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1-2.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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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답자

류주형 | 정책위원장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최근 동유럽에서의 사태 발전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변화시켰다. 우리는 현실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스스로를 결박하는 경직된 자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지 정확히 보름 뒤에 열린 이탈리아공산당(PCI) 중앙위원회 개막 연설에서, 당 총서기 오케토(Achille Occhetto)는 당이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시대착오적 유물로 남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1988년 총서기로 선출되기 전부터 이미 사회민주주의적 지향 속에 다양한 좌파 정치세력을 통합한다는 신노선을 주창했었다. 결국 중앙위원회는 공산당이라는 명칭과 낫과 망치가 새겨진 당 상징을 포기한다는 당 개혁안을 2/3에 가까운 압도적 찬성으로 의결하였다. 1990년 당내 좌우파 간에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지만 이미 저울추는 크게 기운 상태였다. 1991년 1월에 열린 당 대회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당기를 끌어내렸고 당명을 좌파민주당(PDS)로 교체했다. 당명 개정 과정에서 노동노동자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단어는 철저히 금기시됐다. 좌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와 그람시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시장경제 원리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공식 노선으로 채택하였다. 공산당 주류의 청산주의에 대항하여 탈당파와 당외 좌파가 공산주의재건당(PRC)을 1991년 12월 건설하였다.

곧이어 이탈리아제1노총(CGIL)에도 큰 변화가 불어 닥쳤다. 1992-93년 제1노총이 자본가의 요구를 수용하여 노사정 협상에서 연동제 폐지와 분권화된 교섭구조에 합의한 것이다. 연동제는 소득정책(‘신축적 연동제’)으로 대체되었고, 단체교섭의 구조는 전국(노총)-산업(연맹)의 집권화된 구조와 기업(대기업노조)-지역(중소기업노조)의 분권화된 구조로 이원화되었다. 연동제의 폐지는 1969년 ‘뜨거운 가을’에 출현한 평의회 운동의 쇠퇴를 극적으로 상징했다. 1975년 3대 노총 행동통일의 성과로 제도화된 연동제(scala mobile)는 정액임금 인상을 통해 노동자계급 내부의 임금 격차를 축소함으로써 노동자간 경쟁을 제한하고 노동자통제를 복원하려는 평의회 운동의 결정체였다.
제1노총이 노사정 협정을 무기력하게 수용한 데에는 공산당의 해체와 우경화라는 요인 외에도 여러 가지 역사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1979년에 유럽연합(EU)의 모체인 유럽통화제도(EMS)에 가입하면서 유력한 수출경쟁력 확보 수단 중 하나인 평가절하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저임금이 특히 강조되었다. 1981년에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한 것을 시발점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도 본격화되었다. 1982년 이탈리아 경총(Confindustria)이 경제위기를 이유로 연동제의 일방적 폐기를 선언한 데 이어 1983년에는 정부가 제1노총을 배제한 채 제2노총(CISL)과 제3노총(UIL)과 연동제의 수정 또는 폐지를 위한 노사정 협상을 시도했다. 그 결과 느슨하게나마 유지되던 3대 노총 통합연맹도 1984년 해체되었고, 1987년에는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전투적 코포러티즘을 표방하는 독립노조(Cobas, 기층위원회)가 출현하여 연동제를 거부하기도 했다.
한편 1992년 이탈리아는 정치사의 일대 격변을 맞는다. 1948년 제1공화국 이후 정부를 독식한 제1당 기독민주당과, 이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제3당 사회당에서 마피아와 연관된 부패스캔들(탄젠토폴리)이 폭발한 것이다. 결국 제1공화국은 붕괴됐고 기민당과 사회당도 와해됐다. 그러자 기민당과 사회당과 각각 연계를 맺고 있던 제2노총과 제3노총은 부득이하게 정치적으로 ‘독립’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과 연계를 맺고 있던 제1노총도 1990년 노조 내 공산주의 분파의 해산과 1991년 탈공산주의 정체성 채택에 따라 복수의 정당 지지 체제로 이행한 후였다.
경제위기와 유럽 통합을 배경으로 신자유주의적 반격이 거세게 몰아친 반면 3대 노총의 분열과 공산당의 해체 및 우경화로 수세에 처한 제1노총의 선택지는 타협과 양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평의회 노조 운동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1991년 제1노총 전국대회에서 사무총장 트렌틴(Bruno Trentin)으로 대표되는 다수파가 코퍼러티즘적 노사관계의 제도화로 노선을 변경하는 테제를 제출하자, 베르티노티(Fausto Bertinotti) 로 대표되는 소수파는 노조답자(Essere sindacato)라는 자신의 명칭으로 상징되는 테제를 제출하며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비민주적 정치제도와 온건한 사회관계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은 보수적 개혁을 통해 대중을 수동화하고 임금노동자들을 ‘정치적 실어증’에 빠뜨리려고 한다.” 제1노총 내 하나의 분파로서 1987년 창설된 노조답자는 좌파적 견지에서 주로 노조 활동의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해온 세력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노조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조답자가 연동제 폐지 노사정 협상을 반대한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노조답다’는 것은 곧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축소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임금 인상, 노동일 단축, 노동조건 개선과 같은 방어적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단체교섭의 행위자다.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방어투쟁의 방식이다. 즉 노동조합이 조직된 노동자들의 협소한 이해를 방어하는데 주력할 것인가, 아니면 실업자와 반(半)실업자를 포괄하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구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나아가 노조답자는 노동조합이 정당으로부터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답자는 1993년경 좌파민주당을 탈당하여 공산주의재건당에 합류하고, 베르티노티는 1994년 제2대 당 총서기로 선출된다. 그리고 제1노총 안에는 대안노조(Alternativa Sindacale)라는 공산주의재건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형성됐다. 이에 공산주의재건당 안에서 제1노총 안에 자신을 지지하는 분파를 형성할 것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으나, 노조답자의 반대로 인해 결국 별도의 조직체를 두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공산당 해체 이후 다수파와 소수파가 각각 좌파민주당과 공산주의재건당으로 분열한 상황에서 정당 지지를 둘러싸고 노총이 역으로 분열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이로부터 ‘노조답다’는 것은 정파성을 지양하고 올바른 대중노선에 입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노조답자의 공산주의재건당 합류는 당 운동이 사회정치적으로 급진화하고 당 조직이 자기 혁신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6년 좌파민주당을 중심으로 중도좌파 선거연합(올리브동맹)이 집권에 성공하였고 공산주의재건당은 각외연립의 형태로 정부 구성에 참여했다. 그러나 좌파민주당이 점차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지향을 드러내면서 공산주의재건당은 1998년 올리브동맹에서 탈퇴했고 내각도 붕괴했다. 그런데 당초 올리브동맹 참여를 주장했던 공산주의재건당 내 다수파 중 일부 그룹(코수타 그룹)이 올리브동맹 잔류를 위해 탈당하였다. 그 결과 당초 올리브동맹 참여를 반대했던 소수파 일부를 포함하는 새로운 다수파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분당으로 당의 조직세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의 혁신과 재건을 본격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코수타 그룹은 주로 제도적 영역에 우선성을 부여했지만, 베르티노티 그룹을 필두로 하는 새로운 다수파는 당이 사회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변모 과정에서 세계사회포럼은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공산주의재건당과 제1노총은 2002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유럽사회포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그 성과로 2002년 3대 노총의 연대파업을 성사시킨다. 베르티노티는 대안세계화 운동 속에서 코포러티즘을 지양하고 평의회 노조나 노조 페미니즘의 역사적 경험을 계승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토대로 공산주의재건당을 쇄신하자는 요지의 테제를 제출한다. 공산주의재건당의 일대 약진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역설인가. 2006년 공산주의재건당은 다시 좌파민주당이 주도하는 공동정부에 참여하고 제1노총도 다시 이 중도좌파 정부와의 노사정 협상에 참여한다. 하지만 공동정부는 2008년 해체되었고 그 직후 열린 총선에서 공산주의재건당은 의석을 전부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공동정부 참여와 총선 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2008년 이후 당이 크게 분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산주의재건당의 위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단 제2공화국 이후 선거제도 변화에 따라 정당 체제가 양극화된 것을 하나의 요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93년 선거법 개정 이후 이탈리아 정치 구도는 전진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중도우파 선거연합과 좌파민주당이 주도하는 중도좌파 선거연합 대립구도로 크게 재편되었다. 이러한 선거연합에 의한 양극 체제는, 2007년 좌파민주당이 중도좌파 통합정당인 민주당(PD)을 결성하는 동시에 전진이탈리아가 2009년 여타 중도우파 정당들을 흡수 통합하여 자유국민당(PdL)을 창당함으로써 양대 단일 정당 간 대결 구도로 발전했다. 공산주의재건당은 이러한 양당 구도로의 재편을 저지하는 데 최종 실패함으로써 군소정당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제도적 요인만으로 공산주의재건당의 위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베르티노티가 고백하듯이, 공산주의재건당이 제1노총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고 그 우경화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재건당이 위기에 처한 궁극적 원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산주의재건당이 주창한 대안세계화 운동과 대안좌파의 성패는 그 조직적 기초로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부활 여부에 달려있었던 셈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만 민중운동의 이념과 정체성이 위기에 처한 이 역설적 정세에서, 이탈리아 좌파의 역사가 주는 시사점은 매우 많을 것이다. 노조답자 ― 이것은 대안좌파의 건설을 위한 침로에서 우리 모두가 간직해야 할 화두다.
이번 『사회운동』은 2012년 정세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기사 전체를 하나의 정세전망 특집 기사로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2012년 험난한 여정을 함께 헤쳐나갈 독자들의 건승을 기원하며, 특히 차가운 감방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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