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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겨울.1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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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폭격기

류주형 | 정책위원장
지난 7월 27일 정전협정 60주년에 때맞춰 발간된 『폭격』에서 저자 김태우는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 잔혹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그를 따라 폭격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가 10여초에 걸친 최초의 동력비행에 성공한 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류는 최초의 비행기 공중폭격을 실행했다. 19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식민화하기 위해 오스만제국과 교전하면서 최초의 공중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국 군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식민지 원주민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공중폭격의 매력에 쉽게 사로잡혔다. 유럽인들은 소이탄과 집속탄 같은 신무기를 활용한 무차별적 폭격을 ‘문명화의 임무’라는 수사로 포장했고, 폭탄은 문명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자 지상군의 전쟁이었고 비행기는 여전히 보조적 역할에 그쳤다.

공군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에는 1921년 『제공』에서 현대전의 핵심 요소로 제공권의 장악을 강조함과 동시에 ‘전략폭격’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다. 전략폭격이란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의지를 무력화하기 위해 적 점령 하의 주요 도시나 생산동력교통통신 시설, 정치군사적 중추부를 파괴하는 폭격 작전을 의미한다. 이에 대비되는 ‘전술폭격’ 개념은 지상부대나 해상부대의 작전을 보조하는 공중폭격을 뜻한다. 두에와 동시대 인물이자 1차 대전 후 10년간 영국공군 사령관을 역임한 휴 트렌처드는 적군의 전투수행능력보다 적국 국민 전체의 전쟁의지를 파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렌처드가 체계화한 전쟁수행의지 파괴 개념은 2차 대전 당시 영국공군의 ‘지역폭격’ 개념으로 현실화되었다.

2차 대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미군은 영국군의 지역폭격에 대비되는 ‘정밀폭격’을 표방했지만, 전쟁 말기에 이르러 그것은 유럽에서도 태평양에서도 유지되지 않았다. 1945년 2월 미국은 영국과 합동으로 독일 드레스덴을 공습하여 민간인 10만 명의 희생을 초래했고, 이어 3월부터는 일본 본토 전역을 공습하여 사망자 51만 명, 이재민 964만 명의 희생을 초래했다. 전략폭격 개념을 핵폭탄이라는 ‘절대무기’와 결합한 세계 최초의 전략폭격기가 바로 B-29였다. 1943년 개발되어 1944년 실전 배치된 B-29는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매일 일본 본토 상공을 비행하며 도시의 인구밀집지역 태반을 폐허로 만들었다. 8월, B-29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은 2차 대전의 종전이 아닌 ‘3차 대전’의 개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략폭격 개념은 핵폭탄을 장착한 장거리 중폭격기가 수행하는 것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5년 뒤, 한국전쟁은 미 공군 전략폭격의 변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실험장이었다.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폭격 전개과정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한국전쟁 발발부터 중국군 참전 전까지인 1950년 7-10월의 시기로, 이 기간 중 미 공군은 ‘정밀폭격’ 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는 5년 전 일본에 가한 ‘전략폭격’의 군사적 효율성 및 도덕적 정당성을 둘러싸고 군 당국 안팎에서 불거진 논란을 감안한 조치였다. 미 공군은 북한지역에서 후방의 주요 ‘군사목표를 제한적으로 정밀폭격’하기 위해 B-29 등 폭격기를 동원한 전략항공작전을 전개한 반면, 남한지역에서는 ‘전선 부근의 지상군을 화력 지원’하기 위해 F-80 등 전폭기를 동원한 근접지원작전을 전개하였다. 문제는 북한지역의 폭격 대상이 대개 대도시 인구밀집지역에 위치하였던 데 반해 폭격기의 명중률은 현저히 낮았다는 데 있었다. 가로 10미터 세로 200~300미터 크기의 대형건물을 B-29가 폭탄 하나로 적중시킬 수 있는 확률은 0%에 가까웠으며, 최소한 100~200발의 폭탄으로 대량폭격을 가해야만 50~80%의 적중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남한지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안정한 전술항공통제시스템으로 야간에 침투하거나 산 속에 은신한 적들을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점차 조종사들은 ‘육감’에 의존하여 ‘점 표적’이 아닌 ‘지역 표적’ 위주의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중국군이 참전을 개시한 1950년 11월부터 정전협상이 시작된 1951년 5월까지의 시기다. “북한에는 더 이상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1951년 8월경 한 외신 보도처럼,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북한의 눈밭 위에 불의 비가 쏟아졌고, 북한 전역은 초토화되었다. 중국군이 참전할 경우 최악의 대량학살(greatest slaughter)을 벌이겠다는 맥아더의 공언은 1950년 11월 초 중국군의 참전이 공식화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한 달 동안 이뤄진 B-29의 소이탄 투하로 만포진 95%, 회령남시고인동 90%, 초산 85%, 강계희천삭주 75%가 파괴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50년 11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원자폭탄의 사용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고려되어왔다”고 경고하였고, 12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재량권을 요구한 데 이어 26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될 목표물 리스트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소이탄 폭격과 핵폭탄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950-51년 겨울 피난민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전선의 후퇴에 따라 ‘흰 옷 입은 사람들’에 대한 소개 작전이 남한지역으로도 확대됐다. 1951년 초 강원경기경북충북의 민간지역에서 발생한 네이팜탄 폭격은 적의 은신처로 사용 가능한 시설을 적군이 도시나 마을로 진입하기 전에 파괴하는 ‘효과적인 작전’으로 간주되었다.

정전협상이 개시되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1년 6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이르는 세 번째 시기에 미 공군의 폭격은 중국으로부터 보급되는 식량과 무기를 운송하는 철도를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정전회담에 압박을 가할 물리적 수단으로서 공중폭격에 주목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1952년 7월, 미 공군은 차단작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폭격 전략을 대폭 수정한다. “극동공군 최대역량 투입을 통해 공산군에게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할” 목적에서 ‘항공압력전략’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때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 7월까지 미 공군은 민간인들을 향한 대량의 무차별적 폭격을 통해 적에게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그 첫 목표물은 수풍부전장진허천부영금강산 등에 위치한 수력발전소였고, 그 다음 목표물은 견룡자모용원에 소재한 저수지였다. 이처럼 1953년 B-29에 의해 이뤄진 대부분의 폭격은 ‘적에 의해 보급품 집적소로 활용되는 작은 마을과 소도시’의 민간시설에 집중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막바지 폭격 양상은 차단작전에서 파괴작전으로 변화한 극동공군 작전의 성격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미 공군의 폭격은 정전협정 조인이 이루어진 그날까지도 쉼없이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본격화된 냉전 체제에서 B-29를 대신해 미국의 주력 전략폭격기로 자리 잡은 것이 B-52였다. 1955년 실전 배치된 B-52는 1956년 비키니섬에 수소폭탄을 투하함으로써 핵경쟁 무대에 뛰어올랐다. 미국의 핵무기 운반수단은 본토에 배치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핵잠수함이 보유한 잠대지핵미사일(SLBM), B-52에 탑재한 공대지핵미사일(ALCM) 세 축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B-52는 현시 효과란 측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간주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서 묘사되듯, 핵폭탄을 잔뜩 실은 B-52는 지구 곳곳에서 항상 하늘에 떠있으며 그 임무는 특별명령에 따라 사전에 지시된 소련의 공격목표물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다. 게다가 운용 범위와 비용을 고려하면 매우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B-52는 베트남전에서 3백만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라크전에서는 투하된 폭탄의 42%를 도맡았다. 한 마디로 B-52는 미국의 핵공격과 세계지배의 상징이었다.

그런 B-52가 올해 동아시아에 유난히 자주 출현하고 있다. 지난 3월 한반도 상공에 세 번이나 출격하더니 11월 말에는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상공에 전격 출격했다. 북한의 3차 핵실험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설정에 대한 노골적 무력시위인 셈이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과 상대방의 반작용이 악순환을 그리며 역내에서 군사적 긴장이 전례 없이 고조되는 오늘, 한반도에서 전쟁과 공중폭격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현재의 문제라는 저자의 경고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번 『사회운동』의 [특집] 주제는 ‘노동조합 국제연대 사업의 현황과 평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경제위기에 대한 반동으로 인종주의 또는 종족적 민족주의가 발호하는 현 정세에서 국제주의는 오늘날 정치를 사고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지금까지 국제주의의 이념을 주로 다루었다면 이번 호에서는 국제주의의 현실을 다룬다. 먼저 임월산은 세계화된 공급사슬을 따라 국제적 조직화를 시도한 미국 제2노총의 경험을 검토한다. 조은석은 자동차업종에서 노동조합간 국제연대의 방안으로 검토되어온 여러 실험들을 분석한다. 정영섭은 세계 이주노동자 이슈를 망라하면서 아시아지역 이주노동자 운동 과제를 제시한다. 류미경은 국제 노동조합 조직과의 관계에서 민주노총의 국제연대 사업을 점검한다. 필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기된 평가인 만큼 생생한 현실과 고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노동조합 운동에서 국제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기획]으로는 오늘날 핵발전의 문제를 집중 조명한다. 박상은이 후쿠시마 사태의 교훈을, 김태훈이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과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비판을 각각 다룬다.

내년에 더욱 알찬 『사회운동』으로 찾아올 것을 다짐하며 올해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


주제어
정치 평화
태그
폭격 B52 B29 한국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