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향후 정치 지형 전망
박원순 야권 단일 후보의 승리로 끝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경제위기와 재정제약이라는 조건 속에서 복지정책은 이번 선거의 직접적 원인이자 핵심 이슈였다. 선거에서 드러난 여야 간 복지정책은 사실상 큰 차별성이 없었지만 그 담론과 이데올로기는 앞으로도 줄곧 쟁점이 될 것이다. 둘째, 집권 여당의 레임덕이 가시화됐지만 제1야당도 선거의 주도권을 갖지 못했다. ‘안철수 돌풍’으로 상징되는 반한나라당 비민주당 무당파의 지지를 업고 시민운동 출신 박원순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야권 단일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나라당은 ‘오세훈 심판’ 선거 프레임을 ‘박원순 검증’ 프레임으로 변화시키는 네거티브 공세에 주력했다. 셋째, 지난 6.2 지방선거에 이어 범야권은 다시 한 번 선거연합을 성사시켰다.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등 전 집권세력은 이번 야권 후보 단일화를 향후 정계개편과 정권교체의 결정적 고리로 사고하고 있다. 넷째,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등 민중운동은 야권단일화를 무기력하게 수용하며 사실상 범야권의 일각으로 흡수되고 있다. 진보정당 통합이 난항에 빠지고 대중운동이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야권 단일화는 향후에도 민중운동의 유력한 선택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선거가 2012년 총선·대선의 전초전으로 인식된 만큼 이상의 특징들은 향후 정치 지형을 규정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아래에서 그 함의를 분석하면서 내년 정치 지형을 전망한다.
복지담론
이번 서울시장 선거의 직접적 배경이 주민투표 무산에 있는 만큼, 선거의 핵심 쟁점은 무상급식 등 복지정책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7% 성장, 4만 달러 소득, 7대 강국 도약)이나,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의 ‘뉴타운 공약’ 등 성장·개발 담론이 지배했던 과거의 선거와 비교할 때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번 선거에서 여야 간 복지정책은 어떻게 구체화되었나?
야권은 한나라당-오세훈 심판 기조 속에서 이번 선거 구도를 ‘복지 대 반복지’ 프레임으로 설정했다. 박원순 후보도 ‘전시성 토건 예산을 삭감하고 그 재원으로 복지·환경·교육 등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하겠다’며 ‘보편적 복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그동안 일자리, 보육, 교육, 노후, 주거 불안을 ‘국민 5대 불안’으로 규정하고 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와 반값등록금을 ‘3+1’ 복지 정책으로 제시한 데 이어 최근 일자리 복지와 주거 복지를 포함한 ‘3+3’ 정책을 발표했다. 민주당은 이를 집권 5년간의 보편적 복지 미래 비전으로 선전하고 있다.
나경원 후보는 ‘소득 구분 없는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원칙과 소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결과를 겸허히 수용한다’며, 주민투표를 ‘성전,’ ‘낙동강 전투’로 몰아가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복지 공약을 대폭 부각하고 있다. 이는 한나라당이 ‘보궐선거가 무상급식 주민투표 2라운드가 되면 안 된다’는 인식 속에 최근 박근혜 전 대표가 주장했던 ‘소득 차등 없는 무상급식 확대’를 당론으로 채택한 데 따른 것이다.('지방자치단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되 당은 단계적 무상급식 확대를 지지한다') 박 전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운동 지원에 앞서 복지 당론을 정해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한나라당이 박 전 대표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와 유사한 방안을 권고적 당론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런 점만 놓고 본다면, 이번 선거 구도는 야권이 ‘복지 대 반복지’ 프레임을 선점하고 여당이 여기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모양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복지정책을 둘러싼 제반 조건을 고려하면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경제위기와 재정적 제약이라는 조건 속에서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의 방향성을 둘러싼 이념·노선 논쟁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7-09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적극적 재정지출을 통해 고용보조금 지원, 공공부문 고용창출, 실업급여 지급, 기타 사회복지 지원 등 경기부양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위기 직후 복지 지출은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각국의 복지 프로그램은 대부분 위기가 일시적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취해진 한시적 조치였다. 그러나 2009-11년 유럽발 재정위기 여파로 세계적인 경기재침체 우려가 고조되는 동시에 위기 대응 과정에서 재정이 악화되자 많은 나라는 2010-11년 들어 긴축재정으로 회귀하고 있다. 각국의 긴축안에서 복지정책은 단기 차원의 지출 축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금과 같은 중기 차원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조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긴축 또는 재정건전화 흐름에 발맞추어 최근 정부는 <2011-15년 중기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수립했다. 2010년 현재 GDP의 33% 수준에 달하는 국가채무 비율이 주요국에 비해 양호한 수준이지만 세계 재정위기로 인한 대외 불확실성 및 저출산·고령화 등 중장기 재정위험에 대비하여 재정여력을 비축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계획에 따르면 재정수입은 2011-15년 기간 중 연평균 7.2% 증가하는 반면 재정지출은 동기간 연평균 4.8% 증가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정부와 여당은 부자감세에 대한 반론을 고려하여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법인세와 소득세 추가 인하 계획을 일부 철회한 <2011년 세법개정안>을 9월 초 발의했다. 정부는 이로 인한 세수증가분(약 2.8조 원)을 재정건전성을 높이고 서민중산층을 위한 복지재원을 확충하는 데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것 역시 재정건전화를 위해 사회보장 지출의 삭감과 감세의 부분적 철회를 병행하는 국제적 추세를 얼마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정부의 재정건전화 논리를 지지하며 야권의 보편적 복지 공세에 대해 선별적 복지(맞춤형 복지)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민주당은 ‘3+3’으로 불리는 보편적 복지 재원조달 방안을 제시하면서 이를 재정건전성과 사회정의, 국민적 공감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방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국채 발행이나 새로운 세금 신설 등을 통해 조달하는 방안은 재정건전성을 훼손하거나 국민의 조세부담을 급격히 올리는 부작용이 있다’며 재정개혁·복지개혁·조세개혁을 통해 보편적 복지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정책의 허구적 성격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 복지국가론자들은 ‘증세 방안이 결여된 채 대부분 조세감면 철회와 음성탈루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 등 구태의연한 주장에 머물러 있고, 재정추계도 3+1 정책에만 있고 일자리·주거 등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부분은 발표를 미뤄 결국 새로운 복지확대 내용은 없는 셈’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복지국가론자들의 주장대로 민주당을 포함하는 복지국가 동맹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평등과 민주주의’의 복지국가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성이 있나? 이에 답하기 위해서 한국 사회정책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보충하기 위해 사회정책을 제시한 것은 전두환 정부다. 그러나 1986-88년의 ‘3저 호황’까지 사회정책은 유명무실했는데, 이후 노태우 정부가 1989년에 건강보험제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하고, 김영삼 정부가 1995년에 사회보장기본법을 제정한다. 사회정책을 본격적으로 채택한 것은 역시 김대중-노무현 정부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표방하면서 사회정책을 대폭 확충하는데, 특히 1999년에 연금제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한다. 또 노무현 정부는 경제성장과 분배정의의 균형을 주장하면서 생산적 복지를 ‘참여 복지’로 계승한다. 국민소득 대비 사회정책예산의 비중은 김영삼 정부의 1% 미만에서 1998년의 6%로 대폭 상승한 이후에도 2007년의 12%까지 상승세를 지속하여, 결국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의 절반 정도에 도달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장후퇴와 저출산고령화가 시작되면서 복지 재정의 위기가 발생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제도의 재정위기를 연기하기 위해 직장보험과 지역보험의 재정을 통합하고, 국민연금제도의 경우 사업장연금과 지역연금의 재정을 통합한다. 이어서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제도의 재정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적립방식을 채택한다(반면 건강보험제도는 아직 기금으로 전환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재정위기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연금개혁이다. 이미 저성장과 저출산-고령화를 경험한 여러 선진국에서는 재정으로 연금기금을 확충하여 주식에 투자하는 식의 연금개혁 방향이 시행되고 있다. 연금기금의 금융화는 사회보장의 사회보험적 성격이 주식투자적 성격으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 전체가 ‘이해당사자’(stakeholder)로서 금융화에 포섭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2007-10년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주요국 연금기금은 대규모 손실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주요국에서는 기금적립과 투자자유화를 통해 연금제도가 자금 흐름을 만들어 금융시장을 떠받치는 악순환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한편 복지국가론이 제기하듯이 한국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 수준의 복지를 달성하려면 현재세대의 조세를 20% 정도 인상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장기불황 속에서 이런 방안은 실행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명박 정부의 ‘능동적 복지’가 이전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구축된 사회복지의 급격한 후퇴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 역시 현실적 근거가 없다. 복지를 노동의 의무와 노동신축화와 결합하는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나 노무현 정부의 ‘참여 복지’는 이명박 정부의 ‘일을 통한 복지’로 계승된다. 이명박 정부가 국가주도의 보편적 복지가 아닌 잔여적·선택적·시혜적 복지를 명시적으로 표방한 것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정부 민간 협력’ 방안 역시 ‘부족한 공공복지 인력 및 재원 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민간의 복지참여 활성화가 적극 필요하다’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제를 반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속적 경제성장이나 강력한 노동자운동의 실존과 같은 계급타협의 물질적·제도적 조건이 해체된 상황에서, 더구나 민주당이 금융자유화, 노동신축화, 탈규제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어 복지동맹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
안철수-박원순 돌풍의 의미
이번 선거의 두 번째 특징으로 안철수-박원순 돌풍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주민투표 무산 직후 곽노현 전 교육감이 선거 부정 문제로 구속, 수감되면서 정국은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이 와중에 서울시장 후보로 안철수 교수가 급부상했다. 안철수 교수는 사회에 공헌하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IT 전문가로서, ‘기업사회’라 할 수 있는 시대의 추세에 들어맞는 리더십의 전형이자 그러한 기술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청년들의 역할 모델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런데 얼마 뒤 안철수 교수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박원순 이사는 안철수 돌풍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여론의 과반 지지율을 확보했다. ‘양보의 미덕’이 더해지며, 박원순 이사는 현 정부·여당에 비판적이면서도 민주당·국참당과 같은 기성 정당에 독립적인 시민사회의 대표주자로 추대되었다.
언론과 여론전문가들은 안철수-박원순 지지 세력이 2008년 촛불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무상급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 의제에 적극적 지지를 보내온 계층과 대체로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는 데 주목했다. 즉 대도시 거주 20~40대의 고학력 화이트칼라로서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진보 또는 중도좌파로 인식하는 집단이 그들이다.
박원순 이사가 반한나라당 후보로 확고한 입지를 점하자 민주당은 제1야당임에도 한동안 자기 후보조차 선출하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내부 경선 끝에 박영선 후보를 선출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야권 단일화를 전제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무소속이라는 한계로 사전 여론조사와 달리 선거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박원순 후보도 야권 단일화를 추진했다(박원순 후보의 ‘정신적 민주당원’ 발언은 무소속 출마의 취약한 조직력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당 내외곽에서 범야권 통합을 주창해온 ‘혁신과 통합’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반한나라당 주도권을 상실한 민주당으로서는 단일화를 통해 야권 통합과 총대선 승리의 추동력을 이어나가고, 정당 조직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비민주당·시민사회 진영으로서는 당선을 통해 새로운 교두보를 구축한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결국 범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한 박원순 후보는 민주당 입당 대신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
많은 수의 정치학자들은 안철수-박원순 돌풍을 정당의 위기 증후, 즉 한나라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실망한 무당파층의 적극적 지지로 해석하기도 한다(경향신문이 지난 9월 3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지 정당이 없다’라는 응답이 무려 73.6%에 달했다. 그 이유로 ‘정당 간 차이가 없어서’가 41.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정당의 위기는 정당 일체감의 감소, 당원 수의 감소, 전통적 지지층의 축소, 정당에 대한 신뢰 추락, 투표율의 하락으로 그 증후가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들은 미디어 캠페인과 인물 중심 선거 또는 단기 이슈 중심의 선거를 펼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정당들은 당원 중심적 대중정당, 또는 이념 지향적 정당으로 발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현안과 민심을 좇는 선거 중심적 정당으로 변모하게 된다. 선거 승리에 전념하는 ‘선거전문가 정당’은 이념이나 정책적 정체성보다는 더욱 많은 유권자로부터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포괄적 호소에 치중하게 되며, 이러한 정당들의 경쟁구도는 자연히 중도 지향성을 띤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정당들이 정책적 공조보다는 인맥과 파벌에 의해 구성된 정당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촉진된다.
이처럼 이념이나 당원을 근간으로 하는 정당 구조가 안착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명망가 중심의 정당이 복수로 존재하고 선거 시기에 명망가들 간 합의로 선거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은 현대 인민주의의 일반적 현상이다. 이들은 정당을 기반으로 삼지 않더라도 대중적 명망과 미디어의 힘을 활용하여 선거 자금과 운동원을 조직할 수 있다.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이사의 급부상은 이러한 정치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재와 같은 정당의 위기 속에서 인민주의는 고유한 이념이나 정책 대신 기술 관료적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치장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선호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박원순 이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정치선동가적 이미지보다는 NGO 출신 정책전문가 이미지가 더 강한 듯하다. 이처럼 반복과 변주를 거듭하며 형성되는 선거 카르텔은 결국 ‘전문가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보완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고, 그에 참여하는 정당도 그러한 경향성이 강화될 것이다. 또한 그에 편승하는 사회운동의 전략 역시 더욱 궁지에 처할 것이다.
박원순 후보는 선거 기간 ‘한나라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실망한 다수 시민’의 대표자로 자신을 이미지화했다. 이는 기성 정당이나 국가기구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운동이라는 표상을 통해 뒷받침된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기술 관료적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치장한 시민운동은 사실상 정부 여당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정치적행정적 ‘비정부기구’(NGO)로 변모했다. 이들은 사회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주체로 자신을 표상하는 한편 계급적 대중운동을 이익집단으로 부차화한다. 이들이 준거하는 자유주의적 논리에서 계급적 이해관계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다양한 준거집단 중 특수한 집단의 이해에 불과하며, 공공성과 공익이라는 보편적 이해관계에 비해 부차적이고 2차적인 지위를 가진다. 이들은 실용적·정책적 해결책을 통한 갈등의 해소를 지향하기 때문에 국가기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에 따라 시민운동은 전문적 지식에 기초한 정책의 입안과 갈등의 중재를 일상화하는 전문가주의 또는 공익소송과 같은 법률적 매개수단을 절대화하는 법률주의를 지향한다. 시민운동은 정당이 추천한 공직후보자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거나 선거에 출마할 후보자들의 인력 풀을 형성함으로써 정당의 충원적 기능까지 대행하기에 이른다.
재벌개혁 운동, 낙천낙선 운동, 기부 운동에 이르기까지 박원순 후보의 이력은 결코 ‘신자유주의 반대’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지지하고 보완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집행과 감독기능의 분화 △주주권리의 보장 등을 통한 자본시장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론을 적극 지지했다. 소액주주운동이 모태로 삼은 미국의 주주행동주의는 사실 연금기금이나 상호기금과 같은 기관투자가·금리생활자들의 이해를 대변한다. 실제로 참여연대는 타이거펀드나 템플턴그룹과 같은 초국적자본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소액주주운동을 전개했다. 소액주주운동의 수혜자는 노동자와 민중이 아니라 자본으로, 또 개미투자자가 아니라 기관투자가로 철저하게 국한된다. 기업지배구조 개혁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목표하고, 이는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국부유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지지한 주주행동주의와 금융자유화는 오늘날 세계 금융위기의 배경을 이룬다.
또 재벌개혁 운동과 함께 박원순 후보가 주력했던 낙천낙선 운동의 경우, 2000년 총선 국면의 쟁점을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심판에서 낙천낙선 대상으로 꼽힌 부패 정치인에 대한 심판으로 변경시켰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바꾸는가’라는 문제는 한 번도 제기되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바꿔!” 열풍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반면 위기에 몰렸던 정부와 집권 여당은 낙천낙선 운동에서 탈출구를 발견하였고 발빠르게 이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을 개혁세력으로 포장했다. 그 결과 정부 여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총선 후에 계속 강화해야 할 개혁정책으로 다시 자리매김 되었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불리기도 하는 아름다운 재단의 기부 운동은 기업과 부유층의 사회적 책임과 정의 관념에 호소한다. 혹자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재단과 같은 비영리조직(NPO)들은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아름답게 세탁’하는 역할을 하며, 이런 맥락에서 기업과 비영리조직은 전략적 상생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논리를 동원하더라도 기업이나 부유층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 투기를 통해 얻은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기업은 무노조 경영과 불공정 거래로 유명한 삼성전자와 포스코다.
이러한 노선에 대한 명확한 자기비판이 없다면 박 후보가 말하는 개혁과 복지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가 최근 TV 토론에서 한미 FTA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얼버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야권 단일화 효과
한편 이번 야권 단일화를 주도한 이들은 ‘후보 등록일 전에 단일화 방안에 합의함에 따라 단일화 효과를 극대화하고 감동을 주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내년 총·대선에서도 선거연합을 통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6.2 지방선거 이후 정형화된 야권 단일화는 선거 효능감이라는 차원에서 뚜렷한 가시적 성과를 산출하였고, 참여 주체들의 상호보상에 대한 기대감도 충족시켰다. 특히 정당 간의 협상을 중간에서 매개·조율·촉진할 수 있는 시민단체의 개입으로 선거연합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연합정치를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서 단순한 선거연합을 넘어 가치·정책연합의 지향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제출되기도 한다. 나아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과 같은 기존 정당이 대중의 새로운 정치적 요구와 이해, 감수성을 담아내지 못함으로써 정당에 대한 광범한 불신과 이반이 퍼진 상황에서, 박원순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정되는 것이 장차 정당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난 6.2 지방선거 이후 야권연대의 기본틀로 정형화된 후보 단일화는 이념·노선·정강을 초월하여 오로지 선거 승리를 위해 고안된 정치공학에 불과하다. 때로 ‘감동의 정치’로 표현되기도 하는 후보 단일화 기법은 사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정몽준 후보 간에 이뤄진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국민적 지지와 정치적 흥행을 목적으로 도입된 개방형 예비경선 방식의 후보 선출제도는 특히 정당체계의 위기를 표현함과 동시에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반 국민을 일정 비율로 정당의 후보경선 과정에 참여시키는 개방형 예비경선 제도(국민경선제)는 후보선출의 대표성 확대나 당내 민주화라는 표면적 목적과 달리 실상 각 정당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선거운동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선거전략 차원에서 도입된 것이다. 후보 경선과정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하는 것은 한편으로 민심을 반영하여 후보의 대표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미화되곤 하지만, 이는 정당의 이념·정책이나 당원의 의사를 무시함으로써 정당의 존재 의미를 무색하게 한다. 경선 과정에서 여론조사의 반영 비율이나 설문방식과 같은 세부규칙을 둘러싸고 후보 간에 극한 대립이 빚어지기도 한다.
또 국민경선제에 내재한 기술적 결함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가령 국민경선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의 참여율이 아주 낮고 또한 참여하는 유권자들의 성격도 편중된다면, 일반 유권자뿐만 아니라 정당의 지지기반을 이루고 있는 유권자들의 성격도 잘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국민경선에 여론조사를 반영할 경우 후보 선출 과정에 참여할 의사가 없는 사람의 의견도 후보 선출에 ‘무책임하게’ 반영하는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 여론조사에 대한 의존은 근본적으로 정당 내부보다 정당 외부에서의 높은 지지를 갖는 인물을 선호하게 되므로, 정치 엘리트의 육성과 충원이라는 정당 고유의 기능은 이제 더욱 위축된다.
그럼에도 민주당, ‘혁신과 통합’과 같은 이전 집권세력들은 ‘이념·노선·정파를 초월하여 한나라당이라는 공통의 적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다면 민생과 민주주의가 발전할 것’이라는 식의 전형적인 인민주의적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 번 그 위력이 확인된 야권 단일화 선거기법을 발전시켜 정계개편과 정권교체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한다. 이들은 당장 차기 총선에서 단일후보 경선 또는 연합공천 방식 등을 통해 반한나라당 선거연대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확보했다.
이와 관련하여 ‘혁신과 통합’은 재보선 직후 야권 통합을 본격화할 것이라는 구상을 최근 공개했다. 이와 함께 각 정치세력의 정체성 보장을 위해 통합정당을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고 내년 총선 이후 국고보조금을 당선자 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계획도 제시했다. 이들은 이번 야권 단일화가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통합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던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이번 선거를 기점으로 향후 야권 대통합 과정에서 민주당이 아닌 ‘혁신과 통합’이 주도권을 발휘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박원순 후보도 “민주당이 조금 더 앞으로 문호를 열고 저 같은 사람은 좀 더 많이 포함할 수 있는 혁신과 통합의 과정 거치면 나도 기꺼이 같이 갈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편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보수언론으로부터 ‘불임정당,’ ‘숙주정당’이라는 조롱을 들을 정도로 범야권 내 주도권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 야권 단일화로 인한 입지 축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고, 이것이 자칫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등이 당장 신설합당 방식의 통합 절차를 밟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대신 이번 야권단일화와 같은 선거기법을 통해 선거 카르텔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박원순 후보 지지
일반적인 정당의 위기에 조응하여 민주노동당도 최근 수년간 ‘집권 전략’으로 상징되는 탈이념화의 길을 걸어왔다. 민주노동당은 핵심 지지층의 결집과 동원보다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선 변화를 시도했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서는 당의 조직적 토대를 이루는 노동자·농민·빈민 대중운동의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정당 역시 현실의 선거정치에 치중하면서 정치공학이나 여론조작에 유연하게 적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야권 단일화를 도입한 데에 이어 올해 정당통합과 선거연합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선거에 독자 출마하여 완주 패배하기보다는 야권 단일화로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일정한 지분을 갖고 공동지방정부에 참여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비민주당 개혁세력이 당선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를 민주당의 주도권을 무력화하고 향후 선거연합의 협상력을 높이는 기회로 본 것이다. 최규엽 후보 개인도 ‘질 높은 야권 단일화’를 언급하면서 ‘서울시장 선거에서 공동정부가 잘 될 경우 내년 대선에서 연립정부도 구성해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는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최초로 실현된 민주노동당의 후보 단일화와 공동정부 노선이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야권 단일화로 당선된 경상남도, 인천시, 강원도, 서울·경기 기초단체 등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수준의 공동정부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경상남도에서 민주노동당은 강병기 후보가 김두관 후보와 단일화 한 대가로 정무부지사를 맡고 있고 공동지방정부 성격으로 구성된 민주도정협의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를 유연한 선거·정책연합의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여타 지역은 아직 공동정부 구성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지역이 많고 구성된다 하더라도 지방자치단체장의 성향에 따라 공약 실행이 좌지우지되어 선거용으로 그친다는 지적도 있지만, 정부 참여와 견제를 통해 실리를 획득했다는 식의 평가가 주를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후보 단일화와 이를 대가로 한 공동정부 지분 참여 보장을 실용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동지방정부는 연립정부의 예시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일 연립정부 구성이 현실화된다면 민주노동당과 그로 대표되는 민중운동이 집권세력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재 야권 단일화를 주도하는 민주당·국참당이나 그 외곽에 포진한 ‘혁신과 통합’, 또는 이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시민단체 등 전 집권세력은 정권 탈환을 위해 민중운동을 포섭하려고 시도해왔다. 이들은 평상시 독자적인 정당 체계로 존재하던 세력들을 선거 시기에 정치협상을 통해 선거 카르텔을 형성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민주당이 제안하는 ‘빅 텐트론’이나 ‘혁신과 통합’이 제안하는 ‘백지신당론’은 그 속에서 누가 어떻게 주도권을 쥘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진보정당과 민중운동을 자신의 좌익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유사한 효과를 지닌다. 형식적으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선거 카르텔이 반복된다는 것은 범야권이라는 큰 우산을 공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서울본부)은 야권 단일 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참여경선 선거인단 모집과 야권 단일 후보 선거운동에 매진하였다. 후보 단일화 정책 합의문 중 ‘서울시와 산하기관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안정적인 노정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하며, 서울시 등에 노동복지센터를 설립하여 고용안정과 노동복지를 실현한다’는 조항에 근거를 둔 것이다. 민주노총은 박원순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 속에 그와 마찬가지로 무소속 후보가 도지사로 당선된 경상남도의 사례를 염두에 두었다. 또 인천시가 공동정부 구성 이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을 추진하고 유관기관 노동조합 해고자를 복직시킨 사례도 참고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방침은 진보정당 간 통합이 무산되고 또 진보정당 후보가 독자 출마하지 않은 상황에서 조합원들의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차선책이라는 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야권 단일화 과정에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닌다. 우선 주어진 경선 틀에 참여한 것은 그 자체로 민주노동당의 야권 단일화를 추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작년 지방선거에서 수립된 민주노총 정치방침, 즉 ‘야권 단일화 후보는 민주노총 지지후보로 한다’는 정치방침이 지닌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한 것이다. 이 방침은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이를 배타적으로 지지해온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일순간 개혁세력에 대한 직간접적 지지로 둔갑시킨다. 특히 시민사회 진영을 대표하는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어 민주노총은 지방정부에 대한 개입과 의존도를 훨씬 높일 것이다. 이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점점 더 당면한 실리적 쟁점에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잠시, 미국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보자. 미국노총(AFL-CIO)과 민주당의 제휴가 야기한 가장 심원한 효과는 노동조합을 사회운동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것, 또는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정당 정치인에 대한 로비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합원에게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활동은 자기 조합원의 실리적 이익만 추구하는 것으로 협소화된다. 민주당 의존적 노동조합 활동은 노동조합의 성격 그 자체를 협소한 이해관계 집단으로 변모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이 야권 단일화와 같은 정치노선을 지지한다면 이는 노동자운동의 주류가 향후 미국식 자-로(自勞, lib-lab) 공조로 재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현재 민주노총 집행부의 다수를 점하는 한 정파는 숫제 ‘집권을 위한 노동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 하반기 사업계획은 2012년 대선에서 ‘진보적 정권교체’를 명시하였고 이는 다가올 노동자대회에서 공식 제안될 예정이다.
민중운동이 야권 단일화 프레임 속에서 독자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내년 정치 국면에서 민주당이나 ‘혁신과 통합’이 주도하는 선거 카르텔의 일부로 흡수 통합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는 정확히 계급의 해체를 의미하며,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대한 민중적 대안의 건설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운동의 정치적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시급한 시점이다.
복지담론
이번 서울시장 선거의 직접적 배경이 주민투표 무산에 있는 만큼, 선거의 핵심 쟁점은 무상급식 등 복지정책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7% 성장, 4만 달러 소득, 7대 강국 도약)이나,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의 ‘뉴타운 공약’ 등 성장·개발 담론이 지배했던 과거의 선거와 비교할 때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번 선거에서 여야 간 복지정책은 어떻게 구체화되었나?
야권은 한나라당-오세훈 심판 기조 속에서 이번 선거 구도를 ‘복지 대 반복지’ 프레임으로 설정했다. 박원순 후보도 ‘전시성 토건 예산을 삭감하고 그 재원으로 복지·환경·교육 등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하겠다’며 ‘보편적 복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그동안 일자리, 보육, 교육, 노후, 주거 불안을 ‘국민 5대 불안’으로 규정하고 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와 반값등록금을 ‘3+1’ 복지 정책으로 제시한 데 이어 최근 일자리 복지와 주거 복지를 포함한 ‘3+3’ 정책을 발표했다. 민주당은 이를 집권 5년간의 보편적 복지 미래 비전으로 선전하고 있다.
나경원 후보는 ‘소득 구분 없는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원칙과 소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결과를 겸허히 수용한다’며, 주민투표를 ‘성전,’ ‘낙동강 전투’로 몰아가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복지 공약을 대폭 부각하고 있다. 이는 한나라당이 ‘보궐선거가 무상급식 주민투표 2라운드가 되면 안 된다’는 인식 속에 최근 박근혜 전 대표가 주장했던 ‘소득 차등 없는 무상급식 확대’를 당론으로 채택한 데 따른 것이다.('지방자치단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되 당은 단계적 무상급식 확대를 지지한다') 박 전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운동 지원에 앞서 복지 당론을 정해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한나라당이 박 전 대표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와 유사한 방안을 권고적 당론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런 점만 놓고 본다면, 이번 선거 구도는 야권이 ‘복지 대 반복지’ 프레임을 선점하고 여당이 여기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모양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복지정책을 둘러싼 제반 조건을 고려하면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경제위기와 재정적 제약이라는 조건 속에서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의 방향성을 둘러싼 이념·노선 논쟁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7-09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적극적 재정지출을 통해 고용보조금 지원, 공공부문 고용창출, 실업급여 지급, 기타 사회복지 지원 등 경기부양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위기 직후 복지 지출은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각국의 복지 프로그램은 대부분 위기가 일시적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취해진 한시적 조치였다. 그러나 2009-11년 유럽발 재정위기 여파로 세계적인 경기재침체 우려가 고조되는 동시에 위기 대응 과정에서 재정이 악화되자 많은 나라는 2010-11년 들어 긴축재정으로 회귀하고 있다. 각국의 긴축안에서 복지정책은 단기 차원의 지출 축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금과 같은 중기 차원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조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긴축 또는 재정건전화 흐름에 발맞추어 최근 정부는 <2011-15년 중기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수립했다. 2010년 현재 GDP의 33% 수준에 달하는 국가채무 비율이 주요국에 비해 양호한 수준이지만 세계 재정위기로 인한 대외 불확실성 및 저출산·고령화 등 중장기 재정위험에 대비하여 재정여력을 비축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계획에 따르면 재정수입은 2011-15년 기간 중 연평균 7.2% 증가하는 반면 재정지출은 동기간 연평균 4.8% 증가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정부와 여당은 부자감세에 대한 반론을 고려하여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법인세와 소득세 추가 인하 계획을 일부 철회한 <2011년 세법개정안>을 9월 초 발의했다. 정부는 이로 인한 세수증가분(약 2.8조 원)을 재정건전성을 높이고 서민중산층을 위한 복지재원을 확충하는 데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것 역시 재정건전화를 위해 사회보장 지출의 삭감과 감세의 부분적 철회를 병행하는 국제적 추세를 얼마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정부의 재정건전화 논리를 지지하며 야권의 보편적 복지 공세에 대해 선별적 복지(맞춤형 복지)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민주당은 ‘3+3’으로 불리는 보편적 복지 재원조달 방안을 제시하면서 이를 재정건전성과 사회정의, 국민적 공감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방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국채 발행이나 새로운 세금 신설 등을 통해 조달하는 방안은 재정건전성을 훼손하거나 국민의 조세부담을 급격히 올리는 부작용이 있다’며 재정개혁·복지개혁·조세개혁을 통해 보편적 복지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정책의 허구적 성격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 복지국가론자들은 ‘증세 방안이 결여된 채 대부분 조세감면 철회와 음성탈루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 등 구태의연한 주장에 머물러 있고, 재정추계도 3+1 정책에만 있고 일자리·주거 등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부분은 발표를 미뤄 결국 새로운 복지확대 내용은 없는 셈’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복지국가론자들의 주장대로 민주당을 포함하는 복지국가 동맹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평등과 민주주의’의 복지국가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성이 있나? 이에 답하기 위해서 한국 사회정책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보충하기 위해 사회정책을 제시한 것은 전두환 정부다. 그러나 1986-88년의 ‘3저 호황’까지 사회정책은 유명무실했는데, 이후 노태우 정부가 1989년에 건강보험제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하고, 김영삼 정부가 1995년에 사회보장기본법을 제정한다. 사회정책을 본격적으로 채택한 것은 역시 김대중-노무현 정부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표방하면서 사회정책을 대폭 확충하는데, 특히 1999년에 연금제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한다. 또 노무현 정부는 경제성장과 분배정의의 균형을 주장하면서 생산적 복지를 ‘참여 복지’로 계승한다. 국민소득 대비 사회정책예산의 비중은 김영삼 정부의 1% 미만에서 1998년의 6%로 대폭 상승한 이후에도 2007년의 12%까지 상승세를 지속하여, 결국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의 절반 정도에 도달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장후퇴와 저출산고령화가 시작되면서 복지 재정의 위기가 발생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제도의 재정위기를 연기하기 위해 직장보험과 지역보험의 재정을 통합하고, 국민연금제도의 경우 사업장연금과 지역연금의 재정을 통합한다. 이어서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제도의 재정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적립방식을 채택한다(반면 건강보험제도는 아직 기금으로 전환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재정위기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연금개혁이다. 이미 저성장과 저출산-고령화를 경험한 여러 선진국에서는 재정으로 연금기금을 확충하여 주식에 투자하는 식의 연금개혁 방향이 시행되고 있다. 연금기금의 금융화는 사회보장의 사회보험적 성격이 주식투자적 성격으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 전체가 ‘이해당사자’(stakeholder)로서 금융화에 포섭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2007-10년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주요국 연금기금은 대규모 손실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주요국에서는 기금적립과 투자자유화를 통해 연금제도가 자금 흐름을 만들어 금융시장을 떠받치는 악순환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한편 복지국가론이 제기하듯이 한국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 수준의 복지를 달성하려면 현재세대의 조세를 20% 정도 인상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장기불황 속에서 이런 방안은 실행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명박 정부의 ‘능동적 복지’가 이전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구축된 사회복지의 급격한 후퇴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 역시 현실적 근거가 없다. 복지를 노동의 의무와 노동신축화와 결합하는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나 노무현 정부의 ‘참여 복지’는 이명박 정부의 ‘일을 통한 복지’로 계승된다. 이명박 정부가 국가주도의 보편적 복지가 아닌 잔여적·선택적·시혜적 복지를 명시적으로 표방한 것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정부 민간 협력’ 방안 역시 ‘부족한 공공복지 인력 및 재원 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민간의 복지참여 활성화가 적극 필요하다’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제를 반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속적 경제성장이나 강력한 노동자운동의 실존과 같은 계급타협의 물질적·제도적 조건이 해체된 상황에서, 더구나 민주당이 금융자유화, 노동신축화, 탈규제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어 복지동맹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
안철수-박원순 돌풍의 의미
이번 선거의 두 번째 특징으로 안철수-박원순 돌풍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주민투표 무산 직후 곽노현 전 교육감이 선거 부정 문제로 구속, 수감되면서 정국은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이 와중에 서울시장 후보로 안철수 교수가 급부상했다. 안철수 교수는 사회에 공헌하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IT 전문가로서, ‘기업사회’라 할 수 있는 시대의 추세에 들어맞는 리더십의 전형이자 그러한 기술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청년들의 역할 모델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런데 얼마 뒤 안철수 교수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박원순 이사는 안철수 돌풍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여론의 과반 지지율을 확보했다. ‘양보의 미덕’이 더해지며, 박원순 이사는 현 정부·여당에 비판적이면서도 민주당·국참당과 같은 기성 정당에 독립적인 시민사회의 대표주자로 추대되었다.
언론과 여론전문가들은 안철수-박원순 지지 세력이 2008년 촛불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무상급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 의제에 적극적 지지를 보내온 계층과 대체로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는 데 주목했다. 즉 대도시 거주 20~40대의 고학력 화이트칼라로서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진보 또는 중도좌파로 인식하는 집단이 그들이다.
박원순 이사가 반한나라당 후보로 확고한 입지를 점하자 민주당은 제1야당임에도 한동안 자기 후보조차 선출하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내부 경선 끝에 박영선 후보를 선출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야권 단일화를 전제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무소속이라는 한계로 사전 여론조사와 달리 선거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박원순 후보도 야권 단일화를 추진했다(박원순 후보의 ‘정신적 민주당원’ 발언은 무소속 출마의 취약한 조직력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당 내외곽에서 범야권 통합을 주창해온 ‘혁신과 통합’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반한나라당 주도권을 상실한 민주당으로서는 단일화를 통해 야권 통합과 총대선 승리의 추동력을 이어나가고, 정당 조직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비민주당·시민사회 진영으로서는 당선을 통해 새로운 교두보를 구축한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결국 범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한 박원순 후보는 민주당 입당 대신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
많은 수의 정치학자들은 안철수-박원순 돌풍을 정당의 위기 증후, 즉 한나라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실망한 무당파층의 적극적 지지로 해석하기도 한다(경향신문이 지난 9월 3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지 정당이 없다’라는 응답이 무려 73.6%에 달했다. 그 이유로 ‘정당 간 차이가 없어서’가 41.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정당의 위기는 정당 일체감의 감소, 당원 수의 감소, 전통적 지지층의 축소, 정당에 대한 신뢰 추락, 투표율의 하락으로 그 증후가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들은 미디어 캠페인과 인물 중심 선거 또는 단기 이슈 중심의 선거를 펼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정당들은 당원 중심적 대중정당, 또는 이념 지향적 정당으로 발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현안과 민심을 좇는 선거 중심적 정당으로 변모하게 된다. 선거 승리에 전념하는 ‘선거전문가 정당’은 이념이나 정책적 정체성보다는 더욱 많은 유권자로부터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포괄적 호소에 치중하게 되며, 이러한 정당들의 경쟁구도는 자연히 중도 지향성을 띤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정당들이 정책적 공조보다는 인맥과 파벌에 의해 구성된 정당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촉진된다.
이처럼 이념이나 당원을 근간으로 하는 정당 구조가 안착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명망가 중심의 정당이 복수로 존재하고 선거 시기에 명망가들 간 합의로 선거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은 현대 인민주의의 일반적 현상이다. 이들은 정당을 기반으로 삼지 않더라도 대중적 명망과 미디어의 힘을 활용하여 선거 자금과 운동원을 조직할 수 있다.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이사의 급부상은 이러한 정치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재와 같은 정당의 위기 속에서 인민주의는 고유한 이념이나 정책 대신 기술 관료적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치장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선호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박원순 이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정치선동가적 이미지보다는 NGO 출신 정책전문가 이미지가 더 강한 듯하다. 이처럼 반복과 변주를 거듭하며 형성되는 선거 카르텔은 결국 ‘전문가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보완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고, 그에 참여하는 정당도 그러한 경향성이 강화될 것이다. 또한 그에 편승하는 사회운동의 전략 역시 더욱 궁지에 처할 것이다.
박원순 후보는 선거 기간 ‘한나라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실망한 다수 시민’의 대표자로 자신을 이미지화했다. 이는 기성 정당이나 국가기구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운동이라는 표상을 통해 뒷받침된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기술 관료적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치장한 시민운동은 사실상 정부 여당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정치적행정적 ‘비정부기구’(NGO)로 변모했다. 이들은 사회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주체로 자신을 표상하는 한편 계급적 대중운동을 이익집단으로 부차화한다. 이들이 준거하는 자유주의적 논리에서 계급적 이해관계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다양한 준거집단 중 특수한 집단의 이해에 불과하며, 공공성과 공익이라는 보편적 이해관계에 비해 부차적이고 2차적인 지위를 가진다. 이들은 실용적·정책적 해결책을 통한 갈등의 해소를 지향하기 때문에 국가기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에 따라 시민운동은 전문적 지식에 기초한 정책의 입안과 갈등의 중재를 일상화하는 전문가주의 또는 공익소송과 같은 법률적 매개수단을 절대화하는 법률주의를 지향한다. 시민운동은 정당이 추천한 공직후보자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거나 선거에 출마할 후보자들의 인력 풀을 형성함으로써 정당의 충원적 기능까지 대행하기에 이른다.
재벌개혁 운동, 낙천낙선 운동, 기부 운동에 이르기까지 박원순 후보의 이력은 결코 ‘신자유주의 반대’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지지하고 보완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집행과 감독기능의 분화 △주주권리의 보장 등을 통한 자본시장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론을 적극 지지했다. 소액주주운동이 모태로 삼은 미국의 주주행동주의는 사실 연금기금이나 상호기금과 같은 기관투자가·금리생활자들의 이해를 대변한다. 실제로 참여연대는 타이거펀드나 템플턴그룹과 같은 초국적자본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소액주주운동을 전개했다. 소액주주운동의 수혜자는 노동자와 민중이 아니라 자본으로, 또 개미투자자가 아니라 기관투자가로 철저하게 국한된다. 기업지배구조 개혁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목표하고, 이는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국부유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지지한 주주행동주의와 금융자유화는 오늘날 세계 금융위기의 배경을 이룬다.
또 재벌개혁 운동과 함께 박원순 후보가 주력했던 낙천낙선 운동의 경우, 2000년 총선 국면의 쟁점을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심판에서 낙천낙선 대상으로 꼽힌 부패 정치인에 대한 심판으로 변경시켰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바꾸는가’라는 문제는 한 번도 제기되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바꿔!” 열풍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반면 위기에 몰렸던 정부와 집권 여당은 낙천낙선 운동에서 탈출구를 발견하였고 발빠르게 이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을 개혁세력으로 포장했다. 그 결과 정부 여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총선 후에 계속 강화해야 할 개혁정책으로 다시 자리매김 되었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불리기도 하는 아름다운 재단의 기부 운동은 기업과 부유층의 사회적 책임과 정의 관념에 호소한다. 혹자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재단과 같은 비영리조직(NPO)들은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아름답게 세탁’하는 역할을 하며, 이런 맥락에서 기업과 비영리조직은 전략적 상생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논리를 동원하더라도 기업이나 부유층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 투기를 통해 얻은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기업은 무노조 경영과 불공정 거래로 유명한 삼성전자와 포스코다.
이러한 노선에 대한 명확한 자기비판이 없다면 박 후보가 말하는 개혁과 복지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가 최근 TV 토론에서 한미 FTA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얼버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야권 단일화 효과
한편 이번 야권 단일화를 주도한 이들은 ‘후보 등록일 전에 단일화 방안에 합의함에 따라 단일화 효과를 극대화하고 감동을 주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내년 총·대선에서도 선거연합을 통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6.2 지방선거 이후 정형화된 야권 단일화는 선거 효능감이라는 차원에서 뚜렷한 가시적 성과를 산출하였고, 참여 주체들의 상호보상에 대한 기대감도 충족시켰다. 특히 정당 간의 협상을 중간에서 매개·조율·촉진할 수 있는 시민단체의 개입으로 선거연합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연합정치를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서 단순한 선거연합을 넘어 가치·정책연합의 지향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제출되기도 한다. 나아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과 같은 기존 정당이 대중의 새로운 정치적 요구와 이해, 감수성을 담아내지 못함으로써 정당에 대한 광범한 불신과 이반이 퍼진 상황에서, 박원순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정되는 것이 장차 정당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난 6.2 지방선거 이후 야권연대의 기본틀로 정형화된 후보 단일화는 이념·노선·정강을 초월하여 오로지 선거 승리를 위해 고안된 정치공학에 불과하다. 때로 ‘감동의 정치’로 표현되기도 하는 후보 단일화 기법은 사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정몽준 후보 간에 이뤄진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국민적 지지와 정치적 흥행을 목적으로 도입된 개방형 예비경선 방식의 후보 선출제도는 특히 정당체계의 위기를 표현함과 동시에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반 국민을 일정 비율로 정당의 후보경선 과정에 참여시키는 개방형 예비경선 제도(국민경선제)는 후보선출의 대표성 확대나 당내 민주화라는 표면적 목적과 달리 실상 각 정당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선거운동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선거전략 차원에서 도입된 것이다. 후보 경선과정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하는 것은 한편으로 민심을 반영하여 후보의 대표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미화되곤 하지만, 이는 정당의 이념·정책이나 당원의 의사를 무시함으로써 정당의 존재 의미를 무색하게 한다. 경선 과정에서 여론조사의 반영 비율이나 설문방식과 같은 세부규칙을 둘러싸고 후보 간에 극한 대립이 빚어지기도 한다.
또 국민경선제에 내재한 기술적 결함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가령 국민경선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의 참여율이 아주 낮고 또한 참여하는 유권자들의 성격도 편중된다면, 일반 유권자뿐만 아니라 정당의 지지기반을 이루고 있는 유권자들의 성격도 잘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국민경선에 여론조사를 반영할 경우 후보 선출 과정에 참여할 의사가 없는 사람의 의견도 후보 선출에 ‘무책임하게’ 반영하는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 여론조사에 대한 의존은 근본적으로 정당 내부보다 정당 외부에서의 높은 지지를 갖는 인물을 선호하게 되므로, 정치 엘리트의 육성과 충원이라는 정당 고유의 기능은 이제 더욱 위축된다.
그럼에도 민주당, ‘혁신과 통합’과 같은 이전 집권세력들은 ‘이념·노선·정파를 초월하여 한나라당이라는 공통의 적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다면 민생과 민주주의가 발전할 것’이라는 식의 전형적인 인민주의적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 번 그 위력이 확인된 야권 단일화 선거기법을 발전시켜 정계개편과 정권교체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한다. 이들은 당장 차기 총선에서 단일후보 경선 또는 연합공천 방식 등을 통해 반한나라당 선거연대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확보했다.
이와 관련하여 ‘혁신과 통합’은 재보선 직후 야권 통합을 본격화할 것이라는 구상을 최근 공개했다. 이와 함께 각 정치세력의 정체성 보장을 위해 통합정당을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고 내년 총선 이후 국고보조금을 당선자 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계획도 제시했다. 이들은 이번 야권 단일화가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통합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던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이번 선거를 기점으로 향후 야권 대통합 과정에서 민주당이 아닌 ‘혁신과 통합’이 주도권을 발휘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박원순 후보도 “민주당이 조금 더 앞으로 문호를 열고 저 같은 사람은 좀 더 많이 포함할 수 있는 혁신과 통합의 과정 거치면 나도 기꺼이 같이 갈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편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보수언론으로부터 ‘불임정당,’ ‘숙주정당’이라는 조롱을 들을 정도로 범야권 내 주도권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 야권 단일화로 인한 입지 축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고, 이것이 자칫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등이 당장 신설합당 방식의 통합 절차를 밟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대신 이번 야권단일화와 같은 선거기법을 통해 선거 카르텔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박원순 후보 지지
일반적인 정당의 위기에 조응하여 민주노동당도 최근 수년간 ‘집권 전략’으로 상징되는 탈이념화의 길을 걸어왔다. 민주노동당은 핵심 지지층의 결집과 동원보다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선 변화를 시도했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서는 당의 조직적 토대를 이루는 노동자·농민·빈민 대중운동의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정당 역시 현실의 선거정치에 치중하면서 정치공학이나 여론조작에 유연하게 적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야권 단일화를 도입한 데에 이어 올해 정당통합과 선거연합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선거에 독자 출마하여 완주 패배하기보다는 야권 단일화로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일정한 지분을 갖고 공동지방정부에 참여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비민주당 개혁세력이 당선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를 민주당의 주도권을 무력화하고 향후 선거연합의 협상력을 높이는 기회로 본 것이다. 최규엽 후보 개인도 ‘질 높은 야권 단일화’를 언급하면서 ‘서울시장 선거에서 공동정부가 잘 될 경우 내년 대선에서 연립정부도 구성해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는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최초로 실현된 민주노동당의 후보 단일화와 공동정부 노선이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야권 단일화로 당선된 경상남도, 인천시, 강원도, 서울·경기 기초단체 등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수준의 공동정부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경상남도에서 민주노동당은 강병기 후보가 김두관 후보와 단일화 한 대가로 정무부지사를 맡고 있고 공동지방정부 성격으로 구성된 민주도정협의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를 유연한 선거·정책연합의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여타 지역은 아직 공동정부 구성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지역이 많고 구성된다 하더라도 지방자치단체장의 성향에 따라 공약 실행이 좌지우지되어 선거용으로 그친다는 지적도 있지만, 정부 참여와 견제를 통해 실리를 획득했다는 식의 평가가 주를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후보 단일화와 이를 대가로 한 공동정부 지분 참여 보장을 실용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동지방정부는 연립정부의 예시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일 연립정부 구성이 현실화된다면 민주노동당과 그로 대표되는 민중운동이 집권세력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재 야권 단일화를 주도하는 민주당·국참당이나 그 외곽에 포진한 ‘혁신과 통합’, 또는 이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시민단체 등 전 집권세력은 정권 탈환을 위해 민중운동을 포섭하려고 시도해왔다. 이들은 평상시 독자적인 정당 체계로 존재하던 세력들을 선거 시기에 정치협상을 통해 선거 카르텔을 형성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민주당이 제안하는 ‘빅 텐트론’이나 ‘혁신과 통합’이 제안하는 ‘백지신당론’은 그 속에서 누가 어떻게 주도권을 쥘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진보정당과 민중운동을 자신의 좌익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유사한 효과를 지닌다. 형식적으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선거 카르텔이 반복된다는 것은 범야권이라는 큰 우산을 공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서울본부)은 야권 단일 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참여경선 선거인단 모집과 야권 단일 후보 선거운동에 매진하였다. 후보 단일화 정책 합의문 중 ‘서울시와 산하기관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안정적인 노정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하며, 서울시 등에 노동복지센터를 설립하여 고용안정과 노동복지를 실현한다’는 조항에 근거를 둔 것이다. 민주노총은 박원순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 속에 그와 마찬가지로 무소속 후보가 도지사로 당선된 경상남도의 사례를 염두에 두었다. 또 인천시가 공동정부 구성 이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을 추진하고 유관기관 노동조합 해고자를 복직시킨 사례도 참고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방침은 진보정당 간 통합이 무산되고 또 진보정당 후보가 독자 출마하지 않은 상황에서 조합원들의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차선책이라는 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야권 단일화 과정에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닌다. 우선 주어진 경선 틀에 참여한 것은 그 자체로 민주노동당의 야권 단일화를 추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작년 지방선거에서 수립된 민주노총 정치방침, 즉 ‘야권 단일화 후보는 민주노총 지지후보로 한다’는 정치방침이 지닌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한 것이다. 이 방침은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이를 배타적으로 지지해온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일순간 개혁세력에 대한 직간접적 지지로 둔갑시킨다. 특히 시민사회 진영을 대표하는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어 민주노총은 지방정부에 대한 개입과 의존도를 훨씬 높일 것이다. 이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점점 더 당면한 실리적 쟁점에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잠시, 미국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보자. 미국노총(AFL-CIO)과 민주당의 제휴가 야기한 가장 심원한 효과는 노동조합을 사회운동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것, 또는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정당 정치인에 대한 로비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합원에게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활동은 자기 조합원의 실리적 이익만 추구하는 것으로 협소화된다. 민주당 의존적 노동조합 활동은 노동조합의 성격 그 자체를 협소한 이해관계 집단으로 변모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이 야권 단일화와 같은 정치노선을 지지한다면 이는 노동자운동의 주류가 향후 미국식 자-로(自勞, lib-lab) 공조로 재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현재 민주노총 집행부의 다수를 점하는 한 정파는 숫제 ‘집권을 위한 노동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 하반기 사업계획은 2012년 대선에서 ‘진보적 정권교체’를 명시하였고 이는 다가올 노동자대회에서 공식 제안될 예정이다.
민중운동이 야권 단일화 프레임 속에서 독자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내년 정치 국면에서 민주당이나 ‘혁신과 통합’이 주도하는 선거 카르텔의 일부로 흡수 통합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는 정확히 계급의 해체를 의미하며,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대한 민중적 대안의 건설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운동의 정치적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시급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