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운동의 이론과 역사
보건의료운동의 이념 역사 현실 -1
보건의료팀은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과제와 전망을 밝히기 위한 보건의료팀의 입론을 마련하기 위해 2009년 세미나를 시작으로 2010년부터 교안을 작성하는 집단작업을 진행하였다. 교안의 구성은 크게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역사와 과제로 이루어진다.『사회운동』에서는 이번 호부터 총 4회에 걸쳐 그간 작성한 교안을 축약하여 연재한다.
기획연재 1
I.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2. 법인자본주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3. 한국보건의료체계의 역사 :1945년부터 1989년까지
기획연재 2
II.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
2. 자본주의적 의료 분석
3. 생태학적 관점
4. 페미니즘적 관점
기획연재 3
III. 남한 보건의료운동의 역사
1. 보건의료운동의 시작과 발전
2. 보건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대안세계화 운동
3.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보건의료운동의 한계
기획연재 4
4.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보건의료운동의 모색
5. 보건의료운동의 현 정세와 과제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자본주의 사회의 보건의료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치료한다. 질병의 치료는 노동자에게 필요하므로, 이러한 기능을 통해 의료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지배와 통제의 기능을 한다. 자본주의적 질병은 자본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며 보건의료는 단지 사후적으로 대처할 뿐이다. 보건의료가 질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 비효율성이 증대하며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보건의료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보건의료의 영역 또한 확대되며, 자본주의적 임노동의 확대재생산은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질병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건의료도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편입된다.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가. 산업화·도시화와 감염성 질병의 위협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유례없는 인구증가가 나타났고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주택난이 심화되었다. 도시외곽의 공장을 중심으로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대공업과 급속한 도시화는 만성적인 빈곤, 불결한 상하수도 및 통풍시설, 유해한 작업환경 등을 양산하여 감염성 질병이 유행할 수 있는 생태적 조건을 만들었다. 특히 콜레라가 1831년부터 유럽 전역을 휩쓸었는데 이는 대중적 공포와 사회적 혼란을 증폭시켰고 착취에 대한 저항과 결합하여 대중봉기를 야기했다. 이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최초의 대응은 검역과 방역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응은 민족 간 교류와 무역을 제한했기 때문에 심각한 경제문제를 초래했다. 그래서 도시의 위생조건을 개선하는 일련의 사회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콜레라의 유행이 국가의 개입을 직접적으로 가져온 것은 아니었고, 노동자의 질병이 자본축적을 저해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부터 공중보건이 도입되었다.
나. 사회의학과 위생개혁 운동
1840년대에 이르러 질병의 원인을 빈곤과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찾고자 하는 사회의학이 나타났다. 이것을 선도한 것은 엥겔스와 비르효였다. 엥겔스는 질병의 원인을 계급구조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했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영양상태 및 주거환경과 감염성 질병의 상관관계를 지적했으며 계급 간 영아사망률의 차이, 작업환경과 질병의 관계를 조사했다. 비르효는 사회의 결함이 감염성 질병의 필연적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역학이론을 발전시켰으며, 감염성 질병을 예방·제거하기 위해서는 의학적 치료만큼이나 사회적 변화가 중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지배계급은 1830년대 이래의 대중봉기와 사회의학의 등장을 콜레라만큼이나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이에 대응하여 위생개혁운동이 출현했다. 영국의 왕립구빈원 자문 위원이었던 채드윅은 사회의학과 반대로 빈곤의 원인을 질병에서 찾았다. 개인들은 질병으로 인해 노동능력과 생계수단을 상실해서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병을 일으키는 위생조건을 개선함으로써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1848년에 공중보건법이 제정되었다. 채드윅의 위생개혁운동은 생태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의 접합이라는 19세기적 질병에 대한 부르주아적 대응이었으며, 대중의 저항을 순치하고 사회의학의 관점을 기각하는 것이었다.
사회의학의 관점은 이후 세균학의 확립에 따른 생의학의 체계화 속에서 위축되었다가 칠레의 아옌데에게 계승된다. 1939년 인민전선정부의 보건장관으로 재직하던 아옌데는 질병을 사회적 조건의 박탈에 따라 나타나는 개인들의 장애로 개념화하고, 사회의 광범위한 구조적 변혁을 동반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보건의료 내에서의 개혁 조치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전반기에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의학은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보건의료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다. 의학의 지체와 공중보건의 확산
19세기에는 과학적인 의학 지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당시의 보건의료는 사실상 병원을 중심으로 한 빈민구제사업의 일환이거나 감염성 질병에 대응하는 공중보건의 형태였다. 위생개혁운동으로 공중보건에 대한 관념이 점차 확산되어 질병의 유행이 비위생적 생활환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 널리 인식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대도시마다 도로가 포장되었고, 상하수도 시설이 확충되었으며 가정에서의 세탁과 목욕이 널리 보급되었다. 공중보건은 장기적으로 감염성 질병의 유행에 따른 노동력 고갈의 위협을 해소하고, 개별 자본이 부딪히게 되는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저항을 균등화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
2. 법인자본주의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가. 감염성 질병의 감소와 비감염성 질병의 증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면서 생활환경 및 영양상태가 개선되었고, 항생제와 스테로이드의 발견 등 치료의학이 발전하면서 감염성 질병은 감소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노동·생활조건의 변화로 야기된 비감염성 질병이 증가했다. 19세기 말 이후 미국의 산업자본은 소유와 관리를 분리시키는 법인적 형태로 변화하면서 구상과 실행을 분리시키는 노동과정의 혁신을 수반했다. 이러한 혁신의 핵심은 포드주의라고 불리는 이동조립라인인데, 이는 노동자의 숙련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노동은 기계의 흐름에 실질적으로 통합되었고, 노동자계급은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장애, 불만, 불안, 압박감, 불쾌감 등 이른바 스트레스로 통칭되는 새로운 병리적 양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아가 스트레스는 수면장애, 식욕부진, 심장 박동 수 증가, 생리적 긴장과 우울증, 과민증과 같은 증상으로 발전했다. 한편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 상승은 생활조건의 변화를 일으켰고, 이른바 ‘풍요의 병’으로 심혈관계질환, 궤양, 암 등을 가져왔다. 나아가 노동·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출현한 질병들은 진통제, 진정제, 커피, 담배, 암페타민과 같은 약물의 소비를 증가시켰다. 비감염성 질병은 감염성 질병과 유사하게 확산되었고, 질병이 일상화·만성화 되듯이 보건의료 또한 일상화·만성화 되었다. 이에 따라 질병의 책임을 개인적 행위의 탓으로 돌리고, 질병의 해결을 개인적 교정으로 환원하는 희생자 과실론이 등장했다.
나. 현대의학과 대중보건의료의 확립
체계적인 의학지식이 발전하면서 미국에서는 도제교육을 지양하고 의학교육을 표준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플렉스너 개혁이라고 불리는 의학교육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의료전문직의 양성과정과 의료제도를 표준화하고 통제하려는 법인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존스홉킨스 모델을 통해 실험의학(연구실), 의료제도(병원), 의학교육(대학)을 결합하는 현대적 의학연구·교육제도가 정착되었고, 표준화된 교육과정과 의사협회의 면허를 통해 공인된 의료전문직이 출현했다. 빈민구호의 기능을 하던 병원은 대학에 기반을 두고 진단과 치료의 기능을 수행하는 현대의료의 중심으로 완전히 변형되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중산층이 의료비용의 증가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병원은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병원의 주도하에 사적 보험에 의한 제3자 지불방식이 도입되었다. 사적 보험이 도입되면서 중산층이 다시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까지 병원 이용이 확대되었다. 기업주들은 사적 보험을 제공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보건의료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이를 구실로 임금인상과 급진적 노동자운동을 통제했다. 현대의학에 따른 치료비용은 노동자계급에게 큰 부담이었기 때문에 보험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한 대중보건의료의 형성은 동시에 보건의료를 이윤추구를 위한 새로운 산업의 영역으로 편입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법인적 형태와 달리 영국과 소련에서는 국가적 형태의 보험제도가 병원과 결합하여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되었다. 영국은 1911년에 강제보험제도인 국가의료보험을 도입했고, 1945년 노동당 정부는 그 적용범위와 급여를 확대하여 국가보건서비스를 확립, 무상의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의료전문직의 지위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타협에 기초한 것으로, 일반의들이 보건의료 예산의 상당 부분을 영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소련에서는 1917년 혁명 직후 무상의료를 실시했으나 내전과 경제적 곤란 속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1930년대에 중화학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보건의료제도가 다시 구축되었는데, 보건의료서비스를 전문화·중앙 집중화하고 대형병원 중심으로 재편했다. 국유화를 통해 보건의료자원의 분배방식을 변화시켰지만, 의료의 성격과 내용 면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다. 의료보장제도의 발전
1) 영국 NHS의 형성
의료보장제도는 영국, 미국, 유럽 복지국가에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결합된 양상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국가가 시민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야 하고 이를 위한 일차적 수단은 높은 수준의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합의가 존재했다. 따라서 완전고용은 미국에서 스웨덴에 이르는 다양한 나라들에서 지향해야 할 일종의 원칙이었다. 완전고용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직접임금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복지로 여겨졌다. 반면 고용을 통해 소득을 획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출의 형태로 제공되는 간접임금은 완전고용에 비해 부차적인 위상을 가졌다.
1930년대 이후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산업적 팽창은 산업예비군을 급속하게 흡수함으로써 노동자의 ‘사회적 권력’을 증가시켰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자는 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인정받았다. 노동조합은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힘을 키운 결과 고용의 안정성을 확보했고,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며, 나아가 노동자의 대표가 생산과정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자본의 대립은 1946~1948년 사이의 제너럴 모터스(GM)에서 파업의 물결로 나타났다. 이에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수용했고, 물가상승분 뿐 아니라 생산성 증가에도 비례하는 임금의 인상을 약속했다. 대신 노동자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양보를 하였으며, 이러한 타협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에서 제거되었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노조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임금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 인상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아들였으며, 그 대가로 국가를 매개로 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확장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의 코포러티즘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생산성 임금과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에서는 노동당과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삼자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는 1940년대 후반 ‘전후의 합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전후 장기적인 완전고용의 결과로 노동계급의 힘이 증가하였고 이는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형성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임금인상 투쟁을 자제하는 대가로 ‘사회적 임금’의 개선이 협상대상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1948년 국가보건의료서비스제도(NHS)를 성립하게 한다. 영국노총(TUC)의 권고로 1941년 만들어진 베버리지 위원회는 2년 후 자신들의 활동 결과를 베버리지 보고서로 발간한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전후 재건될 복지국가의 청사진이었으며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보고서에서 NHS는 복지국가 사회정책 중 하나가 아니라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서독, 스웨덴 등 서유럽 복지국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NHS가 성립한 데는 전쟁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개전에서 종전까지 독일과 전선을 형성하여 독일로부터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전쟁 중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정부가 이들의 치료를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고, 무료의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의료서비스가 즉각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에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병의원 및 의료 인력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불가피하였다. 전시 구축된 전국응급의료서비스체계는 이후 NHS의 토대가 된다.
NHS가 실제로 도입이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노동당이 집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입각하여 복지국가를 만들어나갔다. 1945년부터 6년간 집권하면서 노동당은 국유화 강령을 시행하는데, 그 중 공공서비스로서의 의료가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러나 사실 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게 된 것은 1차 세계전쟁 이후 영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면서 기존에 노동자계급의 대표를 자임했던 자유당과 노조 사이의 공조체제가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의 국유화는 더 이상 부르주아지가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당이 노동자의 협력을 설득하면서 헤게모니를 상실한 자본주의 국가를 관리한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노동당의 국유화 방식은 무상몰수가 아니라 유상매입을 통한 것으로 부르주아 공공경제학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2) 미국은 왜 전국민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하지 못했는가
미국에서도 전국민의료보장체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미국에서는 정당의 정강 정책보다 민간단체의 입법 활동이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쳤는데 민간단체인 미국 노동자입법협회(AALL)가 1915년 최초로 국민의료보험 법안을 제안한 것이 미국에서 전국민의료보장운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제안은 의사 단체를 비롯한 여러 조직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의사협회의의 경우 AALL의 노력과 지도부의 입장이 결합하여 초기에는 지도부를 중심으로 전국민의료보험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의료보험을 정부가 통제하는 문제와 의사들에 대한 진료비 보상을 사람당 정액제로 하자는 주장에 반발하여 결국 반대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사회보장제도의 발전에 좌파 정당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 좌파 정당의 영향은 미미했다. 심지어 노동운동의 입장은 오히려 전국민의료보험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미국노동연맹(AFL)은 강제적인 의료보험이 불필요한 국가의 개입을 조장하고 건강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반대 입장에 섰다.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임금이나 노동조건 등에서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특히 사용자가 제공하는 복지 프로그램이 확대되자 전국민의료보험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었다.
또한 19세기를 관통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노동조합 조직이었던 AFL은 결성 당시부터 이민자, 흑인,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한 백인 숙련공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고 이 때문에 기업적 노동조합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격은 전국민의료보험 운동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를 좌절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체 노동자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고 정치 사회적 의제를 기피하는 기업 중심적 노동운동이 이후 고용을 기초로 한 민간보험이 확산, 정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두 번째 대대적인 시도는 1930년대 대불황 시기에 런딘 상원의원이 사회보장에 대한 법률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1940년대 중반과 후반에 트루먼 행정부에서의 시도가 있었다. 당시 미국노총(AFL-CIO)이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대중적 참여나 대중운동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 상층 정치권 내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못했고 미국 의사협회의 언론매체 광고, 의원들에 대한 편지, 일선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편지쓰기 운동과 같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에 압도당했다. 이런 반대 운동과 당시 냉전체제로 접어드는 정치 환경은 전국민의료보장을 ‘사회주의 의료’로 낙인찍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의료보장의 주된 방법은 사용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형태의 민간보험이었다. 노동자들에 대한 민간보험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협상이나 집단 교섭의 산물이었다. 뉴딜정책은 노사 간의 단체교섭을 의무화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정부가 임금을 통제하는 대신 일정 수준의 부가급여를 허용했다. 이런 노사관계의 변동은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의료보장을 제공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민간보험이 만들어지는데 이들은 병원과 진료소 등 자체 공급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일정액의 보험료를 받고 정해진 모든 서비스를 포괄적으로 제공하는 ‘정액 보험료-포괄적 서비스’방식을 택했다. 이런 방식이 1970년대 이후 미국 의료보장의 주된 방식으로 등장하는 ‘관리의료’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미 전국 노동자의 3/4이 이런 방식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이러한 민간보험의 성장은 노동운동이 전국민의료보험체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민간보험 또한 전국민의료보험운동이 민간보험의 유지나 성장을 막을 우려가 있는 정책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1915년 AALL이 전국민의료보험 입법안을 제출할 때까지 민간보험회사의 영업에서 의료가 차지하는 상품은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성장을 했던 것이다.
3.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 : 1945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의 보건의료체계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빠르게 변화해왔다. 20세기 전반에는 감염성 질환에 대응한 공중보건, 위생이 발달하였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발달과 함께 1977년 사회보험 형태의 의료보험을 실시한다. 이후 의료보험의 확대로 의료기관의 이용은 점차 일반화되고 병원 수는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된다. 이 과정을 통해 민간 부문 중심의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된다.
가. 미국식 보건의료제도의 이식 : 1945년~1961년
의학, 의료기술은 발전하지만 의료공급체계, 보건의료제도는 방치된 시기다. 이는 미국식 보건행정체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을 따로 설치했다. 그 후에 보건후생부로 독립 승격되었다. 보건후생부는 공중보건업무를 주로 담당했고 의료서비스는 민간부문에서 담당하는 자유방임적 구조였다. 500여 개의 보건진료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국민들에게 구호차원의 서비스만 제공하였고 차별현상이 극심했다. 노동기준법(1953)으로 출산 휴가제등 부분적 모성보호가 시작되었다. 전염병예방법(1954)을 제정해 국가적 전염병 관리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의학과 의료기술은 상대적으로 발전하였다. 1951년 의료업자 전문 과목 표방 허가제가 시행되었다. 일제는 경성제대만 6년제로 운영하여 학술연구를 지향하고, 나머지 학교는 4년제 교육을 통해 의사를 양성했으나, 건국이후 모든 의대가 현행 6년제가 된다. 이는 의사공급이 부족하게 된 원인이었다. 1952년 세계보건기구는 일차의료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준의사제도를 권고하였으나 정부와 의대교수들이 반대한다. 대신 충족되지 않는 일차보건의료의 수요를 약사가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약사가 처방전 없이 조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 재정에서 보건의료비 지출비율은 1%로 건강문제를 개인적 책임으로 전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나. 제도의 확립과 민간 중심 의료공급체계의 형성 : 1961년~ 1977년
1961년 위생관련 법규, 1962년 의료법, 보건소법, 식품위생법, 1963년 사회보장 관련 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예방접종의무화, 의료보험법이 재정되었다. 제도는 정비되었으나 의료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한 공적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다. 일제 시대 때 설립된 도립병원을 포함하여 시·도립병원을 추가 설립하였으나 종교재단이나 사립대학 등이 소유한 사립재단 병원의 증가추세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1949년에서 1971년까지 국공립병원이 1.6배 증가하는 동안 사립재단병원은 7.3배 증가하였다. 병상 수뿐만 아니라 시설, 인력과 같은 질적인 측면에서도 사립병원이 국공립병원을 앞서기 시작한다.
개인의원이 의료서비스 공급의 주축을 이루는 시대였다. 당시에는 국민 대다수가 가난하고, 의료보험이 없었기 때문에 입원 유효수요가 적었다. 병상 이용률은 50%를 밑돌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의료요구를 외래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 외래 수요가 주를 이루었다. 외래 수요에 맞춰 의사들은 대부분 개인의원을 설립하였다. 전체의사 중 70%가, 전문의 중 60%가 개원의사였다. 1960년대 한국 병원의 보수가 적은 것도 개원을 선호하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전문의는 과잉인데 의료보험의 부재로 병원비가 비싸 병원에 대한 환자의 유효수요는 부족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에서 이민 요청이 있자,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약 3,500명의 의사가 이민을 했다. 이는 당시 전체의사의 1/4에 해당한다. 종합병원도 수익을 위해서 외래에 집중하면서 개인의원과 역할이 겹치기 시작한다. 병원의 외래 환자는 1960년에 입원 환자의 2배에서 1971년에는 4~5배로 증가한다.
개인의원을 설립한 의사들 중 일부는 의료자본형성을 주도해서 자본가가 된다. 개원의가 종합병원의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폐쇄형 체계에서 개원의사가 병상을 갖춰 준병원 기능을 하다가 자본을 모아 시설을 확대하는 방식의 의료자본형성이 이루어진다. 지역사회의 의료수요에 알맞은 규모로 재원이 투자되고 병원이 설립되는 외국과 달리, 민간의료의 이윤추구논리가 주도하면서 무질서한 의료공급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인해 한국 민간의료기관의 다수가 법적으로 비영리법인이지만 실제로는 법인 이사장이나 재벌 기업의 오너 혹은 그 가족이 지배하는 형태가 되었다.
다. 법정의료보험의 시작과 대중보건의료의 형성 : 1977년~1989년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시작된다. 박정희 정부가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된 이유는 대중의 정치적 불만을 무마하기위한 통치성 확보의 필요라고 볼 수 있다. 노동, 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른 의료수요에 부응해야 할 필요도 있었고, 발전주의시기 중공업 발전에 필요한 숙련 노동자의 건강을 일정 정도 확보해야 할 자본의 필요도 존재했다. 처음 도입된 의료보험은 전체 인구의 8.6%에 해당하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는 역진적 정책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조합방식이다. 지역, 직장별로 조합을 만들어서 독립적으로 재정을 운영하게 하고, 법정급여는 균등하나 부가급여는 조합에 따라 차등을 주는 방식이다. 조합방식은 전 국민을 포괄하지 못하는 선별적 방식이면서, 재정 위험을 분산하는 기능도 제한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정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조합장에 임명하면서 의료보험조합들은 지배벨트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지속적으로 대상이 확대되어 1989년에 전국민의료보험이 달성된다. 이는 근본적 개혁은 아니고 점증적, 추가적 개혁에 가깝다. 1988년 농어촌 지역의료보험의 경우 직장조합중심의 의료보험제도에 138개의 지역의료보험조합을 추가하는 것으로, 1989년에 도시자영업자를 위한 117개의 지역의료보험조합을 추가하는 것으로 완성한다.
보험 확대로 인해 의료수요가 증가한다. 그러나 정부는 공공의료기관 공급을 확대하기 위한 재정 부담을 늘리지는 않고 민간에 대한 차관과 금융지원을 통해서 민간의료기간 위주의 공급체계를 촉진한다. 1980년대 초 의료취약지역 병원건립사업이 그 첫 번째 예다. 67개 의료취약지역을 설정하여 건립희망자가 부지를 구입하면 건축비는 금융기관에서 장기융자를 해주고, 장비는 일본해외개발자금(OECF)차관을 이용하여 현물로 지원하였다. 6,580병상이 건립되는데 주로 의료법인에 융자를 준다. 아산재단, 대우의료재단에서 건립을 하는데, 초기부터 문제가 나타나서 대도시 주변 지역이 아닌 병원들은 인력부족, 운영자금부족, 수요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민간의료시설에 대한 정부 지원투자의 두 번째 예가 재정투융자특별회계자금과 농어촌특별회계 자금 지원을 통한 민간병원 확충지원사업이다. 이전 사업의 실패를 반영하여 41개 군 지역에 한정해서 100병상 이내로 운영부담을 줄이고 인력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의사를 건립자로 선정한다. 자금은 농어촌 발전기금을 통해 장기 저리 융자를 해준다. 이들 사업으로 인한 병상증가 기여도는 1994년 26.9%, 1995년 48.2%, 1996년 45.4%등 우리나라 병상증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의과대학 신설 남발을 통해 그 수가 증가한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두 가지 측면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병원시장에서 규모를 계속 확장시킨다. 첫째, 학교법인 부속 수익사업체 형식으로 설립이 허가되어 세제지원을 누릴 수 있었다. 둘째, 의사인력에 대한 자본통제력을 갖고 있었다. 교수라는 지위로 숙련인력을 안정적으로 고용할 수 있었고, 전공의를 통해 의사인력을 저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대된 사립대학 부속병원은 2002년 전체 종합병원 병상의 1/3을 차지하고, 의원, 2차병원의 생산기지 역할을 한다. 정부의 의사 공급 확대정책 오류로 인해 거대한 민간의료기관과 그 생산기지가 양산된 것이다.
공공병원 민영화는 매각, 운영권 이양 혹은 외주, 독립채산제 도입, 시장자유화, 규제철폐, 국가지원의 축소 등의 형태로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다. 시·도립병원은 1971년부터 지방공기업으로 운영되었는데 만성적 경영 적자 등을 비판받다가 1981년 지방공사체계로 전환된다. 이러한 지방공사의료원화는 독립채산제를 통해 수익성을 고려한 운영을 하게 되어 민간병원과 차이가 없어진다. 비슷한 흐름으로 1978년 국립 서울의대 부속병원의 특수법인화, 1987년 시립영등포병원 민간위탁 등이 있다.
[표 1] 의료기관의 종별 추이 연도
이러한 민간 중심의 의료자원개발을 지원한 결과, 1977년에서 1987년까지 국공립병상의 비율이 53.2%에서 29.9%로 줄어들었다. 의료자원개발이 본격화된 이 시기에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공적 의료재정체계의 결합이라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특수한 성격이 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 결합은 의료전달체계를 왜곡한다. 개인의원의 성장세는 계속되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위기를 맞으면서 민간병원이 주도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경제력 상승과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해 입원수요가 폭증하고 정부가 병상 증대 장려, 지원을 한 결과다. 의료기관의 종별 증가 추이(표 1)에서 종합병원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민간의료기관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종별 시설 비율뿐만 아니라 진료의 성격도 왜곡된다. 종합병원의 외래 점유율은 건강보험을 통한 의료보장이 확대될수록 더욱 심해진다. 의료서비스는 적절한 전달체계를 갖춰야 지역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 필수서비스인 일차의료는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배분하여 형평성을 높이고, 고도의 의학기술이나 자원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들은 특정 의료기관에 집중시켜서 분화와 전문화, 자원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병원은 중증 입원 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하고, 의원은 경증 외래 환자를 진료하면서 중증환자는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의료전달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입원수요가 적은 상태에서 민간병원이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래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 병원 운영의 재정적 책임과 통제를 공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최소한 보험정책을 통해서라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병원의 외래 진료에는 수가를 적게 책정하고, 입원 진료는 수가를 많이 책정하는 방식이 그 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미흡했고, 1979년 전체 의료기관 외래 진료비의 9.5%를 차지하던 종합병원이 1984년에는 31.3%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달체계 왜곡이 이 시기부터 이미 구조적으로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공적 의료재정체계의 결합이라는 한국 대중보건의료의 특수한 성격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공적 성격을 갖는 의료재정체계와 사적 성격을 갖는 의료공급체계가 서로를 확대시키면서 양 체계의 위기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은 공급자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해서 지속적인 재정위기, 정당성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미 수 천억 원의 자본규모를 갖춘 기업으로 성장한 병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면서 의료전달체계 확립이나 고가의료장비 구입 규제와 같은 정책이 계속 실패한다. 낮은 보장성은 보험제도가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제도가 아니라 ‘의료비를 할인 받을 수 있는’, 단순한 의료이용 및 소득보장의 장치로 이해되었다. 한편 공급체계는 거시적 비효율성이 증가하게 된다.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되어 효과적으로 질병에 대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한 경쟁 속에서 병의원은 경영위기에 처한다.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공급자는 건강보험공단에 급여 항목의 수가 인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고가진단장비, 상급병실, 선택진료 등 비급여 의료를 확대한다
기획연재 1
I.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2. 법인자본주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3. 한국보건의료체계의 역사 :1945년부터 1989년까지
기획연재 2
II.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
2. 자본주의적 의료 분석
3. 생태학적 관점
4. 페미니즘적 관점
기획연재 3
III. 남한 보건의료운동의 역사
1. 보건의료운동의 시작과 발전
2. 보건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대안세계화 운동
3.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보건의료운동의 한계
기획연재 4
4.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보건의료운동의 모색
5. 보건의료운동의 현 정세와 과제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자본주의 사회의 보건의료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치료한다. 질병의 치료는 노동자에게 필요하므로, 이러한 기능을 통해 의료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지배와 통제의 기능을 한다. 자본주의적 질병은 자본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며 보건의료는 단지 사후적으로 대처할 뿐이다. 보건의료가 질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 비효율성이 증대하며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보건의료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보건의료의 영역 또한 확대되며, 자본주의적 임노동의 확대재생산은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질병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건의료도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편입된다.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가. 산업화·도시화와 감염성 질병의 위협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유례없는 인구증가가 나타났고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주택난이 심화되었다. 도시외곽의 공장을 중심으로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대공업과 급속한 도시화는 만성적인 빈곤, 불결한 상하수도 및 통풍시설, 유해한 작업환경 등을 양산하여 감염성 질병이 유행할 수 있는 생태적 조건을 만들었다. 특히 콜레라가 1831년부터 유럽 전역을 휩쓸었는데 이는 대중적 공포와 사회적 혼란을 증폭시켰고 착취에 대한 저항과 결합하여 대중봉기를 야기했다. 이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최초의 대응은 검역과 방역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응은 민족 간 교류와 무역을 제한했기 때문에 심각한 경제문제를 초래했다. 그래서 도시의 위생조건을 개선하는 일련의 사회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콜레라의 유행이 국가의 개입을 직접적으로 가져온 것은 아니었고, 노동자의 질병이 자본축적을 저해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부터 공중보건이 도입되었다.
나. 사회의학과 위생개혁 운동
1840년대에 이르러 질병의 원인을 빈곤과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찾고자 하는 사회의학이 나타났다. 이것을 선도한 것은 엥겔스와 비르효였다. 엥겔스는 질병의 원인을 계급구조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했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영양상태 및 주거환경과 감염성 질병의 상관관계를 지적했으며 계급 간 영아사망률의 차이, 작업환경과 질병의 관계를 조사했다. 비르효는 사회의 결함이 감염성 질병의 필연적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역학이론을 발전시켰으며, 감염성 질병을 예방·제거하기 위해서는 의학적 치료만큼이나 사회적 변화가 중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지배계급은 1830년대 이래의 대중봉기와 사회의학의 등장을 콜레라만큼이나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이에 대응하여 위생개혁운동이 출현했다. 영국의 왕립구빈원 자문 위원이었던 채드윅은 사회의학과 반대로 빈곤의 원인을 질병에서 찾았다. 개인들은 질병으로 인해 노동능력과 생계수단을 상실해서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병을 일으키는 위생조건을 개선함으로써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1848년에 공중보건법이 제정되었다. 채드윅의 위생개혁운동은 생태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의 접합이라는 19세기적 질병에 대한 부르주아적 대응이었으며, 대중의 저항을 순치하고 사회의학의 관점을 기각하는 것이었다.
사회의학의 관점은 이후 세균학의 확립에 따른 생의학의 체계화 속에서 위축되었다가 칠레의 아옌데에게 계승된다. 1939년 인민전선정부의 보건장관으로 재직하던 아옌데는 질병을 사회적 조건의 박탈에 따라 나타나는 개인들의 장애로 개념화하고, 사회의 광범위한 구조적 변혁을 동반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보건의료 내에서의 개혁 조치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전반기에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의학은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보건의료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다. 의학의 지체와 공중보건의 확산
19세기에는 과학적인 의학 지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당시의 보건의료는 사실상 병원을 중심으로 한 빈민구제사업의 일환이거나 감염성 질병에 대응하는 공중보건의 형태였다. 위생개혁운동으로 공중보건에 대한 관념이 점차 확산되어 질병의 유행이 비위생적 생활환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 널리 인식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대도시마다 도로가 포장되었고, 상하수도 시설이 확충되었으며 가정에서의 세탁과 목욕이 널리 보급되었다. 공중보건은 장기적으로 감염성 질병의 유행에 따른 노동력 고갈의 위협을 해소하고, 개별 자본이 부딪히게 되는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저항을 균등화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
2. 법인자본주의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가. 감염성 질병의 감소와 비감염성 질병의 증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면서 생활환경 및 영양상태가 개선되었고, 항생제와 스테로이드의 발견 등 치료의학이 발전하면서 감염성 질병은 감소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노동·생활조건의 변화로 야기된 비감염성 질병이 증가했다. 19세기 말 이후 미국의 산업자본은 소유와 관리를 분리시키는 법인적 형태로 변화하면서 구상과 실행을 분리시키는 노동과정의 혁신을 수반했다. 이러한 혁신의 핵심은 포드주의라고 불리는 이동조립라인인데, 이는 노동자의 숙련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노동은 기계의 흐름에 실질적으로 통합되었고, 노동자계급은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장애, 불만, 불안, 압박감, 불쾌감 등 이른바 스트레스로 통칭되는 새로운 병리적 양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아가 스트레스는 수면장애, 식욕부진, 심장 박동 수 증가, 생리적 긴장과 우울증, 과민증과 같은 증상으로 발전했다. 한편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 상승은 생활조건의 변화를 일으켰고, 이른바 ‘풍요의 병’으로 심혈관계질환, 궤양, 암 등을 가져왔다. 나아가 노동·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출현한 질병들은 진통제, 진정제, 커피, 담배, 암페타민과 같은 약물의 소비를 증가시켰다. 비감염성 질병은 감염성 질병과 유사하게 확산되었고, 질병이 일상화·만성화 되듯이 보건의료 또한 일상화·만성화 되었다. 이에 따라 질병의 책임을 개인적 행위의 탓으로 돌리고, 질병의 해결을 개인적 교정으로 환원하는 희생자 과실론이 등장했다.
나. 현대의학과 대중보건의료의 확립
체계적인 의학지식이 발전하면서 미국에서는 도제교육을 지양하고 의학교육을 표준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플렉스너 개혁이라고 불리는 의학교육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의료전문직의 양성과정과 의료제도를 표준화하고 통제하려는 법인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존스홉킨스 모델을 통해 실험의학(연구실), 의료제도(병원), 의학교육(대학)을 결합하는 현대적 의학연구·교육제도가 정착되었고, 표준화된 교육과정과 의사협회의 면허를 통해 공인된 의료전문직이 출현했다. 빈민구호의 기능을 하던 병원은 대학에 기반을 두고 진단과 치료의 기능을 수행하는 현대의료의 중심으로 완전히 변형되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중산층이 의료비용의 증가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병원은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병원의 주도하에 사적 보험에 의한 제3자 지불방식이 도입되었다. 사적 보험이 도입되면서 중산층이 다시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까지 병원 이용이 확대되었다. 기업주들은 사적 보험을 제공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보건의료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이를 구실로 임금인상과 급진적 노동자운동을 통제했다. 현대의학에 따른 치료비용은 노동자계급에게 큰 부담이었기 때문에 보험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한 대중보건의료의 형성은 동시에 보건의료를 이윤추구를 위한 새로운 산업의 영역으로 편입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법인적 형태와 달리 영국과 소련에서는 국가적 형태의 보험제도가 병원과 결합하여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되었다. 영국은 1911년에 강제보험제도인 국가의료보험을 도입했고, 1945년 노동당 정부는 그 적용범위와 급여를 확대하여 국가보건서비스를 확립, 무상의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의료전문직의 지위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타협에 기초한 것으로, 일반의들이 보건의료 예산의 상당 부분을 영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소련에서는 1917년 혁명 직후 무상의료를 실시했으나 내전과 경제적 곤란 속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1930년대에 중화학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보건의료제도가 다시 구축되었는데, 보건의료서비스를 전문화·중앙 집중화하고 대형병원 중심으로 재편했다. 국유화를 통해 보건의료자원의 분배방식을 변화시켰지만, 의료의 성격과 내용 면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다. 의료보장제도의 발전
1) 영국 NHS의 형성
의료보장제도는 영국, 미국, 유럽 복지국가에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결합된 양상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국가가 시민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야 하고 이를 위한 일차적 수단은 높은 수준의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합의가 존재했다. 따라서 완전고용은 미국에서 스웨덴에 이르는 다양한 나라들에서 지향해야 할 일종의 원칙이었다. 완전고용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직접임금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복지로 여겨졌다. 반면 고용을 통해 소득을 획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출의 형태로 제공되는 간접임금은 완전고용에 비해 부차적인 위상을 가졌다.
1930년대 이후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산업적 팽창은 산업예비군을 급속하게 흡수함으로써 노동자의 ‘사회적 권력’을 증가시켰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자는 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인정받았다. 노동조합은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힘을 키운 결과 고용의 안정성을 확보했고,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며, 나아가 노동자의 대표가 생산과정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자본의 대립은 1946~1948년 사이의 제너럴 모터스(GM)에서 파업의 물결로 나타났다. 이에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수용했고, 물가상승분 뿐 아니라 생산성 증가에도 비례하는 임금의 인상을 약속했다. 대신 노동자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양보를 하였으며, 이러한 타협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에서 제거되었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노조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임금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 인상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아들였으며, 그 대가로 국가를 매개로 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확장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의 코포러티즘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생산성 임금과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에서는 노동당과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삼자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는 1940년대 후반 ‘전후의 합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전후 장기적인 완전고용의 결과로 노동계급의 힘이 증가하였고 이는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형성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임금인상 투쟁을 자제하는 대가로 ‘사회적 임금’의 개선이 협상대상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1948년 국가보건의료서비스제도(NHS)를 성립하게 한다. 영국노총(TUC)의 권고로 1941년 만들어진 베버리지 위원회는 2년 후 자신들의 활동 결과를 베버리지 보고서로 발간한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전후 재건될 복지국가의 청사진이었으며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보고서에서 NHS는 복지국가 사회정책 중 하나가 아니라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서독, 스웨덴 등 서유럽 복지국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NHS가 성립한 데는 전쟁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개전에서 종전까지 독일과 전선을 형성하여 독일로부터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전쟁 중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정부가 이들의 치료를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고, 무료의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의료서비스가 즉각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에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병의원 및 의료 인력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불가피하였다. 전시 구축된 전국응급의료서비스체계는 이후 NHS의 토대가 된다.
NHS가 실제로 도입이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노동당이 집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입각하여 복지국가를 만들어나갔다. 1945년부터 6년간 집권하면서 노동당은 국유화 강령을 시행하는데, 그 중 공공서비스로서의 의료가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러나 사실 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게 된 것은 1차 세계전쟁 이후 영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면서 기존에 노동자계급의 대표를 자임했던 자유당과 노조 사이의 공조체제가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의 국유화는 더 이상 부르주아지가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당이 노동자의 협력을 설득하면서 헤게모니를 상실한 자본주의 국가를 관리한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노동당의 국유화 방식은 무상몰수가 아니라 유상매입을 통한 것으로 부르주아 공공경제학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2) 미국은 왜 전국민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하지 못했는가
미국에서도 전국민의료보장체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미국에서는 정당의 정강 정책보다 민간단체의 입법 활동이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쳤는데 민간단체인 미국 노동자입법협회(AALL)가 1915년 최초로 국민의료보험 법안을 제안한 것이 미국에서 전국민의료보장운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제안은 의사 단체를 비롯한 여러 조직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의사협회의의 경우 AALL의 노력과 지도부의 입장이 결합하여 초기에는 지도부를 중심으로 전국민의료보험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의료보험을 정부가 통제하는 문제와 의사들에 대한 진료비 보상을 사람당 정액제로 하자는 주장에 반발하여 결국 반대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사회보장제도의 발전에 좌파 정당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 좌파 정당의 영향은 미미했다. 심지어 노동운동의 입장은 오히려 전국민의료보험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미국노동연맹(AFL)은 강제적인 의료보험이 불필요한 국가의 개입을 조장하고 건강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반대 입장에 섰다.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임금이나 노동조건 등에서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특히 사용자가 제공하는 복지 프로그램이 확대되자 전국민의료보험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었다.
또한 19세기를 관통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노동조합 조직이었던 AFL은 결성 당시부터 이민자, 흑인,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한 백인 숙련공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고 이 때문에 기업적 노동조합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격은 전국민의료보험 운동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를 좌절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체 노동자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고 정치 사회적 의제를 기피하는 기업 중심적 노동운동이 이후 고용을 기초로 한 민간보험이 확산, 정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두 번째 대대적인 시도는 1930년대 대불황 시기에 런딘 상원의원이 사회보장에 대한 법률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1940년대 중반과 후반에 트루먼 행정부에서의 시도가 있었다. 당시 미국노총(AFL-CIO)이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대중적 참여나 대중운동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 상층 정치권 내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못했고 미국 의사협회의 언론매체 광고, 의원들에 대한 편지, 일선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편지쓰기 운동과 같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에 압도당했다. 이런 반대 운동과 당시 냉전체제로 접어드는 정치 환경은 전국민의료보장을 ‘사회주의 의료’로 낙인찍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의료보장의 주된 방법은 사용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형태의 민간보험이었다. 노동자들에 대한 민간보험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협상이나 집단 교섭의 산물이었다. 뉴딜정책은 노사 간의 단체교섭을 의무화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정부가 임금을 통제하는 대신 일정 수준의 부가급여를 허용했다. 이런 노사관계의 변동은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의료보장을 제공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민간보험이 만들어지는데 이들은 병원과 진료소 등 자체 공급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일정액의 보험료를 받고 정해진 모든 서비스를 포괄적으로 제공하는 ‘정액 보험료-포괄적 서비스’방식을 택했다. 이런 방식이 1970년대 이후 미국 의료보장의 주된 방식으로 등장하는 ‘관리의료’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미 전국 노동자의 3/4이 이런 방식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이러한 민간보험의 성장은 노동운동이 전국민의료보험체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민간보험 또한 전국민의료보험운동이 민간보험의 유지나 성장을 막을 우려가 있는 정책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1915년 AALL이 전국민의료보험 입법안을 제출할 때까지 민간보험회사의 영업에서 의료가 차지하는 상품은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성장을 했던 것이다.
3.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 : 1945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의 보건의료체계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빠르게 변화해왔다. 20세기 전반에는 감염성 질환에 대응한 공중보건, 위생이 발달하였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발달과 함께 1977년 사회보험 형태의 의료보험을 실시한다. 이후 의료보험의 확대로 의료기관의 이용은 점차 일반화되고 병원 수는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된다. 이 과정을 통해 민간 부문 중심의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된다.
가. 미국식 보건의료제도의 이식 : 1945년~1961년
의학, 의료기술은 발전하지만 의료공급체계, 보건의료제도는 방치된 시기다. 이는 미국식 보건행정체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을 따로 설치했다. 그 후에 보건후생부로 독립 승격되었다. 보건후생부는 공중보건업무를 주로 담당했고 의료서비스는 민간부문에서 담당하는 자유방임적 구조였다. 500여 개의 보건진료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국민들에게 구호차원의 서비스만 제공하였고 차별현상이 극심했다. 노동기준법(1953)으로 출산 휴가제등 부분적 모성보호가 시작되었다. 전염병예방법(1954)을 제정해 국가적 전염병 관리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의학과 의료기술은 상대적으로 발전하였다. 1951년 의료업자 전문 과목 표방 허가제가 시행되었다. 일제는 경성제대만 6년제로 운영하여 학술연구를 지향하고, 나머지 학교는 4년제 교육을 통해 의사를 양성했으나, 건국이후 모든 의대가 현행 6년제가 된다. 이는 의사공급이 부족하게 된 원인이었다. 1952년 세계보건기구는 일차의료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준의사제도를 권고하였으나 정부와 의대교수들이 반대한다. 대신 충족되지 않는 일차보건의료의 수요를 약사가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약사가 처방전 없이 조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 재정에서 보건의료비 지출비율은 1%로 건강문제를 개인적 책임으로 전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나. 제도의 확립과 민간 중심 의료공급체계의 형성 : 1961년~ 1977년
1961년 위생관련 법규, 1962년 의료법, 보건소법, 식품위생법, 1963년 사회보장 관련 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예방접종의무화, 의료보험법이 재정되었다. 제도는 정비되었으나 의료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한 공적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다. 일제 시대 때 설립된 도립병원을 포함하여 시·도립병원을 추가 설립하였으나 종교재단이나 사립대학 등이 소유한 사립재단 병원의 증가추세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1949년에서 1971년까지 국공립병원이 1.6배 증가하는 동안 사립재단병원은 7.3배 증가하였다. 병상 수뿐만 아니라 시설, 인력과 같은 질적인 측면에서도 사립병원이 국공립병원을 앞서기 시작한다.
개인의원이 의료서비스 공급의 주축을 이루는 시대였다. 당시에는 국민 대다수가 가난하고, 의료보험이 없었기 때문에 입원 유효수요가 적었다. 병상 이용률은 50%를 밑돌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의료요구를 외래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 외래 수요가 주를 이루었다. 외래 수요에 맞춰 의사들은 대부분 개인의원을 설립하였다. 전체의사 중 70%가, 전문의 중 60%가 개원의사였다. 1960년대 한국 병원의 보수가 적은 것도 개원을 선호하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전문의는 과잉인데 의료보험의 부재로 병원비가 비싸 병원에 대한 환자의 유효수요는 부족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에서 이민 요청이 있자,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약 3,500명의 의사가 이민을 했다. 이는 당시 전체의사의 1/4에 해당한다. 종합병원도 수익을 위해서 외래에 집중하면서 개인의원과 역할이 겹치기 시작한다. 병원의 외래 환자는 1960년에 입원 환자의 2배에서 1971년에는 4~5배로 증가한다.
개인의원을 설립한 의사들 중 일부는 의료자본형성을 주도해서 자본가가 된다. 개원의가 종합병원의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폐쇄형 체계에서 개원의사가 병상을 갖춰 준병원 기능을 하다가 자본을 모아 시설을 확대하는 방식의 의료자본형성이 이루어진다. 지역사회의 의료수요에 알맞은 규모로 재원이 투자되고 병원이 설립되는 외국과 달리, 민간의료의 이윤추구논리가 주도하면서 무질서한 의료공급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인해 한국 민간의료기관의 다수가 법적으로 비영리법인이지만 실제로는 법인 이사장이나 재벌 기업의 오너 혹은 그 가족이 지배하는 형태가 되었다.
다. 법정의료보험의 시작과 대중보건의료의 형성 : 1977년~1989년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시작된다. 박정희 정부가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된 이유는 대중의 정치적 불만을 무마하기위한 통치성 확보의 필요라고 볼 수 있다. 노동, 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른 의료수요에 부응해야 할 필요도 있었고, 발전주의시기 중공업 발전에 필요한 숙련 노동자의 건강을 일정 정도 확보해야 할 자본의 필요도 존재했다. 처음 도입된 의료보험은 전체 인구의 8.6%에 해당하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는 역진적 정책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조합방식이다. 지역, 직장별로 조합을 만들어서 독립적으로 재정을 운영하게 하고, 법정급여는 균등하나 부가급여는 조합에 따라 차등을 주는 방식이다. 조합방식은 전 국민을 포괄하지 못하는 선별적 방식이면서, 재정 위험을 분산하는 기능도 제한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정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조합장에 임명하면서 의료보험조합들은 지배벨트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지속적으로 대상이 확대되어 1989년에 전국민의료보험이 달성된다. 이는 근본적 개혁은 아니고 점증적, 추가적 개혁에 가깝다. 1988년 농어촌 지역의료보험의 경우 직장조합중심의 의료보험제도에 138개의 지역의료보험조합을 추가하는 것으로, 1989년에 도시자영업자를 위한 117개의 지역의료보험조합을 추가하는 것으로 완성한다.
보험 확대로 인해 의료수요가 증가한다. 그러나 정부는 공공의료기관 공급을 확대하기 위한 재정 부담을 늘리지는 않고 민간에 대한 차관과 금융지원을 통해서 민간의료기간 위주의 공급체계를 촉진한다. 1980년대 초 의료취약지역 병원건립사업이 그 첫 번째 예다. 67개 의료취약지역을 설정하여 건립희망자가 부지를 구입하면 건축비는 금융기관에서 장기융자를 해주고, 장비는 일본해외개발자금(OECF)차관을 이용하여 현물로 지원하였다. 6,580병상이 건립되는데 주로 의료법인에 융자를 준다. 아산재단, 대우의료재단에서 건립을 하는데, 초기부터 문제가 나타나서 대도시 주변 지역이 아닌 병원들은 인력부족, 운영자금부족, 수요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민간의료시설에 대한 정부 지원투자의 두 번째 예가 재정투융자특별회계자금과 농어촌특별회계 자금 지원을 통한 민간병원 확충지원사업이다. 이전 사업의 실패를 반영하여 41개 군 지역에 한정해서 100병상 이내로 운영부담을 줄이고 인력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의사를 건립자로 선정한다. 자금은 농어촌 발전기금을 통해 장기 저리 융자를 해준다. 이들 사업으로 인한 병상증가 기여도는 1994년 26.9%, 1995년 48.2%, 1996년 45.4%등 우리나라 병상증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의과대학 신설 남발을 통해 그 수가 증가한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두 가지 측면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병원시장에서 규모를 계속 확장시킨다. 첫째, 학교법인 부속 수익사업체 형식으로 설립이 허가되어 세제지원을 누릴 수 있었다. 둘째, 의사인력에 대한 자본통제력을 갖고 있었다. 교수라는 지위로 숙련인력을 안정적으로 고용할 수 있었고, 전공의를 통해 의사인력을 저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대된 사립대학 부속병원은 2002년 전체 종합병원 병상의 1/3을 차지하고, 의원, 2차병원의 생산기지 역할을 한다. 정부의 의사 공급 확대정책 오류로 인해 거대한 민간의료기관과 그 생산기지가 양산된 것이다.
공공병원 민영화는 매각, 운영권 이양 혹은 외주, 독립채산제 도입, 시장자유화, 규제철폐, 국가지원의 축소 등의 형태로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다. 시·도립병원은 1971년부터 지방공기업으로 운영되었는데 만성적 경영 적자 등을 비판받다가 1981년 지방공사체계로 전환된다. 이러한 지방공사의료원화는 독립채산제를 통해 수익성을 고려한 운영을 하게 되어 민간병원과 차이가 없어진다. 비슷한 흐름으로 1978년 국립 서울의대 부속병원의 특수법인화, 1987년 시립영등포병원 민간위탁 등이 있다.
[표 1] 의료기관의 종별 추이 연도
이러한 민간 중심의 의료자원개발을 지원한 결과, 1977년에서 1987년까지 국공립병상의 비율이 53.2%에서 29.9%로 줄어들었다. 의료자원개발이 본격화된 이 시기에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공적 의료재정체계의 결합이라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특수한 성격이 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 결합은 의료전달체계를 왜곡한다. 개인의원의 성장세는 계속되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위기를 맞으면서 민간병원이 주도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경제력 상승과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해 입원수요가 폭증하고 정부가 병상 증대 장려, 지원을 한 결과다. 의료기관의 종별 증가 추이(표 1)에서 종합병원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민간의료기관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종별 시설 비율뿐만 아니라 진료의 성격도 왜곡된다. 종합병원의 외래 점유율은 건강보험을 통한 의료보장이 확대될수록 더욱 심해진다. 의료서비스는 적절한 전달체계를 갖춰야 지역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 필수서비스인 일차의료는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배분하여 형평성을 높이고, 고도의 의학기술이나 자원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들은 특정 의료기관에 집중시켜서 분화와 전문화, 자원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병원은 중증 입원 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하고, 의원은 경증 외래 환자를 진료하면서 중증환자는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의료전달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입원수요가 적은 상태에서 민간병원이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래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 병원 운영의 재정적 책임과 통제를 공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최소한 보험정책을 통해서라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병원의 외래 진료에는 수가를 적게 책정하고, 입원 진료는 수가를 많이 책정하는 방식이 그 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미흡했고, 1979년 전체 의료기관 외래 진료비의 9.5%를 차지하던 종합병원이 1984년에는 31.3%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달체계 왜곡이 이 시기부터 이미 구조적으로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공적 의료재정체계의 결합이라는 한국 대중보건의료의 특수한 성격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공적 성격을 갖는 의료재정체계와 사적 성격을 갖는 의료공급체계가 서로를 확대시키면서 양 체계의 위기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은 공급자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해서 지속적인 재정위기, 정당성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미 수 천억 원의 자본규모를 갖춘 기업으로 성장한 병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면서 의료전달체계 확립이나 고가의료장비 구입 규제와 같은 정책이 계속 실패한다. 낮은 보장성은 보험제도가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제도가 아니라 ‘의료비를 할인 받을 수 있는’, 단순한 의료이용 및 소득보장의 장치로 이해되었다. 한편 공급체계는 거시적 비효율성이 증가하게 된다.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되어 효과적으로 질병에 대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한 경쟁 속에서 병의원은 경영위기에 처한다.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공급자는 건강보험공단에 급여 항목의 수가 인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고가진단장비, 상급병실, 선택진료 등 비급여 의료를 확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