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발효 이후 투쟁 방향과 총선
야권단일화를 위한 MB FTA 반대가 아니라 한미 FTA 폐기를 위한 지역 현장운동을 조직해야
당의 반격과 궁색하기 그지없는 민주당
3월 15일로 한미 FTA 발효일자가 발표되고, 그동안 줄곧 수세에 몰리던 새누리당이 반격에 나서면서 한미 FTA가 총선 최대 쟁점으로 새삼 떠올랐다. 지난 6년여 간의 투쟁들을 돌이켜보면, 한미 FTA의 발효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정부가 미국 워싱턴에서 제1차 공식협상을 시작한 날부터 따지면 만 6년이고, 2007년 4월 2일 협상 타결된 날로부터는 약 5년이 지났다. 또 지난해 11월 22일 날치기 비준으로부터는 3개월 만에 한미 FTA가 발효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국회비준이 완료된 이후 발효가 개시되는 것은 기계적인 법절차에 불과하다. 문제는 정식 발효 이후, ‘날치기 비준무효 촛불집회’의 투쟁방향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이다. 코앞에 닥친 총선은 이러한 쟁점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새누리당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민주당이 2월 초에 미국대사관에 한미 FTA 폐기 서한을 전달하자, 박근혜 대표가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한 번 체결된 국제협약을 이런 식으로 폐기하자는 무책임한 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그러자 한명숙 대표는 “민주당의 입장은 한미 FTA 폐기가 아니라 재협상”이라고 하루 만에 말을 바꾸며 물러섰다. 기세를 잡았다고 판단한 새누리당은 2주일이 넘도록, 과거 한미 FTA 체결에 앞장섰던 한명숙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의 행적과 발언을 일일이 거론하며 공세를 이어갔다. 이로써 날치기 이후 줄곧 수세에 몰린 모습이었던 새누리당은 정식 발효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반격에 나서게 되었고, 한미 FTA는 새누리당의 선공에 의해 총선 최대쟁점으로 떠올랐다.
한미 FTA 반대 진영은 지난해 연말에 타올랐던 날치기 무효 촛불집회로 기선을 잡았지만, 여기에는 한나라당의 무리한 날치기 처리에 대한 반대여론이 포함된 것이었다. 또한 20~30%대에 불과했던 한미 FTA 반대 여론을 50% 가까이 끌어올리기는 했으나, 과반의 반대여론을 끌어 모으기 전에 날치기 무효 촛불의 기세는 꺾이고 말았다. 5:5의 비등비등한 여론전에서 새누리당은 더 이상 움츠리고만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애초에 한미 FTA 체결에 앞장섰던 민주당을 향한 정치 공세는 참으로 손쉬운 역전방안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당은 한미 FTA 체결에 대한 자기반성과 분명한 노선전환 없이 말을 바꾼 터라, 누가 봐도 민주당의 한미 FTA 반대는 약점투성이 표몰이용 카드에 불과했다. 아니라 다를까 새누리당이 정치공세를 시작하자 막상 민주당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침묵과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민주당이 오바마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이른바 ‘한미 FTA 폐기 서한’에서 언급한 폐기는 실제로 폐기가 아니었다. 서한의 내용을 보자면,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재협상을 요구하고, 미국 정부가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19대 의회에서 한미FTA 폐기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FTA 폐기가 아니라 실상은 ‘ISD 재협상 조건부 폐기 고려론’인 것이다. 이것은 날치기 직전에 김진표 원내대표가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함께 작성했던 ‘ISD 재협상 조건부 비준동의안’과 일맥상통하는 안이다. 재협상하지 않으면 폐기를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애매한 의지성 문구(?)를 제외한다면, 지난해 연말에 한나라당과 야합하여 통과시킨 ‘한미 FTA 재협상 촉구 국회결의안’과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이 결의안에서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말하는 이른바 재협상은 한미 FTA 협정문에 이미 규정되어있는 협의기구에서 보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시행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MB FTA인가, 한미 FTA인가?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은 얼마나 다른가? 민주당은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한미 FTA, 2010년에 재협상한 한미 FTA를 반대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노무현 정부가 어렵게 맞춘 이익균형을 이명박 정부가 깼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자동차관세 관련 양보협상 결과를 포함한 10여개 항목의 재재협상을 주장한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자동차부문의 양보는 큰 것이 아니고 나머지 9개 조항들은 노무현 정부가 2007년 4월에 체결한 내용 그대로라는 반론을 편다. 이 대목에 관한한 새누리당의 주장이 옳다. 2010년 자동차 관세 관련 재협상은 한미 FTA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 큰 변화가 아니다. 국책연구소 10곳이 작성한 경제적 효과 분석을 보면, 재협상으로 우리나라의 자동차 분야 무역수지 흑자가 애초 협정보다 연평균 5,300만 달러 줄어들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미국의 요구로 자동차 세이프가드(일정 물량 이상 수입이 늘어날 때 관세를 복원하는 조처)라는 ‘보호 장벽’이 도입됐다. 하지만 자동차 세이프가드 조항을 제외하고, 민주당이 재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나머지 9개 항목은 2007년 4월 노무현 정부가 체결한 내용 그대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의 한계가 드러나 금융 세이프가드 강화가 필요해졌고, 2010년 국회가 중소상공인을 보호하는 법률을 제개정해 한미 FTA와 충돌하는 국내 법률이 생겼지만 협정안 자체의 내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 나머지 조항은 모두 노무현 정부 때부터 줄곧 독소조항으로 지적돼온 것들이다.
민주당이 ‘재재협상 1호’로 꼽은 투자자국가소송제(ISD)는 중앙정부는 물론 지자체의 법령과 정책, 사법부의 판결까지 투자자가 국제중재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심각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열린우리당의 한미 FTA 평가위원회는 ISD에 대해 “우리 제도 선진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비스와 투자 분야에서 개방 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는 있어도, 뒤로 되돌릴 수는 없는 역진방지 조항(래칫)이나, 주요 농축산 품목의 관세철폐 기간,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 역시 노무현 정부가 체결한 협정에 있던 그대로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다.
야권연대를 정당화시켜주는 화려한 명분으로 이용당하는 한미 FTA
민주당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2008년 금융위기로 사정이 바뀌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퇴임 직후에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사정이 바뀌어 한미 FTA에 대한 재검토와 폐기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세계최강 경제대국인 미국의 지배력이 뒤바뀐 것은 아니다. 만약 민주당의 논리대로 따져보더라도,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한미 FTA를 통한 수출 증대 전략과 경제(제도) 선진화는 더욱 더 절실한 상황이다. 민주당이 자주 언급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미 FTA 재검토 발언 또한, 미국 측의 재협상 요구와 관련한 이명박 정권의 태도를 비판하는 수준이고, 그가 말한 재협상은 말 그대로 ‘보다 면밀한 이익타산과 신중한 추진’을 강조하는 것이다. 폐기라는 단어를 노 전 대통령이 사용한 적이 있지만, 그의 말은 “재협상을 요구하여 추진하고, 정 안되면 폐기를 검토할 수도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엄포를 놓는 유능한 협상전략 차원의 언급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입장도 크게 다르지도 않은 양당이 한미 FTA를 놓고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거 여론조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미 FTA는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갈등 이슈’다. 선명하게 찬반이 갈리면서, 보수 대 진보 선거 구도의 중심에서 다른 이슈들을 이끌고 여론을 움직이는 사안인 것이다. 별다른 관점과 이념 노선의 차이가 없는 보수 양당이 앞다퉈 한미 FTA를 선거 쟁점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짓고, 손쉽게 지지자를 동원할 수 있는 의제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미 FTA 폐기 서한’은 한미 FTA를 폐기하겠다는 운동전략을 반영하는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한미 FTA라는 중심 이슈를 소재로 하는 영향력 있는 ‘정치 퍼포먼스’다.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한미 FTA가 민주당 주도의 야권연대를 정당화시켜주는 화려한 명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의 공천기준에는 한미FTA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천심사위원회 자체가 친FTA인사들로 꾸려졌다는 내부논란이 불거지는 판국이다. 그러니 한미 FTA 찬성-협상파들이 건재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한미 FTA 카드를 버리진 않는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받아내어, 자신이 주도하는 반MB-야권연대를 달성하기 위해 한미 FTA보다 강력한 카드는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06년 한미 FTA 협상 당시 홍준표 의원을 비롯한 적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들도 졸속협상이라는 이유로 당시 FTA 협상을 반대했었다. 그들 역시 한미 FTA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을 반대했던 것이다. 원조 친미 보수집단인 새누리당이 한미 FTA를 맹신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박근혜 위원장이 경제민주화를 말하면서 동시에 한미 FTA같은 중대한 국가간 협정을 함부로 다루는 민주당을 성토하고 나서는 모순적인 태도는, 역시 선거 정치 퍼포먼스의 일환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서민경제도 돌보면서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당과 달리 말을 바꾸지 않는 진정성 있는 보수, 경제를 살릴 능력 있는 정치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목적이다.
한미 FTA가 이렇게 여야 정당간의 표몰이 쟁점으로 전락하는 사태로 말미암아 정작 한미 FTA를 둘러싼 진정한 계급투쟁의 발전은 왜곡되고 가로막힌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한미 FTA 추진은 선, 반대는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민주당은 정반대의 논리로 보수정당들 간의 표 대결에 한미 FTA를 동원하고 있을 뿐이다.
반MB 야권연대의 덫에 걸린 한미 FTA 투쟁과 범국민운동본부
이런 와중에 한미FTA저지범국본이 반MB-야권연대의 덫에 걸려, 한미 FTA 폐기 투쟁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잃어가고 있다. 범국본은 2012년 1월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총선 대응 사업으로 전환했다. 여전히 주말 촛불집회를 계속 개최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과 실질적인 사업기조는 이미 반MB-야권연대 총선대응에 맞춰져 있다. 올해 초 내내 숱한 내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른바 ‘심판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다, 심판운동은 151인의 날치기 의원들을 심판하는 공천 반대운동과 총선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약속운동, 온라인 유권자캠페인으로 구성된다. 최초의 논란은 여야 공천 반대 인사들의 명단 발표 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졌었다. 범국본 산하에 구성된 검증지원단은 애초에 심판자 명단을 <날치기의원 151인 + 박희태 국회의장, 정의화 부의장 2인 + 민주당 의원 7인>으로 제출했다. 이는 심판기준도 잘못됐고, 명단 규모도 지나치게 협소한 안이었다. 이 때문에 연이어 세 차례나 계속된 범국본 대표자회의에서 뜻있는 여러 단체 대표자들은 이러한 명단발표를 반대하고, 다른 기준과 질적으로 다른 총선 대응방식을 찾을 것을 제안했었다.
그것은 첫째, 심판명단 작성의 기준은 한미 FTA 날치기가 아니라 한미 FTA 폐기임을 분명히 해야 하고, 둘째 심판대상은 날치기에 참여한 151인과 7인의 민주당 야합파 의원이 아니라,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날치기151인’과 민주당의 핵심 야합파 의원들에 대한 심판은 별도로 강조하면 될 일이지, 그들 때문에 나머지 의원들을 심판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한미FTA범국본이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공천물갈이를 요구할 이유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범국본 대표자회의의 논의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검증지원단의 안을 다수결로 밀어붙이려는 측과 이에 반대하는 측의 논쟁으로 평행선을 그렸다. 결국 논의는 범국본 대표자회의의 다수의견 대로 검증지원단의 심판자명단을 발표하되, 심판 명단 발표 취지에 “한미 FTA를 체결한 민주당(옛 열린우리당)과 날치기를 자행한 새누리당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범국본의 심판자 명단은 2월 16일에 1차 발표되었다.)
한미FTA범국본은 한미 FTA 밀실협상을 개시하고 폭력적으로 체결한 노무현 정권에 맞서 결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FTA범국본은 날치기 이전이나 이후나 일관된 한미 FTA 폐기 입장에 근거해서, 민주당의 참여정부 FTA 원안 찬성론이나, ISD 재협상 조건부 비준찬성론 등을 비판해왔다. 그런 한미FTA범국본이 이제 와서 민주당과의 공조를 감안하여 야합파 7명 수준의 부실하기 짝이 없는 심판명단을 발표하고, 한미 FTA 폐기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없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중운동의 우경화를 대가로 한 총선승리는 한미 FTA 폐기 투쟁의 질곡이 될 뿐
한미 FTA는 발효와 함께 계급갈등의 광범위한 쟁점들과 분리 불가능한 사안으로 바뀐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당의 진정성 없고 파퓰리즘적인 정치동원 논리와 ‘말 바꾸기 정치’는 실질적인 한미 FTA 폐기 운동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여소야대 국회의 등장이 한미 FTA 폐기 운동에 다소나마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막연한 바람일 뿐이다. 민주당의 전략은 MB-새누리당-박근혜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재협상으로 이른바 이익균형을 맞춘, 좀 더 공고하고 강력한 한미 FTA를 만드는 전략이다. 한미 FTA를 전면 폐기하기 위한 운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민주당과의 무분별한 정치적 연합이 우리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새누리당의 말이 아니더라도 “일단 한 번 체결, 발효된 국가간 협정을 폐기하는 일”은 양국 간의 정치적경제적 외교관계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전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제 한미 FTA 폐기 운동은 불평등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한미관계에 대한 전반적 비판과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정치적 연합은 민중운동 내부로부터 이러한 급진적인 비판론을 검열하고 순화시키는 작용을 할 것이다.
또한 거듭해서 강조하거니와 한미 FTA는 단순히 상품무역과 관련한 관세면제 협정도 아니고, 양국간 국익의 균형과 불평등으로 판단할 수 있는 협정도 아니다. 자동차와 소고기 문제도 핵심이 아니다. 한미 FTA의 핵심은 경제, 사회, 문화, 금융, 서비스, 교육, 노동 등에 걸친 포괄적인 투자 및 경제제도의 광범위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한미 FTA는 국익이 아니라 계급이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 FTA는 다른 어떤 FTA와도 다른 각별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FTA가 정식 발효된 이후에 그것의 전면적인 폐기를 추진하는 일은 경제제도 전반의 개혁방향을 역전시키는 과제다. 가장 관련이 깊고 직접적인 부분은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해외매각, 재벌규제 제도들이다. 하지만 한국전력과 발전노조 투쟁, 철도노조 투쟁으로 이어져온 공공부문 민영화 저지 투쟁들은 지난 2000년대 내내 거듭 패배하고, 집중력 있는 공동 연대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다. 비정규직 노동탄압의 선봉인 현대자동차와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 어용노조를 무기로 키워온 재벌들과의 투쟁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강요하고 한번 개혁된 부분을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되돌리지 못하게 봉쇄하는 한미 FTA가 발효하고, 이 민영화 잔치판에 머리 검은 외국투자자로 이들 재벌이 참여할 것이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운운하며 온갖 규제와 노동 보호 관련 제도들을 무력화하는 공세를 펼칠 것이다.
이에 맞서 이제 한미 FTA 폐기 운동은 공공부문 민영화저지 전선의 복구와 재벌의 지배체제에 맞선 총노동 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지역·현장의 운동들을 조직하는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MB 심판과 야권연대를 통한 총선승리(?)는 굳이 그것이 누구의 승리인지 따지지 않더라도, 전선 복구에 힘을 싣고 강화하는 흐름이 아니다. 야권연대 류의 정치적 흐름이 민중운동의 다수를 우경적인 주류화로 이탈시켜버린다면, 피폐화된 민중운동에 덩그러니 남겨진 국회의석들은 급진적인 운동 발전에 유리한 환경은커녕 민중운동의 질곡이 될 것이다.
이후 투쟁방향에 대하여: 한미 FTA 전면 폐기 기조를 명확히 하고, 실질적인 반신자유주의 전선복구에 매진해야 한다
끝으로 이후 투쟁방향을 구체화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지점들을 살펴보자. 우선 2월 28일 금속노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한미 FTA 저지 총파업’안이 현장 발의되는 일이 있었다. 비록 과반수 결의에 9표 모자라 안건은 부결되었지만, 금속 대의원들은 47.5%의 예상치 못한 높은 지지로 3월 총파업을 요구했다. 이 일은 한미FTA범국본은 물론 금속중앙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이 일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었다. 지난 6년간 민주노총을 위시한 모든 민중운동은 “한미 FTA가 체결되면, 총파업에 돌입한다”, “한미 FTA 비준안이 국회에 상정되면, 총파업 총력투쟁으로 저지한다”는 결의들을 지속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금속 대의원들은 이번에도 당연히 “발효가 이루어지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판단과 결의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보름 앞으로 다가온 발효를 무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투쟁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장의 투쟁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핑계로 야권연대 선거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강변하는 무책임한 태도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3월 발효 저지 파업이 무리라면, 지금부터라도 8-9월 민주노총 파업을 한미 FTA 폐기 민중투쟁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역현장의 투쟁 조직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한편 3월 중에 유성기업, 쌍용차 노동자들과 ‘희망 뚜벅이’(12개 투쟁 사업장들의 공동사업단)가 여러 좌파 운동단체들과 공동으로 주요 지역별 거점 농성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부르주아 선거의 구원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 한미 FTA 폐기를 핵심기치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전선 복구를 위한 운동태세 전환을 촉구하고 조직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 흐름이 소기의 성과를 통해 대중적인 노동자 연대투쟁 흐름을 일궈 새로운 한미 FTA 폐기 운동으로 자리매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운동 흐름 속에서 일회적인 동원사업이 아니라 실질적인 반신자유주의 전선 복구의 전망에 걸맞은 한미 FTA 폐기 운동과 정치 교육 선전 사업들을 확장시켜가야 한다.
끝으로 지난해 날치기 이후 한미 FTA 투쟁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해 온 한미 FTA 범국본과 촛불집회의 변화가 필요하다. 문제는 “투쟁 없이 총선승리 없다!”로 요약되는 범국본 촛불집회의 현재 기조다. 이러한 기조는 심판과 투쟁을 주장하지만, 선거승리가 상위의 목표이고, 심판의 방법은 야권연대다. 계급적 정치역량의 강화가 아니라 반MB 야권 국회의석 확대라는 잘못된 정치적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예컨대 지난 2월 25일 개최된 범국민대회는 통합진보당과 민주당간의 야권연대 협상 결렬을 성토하는 분위기로 가득 찼다. 원칙 없는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비판하기는커녕 민중운동이 야권연대를 애원하는 낯 뜨거운 집회였다. 이런 식이라면 한미 FTA 투쟁은 야권연대를 압박하거나 지지하기 위한 맹목적인 대중동원과 명분 쌓기용 대중동원 행사로 전락할 뿐이다. 한미 FTA 투쟁은 이러한 정치적 굴레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국익을 위한 재협상이 아니라 전면 폐기를 명확한 기조로 다잡아야 하고, 반MB 정치 NGO들의 유권자운동낙선운동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 투쟁과 민영화 저지 운동들과의 결합을 중심으로 새로운 투쟁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할 때다.
3월 15일로 한미 FTA 발효일자가 발표되고, 그동안 줄곧 수세에 몰리던 새누리당이 반격에 나서면서 한미 FTA가 총선 최대 쟁점으로 새삼 떠올랐다. 지난 6년여 간의 투쟁들을 돌이켜보면, 한미 FTA의 발효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정부가 미국 워싱턴에서 제1차 공식협상을 시작한 날부터 따지면 만 6년이고, 2007년 4월 2일 협상 타결된 날로부터는 약 5년이 지났다. 또 지난해 11월 22일 날치기 비준으로부터는 3개월 만에 한미 FTA가 발효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국회비준이 완료된 이후 발효가 개시되는 것은 기계적인 법절차에 불과하다. 문제는 정식 발효 이후, ‘날치기 비준무효 촛불집회’의 투쟁방향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이다. 코앞에 닥친 총선은 이러한 쟁점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새누리당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민주당이 2월 초에 미국대사관에 한미 FTA 폐기 서한을 전달하자, 박근혜 대표가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한 번 체결된 국제협약을 이런 식으로 폐기하자는 무책임한 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그러자 한명숙 대표는 “민주당의 입장은 한미 FTA 폐기가 아니라 재협상”이라고 하루 만에 말을 바꾸며 물러섰다. 기세를 잡았다고 판단한 새누리당은 2주일이 넘도록, 과거 한미 FTA 체결에 앞장섰던 한명숙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의 행적과 발언을 일일이 거론하며 공세를 이어갔다. 이로써 날치기 이후 줄곧 수세에 몰린 모습이었던 새누리당은 정식 발효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반격에 나서게 되었고, 한미 FTA는 새누리당의 선공에 의해 총선 최대쟁점으로 떠올랐다.
한미 FTA 반대 진영은 지난해 연말에 타올랐던 날치기 무효 촛불집회로 기선을 잡았지만, 여기에는 한나라당의 무리한 날치기 처리에 대한 반대여론이 포함된 것이었다. 또한 20~30%대에 불과했던 한미 FTA 반대 여론을 50% 가까이 끌어올리기는 했으나, 과반의 반대여론을 끌어 모으기 전에 날치기 무효 촛불의 기세는 꺾이고 말았다. 5:5의 비등비등한 여론전에서 새누리당은 더 이상 움츠리고만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애초에 한미 FTA 체결에 앞장섰던 민주당을 향한 정치 공세는 참으로 손쉬운 역전방안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당은 한미 FTA 체결에 대한 자기반성과 분명한 노선전환 없이 말을 바꾼 터라, 누가 봐도 민주당의 한미 FTA 반대는 약점투성이 표몰이용 카드에 불과했다. 아니라 다를까 새누리당이 정치공세를 시작하자 막상 민주당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침묵과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민주당이 오바마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이른바 ‘한미 FTA 폐기 서한’에서 언급한 폐기는 실제로 폐기가 아니었다. 서한의 내용을 보자면,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재협상을 요구하고, 미국 정부가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19대 의회에서 한미FTA 폐기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FTA 폐기가 아니라 실상은 ‘ISD 재협상 조건부 폐기 고려론’인 것이다. 이것은 날치기 직전에 김진표 원내대표가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함께 작성했던 ‘ISD 재협상 조건부 비준동의안’과 일맥상통하는 안이다. 재협상하지 않으면 폐기를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애매한 의지성 문구(?)를 제외한다면, 지난해 연말에 한나라당과 야합하여 통과시킨 ‘한미 FTA 재협상 촉구 국회결의안’과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이 결의안에서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말하는 이른바 재협상은 한미 FTA 협정문에 이미 규정되어있는 협의기구에서 보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시행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MB FTA인가, 한미 FTA인가?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은 얼마나 다른가? 민주당은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한미 FTA, 2010년에 재협상한 한미 FTA를 반대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노무현 정부가 어렵게 맞춘 이익균형을 이명박 정부가 깼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자동차관세 관련 양보협상 결과를 포함한 10여개 항목의 재재협상을 주장한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자동차부문의 양보는 큰 것이 아니고 나머지 9개 조항들은 노무현 정부가 2007년 4월에 체결한 내용 그대로라는 반론을 편다. 이 대목에 관한한 새누리당의 주장이 옳다. 2010년 자동차 관세 관련 재협상은 한미 FTA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 큰 변화가 아니다. 국책연구소 10곳이 작성한 경제적 효과 분석을 보면, 재협상으로 우리나라의 자동차 분야 무역수지 흑자가 애초 협정보다 연평균 5,300만 달러 줄어들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미국의 요구로 자동차 세이프가드(일정 물량 이상 수입이 늘어날 때 관세를 복원하는 조처)라는 ‘보호 장벽’이 도입됐다. 하지만 자동차 세이프가드 조항을 제외하고, 민주당이 재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나머지 9개 항목은 2007년 4월 노무현 정부가 체결한 내용 그대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의 한계가 드러나 금융 세이프가드 강화가 필요해졌고, 2010년 국회가 중소상공인을 보호하는 법률을 제개정해 한미 FTA와 충돌하는 국내 법률이 생겼지만 협정안 자체의 내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 나머지 조항은 모두 노무현 정부 때부터 줄곧 독소조항으로 지적돼온 것들이다.
민주당이 ‘재재협상 1호’로 꼽은 투자자국가소송제(ISD)는 중앙정부는 물론 지자체의 법령과 정책, 사법부의 판결까지 투자자가 국제중재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심각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열린우리당의 한미 FTA 평가위원회는 ISD에 대해 “우리 제도 선진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비스와 투자 분야에서 개방 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는 있어도, 뒤로 되돌릴 수는 없는 역진방지 조항(래칫)이나, 주요 농축산 품목의 관세철폐 기간,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 역시 노무현 정부가 체결한 협정에 있던 그대로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다.
야권연대를 정당화시켜주는 화려한 명분으로 이용당하는 한미 FTA
민주당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2008년 금융위기로 사정이 바뀌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퇴임 직후에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사정이 바뀌어 한미 FTA에 대한 재검토와 폐기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세계최강 경제대국인 미국의 지배력이 뒤바뀐 것은 아니다. 만약 민주당의 논리대로 따져보더라도,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한미 FTA를 통한 수출 증대 전략과 경제(제도) 선진화는 더욱 더 절실한 상황이다. 민주당이 자주 언급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미 FTA 재검토 발언 또한, 미국 측의 재협상 요구와 관련한 이명박 정권의 태도를 비판하는 수준이고, 그가 말한 재협상은 말 그대로 ‘보다 면밀한 이익타산과 신중한 추진’을 강조하는 것이다. 폐기라는 단어를 노 전 대통령이 사용한 적이 있지만, 그의 말은 “재협상을 요구하여 추진하고, 정 안되면 폐기를 검토할 수도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엄포를 놓는 유능한 협상전략 차원의 언급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입장도 크게 다르지도 않은 양당이 한미 FTA를 놓고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거 여론조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미 FTA는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갈등 이슈’다. 선명하게 찬반이 갈리면서, 보수 대 진보 선거 구도의 중심에서 다른 이슈들을 이끌고 여론을 움직이는 사안인 것이다. 별다른 관점과 이념 노선의 차이가 없는 보수 양당이 앞다퉈 한미 FTA를 선거 쟁점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짓고, 손쉽게 지지자를 동원할 수 있는 의제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미 FTA 폐기 서한’은 한미 FTA를 폐기하겠다는 운동전략을 반영하는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한미 FTA라는 중심 이슈를 소재로 하는 영향력 있는 ‘정치 퍼포먼스’다.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한미 FTA가 민주당 주도의 야권연대를 정당화시켜주는 화려한 명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의 공천기준에는 한미FTA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천심사위원회 자체가 친FTA인사들로 꾸려졌다는 내부논란이 불거지는 판국이다. 그러니 한미 FTA 찬성-협상파들이 건재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한미 FTA 카드를 버리진 않는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받아내어, 자신이 주도하는 반MB-야권연대를 달성하기 위해 한미 FTA보다 강력한 카드는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06년 한미 FTA 협상 당시 홍준표 의원을 비롯한 적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들도 졸속협상이라는 이유로 당시 FTA 협상을 반대했었다. 그들 역시 한미 FTA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을 반대했던 것이다. 원조 친미 보수집단인 새누리당이 한미 FTA를 맹신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박근혜 위원장이 경제민주화를 말하면서 동시에 한미 FTA같은 중대한 국가간 협정을 함부로 다루는 민주당을 성토하고 나서는 모순적인 태도는, 역시 선거 정치 퍼포먼스의 일환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서민경제도 돌보면서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당과 달리 말을 바꾸지 않는 진정성 있는 보수, 경제를 살릴 능력 있는 정치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목적이다.
한미 FTA가 이렇게 여야 정당간의 표몰이 쟁점으로 전락하는 사태로 말미암아 정작 한미 FTA를 둘러싼 진정한 계급투쟁의 발전은 왜곡되고 가로막힌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한미 FTA 추진은 선, 반대는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민주당은 정반대의 논리로 보수정당들 간의 표 대결에 한미 FTA를 동원하고 있을 뿐이다.
반MB 야권연대의 덫에 걸린 한미 FTA 투쟁과 범국민운동본부
이런 와중에 한미FTA저지범국본이 반MB-야권연대의 덫에 걸려, 한미 FTA 폐기 투쟁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잃어가고 있다. 범국본은 2012년 1월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총선 대응 사업으로 전환했다. 여전히 주말 촛불집회를 계속 개최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과 실질적인 사업기조는 이미 반MB-야권연대 총선대응에 맞춰져 있다. 올해 초 내내 숱한 내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른바 ‘심판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다, 심판운동은 151인의 날치기 의원들을 심판하는 공천 반대운동과 총선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약속운동, 온라인 유권자캠페인으로 구성된다. 최초의 논란은 여야 공천 반대 인사들의 명단 발표 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졌었다. 범국본 산하에 구성된 검증지원단은 애초에 심판자 명단을 <날치기의원 151인 + 박희태 국회의장, 정의화 부의장 2인 + 민주당 의원 7인>으로 제출했다. 이는 심판기준도 잘못됐고, 명단 규모도 지나치게 협소한 안이었다. 이 때문에 연이어 세 차례나 계속된 범국본 대표자회의에서 뜻있는 여러 단체 대표자들은 이러한 명단발표를 반대하고, 다른 기준과 질적으로 다른 총선 대응방식을 찾을 것을 제안했었다.
그것은 첫째, 심판명단 작성의 기준은 한미 FTA 날치기가 아니라 한미 FTA 폐기임을 분명히 해야 하고, 둘째 심판대상은 날치기에 참여한 151인과 7인의 민주당 야합파 의원이 아니라,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날치기151인’과 민주당의 핵심 야합파 의원들에 대한 심판은 별도로 강조하면 될 일이지, 그들 때문에 나머지 의원들을 심판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한미FTA범국본이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공천물갈이를 요구할 이유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범국본 대표자회의의 논의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검증지원단의 안을 다수결로 밀어붙이려는 측과 이에 반대하는 측의 논쟁으로 평행선을 그렸다. 결국 논의는 범국본 대표자회의의 다수의견 대로 검증지원단의 심판자명단을 발표하되, 심판 명단 발표 취지에 “한미 FTA를 체결한 민주당(옛 열린우리당)과 날치기를 자행한 새누리당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범국본의 심판자 명단은 2월 16일에 1차 발표되었다.)
한미FTA범국본은 한미 FTA 밀실협상을 개시하고 폭력적으로 체결한 노무현 정권에 맞서 결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FTA범국본은 날치기 이전이나 이후나 일관된 한미 FTA 폐기 입장에 근거해서, 민주당의 참여정부 FTA 원안 찬성론이나, ISD 재협상 조건부 비준찬성론 등을 비판해왔다. 그런 한미FTA범국본이 이제 와서 민주당과의 공조를 감안하여 야합파 7명 수준의 부실하기 짝이 없는 심판명단을 발표하고, 한미 FTA 폐기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없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중운동의 우경화를 대가로 한 총선승리는 한미 FTA 폐기 투쟁의 질곡이 될 뿐
한미 FTA는 발효와 함께 계급갈등의 광범위한 쟁점들과 분리 불가능한 사안으로 바뀐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당의 진정성 없고 파퓰리즘적인 정치동원 논리와 ‘말 바꾸기 정치’는 실질적인 한미 FTA 폐기 운동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여소야대 국회의 등장이 한미 FTA 폐기 운동에 다소나마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막연한 바람일 뿐이다. 민주당의 전략은 MB-새누리당-박근혜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재협상으로 이른바 이익균형을 맞춘, 좀 더 공고하고 강력한 한미 FTA를 만드는 전략이다. 한미 FTA를 전면 폐기하기 위한 운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민주당과의 무분별한 정치적 연합이 우리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새누리당의 말이 아니더라도 “일단 한 번 체결, 발효된 국가간 협정을 폐기하는 일”은 양국 간의 정치적경제적 외교관계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전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제 한미 FTA 폐기 운동은 불평등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한미관계에 대한 전반적 비판과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정치적 연합은 민중운동 내부로부터 이러한 급진적인 비판론을 검열하고 순화시키는 작용을 할 것이다.
또한 거듭해서 강조하거니와 한미 FTA는 단순히 상품무역과 관련한 관세면제 협정도 아니고, 양국간 국익의 균형과 불평등으로 판단할 수 있는 협정도 아니다. 자동차와 소고기 문제도 핵심이 아니다. 한미 FTA의 핵심은 경제, 사회, 문화, 금융, 서비스, 교육, 노동 등에 걸친 포괄적인 투자 및 경제제도의 광범위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한미 FTA는 국익이 아니라 계급이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 FTA는 다른 어떤 FTA와도 다른 각별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FTA가 정식 발효된 이후에 그것의 전면적인 폐기를 추진하는 일은 경제제도 전반의 개혁방향을 역전시키는 과제다. 가장 관련이 깊고 직접적인 부분은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해외매각, 재벌규제 제도들이다. 하지만 한국전력과 발전노조 투쟁, 철도노조 투쟁으로 이어져온 공공부문 민영화 저지 투쟁들은 지난 2000년대 내내 거듭 패배하고, 집중력 있는 공동 연대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다. 비정규직 노동탄압의 선봉인 현대자동차와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 어용노조를 무기로 키워온 재벌들과의 투쟁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강요하고 한번 개혁된 부분을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되돌리지 못하게 봉쇄하는 한미 FTA가 발효하고, 이 민영화 잔치판에 머리 검은 외국투자자로 이들 재벌이 참여할 것이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운운하며 온갖 규제와 노동 보호 관련 제도들을 무력화하는 공세를 펼칠 것이다.
이에 맞서 이제 한미 FTA 폐기 운동은 공공부문 민영화저지 전선의 복구와 재벌의 지배체제에 맞선 총노동 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지역·현장의 운동들을 조직하는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MB 심판과 야권연대를 통한 총선승리(?)는 굳이 그것이 누구의 승리인지 따지지 않더라도, 전선 복구에 힘을 싣고 강화하는 흐름이 아니다. 야권연대 류의 정치적 흐름이 민중운동의 다수를 우경적인 주류화로 이탈시켜버린다면, 피폐화된 민중운동에 덩그러니 남겨진 국회의석들은 급진적인 운동 발전에 유리한 환경은커녕 민중운동의 질곡이 될 것이다.
이후 투쟁방향에 대하여: 한미 FTA 전면 폐기 기조를 명확히 하고, 실질적인 반신자유주의 전선복구에 매진해야 한다
끝으로 이후 투쟁방향을 구체화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지점들을 살펴보자. 우선 2월 28일 금속노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한미 FTA 저지 총파업’안이 현장 발의되는 일이 있었다. 비록 과반수 결의에 9표 모자라 안건은 부결되었지만, 금속 대의원들은 47.5%의 예상치 못한 높은 지지로 3월 총파업을 요구했다. 이 일은 한미FTA범국본은 물론 금속중앙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이 일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었다. 지난 6년간 민주노총을 위시한 모든 민중운동은 “한미 FTA가 체결되면, 총파업에 돌입한다”, “한미 FTA 비준안이 국회에 상정되면, 총파업 총력투쟁으로 저지한다”는 결의들을 지속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금속 대의원들은 이번에도 당연히 “발효가 이루어지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판단과 결의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보름 앞으로 다가온 발효를 무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투쟁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장의 투쟁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핑계로 야권연대 선거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강변하는 무책임한 태도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3월 발효 저지 파업이 무리라면, 지금부터라도 8-9월 민주노총 파업을 한미 FTA 폐기 민중투쟁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역현장의 투쟁 조직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한편 3월 중에 유성기업, 쌍용차 노동자들과 ‘희망 뚜벅이’(12개 투쟁 사업장들의 공동사업단)가 여러 좌파 운동단체들과 공동으로 주요 지역별 거점 농성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부르주아 선거의 구원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 한미 FTA 폐기를 핵심기치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전선 복구를 위한 운동태세 전환을 촉구하고 조직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 흐름이 소기의 성과를 통해 대중적인 노동자 연대투쟁 흐름을 일궈 새로운 한미 FTA 폐기 운동으로 자리매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운동 흐름 속에서 일회적인 동원사업이 아니라 실질적인 반신자유주의 전선 복구의 전망에 걸맞은 한미 FTA 폐기 운동과 정치 교육 선전 사업들을 확장시켜가야 한다.
끝으로 지난해 날치기 이후 한미 FTA 투쟁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해 온 한미 FTA 범국본과 촛불집회의 변화가 필요하다. 문제는 “투쟁 없이 총선승리 없다!”로 요약되는 범국본 촛불집회의 현재 기조다. 이러한 기조는 심판과 투쟁을 주장하지만, 선거승리가 상위의 목표이고, 심판의 방법은 야권연대다. 계급적 정치역량의 강화가 아니라 반MB 야권 국회의석 확대라는 잘못된 정치적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예컨대 지난 2월 25일 개최된 범국민대회는 통합진보당과 민주당간의 야권연대 협상 결렬을 성토하는 분위기로 가득 찼다. 원칙 없는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비판하기는커녕 민중운동이 야권연대를 애원하는 낯 뜨거운 집회였다. 이런 식이라면 한미 FTA 투쟁은 야권연대를 압박하거나 지지하기 위한 맹목적인 대중동원과 명분 쌓기용 대중동원 행사로 전락할 뿐이다. 한미 FTA 투쟁은 이러한 정치적 굴레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국익을 위한 재협상이 아니라 전면 폐기를 명확한 기조로 다잡아야 하고, 반MB 정치 NGO들의 유권자운동낙선운동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 투쟁과 민영화 저지 운동들과의 결합을 중심으로 새로운 투쟁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