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현황과 과제
김용직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 초청 노동자운동연구소 월례워크숍
노동자운동연구소는 작년부터 지역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활동가를 초빙하여 그 지역의 노동운동의 역사 및 현재 상황과 고민을 들어보는 워크숍을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지역의 모범 사례를 발굴하여 전파하고, 다른 지역과 전체 노동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지난 3월 22일에는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김용직 사무처장을 초청하여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현황과 과제>라는 이름으로 워크숍을 열었다. 제출된 발표문과 발표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당일 토론된 내용을 참고하여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교훈을 짚어 보겠다. 제출된 발표문 전문은 노동자운동연구소 홈페이지(www.awm.or.kr)에서 볼 수 있다.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현재
민주노조 운동의 태동
80년대 중반까지 충북지역은 한국노총의 본산, 노조운동의 무풍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노동운동의 발전이 더딘 지역이었다. 85년 이후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공단에 들어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으나 활동가 색출작업으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월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이 청주지역에서도 분출한다. 8월 한 달 동안 청주·청원 30개 사업장, 기타 도내 30개 사업장 등 60여개 사업장에서 쟁의가 발생하였다. 이는 과거 20여 년 동안 발생했던 쟁의행위 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폭발적인 투쟁의 결과 87년 7월 이후 90년까지 89개의 노동조합이 설립되었고, 이는 99년 기준 전체 조합 수의 40%에 달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준비되고 조직된 노동운동의 역량이 부족하다보니 지역노조협의회 등 지역조직 결성으로 나아가거나, 연쇄적인 노조 조직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88년 잠깐의 소강상태를 거쳐 90년, 91년에는 학생운동출신 활동가들이 현장에 정착하고 현장의 소그룹, 공부모임의 수가 늘어나면서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보다 조직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주로 노조민주화 투쟁이 중심이 되었고 자본 역시 공세에 나서면서 투쟁의 양상 또한 격렬해졌다. 결국 치열하게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업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민주노조가 제대로 뿌리내리지는 못하였다.
지역 연대활동의 기반 형성과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창립
90년, 91년의 패배를 경험한 뒤 지역 연대활동이 시작되었다. 지역 내 민주노조가 제대로 서 있는 사업장이 없는 상황에서 지역연대 없이 독자적인 활동은 불가능했다. 살아남은 민주노조와 외곽지원단체가 함께 공동간부교육 등 일상적인 지역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사업장 간의 교류도 활발해지고 중간노조의 조합원들의 참여도 늘어났다. 이 결과 공동활동에 참여하는 폭이 늘어, 10여개 사업장 노조 및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노민추)가 함께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민주노조들마저 와해되는 가운데 노동조합 투쟁을 지원했던 국민연합 임투대책위원회의 성과를 이어 결성된 청주노동자의집이 노동조합 지원과 지역 연대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92년 이후 무너진 조직력을 복구하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대응이 이루어졌다. 먼저 현장활동가들이 청주노동자의집을 중심으로 충북민주노동자회를 결성하여 현장의 조직력 복원과 기반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성과로 정식품, 럭키, 한국야금 등에서 노민추 또는 노조결성팀이 만들어지고, 청주노동자의 집과 함께 노민추 연대모임인 ‘좋은친구들’을 구성하여 활동하여 상당한 성과를 남겼다. 이들은 이후 청주공단 제조업노조의 중심세력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청주지역택시노조와 의보노조, AMK노조, 배이산업노조 등 7개 노조와 청주노동자의집 등 1개 단체가 충북지역노조대표자회의를 결성(1994년 10월 11일)하여 대중적, 공식적 노조연대조직으로 활동하였다. 충북지역노조대표자회의는 22차례의 정례회의와 지역의 각종 투쟁 및 전국적인 사업 등을 통해 19개 노동조합으로 참가를 확대하고 실질적인 지역 민주노조진영의 결집체이자 대표체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충북지역노조대표자회의는 비록 대표자회의 수준이기는 하지만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창립의 모태로서 조직운영, 조직체계의 안정화와 노조 간 연대를 통해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단결을 위한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성공적으로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창립준비위원회로 전환하였다.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와 방어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가 1996년 3월 23일 창립되었다. 참가 14개, 참관 5개 노조, 조합원 5천명의 규모였다. 지역본부는 창립과 동시에 조직확대에 주력하였다. 특히 청주공단 내 제조업 노조의 절대적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조직확대 사업과 96-97 노동법개정총파업의 성과로 98년 1월에는 총 68개 노조 10,500명으로 창립 당시 대비 조합수는 3.5배, 조합원수는 2배 증가하여 지역의 조직노동자의 35%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급성장하였다. 또한 엘지화학, 한국네슬레노조, 정식품노조가 민주노총으로 합류하여 총연맹으로서 최소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이후 구조조정과 탄압이 시작되었다. 98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정리해고의 칼끝은 여지없이 조합원의 생존권을 박탈하였고 그나마 저항력이 있는 노조 역시 임금삭감과 동결, 복지축소, 근로조건 악화를 피할 수 없었다. 98년 5.27-28 총파업 이후 많은 사업장들이 임단협 투쟁 시기에 파업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은 악랄했다. 만도기계노조 청원지부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노조간부에 대한 구속수배와 사법처리가 진행되면서 지역본부와 각 단위노조는 조직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역연대를 무기로, 방어를 넘어 공세로
2000년대 들어 경기가 회복되면서 98년 이후 후퇴했던 노동조건과 권리를 원상회복하자는 조합원의 요구가 분출했다. 2000년에서 2004년의 시기는 충북지역본부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조합원이 참가하여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던 시기이며, 지역연대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2000년 5·31총파업은 충북지역의 12,000명 조합원 중 절반이 넘는 26개 사업장 약 6,500 여명이 파업에 참가하였다. 지역분담금 납부 조합원 수를 기준으로 하면 2/3에 이르는 인원이기도 하다. 2001년에는 투쟁 규모는 2000년의 1/3수준에 그쳤으나 투쟁의 기간은 장기화되고 투쟁 강도가 더욱 격렬해졌다. 지역본부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상시 투쟁 대오가 400여명에 이르렀고 투쟁사업장이 발생하면 지역에서 집중연대투쟁을 통해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 시기의 투쟁을 통해 간부가 아닌 조합원들까지 강한 연대의식과 전투적인 계급의식을 갖게 되었다. 죽암휴게소, 정식품, 충북대병원, 평화택시, 한통계약직 등 장기투쟁사업장에서 이러한 연대투쟁은 빛을 발했다. 정식품은 이 당시 승리에 힘입어 쟁취한 현장권력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한껏 물오른 지역연대투쟁은 2002년 신규노조의 폭발적 건설과 민주노조 사수 투쟁, 2003년 손배가압류 폐지를 위한 열사 투쟁으로 계속 이어졌다. 산업노조의 지역조직도 자리를 잡아갔다. 금속과 화학 등 제조업 사업장이 시기 집중투쟁을 전개하면서 많은 성과를 냈다.
이 시기 지역연대투쟁의 힘은 2004년 우진교통 투쟁에서 정점에 달했다. 임금체불로 파업에 돌입한 우진교통은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하면서 본격적으로 투쟁에 들어섰다. 청주시청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투쟁하러 갔다 진입농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권력의 침탈로 전 조합원과 연대단위 전원이 연행되었으나, 이후 2주일간 연일 600여명이 참여하는 야간 청주시청 앞 5차선 전면 점거 투쟁이 지속되었고 지역 연대 총파업이 결의되었다. 그러자 청주시장이 노조요구를 전면 수용하여 체불임금과 회사주식을 맞교환하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이후 우진교통은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이닉스 매그나칩 사내하청 패배와 지역연대의 침체
2004년 하이닉스 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사내하청 노동조합을 결성했다가 12월 31일자로 도급해지로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후 2년 4개월간의 투쟁은 결국 패배로 끝이 났다. 지역연대 총파업까지 지역 노동운동은 총력을 집중했으나 노무현 정권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공권력의 벽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하이닉스 매그나칩은 부도로 산업은행이 주인이었다.)
이 패배는 지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징역과 집행유예, 벌금형을 받았다. 패배감이 압도하여 연대투쟁의 기풍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연대가 잘 안 되다보니 신규사업장이 만들어졌다가도 깨지고 결국 패배의식이 강화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공단의 미조직 노동자들도 움츠러들었고 자본은 진성도급화를 추진하여 정규직화 투쟁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투쟁 과정에서 지역본부와 산별 지역조직의 갈등, 지역 활동가들의 갈등이 확대되었다.
2008년 이후 지역의 많은 투쟁 사안이 있었으나 지역본부 차원의 연대투쟁은 미약했고 연대의 폭이 산별연맹 내로 갇히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세한 신규노조의 투쟁이 연이어 패배하기도 하였다. 2009년에는 총 10개 노조가 참가한 ‘구조조정 저지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였다. 이를 통해 구조조정 투쟁을 지역 차원의 공동투쟁으로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각 사업장별 구조조정 및 투쟁 시기, 대응방식의 차이 등으로 인해 한국네슬레노조 매각저지 투쟁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2011년 유성기업 투쟁과 지역연대의 복원
2010년 아동 양육시설을 사유화 한 충북희망원 사측이 일방적으로 시설 폐쇄를 선언한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조합원들의 피나는 투쟁에 지역 활동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 지역 연대투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2011년 유성기업의 투쟁은 지역 연대투쟁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유성지부조합원들은 지역 연대투쟁에 최선두에 서왔다. 그러다보니 지역 분위기가 좋지 않았음에도 그동안 연대를 받았던 조합과 조합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서로 갈라져 있던 활동가들도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진 청주시립노인전문병원 간병노동자들의 해고자 복직 투쟁은 간병에 대한 사회공공성 문제를 제기하고 해고자 복직과 간병노동자의 권리 확장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의료공공성을 파괴하는 효성병원에 맞서 지역 연대투쟁은 다시 한번 힘을 발휘했다.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교훈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은 역사도 짧고 타 지역에 비해 조합원의 규모가 작지만 매우 강력한 지역연대의 역사와 기풍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지역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대공장이 없고 중소규모의 노동조합이 주를 이루고 있어 단위 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힘을 지역연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금속 지역지부 중 경주지부의 사례와 유사하다. (충북지역 가장 큰 노동조합은 조합원 1,800여명 규모의 LG화학이다.)
둘째, 지역 노동운동의 형성과정에서 지역연대와 지역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년대 초 ‘좋은 친구들’의 역할은 공단조직화의 사례로서 적극 검토해 볼만 하다. 한편 9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지역연대가 민주노총 창립과정과 이후 산별연맹 중심의 노동운동 재편 과정에서 약화된 사례가 타 지역에서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충북의 경우 단위 노조와 지역 단체, 활동가들이 통합적인 논의틀 내에서 지역본부를 창립하였고 이후 지역본부가 중심이 되어 조합확대 사업을 추진하였다. 산별조직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역사가 지역본부 중심의 지역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던 토양이 되었다.
셋째, 지역본부가 매년 실시해 온 활동가·간부교육이 사업장을 넘어선 활동가들의 교류와 통합력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충북지역본부는 매년 9월부터 4개월 동안 “현장맞춤교육”을 실시해 왔다. 작년의 경우 정세, 철학, 경제학, 성평등, 노동운동사, SNS, 노동역사기행 등의 주제로 진행되었다. 교육 방식은 참가자들이 교재를 읽고 발제하고 토론하는 식이다. 지역, 사업장, 연배 등 다양하게 팀을 구성하는데 한때는 10개 넘게 팀이 구성된 적도 있다고 한다. 유성지부의 경우 매년 교육에 참여해 왔는데 그 결과 조합원의 절반 가까이 교육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유성 조합원들이 지역의 다른 조합원들과 맺은 관계가 2011년 유성에 대한 지역연대의 기반이 되었다. 지역운동이 침체되면서 현장맞춤교육도 함께 침체되었는데 이를 복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김용직 사무처장은 강조했다.
지역 노동운동이 질적·양적으로 크게 발전했던 2000년에서 2004년의 시기는 지역 연대를 통해 개별 사업장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다시 승리한 사업장이 지역 연대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선순환이 작동했던 시기다. 특히 기존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상시적인 연대대오가 구축되고 신규사업장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냄으로써 더 많은 신규조직화와 더 튼튼한 연대대오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처럼 미조직 조직화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존 조직을 중심으로 든든한 지원군, 연대대오의 형성이 중요하며, 미조직 조직사업과 기존 조직의 재조직화 사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충북지역본부는 2011년 복구된 지역연대의 힘을 가지고 청주나 청원 지역의 공단 등에 대한 전략조직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김용직 사무처장은 지역본부와 산별조직, 현장활동가가 함께 현장조직 사업을 벌여 ‘잃어버린 청주공단’을 꼭 되찾아 오겠다고 했다.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은 강력한 지역연대를 무기로 노동운동의 불모지라 불리던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 왔다. 충북지역의 전투적이고 헌신적인 연대투쟁의 전통은 앞으로 더 자세하게 연구되고 전파되어야 한다.
지난 3월 22일에는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김용직 사무처장을 초청하여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현황과 과제>라는 이름으로 워크숍을 열었다. 제출된 발표문과 발표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당일 토론된 내용을 참고하여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교훈을 짚어 보겠다. 제출된 발표문 전문은 노동자운동연구소 홈페이지(www.awm.or.kr)에서 볼 수 있다.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현재
민주노조 운동의 태동
80년대 중반까지 충북지역은 한국노총의 본산, 노조운동의 무풍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노동운동의 발전이 더딘 지역이었다. 85년 이후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공단에 들어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으나 활동가 색출작업으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월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이 청주지역에서도 분출한다. 8월 한 달 동안 청주·청원 30개 사업장, 기타 도내 30개 사업장 등 60여개 사업장에서 쟁의가 발생하였다. 이는 과거 20여 년 동안 발생했던 쟁의행위 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폭발적인 투쟁의 결과 87년 7월 이후 90년까지 89개의 노동조합이 설립되었고, 이는 99년 기준 전체 조합 수의 40%에 달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준비되고 조직된 노동운동의 역량이 부족하다보니 지역노조협의회 등 지역조직 결성으로 나아가거나, 연쇄적인 노조 조직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88년 잠깐의 소강상태를 거쳐 90년, 91년에는 학생운동출신 활동가들이 현장에 정착하고 현장의 소그룹, 공부모임의 수가 늘어나면서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보다 조직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주로 노조민주화 투쟁이 중심이 되었고 자본 역시 공세에 나서면서 투쟁의 양상 또한 격렬해졌다. 결국 치열하게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업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민주노조가 제대로 뿌리내리지는 못하였다.
지역 연대활동의 기반 형성과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창립
90년, 91년의 패배를 경험한 뒤 지역 연대활동이 시작되었다. 지역 내 민주노조가 제대로 서 있는 사업장이 없는 상황에서 지역연대 없이 독자적인 활동은 불가능했다. 살아남은 민주노조와 외곽지원단체가 함께 공동간부교육 등 일상적인 지역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사업장 간의 교류도 활발해지고 중간노조의 조합원들의 참여도 늘어났다. 이 결과 공동활동에 참여하는 폭이 늘어, 10여개 사업장 노조 및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노민추)가 함께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민주노조들마저 와해되는 가운데 노동조합 투쟁을 지원했던 국민연합 임투대책위원회의 성과를 이어 결성된 청주노동자의집이 노동조합 지원과 지역 연대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92년 이후 무너진 조직력을 복구하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대응이 이루어졌다. 먼저 현장활동가들이 청주노동자의집을 중심으로 충북민주노동자회를 결성하여 현장의 조직력 복원과 기반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성과로 정식품, 럭키, 한국야금 등에서 노민추 또는 노조결성팀이 만들어지고, 청주노동자의 집과 함께 노민추 연대모임인 ‘좋은친구들’을 구성하여 활동하여 상당한 성과를 남겼다. 이들은 이후 청주공단 제조업노조의 중심세력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청주지역택시노조와 의보노조, AMK노조, 배이산업노조 등 7개 노조와 청주노동자의집 등 1개 단체가 충북지역노조대표자회의를 결성(1994년 10월 11일)하여 대중적, 공식적 노조연대조직으로 활동하였다. 충북지역노조대표자회의는 22차례의 정례회의와 지역의 각종 투쟁 및 전국적인 사업 등을 통해 19개 노동조합으로 참가를 확대하고 실질적인 지역 민주노조진영의 결집체이자 대표체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충북지역노조대표자회의는 비록 대표자회의 수준이기는 하지만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창립의 모태로서 조직운영, 조직체계의 안정화와 노조 간 연대를 통해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단결을 위한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성공적으로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창립준비위원회로 전환하였다.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와 방어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가 1996년 3월 23일 창립되었다. 참가 14개, 참관 5개 노조, 조합원 5천명의 규모였다. 지역본부는 창립과 동시에 조직확대에 주력하였다. 특히 청주공단 내 제조업 노조의 절대적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조직확대 사업과 96-97 노동법개정총파업의 성과로 98년 1월에는 총 68개 노조 10,500명으로 창립 당시 대비 조합수는 3.5배, 조합원수는 2배 증가하여 지역의 조직노동자의 35%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급성장하였다. 또한 엘지화학, 한국네슬레노조, 정식품노조가 민주노총으로 합류하여 총연맹으로서 최소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이후 구조조정과 탄압이 시작되었다. 98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정리해고의 칼끝은 여지없이 조합원의 생존권을 박탈하였고 그나마 저항력이 있는 노조 역시 임금삭감과 동결, 복지축소, 근로조건 악화를 피할 수 없었다. 98년 5.27-28 총파업 이후 많은 사업장들이 임단협 투쟁 시기에 파업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은 악랄했다. 만도기계노조 청원지부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노조간부에 대한 구속수배와 사법처리가 진행되면서 지역본부와 각 단위노조는 조직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역연대를 무기로, 방어를 넘어 공세로
2000년대 들어 경기가 회복되면서 98년 이후 후퇴했던 노동조건과 권리를 원상회복하자는 조합원의 요구가 분출했다. 2000년에서 2004년의 시기는 충북지역본부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조합원이 참가하여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던 시기이며, 지역연대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2000년 5·31총파업은 충북지역의 12,000명 조합원 중 절반이 넘는 26개 사업장 약 6,500 여명이 파업에 참가하였다. 지역분담금 납부 조합원 수를 기준으로 하면 2/3에 이르는 인원이기도 하다. 2001년에는 투쟁 규모는 2000년의 1/3수준에 그쳤으나 투쟁의 기간은 장기화되고 투쟁 강도가 더욱 격렬해졌다. 지역본부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상시 투쟁 대오가 400여명에 이르렀고 투쟁사업장이 발생하면 지역에서 집중연대투쟁을 통해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 시기의 투쟁을 통해 간부가 아닌 조합원들까지 강한 연대의식과 전투적인 계급의식을 갖게 되었다. 죽암휴게소, 정식품, 충북대병원, 평화택시, 한통계약직 등 장기투쟁사업장에서 이러한 연대투쟁은 빛을 발했다. 정식품은 이 당시 승리에 힘입어 쟁취한 현장권력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한껏 물오른 지역연대투쟁은 2002년 신규노조의 폭발적 건설과 민주노조 사수 투쟁, 2003년 손배가압류 폐지를 위한 열사 투쟁으로 계속 이어졌다. 산업노조의 지역조직도 자리를 잡아갔다. 금속과 화학 등 제조업 사업장이 시기 집중투쟁을 전개하면서 많은 성과를 냈다.
이 시기 지역연대투쟁의 힘은 2004년 우진교통 투쟁에서 정점에 달했다. 임금체불로 파업에 돌입한 우진교통은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하면서 본격적으로 투쟁에 들어섰다. 청주시청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투쟁하러 갔다 진입농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권력의 침탈로 전 조합원과 연대단위 전원이 연행되었으나, 이후 2주일간 연일 600여명이 참여하는 야간 청주시청 앞 5차선 전면 점거 투쟁이 지속되었고 지역 연대 총파업이 결의되었다. 그러자 청주시장이 노조요구를 전면 수용하여 체불임금과 회사주식을 맞교환하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이후 우진교통은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이닉스 매그나칩 사내하청 패배와 지역연대의 침체
2004년 하이닉스 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사내하청 노동조합을 결성했다가 12월 31일자로 도급해지로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후 2년 4개월간의 투쟁은 결국 패배로 끝이 났다. 지역연대 총파업까지 지역 노동운동은 총력을 집중했으나 노무현 정권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공권력의 벽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하이닉스 매그나칩은 부도로 산업은행이 주인이었다.)
이 패배는 지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징역과 집행유예, 벌금형을 받았다. 패배감이 압도하여 연대투쟁의 기풍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연대가 잘 안 되다보니 신규사업장이 만들어졌다가도 깨지고 결국 패배의식이 강화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공단의 미조직 노동자들도 움츠러들었고 자본은 진성도급화를 추진하여 정규직화 투쟁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투쟁 과정에서 지역본부와 산별 지역조직의 갈등, 지역 활동가들의 갈등이 확대되었다.
2008년 이후 지역의 많은 투쟁 사안이 있었으나 지역본부 차원의 연대투쟁은 미약했고 연대의 폭이 산별연맹 내로 갇히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세한 신규노조의 투쟁이 연이어 패배하기도 하였다. 2009년에는 총 10개 노조가 참가한 ‘구조조정 저지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였다. 이를 통해 구조조정 투쟁을 지역 차원의 공동투쟁으로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각 사업장별 구조조정 및 투쟁 시기, 대응방식의 차이 등으로 인해 한국네슬레노조 매각저지 투쟁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2011년 유성기업 투쟁과 지역연대의 복원
2010년 아동 양육시설을 사유화 한 충북희망원 사측이 일방적으로 시설 폐쇄를 선언한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조합원들의 피나는 투쟁에 지역 활동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 지역 연대투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2011년 유성기업의 투쟁은 지역 연대투쟁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유성지부조합원들은 지역 연대투쟁에 최선두에 서왔다. 그러다보니 지역 분위기가 좋지 않았음에도 그동안 연대를 받았던 조합과 조합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서로 갈라져 있던 활동가들도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진 청주시립노인전문병원 간병노동자들의 해고자 복직 투쟁은 간병에 대한 사회공공성 문제를 제기하고 해고자 복직과 간병노동자의 권리 확장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의료공공성을 파괴하는 효성병원에 맞서 지역 연대투쟁은 다시 한번 힘을 발휘했다.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의 교훈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은 역사도 짧고 타 지역에 비해 조합원의 규모가 작지만 매우 강력한 지역연대의 역사와 기풍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지역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대공장이 없고 중소규모의 노동조합이 주를 이루고 있어 단위 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힘을 지역연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금속 지역지부 중 경주지부의 사례와 유사하다. (충북지역 가장 큰 노동조합은 조합원 1,800여명 규모의 LG화학이다.)
둘째, 지역 노동운동의 형성과정에서 지역연대와 지역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년대 초 ‘좋은 친구들’의 역할은 공단조직화의 사례로서 적극 검토해 볼만 하다. 한편 9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지역연대가 민주노총 창립과정과 이후 산별연맹 중심의 노동운동 재편 과정에서 약화된 사례가 타 지역에서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충북의 경우 단위 노조와 지역 단체, 활동가들이 통합적인 논의틀 내에서 지역본부를 창립하였고 이후 지역본부가 중심이 되어 조합확대 사업을 추진하였다. 산별조직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역사가 지역본부 중심의 지역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던 토양이 되었다.
셋째, 지역본부가 매년 실시해 온 활동가·간부교육이 사업장을 넘어선 활동가들의 교류와 통합력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충북지역본부는 매년 9월부터 4개월 동안 “현장맞춤교육”을 실시해 왔다. 작년의 경우 정세, 철학, 경제학, 성평등, 노동운동사, SNS, 노동역사기행 등의 주제로 진행되었다. 교육 방식은 참가자들이 교재를 읽고 발제하고 토론하는 식이다. 지역, 사업장, 연배 등 다양하게 팀을 구성하는데 한때는 10개 넘게 팀이 구성된 적도 있다고 한다. 유성지부의 경우 매년 교육에 참여해 왔는데 그 결과 조합원의 절반 가까이 교육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유성 조합원들이 지역의 다른 조합원들과 맺은 관계가 2011년 유성에 대한 지역연대의 기반이 되었다. 지역운동이 침체되면서 현장맞춤교육도 함께 침체되었는데 이를 복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김용직 사무처장은 강조했다.
지역 노동운동이 질적·양적으로 크게 발전했던 2000년에서 2004년의 시기는 지역 연대를 통해 개별 사업장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다시 승리한 사업장이 지역 연대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선순환이 작동했던 시기다. 특히 기존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상시적인 연대대오가 구축되고 신규사업장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냄으로써 더 많은 신규조직화와 더 튼튼한 연대대오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처럼 미조직 조직화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존 조직을 중심으로 든든한 지원군, 연대대오의 형성이 중요하며, 미조직 조직사업과 기존 조직의 재조직화 사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충북지역본부는 2011년 복구된 지역연대의 힘을 가지고 청주나 청원 지역의 공단 등에 대한 전략조직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김용직 사무처장은 지역본부와 산별조직, 현장활동가가 함께 현장조직 사업을 벌여 ‘잃어버린 청주공단’을 꼭 되찾아 오겠다고 했다.
충북지역 노동자운동은 강력한 지역연대를 무기로 노동운동의 불모지라 불리던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 왔다. 충북지역의 전투적이고 헌신적인 연대투쟁의 전통은 앞으로 더 자세하게 연구되고 전파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