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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1.7-8.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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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한국의 이주노동자

임월산 | 노동자운동연구소 국제국장
작년과 올해 초 인천 신항만 건설현장에서 벌어진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파업소식이 최근 널리 알려졌다. 이 사건은 고용허가제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현실,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공동 투쟁 그리고 그 투쟁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잘 보여준다. 인천 신항만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180명 노동자는 주야맞교대로 하루에 12시간 씩 노동을 하면서 최저임금을 받았다. 회사가 제공하는 식사 질은 형편없었으며, 친구들의 숙소출입과 숙소에 음식물 및 주류반입을 금지하는 등 노동자를 면밀히 통제했다. 2010년 6월에는 사측이 세끼 제공하던 식사를 한끼로 줄여(월급에서 24만원씩 공제) 노동자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노동자들은 식사 질 개선, 휴일 보장, 강압적 야간근로 중단 등을 요구하며 7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 동안 작업거부 투쟁을 벌였고 2011년 1월 9일부터 10일까지 다시 파업에 나섰다. 사측은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에 응하기는커녕 “노동부에 신고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
2차 파업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난 후 경기지방경찰청은 파업 참여 베트남 노동자 10명을 체포해서 구속시키고 다른 17명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5월 이후 베트남 노동자들의 투쟁과 이후 탄압 상황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민중운동의 대응 역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고용허가제 하에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사업장 투쟁으로 관심을 끌었고, 특히 경찰청의 무리한 수사와 검찰의 엄격한 구형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내국인 노동자였으면 벌금 정도 받을 사안에 대해 검찰은 “불법파업, 업무방해”라고 규정했으며, 노동자 개인 간의 발생한 사소한 다툼을 “비참가자에 대한 조직적 폭력행사”로 과장하여 징역 1년~3년을 구형했다(2명에 징역 3년, 1명에 징역 1년 6개월, 6명에 징역 1년, 1명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이 사건은 분명 인종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사건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이주노동자의 삶에서 인종주의는 노동탄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 내에서 인종주의의 본질과 신자유주의·자본주의와의 연계성에 대한 토론은 아직 풍부하지 않다. 토론을 통해 공동의 이해를 마련할 때, 앞으로 사안에 대한 대응은 물론이고 이를 넘어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반인종주의 운동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인종, 인종주의 그리고 그것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규정짓고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의 모습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반인종주의 투쟁을 위한 몇 가지 중장기적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표는 확고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앞으로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인종과 인종주의를 이론적이고 역사적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이를 위해서 인종주의의 본원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사회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인종의 정의

미국의 인종 이론가 마이클 오미(Michael Omi)와 하워드 위넌트(Howard Winant)는 다음과 같이 인종을 정의한다. “각기 다른 형태의 인간 신체를 언급함으로써 사회적 갈등과 이해를 나타내고 상징하는 개념”(Omi & Winant 1994, 55).
이 정의는 인종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종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종적 명명이 본질적인 특성이나 물리적 성격을 언급할 때 사실 각기 다른 인종적 집단을 나누는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종적 범주는 시간과 장소를 넘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아시안’이라는 예를 들어 보자. 한국에서 ‘아시안’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와 같이 1980년대 후반 이후에 집단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한 나라 사람들을 언급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시안’이라는 명명은 이러한 사람들을 토박이 한국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표시하고 비난과 동정, 자선과 교육의 대상으로 만든다. (예컨대 부모 한 쪽이 한국인이고 다른 한 쪽이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출신인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부르기 위해 사용되는 코시안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보라. 혹은 영화 ‘방가방가’에 나오는 다국적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노래그룹 ‘아시안 브라더스’와 같은 이름을 생각해보라.)
반면에 미국 2000년 인구센서스에서 ‘아시안’은 “예컨대 캄보디아, 중국, 인도,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필리핀군도, 태국, 베트남 등을 포함하는 극동, 동남아시아 또는 인도대륙의 원주민들에 출신을 갖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한국과 미국의 각기 다른 ‘아시안’ 만들기는 두 나라의 상이한 경제, 사회, 정책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인종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인종이 단지 환상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종은 사회와 정치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제도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려면, 인종을 상식의 요소로서 이해하는 것이 유용하다. 상식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무의식적으로 배우고 거의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상적 관행, 사람 간의 상호작용, 국가정책의 개발 등 사회적인 관행을 주조하며 같은 사회적 행동에 의해 재생산된다. 다양한 사회적 행동에 내재된 상식으로서 인종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의 요소’가 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미와 위넌트의 정의는 또한 인종의 개념이 처음부터 갈등으로 뒤엉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종적 범주의 개발과 위계화는 근본적으로 특정 세력이 경제, 문화, 정치적 지배를 세우고 특정한 축적체제가 유지되는 헤게모니 진행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종적 차이에 대한 개념에는 항상 열등성과 우월성이 내포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인종이 불평등을 위해 종종 의식적으로 날조된 정당화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반(半)의식적 혹은 잠재의식적 자연화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인종의 역사

많은 사람들은 인종적 범주와 이에 기반한 편견과 불평등이 우리 천성의 일부로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종 개념은 겨우 4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 식민화’, 즉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세계 자본주의체계의 설립이라는 맥락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와 아프리카인의 노예화가 상식인 것처럼 느껴지게끔 설명함에 따라 발전했다. 17세기 말 아프리카 식민지의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백인 계약 하인에 비해 아프리카 노예를 더욱 저렴하게 활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피부색의 구별에 따라 아프리카인은 ‘평생 노예’로 백인은 ‘자유민’으로 명명하여 두 그룹 사이에 사회적 장벽을 세우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법률을 개발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마치 그 법률이 자연적인 질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백인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시켰다. 즉, 흑인과 백인을 확실히 구별하고 후자를 전자 위에 위치 짓는 이데올로기 및 사회적 체제(다르게 말하면 인종주의)의 발전 그리고 노예 노동력에 기반한 축적체제의 구조화는 거의 같은 시기에 상호적으로 발생했다. 동시에 남부의 노예노동과 대서양의 노예무역은, 마르크스가 분명히 인식하였듯이, 아메리카 북동부와 유럽에서 섬유, 조선, 기타 새로운 자본주의 기업에 투자되는 부를 창출했다. 따라서 인종과 인종적 지배의 출현이 근본적으로 지구적 자본주의의 출현과 뒤얽혀 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노예제도 철폐 이후 인종과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의 각 국면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어 왔다. 그것은 19세기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 법적으로 백인과 흑인 노동자를 분리시켰던 ‘짐 크로우(Jim Crow)’ 법의 형태를 띠었다. 이는 남부에서 백인 지주의 흑인 농업노동자에 대한 지배를 가능케 했다. 또한 인종과 인종주의는 19~20세기의 전환기에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식민지들 사이의 지배와 복속 관계, 식민지 내에서 서구인들과 식민지 주민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확립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재생산되고 정교화 되었다. 이 당시 식민화와 인종적 사회구조는 유럽 과학자들에 의한 각기 다른 인종 그룹의 범주화와 위계적 질서화에 의해 소위 객관적인 지원을 받았다. 유럽 자본주의가 여러 지역을 불균등하게 지구적 생산체계에 편입시키고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인종주의도 국가들 내부와 국가들 사이에서 관계를 주조하면서 확대되었다. 발리바르가 지적했듯이 “인종 따라서 인종주의는 노동분업 축과 연관된 지리적 집중의 촉진자이자 결과의 표현이다.”(Balibar, 1991, 80) 중국계 미국인 학자인 리사 로우(Lisa Lowe)는 인종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지구적 확장의 전체 역사는 [인종적, 성적 등] 차이의 구조화를 통해 조직되었다... 자본 축적은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법적 차별화를 통해 지속된다.”(Lowe, 1999, 159)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오늘날 인종주의는 이민과 외국인 노동력을 규율하는 법률들을 통해 작동한다.

3) 인종주의의 정의

위에서 필자는 사람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인종’을 사용했다. 필자가 채택하는 인종주의 개념은 인종을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개인적 편견을 넘어선다. 오히려 인종주의는 개인적 편견, 이데올로기, 법률과 정책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되고 유지되고 변화되는, 인종적 범주에 기반한 지배와 억압체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가부장제와 성 억압처럼 체계적 인종주의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근본적으로 지구적 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개인적 인종차별 행위나 정보, 기술과 자원에 대한 인종화된 집단의 불평등한 접근을 유지하는 행위, 인종화된(인종으로 여겨지는)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 정책, 인종적 표상들은 모두 체계적 인종주의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의 오랜 상호작용은 자본주의 축적체제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집단의 헤게모니를 동시에 지원하고 자연화하는 인종주의적 사회구조를 형성하면서 자원, 기회와 권력에 있어 불평등을 형성한다.


지구적 자본주의, 이주, 신자유주의...그리고 인종주의

1) 이주와 국제 노동분업

지구적 자본주의는 국가와 지역들을 불평등한 관계로 편성하고, 그들 사이에서의 무역, 투자, 노동의 흐름으로 연계된 세계 체계를 통해 기능하고 유지된다. 이 체계는 국제 이주를 몇 가지 수준에서 가능하게 했다. 첫째, 생산의 세계화는 주변부 지역에서 농산물 수출과 제조업 수출을 발전시켰다. 이는 자급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킴으로써 인구의 일부를 삶터에서 쫓아내는 경향이 있다. 쫓겨난 노동자들은 처음에 자기 나라 안의 중심 도시로 이주하고 그 다음에 그 중심도시에 일자리가 충분치 않으면 더 발전된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 또한 국가 간 무역과 투자는 전혀 다른 장소 사이에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이 ‘문화적 연계’라고 부른 것을 창출한다. 선진국으로 수출될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종종 선진국 자본가들이 소유한 기업에서 일하는데 이들은 이러한 접촉으로부터 그 나라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획득한다. 이는 이러한 나라들로의 이주를 상상가능하고 매력 있는 것으로 만든다.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저발전 나라들에서 수출 경제와 외국인 투자는 이전에 정착 노동자들을 이동하게 만들고 이주 본국(송출국)과 목적국(유입국) 사이에 물질적 문화적 연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주민은 이러한 연계를 따라 자본의 역방향으로 움직인다.(Sassen, 1988, 20; 1993, 74)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농촌 지역 안팎과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에 불평등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인종적 구분선과 일치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인종적 범주와 인종주의적 사회구조와 함께 발생한 세계 각 지역의 자본주의로의 불균등한 편입에서부터 일어난다. 인종은 다양한 사람들의 본질적 특징으로부터 발생하는 불평등한 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러한 역사적 불균등성을 제거하는 작용을 한다. 즉, 남반구 노동자의 빈곤은 그들의 선천적인 특징인 교육 부족, 무기력함, 기술 부족, 열등한 문화, 성차별주의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은 인종화된 피지배자들을 더 발전된 나라로 들여오는 이주 물결의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이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더욱 증가하였다. 국제이주기구(IOM)의 통계에 따르면 1965년에서 2002년 사이에 7천5백만 명에서 1억5천만 명으로 이주민 숫자가 두 배가 되었다고 한다. 이주민은 2002년까지 세계 인구의 2%인 1억8천5백만 명이었다. 현재는 그 숫자는 세계 인구의 3%인 2억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여겨진다(Castle & Miller), 2003, 4). 물론 이주는 경제적 조건, 전쟁, 정치적 불안정성, 나라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연계, 이전의 이주 전통, 개인적 선택 등의 요인들의 결합으로 인해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이주를 발생시키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은 적어도 지난 삼사십년 동안 이주를 가속화시켰고 이주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하는 데에 핵심 역할을 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무역 자유화와 구조조정 정책은 나라와 지역 간 소득과 실업, 기회의 차이의 주요 원인이다. 이들은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노동자들을 지역 경제로부터 쫓아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주 사이의 연관에 대한 가장 극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멕시코 농민에 미친 효과이다. 미국노총(AFL-CIO)의 연대센터(Solidarity Center)에 따르면 “북미자유무역협정의 실행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값싼 농산물은 1백7십만 명의 멕시코 소농들을 쫓아냈고 멕시코의 농업경제를 파괴했다. 생계를 잃고 농촌에서 실업에 직면한 농업노동자들은 일자리 경쟁을 위해 멕시코의 도시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이주는 중심 도시들에서 더 낮은 임금을 초래했고 노동자를 다시금 쫓아내서 이제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 일자리를 찾으러 가게 만들었다.”(Misra, 2007, 2).

2) 한국으로의 이주와 한국의 자본축적

20세기 초부터 중후반까지 한국에서 노동력의 순흐름(net flow)은 군사적, 경제적인 개입으로 형성된 물질적 문화적 연계를 따라 한국을 떠나 일본, 미국 등 선진국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한국이 주변 아시아국 노동자들의 중요한 목적국으로 등장함으로써 순흐름의 방향이 역전되었다. 변화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국제 노동분업에서 한국의 역할 변화와 한국 경제의 축적구조 변화에 있다.
이주노동은 현재 한국 축적체제의 필수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정부에 의해 도입되고 규율된다. 그러나 최초의 이주노동자 유입은 정부의 노력이나 자본의 유치 결과가 아니라 해당 노동자들 스스로의 선택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한국은 자본주의 발전의 기적처럼 여겨졌고 동시에 석유가격의 하락은 이전까지 아시아 이주노동의 중요한 목적지였던 중동에서 경기침체를 낳았다. 물론 한국의 발전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보루이자 일본의 하위 경제파트너로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미국의 원조와 반공주의 독재자의 주도 하에서 진행된 극단적 수출주도의 경제성장에 의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의 한국의 성장은 비슷한 식민 역사를 가진 문화적, 지형학적으로 비슷한 나라에 의해 달성된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의 드문 사례로서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효과를 선전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더욱이 한국은 베트남, 중국과 왕래를 원활히 하면서 그 같은 공산주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설립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한국 자본은 선진국에 기반을 둔 초민족자본의 급속한 지구적 확장에 대응하여 이와 경쟁하기 위한 노력으로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아시아 나라들로 해외투자를 하고 생산시설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자는 이주를 가능하게 한 물질적, 문화적 연계를 형성시켰다.
해외 투자에 더해 한국 재벌들은 생산비용 삭감을 위한 수단으로 한국 내에서 외주화와 하청화를 본격화했다. 해외로 확장할 수 없는 중소기업들은 하청업체로서 이러한 생산체계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하향압력에 직면했다. 동시에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을 증가시켰고 상대적으로 더 나은 노동조건과 임금인상을 요구할 능력을 주었다. 재벌 원청으로부터의 단가절감압력과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요구 사이에서 중소기업들은 이주노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해외로 이전하지 못하는 농업, 어업 등 일차산업과 건설 자본도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이주노동자를 채용하게 됐다. 앞서 언급한 파업 베트남 노동자들이 일하던 건설업에서는 이주노동과 유연한 노동관계가 특히 중요하다. 수주산업인 건설업에서 건설 원청회사는 각 공정을 발주해서 담당하는 전문업체와 전체 사업비용의 일부비용으로 계약을 한다. 하청 건설회사보다 수익이 낮은 전문업체는 노동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직접고용 노동을 피하며 3차 도급업체를 사용한다. 시간이 갈수록 하도급체계가 복잡해지는데 이주노동자는 1990년대에 수익이 가장 적은 제3, 제4 단계에서 도입됐다. 인천 신항만 노동자 사례에서 봤듯이 도급업체는 이주노동자의 임금 삭감, 식비 공제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돈을 아끼려고 한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축적체제의 가장 낮은 층위에 편입되었다. 1990년대에 한국 경제에 유연생산 체계가 확고하게 정착되면서 한국은 이주노동 유출 국가가 아니라 순 유입국이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의 증가와 그들이 한국 경제에 필수불가결함을 인식함과 동시에 정부는 이주노동을 규율하기 시작했다.

3) 이주노동, 비정규 노동과 인종주의

저임금을 받고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하고 사회적 반발없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어서, 이주노동자들은 ‘비정규’ 노동 개념이 아직 광범위하게 사용되지 않았을 때에도 비정규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점점 더 막대한 숫자의 한국 노동자들이 비정규직화 되어서 이제 비정규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귀에 익은 용어가 되었다. 유연 노동관계의 강화는 노동자 분할(비정규직/정규직, 대사업장/중소영세, 내국인노동자/외국인노동자, 동포/비동포 이주노동자 등)의 강화와 함께 도래했다. 이는 이윤 목적을 위한 자본의 ‘차이의 구조화’의 결과이다. 인종주의는 이러한 분할을 재생산하고 자연화하도록 작동할 뿐만 아니라 작업장에서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이들을 퍼뜨린다.
유연한 생산, 이주노동, 인종주의의 밀접한 관련은 한국에만 특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목적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생산과 분배 체제에 편입된다. 예를 들어, 애드나 버나시츠(Edna Bonacich)와 제이크 윌슨(Jake Wilson)은 1980년대에 물류기업의 노동비용 절감 전략을 가능하게 한 운수산업 탈규제와 새로운 기술발전이 또한 운수와 물류 노동력에 이민자와 다른 유색인들의 참여 증가로 이어진 것을 설명한다. 한때 안정적이고 정규직이고 의료보험 등 후생복지 혜택을 제공했던 트럭운송, 항만, 창고 업종의 일자리들은 현재 파트타임이고 불안정하며 후생복지 혜택이 없으며 대개 라틴아메리카계 이민자와 다른 인종화된 그룹이 차지하고 있다.(Bonacich & Wilson, 2008) 식육가공도매업, 양계, 건설산업과 청소와 경비같은 값싼 서비스 업종의 일자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 미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홍콩에 이르기까지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가사노동자로 고용되어 있고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노동법 보호로부터도 배제되어 있다. 버니시츠와 월슨이 지적하듯이, 이민자들은 이러한 비정규, 저임금, 종종 위험한 일자리를 위한 일차적인 고용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들 본국의 비참한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내국인 노동자들이 거부하는 일자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엄격한 이민정책과 외국인노동 정책은 다른 형태의 고용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민노동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종화로 인해 일반적으로 그들이 직면하는 기준 이하의 노동조건과 권리 부재에 대해 대중이 별로 분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해야할 지점은 한국의 노조활동가들이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을 대체로 소수자 그룹으로, 도와주어 마땅하나 노동운동의 주요 활동에서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보지만, 사실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현재 노동자의 가장 근본적인 적들 가운데 하나로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는 하청과 유연 노동 체제의 핵심 요소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인종주의(혹은 반인종주의)는 아직 한국 노조활동가들이 쉽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뒤얽힌 억압 구조라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인종주의의 모습

필자는 앞서 체계적 인종주의가 개인적 인종차별 행위나 정보, 기술과 자원에 대한 인종화된 집단의 불평등한 접근을 유지하는 법률, 인종화된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 정책, 인종적 표상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나열한 요소는 체계적 인종주의의 생산과 재생산에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배제적 이민정책이 일반적으로 명백한 인종주의적 범주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한국에서 귀화의 권리는 공식적으로 거주기간의 길이, 자산, 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고 있다(국적법, 5항). 그러나 개인적 편견, 인종주의적 표상, 다단계 하청에 기반한 한국의 축적체계와 결합할 때, 그 효과는 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민들을 고용기회, 사회 서비스, 노동권과 정치적 권리에 대해 불평등한 접근권을 가진 부정적으로 인종화된 집단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1) 인종주의와 속박된 노동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아시안 혹은 남아시안 혹은 갈색 인종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는 특정한 개인들을 외국인 노동자로 정의한다. 그랬을 때 토착/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구별은 권리, 부, 기회의 불평등을 자연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인종적 범주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이 개인들은 자유로운 직업 선택과 사업장 이동의 권리가 금지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기간을 연장해서 머물지 못하며 시민의 정치적 권리도 부정 당한다. 이러한 제한들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효과적으로 속박된 노동으로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노예처럼 대우받는다”는 카투이라 이주노조 위원장의 잦은 발언은 단순한 비유 이상이다. 평생 노예상태가 아니지만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흑인들처럼 한국인(혹은 동포)으로 정의된 이들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고용주들에게 수익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통해 이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법적으로 부정당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이러한 장벽을 설치할 주권이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국민이 아닌 이들을 배제하거나 제한하는 국가의 권리는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개념의 핵심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이주를 가속화하면서 국가의 국경 순찰 역할이 증가해 왔다. 그러나 출입 제한은 이주를 막거나 속도를 늦추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이민 통제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적하는 사실이다. 국경통제는 사람들이 입국하는 것을 실제로 막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외국인들을 규율할 권리를 강조하는 데에 복무하여 그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이윤 창출을 위해 그들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단속도 유사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 한국에서 단속이 명백하게 미래의 미등록 이주를 막지 못했고 현재의 미등록 이주민 숫자를 줄이는 데 제한적으로만 성공했지만, 단속은 거주 허가가 있든 없든 외국인인 사람들을 통제할 국가의 권리를 선언한다.
정책 담론에 명시적인 인종적 용어가 부재한 것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예외가 존재한다. 그것은 동포라는 용어의 사용인데, 이는 생물학적이고 민족적 동일성에 근거해 해외의 한국인들을 다른 이주민과 구별하는 것이다. ‘동포’로 명명된 사람들은 한국에 들어오고 나가는 데 훨씬 큰 자유가 있고 사업장 변경의 자유도 크다. 또한 노동할 산업 선택 범위도 더 넓다. 최근에 미등록 동포들에 대한 인도적 고려에 기반하고 있다는 광범위한 합법화 프로그램이 실시됐다. 그러나 저발전 나라들에서 온 동포들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온 이들과 같은 권리를 받지 못한다. 이 사실은 동포라는 용어의 실용적 적용을 보여준다. 인종적/민족주의적 용어인 동포의 사용과 이에 기반한 정책은 한국인(그리고 미국과 일본 출신의 해외 한국인)이 최상위에 있고 저발전 국가 출신의 해외 한국인이 중간에 있고 ‘비동포’ 이주민이 바닥에 있는 권리와 사회적 지위의 위계구조를 만들어내는데 복무한다.

2) 인종주의의 두 가지 형태

외국인으로서든 혹은 아시안으로서든 이주노동자에 관한 두 개의 지배적인 인종주의적 표상이 존재한다. 현재 한국사회에 유포되어 있는데, 이는 범죄자로서의 이주민의 표상과 한국인의 동정과 도움의 대상으로서의 이주민의 표상이다. 단순한 스테레오타입과는 달리 이러한 표상들은 이주민들이 정부 정책과 공공기관에서 대우받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들은 또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에 접근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개입한다.

(1) 범죄자화
지난 몇 년 동안 정부와 미디어는 ‘외국인 범죄’에 점점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다. 외국인 범죄에 대해 취해진 조치와 발표된 입장은 종종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미등록 체류(행정적 위반)와 범죄행위 사이의 구별을 흐린다. 이는 또한 외국인인 것과 잠재적 범죄성 사이의 일반적 상관관계를 언급한다.
한국정부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2008년 9월 25일에 제출한 ‘미숙련 외국인력 정책개선 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이러한 경향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 문서는 “불법 외국인 체류 집중지역의 증가”와 “모든 형태의 범죄 발생”을 “[불법 체류의] 문제점: 범죄와 국가이미지 훼손” 부분에서 같이 다루고 있다. 보고서는 또한 “불법체류자에 의한 노조결성 [이주노조], 법 무시 풍조[조장]”을 문제로 적고 있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검찰, 경찰,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는 ‘외국인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몇 가지 노력을 했다. 인천 신항만 베트남 노동자가 연행된 지 얼마 안돼서 경찰청이 ‘외국인 조직폭력과 조직성 폭력배의 불법행위’를 중점 대상으로 한 외국인 범죄 집중 단속 기간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베트남 노동자의 파업과 유사한 사건을 집단 폭력, 범죄로 표상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틀을 제공했다.
외국인 범죄 단속조치들을 설명하는 정부의 발표는 범죄성을 ‘외국인’의 특성으로 만드는데 근접해 있다. 2010년 단속 활동을 설명하는 한 보도자료는 단속조치들이 “공공질서를 위협하고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 사이에 증가하는...조직적이고 심각한 외국인 범죄에 대한 [대응 필요성의] 공동의 인식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G-20 정상회의 바로 직전에 실행된 또 다른 외국인 범죄 단속 기간에는 불법 체류자가 ‘불심검문의 대상이 되는 범죄자’ 가운데 명시적으로 적혀 있었다. 여기에 서술된 조치들은 아시아 이주민들을 선천적으로 잠재적 범죄자로, 수사에 걸린 이주민을 사실상의 범죄자로 표현하고 그렇게 취급한다. 이는 주류 미디어 보도에 반영된다. 이주노동자를 범죄성과 연관짓는 것은 국경통제, 단속, 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더 강한 규제를 정당화하고 이에 의해 재강화된다.
또한 파업 이주노동자나 이주활동가들에 대한 단속은 한국인과 이주민 사이의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이는 이주민 단체들의 지도부를 없애고 대부분 일반 이주노동자에게 겁을 주어 집단행동, 즉 억압받는 세력(노동자, 인종화된 소수 등)이 실질적 불평등과 대표성의 부족을 상쇄할 수 있는 기본적 수단을 갖추기 위한 이주민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평등하게 만드는 힘을 훼손함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이 인종적 계급적 위계구조에서 그들의 위치를 유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이주노동자들이 집단적 정치세력으로서 주체화, 세력화되는 것이 반인종주의 투쟁에서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2) 다문화적 은인 - 수혜자 관계
티비 광고에서 영화, 정부 다문화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아시아 이주노동자에 대한 또 다른 지배적 표상은 저개발 국가에서 온 가난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여성화된 남성 이주노동자에게도 종종 적용되지만, 한국 남편의 이주민 아내와 가장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 불쌍한 여성이든 여성화된 남성이든 이런 방식으로 표상된 이주민들 역시 한국인의 자선과 도움을 받는 이들로 만들어진다. 최근 연합뉴스 기사를 예로 들어 보자. 이 기사는 부산 경찰이 기장군 경찰서에서 견학 프로그램을 개최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경찰이 설명한 내용을 가져온 것인데 기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기장군에는 16개국 187명의 결혼이민자들이 체류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중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이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경찰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한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경찰서에 출입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정작 필요한 때에도 도움 요청을 꺼려했다고 결혼이주여성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경찰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처음 경찰서를 방문한 결혼이주여성들은 외사계 직원들의 안내로 민원실, 교통계, 시뮬레이션 사격장, 112지령실을 견학하고, 기초생활법률과 범죄예방교육을 받았다.
베트남 이주여성 응웬 티 짱(23세)씨는 “대부분 결혼이주여성들은 경찰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해도 쉽게 접근하거나 도움을 요청 할 수 없었다”면서 “경찰관들이 다문화가정에도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11년 4월 8일).

여기에서 한국의 남아시아 이주여성의 어려움은 그들이 겪을 수 있는 차별이나 빈곤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히려 그들의 어려움은 제복에 대한 겁, 한국 기관에 대한 오해로부터 나오고 이는 그들의 본국에서 부패한 정부 기관에 대한 경험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다. 경찰(추측컨대 남성)은 교육, 관심과 애정을 통해 이러한 오해를 누그러뜨리도록 돕는다. 이 기사에는 남아시아 이주민들이 바로 똑같은 경찰에 의해 다른 상황에서는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는 언급이 당연히 없다. 아마 이것이 이 여성들이 경찰서에 발을 들여놓기를 꺼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비로운 한국인-불쌍한 이주민 관계는 요즘 한국 사회 전체에 걸쳐 발견된다. 한국 정부의 다문화 가정 지원, 영화 ‘방가방가’에서 영웅적/코믹한 한국인(부탄사람으로 위장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센터들... 나아가 일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사용한 수사를 생각해보라. 이러한 관계는 이주민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인간적이고 더 발전된 이로서의 한국과 한국 사람의 표현이자 연기(performance)이다. 은인-수혜자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노동자를 체계적으로 구속된 이로 만드는 착취자가 아니라 불쌍한 외국인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결국 이주노동자를 범죄자화하는 행위와 불쌍하게 여기는 행위 모두 다른 방식에 의해서이지만 한국을 발전된 나라로 개조하는 목표에 복무한다. 전자는 이주노동자를 값싸고 착취가능하고 통제가능한 노동력으로 만들어 이윤을 보장하고 국가경쟁력을 개선하는 것을 돕는다. 후자는 이러한 착취를 대중적 시야와 개인적 의식으로부터 가린다. 이것들은 우리가 발전되고 관대하고 다문화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세련됨을 가진 국가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주노동자 범죄자화와 다문화적 자비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의 함의는 무엇인가? 즉, 신자유주의와 유연생산의 핵심요소로서 이주와 이주노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주노동자운동의 나아갈 바에 어떠한 제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와 동일하지 않지만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자본주의에 의해 지지되는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어떤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몇 가지 제언을 하겠다.

1) 국제적 관점과 전지구적 투쟁

1. 국경에 갇히지 않는 조직화의 형식을 찾아야 한다. 많은 노조들은 이미 이주노동자가 귀국하거나, 다른 목적국으로 이주했을 때 이들과의 연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 이주해간 곳에서도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조직화방법과 노조가입방식의 필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는 주요 목적국의 노동조건을 설명하고 노조를 소개하기 위한 자료를 생산하고 배포하는 국제산별연맹의 노력을 들 수 있다. 국제서비스노련 여권이 대표적인 사업인데, 이 여권을 소지한 노동자는 노조와 자신의 권리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받을 뿐 아니라, 목적국의 국제서비스노련 가맹노조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지역사회와 친숙해지는 데 있어 도움을 받게 된다. 각종 정보 메일링 리스트에 가입되고 문화 및 정치 사업들에 초대를 받기도 하며, 교육훈련 기회를 가지고,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상담 및 법적 지원 등을 얻을 수 있다. 민주노총, 네팔노총을 포함해 일부 이주본국과 목적국 노조가 양해각서를 체결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고, 이주 전/정착후 노동권·노조 교육을 추진하기로 한 사례도 중요하다. 또한 필리핀 노동자의 국제 조직인 ‘국제 이주민’(Migrante International)과 같은 세계 이주노동자 네트워크 역시 존재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조직화 방식을 조사해 각 방식의 강점과 한계를 평가하고 진전시킬 방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민주노총은 네팔노총과의 양해각서 시행을 강화하고 다른 이주본국의 노조와도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이주문제의 범세계적 성격을 감안하여 이주본국과 목적국에서 도입할 수 있는 기본 요구틀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 틀로서 ‘머물 권리’와 ‘이주할 권리’를 제안한다. 머물 권리는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고 강제이주를 피할 수 있는 기본적 사항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양질의 일자리 및 기초 사회서비스 제공,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정치적 권리)이 포함된다. 이주할 권리는 이주본국을 떠날 수 있는 자유, 목적국으로의 이주를 위한 합법적이고 안전한 경로 확보, 영주할 수 있는 기회와 목적국에서의 정치적 권리를 포함한다. 이러한 요구에 기반하여 한국의 출입국과 귀화 체계 개혁에 대한 현실적 제안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계획이 제출되어야 한다.

2) 반인종주의적 관점과 반인종주의 투쟁

1.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유연생산과 유연노동 체계의 핵심에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또한 인종주의가 이러한 체계를 지탱하고 또 이러한 체계에 의해 지탱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계급의 헤게모니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나서야 하며, 반인종주의 투쟁을 자신의 사활적 과제로서 인식하여야 한다.
2. 인종주의가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되,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가부장제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는 자본주의가 해체된다 할지라도 간단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는 상호이해와 관용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한 편견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전선에서 인종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개인 간 상호작용에서부터, 일터, 학교, 언론과 정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이 그러한 전선이 되어야 한다.
단지 단속추방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외국인’으로 분리하는 데 맞선 포괄적인 투쟁이 필수적이다. 동포와 비동포 이주민에 대한 인종적 위계화를 철폐하라는 요구 또한 필수적이다. 이는 재외동포법의 완전한 적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주민에게 영주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과업은 상기 a-2와 상당 부분 겹친다.
여기서 학교를 언급한 이유는 인종적 범주와 인종주의가 이주노동자 자신 뿐만아니라 이들의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미등록 이주민의 아이들의 경우에는 미등록 신분이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두드러지지만, 시민권을 가진 아이들이나 부모 중 한 명만 한국인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인종주의의 영향으로 낮은 학교 성적, 높은 중퇴율과 낮은 출석율을 보이게 된다. 인종화된 청소년들은 이미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종류의 관심으로써 미디어는 이들을 피해자로, 다문화적 자비가 필요한 대상으로만 그릴 뿐이다. 이러한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주인공으로 주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반인종주의 조직화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개인 간 상호작용의 영역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이 일어나는 인종주의적 사회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권력을 행사하는 인종주의적 위계에서 이러한 권력(더 나은 정보 접근권, 더 높은 의사결정과정 참여도, 재화와 자원에 대한 더 큰 통제력 등)을 유지시키는 우리의 행위는 체계적 인종주의의 구성요소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 말하기 습관, 일하는 스타일 등을 통해 인종적 위계를 영속화할 수도 교란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인종적 위계를 영속화하는 것들을 바꿔낼 책임이 있다.
3. 반인종주의 투쟁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종위계의 밑바닥에 있는 집단을 사회적/정치적 행위자로 주체화시켜내는 것이다. 이주민 권리 운동이 요구를 걸고 투쟁을 한다 할지라도, 이주민 활동가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고 현재의 활동을 어찌되었건 진행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인종적 위계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런 운동은 반인종주의 운동이 아니다.
인종위계의 밑바닥에 있는 집단을 사회적/정치적 행위자로 주체화시켜 낸다는 것은 조직화를 의미한다. 단순히 조직 구성원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리더를 만들어내는 조직화를 의미한다. 조직화와 주체화를 위해 효과적인 전략과 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1) 이주노조와 같이 단체교섭권이 없는 이주노동자 조직은 언어습득과 기술 훈련을 위한 제도 도입과 더불어 달성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캠페인을 통해 활동 경험을 얻을 기회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에 등록 이주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통역자 배치, 사업장 이동 절차 개선 등의 요구로 고용지원센터를 상대로 한 투쟁을 제안한 바가 있다. 2) 다른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경우, 훈련된 조직활동가를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배치하여야 하며, 다른 부문에서 사용된 포괄적 조직화전략을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적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시한 아이디어들은 더욱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한국 노동자 운동이 반인종주의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을 채택해 이주노동자를 조직하려면 금속노조, 건설노조 등과 같은 민주노총 가맹 조직은 현재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노동운동이 반인종주의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을 도입하지 않고 필요한 자원을 배치하지 않는다면, 이주노동자 조직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만약 한국노동운동이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향후 점진적 약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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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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