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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3.1-2.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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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4주기를 기억하는 우리의 투쟁을 모아내자!

이원호 |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안녕하세요. 저는 2009년 1월 20일 용산학살로 돌아가신 고 이상림님의 부인이자, 아버지와 동지를 죽였다는 살인죄를 씌워 5년 4개월의 징역형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이충연의 어머니 전재숙입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 남편과 아들의 이름을 말하는 이 어머니의 긴 소개는 오늘도 거리에서, 투쟁의 현장에서 계속된다. 그렇게 벌써 4년, 용산참사 4주기가 되어간다.

기억해야 할 이름들

이상림, 양회성, 한대성, 윤용헌, 이성수. 1월 20일 열사력에 빼곡히 적혀있는 이름들을 본다. 열사들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여전히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있다. 구속된 철거민들의 법원 판결문에서는 다섯 철거민들의 죽음의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묻고 있지 않다. 오직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경찰특공대원 한 명의 죽음에 대해서만 묻고 있을 뿐이다. 판결문에서 다섯 열사들의 이름은, ‘피고인들(구속 철거민들)은 망 이상림, 망 양회성, 망 한대성, 망 윤용헌, 망 이성수와 공동공모하여.... 경찰을 죽였다’는 것으로 호명된다. 여전히 서럽고 서럽게 불리는 이름들이다.
당시 72세로 가장 고령이었던 이상림 열사는 1986년부터 용산구 한강로 2가(용산4구역)에서 ‘한강갈비’집을 운영하였다. 1993년부터 한강갈비집을 손수 리모델링해서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레아호프’로 업종 변경했다. 레아는 그들이 만든 희망이었다. 그렇게 20여 년간 한 곳에서 장사를 하고, 가게 맨 꼭대기 비좁은 옥탑에서 거주하면서도, 아들 내외와 일구는 가게에 온갖 정성을 쏟아가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 그의 평범한 삶은 2007년 경 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레아호프가 있는 한강로2가가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지정, 사업시행인가와 관리처분인가가 나게 되면서, 철거용역 깡패들에 의한 협박과 폭행, 영업방해로 세입자들이 대책 없이 쫓겨나기 시작했다. 이상림 열사는 대책 없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며 초대 철거민대책위원회(철대위) 위원장을 맡기도 해, 그에 대한 용역들의 폭력은 더욱 극심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맞고, 시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며느리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어야 했다. 용역깡패에 둘러싸인 70대 노인의 저항은 오히려 용역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바뀌었고, 그는 결국 하늘 끝 망루로 내몰렸다.
‘삼호복집’의 주방장이기도 했던 양회성 열사는 두 아들과 함께 일식당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IMF로 인해 몇 차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가족들과의 약속, 아들들과 이루고 싶었던 꿈을 생각하며 꿋꿋이 살아오셨다. 2004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빚을 내어 용산국제빌딩 옆에 삼호복집을 차렸다. 새 출발의 기쁨도 잠시, 용산에 가게를 연지 이년 만에 재개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5, 6년은 더 걸릴 것 같던 개발이 벼락치기처럼 진행되면서 철거용역 깡패들에 의한 행패가 시작되었다. 대책 없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 맞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철대위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존권 문제를 넘어서 잘못된 개발악법을 바꾸겠다는 열의를 다하셨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고 가정을 꾸린 한대성 열사는, 가난이 대물림될까 두려워 시골에서 나와 수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수원 변두리 논밭 가운데 위치한 작은 마을 신동으로 이사와 2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결혼 10년 만에야 월세 단칸방을 벗어나 이웃에 있던 아담한 독채로 옮겼다. 비록 허름한 농가주택이지만 행복한 삶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하던 열사의 삶은 2007년부터 수원시에서 시작한 ‘신동지구 도시개발사업’으로 인해 위협받게 되었다. 논밭 사이에 있는 보증금 500만 원 내외인 작은 농가주택 동네라, 보상비 몇 푼으로는 도저히 갈 곳을 찾을 수 없었다. 2008년 6월 동네 주민들과 함께 철거민대책위원회를 세우고, 주거권을 쟁취하기위한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집을, 주거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20년을 다니던 일자리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연대집회를 다니며, 자신과 같은 이들의 삶을 보게 되었다. 2009년 1월 19일, 열사는 자신과 다르지 않은 처지의 용산 철거민들의 망루 투쟁에 연대하고자 함께 남일당 옥상 ‘망루’에 올랐다.
‘미락정’. 윤용헌 열사가 10년 가까이 중구 순화동에서 장사하던 한정식 식당이자,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다. 유들유들한 성격의 열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미락정’에 온갖 정성을 쏟으며 열심히 일해 왔다. 2005년 순화동에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영업을 하는 상가들이 있음에도 동네는 철거용역 깡패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2006년 겨울, 결국 용역깡패들과 집행관이 미락정에 들이닥쳐 물건을 빼앗아갔고, 그 뒤 다시 가게를 열지 못했다. 열사는 하루아침에 빼앗겨 버린 주거권과 생존권을 되찾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곳곳의 철거 투쟁현장에 연대했다. 2009년 1월 19일, 닷새 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가족들에 남기고 집을 나서 용산으로 향했다.
유난히 사람을 좋아하던 이성수 열사는 2007년 용인 수지에서 13년을 살아오던 집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철거당했다. 10여 년 전에도 강제철거 당해 쫓겨났는데 두 번째 강제철거를 당한 것이다.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자녀가 돌아오니 집이 없어져 버렸다. ‘뻥튀기’, ‘즉석 생과자’를 파는 노점으로 가정을 일궈오던 열사는 노점단속과 탄압에 시달려오던 삶에 더해, 이제는 가족의 삶터인 집마저 빼앗긴 것에 분노하였다. 부서진 집에서라도 쫓겨날 수 없다며, 천막을 짓고 살면서 주거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였다. 노점상 투쟁에도 앞장섰고, 다른 지역 철거투쟁과 사회 문제들에 대한 투쟁에 연대하면서, 반드시 투쟁에서 승리하여 주거권을 쟁취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마음으로 2009년 1월 19일, 남일당 옥상 ‘망루’에 올랐다.
이렇게 이상림, 양회성, 한대성, 윤용헌, 이성수 열사는 2009년 1월 19일, 용산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여기, 사람이 있다”, “대책 없는 살인개발 중단하라”, “철거민 주거, 생존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거농성에 돌입하였으나, 살려고 올라간 그 곳에서 죽어서야 내려왔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인간선언은 만 하루도 못되어 죽음으로 묵살되었다.

기억의 투쟁

355일간의 장례투쟁 이후, 용산투쟁은 망각에 맞선 기억의 싸움이었다. 장례 후 조금씩 잊혀져가던 용산투쟁은 유가족들의 끈질긴 싸움과 잊지 않은 이들의 끊임없는 연대로, 3주기를 기점으로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했다. 3주기에 박원순 시장은 비록 전임시장 때의 일이지만 서울 도시개발 행정의 책임자로서 유가족 앞에 사과했다. 종교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는 올 한해 끊임없이 철거민들의 사면을 촉구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 전원이 서명한 ‘구속철거민 석방촉구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살인진압의 책임자 김석기는 뻔뻔하게도 경주에서 총선에 출마하였지만, 유가족들은 김석기 선거사무소 앞에서 천막농성 투쟁을 전개하여 낙선 시켰다. 3년여 만에 처음으로 유세장에서 김석기를 대면하게 된 유가족들은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족의 오열앞에 선 김석기는 유세차 연단에서 오히려 용산진압이 정당했다고 연설했다. 유가족들은 경찰과 검찰의 소환에 “김석기 먼저 조사하라”며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9년 서면조사 한통으로 무혐의 처분된 김석기를 다시 고발하는 고발운동으로 맞섰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투쟁은 용산다큐 『두 개의 문』의 극장개봉을 위한 배급활동으로 이어졌다. 800여 명이 배급위원으로 참여해 극장개봉을 이끌어 냈다. 용산문제를 차갑고 냉철한 시선으로 접근한, 국가폭력의 문제를 제대로 다룬 수작이라는 평을 받으며, 독립다큐로는 기록적인 흥행을 만들어 낸 『두 개의 문』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SNS상에서 관람평들이 이어지고, 대선 전에 꼭 봐야할 영화라고 추천하면서 7만 3천여 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했다. 관객들은 이명박 정권의 ‘무관용 원칙’에 의한 국가폭력에 다시금 분노하며 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건물 터를 방문해 국화꽃을 두고 가는 추모행사를 진행하기도 했고, 극장에 국화꽃을 들고 입장하는 풍경까지 생겨났다. 3년여 만에 참사현장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그 곳, 남일당 터에서 촛불 추모문화제를 갖기도 했다.
끈질긴 기억의 투쟁은 주요 현안 투쟁인 쌍용차와 강정마을 투쟁에 용산투쟁이 연결되면서 새로운 연대투쟁인 ‘쌍차(S)-강정(K)-용산(Y)의 연대’, ‘SKY공동행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서로의 투쟁에 긴밀히 연대하였고, 지난 10월 5일부터 11월 4일까지의 한 달간 전국의 투쟁현장을 순회하며 ‘생명평화대행진’을 진행했다. 11월 4일 서울에 도착한 행진단은 여의도를 출발해, 용산참사 현장과 해군기지 사업을 강행하는 국방부앞, 쌍용차 3000인 동조단식 집회가 열리는 서울역에서 집회를 하고, 서울광장에서 전국의 투쟁 현장을 통해 만난 이들의 목소리들을 모아냈다. 그리고 그날부터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옆에 ‘함께살자 농성촌’을 만들고 농성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무관용을 되돌려 줘야 한다

참사의 현장인 용산4구역은 참사발생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개발이 멈춰진 채 허허벌판으로 남아있다. 철거민들을 폭력적으로 내쫓던 철거용역 깡패들은 망루가 불탄 남일당 자리를 주차장 터로 사용하면서 임시영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허허벌판으로 방치할 걸, 왜 그리 빨리 내쫓으려 했냐’는 유가족들의 애통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SJM등 노동현장에서 ‘컨택터스’라는 경비용역이 진압경찰과 유사한 복장, 장비를 소지하고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해 사회적 비난이 일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용산참사 당시 현장을 누비며 POLICIA라고 적혀있는 사제 방패를 든 이들이 떠올랐다. 이들은 경찰로 오인되었던 철거용역들이었다. 당시 철거민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남일당 건물 3층에서 집기들을 불태우며 연기를 위로 올려 보냈던 용역들과, 경찰과 함께 물대포를 쏘던 용역들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이라는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물대포를 쏜 용역 2명 중 1명은 징역 6월에 집유 1년을, 1명은 벌금 150만 원을, 불을 지른 용역 5명 중 1명은 징역 6월에 집유 2년, 나머지는 벌금 200만 원의 판결을 받았다.
무리하고 성급한 진압을 한 경찰도, 살인적인 개발을 밀어붙인 건설사도, 폭력적인 철거용역도 제대로 처벌받지도 책임지지도 않았다. 오직 철거민들만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4~5년의 형을 받고 4년째 감옥에 있다. 대통령 측근도 석방되고 용산 안건을 ‘독재’적으로 막은 이가 인권위원장에 연임되었지만, 철거민들에 대한 각계의 사면 요구는 거절당했다.
여섯 명이 죽었는데도 처벌받지 않고 책임지지도 않은 경찰은 같은 해 쌍용차 노동자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폭력진압 했고, 국가폭력은 더욱 극심해 졌다. 잘못된 개발의 책임을 면피한 용산4구역 시공사 삼성과 대림은 제주 강정에서 불법적인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며, 곳곳에서 살인을 멈추지 않고 자본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자신들의 폭력에 대해 제대로 책임진 적이 없는 용역깡패들은 자본의 사병이 되어 노동자와 철거민들을 폭행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이처럼 용산 투쟁은 2009년 1월 20일에 있었던 특정 사건의 문제를 해결하는 투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관용 원칙에 입각한 국가와 자본의 계속되는 폭력에, 우리의 관용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용산참사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으면 이러한 폭력은 반복되고, 인간의 존엄은 계속해서 짓밟힐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가 무관용으로 폭력기구들을 지켜보고, 맞서야 한다.

용산참사 4주기, 잊지 않고 기억하는 우리가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모아내자!

오는 2013년 1월 20일은,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해 다섯 철거민 열사들이 돌아가신 용산참사 4주기가 되는 날이다. 4주기를 이명박 정권 시대에서 박근혜 정권 시대로 넘어가는 정권이양의 시기에 맞이하며 어느 때보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 용산참사를 기억하는 우리의 힘을 모아내야 한다.
용산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이명박 정권 심판론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만 언급하는 정치세력에 맞서, 용산이 결코 끝나지 않은 투쟁임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음을 각인 시켜야 한다.
이에 이번 4주기는 다시 ‘용산참사 4주기 범국민 추모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속철거민의 사면과 진상규명, 강제퇴거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규모의 추모위원들을 모아나갈 것이다.
화마에 휩싸인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용산이 아닌, 끈질긴 투쟁을 기억하고 연대해온 우리, 용산을 잊지 않은 우리가, 책임자들을 다시 소환하자. 국가폭력과 자본의 폭력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모아내자!
주제어
빈민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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