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11-12.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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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경영참여로 재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2012)

이승하 | 조직국장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인 김상봉 교수는 진보신당의 이념과 노선을 수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참여적 지식인이다. ‘만남’이라는 말이 총 21번 등장하여 별칭 ‘만남 강령’이라 불린 진보신당의 강령을 기초한 것도 그로 알려져 있다. 지난 총선시기 진보신당은 탈핵, 탈비정규직, 탈학벌과 함께 탈삼성을 10대 핵심정책으로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이른바 ‘반삼성 운동’에 목소리를 높여온 김상봉 교수의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상봉 교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2012)는 대선을 앞두고 펼쳐진 경제민주화 논쟁에 대한 좌파적 개입 시도 중 하나라는 점에서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핵심 주장은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로 요약된다. 그는 주식회사의 구조와 본질을 밝히고자 하면서 근본적으로 주식회사의 소유권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또한 소유권으로부터 경영권이 연역되는 것은 아니며 참된 의미에서의 경영, 즉 기업 공동체의 이념 실현을 위해서는 노동자 경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교수들이 총장을 선출하고 오케스트라 단원이 지휘자를 뽑듯이 노동자들이 경영자를 뽑는 것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그는 기업의 현행 지배구조를 해체하고 그것을 민주적으로 바꿔냄으로써 ‘세습의 왕국’을 노동자들이 주인되는 공화국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김상봉 교수와 함께 진보신당 강령을 작성한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이 책의 의의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에 대해 훌륭히 비판함으로써 마르크스가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친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비판을 좀 더 완성된 형태로 전개했다는 점, 그리고 소유가 아니라 관계(‘서로주체성’)에 바탕을 둔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를 철학적으로 정초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장석준은 ‘노동자 경영 기업을 넘어 경제 생태계 전반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김상봉의 제안이 지배세력과는 다른 시각으로 재벌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케 했다며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는 이 책에 대해, 기업의 이윤추구와 시장경쟁 원리를 자연스레 수용함으로써 자본과 노동사이의 적대 관계를 보지 않고 분배투쟁만 남겨놓았다고 비판하면서도, 노동자들이 지배하는 기업의 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지향’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호평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을 얻을 때까지 일하고 철강공장에서는 쇳물에 빠져죽도록 일을 해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김상봉은 책 곳곳에서 비감을 표현한다. 이 책의 곳곳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한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고 기업과 사회에 대한 노예적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에 대한 일관된 지지가 표현되어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독점하며 군림하는 재벌을 비롯해 노동자들을 구속하는 자본에게 어떤 정당성도 없음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과거의 시민들이 ‘짐이 곧 국가’라 했던 왕들의 선언을 부정하듯이 훗날에는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는 21세기의 상식에 대해 똑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맞다, 반드시 그래야한다. 그런데 문제는 김상봉이 비마르크스주의적, 때로는 반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전개한 결과 그릇된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행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그의 물음은 주식회사 분석으로부터 출발한다. 20세기 초 관리자혁명을 거치며 완성된 미국의 법인기업은 대불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해왔고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그에 따른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자본의 지배구조란 이렇게 소유자와 관리자가 분리된 법인자본 내부에서의 세력관계를 말한다.
김상봉의 주장은 이런 기업지배구조 하에서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 경영권의 분리 즉, 주식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과 주식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을 별개의 일로 분리하여, 주주에겐 배당금과 기업자산에 대한 잔여청구권만 주고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주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가 경영권을 얻게 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주체가 된다고 한다. 노동자 주권에 입각하여 경영되는 기업에서는 생산과 노동이 균형을 이루고 타자적 착취가 불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법’을 쟁취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사유재산 폐지’와 ‘노동자 해방’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성이 없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에 의한 경영을 실현하기 위해 기업을 노동자들이 소유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노동자 경영권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도 덧붙인다.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질 수 있으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존속하는 것과 무관하게 착취가 소멸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렇듯 김상봉에게 ‘노동자 주권에 입각한 기업경영’이란 단순한 ‘지향’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로서 그 나름의 이행론이자 대안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비전으로 제시된다.

‘기업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다

여기서 김상봉 교수가 전제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설명하는 자본주의적 억압의 근원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기업이 경영에는 관심도 책임도 없는 주주들의 소유의 대상이 되고 기업에 부속된 사물로서 노동자들 역시 그 소유의 대상으로 규정됨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다.
그의 국가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기업과 경쟁하는 주체이다. 민주주의의 퇴행은 ‘국가 기업화’의 결과이며 기업이 국가보다 더 커진 오늘의 현실에서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을 민주화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진보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는 국가와 기업의 구별이 사라지고 (원래는 중립적일 수 있는) 국가가 기업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락한 현실을 개탄한다.
따라서 김상봉에게 ‘기업’은 오늘날의 사회를 심층부에서부터 완전히 규정하는 전부이고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존재의 집’이다. 실제로 그가 말하는 ‘기업의 지배’란 중세 교회의 지배와 유비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주장은 오늘날의 세계가 ‘기업의 세계’라는 점을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으로서 주식회사”라는 규정과 이에 포위당해있는 ‘(원래)중립적인 국가’라는 인식은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노동과정, 노동시장, 노동력 재생산과정 전반에 사전적·사후적으로 항상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국가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변형되고 재조직되어오는 과정에서 언제나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단순히 경제라는 토대를 반영하는 상부구조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공장법 분석을 통해 보여주었고 브뤼노프가 특히 강조했듯이, 국가는 개별 자본에 의해서는 제공될 수 없는 특수한 정치적경제적 조건을 제공해왔고 자본은 이를 전제로 축적활동을 수행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내에서 상품으로 교환되지만,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산재생산되지 않는 특수한 상품인 화폐와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을 하는 것이 바로 국가다. 또한 김상봉이 분석하는 주식회사는 미국의 법인자본주의 모델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결과인데, 그에게는 주식회사에 대한 분석은 존재하지만 경제와 사회를 관리하는 정책과 제도의 복합체로서 20세기 자본주의 국가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은 결여되어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결여한 채 그는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대안을 도출한다. 그는 자본과 노동의 적대를 시장 내에서의 몫의 배분을 둘러싼 갈등으로 환원하면서, 기업의 지배구조를 민주화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자본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민주화의 대상이 일개 기업이 아니라 체제 내 존재하는 모든 기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사회 전체가 기업의 단순 합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규정을 위해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그 핵심에 적대적 계급관계와 그에 따른 노동력의 상품화와 착취라는 문제설정을 도입했다.
이미 오래전에 ‘상속제 폐지’를 사회변혁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 바쿠닌에 대해 마르크스는 상속제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지배의 원인이 아니며 사적 소유에 기초한 기존의 경제적 사회 조직의 법률적 귀결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상속제 폐지가 사회변혁의 출발점이라는 구상은 “교환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계약법을 폐지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소유를 은밀히 부러워한 마르크스?

앞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변혁은 김상봉의 관심 밖에 있다. 그는 ‘자유’와 ‘소유’를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재산권이 자유의 기초라며 로크, 칸트, 헤겔이 속물적 욕망에 철학적 위엄을 부여해왔는데, 마르크스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들이 소유를 통해서만 자유를 확보하려는 까닭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마치 무소유(?)를 권하기라도 하는 듯, 그는 자유란 이것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형성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말한다.
김상봉은 타인을 지배하고 타인의 주체성을 파괴할 수 있는 권리가 소유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음과 같이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소유권은 부르주아적 인권의 핵심으로서, 생산수단의 보유자가 생산수단을 자본주의적사적으로 영유하고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일컫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적사적 소유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의 재건을 주장했다. 이 때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 즉 노동력에 대한 자기소유(‘노동권’)와 육체노동자와 지식노동자의 분할의 사멸(‘지식권’)을 의미한다. 물론 지금처럼 부르주아 소유권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노동권은 노동력 상품화에 반대하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노동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성격을 인정하는(노동력 가치를 제대로 받아야 한다) 변형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 노동권은 노동자가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로서 부르주아 소유권에 근본적으로 적대하는 것이다.
또한 김상봉은 현실 사회주의를 예로 들며 소유의 주체가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 국가가 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고 비판한다. 그는 “처음부터 시장경쟁을 배제하고 오로지 국가 권력에 의한 계획경제를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처방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마르크스적 길을 국유화와 계획경제로 환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국가자본주의와 등치될 수는 없다. 국가자본주의적 사회화를 핵심으로 했던 소련사회주의는 ‘노동자 통제없는 국유화계획화’로서 ‘개인적 소유없는 사회적 소유’라는 결함이 있었고 가치법칙, 화폐형태, 임금형태를 재생산했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지적했듯이 소유란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김상봉은 마르크스주의를 개인성을 부정하는 모종의 집산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개인성의 새로운 역사적 형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란 단순히 사물이나 타인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활동 능력의 자유로운 처분 및 개인이 그 발휘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 자기 자신의 활동을 통해 자연적 문화적 대상들과 관계맺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는 생활양식의 제도화를 내포하는 것이다. 김상봉이 말하는 진실로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로서의 자유란 사실 이런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는 정치철학이 현대적 소유형태를 이상화하고 소유라는 개인성에 근거한 정치공동체를 정당화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 위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그 조건의 변혁을 제안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과학적인 이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배금주의적 세태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해방될 수 있는 실질적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한 ‘생산양식의 변혁’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경영권만 돌려받기

하지만 김상봉은 마르크스의 길을 부정하면서 현실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유권과 무관하게 경영권을 점하자는 그의 전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가 전제하는 소유자와 경영자 사이의 긴장은 주식회사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에 해당한다. 가령, 단기적 이윤 실현을 요구하는 소유자와 장기적 투자계획을 갖는 경영자 간의 대립구도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기업지배구조로 통칭되는 분업구조 내에서 소유자에 대한 경영자의 상대적 자율성은 양자 간 세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주식회사, 즉 법인자본의 성장기에는 경영자의 상대적 자율성이 증가하는 반면 법인자본이 금융화되는 시기에는 관리자가 소유자에게 다시 종속된다. 그런 종속을 상징하는 것이 이른바 ‘주주가치의 최대화’를 주장하는 기관투자가의 주주행동주의인데, 한국에서는 보통 소액주주운동이라고 부른다.) 주식회사의 특징이 소유자와 경영자의 분리에 있다는 사실은 경영자가 소유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김상봉은 경영진과 주주가 상호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에 쟁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주식회사 자체의 근원적 곤경과 주주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이라 지적한다. 반대로, 그가 가정하는 이상적 노동자 기업에서는 소유(자본)와 경영(노동자 이사진)의 적절한 역할 분담을 통해 갈등이 조정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전제한 주식회사의 곤경과 모순이 어떻게 해소되는지 밝히고 있지 않다.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권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라도 잉여가치의 생산을 관리하는 경영권을 소유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영은 사실 노동과정 전반에 걸쳐 자본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소유경영의 분리가 노동자 통제의 가능성을 열어주리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이며, 나아가 이를 통해 착취가 소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를 흘리지 않고 살만 뗄 수 있었다면 샤일록이 유명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 경영을 위해 필요한 권리

다음으로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획득한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제대로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대한 그의 답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 커다란 이익을 남긴 뒤에 그대로 나누어 먹어버린다면 결국 주가는 떨어지고 회사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결국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니 시장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는 기업의 생성과 소멸은 원칙적으로 시장경쟁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며 시장이 있으면 노동자들이 잉여를 합리적으로 사용할 것이라 낙관하는 한편, 노동자 경영에 대한 우려를 악의적 험담으로 치부한다.
먼저, 그의 ‘시장 찬양’에 대해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시장은 ‘미리 계획되지 않은 우발성의 영역에서 능동성의 교차 속에서 일어나고 타인의 결핍과 나의 결핍이 경제적으로 교환되는 수동성의 장소’로서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장소’다. 김상봉은 자신의 비전에 대해 원칙적으로 경제적 이윤추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기업 경영의 길을 내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서 내재적 탐구란 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기초한다. 그러나 김상봉의 이러한 시장에 대한 규정은 대단히 자의적이며, 시장경쟁이 존속하는 상황에서 노동자 경영을 낙관하고 심지어 시장경쟁이 노동자 경영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오류다.
다음으로, 노동자 경영, 정확히 말해서는 노동자 통제의 문제를 살펴보자. 법인혁명에 따른 소유경영의 분리에 이어 관리자혁명을 경과하며 노동자는 그들의 작업 기술지식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 생산과정의 조직과 통제는 이제 전문적 지식을 지닌 공학자와 경영자에게 이전된다. 그 결과 생산적 노동자와 경영자는 구별분리되고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은 심화된다. 착취의 과정에는 생산과정과 재생산과정을 관통하는 위계화된 지적 차이와 이를 통한 지배가 동반된다. 관리자 혁명의 시기에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제도로서 대학과 가족이 개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온전한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를 위해 노동력에 대한 소유와 함께 육체노동자와 지식노동자의 분할의 사멸, 즉 지식권을 말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달리 말해서 새로운 주체화사회화 양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혁은 생산형태에서 노동자통제의 도입, 통치형태에서 공장평의회와 지역평의회의 대표자로 구성된 전국평의회의 건설, 이데올로기형태에서 ‘문화혁명’이라고 부른 지속적 투쟁이라는 복합적이고 장기적인 이행기를 요한다고 할 수 있다. (국유화와 국가(당)에 의한 계획화를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 규정하고 결국 평의회와 같은 대중운동을 부차화 내지 억압하게 된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근본적 반성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주주 권리와 노동자 권리 사이

김상봉 교수는 종업원 지주제에 대해서 경영진과의 유착이 낳은 폐해를 언급하면서 “기업경영에 관해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종업원 지주제나 우리 사주제의 문제점이 단순히 소유자와 경영자 간의 유착 가능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주식의 소유는 그것이 우리사주라는 형태의 집단적 소유라 할지라도 결코 그 자체로 사회적 소유로 기능할 수 없다. 노동자가 소유자와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이해를 노동자 스스로 방관하게 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법인기업은 경영조직기법의 발달 과정에서 노동자를 기업으로 통합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그 핵심은 개별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기업의 이익과 동일시하여 노동자 전체의 보편적 이해보다는 특수한 이해를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부가급여, 사적연금 및 민간보험 같은 민간 복지체계도 이 과정에서 정착되었다. 우리사주제 하에서 노동자는 주가 상승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가 될 뿐이다.
또 김상봉은 기관투자가들이 최대주주가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이들이 기업의 경영권을 노동자에게 위임하도록 압박하며 경영권에 대한 낡은 관습을 바꾸어 나가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주주권리를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은 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기 시민운동에 의해 도입된 ‘소액주주운동’도 실상 주식시장을 활성화하고 기관투자자 같은 소유자의 이익이 우선하도록 지배구조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외이사제와 소액주주권 강화를 요체로 하는 투명책임 경영제는 금융화된 미국식 기업지배구조의 정착과 다르지 않았다.

재벌 개혁의 지향이 일본, 독일 따라잡기인가?

김상봉 교수가 기업지배구조를 문제로 삼는 이유는 결국 한국 재벌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재벌체제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는 한국에 앞서 재벌을 해체한 사례로 일본을 꼽는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에서는 과거 자이바츠(財閥)라 불리던 기업집단이 케이레츠(系列)로 변모했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기 동안 개인소유자를 퇴진시키면서 개혁된 재벌이 케이레츠다. 케이레츠는 개인 소유에서 계열사 상호 지분 투자로 일부 구조가 바뀐 재벌체제다.
또한 그는 ‘종업원 중심주의’와 ‘연공서열’을 예로 들며 일본 기업문화를 합리적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문화의 정수는 적기생산(just-in-time)과 하청계열화로 상징되는 린생산방식을 선도한 도요타주의다. 일본 노동자운동의 제도적 취약성도 한 요소였지만, 도요타주의의 배경에는 ‘충성심’과 같은 일본 사회의 역사적 전통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일본 기업은 가시적인 보상으로 ‘종신고용’을 보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재벌과 중소기업으로 나뉜 산업의 이중구조 속에서 대기업의 핵심 노동자는 종신고용의 지위가 보장되는 반면, 그 외곽에 있는 다수의 노동자는 불안정 고용상태에 놓인다.
사실 일본식 기업 민주주의는 회사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통제 기제로 작동한다.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엄격하게 위로부터 조직된 것으로, 도요타의 경우 품질회의(quality circles) 같은 모임들 뿐이다. 가족주의의 연장에서 회사를 나의 것으로 여기는 ‘종업원 중심성’이란 것도 실제로는 회사의 비용절감 노력에 동참하는 모범적 노예(model slave)로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회사 생활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각성시키며 노동력을 ‘자가-활성화’ 시키는 것도 도요타주의의 중요한 전략이다. 일본 기업은 어떤 형태든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조직 또는 고용주에 대한 반대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 ‘종업원 중심주의’는 회사 경영진과의 성실한 협력을 강조하면서 노동자의 공장 체류시간을 가능한 늘리고 회사 소속감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반조치의 일환인 것이다. 이런 조작된 참여와 자율성은 오직 기업의 수익성 향상, 경쟁업체의 제거, 노동력 가치의 절하 등을 위해 존재한다. 게다가 장기불황을 거치며 도요타를 위시한 일본 기업 전반에서 연공서열, 종신고용 관행은 극적으로 후퇴하는 추세에 있다.
김상봉 교수가 또 다른 사례로 제시하는 것은 독일이다. 그는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를 주주, 은행과 더불어 기업의 이해당사자 중 하나인 노동자들이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긍정적인 제도로 평가한다. 나아가 그는 독일의 경우 기업의 존재 이유를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노동자의 복지에서 찾는다면서,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독일이 훌륭한 사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 자본주의에 대한 전적인 오해다. 그가 주목하는 독일적 전통이란 실은 전후 서독 재건 정책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Soziale Marktwirtschaft)이다. 이는 국내에 민주적 시장경제 또는 개혁적 자본주의로 소개된 것과 정반대로 실상은 완고한 긴축정책에 의한 물가관리와 독점적 대자본의 시장지배를 보장한다. 이때 복지정책은 기본적으로 잔여사항으로서의 지위밖에 갖지 못한다. 전후 서독의 타협적 노사관계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바탕으로 한다. 게다가 노사공동결정제도의 기원은 1919년 독일사회민주당이 집권에 성공한 이후 평의회운동에 대한 반격으로 제시한 것으로 노동자 운동이 취해야할 이념과 애초부터 거리가 있다. 더욱이 독일의 전통적 노사관계는 신자유주의적 유럽 통합 과정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코포러티즘’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재벌개혁론, 세이렌의 노래를 경계한다

대선을 앞두고 제 정치세력과 대선 후보들이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재벌개혁에 대한 논쟁을 지속하는 가운데, 진보진영 내에서도 재벌개혁에 대한 입장이 속속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보진영 주류는 대체로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혁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민주노총의 경우, 대체로 진보진영 주류의 재벌개혁론을 지지하면서 원하청 기업 간 공정거래를 핵심으로 하여 ‘노동자 경영참여’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가 기업에 경영정보를 요구하고 단체교섭에서 경영 인사 사항에 대한 배제에 맞서 싸우는 것의 정당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지배구조 개선을 중심에 둔 재벌개혁론이나 국외 사례에 대한 단편적 접근으로 재벌체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 수는 없다. 재벌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재벌 문제가 부패한 총수일가의 전횡과 불건전한 기업 관행 때문이라면 차라리 그 처방은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재벌대기업을 정점으로 한 하청계열화 구조와 저임금을 통한 수출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한국경제의 성장전략과 관련된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구조적 문제다. 따라서 재벌체제의 변화란 곧 수출-재벌 중심의 세계화 전략과 이를 지지하는 노동신축화의 전반적인 변혁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벌개혁 담론은 이를 겨냥하지 못한다.
노동자운동은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원하청구조와 노동시장의 분단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들의 단결의 힘을 제고하는 투쟁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재벌문제에 접근하고 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초민족적 자본에 의한 구조조정, 국부유출, 국외이전에 대한 대응 전략도 필요하다. 이러한 전략은 반삼성 이슈파이팅으로 제한될 수 없으며, ‘노동자 경영권을 보장하는 단 하나의 법조항’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누군가의 비유처럼 한국 경제에게 재벌체제와 금융세계화는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향하는 길에 죽음의 해협에서 만났다던 ‘실라’와 ‘카립디스’ 같은 진퇴양난의 대재앙이다. 세계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지금, 성장기 발전국가의 환상을 불러내어 재벌체제의 확립을 도모할 수도 없고, 반대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금융세계화를 더욱 심화하는 길을 도모할 수도 없는 곤란에 놓여있다. 이미 순항의 길은 어려워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바다를 건너는 데 필요한 희생이 노동자 몫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벌개혁이 아무리 ‘개혁’이라는 말을 빌려 우리의 귀를 잡아끈다 해도,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약화시키는 대안이라면, 이는 이타카로의 귀항을 어렵게 하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세이렌의 노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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