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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3-4.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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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1년, 주민들의 삶과 일본의 반핵운동

박상은 | 정책위원
오는 3월 11일로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지 1년이 된다. 일본 도호쿠지방 해안일대를 집어삼킨 검은 파도는 후쿠시마에 있는 핵발전소도 예외없이 덮쳤다. 쓰나미 피해로 외부전력을 상실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는 지진 후 5시간 후부터 연료손상이 시작되어, 지진 후 16시간 후인 3월 12일 새벽 6시에 핵발전소 사고 중 가장 심각하다는 멜트다운(노심용융) 상태에 이르렀다. 이후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1호기의 수소 폭발을 시작으로 2~4호기까지 연쇄적으로 수소폭발을 일으키면서 대량의 방사성 물질을 유출하게 된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사고 상태’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피난을 강제당한 후쿠시마의 주민들을 비롯하여 방사능 공포를 견디며 살고 있는 일본의 시민들은 물론, 넓게 보면 인류 전체가 이번 사고의 피해자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핵발전의 길을 선택한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와 달리, 가동중인 핵발전소의 20%, 건설중인 핵발전소의 52%가 몰려있는 동북아시아 3국에서 탈핵의 길은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현재 13기의 핵발전소를 가동중이며, 무려 27기의 핵발전소를 건설 중에 있다. 이는 핵발전소 신규 건설에서 세계 최대 규모이다. 미증유의 피해를 입은 일본에서조차 탈핵발전 선언이 뒤집히고 있다. 지난해 8월 취임한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핵발전소의 재가동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그는 간 나오토 총리의 탈핵발전 정책에 대해 “급격한 탈핵발전은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으며, 지난 12월에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수습을 발표하여 빈축을 샀다. 올해 2월 15일 민주당은 당 에너지프로젝트팀 회의를 열어 정기점검으로 멈춰선 원전의 재가동을 용인하는 쪽으로 정책조정에 착수했다.
3월 26-27일에 핵안보정상회의를 유치하는 한국도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은 21기의 핵발전소를 가동중인데, 탈핵발전의 계획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새로운 성장동력’ 운운하며 핵발전소 수출을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가 폭발한 당일 아랍에미리트(UAE) 핵발전소 기공식에 참석했고, 일본의 사고가 한국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이번 핵안보정상회의 역시 핵발전소 수출의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선전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한국에서도 탈핵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대중운동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는 반핵운동의 힘이 되기보다 일본의 핵발전소 사고 때문에 애꿎은 우리만 피해를 입었다며 반일감정이나, 어떻게 하면 내부피폭을 줄이기 위해 먹거리를 조심할 것인가와 같은 개인적인 대응에 머무르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피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일본 민중들의 삶, 오랜 기간 대중운동이 침체되어 있던 일본에서 다시 시작된 반핵운동은 한국에서도 시급히 반핵의 흐름이 강화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히로시마의 아픔을 딛고 핵발전 강국으로?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폭탄이 투하된 국가임에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전력 소비량의 약 30%를 핵발전소에 의지하고 있던 핵발전 강국이다. 일본에는 핵발전소가 많을 뿐만 아니라, 도시바와 히타치, 미츠비시와 같이 핵발전소 건설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도 있다. 이 세 업체는 미국의 업체를 인수하여 프랑스, 미국과 함께 전세계 핵산업계를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핵연료 사이클을 자립적으로 구축하고자 지속적으로 시도해왔다. 핵연료 사이클은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다시 핵연료(우라늄)로서 사용할 수 있는 순환체제를 말하는데, 이 사이클을 완성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다는 것은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갖는다는 말과 같다. 일본은 이 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핵 관련 기술에서 첨단을 자랑해왔다.
일본이 핵발전 강국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1954년부터이다. 1954년 3월 핵분열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235에서 따 온 상징적인 금액 2억 3천 5백만엔을 원자력 연구 개발 예산으로 국회에서 통과시킨 일본은, 이후 큰 무리없이 핵발전소를 차례로 건설해 나간다.
핵무기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일본이 핵발전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핵무기와 핵발전소는 서로 다른 것이고 일본이 반대하는 것은 핵기술의 군사이용이지 평화이용은 아니라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핵운동 단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매년 8월 일본에서 열리는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당시 선언문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1회 선언문에서는 “본 대회는 원수폭(원자폭탄수소폭탄) 금지가 반드시 실현되어 원자전쟁을 기도하는 힘을 깨부수고 그 원자력을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2회 선언문에서는 “원자폭탄의 금지가 실현되어야만 비로소 원자력이 인류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의 전략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1953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그때까지의 비밀주의를 포기하고 핵기술을 다른 나라들과 공유하기 시작한다. 1950년대 미국은 일본에 대해 적극적인 원자력 판매 공세를 펼치는데, 일본은 이런 미국의 요구에 적극 부응한다. 원자력 연구 개발 예산이 통과된 이듬해인 1955년 6월, 미일원자력협정이 조인되었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사고는 지금까지 핵발전소를 정당화하는 핵심 이유이다. 그러나 핵무기나 핵발전소 모두 우라늄을 원료로 하는 것이고, 그 원리도 핵연쇄분열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핵발전소와 핵무기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핵산업계와 일본정부의 선전으로 핵발전소는 ‘핵의 평화적 이용’ 이라는 잘못된 사고가 상식이 된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일본 뿐 아니라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가동 중인 국가들 전체에 통용되고 있다. 이 믿음은 핵폭탄의 피해를 직접 경험했던 일본의 반핵여론을 바꾸고, 반핵운동의 기조에까지 침투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원자력 촌: 죽음의 산업을 유지하는 거대 이권 네트워크

일본에서는 핵발전소를 건설운영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자본가기업가들과 그들에게 협력하거나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정치인, 관료, 언론, 학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원자력 이권 네트워크’를 ‘원자력 촌’(원자력 마피아)이라 부른다. 원자력 촌 구성원들에게 핵발전 정책 추진과 자신들의 이익은 떨어질 수 없다. 이들은 이익을 위해 안전 기준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설정하고, 핵발전소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고 데이터를 조작했다.
기본적으로 핵발전소는 국가의 비호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최신형 핵발전소 1기를 짓기 위해서는 대략 3조원에서 3조 5천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들며, 핵발전 과정에서 생기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수천 년에 걸쳐 관리하기 위해서는 역시 방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국가가 함께 책임지지 않으면 핵발전소는 건설도 사후 관리도 불가능하다. 현재 일본의 핵발전 시스템에서 도쿄전력을 비롯한 전력회사는 굉장히 큰 이익을 내고 있다. 일본에는 9개의 전력회사가 있는데 모두 지역별 독점 회사이며, 정부의 보조를 받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가와 기업의 유착관계가 자주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원자력안전보안원은 일본 핵발전소의 안전평가를 시행하는 경제산업성 산하 조직인데, 이들이 작성하는 안전에 관한 보고서를 실제로는 핵발전소 건설사가 만든다.
실제로 안전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고 있는 것은 설계 건설을 담당하는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이며, 도쿄전력은 그들이 작성한 문서의 표지를 ‘도쿄전력’이라고 바꿔달 뿐이다. 이 문서를 원자력 안전 보안원에 제출하는데, 보안원은 관료 그 자체이다. 즉 ‘도쿄전력 문체’를 ‘관료 문체’ 로 바꾸는 정도의 작업만 할 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전력회사 직원들은 사고를 은폐하고, 정부는 이를 눈감아준다. 2002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의 격납용기 시험 테이터를 도쿄전력 직원들이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고, 1978년 3호기의 제어봉이 공기 중에 노출된 사고도 2007년이 되어 발각됐다. 그러나 사고 은폐가 발각된 뒤에도 정부는 도쿄전력에 운전 정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미 안전이 확인됐고, 사회적 제재도 받았다”는 이유였다.
핵발전에서 전문가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안전성 보증서를 달아주는 원자력 전문가 없이 핵발전은 추진될 수 없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조교로 일하며 핵이용의 위험성을 연구해 온 이마나카 데츠지는 “원자력 학회는 원래 원자력을 추진하는 학회로, 그런 의미에서 과학을 목적으로 한 학회가 아니다. 원자력 추진은 기술개발에만 치중된다. 요즘 들어 잘 알려진 대로 원자력학회도 원자력촌(村), 원자력 마피아의 일각이다. 원자력 학회가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범이라는 것은 틀림없다”라고 말한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핵 전공 학자 중 핵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적으며, 이러한 의견을 밝히는 것 자체가 어렵다.
언론은 국민들에게 핵발전은 안전하고 경제적이라고 선전하면서, 전력회사로부터 막대한 광고비를 챙겼다.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도 주류언론에서 반핵이나 탈핵움직임을 적극적, 지속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
이마나카 데츠지는 이런 원자력촌을 유지하는 동력은 만약의 경우 일본도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핵 옵션’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의 비핵3원칙(핵무기를 가지지 않고, 만들지 않고,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다)은 1968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숨겨진 의미는 ‘지금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지만, 만약의 경우 언제든 가질 수 있도록 기술을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일본이 추진하는 고속증식로, 재처리, 농축우라늄 제조 기술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언제든 가능하도록 기술을 갖고 있는다’는 기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이것이 원자력 촌을 유지하는 하나의 큰 이유이다.


삶의 터전을 잃은 후쿠시마 주민들

핵발전을 지속하면서 입는 피해, 이번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피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원자력촌 구성원들이 아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후쿠시마현의 주민들이다. 일본정부는 2011년 4월 22일, 반경 20km 이내 지역을 강제 피난이 실시되는 ‘경계 구역’으로, 30Km까지를 자발적 피난을 권유하는 ‘긴급시 피난 준비 구역’으로 지정하였다. 30km 바깥이라 하더라도 방사선량이 법정 기준을 초과한 곳은 ‘계획적 피난 구역’으로 지정돼 강제 피난 명령이 내려졌다. 피난을 강제당한 사람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다. 피난 구역이 아닌 지역에서도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피난구역은 핵발전소 반경 30Km보다 넓게 설정되었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피난구역의 범위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피난을 강제당했든 자발적 피난을 고민하든, 이들은 그 동안의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피폭을 피하기 위해 이주하면 주택이나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주하지 않으면 수입이나 재산은 유지될 수 있지만 건강, 출산, 육아 등의 권리가 침해받는다. 이 둘은 충돌되는 권리가 아님에도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다. 이런 권리들의 포기를 강요당한 주민들은 분열된다. 이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앞으로 일은 어떻게 하며 육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족 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피난을 강제당한 대가족은 가족들과 흩어져 살게 된 경우가 많다. 주민 6,200명의 이타테무라는 사고 전 1,700가구가 임시주택으로 옮기면서 2,700가구로 나뉘었다. 단기간에 수습될 수 있는 사고라면 일시적인 피난으로 끝나 불편을 감수할 수도 있겠지만, 후쿠시마 주민들이 본래 살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몇 십 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후쿠시마 주민들 사이에서는 지금 현 외로 피난가거나 이주하는 것은 입에 올리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자칫했다가는 소심하다거나 지역을 버린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 지역인 도호쿠 지방의 역사를 보면 안타까움은 더하다. 도호쿠지방은 전통적인 농업지대로, 일본 패전 직후에 장자상속제로 인해 아무것도 물려 받을 수 없어 군대에 간 차남과 삼남이 대거 진입하여 개척한 곳이다. 그러나 1970년대 고도경제 성장 정책으로 1차산업은 파괴되고 젊은 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도시로 내몰리면서 이 지방은 인구 과소지역이 됐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일본도 이런 곤란을 이용하여, 도시에서 기피하는 핵발전소를 쇠락한 농촌지역에 지었다. 후쿠시마현에는 핵발전소가 10기 있고, 추가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핵발전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도호쿠지방은 치명적인 사고가 났을 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현재 피난민은 15만 명에 이르며, 후쿠시마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주한 지역에서 배제당하기도 한다. 타 지역으로 전학을 간 후쿠시마 출신 학생들이 이지메(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들이 보고되고 있다. 후쿠시마 주민들이 고향을 잃은 상황에서, 다른 지역을 떠돌지만 타지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현상을 두고 후쿠시마 주민들의 ‘국내 난민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피폭당하며 일하는 노동자들

또 다른 핵심 피해자는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아무리 방호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작업을 한다해도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이상 피폭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정기검사 때는 엄청난 압력과 300도에 이르는 수온으로 인해 얇아진 배관이나 노후된 밸브를 교체해야 하는데, 이 작업에는 반드시 피폭이 동반된다. 그러나 피폭의 피해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며, ‘시키는대로만 하면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듣고 작업에 투입된다.
핵발전소에서 피폭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업무는 3,4차 하청회사를 통해 들어오는 최하층 노동자들의 몫이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면서 받는 임금은 중간업자들이 가져가고, 노동조합에 가입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권리 주장도 어렵다. 핵발전소 작업으로 피폭되어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의 86%가 하청계약으로 들어온 노동자이다.
후쿠시마 사고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누출되면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평상시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허용 피폭치를 적용하면 작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핵발전소 노동자의 피폭 허용치는 연간 20mSv(밀리시버트), 긴급시는 100mSv인데, 사고가 나자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한해 허용 피폭치가 250mSv로 변경되었다. 이 자체로도 노동자들을 큰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인데, 이마저도 초과하여 피폭된 노동자들도 있다. 이 중에서는 500mSv이상 피폭된 노동자도 있는데, 500mSv이상 피폭되면 일시적인 백혈구 수치의 저하가 관찰되며, 급성 방사성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몇 명의 노동자들이 어떤 상태로 일하며, 피해가 어떠한지에 대해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고선량 지역으로 들여보는 정책에 대해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다. 방사선 양이 내려갈 수는 있지만 방사성 물질의 제염작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이는 또 다른 비극이 된다. 제염작업이 핵기업의 새로운 수입원으로 부상하고, 도호쿠지방의 재건이 건설회사에 호기로 작용하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특정 사회층을 희생시킴으로써 성립하는 핵발전, 일하는 사람이 피폭당해 죽어가고, 핵발전소가 건설된 지역의 주민들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핵발전소의 현실을 볼 때,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것은 사고 발생여부를 떠나 어불성설이다.


다양한 피해자들, 각기 다른 고통

앞서 언급했듯 많든 적든 방사성 물질의 피해를 입고, 정신적인 상흔을 입은 전세계 민중들 모두가 피해자이겠지만, 이 사고의 피해가 가장 아프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후쿠시마현의 주민, 핵발전소의 노동자라는 정체성에서 즉각적으로 보이는 문제만이 다는 아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처한 조건에 따라 각각 다양한 정치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너무나 커다란 피해 앞에 사고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후쿠시마현의 농민들의 이야기는 여러 경로로 한국에도 전해졌다. 방사성 물질이 날아오는 바람에 시금치도, 배추도 출하정지 조치가 되자 절망해 자살한 농민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애써 짠 우유를 버려야 하는 나날을 견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낙농업 농민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지난해 6월 말까지 자살한 152명의 지진과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 중 후쿠시마 낙농업 농민은 68명이었다. 안타까운 사연은 종종 언론에 보도되지만, 피해보상을 줄이기 위해 피폭허용치를 제멋대로 늘린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이 농민들의 피해보상까지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지진과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일본정부는 패닉에 빠지지 말고 ‘자숙’해야 한다, 핵발전소 사고로 에너지가 부족하니 ‘절전’에 협조해달라는 선전을 진행했다. 그 중 핵심은 ‘힘내라 일본!’ 이라는 슬로건으로, 이에 대해 일본의 지식인들과 운동진영은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힘내라 일본!’ 이라는 슬로건은 일본이라는 ‘집단’을 주어로 만든다. 이는 피해자 내부에 있는 여러 차이를 감추고, 피해지원 밖에 있는 사람들을 아예 보지 못하게 만든다.
몇몇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1923년 관동대지진에서와 같은 타민족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일본정부가 학교교육법상 정식 학교로 인정하지 않는 조선인학교에 대해서는 방사선측정기나 운동장에 대한 제염처리 지원을 하지 않는다거나, 행정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정부의 지원없이 졸업생들과 학부모들이 나서 제염작업을 거의 마무리했을 지난해 9월 즈음에서야, 일본정부와 후쿠시마현은 태도를 바꿔 학교 재건 비용 전액을 보상했다. 재일조선인 외에도 고려해야 할 대상은 또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농촌에는 아시아에서 유입된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으로 이주한 아시아인들이 많다. 현재 후쿠시마 전체에서는 2,000여명 이상의 필리핀인들이 일본인 남성의 배우자로 살아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낙농업 농민의 부인도 필리핀인이다. 그녀는 이제 남편이라는 보호막 없이, 외국인으로서, 재난지역에서, 혼혈인 아이와 함께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일본의 반핵운동의 요구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전국에서는 반핵탈핵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적은 일본에서, 지난 4월 도쿄에서 1만 5천 명 규모의 집회가 처음 열렸고, 사고 6개월 후인 9월 19일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6만 명이 도쿄 도심에 모여 대규모 반핵 시위를 벌였다. 반핵 시위에는 작가나 평론가 등 지식인 참가자들도 눈에 띈다. 현재 진행 중인 ‘사요나라(헤어질 때 하는 인사) 핵발전소 1,000만 서명’의 제안자 중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와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등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일본의 반핵운동은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피해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 핵발전소의 재가동을 막고 에너지정책을 전환하는 것, 일본정부 및 도쿄전력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운동의 목표와 요구가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 후쿠시마현 주민들은 당사자들이 처한 문제에 좀 더 구체적으로,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먹거리와 교육에 좀 더 방점이 찍혀있는 등의 차이가 있다. 현재 일본 반핵운동의 요구에 대해 정리하고, 어떤 방식으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핵발전소 재가동 저지와 에너지정책 전환
후쿠시마 사고 이후 54기에 이르는 일본의 핵발전소는 정기점검에 이은 내성검사를 받느라 잇따라 멈춰, 2월 15일 현재 3기만 운전 중이다. 오는 5월에는 모든 핵발전소의 가동이 중지될 예정이다. 이대로 가면 핵발전이 없는 상태를 맞이하지만, 일본 정부는 현재 재가동을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일본 반핵운동 진영에서 가동 중단된 핵발전소의 운전 재개를 막는 것이 현재 가장 핵심적인 요구이다.
핵발전소를 재가동해야 한다는 이들의 논리는 전력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지난해 일본정부는 전력소모가 많은 여름을 핵발전 없이 맞이하면 약 9%의 전력이 부족하다고 설명하였는데, 이는 9%만 전력소모를 줄이면 핵발전 없는 사회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력부족의 논리에 맞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풍력, 태양열 등을 이용한 에너지생산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독일 등을 좋은 예로 삼아 일본 반핵운동 내에서도 그 실현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올해 1월 14-15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탈핵 세계회의에서 채택된 ‘핵발전 없는 세계를 위한 요코하마 선언’ 의 일곱 번째 요구는 ‘핵발전에 의존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자체를 지원할 것’이다.
최근엔 핵발전 옹호 논리가 전력 부족에서 핵발전소가 폐쇄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고용문제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도 렌고(連合)등 일본의 거대노총은 핵발전 관련 노동조합이 소속되어있다는 것을 이유로 핵발전소 폐쇄에 대해 반대했고, 아직까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탈핵이라는 사회적 흐름에 대해 노동조합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대하여,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 반핵운동은 고용문제를 사회적으로 함께 해결하는 가운데, 렌고 등 노동조합의 입장을 바꿔내면서 핵발전소의 가동 중지를 못 박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일본정부 및 도쿄전력에 대한 책임을 묻자
일본 정부는 사고 후 피난 기준을 연간 20mSv로 상향 조정했다. 원래 일본 법률에는 연간 1mSv를 허용치로 적시하고 있으니, 기준치를 20배나 올린 셈이다. 기준치의 상향 조정에 대해 일본 반핵운동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는, 원래 법률에 적시된 기준치로 보면 현 내 거의 모든 지역을 피난 구역으로 설정해야 하고, 둘째로 본래의 법적 기준으로는 배상 대상이 너무 커져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일본의 지식인인 가라타니 고진은 정부와 도쿄전력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흘려 넣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세계 핵실험장 및 피폭자 취재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모리즈미 다카시는 사고 직후의 인터뷰에서 “도쿄전력이 살인자라면 정부는 살인협력자”라고 분노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정부의 국난극복선전에 응하여 ‘지금은 정부를 비판할 때가 아니라, 일본 전체가 일치단결해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도 횡행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일본 반핵운동에서는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에 대해 정보공개와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도쿄전력의 해체까지 요구되고 있다. 도쿄전력 뿐만 아니라 일본에 지역별로 있는 전력회사가 독점하고 있는 송전과 발전 기능을 분리하라는 요구도 있다. 일본은 전력회사가 송전 기능을 독점하여, 전력회사의 승인을 받은 업체만 자신들이 발전한 전기를 판매할 수 있다. 전력회사가 이런 권한을 이용해 재생에너지 개발을 막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피폭을 줄이기 위한 노력
요코하마 선언의 요구 중 첫 번째 항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권리’였다. 지난해 3월 11일 일어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 수준의 생활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피해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피폭 문제이다. 정부가 정한 연간 20mSv라는 피폭허용치는 어린이들에게도 동일한데,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을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과 후쿠시마현 주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20mSv라는 잠정적 기준의 철회를 문부과학성에 요구하는 활동이 이루어졌다. 가와사키 아키라 <피스보트> 공동대표는 국가가 결정한 기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성과라고 평가한다. 이외에도 학교 운동장 표면 같은 데에 있는 흙을 제거만 해도 방사능 수치가 현저히 낮아진다는 것을 발견해내고 모든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결국은 일본 정부가 이 방안을 수용하여 제염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이들을 방사능 피해로부터 지키려는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을 중심으로 전국의 개인 및 단체들이 연대하여 각각의 활동을 서로 지원하는 네트워크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들은 식품의 안전을 검사하고, 정부를 대상으로 한 교섭, 후쿠시마 지원, 방사선치 측정 등의 활동을 자체적으로 벌이고 있다.

핵발전소 수출저지 및 핵사이클의 완전철폐
1970-1980년대에 일본 내에 핵발전소가 굉장히 많이 지어졌지만 1990년대부터는 차츰 줄어들어, 사고 직전 건설 중이었던 것은 2기에 불과했다. 도시바, 히타치, 미츠비시 등 핵발전소 건설 회사는 국내 수요를 찾지 못하자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경악스러운 것은 후쿠시마 사고에도 핵발전소 수출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산업성의 핵발전소 수출 정책은 변화가 없다. 2011년 6월 도시바와 히타치는 핵발전소 건설 시찰 건으로 리투아니아를 방문했는데, 이 시찰 후 도시바와 히타치가 리투아니아 핵발전소 건설의 우선적인 교섭권을 갖게 되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본 반핵운동의 비판이 거세다. 작가인 사와치 히사에는 2월 11일 도쿄 반핵 집회에서 “정부는 자신들이 일으킨 사고도 수습하지 못하면서, 외국에 핵발전소를 팔려고 하고 있고, 세계의 시민들은 싫어하고 있다. 이것이 국적을 뛰어넘은 시민의 의사다”라고 발언하며 정부의 핵발전소 수출을 비판했다.
일본 반핵운동은 핵연료 사이클을 완성하기 위한 기술 개발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핵발전소가 군사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핵사이클 자체를 완전히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핵탈핵을 위한 여러 활동과 전망

이러한 요구를 가진 반핵운동은 여러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올 1월 14-15일에는 요코하마에서 탈핵 세계회의가 열렸는데, 1개월 여의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1만 1,500명이 참가하여 주최측을 놀라게 했다. 탈핵 세계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요코하마 선언을 채택하고, 선언에 포함된 8가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핵발전소 없는 세계를 만드는 행동의 숲’ 활동을 시작했다. 행동제언은 개인적인 실천에서부터 대정부요구까지 다양하다.
직접 행동도 계속되고 있다. 2월 11일에도 전국 각지에서 반핵집회가 열렸으며, 이 날 도쿄 도심에는 12,000명이 모였다. 경제산업성 앞에는 작년 9월 11일부터 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탈핵 텐트’라 불리는 이 농성장은 경제산업성을 1,300명이 둘러싼 인간 띠잇기 행사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세 동의 ‘탈핵 텐트’ 농성은 철거 위기를 넘기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요나라 핵발전소’ 1000만 서명은 2월 말 현재까지 420만 명의 서명을 받았고, 5월 말까지 1,000만명을 목표로 계속될 예정이다. 오는 3월 11일에는 15,000명 정도의 참가를 목표로 하여 후쿠시마에서 집회가 열린다. 7월 16일에는 10만 명을 목표로 도쿄 도심에서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일본의 반핵운동은 명확한 요구를 가지고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가공할 피해를 입고 생존권을 위협받으며 살고 있는 후쿠시마 현지 주민들과 후쿠시마 외부에서 벌이는 반핵운동과의 충돌이 있다.
일본 운동 내에서 이에 대한 우려와 실제 겪고있는 곤란에 대한 증언이 나오고 있다. 서경식은 방사능 오염에 대한 공포는 일본 전역과 전 세계에서 탈핵 운동의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지만, 일본 내에 후쿠시마에 대한 거부반응이나 핵발전소 반대 운동을 후쿠시마에 대한 차별이라고 비난하는 움직임도 존재한다고 증언한다. 문제는 정작 후쿠시마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생활 근거지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원전의 위험성이나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소리에 대해서 점점 짜증이 나고, 오히려 방사능 오염은 별거 아니다, 괜찮다 하는 말에 위안을 받게 된다고 한다.
‘아이들을 방사능으로부터 지키는 전국 네트워크’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핫토리 나츠오는 ‘안전하다’ ‘안전하지 않다’는 정보가 혼재하는 가운데,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일만 하더라도 벅차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는데, 이런 일이 계속되면 일종의 사고정지 상태가 되어 부정적인 정보에 대해 눈을 감고 싶어지는 심리상태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가와사키 대표는 후쿠시마 주민들은 도쿄에 의해 핵발전을 강요받았다는 불만이 있으며, 도쿄와 탈핵운동을 함께 하자는 연대의 노력이 있는 반면에, 도쿄에 대한 불만 의식도 공존한다고 말한다. 오는 3.11 후쿠시마 집회에 관해서도 현 내외의 태도가 다르다. 후쿠시마현 바깥에서는 ‘왜 방사선량이 많은 지역에서 집회를 하는가’라는 질문이 주최측에 제기된다. 이에 대해 주최측은 2월 24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살고 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참가여부를 결정할 수 있지만, 집회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외에도 보수적인 일본 노동운동의 변화 여부, 재생에너지가 결국은 또 다른 돈벌이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 민족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인학교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의 많은 운동단위가 지적하고 함께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벌여 일정한 성과를 남겼다. 하지만 농촌지역에 결혼하여 이민 온 필리핀 여성들이나 후쿠시마 지역에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들의 문제까지 눈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누려왔던 일상생활과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고자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향토애나 애국심과 혼동되기도 한다. 2.11 도쿄 반핵집회에서 젊은 배우인 야마모토가 한 발언은 일본의 반핵 여론이 이 경계에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정말로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에 모여있으며, 다시 한 번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가 일어난다면 일본은 이제 끝이다’라며 핵발전소 반대를 외쳤다. 피해가 장기화되어 후쿠시마 주민들이 버티기 힘들어질수록 반핵운동과의 충돌이 심해 질 수 있다.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고 이것이 반핵운동의 내부에도 침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며 운동을 지속할 것인가, 현재 일본의 반핵운동이 처한 과제이다.
탈핵 움직임에 대한 원자력 촌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소위 경제전문가들은 ‘상당한 빚을 지고 핵발전소를 지었으므로 국가 재정 차원에서도 핵발전소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놓고 있다. 그 이면에 국가의 핵발전소 사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그에 따른 기득권이 있다. 핵발전소로 인해 이득을 얻는 사람들의 연대는 강고하다.
1960년대 안보투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이번에야말로 후쿠시마의 희생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느냐라는 기로에 서 있다.


2012년 한국에서

핵발전소 사고나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에 관한 숱한 문헌과 자료를 읽다보면,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기 쉽다. 핵기술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사고정지에 빠지는 것은 비단 후쿠시마의 주민들만이 아니다.
그러나 핵발전의 위험을 알면서도 목숨 걸고 싸우지 못했다고, 사고의 책임의 절반은 우리에게 있다는 일본 활동가들의 참회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후쿠시마의 사고로 인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보고도 여전히 ‘설마’ 하며 적당히 싸운 오늘을 후회할 내일이 올 수 있다.
우리는 방사성 물질의 오염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의 반핵운동은 한국에 요구하고 있다. 일본에서 ‘핵발전소 수출은 안된다’ 고 할 때 ‘일본이 안하면 한국이 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 서로 경쟁시키며 핵발전소를 유지하는 쪽으로 가려는 논리를 꺾어야 한다. 그래서 두 나라가 함께 핵발전을 중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묵시록적인 상황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일본도, 핵발전소 21기를 가동 중인 우리도 여전히 싸워야 할 것이 많다. 이를 위해 핵발전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국가와 기업에, 기만적인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이루어질 저들의 담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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