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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9-10.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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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독도 영유권 갈등과 민족주의의 부상

류주형 | 정책위원장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던 이명박 대통령의 대일 행보가 연일 심상치 않다. 8월 10일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독도를 전격 방문한 데 이어 14일에는 “일왕의 사과가 필요하다”라는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에 뒤질세라 일본도 맞불을 놓는 모양새다. 중의원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관련 발언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데 이어 노다 총리도 현직 총리로서는 31년 만에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8월 들어 한일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는 가운데, 언론은 대통령 독도 방문의 의도와 파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의 대체적인 반응은, 일본의 지속적인 독도 영유권 주장 도발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정당하지만, 동시에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를 분쟁화하려는 일본의 도발에 휘말릴 필요가 없지 않았냐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이 외교적 실익이 없는 무리수를 뒀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틈만 나면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했던 현 정부의 외교 노선에 비추어볼 때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향후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비등하다.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갈등의 역사와 함께 이와 관련된 최근 몇 개의 단속적인 계기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독도 문제와 함께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를 적극 제기하게 된 데에는 최근 사법부의 전향적 판결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작년 8월 헌법재판소는 ‘한국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을 이유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올해 5월 대법원도 일제 강점기 때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두 기업이 피해자들의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와 기업, 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가 5억 달러의 차관을 받는 대신 개인들의 청구권은 포기하였다’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도 사실상 이를 인정해왔다. 실제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범위는 너무 협소했고, 게다가 국내법원이 일본법원 판결의 기판력을 인정하거나 소멸시효를 문제삼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배상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법부의 판단은 (사법부 스스로의 무능과 더불어)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위선이 낱낱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 와중에 불거진 것이 바로 5월 말 6월 초 한일정보협정 파동이었다. 사실 한일정보협정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2011년 1월 한일 국방장관회담이었지만, 정부는 공개 추진 시 여론의 반발을 의식해 밀실 처리로 일관했다. 한일정보협정은 외교전략 측면에서 한미일 공조를 한 단계 끌어올릴 기회인 동시에 정무적 관점에서는 반일 감정을 격화시킬 수 있는 위험 요소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외교 전략을 총괄한 것으로 알려진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한일정보협정 파동은 일단락되었다. 일종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였다. 김태효 기획관은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 자위대가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내놓아 물의를 빚기도 했던, 강성 한일동맹파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한일정보협정 좌초로 난처한 상황에 몰린 이명박 대통령은 새로운 외교적 돌파구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한 언론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한일군사협정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7월 중순 신각수 주일 대사를 청와대로 비밀리에 불러 일본 쪽에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와 관련한 모종의 타협책을 제시한 뒤 타결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이 이를 수용할 뜻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8월 초 독도 방문을 최종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일 간 갈등이 첨예하게 고조되던 8월 15일, 미국의 대외전략 관련 유력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간한다. 미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외전략가 리처드 아미티지와 조지프 나이가 공동 작성한 「미일 동맹 보고서」가 그것이다. 미국의 초당파 그룹이 공동 집필한 이 보고서는 2000년과 2007년에 나온 1, 2차 보고서에 이은 3차 보고서다. 1, 2차 보고서와 비교할 때 이번 3차 보고서에서 달라진 것은 미일동맹의 존속 근거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명시한 점이다. 여기서 이들은 최근 일련의 한일 갈등을 염두에 둔 듯 “한일 양국은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부활시키고 민족주의적 감정을 활용하려는 유혹을 떨쳐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호전성과 중국의 군사력 증강이 한일 양국의 진정한 전략적 도전이며, 따라서 공통의 가치와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한미일 민주동맹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미티지-나이 보고서에서 줄곧 등장하는 개념인 ‘가치 동맹’이란 곧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한일정보협정 체결을 강조한다.
다시 김태효 기획관 얘기로 돌아가 보자.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의 논문 「한·일 관계 민주동맹으로 거듭나기」의 요지는, ‘동북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는 일본뿐이므로, 동맹의 핵심 축은 한일 동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현재 한일 관계를 압도하고 있는 과거사 이슈와 이에 대한 민족주의적 접근이 야기할 수 있는 파행 요소”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아미티지-나이 보고서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이는 그가 유별난 한일동맹파라기보다는 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한미일동맹파라는 사실을, 또 한국의 외교전략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그대로 추종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김태효 기획관의 실각을 불러온 이 ‘민족주의적 파행 요소’로 인해, 한일정보협정이 잠정 체결 중단되었지만 한미일 동맹 기조 속에서 언제든 다시 제기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반일 정서를 감안하여 다소간 궤도를 이탈한 정부의 대일 외교 노선도 미국의 압력 아래 조만간 ‘정상화’될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정무적 관점’과 ‘외교적 관점’ 사이에서 쉽지 않은 줄타기를 해야 하겠지만.
이런 연유로 대통령 독도 방문에 대해 임기 말 국면 전환용이라는 비판이 한편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어쨌든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행사해야 할 국토 수호의 의무를 다했다’는 점에서 여론의 반응은 우호적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역대 많은 정권이 임기 후반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대체로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그때마다 일정한 지지율 상승효과를 얻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정권의 지지 기반이 취약할 때에는 독도나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등 영토 문제를 제기해서 민족 외부의 적을 불러냈던 것이다. 이처럼 한일 양국의 지배계급은 지속적인 영토 분쟁을 계기로 민족주의에 호소하며 ‘적대적 공생관계’를 추구해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적대적 공생관계가 전후 미국의 냉전 전략에 따라 형성되었고 지금도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에 일조한다는 점이다.

독도 영유권 분쟁은 제국주의-식민지 관계를 청산하기는커녕 유지, 온존하는데 급급했던 미국의 전후 처리의 부산물이었다. 1949년 소련의 원폭실험과 중국의 인민공화국 수립 등 일련의 정세 속에서 미국의 대 사회주의 봉쇄정책은 유럽에 이어 아시아로 확대된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을 군사기지와 군수물자 공급처로 적극 활용하고, 이 과정에서 군국주의 세력이 대거 복권된다. 이는 일본이 전후 미국의 긴밀한 정치경제적 파트너이자 반공의 보루로서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남한에서도 일제에 협력했던 억압적 국가기구의 관료들이 미국의 반공 정책에 따라 화려하게 부활하며 식민 잔재 청산은 한낱 과거의 구호에 묻히게 된다.
그 결과 대일 강화조약은 소련과 중국을 배제한 ‘단독강화’로 귀결되었다.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 인민에 대한 책임문제가 유보된 상태로 체결되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발효되어 일본 열도 주변에 설치한 ‘맥아더 라인’이 철폐되면 일본 어민들이 대거 한해(韓海)에 침범할 것을 우려한 한국은 ‘평화선’(Peace Line, Rhee Line)을 선포했다. 일본도 강화조약 발효로 주권을 회복하게 되자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항의하면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들이 적전 충돌을 불사하자 미국은 부랴부랴 중재에 나섰다. 이처럼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은 외형적으로는 일본이 1952년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반발하며 독도가 일본령임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실상 그 중요한 원인제공자는 미국이었던 셈이다. 그 후로도 한일 간 영토 갈등은 때때로 극렬하게 나타났지만 미국의 공동지배 아래서 곧 봉합되곤 했다.

미국의 우산 아래 적대적 공생관계를 추구하는 한일 지배계급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할 현실적 힘은 한일 사회운동에 달려 있다. 문제는 지배계급이 유포하는 민족주의적 호소에 사회운동이 과연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특히 세계화가 전개되면서 인민주권이 쇠퇴함에 따라 종족적 민족주의가 부활하는 현 정세에서 말이다(그 극단화된 형태는 최근 그리스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민족주의의 부상은 세계화라는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중국과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쇠퇴와 일본과 남한에서 자유주의의 취약성이라는 요인이 더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탈식민화가 반드시 민족주의를 토대로 하는 것도 아니라는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가령 전후 일본 민중의 평화운동은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들과의 전면강화, 중립비무장, 군사기지 제공 반대와 같은 국제주의적 요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탈식민화는 국제주의를 토대로 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체의 해방이었고, 베트남 민족해방전쟁도 실은 캄보디아라오스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해방전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환기할 때, 한미일 군사동맹에 맞선 한일 민중의 연대야말로 오늘날 새로운 한일 관계, 다시 말해서 ‘또 다른 세계화’의 출발점임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사회운동』에 실린 그리스의 인종주의를 다룬 기사와 한일 평화운동의 연대를 호소하는 기사는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상을 포함한 [특집]은 지난 8월 18-19일 개최된 ‘자본주의를 넘어 대안세계로, 2012 노동운동포럼’의 주요 발표문을 요약한 기사들로 구성되었다. 노동운동포럼과 함께 여름 중요 행사 중 하나였던 ‘민주노조 운동 혁신을 위한 공동수련회’ 참가기도 함께 읽어주시기 바란다. 대선의 주요 이슈인 ‘안철수 현상’과 가계부채 문제는 [분석] 코너에 실었다. 같은 코너에 실린 봉기 이후 시리아 민중운동의 상황을 진단하는 기사와 10월 총회를 앞두고 있는 공무원 노조의 상황을 진단하는 [제언] 기사도 흥미진진하다. 페미니즘에 관해서,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여성사업의 발전을 고민한 [지상중계] 기사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로보섬의 저작을 다룬 [서평] 기사를 수록했다. 그밖에 인천 영리병원 투쟁과 대구 성서공단 최저임금 투쟁을 다룬 [지역과 현장] 기사와 이주노동자 투쟁을 되돌아보는 [회원칼럼] 기사도 일독을 권한다. 이번 『사회운동』이 하반기 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쓰임새 있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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