 노골적인 친정부 성향을 보였다. 노동운동 전반으로 보자면 대부분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과는 달리 튀니지 노동자 운동은 대정부 투쟁에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투쟁의 경험이 존재하며, 이는 모두 UGTT라는 울타리를 넘나들며 벌어진 일이다. 예를 들어 UGTT는 1977년 크사르 헬랄(Ksar Hellal) 지역의 국영 섬유회사 파업과 동년 인산염 광산 파업 등에서 승리하였으며, 1978년에는 전국적 총파업을 시도하였다. 또 2007년 재스민 혁명에 앞서 가프사(Gafsa) 지역에서 벌어진 투쟁은 국영 인산염 광산에서 벌어지는 부패한 고용 관행에 맞서 청년 실업계층을 중심으로 벌어진 파업이었다. 당시 정부와 유착한 UGTT 중앙 지도부에 절망한 노동자들은 UGTT 가프사 지역 본부를 장악하고 6개월간 투쟁을 이끌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벤 알리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젊은이들이 정치적 자유와 일자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전까지 정권에 충성하던 UGTT의 지도부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UGTT를 중심으로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은 민중봉기 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이 알자지라 방송과 페이스북, 그리고 블로그 등을 통해 알려져 전국적 공분을 얻게 되나, 이를 실제 오프라인에서의 투쟁으로 만든 것은 UGTT 시디 보우치드 지역본부였던 것이다.
14일 벤 알리의 도주 후 과도정부 구성에서도 UGTT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과도정부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UGTT는 애초 집권여당인 민주헌법회의에서 이탈한 모하메드 간노우치가 이끄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통합정부에서 철수한 후 민주헌법회의의 해체와 장관급 퇴진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주도권을 행사하는 벤 알리 추종세력은 모든 야당세력과 협력하겠다고 밝히고 과도내각을 구성하였으나, UGTT는 과도내각에 파견한 노동자 대표자를 사퇴시키고 UGTT의 국회의원들 또한 자리를 내놨다. 이후 구 여당세력의 척결을 주장하는 시위와 함께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튀니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스팍스에서 총파업을 벌였다.
4) 민주화 혁명 이후 튀지니 노동자운동의 전망
비록 약화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튀니지의 지배계급은 권력을 쥐고 있다. 혁명을 이끌었던 조직된 노동자 운동과 튀니지 좌파, 그리고 이슬람 세력은 여전히 투쟁하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혁명 이후 UGTT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나 정국을 주도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벤 알리의 퇴진 이후 열린 새로운 정치적 공간 속에서 다양한 세력이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2월 2일에는 벤 알리 정권 아래서 인정을 받지 못한 튀니지노동총연맹(Federation Generale Tunisienne du Travail, CGTT)이 임시행정부에 법적 승인을 요구하며 출범을 발표했다. CGTT의 성명서를 보면 현 UGTT 집행부의 지난 23년간의 친정부 행태를 비판하며, 정치권력의 ‘일당’ 모델에 조응하는 노동자 운동의 ‘단일노총’ 모델은 종식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간노우치 반대 운동에서도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경향성을 지닌 세력들이 출현하고 있다. 알 나다(Al Nahda)와 1.14 전선이 그 대표적 예이다. 알 나다는 벤 알리 정권 아래 탄압을 당하던 중도 이슬람 조직이며, 1.14 전선은 좌파 정당과 조직의 연합체다. 1.14 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조직은 노동좌파연맹(League of the Labor Left), 나세르 노동자 운동(Movement of Nasserist Unionists), 민주국민운동(Movement of Democratic Nationalists), 민주국민당(Democratic Nationalists, Al-Watad), 독립좌파(Independent Left), 튀니지 공산노동당(Tunisian Communist Workers Party), 그리고 애국민주노동당(Patriotic and Democratic Labor Party) 등이다.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이 앞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민주정부 구성에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서방세계의 리비아 침공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패권 다툼이 향후 어떠한 정치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특히 튀니지 노동자 운동이 이슬람 세력과의 정치적 관계 형성을 두고 어떤 입장을 취할지 역시 초미의 관심사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의 요구가 주로 정권퇴진, 계엄법 철폐, 고문금지, 자유선거 실시 등 정치적 자유에 관한 것임과 동시에 사회경제적 평등과 분배에 대한 요구가 공권력의 힘을 뚫고 정권 전복에 이르게 하였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향후 사회경제적 변화를 만들어갈 책임이 자신들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알제리
튀니지와 이집트에 비해 알제리는 미디어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했는데, 그 이유는 알제리의 시위가 두 국가만큼 고조되지 못하였고, 또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정권의 전복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16위의 석유 생산국인 알제리(리비아는 17위)에서의 사회변화는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더욱이 미국의 오랜 동맹인 부테플리카 정권이 카다피를 지지하면서 알제리와 부테플리카 정권의 운명이 이 지역 전체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 맥락을 고려한다면 현 시점에서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가지는 정세적 중요성 또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는 또한 아랍 국가들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강력한 독립노조가 활동하고 있다.)
1) 2010-2011년 시위의 전개
2011년 초 알제리의 대규모 시위는 2010년 12월 주거공간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초 설탕과 식용유, 밀가루의 국제 시세가 상승하면서 가격이 올랐고, 때마침 암시장에 가해진 규제가 이를 부채질하였다. 이 때문에 시위는 더욱 고조되었고, 1월 초부터 몇 주 동안 알제리 전역에 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소식에 고무된 알제리인들 역시 주거공간의 부족, 청년실업, 정부 부패,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튀니지에서의 시위가 정부를 전복한 뒤, 알제리에서도 수 명의 분신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대규모 시위는 1월 중순을 지나면서 사그라졌다. 그리고 1월 21일 독립노조들과 진보적 사회단체들은 변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 연합(National Coordination for Change and Democracy, CNCD)을 결성하였다. CNCD는 그때까지는 상당히 자연발생적이었던 대중집회를 부테플리카 정권의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모아낼 방안을 강구하였다. CNCD는 실업, 주택부족, 생필품 가격 상승을 이유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알제리의 일부 여당들과 함께 CNCD는 2월 말까지 간헐적인 시위를 조직하였고, 2월 12일 시위에는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 수천의 시위대가 수도 알제의 ‘5월 1일’ 광장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1월 이후 알제리 정부는 유화책과 강경책을 모두 동원해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였다. 알제리 정부는 수만의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고, 2월 12일을 비롯 몇 번의 충돌을 겪으며 수 명의 사상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1월 8일 정부는 설탕과 식용유에 대한 세금을 8월까지 임시로 낮추는 데 동의했지만, 이는 표면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결국 2월 22일 알제리 정부는 지난 19년 동안 시위를 금지하고, 헌법적 자유를 제약하며, 임의 구금을 가능케 했던 계엄법의 철폐를 발표하였다. 계엄법이 철회되었음에도 그 효과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수도 알제에서 시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시위의 원인
1월의 시위가 규모로 따지자면 근래 최대의 시위였으나, 이와 비슷한 시위가 지난 몇 년간 계속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2001년 베르베르족 영토인 카빌리아 지방에서는 대규모의 장기 소요사태가 있었다. 2005년 이후 알제리에서는 거의 2주에 한 번 꼴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통계도 있다. 이러한 소요사태는 국가의 분배 기능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대중들 역시 기존의 정치체계가 너무도 부패한 나머지 공식 정치체계 속에선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할 경로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알제리의 사회위기는 극히 심각하다. 인플레이션은 2011년 11월까지 평균 5.7%였는데, 농산물 가격은 1년 사이 21% 이상 올랐다. 2002년 내전 종식 이후 5년간 정규직 일자리를 얻은 노동자는 전체의 30%에 그쳤다. 비공식 부문이 계속 커지고, 민간 부문은 점점 임시직으로 채워졌다. 평균 실업률은 30%인데, 청년층의 실업률은 35%에 달한다. 최근 시위에 깊이 참여한 베르베르족의 경우, 경제적 고통에 더해 언어적·문화적 차별로 인한 피해를 받아온 역사가 있다.
높은 실업률과 저임금, 생활수준 하락을 겪은 알제리의 청년층은 규제가 없는 길거리 시장의 노점상과 같은 비공식 부문으로 유입되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이들을 잘못된 경제정책의 결과로 인식하기보다는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지난 10월부터 정부는 시장을 폐쇄하고 세금탈루를 이유로 노점상을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공식 부문에 대한 단속은 시위의 또 다른 직접적 원인이었다.
3) 석유경제
알제리인들이 겪는 가난과 실업이라는 문제는 알제리가 탄화수소 경제(석유경제)에 편향적으로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알제리에서 유전이 처음 발견된 해는 1956년이며, 1958년부터 원유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후 알제리 경제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졌으나, 기타 산업은 저발전 상태로 머물러 있다. 탄화수소 경제는 현재 수출의 95%, GDP의 51%, 전체 고용의 13.6%를 차지한다. 알제리는 현재 거의 1,500만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지니고 있으며, 대외부채는 거의 없고, 2011년 4%의 경제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석유산업에서 창출되는 부는 군부와 정부의 일부 엘리트, 그리고 1990년대부터 알제리에 진입한 초국적 석유회사의 손에 떨어질 뿐이다.
알제리는 척박한 토양과 만성적 물 부족, 농업부문 발전을 등한시하는 정책 때문에 농산물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다. 따라서 세계 식량가격 변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지난 6개월간 알제리의 기초 식량 가격은 상승 일로에 있었으며, 일부 식품의 경우 50%까지 인상되기도 하였다. 식료품 가격 상승이 일반 가계에 끼친 부담이 2011년 초부터 일어난 봉기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은 요르단, 수단, 예멘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알제리 경제 전반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유가 상승이 식료품 가격 상승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세계적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기계화된 대규모 농업에는 농기계와 운송수단에 석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유는 또한 살충제, 제초제, 화학비료 등의 제조에 사용된다. 더욱이 유가상승은 지구 온난화 문제 대처를 위한 각국 정부의 시도로 식량이 아닌 바이오연료용 작물 재배에 대한 유인을 강화했고, 이 역시 식료품 가격 상승에 기여했다. 따라서 유가 상승이라는 현상이 알제리 엘리트에게는 부의 원천이었던 반면 민중들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된 것이다.
4) 군부, 내전, 신자유주의 개혁
사회주의 성향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FLN) 정부가 1988년 말 무너진 이후 나타난 정쟁과 신자유주의 개혁 때문에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88년 유가 하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정부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한 불만이 겹쳐 대규모 파업과 학생들의 동맹휴업이 벌어졌다. 정부는 경찰력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충돌이 끝날 때까지 500명이 희생되었고, 3,500명이 투옥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차들리 벤제디드는 내각 대부분을 해임하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다. 1989년 2월 정부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는 새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렇지만 이 법에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양보조치로서 이전 헌법에서는 보장되었던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였다.) 군의 역할은 국방으로 국한되었다.
그렇지만 (남성에게만 주어진) 상대적인 정치적 자유의 시기는 얼마 가지 못해 끝이 났다.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인 이슬람해방전선이 1990년 지방선거에서 62%의 지지를 얻고, 이듬해 전국선거에서는 최대 다수당이 되었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벤제디드 대통령을 사퇴시키고 급격히 급진화된 이슬람 세력과의 내전을 시작하였다. 10년간 계속된 내전에서 약 20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이유로 1992년 계엄법이 발효되었다.
내전 와중에 군부 정권은 IMF와 세계은행에 따라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94년 IMF는 외채 조정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였다. 4년간 지속된 이 프로그램에 따라 알제리 정부는 소비자 보조금 폐지, 부가가치세 인상, 공공지출 삭감, 공공부문 노동자 임금 동결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구조조정, 사유화, 공기업 해체 조치도 취해졌다. 총 450,000명의 공공부문 노동자가 해고당했으며, 이 때문에 불만과 가난이 증대되었다. 1986년부터 1999년까지 1인당 GDP는 2,590달러에서 1,550달러로 하락하였다.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로 채워진 민간부문의 확장과 사유화는 200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정부는 특히 석유산업에 해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슬람주의 지지세력을 민주적 과정에 참여시키는 대신 광범한 탄압을 펼친 것은 해외 투자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2005년 통과된 탄화수소법을 통해 무역과 투자 규제가 해제되었고 석유산업에 자유경쟁이 도입되어 국영 석유회사 역시 경쟁에 노출되었다. 그 결과 미국과 프랑스의 초민족기업이 특히 석유산업에서 더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고, 착취가 심화되었다.
5) 알제리 노동조합법과 노동조합
알제리의 노동조합법은 아랍세계 대부분의 국가보다는 제약이 덜하지만, 노동조합의 권리가 완벽히 보장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법에 따르면 알제리인들은 노동조합 결사와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을 등록하기 위해선 사업장 전체 노동자의 20%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등록 노조는 단체협상의 권리가 보장된다. 파업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매우 심각하게 제약되어 합법 파업을 벌이기란 매우 어렵다. 파업을 결의하기 위해선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비밀투표를 해야 하며 파업 시작 1주일 전에 통보하여야 한다. 정부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파업을 금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계속해서 폐지를 요구해온 조항이기도 하다.
알제리에서 유일하게 승인된 노총은 알제리노총(General Union of Algerian Workers, UGTA)으로, 알제리가 여전히 식민상태에 있던 1956년 FLN에 의해 설립되었다. UGTA의 애초 목적은 프랑스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통치 기간 동안 UGTA의 지도부는 FLN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했으나, 1962년 해방 이후 FLN의 국가구조 안에 포섭되게 된다. 공공부문 파업은 불법화되었고, UGTA 지도부의 임무는 노동쟁의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UGTA 하부조직 활동가들은 FLN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고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할 수 있었다.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일부나마 귀를 기울였으며,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에는 몇 번의 대규모 파업도 기획하였다.
1988년 시위 이후 짧게 지속된 민주화 시기,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1989년 신헌법은 집회의 자유와 파업권을 보장하였고, 복수노조를 가능케 하였다. 1989년 학생운동의 활동을 통해 몇몇 독립노조가 정부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그렇지만 UGTA는 이러한 변화에 저항하였으며, 1991년 군부가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군부를 지지하였다. 정부는 계엄법을 독립노조와 모든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의 도구로 삼았다. 정부는 과거 독립노조를 승인하긴 했지만, 단체협상과 사회적 대화로부터는 배제하였다. 정부는 고의적으로 일부 노조의 등록 신청 심사를 연기하거나, 등록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2004년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UGTA만을 공식 인정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억압적 상황에도 현재 알제리에는 약 20개의 독립노조가 60만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UGTA의 공식 포괄 노동자는 130만 명이다.) 독립노조는 보건 및 교육 부문에서 특히 강력하다.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간 알제리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워 왔다. 1990년대 동안 UGTA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동안 긴축 정책과 고용악화에 항의하여 수차례 파업과 투쟁을 벌였다. 2003년 UGTA의 총파업은 석유산업의 경쟁 심화와 외자 유치를 목적으로 하는 탄화수소법의 시행을 연기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보건의료 및 교사 독립노조는 2003년 파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2008년 임금 인상을 쟁취할 수 있었다. 철도, 트럭, 항만, 철강 노동자들 역시 성공적인 파업을 벌인 바 있는데, 이들이 벌인 파업의 상당수는 비공인 파업이었다. 알제리 약 20개의 초민족적기업 노동자들은 처참한 노동조건과 노동법 회피 등에 맞서 UGTA 안팎을 넘나들며 투쟁을 벌였다.
6) 시위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역할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 노동조합이건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이건 거리시위가 가장 강력하게 펼쳐지던 1월 초의 자연발생적 투쟁에서 큰 역할을 하진 못했다. 이것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알제리의 소규모 독립노조 중 4개 노조가 CNCD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며, 야당과 사회단체와의 공조를 통해 2월 12일 시위를 비롯한 다른 시위를 기획하였다. 그렇지만 CNCD는 1월에 시위를 시작한 대다수 시민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하였으며, 체제 변화를 위한 구체적 요구안 마련이나 알제리의 미래상을 그리지도 못하였다. 2월 말이 되어가면서 CNCD는 ‘운동을 재구성’한다는 명분으로 대중동원 기획을 그만두었다. 제1야당인 문화민주 행동당(Rally for Culture and Democracy, RCD)의 경우 3월 초까지 시위 조직화를 이어나갔지만, 수백 명만이 참석하는 소규모 집회에 그쳤다.
7) 알제리 혁명과 알제리 노동자운동의 전망
CNCD나 어떤 재야세력도 알제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부활시키고 혁명적 열정을 다시 불붙이기란 당분간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면 알제리에서는 무엇이 이집트, 튀니지와 달랐기에 이런 결과가 찾아왔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먼저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12월에서 2월까지 일어난 시위는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이 폭발하면서 이전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창출해낸 반면, 알제리에서 이러한 자발적인 대중동원은 지난 몇 년간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월의 시위는 많은 점에서 그 규모가 컸을 뿐 과거시위와 ‘거의 동일’했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정치적 요구가 부재하였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이집트에서 정치세력은 애초에 경제적 요구와 함께 부패한 국가와 억압적 권력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내걸었다. 반면 알제리에서는 몇 년 동안이나 똑같은 분배문제를 둘러싸고 시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정치적 요구는 부재했다. CNCD는 2월 들어 정치적 요구를 포함하려 노력하였으나, 그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소요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피로감을 고려하여야 한다. 수년에 걸친 내전 때문에 정치적 안정과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광범위한 불만에도 오랫동안 알제리인들의 삶을 위협했던 일상적 폭력을 다시금 불러올지 모르는 장기적 정치 불안정 상태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비록 혁명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알제리의 운동세력은 시위를 통해 비상계엄법이 해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비록 작은 승리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화와 노동자 운동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다. 부테플리카 정권을 압박하여 그가 약속한 정치적 자유를 말이 아닌 현실에서 쟁취하고, 그를 통해 나타날 성장의 공간을 이용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알제리의 사회단체와 노조에 달렸다.
결론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리비아는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리비아에 대한 군사공격이 이 세 나라를 비롯한 아랍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판단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영향이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독재정권을 지원해 왔던 서방세계는 현재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있다. 명확한 것은 서방 강대국들이 ‘인도주의적 개입’을 구실로 변화된 상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재확립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의도가 관철된다면 서방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의존해 온 기초적인 정치경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지역의 사회·정치적 변화를 억누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껏 얻어낸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민주세력과 노동자 운동이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알제리 CNCD에 참가한 독립 노조와 운동조직들은 세력을 늘려 부테플리카를 압박하여 자신이 약속한 개혁을 수행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3국 모두에서 민주화 세력과 노동자 운동 세력은 정치적 제약이 느슨해짐으로써 형성된 정치적 공간을 활용하여 기반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북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이 최근의 시위에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젊은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잠재적 역량이다. 이들 집단은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이 조직률 하락과 영향력 상실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들 부문을 조직해야 한다.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에서 비공식 부문 노동자를 조직하고 그들의 요구에 대응할 방법을 찾는다면 이들 국가의 노동조합은 시위 주요 세력과의 결합을 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시위는 국제 연대를 위한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민주화 시위대와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깃발과 현수막을 통해 서로의 투쟁을 지지하였다. 알제리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무라바크가 퇴임하기 불과 며칠 전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연대집회를 벌였다. 이제 상징적 연대를 넘어 실질적 교류를 할 때이다. 아프리카 노동자들은 독립노조의 설립과 운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 그리고 정치적 참여의 계기를 모색하는 데 있어 서로의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노조와 다른 운동세력은 사회ㆍ경제적 변화를 위한 주장을 이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장기적 관점에서 조직화를 진행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투쟁을 주도해야 한다. 혁명은 진정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