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의 분노, 탈핵의 길을 외치다
반핵아시아포럼 2011 참가기
7월 30일 일본 도쿄의 아자부다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2011 반핵아시아포럼’이 개막됐다. 올해 반핵아시아포럼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지진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다’라는 주제로 일본의 도쿄, 후쿠시마, 히로시마, 이와이시마 등에서 진행되었다. 반핵아시아포럼은 아시아지역의 반핵운동 연대체로, 1992년 한국 반핵운동 진영의 제안으로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기치에 따라 아시아 지역의 반핵운동 네트워크로 결성되었다. 현재 일본,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대만, 인도, 태국, 호주, 한국 등의 반핵활동가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매년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과 일본의 원자력자료정보실(CNIC),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위한 네트워크(NINDJA) 등 아시아의 주요 반핵운동 단체들이 공동주최하는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은 8월 6일까지 진행되었다. 태국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대안 에너지 프로젝트, 인도네시아의 반핵시민연합, 필리핀의 비핵 바타안운동 네트워크, 인도의 반핵운동전국연합, 대만의 환경보호연맹 등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에너지정의행동, 서울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참여연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보건의료단체연합, 사회진보연대 등이 함께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
후쿠시마의 현실: 7월 30일 후쿠시마 지역 활동가들과의 토론회
7월 30일, 2011 반핵아시아포럼의 첫날 행사는 후쿠시마 지역의 사람들과 활동가들로부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상황과 경험을 듣는 자리였다.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의 경험을 공유하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실제 후쿠시마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후쿠시마 사고 후 지금까지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후쿠시마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후쿠시마 사고는 아직도 진행형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는 사고 발생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지난 8월 2일 도쿄전력은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1호기와 2호기 사이의 외부 배기관 부근에서 시간당 10Sv(시버트) 이상의 방사선량을 측정했다. 이 정도의 수치는 한 번 노출되면 즉시 사망하게 되는 치명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도쿄전력은 어디서 유출이 이루어졌는지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고농도 방사선량은 방호복을 입은 작업원도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한동안은 조사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사고 지역의 상황이 이러하니 ‘정확한 피해 정도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원자로 내 연료봉이 얼마나 녹아내렸는지, 그것이 격납용기를 뚫고 흘러내려 바닥까지 내려갔는지에 대해 다양한 소문이 무성하다.
토론회 서두에서 일본 원자력자료정보실의 반 히데유키 대표는 이러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 후 후쿠시마 지역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 핵발전소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이 이 눈에 흡착되어 확산되기도 했다. 그렇게 퍼진 방사성 세슘을 검출해 지도를 그리면 사고 지역에서 200km가 넘는 지역에서까지 오염이 확인되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지금 핵연료가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에 계속 냉각해야만 하고, 이를 위해 계속해서 물을 공급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반 히데유키 대표는 ‘이 냉각도 아마 10년은 계속해야 할 것’이며, ‘원자로 폐쇄까지는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이라 말했다.
코피를 쏟는 아이들
두 번째로 ‘아이들을 방사능에서 지키는 후쿠시마 네트워크’의 나카테 세이치 대표의 발표가 이어졌다. 사고 지역에서 60km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나카테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인 두 아이를 둔 아버지다. 사고 두 달 후인 5월 중순 즈음 큰 아이가 코피를 쏟았을 때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둘째 아이가 별 이유도 없이 매우 많은 양의 코피를 쏟았다. 과학적으로 후쿠시마 사고와의 연결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같은 지역에서 코피를 쏟는 아이들의 사례가 많이 보고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현재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 특히 아이들의 건강 피해를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그는 후쿠시마 지역 7개 초등학교에서 방사능 수치를 측정한 활동도 들려주었다. 자신의 아이들이 다니는 (사고 이후 휴교 상태였던) 학교에서 처음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는데, 운동장 지표면에서는 시간당 10μSv(마이크로시버트), 하수구 인근 지표면에서는 시간당 108.8μSv가 나왔다. 물론 이 방사능 수치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론상 108.8μSv라는 수치가 1년 365일 지속된다면 953mSv(밀리시버트)가 넘는 수치로 연간 허용치인 1mSv를 엄청나게 초과하는 양이다. 나카테 대표는 장래에 발생할 수 있는 건강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야 하며, 이들이 오염이 제거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사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식의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발표를 마쳤다.
토양과 소의 오염 순환
오후 세션은 농업 문제 담당 기자인 오노 카즈오키씨의 발표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후쿠시마 지역 농민들과 교류해 온 오노씨는 사고 후에 발생한 토양 오염이 어떻게 해당 지역에서 기르는 소의 오염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소의 여물로 쓰이는 볏짚이 고농도 세슘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후쿠시마 지역 소들에게 체내피폭(방사성 물질이 생물체 내부에 들어와 쌓이는 피해)이 발생했다고 한다. 올해 소에게 먹이는 볏짚은 작년 쌀을 수확하고 논에 쌓여 있던 것들을 모은 것인데, 사고 직후 방사성 물질이 날아와 짚단에 흡착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체내피폭이 이루어진 소에서 짜낸 우유나 고기는 방사성 물질에 오염되어 또 다른 피해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가 배출하는 배설물은 풀이나 나무껍질과 섞어 발효시켜 퇴비로 만든다. 이렇게 만든 퇴비는 다른 농가에 공급되어 농지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볏짚과 같이 그 농지에서 수확되고 남은 작물이 다시 소에게 공급된다. 오노씨는 이를 두고 ‘소를 중심으로 한 유기물의 물질 순환’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체내피폭된 소의 배설물은 퇴비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현재는 따로 쌓아둘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다른 토양오염과 수질오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어른 소를 기준으로 소 한 마리가 배출하는 배설물은 하루에 30kg이 넘는다. 후쿠시마 현의 대형 축산 농가 중에는 500마리의 소를 기르는 곳도 있다고 한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강제된 핵발전소
마지막 발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지역에 살던 오가 아야코씨의 순서였다. 사고 지역에서 불과 5km 지역에서 살고 있던 그녀는 사고 직후 강제피난 조치로 지금까지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오가씨는 후쿠시마 지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유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은 원래 냉해(冷害)가 많이 발생해 한촌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그래서 도시지역으로 일하러 나가는 농민도 많았다. 인구의 과소화 현상이 시작되었고 지역 재정도 상당히 나빠졌다. 그래서 1960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입지 계획이 나오자 선뜻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당시 주민들에게는 ‘황폐한 농촌 지역에 최첨단 기술이 들어오는 꿈같은 일’이라는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그녀는 핵발전소를 만들면서 들어온 거액의 정부 지원금으로 처음에는 지역 경제가 살아나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얼마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정부 지원금 덕에 다양한 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고, 이 건설에 많은 사람들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 일자리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 떠나갔다. 인구는 늘지 않고 계속 줄어들었으며, 지역 재정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것이 후쿠시마 현만이 아니라 핵발전소를 유치한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후쿠시마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야
오전 9시경부터 진행된 토론회는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발표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으며, 때로는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참가자들은 일본의 경험과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자신들의 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알리고,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결의했다. 또한 다음 날인 7월 31일 후쿠시마 시내에서 열리는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 요구 현민 집회’에 참석을 결의하며 첫날 일정을 마쳤다.
후쿠시마의 외침: 7월 31일 후쿠시마 현민 집회
2011 반핵아시아포럼 일정 둘째 날인 7월 31일 오후 1시, 후쿠시마시 마치나카 광장에서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를 위한 현민 집회’가 열렸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도 2천여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집회는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 발생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강제 피난의 문제와 식품 안전의 문제, 어린이 안전의 문제 등 심각한 피해 상황을 알리면서, 정부와 도쿄전력의 즉각적인 사태 수습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로 이루어졌다.
지금도 계속되는 지진
집회는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의장 유노카와 마모루씨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유노카와 의장은 ‘오늘도 진도 6의 지진이 발생했고, 2-3일 전에는 큰 비가 내려 피해를 입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회 당일 새벽, 후쿠시마에서는 규모 6.4의 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여진이, 그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7일부터는 650mm에 달하는 큰 비가 내려 대피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유노카와 의장에 따르면 현재 강제 이주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숫자만 7만 3천 명에 이른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 피해로 인해 행정력이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황이라 정확한 숫자나 이주 지역, 실내 대피하고 있는 주민들의 숫자와 상황 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후 처음에는 발전소 반경 3km를 피난 구역으로 설정했던 일본 정부는 조금씩 피난 범위를 넓혔고, 현재 반경 30km가 완전 소개 지역이 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곳으로 이주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고, 헤어져 살고 있는 가족도 많다.
약자에게 더 집중되는 피해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태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피해는 어린이나 노약자,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집중된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대표 다케나카 유이치씨는 ‘28만 명의 어린이에게 대량으로 방사성 물질이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지금 여름 방학 기간인데, 1학기를 마치고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 가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주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거나, 다른 지역에 친척이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곳에 연고가 없어 이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감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 많다고 다케나카 대표는 설명했다. 그는 또한 핵발전소 사고와 지진, 쓰나미로 인해 생계를 잃은 많은 후쿠시마 현민들이 핵발전소 수습 작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더 이상 농사를 짓게 될 수 없어 자살하는 농민들이 있는데, ‘후쿠시마는 이제 더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93세의 노인도 있다고 한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현실
이후 후쿠시마 주민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다테 마을에 살고 있다가 현재도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토 켄타씨는 3월 11일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사고 당일 직장에 있던 사토씨는 지진이 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정전이 되어 있었고,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TV나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동차 라디오를 통해 재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 중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고농도 방사능이 대량 누출되었지만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고, 이다테 마을 주민들이 상당한 피폭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쿠시마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한 정보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매일 160km를 통근해야 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근처의 후타바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요시다 히로마사씨가 다음 증언에 나섰다. 요시다씨는 사고 당일 집에 있기 불안해서 가족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워두고 밤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요시다씨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당장 피난하라!”고 말했다. 요시다씨가 “어디로 가야 하나?”라고 물으니, “모른다. 우리는 홍보만 하고 있다. 당국에 물어 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현재 후타바군에서 160km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나미에마치에 회사가 있는 아내는 출근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직장을 잃었다. 요시다씨는 매일 160km 거리를 통근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요시다씨의 고통은 본인과 가족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사인 그는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아파 했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한 아이는 그에게 “선생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사고 지역에서 도망치는 것, 정보를 모으는 것,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요시다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무력감 속에서 상처받고 있는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사고 직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힘내라 동일본’이라는 구호가 많이 등장했다. 후쿠시마 시내 곳곳에도 ‘힘내라 일본! 힘내라 후쿠시마!’라는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요시다씨는 ‘힘내라고 하지만, 어떻게 힘낼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힘을 내면 복구가 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핵발전소의 피해자는 우리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탈원전이어야 한다!’는 말로 발언을 마쳤다.
아픈 딸아이를 지켜보며
마지막 주민 보고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로부터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고리야마시에 살고 있는 마츠모토 노리코씨였다. 두 딸의 어머니인 그녀는 사고 당일 후쿠시마시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창피하지만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후쿠시마에 핵발전소가 10개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력회사나 정부에서 ‘핵발전은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자신의 딸은 코피를 흘리고 복통을 호소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인터넷만 뒤졌다고 한다. 그녀는 결국 중학교 1학년 딸을 도쿄에 있는 여동생 집으로 보냈다. 자신은 친척이 있어 아이를 보낼 수 있었지만, 연고가 없어 아이를 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들이 많다고 그녀는 말했다. 마츠모토씨는 앞으로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라며, 끝으로 ‘원전은 필요 없다. 그것만이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분노를 들어라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마치나카 광장에서 후쿠시마 역까지 약 1시간가량 행진을 진행했다.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모든 원전을 없애자!’, ‘어린이의 미래를 지키자!’, ‘모든 피해를 보상하라!’는 구호에 길가의 시민들도 열렬히 호응했다.
후쿠시마 현민 집회는 후쿠시마 현민들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더 이상 그 고통이 지속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 즉 핵발전이 없는 사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 한국의 언론은 침착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전파를 타고 성숙한 시민의식의 표본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TV나 신문의 카메라도, 자원 봉사자도 가 닿지 못한 지역에서 사고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행동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외침은 단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운영 책임사인 도쿄전력이나 일본 정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과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 모든 이들을 향한 외침이며 질문이다.
핵 없는 사회를 향한 아시아 지역 연대: 8월 1일 반핵아시아포럼 국제회의
다음 날인 8월 1일에는 일본 도쿄의 아자부다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반핵아시아포럼 2011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날 국제회의에서는 일본과 한국,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필리핀, 중국 등 총 8개 아시아 국가 100여 명의 반핵 활동가들이 참가해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핵발전소의 문제, 핵무기의 문제와 이에 대항하는 투쟁 상황 보고를 진행했다.
후쿠시마 사고, 에너지 정책 전환의 시험대
첫 번째 보고는 주최국 일본의 순서였다. 환경지속사회 연구센터의 타나베 유우씨는 후쿠시마 사고만이 아니라 시야를 좀 더 넓혀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보아야 한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타나베씨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전, 2030년까지 (전력생산에서) 핵발전 비중을 53%로 확대할 계획이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핵발전 비중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는 이러한 계획을 완전히 무효화시켰다. 향후 국가 에너지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가 일본에서는 현재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고 타나베씨는 설명했다. 참고로 사고 이후 일본 정부는 2008년 기준 1%에 불과한 재생가능 에너지 비중을 2020년까지 20%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현재 운행이 중지된 핵발전소의 재가동을 놓고도 커다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일본에서는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고 이후 총 54기의 원자로 중 39기의 원자로가 정지되어 있고, 15기만이 작동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계획 절전을 시행하고 있는 도쿄에서는 지하철역을 비롯해 곳곳에서 시간대별 전력 공급량 수치를 볼 수 있는데, 필자가 도쿄에 머무르면서 본 수치는 많아 봐야 70%대를 넘지 않았고 대부분 50-60%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건물 자동문 2곳 중 1곳이 작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가동되는 엘리베이터 1-2기를 줄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불편을 느낄 수 없었다. 지하철의 냉방 시스템도 충분히 작동되고 있다고 느낄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참가자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도시의 엄청난 전력 수요와 이를 기반으로 확대되는 핵발전 정책의 허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지금 도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타나베씨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 문제를 언급했다. 최근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핵발전소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타나베씨는 일본이 핵발전소 수출을 위해 여러 나라와 원자력 협정을 맺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베트남과 원자력 관련 협정을 맺고 현지에서 입지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일본의 히타치와 도시바는 이미 대만에 핵발전소를 수출한 바 있다.
탈핵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 진영의 연대 확장
타나베씨의 발표에 이어 일본의 원자력자료정보실 반 히데유키 공동대표가 현재 일본의 운동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 핵발전소 수출 정책을 전환시키기 위해 탈핵운동 진영과 에너지전환 운동 진영이 함께 연대하고 있다고 반 공동대표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원자력자료정보실과 원수폭금지 일본국민회의, 그 밖에 여러 운동 단체들이 함께 일본의 에너지 정책 전환, 탈핵을 위한 1,00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했으며, 9월 19일에는 도쿄에서 5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실천 투쟁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에 참여한 분들이 9월 19일에 다시 도쿄에 모여 아시아 지역 연대 투쟁을 상승시켜가자고 호소했다.
내진 설계가 일반 주택만도 못한 핵발전소
두 번째 보고는 대만의 순서였다. 대만 참가자 대표로 발표에 나선 국립타이완대학교의 카오쳉얀 교수는 대만 핵발전소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대만에서 핵발전이 시작된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978년인데 현재 3개의 핵발전소에서 6기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고, 또 하나의 핵발전소(원자로 2기)가 건설 중에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자연 재해에 대한 핵발전소의 대비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카오 교수에 따르면 현재 대만의 주택 내진 설계 기준은 0.33g(중력가속도)인데, 제1 핵발전소의 내진 설계는 0.3g에 불과하다. 또한 건설 중인 제4 핵발전소의 쓰나미에 대한 대비는 처오름 12m 수준인데, 내진 설계에 따른 최대 지진인 8.5 진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25m의 쓰나미가 닥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최고의 안전 설비를 자랑하던 핵발전의 안전 신화는 깡그리 무너졌다.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그 어떤 대비도 완벽할 수 없으며, 그 후과는 너무나도 엄청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대만의 핵발전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제대로 구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핵무기와 연결된 핵발전 정책
인도의 상황을 보고한 반핵운동 전국동맹(National Alliance of Anti-Nuclear Movements)의 S.P.우다야쿠마 박사는 핵발전은 결국 핵무기와 연결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도의 역사,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발표를 시작한 우다야쿠마 박사는 인도는 핵에 의존하지 않아도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태양광이 남아돌 정도로 더운 나라이며, 삼면이 바라도 둘러싸여 해안선이 무려 7,500km에 달해 파력 발전 등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한 히말라야 같은 지역에서는 1년 동안 바람이 계속 불어 풍력 발전의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우다야쿠마 박사는 인도가 핵에너지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오로지 핵무기를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파키스탄과의 갈등,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중국에 대한 대비 등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인도는 핵무기 개발에 매달린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국이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도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NPT(핵비확산조약)에 가입하지도 않은 인도와 원자력협력협정을 맺고 굉장히 많은 기술을 제공해주었다고 말했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핵, 그러나 인민을 죽이는 핵
중국 상황에 대해 발표에 나선 태평양 환경(Pacific Environment)의 웬 보씨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 역사에 대한 설명에 주력했다. 1964년 10월 16일, 처음 핵실험을 한 중국은 냉전 시대 제국주의 국가의 공격을 막기 위한 ‘핵 억지력’이라는 미명 하에 중국의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핵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통제가 심한 중국에서 핵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지금까지 총 45회의 핵실험(대기권 23회, 지하 22회)을 진행했는데, 그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된 바가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웬씨에 따르면 중국은 ‘8023 부대’라는 핵 부대를 창설했다고 한다. 150명 정도로 구성된 이 부대는 핵실험 지역에서의 시료 채취나 실제 핵공격이 진행될 경우에 지상부대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와 같은 작전 계획 수립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핵폭발이 주는 건강 피해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그에 대비하는 보호 장구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예를 들어 핵실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탱크를 이용했는데,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 탱크 운전이 매우 명예로운 일로 여겨져 서로 자원했다고 한다. 웬씨는 8023 부대에서 퇴역한 군인들이 나이가 들면서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핵실험 당시 이 부대를 지휘했던 사령관은 62세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현재 8023 부대 퇴역 군인들은 당시의 진상 규명과 건강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 연대로 핵 없는 세상을 만들자
마지막으로 공동 성명서 채택을 위한 전체 토론이 진행되었다. 8개 국가의 참가자들은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공통의 인식 마련을 위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공동 성명을 채택한 참석자들은 내년 반핵아시아포럼을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 3월 서울에서 진행할 것을 결의하며 이날 국제회의를 마무리했다.
일본은 과연 탈핵의 길을 향해 가는가?: 8월 2일 일본 경제산업성과 도쿄전력 항의방문
지난 8월 2일 반핵아시아포럼 2011 참가자들은 일본의 경제산업성과 도쿄전력 항의방문을 진행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운영 주체이고, 경제산업성은 일본 핵발전의 추진과 감시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정부부처다. 전날 국제회의를 통해 경제산업성 장관 카이에다 반리와 도쿄전력 사장 니시자와 토시오 앞으로 전달할 요청서를 채택한 100여 명의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먼저 경제산업성으로 향했다.
우리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경제산업성에서는 계장급 이하 젊은 직원들이 항의방문 대오를 맞았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약 15분간 진행된 면담은 항의방문 대오가 전달한 요청서 항목별로 경제산업성의 입장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리들은 일본 정부가 최대한의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예를 들어 항의방문 대오가 전달한 요청서 3항 ‘사고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사고의 진실에 대해 명백하게 설명해 주십시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는 사고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고 답했다. 방사능 오염 지역 주민들에 대한 대피 문제에 대해서는, ‘제1 핵발전소에서 고농도 방사능이 나와 사람들을 피난시켰다’고 답했다. 정부의 대응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다.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이 직접 후쿠시마에서 보고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핵발전소 수출은 정부의 소관이 아니다
이러한 경제산업성의 무책임한 태도는 핵발전 정책과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서 극에 달했다.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일본의 모든 원자로를 폐로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해 ‘핵발전소 폐기는 일본 전체의 에너지 정책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라고 답했다. 전체 에너지 정책과 연결된 문제이기에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식이다.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책임을 민영 기업에게 떠넘기기까지 했다. 면담에 참여한 정부 관료는 ‘핵발전소 수출은 정부가 아니라 사기업이 진행하는 것’으로서, ‘정부가 뭐라 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나 핵기술의 노하우 전수 문제 등에 대해 수출 대상국과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고 말했다. 핵발전소 수출에 있어 정부의 역할은 인정하면서도 기업의 거래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일본이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짧은 면담을 마치고 나온 대오는 경제산업성 앞에서 규탄 집회를 진행했다. 후쿠시마 현민들을 비롯해 수많은 민중이 미흡한 사고 수습 상황과 재해 지역 구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경제산업성의 태도에 참가자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대만에서 온 참가자는 ‘일본과 대만은 무척 가까운 나라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원한다’면서 경제산업성의 태도를 비판했다. 또한 ‘일본의 도시바와 히타치가 대만에 원자로를 수출’한 상황을 지적하며,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이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온 참가자는 ‘후쿠시마 사고로 전 세계가 일본을 주목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세계에 리더십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항의방문 대오는 약 30여 분간 경제산업성 앞에서 규탄 발언을 이어간 뒤 도쿄전력으로 향했다.
복구는 로드맵에 따라
반핵 선전물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대오는 도쿄전력에 다다랐다.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던 도쿄전력 본사 건물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고, 경찰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면담은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별관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면담장에는 도쿄전력 홍보 담당으로 보이는 3명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면담에 참가한 도쿄전력 직원은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반핵아시아포럼 여러분의 요청서를 회사로 가져가서 매우 주의 깊게 검토할 것’이라 덧붙였다.
면담 참가자들은 경제산업성에서 동일하게 요청서 문항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도쿄전력 측은 2011년 5월 20일 자로 배포된 보도자료를 제시하며, 도쿄전력이 설정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 복구를 위한 로드맵’에 따라 사고 수습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답했다. 항의방문이 이루어진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와 2호기 사이에서 치명적 수준의 방사선량(시간당 10Sv; 노출 시 즉사)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세운 로드맵에 따른 수습 절차를 믿으라는 식이었다. 도쿄전력 측은 또한 ‘후쿠시마 지역과 도쿄 지역의 상황에 대해 매일 알리고'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빨리, 갖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핵발전소 수출은 중단하겠다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필리핀에서 온 참가자는 도쿄전력이 필리핀에 핵발전소를 수출하려 하고 있는데, 향후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다. 도쿄전력 측은 후쿠시마 사태 수습과 사고 보상을 위해 해외 자본과 인력을 모두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향후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피해 보상의 수준과 방식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도쿄전력이 감당해야 할 몫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 수준의 지분 매각이나 해외 자본 철수는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후쿠시마 사고 이전에 도쿄전력이 핵발전소 수출을 시도하고 있던 대상국으로서는 도쿄전력의 이러한 입장이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부 차원에서 핵발전소 수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볼 때 도쿄전력이 아니라 다른 전력회사에 의한 핵발전소 수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향후 추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기업은 핵발전소로 이윤을 얻지만, 민중들은 피해를 당한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도쿄전력 본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계속하고 있던 대오와 합류해 면담 내용을 공유하고 규탄 발언을 이어갔다. 인도의 반핵운동 전국동맹의 S.P.우다야쿠마 박사는 ‘핵발전소를 통해 도쿄전력은 이윤을 얻지만, 민중들은 모든 피해를 떠안는다’면서 ‘도쿄전력은 악의 기업’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도쿄전력 측의 핵발전소 수출 철회 이야기로 희망을 얻게 되었다는 필리핀 참가자는 '필리핀의 핵발전소 수출 저지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에서 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함께 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이와이시마, 29년간의 끈질긴 투쟁: 8월 3일 이와이시마 지역 간담회
8월 3일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히로시마 서남쪽 야마구치현 가미노세키정의 이와이시마로 향했다. 이와이시마는 가미노세키정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섬이다. 이 작은 섬 마을에 핵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처음 나온 것은 1982년이다. 양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의 어업과 비파 농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작은 마을에 원자로 2기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세토 내해에 인접한 아름다운 환경을 지닌 섬마을을 지키고자 한 이와이시마 주민들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29년 동안 핵발전소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줄기차게 싸워오고 있다.
평화로운 지역의 분할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문제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당시 가미노세키 정장이 정의회에서 기업 유치의 일환으로 핵발전소를 유치하자고, 정의회의 합의가 있으면 건설을 추진하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지역 경제가 무너져 정부의 지원금이 절실해 핵발전소를 받아들였던 후쿠시마처럼, 점차 인구가 줄어 지자체 재정이 부족했던 가미노세키 역시 발전소 유치를 통해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작고 평화로운 지역의 분할을 가져왔다. 일부 주민들은 지역 사회의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핵발전소를 수용하는 것 말고 선택지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에서 불과 4km 떨어진 이와이시마의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어업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금도 거부한 채 매주 월요일마다 29년째 핵발전소 건설 반대 집회를 이어왔다.
온 몸으로 저항하다
20년이 넘는 이와이시마 주민들의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2008년 10월, 야마구치현 지사는 핵발전소 건설 준비를 위한 전력회사의 매립권을 승인했다. 전력회사는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 주변 토지를 통제하고 바다에 부표를 설치해 주민들과 선박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건설 예정지 주변에 통나무집을 짓고 전력회사의 매립 작업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올해 매립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자재와 6백여 명의 작업원을 실은 전력회사의 배 20여 척이 새벽 2시에 이와이시마 앞바다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선과 조그만 보트 30여 척을 동원해 바닷길을 막고 버텼다. 작업선이 들어올 때마다 주민들은 생업을 팽개치고 작은 어선으로 맞섰다. 전국적인 반대서명도 조직했다. 지난 8월 1일 자로 반대서명은 1백만 명을 돌파했다.
그럼에도 전력회사의 건설 작업은 조금씩 진척되었다. 올해 초에는 굴착 공사가 진행되는 등 매립 직전 상황까지 갔다. 그러던 중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함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했고, 3월 29일 매립 작업은 중단되었다. 야마구치현지사는 향후 전력회사가 매립 허가 요청을 다시 내더라도 결코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끝나지 않은 싸움
그러나 이와이시마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와이시마 주민인 토시야스 시미즈씨는 “향후 3년 정도는 핵발전소 건설이 중단되겠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 될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간 나오토 총리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부 내에서도 합의가 되지 않고 있다. 또한 후쿠시마 사고 이전부터 정권의 위기를 겪고 있던 간 총리는 조만간 사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총리가 바뀌거나, 향후 정권이 바뀔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도쿄전력이 아시아 국가들에 핵발전소를 수출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른 전력회사가 추진할 수 있는 것처럼, 핵에너지에 의존하는 에너지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와이시마의 싸움은 끝날 수 없다.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과 이와이시마 주민들은 8월 6일 함께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건설을 책임지고 있는 전력회사인 ‘중국전력’을 항의방문하면서, 향후에도 이 싸움에 함께 연대할 것을 결의했다.
남겨진 과제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그 어떤 해보다 역동적이고 다양한 일정으로 구성된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은 8월 6일 중국전력 항의방문과 집회로 모든 일정을 끝마쳤다. 한국과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 경쟁 등, 이른바 ‘핵 르네상스’ 정책으로 인해 가속화되고 있던 핵발전 확대의 흐름은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상당부분 진도가 늦춰지게 되었다. 29년 간 주민들의 투쟁에도 핵발전소 건설을 지속하려 했던 가미노세키의 사례나 해외 진출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도쿄전력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반핵 운동 진영에도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도쿄전력이 해외에서 철수하더라도, 혹은 중국전력이 가미노세키에 핵발전소 건설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핵발전 확대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의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희미해져 간다면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갈 재앙의 씨앗은 다시 잉태될 수 있다. 후쿠시마의 상황과 현지 주민들의 외침을 널리 알리고, 그들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재앙의 싹을 제거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고 3일 뒤 이명박 대통령은 UAE에서 핵발전소 기공식을 진행했다. 또한 원자력안전기술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일본 원전 사고가 생겼다고 해서 (핵발전소가)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인류가 기술면에서 후퇴하는 것”이라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세계에서 탈핵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구체적인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한국은 핵발전 확대 정책을 밀어붙이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명이었다.
내년 3월 서울에서 두 번째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다. 핵테러리즘의 차단, 핵물질의 안전보장 등을 논의하는 핵안보정상회의는 물론 직접적으로 핵발전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핵물질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 취약한 핵물질을 보호하는 것은 결국 핵무기 보유국의 절대적 권력을 보존하고, 핵발전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핵발전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년 서울의 핵안보정상회의는 결국 탈핵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자리일 수밖에 없다.
이번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내년 반핵아시아포럼을 3월 핵안보정상회의 기간에 맞춰 한국에서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는 핵발전을 확대하려는 세계 정상들과 탈핵의 흐름을 확대하려는 민중들의 격돌의 장이 되어야 한다. 후쿠시마의 분노와 외침이 재난을 당한 일부 사람들의 호소가 아니라 인류가 탈핵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내년 핵안보정상회의 대응을 해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핵안보’를 논의하는 정상회의가 아니라, ‘탈핵’을 위한 정상회의, 탈핵의 길을 밝히는 민중회의다.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과 일본의 원자력자료정보실(CNIC),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위한 네트워크(NINDJA) 등 아시아의 주요 반핵운동 단체들이 공동주최하는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은 8월 6일까지 진행되었다. 태국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대안 에너지 프로젝트, 인도네시아의 반핵시민연합, 필리핀의 비핵 바타안운동 네트워크, 인도의 반핵운동전국연합, 대만의 환경보호연맹 등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에너지정의행동, 서울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참여연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보건의료단체연합, 사회진보연대 등이 함께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
후쿠시마의 현실: 7월 30일 후쿠시마 지역 활동가들과의 토론회
7월 30일, 2011 반핵아시아포럼의 첫날 행사는 후쿠시마 지역의 사람들과 활동가들로부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상황과 경험을 듣는 자리였다.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의 경험을 공유하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실제 후쿠시마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후쿠시마 사고 후 지금까지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후쿠시마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후쿠시마 사고는 아직도 진행형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는 사고 발생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지난 8월 2일 도쿄전력은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1호기와 2호기 사이의 외부 배기관 부근에서 시간당 10Sv(시버트) 이상의 방사선량을 측정했다. 이 정도의 수치는 한 번 노출되면 즉시 사망하게 되는 치명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도쿄전력은 어디서 유출이 이루어졌는지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고농도 방사선량은 방호복을 입은 작업원도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한동안은 조사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사고 지역의 상황이 이러하니 ‘정확한 피해 정도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원자로 내 연료봉이 얼마나 녹아내렸는지, 그것이 격납용기를 뚫고 흘러내려 바닥까지 내려갔는지에 대해 다양한 소문이 무성하다.
토론회 서두에서 일본 원자력자료정보실의 반 히데유키 대표는 이러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 후 후쿠시마 지역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 핵발전소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이 이 눈에 흡착되어 확산되기도 했다. 그렇게 퍼진 방사성 세슘을 검출해 지도를 그리면 사고 지역에서 200km가 넘는 지역에서까지 오염이 확인되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지금 핵연료가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에 계속 냉각해야만 하고, 이를 위해 계속해서 물을 공급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반 히데유키 대표는 ‘이 냉각도 아마 10년은 계속해야 할 것’이며, ‘원자로 폐쇄까지는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이라 말했다.
코피를 쏟는 아이들
두 번째로 ‘아이들을 방사능에서 지키는 후쿠시마 네트워크’의 나카테 세이치 대표의 발표가 이어졌다. 사고 지역에서 60km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나카테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인 두 아이를 둔 아버지다. 사고 두 달 후인 5월 중순 즈음 큰 아이가 코피를 쏟았을 때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둘째 아이가 별 이유도 없이 매우 많은 양의 코피를 쏟았다. 과학적으로 후쿠시마 사고와의 연결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같은 지역에서 코피를 쏟는 아이들의 사례가 많이 보고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현재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 특히 아이들의 건강 피해를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그는 후쿠시마 지역 7개 초등학교에서 방사능 수치를 측정한 활동도 들려주었다. 자신의 아이들이 다니는 (사고 이후 휴교 상태였던) 학교에서 처음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는데, 운동장 지표면에서는 시간당 10μSv(마이크로시버트), 하수구 인근 지표면에서는 시간당 108.8μSv가 나왔다. 물론 이 방사능 수치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론상 108.8μSv라는 수치가 1년 365일 지속된다면 953mSv(밀리시버트)가 넘는 수치로 연간 허용치인 1mSv를 엄청나게 초과하는 양이다. 나카테 대표는 장래에 발생할 수 있는 건강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야 하며, 이들이 오염이 제거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사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식의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발표를 마쳤다.
토양과 소의 오염 순환
오후 세션은 농업 문제 담당 기자인 오노 카즈오키씨의 발표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후쿠시마 지역 농민들과 교류해 온 오노씨는 사고 후에 발생한 토양 오염이 어떻게 해당 지역에서 기르는 소의 오염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소의 여물로 쓰이는 볏짚이 고농도 세슘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후쿠시마 지역 소들에게 체내피폭(방사성 물질이 생물체 내부에 들어와 쌓이는 피해)이 발생했다고 한다. 올해 소에게 먹이는 볏짚은 작년 쌀을 수확하고 논에 쌓여 있던 것들을 모은 것인데, 사고 직후 방사성 물질이 날아와 짚단에 흡착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체내피폭이 이루어진 소에서 짜낸 우유나 고기는 방사성 물질에 오염되어 또 다른 피해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가 배출하는 배설물은 풀이나 나무껍질과 섞어 발효시켜 퇴비로 만든다. 이렇게 만든 퇴비는 다른 농가에 공급되어 농지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볏짚과 같이 그 농지에서 수확되고 남은 작물이 다시 소에게 공급된다. 오노씨는 이를 두고 ‘소를 중심으로 한 유기물의 물질 순환’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체내피폭된 소의 배설물은 퇴비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현재는 따로 쌓아둘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다른 토양오염과 수질오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어른 소를 기준으로 소 한 마리가 배출하는 배설물은 하루에 30kg이 넘는다. 후쿠시마 현의 대형 축산 농가 중에는 500마리의 소를 기르는 곳도 있다고 한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강제된 핵발전소
마지막 발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지역에 살던 오가 아야코씨의 순서였다. 사고 지역에서 불과 5km 지역에서 살고 있던 그녀는 사고 직후 강제피난 조치로 지금까지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오가씨는 후쿠시마 지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유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은 원래 냉해(冷害)가 많이 발생해 한촌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그래서 도시지역으로 일하러 나가는 농민도 많았다. 인구의 과소화 현상이 시작되었고 지역 재정도 상당히 나빠졌다. 그래서 1960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입지 계획이 나오자 선뜻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당시 주민들에게는 ‘황폐한 농촌 지역에 최첨단 기술이 들어오는 꿈같은 일’이라는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그녀는 핵발전소를 만들면서 들어온 거액의 정부 지원금으로 처음에는 지역 경제가 살아나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얼마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정부 지원금 덕에 다양한 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고, 이 건설에 많은 사람들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 일자리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 떠나갔다. 인구는 늘지 않고 계속 줄어들었으며, 지역 재정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것이 후쿠시마 현만이 아니라 핵발전소를 유치한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후쿠시마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야
오전 9시경부터 진행된 토론회는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발표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으며, 때로는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참가자들은 일본의 경험과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자신들의 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알리고,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결의했다. 또한 다음 날인 7월 31일 후쿠시마 시내에서 열리는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 요구 현민 집회’에 참석을 결의하며 첫날 일정을 마쳤다.
후쿠시마의 외침: 7월 31일 후쿠시마 현민 집회
2011 반핵아시아포럼 일정 둘째 날인 7월 31일 오후 1시, 후쿠시마시 마치나카 광장에서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를 위한 현민 집회’가 열렸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도 2천여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집회는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 발생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강제 피난의 문제와 식품 안전의 문제, 어린이 안전의 문제 등 심각한 피해 상황을 알리면서, 정부와 도쿄전력의 즉각적인 사태 수습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로 이루어졌다.
지금도 계속되는 지진
집회는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의장 유노카와 마모루씨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유노카와 의장은 ‘오늘도 진도 6의 지진이 발생했고, 2-3일 전에는 큰 비가 내려 피해를 입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회 당일 새벽, 후쿠시마에서는 규모 6.4의 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여진이, 그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7일부터는 650mm에 달하는 큰 비가 내려 대피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유노카와 의장에 따르면 현재 강제 이주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숫자만 7만 3천 명에 이른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 피해로 인해 행정력이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황이라 정확한 숫자나 이주 지역, 실내 대피하고 있는 주민들의 숫자와 상황 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후 처음에는 발전소 반경 3km를 피난 구역으로 설정했던 일본 정부는 조금씩 피난 범위를 넓혔고, 현재 반경 30km가 완전 소개 지역이 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곳으로 이주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고, 헤어져 살고 있는 가족도 많다.
약자에게 더 집중되는 피해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태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피해는 어린이나 노약자,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집중된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대표 다케나카 유이치씨는 ‘28만 명의 어린이에게 대량으로 방사성 물질이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지금 여름 방학 기간인데, 1학기를 마치고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 가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주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거나, 다른 지역에 친척이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곳에 연고가 없어 이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감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 많다고 다케나카 대표는 설명했다. 그는 또한 핵발전소 사고와 지진, 쓰나미로 인해 생계를 잃은 많은 후쿠시마 현민들이 핵발전소 수습 작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더 이상 농사를 짓게 될 수 없어 자살하는 농민들이 있는데, ‘후쿠시마는 이제 더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93세의 노인도 있다고 한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현실
이후 후쿠시마 주민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다테 마을에 살고 있다가 현재도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토 켄타씨는 3월 11일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사고 당일 직장에 있던 사토씨는 지진이 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정전이 되어 있었고,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TV나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동차 라디오를 통해 재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 중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고농도 방사능이 대량 누출되었지만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고, 이다테 마을 주민들이 상당한 피폭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쿠시마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한 정보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매일 160km를 통근해야 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근처의 후타바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요시다 히로마사씨가 다음 증언에 나섰다. 요시다씨는 사고 당일 집에 있기 불안해서 가족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워두고 밤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요시다씨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당장 피난하라!”고 말했다. 요시다씨가 “어디로 가야 하나?”라고 물으니, “모른다. 우리는 홍보만 하고 있다. 당국에 물어 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현재 후타바군에서 160km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나미에마치에 회사가 있는 아내는 출근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직장을 잃었다. 요시다씨는 매일 160km 거리를 통근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요시다씨의 고통은 본인과 가족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사인 그는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아파 했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한 아이는 그에게 “선생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사고 지역에서 도망치는 것, 정보를 모으는 것,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요시다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무력감 속에서 상처받고 있는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사고 직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힘내라 동일본’이라는 구호가 많이 등장했다. 후쿠시마 시내 곳곳에도 ‘힘내라 일본! 힘내라 후쿠시마!’라는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요시다씨는 ‘힘내라고 하지만, 어떻게 힘낼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힘을 내면 복구가 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핵발전소의 피해자는 우리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탈원전이어야 한다!’는 말로 발언을 마쳤다.
아픈 딸아이를 지켜보며
마지막 주민 보고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로부터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고리야마시에 살고 있는 마츠모토 노리코씨였다. 두 딸의 어머니인 그녀는 사고 당일 후쿠시마시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창피하지만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후쿠시마에 핵발전소가 10개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력회사나 정부에서 ‘핵발전은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자신의 딸은 코피를 흘리고 복통을 호소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인터넷만 뒤졌다고 한다. 그녀는 결국 중학교 1학년 딸을 도쿄에 있는 여동생 집으로 보냈다. 자신은 친척이 있어 아이를 보낼 수 있었지만, 연고가 없어 아이를 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들이 많다고 그녀는 말했다. 마츠모토씨는 앞으로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라며, 끝으로 ‘원전은 필요 없다. 그것만이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분노를 들어라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마치나카 광장에서 후쿠시마 역까지 약 1시간가량 행진을 진행했다.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모든 원전을 없애자!’, ‘어린이의 미래를 지키자!’, ‘모든 피해를 보상하라!’는 구호에 길가의 시민들도 열렬히 호응했다.
후쿠시마 현민 집회는 후쿠시마 현민들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더 이상 그 고통이 지속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 즉 핵발전이 없는 사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 한국의 언론은 침착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전파를 타고 성숙한 시민의식의 표본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TV나 신문의 카메라도, 자원 봉사자도 가 닿지 못한 지역에서 사고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행동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외침은 단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운영 책임사인 도쿄전력이나 일본 정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과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 모든 이들을 향한 외침이며 질문이다.
핵 없는 사회를 향한 아시아 지역 연대: 8월 1일 반핵아시아포럼 국제회의
다음 날인 8월 1일에는 일본 도쿄의 아자부다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반핵아시아포럼 2011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날 국제회의에서는 일본과 한국,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필리핀, 중국 등 총 8개 아시아 국가 100여 명의 반핵 활동가들이 참가해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핵발전소의 문제, 핵무기의 문제와 이에 대항하는 투쟁 상황 보고를 진행했다.
후쿠시마 사고, 에너지 정책 전환의 시험대
첫 번째 보고는 주최국 일본의 순서였다. 환경지속사회 연구센터의 타나베 유우씨는 후쿠시마 사고만이 아니라 시야를 좀 더 넓혀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보아야 한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타나베씨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전, 2030년까지 (전력생산에서) 핵발전 비중을 53%로 확대할 계획이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핵발전 비중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는 이러한 계획을 완전히 무효화시켰다. 향후 국가 에너지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가 일본에서는 현재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고 타나베씨는 설명했다. 참고로 사고 이후 일본 정부는 2008년 기준 1%에 불과한 재생가능 에너지 비중을 2020년까지 20%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현재 운행이 중지된 핵발전소의 재가동을 놓고도 커다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일본에서는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고 이후 총 54기의 원자로 중 39기의 원자로가 정지되어 있고, 15기만이 작동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계획 절전을 시행하고 있는 도쿄에서는 지하철역을 비롯해 곳곳에서 시간대별 전력 공급량 수치를 볼 수 있는데, 필자가 도쿄에 머무르면서 본 수치는 많아 봐야 70%대를 넘지 않았고 대부분 50-60%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건물 자동문 2곳 중 1곳이 작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가동되는 엘리베이터 1-2기를 줄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불편을 느낄 수 없었다. 지하철의 냉방 시스템도 충분히 작동되고 있다고 느낄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참가자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도시의 엄청난 전력 수요와 이를 기반으로 확대되는 핵발전 정책의 허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지금 도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타나베씨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 문제를 언급했다. 최근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핵발전소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타나베씨는 일본이 핵발전소 수출을 위해 여러 나라와 원자력 협정을 맺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베트남과 원자력 관련 협정을 맺고 현지에서 입지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일본의 히타치와 도시바는 이미 대만에 핵발전소를 수출한 바 있다.
탈핵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 진영의 연대 확장
타나베씨의 발표에 이어 일본의 원자력자료정보실 반 히데유키 공동대표가 현재 일본의 운동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 핵발전소 수출 정책을 전환시키기 위해 탈핵운동 진영과 에너지전환 운동 진영이 함께 연대하고 있다고 반 공동대표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원자력자료정보실과 원수폭금지 일본국민회의, 그 밖에 여러 운동 단체들이 함께 일본의 에너지 정책 전환, 탈핵을 위한 1,00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했으며, 9월 19일에는 도쿄에서 5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실천 투쟁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에 참여한 분들이 9월 19일에 다시 도쿄에 모여 아시아 지역 연대 투쟁을 상승시켜가자고 호소했다.
내진 설계가 일반 주택만도 못한 핵발전소
두 번째 보고는 대만의 순서였다. 대만 참가자 대표로 발표에 나선 국립타이완대학교의 카오쳉얀 교수는 대만 핵발전소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대만에서 핵발전이 시작된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978년인데 현재 3개의 핵발전소에서 6기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고, 또 하나의 핵발전소(원자로 2기)가 건설 중에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자연 재해에 대한 핵발전소의 대비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카오 교수에 따르면 현재 대만의 주택 내진 설계 기준은 0.33g(중력가속도)인데, 제1 핵발전소의 내진 설계는 0.3g에 불과하다. 또한 건설 중인 제4 핵발전소의 쓰나미에 대한 대비는 처오름 12m 수준인데, 내진 설계에 따른 최대 지진인 8.5 진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25m의 쓰나미가 닥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최고의 안전 설비를 자랑하던 핵발전의 안전 신화는 깡그리 무너졌다.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그 어떤 대비도 완벽할 수 없으며, 그 후과는 너무나도 엄청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대만의 핵발전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제대로 구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핵무기와 연결된 핵발전 정책
인도의 상황을 보고한 반핵운동 전국동맹(National Alliance of Anti-Nuclear Movements)의 S.P.우다야쿠마 박사는 핵발전은 결국 핵무기와 연결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도의 역사,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발표를 시작한 우다야쿠마 박사는 인도는 핵에 의존하지 않아도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태양광이 남아돌 정도로 더운 나라이며, 삼면이 바라도 둘러싸여 해안선이 무려 7,500km에 달해 파력 발전 등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한 히말라야 같은 지역에서는 1년 동안 바람이 계속 불어 풍력 발전의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우다야쿠마 박사는 인도가 핵에너지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오로지 핵무기를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파키스탄과의 갈등,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중국에 대한 대비 등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인도는 핵무기 개발에 매달린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국이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도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NPT(핵비확산조약)에 가입하지도 않은 인도와 원자력협력협정을 맺고 굉장히 많은 기술을 제공해주었다고 말했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핵, 그러나 인민을 죽이는 핵
중국 상황에 대해 발표에 나선 태평양 환경(Pacific Environment)의 웬 보씨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 역사에 대한 설명에 주력했다. 1964년 10월 16일, 처음 핵실험을 한 중국은 냉전 시대 제국주의 국가의 공격을 막기 위한 ‘핵 억지력’이라는 미명 하에 중국의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핵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통제가 심한 중국에서 핵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지금까지 총 45회의 핵실험(대기권 23회, 지하 22회)을 진행했는데, 그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된 바가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웬씨에 따르면 중국은 ‘8023 부대’라는 핵 부대를 창설했다고 한다. 150명 정도로 구성된 이 부대는 핵실험 지역에서의 시료 채취나 실제 핵공격이 진행될 경우에 지상부대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와 같은 작전 계획 수립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핵폭발이 주는 건강 피해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그에 대비하는 보호 장구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예를 들어 핵실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탱크를 이용했는데,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 탱크 운전이 매우 명예로운 일로 여겨져 서로 자원했다고 한다. 웬씨는 8023 부대에서 퇴역한 군인들이 나이가 들면서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핵실험 당시 이 부대를 지휘했던 사령관은 62세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현재 8023 부대 퇴역 군인들은 당시의 진상 규명과 건강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 연대로 핵 없는 세상을 만들자
마지막으로 공동 성명서 채택을 위한 전체 토론이 진행되었다. 8개 국가의 참가자들은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공통의 인식 마련을 위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공동 성명을 채택한 참석자들은 내년 반핵아시아포럼을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 3월 서울에서 진행할 것을 결의하며 이날 국제회의를 마무리했다.
일본은 과연 탈핵의 길을 향해 가는가?: 8월 2일 일본 경제산업성과 도쿄전력 항의방문
지난 8월 2일 반핵아시아포럼 2011 참가자들은 일본의 경제산업성과 도쿄전력 항의방문을 진행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운영 주체이고, 경제산업성은 일본 핵발전의 추진과 감시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정부부처다. 전날 국제회의를 통해 경제산업성 장관 카이에다 반리와 도쿄전력 사장 니시자와 토시오 앞으로 전달할 요청서를 채택한 100여 명의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먼저 경제산업성으로 향했다.
우리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경제산업성에서는 계장급 이하 젊은 직원들이 항의방문 대오를 맞았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약 15분간 진행된 면담은 항의방문 대오가 전달한 요청서 항목별로 경제산업성의 입장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리들은 일본 정부가 최대한의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예를 들어 항의방문 대오가 전달한 요청서 3항 ‘사고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사고의 진실에 대해 명백하게 설명해 주십시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는 사고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고 답했다. 방사능 오염 지역 주민들에 대한 대피 문제에 대해서는, ‘제1 핵발전소에서 고농도 방사능이 나와 사람들을 피난시켰다’고 답했다. 정부의 대응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다.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이 직접 후쿠시마에서 보고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핵발전소 수출은 정부의 소관이 아니다
이러한 경제산업성의 무책임한 태도는 핵발전 정책과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서 극에 달했다.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일본의 모든 원자로를 폐로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해 ‘핵발전소 폐기는 일본 전체의 에너지 정책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라고 답했다. 전체 에너지 정책과 연결된 문제이기에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식이다.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책임을 민영 기업에게 떠넘기기까지 했다. 면담에 참여한 정부 관료는 ‘핵발전소 수출은 정부가 아니라 사기업이 진행하는 것’으로서, ‘정부가 뭐라 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나 핵기술의 노하우 전수 문제 등에 대해 수출 대상국과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고 말했다. 핵발전소 수출에 있어 정부의 역할은 인정하면서도 기업의 거래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일본이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짧은 면담을 마치고 나온 대오는 경제산업성 앞에서 규탄 집회를 진행했다. 후쿠시마 현민들을 비롯해 수많은 민중이 미흡한 사고 수습 상황과 재해 지역 구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경제산업성의 태도에 참가자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대만에서 온 참가자는 ‘일본과 대만은 무척 가까운 나라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원한다’면서 경제산업성의 태도를 비판했다. 또한 ‘일본의 도시바와 히타치가 대만에 원자로를 수출’한 상황을 지적하며,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이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온 참가자는 ‘후쿠시마 사고로 전 세계가 일본을 주목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세계에 리더십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항의방문 대오는 약 30여 분간 경제산업성 앞에서 규탄 발언을 이어간 뒤 도쿄전력으로 향했다.
복구는 로드맵에 따라
반핵 선전물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대오는 도쿄전력에 다다랐다.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던 도쿄전력 본사 건물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고, 경찰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면담은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별관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면담장에는 도쿄전력 홍보 담당으로 보이는 3명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면담에 참가한 도쿄전력 직원은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반핵아시아포럼 여러분의 요청서를 회사로 가져가서 매우 주의 깊게 검토할 것’이라 덧붙였다.
면담 참가자들은 경제산업성에서 동일하게 요청서 문항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도쿄전력 측은 2011년 5월 20일 자로 배포된 보도자료를 제시하며, 도쿄전력이 설정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 복구를 위한 로드맵’에 따라 사고 수습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답했다. 항의방문이 이루어진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와 2호기 사이에서 치명적 수준의 방사선량(시간당 10Sv; 노출 시 즉사)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세운 로드맵에 따른 수습 절차를 믿으라는 식이었다. 도쿄전력 측은 또한 ‘후쿠시마 지역과 도쿄 지역의 상황에 대해 매일 알리고'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빨리, 갖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핵발전소 수출은 중단하겠다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필리핀에서 온 참가자는 도쿄전력이 필리핀에 핵발전소를 수출하려 하고 있는데, 향후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다. 도쿄전력 측은 후쿠시마 사태 수습과 사고 보상을 위해 해외 자본과 인력을 모두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향후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피해 보상의 수준과 방식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도쿄전력이 감당해야 할 몫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 수준의 지분 매각이나 해외 자본 철수는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후쿠시마 사고 이전에 도쿄전력이 핵발전소 수출을 시도하고 있던 대상국으로서는 도쿄전력의 이러한 입장이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부 차원에서 핵발전소 수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볼 때 도쿄전력이 아니라 다른 전력회사에 의한 핵발전소 수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향후 추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기업은 핵발전소로 이윤을 얻지만, 민중들은 피해를 당한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도쿄전력 본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계속하고 있던 대오와 합류해 면담 내용을 공유하고 규탄 발언을 이어갔다. 인도의 반핵운동 전국동맹의 S.P.우다야쿠마 박사는 ‘핵발전소를 통해 도쿄전력은 이윤을 얻지만, 민중들은 모든 피해를 떠안는다’면서 ‘도쿄전력은 악의 기업’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도쿄전력 측의 핵발전소 수출 철회 이야기로 희망을 얻게 되었다는 필리핀 참가자는 '필리핀의 핵발전소 수출 저지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에서 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함께 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이와이시마, 29년간의 끈질긴 투쟁: 8월 3일 이와이시마 지역 간담회
8월 3일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히로시마 서남쪽 야마구치현 가미노세키정의 이와이시마로 향했다. 이와이시마는 가미노세키정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섬이다. 이 작은 섬 마을에 핵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처음 나온 것은 1982년이다. 양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의 어업과 비파 농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작은 마을에 원자로 2기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세토 내해에 인접한 아름다운 환경을 지닌 섬마을을 지키고자 한 이와이시마 주민들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29년 동안 핵발전소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줄기차게 싸워오고 있다.
평화로운 지역의 분할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문제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당시 가미노세키 정장이 정의회에서 기업 유치의 일환으로 핵발전소를 유치하자고, 정의회의 합의가 있으면 건설을 추진하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지역 경제가 무너져 정부의 지원금이 절실해 핵발전소를 받아들였던 후쿠시마처럼, 점차 인구가 줄어 지자체 재정이 부족했던 가미노세키 역시 발전소 유치를 통해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작고 평화로운 지역의 분할을 가져왔다. 일부 주민들은 지역 사회의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핵발전소를 수용하는 것 말고 선택지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에서 불과 4km 떨어진 이와이시마의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어업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금도 거부한 채 매주 월요일마다 29년째 핵발전소 건설 반대 집회를 이어왔다.
온 몸으로 저항하다
20년이 넘는 이와이시마 주민들의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2008년 10월, 야마구치현 지사는 핵발전소 건설 준비를 위한 전력회사의 매립권을 승인했다. 전력회사는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 주변 토지를 통제하고 바다에 부표를 설치해 주민들과 선박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건설 예정지 주변에 통나무집을 짓고 전력회사의 매립 작업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올해 매립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자재와 6백여 명의 작업원을 실은 전력회사의 배 20여 척이 새벽 2시에 이와이시마 앞바다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선과 조그만 보트 30여 척을 동원해 바닷길을 막고 버텼다. 작업선이 들어올 때마다 주민들은 생업을 팽개치고 작은 어선으로 맞섰다. 전국적인 반대서명도 조직했다. 지난 8월 1일 자로 반대서명은 1백만 명을 돌파했다.
그럼에도 전력회사의 건설 작업은 조금씩 진척되었다. 올해 초에는 굴착 공사가 진행되는 등 매립 직전 상황까지 갔다. 그러던 중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함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했고, 3월 29일 매립 작업은 중단되었다. 야마구치현지사는 향후 전력회사가 매립 허가 요청을 다시 내더라도 결코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끝나지 않은 싸움
그러나 이와이시마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와이시마 주민인 토시야스 시미즈씨는 “향후 3년 정도는 핵발전소 건설이 중단되겠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 될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간 나오토 총리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부 내에서도 합의가 되지 않고 있다. 또한 후쿠시마 사고 이전부터 정권의 위기를 겪고 있던 간 총리는 조만간 사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총리가 바뀌거나, 향후 정권이 바뀔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도쿄전력이 아시아 국가들에 핵발전소를 수출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른 전력회사가 추진할 수 있는 것처럼, 핵에너지에 의존하는 에너지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와이시마의 싸움은 끝날 수 없다.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과 이와이시마 주민들은 8월 6일 함께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건설을 책임지고 있는 전력회사인 ‘중국전력’을 항의방문하면서, 향후에도 이 싸움에 함께 연대할 것을 결의했다.
남겨진 과제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그 어떤 해보다 역동적이고 다양한 일정으로 구성된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은 8월 6일 중국전력 항의방문과 집회로 모든 일정을 끝마쳤다. 한국과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 경쟁 등, 이른바 ‘핵 르네상스’ 정책으로 인해 가속화되고 있던 핵발전 확대의 흐름은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상당부분 진도가 늦춰지게 되었다. 29년 간 주민들의 투쟁에도 핵발전소 건설을 지속하려 했던 가미노세키의 사례나 해외 진출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도쿄전력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반핵 운동 진영에도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도쿄전력이 해외에서 철수하더라도, 혹은 중국전력이 가미노세키에 핵발전소 건설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핵발전 확대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의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희미해져 간다면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갈 재앙의 씨앗은 다시 잉태될 수 있다. 후쿠시마의 상황과 현지 주민들의 외침을 널리 알리고, 그들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재앙의 싹을 제거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고 3일 뒤 이명박 대통령은 UAE에서 핵발전소 기공식을 진행했다. 또한 원자력안전기술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일본 원전 사고가 생겼다고 해서 (핵발전소가)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인류가 기술면에서 후퇴하는 것”이라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세계에서 탈핵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구체적인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한국은 핵발전 확대 정책을 밀어붙이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명이었다.
내년 3월 서울에서 두 번째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다. 핵테러리즘의 차단, 핵물질의 안전보장 등을 논의하는 핵안보정상회의는 물론 직접적으로 핵발전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핵물질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 취약한 핵물질을 보호하는 것은 결국 핵무기 보유국의 절대적 권력을 보존하고, 핵발전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핵발전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년 서울의 핵안보정상회의는 결국 탈핵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자리일 수밖에 없다.
이번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내년 반핵아시아포럼을 3월 핵안보정상회의 기간에 맞춰 한국에서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는 핵발전을 확대하려는 세계 정상들과 탈핵의 흐름을 확대하려는 민중들의 격돌의 장이 되어야 한다. 후쿠시마의 분노와 외침이 재난을 당한 일부 사람들의 호소가 아니라 인류가 탈핵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내년 핵안보정상회의 대응을 해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핵안보’를 논의하는 정상회의가 아니라, ‘탈핵’을 위한 정상회의, 탈핵의 길을 밝히는 민중회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