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과 노동
현 시기 노동운동의 재벌개혁운동 과제
재벌과 중소기업의 공통된 이해
2012년 7월 마지막 주, 하계휴가 전날, SJM과 만도에 10시간 차이로 용역깡패가 투입되고 직장폐쇄가 이뤄졌다. 경주 발레오만도에서부터, 대구 상신브레이크, 구미 KEC, 충청 유성기업을 거쳐 이제 경기 SJM과 전국 사업장 만도에 민주노조 와해 시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SJM은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핵심 사업장이고, 만도는 가장 큰 부품사 사업장이자 완성차 지부와 가장 유사한 노조다. 이번 사태는 금속노조 경남부터 지역지부의 핵심 사업장을 파괴해온 흐름의 종착지이자, 이제 대공장 사업장에도 얼마든지 자본이 금속노조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선전포고라 할 만하다.
물론 이 배후에 현대차 노무 전략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현대차를 매개로 하지 않는 이상 SJM과 만도는 서로 관계없는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SJM은 현대차의 관리 아래 세종공업, 세정, 포레시아, 우신공업 등 배관시스템(마후라) 제조업체에 벨로우즈를 납품하던 업체고, 만도는 제동장치, 조향장치, 서스펜션 제조업체다. 전혀 관계없는 두 사업장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용역깡패와 직장폐쇄가 하루의 시간차를 두고 진행되었다. 양재동(현대차 본사) 노무팀의 작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발레오만도 직장폐쇄 때 현대차와 발레오만도가 바이백(중국산 역수입) 제품에 대해 미리 협의를 끝냈던 일, 유성기업 직장폐쇄 수일 전부터 아예 현대차 노무팀에서 유성기업에 상주하며 용역깡패부터 노무사까지 대주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7월 27일, 익산, 평택, 문막, 안산, 시흥에서 한 날 발생한 일 또한 비슷한 정황들이 많다.
최근 노골적으로 진행 중인 현대차의 부품사 민주노조 와해 공작은 현대차와 부품사 자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대차의 생산방식은 강한 부품사 노조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차는 2000년대부터 부품 공급의 시간과 순서까지도 통제하며 재고를 최소화하는 적시서열(JIS) 방식의 생산을 확대해 왔다. 이는 토요타의 적시생산을 더욱 확대한 방식으로 현대차는 이를 타 자동차 업체에 대한 강한 경쟁력 우위 요소로 밝히고 있다. 현대차 입장에서 문제는, 라인이 공장 밖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직서열 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하청 기업에 대한 안정적 노무 관리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차는 1차 부품사 지회들에 대한 통제를 원했고, 최근 몇 년간 금속노조 지역지부 핵심 사업장에서 벌어진 노조와해 공작은 이명박 정부의 노동배제적 노사관계 정책을 배경으로 현대차의 하청 기업 노사관계개입이 극단적으로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올해의 경우, 수년간 무쟁의 상태였던 현대차지부, 기아차지부가 주간연속2교대제를 쟁점으로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고 있는 점이 현대차가 더욱 공격적으로 부품사 노조 공격에 나선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공장 기업지부인 만도에 어용노조가 쉽게 조직될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현대차 지부, 기아차지부에 큰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주간연속2교대 시행 사업장이자,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대표 사업장인 SJM에 용역깡패를 동원한 직장폐쇄는 금속노조 전체 임단협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에 대한 협박이자, 고립 전략인 셈이다. 현대차 사측이 올해 케피코, 위아, 메티아 등 계열사 노조 요구를 예전과 달리 매우 빠르게 수용하며 그룹 내에 두 지부 임단협만 남겨두었다는 점은 이러한 전략이 단지 추측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
부품사 자본 입장에서도 현대차의 이러한 전략은 이득이다. 강한 현장통제력과 경영감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조합은 자본에게 눈엣가시이기 때문이며, 특히 세계 경제위기 이후 대부분의 부품사 노조들이 취하고 있는 기업 재편 전략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2008년 만도를 재인수한 한라그룹 정몽원 회장은 만도를 다시 그룹에 통합시키기 위해 재무 관계, 내부거래 관계에서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2010년 재상장 시점부터는 공개적으로 노조에 대해 반감을 표하기 시작했고, 올해는 아예 지부장에 대한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조가 요구한 깁스 인수가 경영권 침해라는 것이 직장폐쇄의 표면적 이유지만, 사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라그룹이 만도 재통합을 하는 것에 노동조합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의 금속노조에 대한 공격적 태도는 큰 힘이 되었다.
SJM은 2세 경영권 상속이 배경이다. 이는 SJM의 경영승계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SJM에서 지분승계 과정이 끝났지만 2세 경영인 김휘중 대표는 실질적 경영 책임자로 역할하지 못했다. 그룹의 핵심 기업인 SJM의 대표이사는 창업주 김용호 회장이 맡고 있으며, 김휘중 대표는 지주회사 대주주로만 존재했다. 이 상황에서 지주회사 건설 시 재무관련 역할을 했고, 이후 노무관련 책임자로 나선 민흥기 이사가 2세 경영체제를 위해 노동조합을 밀어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공격적으로 기존 노사관계를 파행으로 내몰며, 직장폐쇄를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직장폐쇄는 올해 초부터 노골적으로 준비되었다.
경주 발레오만도, 대구 상신브레이크, 충청 유성기업 역시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본사 경영위기 속에 더 많은 자본 유출을 원했던 발레오만도나, 2공장 건설을 앞두고 노조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내려 했던 상신이나, 내부거래 확대 속에 유성기업의 부를 비상장계열사로 더 이전하려 했던 유성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현대차의 중장기적 노무관리 전략, 정세적으로 올해 현대차 기아차 지부를 고립시키고 협박해야 할 필요, 이런 현대차의 필요를 배경으로 공격적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부품사 자본, 이 모든 것이 시장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정부. 이들의 공모가 7월 27일 사태의 배경이다. 현대차의 기조실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감사팀, 부품사 공급 관리 명분으로 부품사 노조탄압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는 구매본부가 이를 주도했다. 자본의 이해관계가 중장기적으로도 금속노조 와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현대차 자본의 금속노조 와해 공작도 점점 더 확대될 것이다.
재벌개혁을 이야기하는 많은 논자들은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대립하는 자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례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민주노조 탄압이라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제품 거래 관계에서 갈등이 첨예한 것도 사실이나, 이 또한 최근 1차 하청과 원청이 해외로 동반 진출하는 사례가 늘어나며 오히려 갈등보다는 ‘조정’과 ‘협력’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리는 추이다. 물론 여기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것은 ‘노동’이다.
시대의 큰 의제가 된 재벌개혁. 하지만 지금까지 이 의제에 노동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외삽적으로 다뤄지는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다. 재벌의 부를 만드는 것도,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거래가 가능하게 하는 것도 노동이지만 말이다. 어떤 점에서는 재벌개혁 의제 자체가 노동배제적이기까지 하다.
경제 위기와 재벌
한국에서 재벌 문제가 범사회적 쟁점이 될 때는 항시 경제위기가 있어 왔다.
98년 IMF시기에는 4대 구조개혁의 첫 번째가 재벌개혁이었다. 재벌들의 무분별한 해외차입이 외환위기의 중요한 원인이 된 바, IMF와 국내 시민단체들은 재벌에 관한 규제를 요구했다. IMF는 주요 재벌개혁으로 부실계열사 정리 또는 매각, 회계투명성, 사외이사제 및 소액주주권한 확대 등을 요구했다.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 역시 소액주주운동을 펼치며 IMF와 비슷한 재벌개혁을 요구했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재벌 개혁 요구는 빈부격차 확대가 배경이다. 세계경제위기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하락하고, 생활고가 가중되는 상태에서 삼성전자, 현대차 등의 재벌은 경제위기 이전에 비해서도 더욱 큰 수익을 남겼다. 삼성전자, 현대차 모두 2008~2009년 이익이 줄지 않은 것은 물론 2010년에는 창사 이래 최고의 순익을 남겼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동반성장위원회를 꾸려 재벌 대기업 성장이 중소기업에게까지 혜택이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고, 시민단체들은 출자총액제한 부활, 내부거래 규제, 중소기업보호업종 확대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재벌개혁은 두 시기 모두 사회적으로 쟁점화 된 것에 비해 결과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재벌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구조조정은 재벌과 초국적자본에 막대한 이득만 올려준 사례가 더 많았다.
단적인 예로 삼성전자, 현대차, SK, LG, 한화, 두산 등의 자산규모와 매출액은 2000년에 이전 상태를 회복했고, 2001년부터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성장했다. 2002년 30대 재벌들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GDP대비 60%까지 상승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재벌들의 독점력은 더욱 심각했다. 2011년 삼성전자는 120조원 매출에 11조원 영업이익을, 현대차는 42조원 매출에 4조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두 회사가 지배하는 종속회사들을 합하면 삼성전자는 165조원 매출에 16조원 영업이익, 현대차는 77조원 매출에 8조원의 영업이익이다. 그룹차원으로 확대하면 액수는 더 커진다. 삼성그룹은 183조원 매출에 15조원 영업이익을, 현대차그룹은 132조원 매출에 11조원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두 기업의 매출 총액은 2011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예산 총액의 84%에 달한다. 두 재벌그룹이 굴리는 돈이 정부에 못지않다.
두 기업은 모두 2008~2009년 경제위기 이후 급성장했다. 2007년 삼성전자와 그 종속회사들은 98조원 매출에 9조원 영업이익을 기록하다 경제위기를 거치며 매출은 74%, 영업이익은 77%가 늘어났다. 현대차와 그 종속회사들 역시 2007년 69조원 매출에 3조원 영업이익에서 매출은 12%, 영업이익은 166% 늘었다. 같은 기간 한국경제성장률이 12.4%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성장 속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두 기업은 경제위기를 거치며 한국경제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했다.
한편 이런 성장 속에 이들 재벌들의 고용 증가는 미미하다. 이 두 기업이 국내에서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는 삼성전자가 10만명, 현대차가 5만7천명이다. 2007년 말에 비해 각각 19%, 3% 늘어난 수치다. 삼성전자는 얼핏 고용이 크게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매출과 이익이 갑절씩 늘어난 것에 비하면 고용 증가율은 사실 낮다고 봐야 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두 기업의 고용 증가가 더딘 이유는 해외공장과 외주화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주력 상품인 휴대폰은 국내에서 20% 미만만 생산된다. 나머지는 베트남, 브라질 등에서 생산된다. TV는 아예 국내에서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대부분을 생산했던 반도체와 LCD패널 역시 내년부터는 상당량이 중국에서 생산된다. 현대차는 2010년부터 국내외 생산 비중이 역전되어 작년에는 전체 차의 54%가 국외에서 생산되었다. 작년 러시아 공장에서 생산이 시작되었고, 올해와 내년에는 중국에서 생산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본사가 한국에 있지만 이 두 기업은 생산과 고용 면에서 보면 더 이상 한국기업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향후 세계경제위기가 더 깊어지고 자주 반복되리라는 점이다. 위기가 한 동안 더욱 자주 반복될 것이라는 것은 좌우파를 떠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바이다. 1998년이나 2008년의 경험이 그대로 반복된다면 재벌의 경제적 지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특히 재벌 내의 재벌로 불리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는 다른 재벌과도 격차를 벌리며 성장할 것이다.
한편, 98년 이전 재벌 대기업과 함께 성장했던 한국 민주노조 운동은 98년 이후 재벌 성장에 비례해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87년부터 97년까지 재벌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와 신규 고용, 그리고 이에 따른 조합의 확대와 영향력 증가가 비례했다면, 98년 이후에는 고용 없는 성장에 따른 대기업 조합원들의 노령화, 아웃소싱 증가에 따른 조합원 감소, 부품사까지 확대되는 재벌 대기업의 노무관리 능력 등으로 재벌이 커지는 만큼 오히려 노조가 약화됐다.
자신은 물론이고, 납품업체 역시 노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가지고 있는 범삼성그룹(삼성전자, CJ, 신세계)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진출과 적기적시 생산 시스템을 강화한 현대자동차는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 현대차 계열사 지회 약 10만 개 정도를 제외하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다른 자동차 부품사 민주노조에 대해서는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상속과 관련해서 설립된 물류회사 글로비스마저 특수고용노동자 조직인 화물연대를 깨고 있는 실정이다.
2000년대 성장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시작한 대표적 예는 두산그룹과 롯데그룹이다. 두산은 중공업, 인프라코어를 인수함과 동시에 노조 파괴 공작을 10여 년간 진행해왔고, 최근에 인프라코어에서 어용노조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롯데는 롯데호텔노조에 대해 특공대까지 투입하는 초강경 대응까지 한 이후 끈질긴 공작으로 민주노조를 와해시켰다. 일찍부터 노조를 길들인 현대중공업, 어용노조를 통한 노무관리의 달인이라 할 LG, 한화 등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대기업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재벌의 성장은 산업적 차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다. 노동운동이 더 이상 재벌 문제를 우회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재벌해체와 민주노조
통합진보당은 연초 재벌해체를 타이틀로 한 법안을 제출했고, 민주노총은 ‘노동존중’ 사회를 위한 과제 중 하나로 재벌해체를 내걸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가 재벌개혁 의제로 소수지분의 총수 지배권 문제를 핵심으로 내건 이후 재벌개혁은 총액출자제한, 순환출자 금지 등을 얼마나 강하게 추진 하냐는 문제가 되었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노총의 주장은 그 연장선에 있다.
98년 해체된 재벌그룹, 한라그룹과 대우그룹의 예를 보자.
현대차 가문의 정몽원 회장이 분가해 만든 한라그룹은 자동차부품 만도기계, 한라공조, 조선 한라중공업, 건설 한라건설, 제지 한라펄프제지 등 18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1998년 유동성위기가 오며 핵심계열사 대부분을 초국적기업에 매각했다. 만도기계는 로스차일드 펀드에, 포드와 합작사였던 한라공조는 비스티온에, 보쉬와 합작사였던 캄코(현 보쉬전장)는 보쉬에, 한라펄프(현 보워터코리아)는 보워터에 매각했다. 현대중공업에 매각된 한라중공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헐 값 인수를 목적으로 들어온 초국적 기업이 사들였다. 이중 만도기계는 로스차일드가 다시 분리매각하는 과정을 거쳐, 평택/문막/익산 공장(현 만도)은 JP모건 계열사인 선세이지에 매각했고, 경주 공장(현 발레오전장시스템)은 발레오에 매각했으며, 가전제품을 만들던 아산 공장(현 위니아만도)은 CVC라는 초국적사모펀드에 매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분리매각을 진행해 문막 공장 안에 존재하는 다이캐스팅 사업부(현 깁스코리아)를 미국 깁스에 넘겼다.
대우그룹 역시 비슷했다. 1998년 대우그룹 부도 이후에 대우자동차는 트럭 공장, 버스 공장, 승용차공장(부평, 창원, 군산)으로 나뉘어 각각 인도 타타, 영안모자, GM에 분리 매각되었다. 심지어 승용차 부분에서 부평공장은 별도 법인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다 2006년에야 지엠대우차에 인수되었다. 대우중공업은 대우종합기계, 대우조선, 잔존사업부로 나뉘어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는 두산그룹에 매각되었고, 대우정밀(현 S&T모티브)은 S&T그룹에 매각되었으며, 잔존사업부(현 현대로템)는 현대로 매각되었다. 대우전자와 대우모터 일부 사업부는 합병 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재탄생해 아직까지 산업은행 관리 하에 있으며, 대우조선 역시 산업은행이 대주주인 상태로 남겨져있다. 한편 전자계열사였던 오리온전기는 오션링크라는 초국적 사모펀드에 매각되어 이후 사업부가 갈가리 찢긴 상태에서 청산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체된 기업들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작건 크건 모두 구조조정 과정이 한 차례 이상 진행되었고, 십 수 년간 노조 탄압을 경험했다. 금속노조에서 최근 5년 간 노조탄압 사업장으로 유명했던 사업장 중 상당수는 매각된 한라그룹 사업장들이다. 보워터코리아(2009년부터 노조간부 징계, 손배소 등), 발레오전장(2010년 초 직장폐쇄와 용역깡패 투입, 노조와해), 위니아만도(2008년부터 대규모 배당잔치 뒤 구조조정, 노조무력화), 보쉬전장(2012년 어용노조 설립 후 금속 탄압), 깁스코리아(2012년 공장 청산 후 자본 도피), 그리고 최근 만도(2012년 직장폐쇄, 용역깡패 투입 뒤 어용노조 설립)까지 모두 그러하다.
이렇게 재벌그룹에서 매각된 사업장들의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업장에 비해 더욱 큰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특히 초국적기업에 매각된 사업장들은 초고배당과 입만 열면 자본이 이야기하는 공장 철수 설 때문에 항시 불안 속에 살아야 했다. 금속노조 경주지부의 핵심 사업장이었던 발레오만도가 2010년 직장폐쇄 후 10여일 만에 무너졌던 결정적 계기도 사측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공장철수설이었다. 초국적기업 사측이 지속적으로 노조를 약화시킬 수단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우그룹의 노동자들 역시 그룹 해체 이후 불안과 노동탄압 속에서 살았다. 2001년 대규모 정리해고 투쟁 이후 대우차 노동조합은 10년 간 제대로 된 파업 한 번 못해봤으며, 두산인프라코어는 2011년 초 어용노조를 출범시키며 민주노조를 와해시켰다. 초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병존했던 대우일렉트로닉스는 결국 회사노조로 정리되었고, 금속노조 구미의 핵심사업장이었던 오리온전기는 수차례의 정리해고 끝에 2005년 청산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벌이 해체 된 이후 중소기업들의 상황은 나아졌을까? 물론 전혀 아니다.
예를 들면 대우차는 지엠에 넘어간 이후 부품 공급을 본사 기준에 따라 글로벌 소싱하면서 국내 부품사와의 전략적 관계 대부분이 끊어졌다. 제조업 기업이 아닌 금융펀드들이 인수한 회사는 이러한 양상이 더욱 심했다. 계열사들이 초국적기업에 의해 갈가리 찢긴 한라그룹에 납품하던 중소기업들 중 상당수는 2000년대 초중반 매우 큰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도가 나든 아니면 법적 제한으로 그룹(혹은 기업집단)이 해체되든 진행되는 양상은 비슷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재벌해체 자체가 노동자에게 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룹에서 빠져 초국적기업 혹은 사모펀드, 또는 국내 중견기업에게 인수된 경우에 해당 기업 노동자들은 극도의 고용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 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역시 심각한 불안 상태에 놓였다.
재벌개혁 논쟁의 이면, 한국사회 성장론
재벌개혁이 사회적 의제가 되자 학계에서도 재벌개혁과 관련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반주변부 국가 발전모델로 유명한 장하준 교수와 재벌개혁론자로 유명한 김상조 교수가 논쟁의 두 축이었다. 책과 언론기고를 통해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외형은 재벌개혁의 타당성이었지만 핵심은 사실 한국사회 성장론에 관한 것이다.
김상조 교수를 필두로 한 재벌개혁론 진영은 내수중심성장-중소기업육성이 한국사회 성장의 기본 축이라고 본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시민연대에는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조하는 입장부터, 주주에 의한 통제를 강조하는 입장까지 다양하지만 소수 재벌로의 경제 집중이 내수중심성장과 중소기업육성에 큰 장애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한다. 재벌은 성장의 동력이 아니라 동네 빵집까지 노리는 탐욕의 화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약탈자라는 것이다.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기 위해 재벌은 현재와 같은 구조가 아니라 좀 더 작은 단위로 분리되어야 하고(지배구조 개선), 시장에 의해 공정하게 감시(투자자에 의한 감시)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장하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필요한 것은 대규모 투자를 통한 (제조업 중심)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은 재벌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국가에서 중소기업 중심 성장은 역사적 맥락에서도, 현재 세계경제 구조를 볼 때도 불가능한 일이며, 역기능을 최대한 규제하되 재벌과 같은 대규모 기업집단의 순기능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제가 되고 있는 재벌 지배구조는 기업집단법을 만들어,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규제할 건 규제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경우 한계기업은 한계기업으로 정리해야 하며, 이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산업에서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선순환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진보진영에서는 김상조 교수 식의 재벌개혁론이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최근 이건희, 정몽구, 김승연, 최태원 등 조폭 두목 식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재벌 총수들의 행태나, 이들의 반노조 태도 등은 진보진영을 넘어 시민들의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재벌대기업-수출에 대립하는 중소기업-내수라는 틀 역시 악과 선의 대립으로 작동했다. 최소한 진보진영에서는 진보의 당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경험적으로 봐도 재벌그룹이 개별기업으로 해체된다고, 또는 재벌 총수가 전문 경영진으로 바뀐다고 뭔가 특별한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만도기계가 한라그룹에서 분리되어 사모펀드의 관리 하에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는 대기업이 되었다고 하청 중소기업들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았고, 사실상 순환출자구조가 해소되어 금호타이어만 소유한 박찬구 회장이 예전과 다른 경영, 중소기업과 정상적 거래를 한 것도 아니었다.
재벌개혁론 진영에서 강조하는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거래 개선 방안 역시 얼핏 타당해 보이지만 실제 그것이 핵심인지는 의문이다. 첫 번째 문제는 1차 부품사들이 원청으로부터 좀 더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한다고 해서 부품사 노동자들의 조건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원하청거래의 가장 진일보한 입장이라는 이윤공유제를 보자. 이윤공유제를 실시하고 있는 브라질 헤센데 지역의 폭스바겐 부품사 사례를 보면, 부품사들은 공유할 이윤을 크게 늘리기 위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했다. 정규직 고용을 부품사들이 오히려 상호 규제하기까지 했는데, 한 기업이 정규직을 고용하여 노동비용을 높이면 모든 기업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1차 부품사들에 대해 아예 노골적으로 노동 배제적 이윤 공유를 하고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 휴대폰 케이스 생산과 조립을 하는 한 중소기업은 삼성전자로부터 자본 투자도 받고, 해외진출 시 부지와 공장 건설에 관한 협조도 받으며, 납품가 역시 신제품 출시 때마다 곧잘 올려받고 있다. 그야말로 원하청 상생의 모범이라 할 만한데, 이 기업의 노동자들은 모두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당연히 노조는 꿈도 못 꾼다.
두 번째로, 과연 현재 제조업에서 과연 재벌에 배제된 중소기업이 그렇게 많은지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현재 자동차부품사의 절반 가까이는 사실상 현대차와 분업 구조만 갖추었을 뿐 재벌개혁론에서 이야기하는 재벌과 대당하는 자본이 아니다. 유성기업, SJM, 상신브레이크 등 현대차를 뒤에 업고 노조를 탄압한 사업장뿐만 아니라 현대차가 직접 거래하는 6백여개 중소기업 대부분이 그렇다. 심지어 2차 부품사, 또는 3차 부품사라고 지칭되는 기업 중 상당수도 알고 보면 이들 부품사가 법인 분리, 또는 인수하며 사실상 중소그룹의 계열사인 경우가 많다. 현재 주요 산업에서 보면 재벌에 의해 배제된 중소기업이 다수라고 보기 힘들다. 최소한 제조업에서는 그렇다. 재벌에 의해 배제된 자본은 해외로 이전했거나 아니면 아예 재벌과 관계없는 일부 산업의 중소기업이 다수다. 요컨대 중소기업성장론은 현재 상태에서 보면 대상이 불분명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서비스 부문에 속하는 일부 자영업 정도가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재벌총수와 타협하고 신산업 중심 성장을 이루자는 이야기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의 재벌 가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60여년의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시민적 상식과 단절되었고, 충분한 계급투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자들이다. 한국에서 재벌 가문이 형성되고 그들만의 혈연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개인적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재벌 가문들에 대한 큰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한 재벌 타협론은 탁상공론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제도적 규제를 통해 제왕적 경영에서 입헌군주제 식 경영으로 나가자고 하지만 과연 유혈 혁명 없이 이 전환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또한 세계 자본주의 위기 과정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과연 자본주의 전체가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 신성장 산업 중심의 축적을 이루는 것이 가능한가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장하준 스스로도 이야기하듯이 1970년대 이래 산업적 성장이라는 것은 기존 제조업의 부가가치를 분배받는 서비스업에 그쳤다. 전자, 기계, 화학 산업과 같은 제조업의 대규모 성장은 1970년대 초반을 정점으로 끝났다.
한국은 뒤늦게 1990년대 초반 재벌 대기업 중심으로 큰 (외채에 기반한) 자본 축적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세계적 경향을 뛰어넘지 못하고 1998년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 이후에 재벌들의 투자는 이미 익히 알려진 것처럼 공장과 기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외주화와 저임금 지역으로의 이전이었다. 2008년부터 세계 경제위기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이 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 1950~197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의 성장을 하자는 것은 다소 ‘박정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재벌개혁, 노동운동이 어떻게 강화될 수 있는지가 관건 - 원하청불공정거래 개선 정책의 예시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성장 중심의 전망이 그럴 듯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이 주력해야 할 것은 어설픈 개혁론, 또는 성장론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정세적 필요에 따라 적당한 제도 개선 과제를 ‘주체’의 발전 전략에 따라 활용하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는 노동자운동의 더 심각한 위기로 인해 대안 세계를 구성할 수 없는 형태로 진행 중이다.
재벌개혁과 관련해 민주노조 운동이 관여한다면 우선은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원하청 불공정거래에 관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하지만 이 또한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재벌개혁론에서 이야기하는 이윤공유제(혹은 성과공유제)여서는 곤란하다. 이윤공유제로 노동자운동이 성장할 경로가 없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의 목표는 재벌개혁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운동의 성장 매개를 그 곳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있다.
이런 점에서 원하청 관계와 관련해 금속노조가 택해야 하는 전략은 기업지불능력에 근거한 노동조건 개선이 아니라 원하청 관계에 개입하는 금속노조의 역할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림 1] 금속노조 원하청 불공정 거래 개선 정책 흐름도
불공정거래 개선 핵심정책으로서 “산별교섭”의 사회적 의제화
가장 먼저 금속노조가 추진해야 하는 것은, 현재 하도급법과 공정거래법 중심으로만 논의되고 있는 원하청 관계와 관련된 의제를 원하청 노동자 격차 축소를 위한 산별교섭 제도화 의제로 확대시켜나가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산별교섭은 원청의 납품가 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하청의 임금률 결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로 인해 산별교섭 참여 사업장이 비금속노조 사업장보다 노동조건과 기업 경영 상황 모두 좋은 상태였다. 현대차 부품사 420개를 조사한 결과 일반적으로 기업 수익률에 영향을 준다는 기업규모보다도 산별교섭 참여여부가 오히려 부품사 기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는 원하청 불공정거래에 관해서 노동의 측면은 오직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하청 기업의 지불능력 개선 이후의 효과로만 고려되었다. 하지만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은 기업간 거래에 대한 규제만이 아니라 산별노조의 역할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금속노조는 재벌 대기업 원청을 포함한 살별교섭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원하청 불공정 거래 개선에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산별교섭 제도화를 의제화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별교섭 제도화가 원하청 불공정거래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도급법, 공정거래법에 산별노조 역할에 대한 명시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확대 및 배상액 한도 증액, 공정거래법 및 하도급법 위반 사항에 대한 공정위 전속 고발권 완화, 중소기업 협동조합의 납품가 집단 교섭 허용 등 여러 수준의 원하청 불공정거래개선 정책들이 십 수년간 이야기되어 왔고, 일부는 부족하게나마 하도급법에 반영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많은 정책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상거래 관계를 법적으로 완벽하게 규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재벌 대기업이 압도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는 상태에서 제도적 규제는 더욱 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사회적 규제 정도가 실제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에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하도급법이나 공정거래법 등의 상법도 다양한 이해관계자에 의한 감시를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 주체로 금속노조가 역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2012년 7월 마지막 주, 하계휴가 전날, SJM과 만도에 10시간 차이로 용역깡패가 투입되고 직장폐쇄가 이뤄졌다. 경주 발레오만도에서부터, 대구 상신브레이크, 구미 KEC, 충청 유성기업을 거쳐 이제 경기 SJM과 전국 사업장 만도에 민주노조 와해 시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SJM은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핵심 사업장이고, 만도는 가장 큰 부품사 사업장이자 완성차 지부와 가장 유사한 노조다. 이번 사태는 금속노조 경남부터 지역지부의 핵심 사업장을 파괴해온 흐름의 종착지이자, 이제 대공장 사업장에도 얼마든지 자본이 금속노조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선전포고라 할 만하다.
물론 이 배후에 현대차 노무 전략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현대차를 매개로 하지 않는 이상 SJM과 만도는 서로 관계없는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SJM은 현대차의 관리 아래 세종공업, 세정, 포레시아, 우신공업 등 배관시스템(마후라) 제조업체에 벨로우즈를 납품하던 업체고, 만도는 제동장치, 조향장치, 서스펜션 제조업체다. 전혀 관계없는 두 사업장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용역깡패와 직장폐쇄가 하루의 시간차를 두고 진행되었다. 양재동(현대차 본사) 노무팀의 작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발레오만도 직장폐쇄 때 현대차와 발레오만도가 바이백(중국산 역수입) 제품에 대해 미리 협의를 끝냈던 일, 유성기업 직장폐쇄 수일 전부터 아예 현대차 노무팀에서 유성기업에 상주하며 용역깡패부터 노무사까지 대주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7월 27일, 익산, 평택, 문막, 안산, 시흥에서 한 날 발생한 일 또한 비슷한 정황들이 많다.
최근 노골적으로 진행 중인 현대차의 부품사 민주노조 와해 공작은 현대차와 부품사 자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대차의 생산방식은 강한 부품사 노조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차는 2000년대부터 부품 공급의 시간과 순서까지도 통제하며 재고를 최소화하는 적시서열(JIS) 방식의 생산을 확대해 왔다. 이는 토요타의 적시생산을 더욱 확대한 방식으로 현대차는 이를 타 자동차 업체에 대한 강한 경쟁력 우위 요소로 밝히고 있다. 현대차 입장에서 문제는, 라인이 공장 밖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직서열 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하청 기업에 대한 안정적 노무 관리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차는 1차 부품사 지회들에 대한 통제를 원했고, 최근 몇 년간 금속노조 지역지부 핵심 사업장에서 벌어진 노조와해 공작은 이명박 정부의 노동배제적 노사관계 정책을 배경으로 현대차의 하청 기업 노사관계개입이 극단적으로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올해의 경우, 수년간 무쟁의 상태였던 현대차지부, 기아차지부가 주간연속2교대제를 쟁점으로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고 있는 점이 현대차가 더욱 공격적으로 부품사 노조 공격에 나선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공장 기업지부인 만도에 어용노조가 쉽게 조직될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현대차 지부, 기아차지부에 큰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주간연속2교대 시행 사업장이자,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대표 사업장인 SJM에 용역깡패를 동원한 직장폐쇄는 금속노조 전체 임단협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에 대한 협박이자, 고립 전략인 셈이다. 현대차 사측이 올해 케피코, 위아, 메티아 등 계열사 노조 요구를 예전과 달리 매우 빠르게 수용하며 그룹 내에 두 지부 임단협만 남겨두었다는 점은 이러한 전략이 단지 추측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
부품사 자본 입장에서도 현대차의 이러한 전략은 이득이다. 강한 현장통제력과 경영감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조합은 자본에게 눈엣가시이기 때문이며, 특히 세계 경제위기 이후 대부분의 부품사 노조들이 취하고 있는 기업 재편 전략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2008년 만도를 재인수한 한라그룹 정몽원 회장은 만도를 다시 그룹에 통합시키기 위해 재무 관계, 내부거래 관계에서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2010년 재상장 시점부터는 공개적으로 노조에 대해 반감을 표하기 시작했고, 올해는 아예 지부장에 대한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조가 요구한 깁스 인수가 경영권 침해라는 것이 직장폐쇄의 표면적 이유지만, 사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라그룹이 만도 재통합을 하는 것에 노동조합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의 금속노조에 대한 공격적 태도는 큰 힘이 되었다.
SJM은 2세 경영권 상속이 배경이다. 이는 SJM의 경영승계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SJM에서 지분승계 과정이 끝났지만 2세 경영인 김휘중 대표는 실질적 경영 책임자로 역할하지 못했다. 그룹의 핵심 기업인 SJM의 대표이사는 창업주 김용호 회장이 맡고 있으며, 김휘중 대표는 지주회사 대주주로만 존재했다. 이 상황에서 지주회사 건설 시 재무관련 역할을 했고, 이후 노무관련 책임자로 나선 민흥기 이사가 2세 경영체제를 위해 노동조합을 밀어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공격적으로 기존 노사관계를 파행으로 내몰며, 직장폐쇄를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직장폐쇄는 올해 초부터 노골적으로 준비되었다.
경주 발레오만도, 대구 상신브레이크, 충청 유성기업 역시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본사 경영위기 속에 더 많은 자본 유출을 원했던 발레오만도나, 2공장 건설을 앞두고 노조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내려 했던 상신이나, 내부거래 확대 속에 유성기업의 부를 비상장계열사로 더 이전하려 했던 유성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현대차의 중장기적 노무관리 전략, 정세적으로 올해 현대차 기아차 지부를 고립시키고 협박해야 할 필요, 이런 현대차의 필요를 배경으로 공격적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부품사 자본, 이 모든 것이 시장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정부. 이들의 공모가 7월 27일 사태의 배경이다. 현대차의 기조실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감사팀, 부품사 공급 관리 명분으로 부품사 노조탄압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는 구매본부가 이를 주도했다. 자본의 이해관계가 중장기적으로도 금속노조 와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현대차 자본의 금속노조 와해 공작도 점점 더 확대될 것이다.
재벌개혁을 이야기하는 많은 논자들은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대립하는 자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례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민주노조 탄압이라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제품 거래 관계에서 갈등이 첨예한 것도 사실이나, 이 또한 최근 1차 하청과 원청이 해외로 동반 진출하는 사례가 늘어나며 오히려 갈등보다는 ‘조정’과 ‘협력’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리는 추이다. 물론 여기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것은 ‘노동’이다.
시대의 큰 의제가 된 재벌개혁. 하지만 지금까지 이 의제에 노동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외삽적으로 다뤄지는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다. 재벌의 부를 만드는 것도,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거래가 가능하게 하는 것도 노동이지만 말이다. 어떤 점에서는 재벌개혁 의제 자체가 노동배제적이기까지 하다.
경제 위기와 재벌
한국에서 재벌 문제가 범사회적 쟁점이 될 때는 항시 경제위기가 있어 왔다.
98년 IMF시기에는 4대 구조개혁의 첫 번째가 재벌개혁이었다. 재벌들의 무분별한 해외차입이 외환위기의 중요한 원인이 된 바, IMF와 국내 시민단체들은 재벌에 관한 규제를 요구했다. IMF는 주요 재벌개혁으로 부실계열사 정리 또는 매각, 회계투명성, 사외이사제 및 소액주주권한 확대 등을 요구했다.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 역시 소액주주운동을 펼치며 IMF와 비슷한 재벌개혁을 요구했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재벌 개혁 요구는 빈부격차 확대가 배경이다. 세계경제위기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하락하고, 생활고가 가중되는 상태에서 삼성전자, 현대차 등의 재벌은 경제위기 이전에 비해서도 더욱 큰 수익을 남겼다. 삼성전자, 현대차 모두 2008~2009년 이익이 줄지 않은 것은 물론 2010년에는 창사 이래 최고의 순익을 남겼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동반성장위원회를 꾸려 재벌 대기업 성장이 중소기업에게까지 혜택이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고, 시민단체들은 출자총액제한 부활, 내부거래 규제, 중소기업보호업종 확대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재벌개혁은 두 시기 모두 사회적으로 쟁점화 된 것에 비해 결과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재벌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구조조정은 재벌과 초국적자본에 막대한 이득만 올려준 사례가 더 많았다.
단적인 예로 삼성전자, 현대차, SK, LG, 한화, 두산 등의 자산규모와 매출액은 2000년에 이전 상태를 회복했고, 2001년부터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성장했다. 2002년 30대 재벌들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GDP대비 60%까지 상승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재벌들의 독점력은 더욱 심각했다. 2011년 삼성전자는 120조원 매출에 11조원 영업이익을, 현대차는 42조원 매출에 4조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두 회사가 지배하는 종속회사들을 합하면 삼성전자는 165조원 매출에 16조원 영업이익, 현대차는 77조원 매출에 8조원의 영업이익이다. 그룹차원으로 확대하면 액수는 더 커진다. 삼성그룹은 183조원 매출에 15조원 영업이익을, 현대차그룹은 132조원 매출에 11조원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두 기업의 매출 총액은 2011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예산 총액의 84%에 달한다. 두 재벌그룹이 굴리는 돈이 정부에 못지않다.
두 기업은 모두 2008~2009년 경제위기 이후 급성장했다. 2007년 삼성전자와 그 종속회사들은 98조원 매출에 9조원 영업이익을 기록하다 경제위기를 거치며 매출은 74%, 영업이익은 77%가 늘어났다. 현대차와 그 종속회사들 역시 2007년 69조원 매출에 3조원 영업이익에서 매출은 12%, 영업이익은 166% 늘었다. 같은 기간 한국경제성장률이 12.4%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성장 속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두 기업은 경제위기를 거치며 한국경제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했다.
한편 이런 성장 속에 이들 재벌들의 고용 증가는 미미하다. 이 두 기업이 국내에서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는 삼성전자가 10만명, 현대차가 5만7천명이다. 2007년 말에 비해 각각 19%, 3% 늘어난 수치다. 삼성전자는 얼핏 고용이 크게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매출과 이익이 갑절씩 늘어난 것에 비하면 고용 증가율은 사실 낮다고 봐야 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두 기업의 고용 증가가 더딘 이유는 해외공장과 외주화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주력 상품인 휴대폰은 국내에서 20% 미만만 생산된다. 나머지는 베트남, 브라질 등에서 생산된다. TV는 아예 국내에서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대부분을 생산했던 반도체와 LCD패널 역시 내년부터는 상당량이 중국에서 생산된다. 현대차는 2010년부터 국내외 생산 비중이 역전되어 작년에는 전체 차의 54%가 국외에서 생산되었다. 작년 러시아 공장에서 생산이 시작되었고, 올해와 내년에는 중국에서 생산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본사가 한국에 있지만 이 두 기업은 생산과 고용 면에서 보면 더 이상 한국기업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향후 세계경제위기가 더 깊어지고 자주 반복되리라는 점이다. 위기가 한 동안 더욱 자주 반복될 것이라는 것은 좌우파를 떠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바이다. 1998년이나 2008년의 경험이 그대로 반복된다면 재벌의 경제적 지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특히 재벌 내의 재벌로 불리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는 다른 재벌과도 격차를 벌리며 성장할 것이다.
한편, 98년 이전 재벌 대기업과 함께 성장했던 한국 민주노조 운동은 98년 이후 재벌 성장에 비례해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87년부터 97년까지 재벌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와 신규 고용, 그리고 이에 따른 조합의 확대와 영향력 증가가 비례했다면, 98년 이후에는 고용 없는 성장에 따른 대기업 조합원들의 노령화, 아웃소싱 증가에 따른 조합원 감소, 부품사까지 확대되는 재벌 대기업의 노무관리 능력 등으로 재벌이 커지는 만큼 오히려 노조가 약화됐다.
자신은 물론이고, 납품업체 역시 노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가지고 있는 범삼성그룹(삼성전자, CJ, 신세계)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진출과 적기적시 생산 시스템을 강화한 현대자동차는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 현대차 계열사 지회 약 10만 개 정도를 제외하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다른 자동차 부품사 민주노조에 대해서는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상속과 관련해서 설립된 물류회사 글로비스마저 특수고용노동자 조직인 화물연대를 깨고 있는 실정이다.
2000년대 성장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시작한 대표적 예는 두산그룹과 롯데그룹이다. 두산은 중공업, 인프라코어를 인수함과 동시에 노조 파괴 공작을 10여 년간 진행해왔고, 최근에 인프라코어에서 어용노조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롯데는 롯데호텔노조에 대해 특공대까지 투입하는 초강경 대응까지 한 이후 끈질긴 공작으로 민주노조를 와해시켰다. 일찍부터 노조를 길들인 현대중공업, 어용노조를 통한 노무관리의 달인이라 할 LG, 한화 등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대기업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재벌의 성장은 산업적 차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다. 노동운동이 더 이상 재벌 문제를 우회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재벌해체와 민주노조
통합진보당은 연초 재벌해체를 타이틀로 한 법안을 제출했고, 민주노총은 ‘노동존중’ 사회를 위한 과제 중 하나로 재벌해체를 내걸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가 재벌개혁 의제로 소수지분의 총수 지배권 문제를 핵심으로 내건 이후 재벌개혁은 총액출자제한, 순환출자 금지 등을 얼마나 강하게 추진 하냐는 문제가 되었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노총의 주장은 그 연장선에 있다.
98년 해체된 재벌그룹, 한라그룹과 대우그룹의 예를 보자.
현대차 가문의 정몽원 회장이 분가해 만든 한라그룹은 자동차부품 만도기계, 한라공조, 조선 한라중공업, 건설 한라건설, 제지 한라펄프제지 등 18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1998년 유동성위기가 오며 핵심계열사 대부분을 초국적기업에 매각했다. 만도기계는 로스차일드 펀드에, 포드와 합작사였던 한라공조는 비스티온에, 보쉬와 합작사였던 캄코(현 보쉬전장)는 보쉬에, 한라펄프(현 보워터코리아)는 보워터에 매각했다. 현대중공업에 매각된 한라중공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헐 값 인수를 목적으로 들어온 초국적 기업이 사들였다. 이중 만도기계는 로스차일드가 다시 분리매각하는 과정을 거쳐, 평택/문막/익산 공장(현 만도)은 JP모건 계열사인 선세이지에 매각했고, 경주 공장(현 발레오전장시스템)은 발레오에 매각했으며, 가전제품을 만들던 아산 공장(현 위니아만도)은 CVC라는 초국적사모펀드에 매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분리매각을 진행해 문막 공장 안에 존재하는 다이캐스팅 사업부(현 깁스코리아)를 미국 깁스에 넘겼다.
대우그룹 역시 비슷했다. 1998년 대우그룹 부도 이후에 대우자동차는 트럭 공장, 버스 공장, 승용차공장(부평, 창원, 군산)으로 나뉘어 각각 인도 타타, 영안모자, GM에 분리 매각되었다. 심지어 승용차 부분에서 부평공장은 별도 법인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다 2006년에야 지엠대우차에 인수되었다. 대우중공업은 대우종합기계, 대우조선, 잔존사업부로 나뉘어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는 두산그룹에 매각되었고, 대우정밀(현 S&T모티브)은 S&T그룹에 매각되었으며, 잔존사업부(현 현대로템)는 현대로 매각되었다. 대우전자와 대우모터 일부 사업부는 합병 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재탄생해 아직까지 산업은행 관리 하에 있으며, 대우조선 역시 산업은행이 대주주인 상태로 남겨져있다. 한편 전자계열사였던 오리온전기는 오션링크라는 초국적 사모펀드에 매각되어 이후 사업부가 갈가리 찢긴 상태에서 청산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체된 기업들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작건 크건 모두 구조조정 과정이 한 차례 이상 진행되었고, 십 수 년간 노조 탄압을 경험했다. 금속노조에서 최근 5년 간 노조탄압 사업장으로 유명했던 사업장 중 상당수는 매각된 한라그룹 사업장들이다. 보워터코리아(2009년부터 노조간부 징계, 손배소 등), 발레오전장(2010년 초 직장폐쇄와 용역깡패 투입, 노조와해), 위니아만도(2008년부터 대규모 배당잔치 뒤 구조조정, 노조무력화), 보쉬전장(2012년 어용노조 설립 후 금속 탄압), 깁스코리아(2012년 공장 청산 후 자본 도피), 그리고 최근 만도(2012년 직장폐쇄, 용역깡패 투입 뒤 어용노조 설립)까지 모두 그러하다.
이렇게 재벌그룹에서 매각된 사업장들의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업장에 비해 더욱 큰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특히 초국적기업에 매각된 사업장들은 초고배당과 입만 열면 자본이 이야기하는 공장 철수 설 때문에 항시 불안 속에 살아야 했다. 금속노조 경주지부의 핵심 사업장이었던 발레오만도가 2010년 직장폐쇄 후 10여일 만에 무너졌던 결정적 계기도 사측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공장철수설이었다. 초국적기업 사측이 지속적으로 노조를 약화시킬 수단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우그룹의 노동자들 역시 그룹 해체 이후 불안과 노동탄압 속에서 살았다. 2001년 대규모 정리해고 투쟁 이후 대우차 노동조합은 10년 간 제대로 된 파업 한 번 못해봤으며, 두산인프라코어는 2011년 초 어용노조를 출범시키며 민주노조를 와해시켰다. 초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병존했던 대우일렉트로닉스는 결국 회사노조로 정리되었고, 금속노조 구미의 핵심사업장이었던 오리온전기는 수차례의 정리해고 끝에 2005년 청산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벌이 해체 된 이후 중소기업들의 상황은 나아졌을까? 물론 전혀 아니다.
예를 들면 대우차는 지엠에 넘어간 이후 부품 공급을 본사 기준에 따라 글로벌 소싱하면서 국내 부품사와의 전략적 관계 대부분이 끊어졌다. 제조업 기업이 아닌 금융펀드들이 인수한 회사는 이러한 양상이 더욱 심했다. 계열사들이 초국적기업에 의해 갈가리 찢긴 한라그룹에 납품하던 중소기업들 중 상당수는 2000년대 초중반 매우 큰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도가 나든 아니면 법적 제한으로 그룹(혹은 기업집단)이 해체되든 진행되는 양상은 비슷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재벌해체 자체가 노동자에게 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룹에서 빠져 초국적기업 혹은 사모펀드, 또는 국내 중견기업에게 인수된 경우에 해당 기업 노동자들은 극도의 고용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 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역시 심각한 불안 상태에 놓였다.
재벌개혁 논쟁의 이면, 한국사회 성장론
재벌개혁이 사회적 의제가 되자 학계에서도 재벌개혁과 관련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반주변부 국가 발전모델로 유명한 장하준 교수와 재벌개혁론자로 유명한 김상조 교수가 논쟁의 두 축이었다. 책과 언론기고를 통해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외형은 재벌개혁의 타당성이었지만 핵심은 사실 한국사회 성장론에 관한 것이다.
김상조 교수를 필두로 한 재벌개혁론 진영은 내수중심성장-중소기업육성이 한국사회 성장의 기본 축이라고 본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시민연대에는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조하는 입장부터, 주주에 의한 통제를 강조하는 입장까지 다양하지만 소수 재벌로의 경제 집중이 내수중심성장과 중소기업육성에 큰 장애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한다. 재벌은 성장의 동력이 아니라 동네 빵집까지 노리는 탐욕의 화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약탈자라는 것이다.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기 위해 재벌은 현재와 같은 구조가 아니라 좀 더 작은 단위로 분리되어야 하고(지배구조 개선), 시장에 의해 공정하게 감시(투자자에 의한 감시)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장하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필요한 것은 대규모 투자를 통한 (제조업 중심)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은 재벌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국가에서 중소기업 중심 성장은 역사적 맥락에서도, 현재 세계경제 구조를 볼 때도 불가능한 일이며, 역기능을 최대한 규제하되 재벌과 같은 대규모 기업집단의 순기능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제가 되고 있는 재벌 지배구조는 기업집단법을 만들어,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규제할 건 규제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경우 한계기업은 한계기업으로 정리해야 하며, 이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산업에서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선순환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진보진영에서는 김상조 교수 식의 재벌개혁론이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최근 이건희, 정몽구, 김승연, 최태원 등 조폭 두목 식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재벌 총수들의 행태나, 이들의 반노조 태도 등은 진보진영을 넘어 시민들의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재벌대기업-수출에 대립하는 중소기업-내수라는 틀 역시 악과 선의 대립으로 작동했다. 최소한 진보진영에서는 진보의 당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경험적으로 봐도 재벌그룹이 개별기업으로 해체된다고, 또는 재벌 총수가 전문 경영진으로 바뀐다고 뭔가 특별한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만도기계가 한라그룹에서 분리되어 사모펀드의 관리 하에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는 대기업이 되었다고 하청 중소기업들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았고, 사실상 순환출자구조가 해소되어 금호타이어만 소유한 박찬구 회장이 예전과 다른 경영, 중소기업과 정상적 거래를 한 것도 아니었다.
재벌개혁론 진영에서 강조하는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거래 개선 방안 역시 얼핏 타당해 보이지만 실제 그것이 핵심인지는 의문이다. 첫 번째 문제는 1차 부품사들이 원청으로부터 좀 더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한다고 해서 부품사 노동자들의 조건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원하청거래의 가장 진일보한 입장이라는 이윤공유제를 보자. 이윤공유제를 실시하고 있는 브라질 헤센데 지역의 폭스바겐 부품사 사례를 보면, 부품사들은 공유할 이윤을 크게 늘리기 위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했다. 정규직 고용을 부품사들이 오히려 상호 규제하기까지 했는데, 한 기업이 정규직을 고용하여 노동비용을 높이면 모든 기업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1차 부품사들에 대해 아예 노골적으로 노동 배제적 이윤 공유를 하고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 휴대폰 케이스 생산과 조립을 하는 한 중소기업은 삼성전자로부터 자본 투자도 받고, 해외진출 시 부지와 공장 건설에 관한 협조도 받으며, 납품가 역시 신제품 출시 때마다 곧잘 올려받고 있다. 그야말로 원하청 상생의 모범이라 할 만한데, 이 기업의 노동자들은 모두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당연히 노조는 꿈도 못 꾼다.
두 번째로, 과연 현재 제조업에서 과연 재벌에 배제된 중소기업이 그렇게 많은지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현재 자동차부품사의 절반 가까이는 사실상 현대차와 분업 구조만 갖추었을 뿐 재벌개혁론에서 이야기하는 재벌과 대당하는 자본이 아니다. 유성기업, SJM, 상신브레이크 등 현대차를 뒤에 업고 노조를 탄압한 사업장뿐만 아니라 현대차가 직접 거래하는 6백여개 중소기업 대부분이 그렇다. 심지어 2차 부품사, 또는 3차 부품사라고 지칭되는 기업 중 상당수도 알고 보면 이들 부품사가 법인 분리, 또는 인수하며 사실상 중소그룹의 계열사인 경우가 많다. 현재 주요 산업에서 보면 재벌에 의해 배제된 중소기업이 다수라고 보기 힘들다. 최소한 제조업에서는 그렇다. 재벌에 의해 배제된 자본은 해외로 이전했거나 아니면 아예 재벌과 관계없는 일부 산업의 중소기업이 다수다. 요컨대 중소기업성장론은 현재 상태에서 보면 대상이 불분명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서비스 부문에 속하는 일부 자영업 정도가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재벌총수와 타협하고 신산업 중심 성장을 이루자는 이야기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의 재벌 가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60여년의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시민적 상식과 단절되었고, 충분한 계급투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자들이다. 한국에서 재벌 가문이 형성되고 그들만의 혈연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개인적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재벌 가문들에 대한 큰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한 재벌 타협론은 탁상공론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제도적 규제를 통해 제왕적 경영에서 입헌군주제 식 경영으로 나가자고 하지만 과연 유혈 혁명 없이 이 전환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또한 세계 자본주의 위기 과정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과연 자본주의 전체가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 신성장 산업 중심의 축적을 이루는 것이 가능한가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장하준 스스로도 이야기하듯이 1970년대 이래 산업적 성장이라는 것은 기존 제조업의 부가가치를 분배받는 서비스업에 그쳤다. 전자, 기계, 화학 산업과 같은 제조업의 대규모 성장은 1970년대 초반을 정점으로 끝났다.
한국은 뒤늦게 1990년대 초반 재벌 대기업 중심으로 큰 (외채에 기반한) 자본 축적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세계적 경향을 뛰어넘지 못하고 1998년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 이후에 재벌들의 투자는 이미 익히 알려진 것처럼 공장과 기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외주화와 저임금 지역으로의 이전이었다. 2008년부터 세계 경제위기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이 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 1950~197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의 성장을 하자는 것은 다소 ‘박정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재벌개혁, 노동운동이 어떻게 강화될 수 있는지가 관건 - 원하청불공정거래 개선 정책의 예시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성장 중심의 전망이 그럴 듯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이 주력해야 할 것은 어설픈 개혁론, 또는 성장론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정세적 필요에 따라 적당한 제도 개선 과제를 ‘주체’의 발전 전략에 따라 활용하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는 노동자운동의 더 심각한 위기로 인해 대안 세계를 구성할 수 없는 형태로 진행 중이다.
재벌개혁과 관련해 민주노조 운동이 관여한다면 우선은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원하청 불공정거래에 관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하지만 이 또한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재벌개혁론에서 이야기하는 이윤공유제(혹은 성과공유제)여서는 곤란하다. 이윤공유제로 노동자운동이 성장할 경로가 없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의 목표는 재벌개혁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운동의 성장 매개를 그 곳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있다.
이런 점에서 원하청 관계와 관련해 금속노조가 택해야 하는 전략은 기업지불능력에 근거한 노동조건 개선이 아니라 원하청 관계에 개입하는 금속노조의 역할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림 1] 금속노조 원하청 불공정 거래 개선 정책 흐름도
불공정거래 개선 핵심정책으로서 “산별교섭”의 사회적 의제화
가장 먼저 금속노조가 추진해야 하는 것은, 현재 하도급법과 공정거래법 중심으로만 논의되고 있는 원하청 관계와 관련된 의제를 원하청 노동자 격차 축소를 위한 산별교섭 제도화 의제로 확대시켜나가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산별교섭은 원청의 납품가 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하청의 임금률 결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로 인해 산별교섭 참여 사업장이 비금속노조 사업장보다 노동조건과 기업 경영 상황 모두 좋은 상태였다. 현대차 부품사 420개를 조사한 결과 일반적으로 기업 수익률에 영향을 준다는 기업규모보다도 산별교섭 참여여부가 오히려 부품사 기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는 원하청 불공정거래에 관해서 노동의 측면은 오직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하청 기업의 지불능력 개선 이후의 효과로만 고려되었다. 하지만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은 기업간 거래에 대한 규제만이 아니라 산별노조의 역할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금속노조는 재벌 대기업 원청을 포함한 살별교섭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원하청 불공정 거래 개선에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산별교섭 제도화를 의제화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별교섭 제도화가 원하청 불공정거래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도급법, 공정거래법에 산별노조 역할에 대한 명시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확대 및 배상액 한도 증액, 공정거래법 및 하도급법 위반 사항에 대한 공정위 전속 고발권 완화, 중소기업 협동조합의 납품가 집단 교섭 허용 등 여러 수준의 원하청 불공정거래개선 정책들이 십 수년간 이야기되어 왔고, 일부는 부족하게나마 하도급법에 반영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많은 정책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상거래 관계를 법적으로 완벽하게 규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재벌 대기업이 압도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는 상태에서 제도적 규제는 더욱 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사회적 규제 정도가 실제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에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하도급법이나 공정거래법 등의 상법도 다양한 이해관계자에 의한 감시를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 주체로 금속노조가 역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