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갈등의 배경, 전망, 쟁점, 대응방향
2019년 7월 1일 일본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부품·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8월 7일 일본은 백색 국가(수출절차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시행령을 선포했다. 한국 역시 8월 12일 일본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했으며, 8월 24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연장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에서 무역 제재가 민족주의의 무기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발표한 직후, 7월 3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대한 수출규제 보복을 즉시 철회하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경제교류에 정치대립을 끌어들이면, 한일관계에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 그 핵심적 근거였다. 중국은 센카쿠/댜오위다오 분쟁을 계기로 희토류의 대일 수출을 중단했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안보를 근거로 중국에 대한 관세 인상을 단행했다.
동아시아 각국은 ‘역사 문제’라는 폭발적인 이슈를 안고 있다. 누구라도 상대국과 상대 국민을 배척하는 민족주의적 정서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일 수 있다. 어느 한 편에서라도 불길이 타오르면 다른 편에서는 더 큰 맞불을 붙여야 한다는 정서가 들끓는다. 나아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은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국내 개인, 집단마저 적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곧장 ‘민족의 배신자’,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어버린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마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발언일 것이다. 7월 20일 그는 “2012년, 2018년 대법원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한 번 폭발하여 정치적 분위기를 장악하게 되면, 누구도 이를 쉽게 제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의 경제화, 곧 무역이 민족주의의 공격무기가 되어 버린다면, 무역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는 상호파괴일 뿐이다. 즉 모두가 패배자가 된다는 뜻이다.
8월 28일 일본이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한 결정이 시행된다. 양국 모두 수출규제를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되지만, 본격적으로 수출규제에 돌입할지 여부는 이 글을 쓰는 8월 26일 시점까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상호 수출규제에 돌입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막대한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는 현 상황이 상당히 위중하다고 인식한다. 이 글에서는 이번 사태의 배경과 전망, 쟁점과 대응 방향을 살펴보겠다.
1. 배경
1) 일본 정부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7월 1일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는 사실 계속 예고되었던 바이지만, 이처럼 분명한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던 한국인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그로 인해 일본이 이를 단행한 배경이 무엇이냐를 두고 처음부터 여러 가지 견해가 제출되었다. 따라서 각 견해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7월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의 집권 세력이 국내정치용으로 활용하기 위한 카드라는 주장. 2019년 7월 1일 수출규제가 발표되었을 당시, 아베 정부에 대한 지지도(51%)보다 수출규제 지지도(57%)가 더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수출규제에 대한 일본 내 지지도는 계속 상승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 결과, 참의원에서 여당이 총 141석, 야당이 총 104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야당이 부진을 면치 못하는 상태에서 수출규제가 국내정치를 위해 시급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두 번째,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비롯해 첨단산업을 가로막기 위한 카드라는 주장. 혹자는 이를 1980년대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견제했던 역사적 경험과 비교하기도 했다. 즉 1980년대 미국은 일본 반도체를 덤핑 문제로 공격했다는 것이다. 어떤 나라든 경제적 제재를 가할 때 기왕이면 상대방의 급소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법원판결과 압류집행이 없었어도, 일본이 수출규제를 단행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한국경제의 붕괴가 일본경제의 이익이 되므로, 일본이 제로섬 게임을 추구한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일례로 금융위기가 정점을 향해 달리던 2008년, 한국이 외환위기에 상당히 근접하게 될 때, 일본과 중국은 한국과 통화스와프를 확대하기로 했다. 각국 경제 관계가 그렇게 단순히 제로섬이라면 일본이나 중국이 한국과 통화스와프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을까
세 번째, 남북이 주도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진척되면 군사대국화를 추구하는 일본이 명분을 상실하고 고립될 것이므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국을 견제한다는 주장. 물론 일본이 북한의 비핵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미일 동맹이 공유하는 바인데, 동아시아 미군기지 네트워크의 중심점이 바로 일본이기 때문이다. 일본 내 미군기지가 북한의 핵무기 사정권에 들어오는 것은 미국과 일본에 심각한 위협이다. 하지만 일본은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와 함께 북일 수교 의사가 있다. 일본이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할 의사가 충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2002년 평양 선언으로 확인된 바 있다. 또 한편 1994년 제네바 합의 당시, 일본은 경수로 건설의 사업 주체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사업비 총액 46억 달러(약 5조5000억 원) 중 1100억 엔(약 1조 원)을 부담하기로 결정한 적도 했다. 일본은 북한과 미국이 합의한 제네바 합의의 직접적 주체도 아니지만,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해 자금을 제공했다.
네 번째,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주장. 예를 들어 《조선일보》는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는 미일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 한국 측의 호소에도 미국 정부는 한일 교착에 개입하거나 중재할 의도가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점, 일본의 보복 조치가 판문점 회담을 마친 트럼프의 비행기가 한국 땅을 떠난 직후 발표된 타이밍 등은 트럼프와 아베의 '짜고 치는 고스톱'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2019년 7월 16일)
현재 미국과 일본은 이른바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중국의 순치와 포위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현재 미국이 바라보는 ‘헤게모니 연합’(hegemonic coalition)은 미국에 유럽-캐나다-호주-뉴질랜드를 포함하는 핵심그룹(연합 그룹1)과 그에 일본과 한국을 추가하는 그룹(연합 그룹2)이다. 물론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인도-태평양 전략에서는 일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에 비해 문재인 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시종일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2019년 6월 정상회담에서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의 신(新)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정책 간 조화로운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미일 동맹이 추구하는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대해 한국 정부가 지속해서 ‘비협조적’ 태도를 보이자, 미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압박을 묵인하며 한국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외교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미국의 직접적 국익, 예를 들어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의 주둔 비용과 관련이 없는 문제에 관여할 의사가 없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트럼프 개인의 성향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 행정부나 의회, 워싱턴의 핵심 싱크탱크의 동향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국 대법원의 판결과 집행에 대한 외교적 대응이라는 주장. 이른바 ‘오캄의 면도칼’이 말하는 것처럼(즉 불필요한 가정은 다 잘라내라), 현실적으로는 가장 단순한 설명이 가장 정확한 설명일 수 있다. 실제로 한일청구권협정에 반하지 않는 방식으로 한국이 외교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면 일본이 수용할 수 있다.
종합해보자. 이번 수출규제는 기본적으로는 대법원판결과 집행에 대한 외교적 대응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의 대응이 미국의 묵인 하에 진행되는 것이라는 평가는 현재로서 명확히 검증될 수 없지만, 최소한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핵심 동맹국으로서 일본에 불리한 입장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한편 이왕에 수출규제 조치를 취할 때, 상대편의 가장 아픈 곳을 공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한국의 대응 양상에 따라 일본이 수출규제 수위를 조절해 나가리라 예상할 수 있다.
2) 한국 정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일본의 의도가 이렇다면, 한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한국에 어떤 치밀한 시나리오와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현재 상황이 발생하게 된 데는 복합적 요인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2018년 판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2012년 판결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는 2012년 대법원판결 이후, 이번 2018년 대법원판결이 나올 때까지 한국 행정부나 의회가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는 문제만 검토한다.
직접적으로는 박근혜 정부 당시 ‘재판거래’ 관련 프레임과 ‘위안부 합의’ 관련 프레임이 작동한 게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의혹’에는 ‘일본 강제징용 재판 고의지연’이 포함되었다. 즉 ‘재판거래’를 위해 강제징용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의심이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이처럼 ‘재판거래’ 프레임이 형성되면서 사법부나 정부 양자 모두 이를 의식하여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 태스크포스가 구성되었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 민주당은 ‘정부 간 밀실 이면합의’, ‘피해자 목소리 무시’라는 쟁점을 이슈로 부각시켰는데, 이 역시 집권 이후 일본과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을 상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일본이 외교적 고려에서 점차 뒷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보도도 많았다. 예를 들어 와다 하루키는 2019년 8월 26일 한국에서 열린 학술회의 ‘한일 관계: 반일과 혐한을 넘어서’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2018년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과 곧바로 이어진 북·미 정상회담은 아베 총리에게 이중의 충격을 줬다.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만남을 중개했을 때 트럼프는 아베와 상의도 없이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즉답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납북 일본인 문제로 계속해서 북한에 압력을 가해온 아베 총리의 전략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북한이 일본의 납치 문제에 대한 협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한미와 대화를 이어가자 아베 총리는 외교적으로 전례 없이 궁지에 몰리게 됐다.”
종합하면 문재인 정부가 일본과의 ‘파국적’ 상황을 미리 의도, 예비하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왔다는 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더라도, 상황변화에 따른 임기응변식 대응이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를 풀기 더 어려워지는 난국을 초래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더해서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이후 청와대와 여당의 대응을 보면, 현재 상황을 오히려 ‘정치적 호기’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원장 양정철)이 7월 30일 “일본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민주당 의원 전원에게 배포했다. 이는 민주당 싱크탱크가 의원들에게 강력한 반일 메시지를 토해내라고 신호를 보낸 것으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2. 전망
일본이 수출규제를 발표한 직후, 일각에서는 세 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되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양국 관계가 계속 악화하면서 한일조약 체제가 붕괴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즉 아무런 협력도 하지 않는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다. 그럴 경우 어업 협정이나 재일조선인 법적 지위 협정도 위태로울 수 있다. 두 번째는 1965년 청구권협정에 명기된 대로 중재위, 국제사법재판소(ICJ)의 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한일청구권협정에 반하지 않는 방법으로 재단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현재까지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안한 외교적 해결책은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공동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1+1 안이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안한 바는 3국 중재위 안이다. 양자의 안은 상대방 정부가 각각 거부했으므로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시나리오는 실행되기 어려울 가망이 높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일본이 거부한 1+1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1+1+α를 의미하는가? 이와 관련된 언론 보도를 보자. “외교 소식통은 7월 23일 ‘복수의 일본 외무성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은 당초 제3국 중재위원회 구성 요청에 대한 답변 시한인 18일까지 1+1+α 안(한일 기업, 한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방안)에 대한 타협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고 한다’며 ‘시한은 지났어도 여전히 그 안을 가져오면 조율해볼 여지가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그러한 안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예를 들어 7월 16일, 청와대 관계자는 1+1+α 보상안에 대해서도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할 수는 없다. 일부 언론에서 이를 정부가 검토한다는 기사도 나왔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양국의 정부 관계자의 입을 빌어 나온 기사를 종합해 보면, 1+1+α은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가 아직 공식적으로는 언급한 적이 없다. 그리고 양측의 동의 의사도 분명치 않다. 언론 보도를 볼때 일본이 조금 더 적극적이고 한국은 매우 부정적인 듯 보이지만, 이조차 확실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첫 번째 시나리오뿐인가? 아직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러 언론 보도를 보면 일본이 생각하는 레드라인(금지선)은 대법원의 압류 자산 현금화로 보인다. 그럴 경우 일본이 수출규제를 가능성에서 현실로 바꿀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러한 상호 ‘무역 보복’이 상승 나선을 탈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3. 쟁점
사회운동의 대응 방향을 논의하기에 앞서, 몇 가지 쟁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사회운동의 ‘통념’에 영향을 끼치는 쟁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쟁점은 한일청구권협정과 대법원판결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다. 하지만 이 문제는 특집의 다른 글에서 다루므로 여기서는 그 외 쟁점을 살펴본다. 먼저 △한일청구권협정은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한 친일노선의 귀결인가. 또한 △최근 들어 “한일 민중연대를 통해 불법적인 한일병합을 원천무효화하고 식민지배 청산을 완수하자”라는 주장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얼마나 타당한가.
1) 한일청구권협정은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한 친일노선의 귀결인가?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려면, 한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전후처리에 임한 국가들의 경우 모두 ‘친일파’라는 주장도 성립해야 한다. 그렇다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며 일본과 직접적 전쟁 당사국이었던 중국이나,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강조하는 북한은 어떠했나?
(1) 중국 사례
잘 알려진 것처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초안을 작성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조기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아시아에서 자유 진영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고, 일본에 대한 과대한 배상 징수로 일본경제에 가중한 부담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렇다면 중국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나?
애초 1946년 10월 국민당 정부는 중국의 공·사 재산의 직접적 손해는 약 313억 달러, 간접 손해는 204억 달러, 민간인 사상자 수는 1040만 명으로 계상했다. (그렇지만 타이완은 1952년 배상 포기를 결정했다.) 또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신중국은 1951년 선쥔루(沈鈞儒)의 보고서 「전쟁범죄인 검거와 징벌에 관해」에서 사망 1000만 명, 재산손실액 500억 달러라고 하는 수치를 사용했다. 한편 1971년 일본의 다테우시 요시미는 인간의 생명을 굳이 수치로 환산하여 1인당 1만 달러로 한다면, 인적손해에 대해서 35조 엔, 여기에 물적 손해 17조 엔을 더하면 합계 52조 엔이 되며, 만약 이를 20년 상환으로 지급한다면 매년 2조 6000억 엔으로 당시 일본 국가 예산 9조 4000억 엔의 약 3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을 20년간 지급하게 된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런데, 중국은 1972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공동성명 제5조를 통해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 포기를 선언하였다. 중일 간 배상 청구 문제는 국교 정상화의 중요하고 어려운 교섭 사항 중 하나로 여겨졌으나, 중국의 배상 청구 포기는 교섭 초반에 제시되었고, 중일 국교 정상화는 이를 전제로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는 중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요강을 마련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① 타이완의 장제스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배상 요구를 포기했다. 공산당의 도량은 장제스보다 넓지 않으면 안 된다.
② 일본은 우리와 국교를 회복할 때 타이완과 단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배상 문제에 관대한 마음을 보이는 것이 일본 측을 중국 측의 원칙에 타협하도록 하는 데 유리하다.
③ 일본이 중국에 배상금을 지불하려고 하면 그 부담은 최종적으로 광범위한 일본의 국민에게 지워지는 것이 된다. 그들은 긴 시간에 걸쳐 중국으로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일본 인민과 세세대대 우호적이 되어간다고 하는 우리의 희망과 상반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중국이 얻은 게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첫째, 국교 정상화를 통해 중국이 유일 정부로 인정받고 일본은 대만과 단교를 실행했다. 둘째, 중일 경제협력의 확대, 즉 일본 정부로부터의 차관 또한 공식개발원조(ODA) 형식의 엔 차관, 무상자금협력, 기술협정이 이뤄졌다. 즉 배상청구권 포기는 중국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2) 북한 사례
북한의 경우, 아직 국교 정상화를 하지는 않았으나 이를 위한 외교교섭은 진행한바 있으므로 검토할 수 있다. 2002년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의 ‘조일평양선언’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쟁점이 존재했다. 북한의 입장은 한일병합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되었으며, 따라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식문서에서 사죄를 명기해야 하며, 정신적·물질적·인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과거 북일 관계는 교전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배상이나 보상에 응할 수 없다고 봤다. 다만 1995년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가 사죄 문제에 관한 기본입장이며 이를 북한에 표명할 수 있으며, 한일관계에 적용했던 재산청구권 형태의 (즉 경제협력방식의) 처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2002년 9월 17일 조일평양선언을 통해 상황이 급변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측은 과거 식민지지배로 인하여 조선 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다.
쌍방은 일본 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대하여 국교 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협력, 저이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인식 밑에 국교정상화회담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하였다.
쌍방은 국교 정상화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발생한 이유에 기초한 두 나라 및 두 나라 인민의 모든 재산 및 청구권을 호상 포기하는 기본원칙에 따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
즉 국가·민간청구권의 상호 포기와 경제협력이라는 한국과 같은 방식의 국교 정상화 방식이 합의된 것이었다. 그런데 평양선언을 계기로 일본인 납치 문제가 일본 국내정치 이슈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납치 문제에 관해 평양선언에서는 “일본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현안에 대하여” 북한은 “이러한 유감스러운 문제가 앞으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문구가 오히려 북한이 납치를 인정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에 이어 2차 북핵 위기, 즉 2002년 10월 3일 제임스 켈리를 대표로 한 미국 협상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탄두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에 따라 발생한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평양선언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만약 이때 북한이 평양선언에 따라 북일 국교 수립을 추진했다면, 이 역시 북한 정부가 ‘친일파’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2) “한일 민중연대를 통해 불법적인 한일병합을 원천무효화하고 식민지배 청산을 완수하자”라는 주장은 얼마나 타당한가?
이 쟁점이 실천적으로 가장 복잡한 쟁점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일본의 한국병합은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로서 원천무효이며, 한일협정이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주로는 일본공산당계, 구(舊)일본사회당계 등 전후 ‘혁신계’라고 불리었던 세력에 뿌리를 둔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18년 11월 11일 일본에서 결성된 강제동원문제해결과과거청산을위한공동행동은 이러한 입장에 기초해 있다. 보도에 따르면, 결성식에는 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을위한일한공동행동,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일본제철징용공피해를지원하는 모임, 미쓰비시강제동원소송지원단체, 식민지역사박물관과일본을연결하는모임, WAM(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포럼평화·인권·환경을 비롯해 폭넓은 시민사회단체가 모였다. 이들은 대법원판결 내용과 의미를 알리고 일본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집회를 개최하며 일본기업에 대법원판결 수용과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공동행동에 참가한 단체 면면을 다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 뿌리를 더듬어 찾아볼 수는 있겠다. 일본에서 ‘조선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운동 흐름의 형성은 일조협회의 결성(19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조협회 내부에서는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이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1953년 한국전쟁의 정전을 앞두고, 북한은 한일회담을 견제하면서 대일 접근을 모색했다. 따라서 북한은 일본 혁신계와 새로운 연계 채널을 만들고자 했고, 일조협회는 북한과 접촉하는 매개가 되었다.(일조협회는 1958~1961년 재일조선인 ‘귀국협력운동’〔북한으로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일본 정부가 북한과 ‘북송문제’를 협의하게 한다.)
한국에서 장면 정부가 수립된 후 시점인 1960년 12월 일조협회의 전국대회에서는 “안보체제 강화와 동북아시아조약기구(NEATO)를 노리는 일한회담에 반대하자”라는 슬로건이 제시되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우호적 정책을 변경시켜 일조관계를 정상화시키자”라는 구호도 제시되었다. “남조선 인민의 투쟁을 지지하여 제휴를 깊이하자”라는 구호도 있었다. 종합해보면, △한일수교를 저지하며 동시에 북일 관계의 정상화를 추진하고, △남한 민주당 정부에 대한 남한 인민의 투쟁을 지지하며 남한 정부를 견제하고, △그런 조건에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는 구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61년 1월 ‘일한회담 대책연락회의’가 발족하며 1961~1962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공산당, 사회당,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도 일한회담 반대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반대 운동의 주장을 요약하면, △한일조약은 한반도에서 남북분열을 고정화하고, 한민족의 비원(悲願)인 남북통일을 저해한다, △한일조약이 본질적으로는 한일 군사동맹이며 미국의 비호 아래, 일본, 한국, 대만 3개국을 묶은 북동아시아 군사동맹으로 장래 발전할 수 있다, △한일조약은 일본의 독점자본에 대해 경제협력의 명분으로 한국에 경제침략을 획책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1965년 기본조약과 각 협정이 가조인되면서 급속한 협상 타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원내 사회당과 총평은 NEATO론과 함께 어업, 독도 문제를 거론하면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국익론’에 입각해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총평은 “싼 임금으로 혹사할 수 있는 한국 노동력 때문에 일본 노동자가 고생한다”라거나 “일본인 한 명당 3200엔의 혈세로 박정희 정권을 구제한다”는 논리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 관점의 국익론이 한반도 식민지배 청산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 일조우호계 단체는 1961년 11월 일본조선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들은 종래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 군사적·경제적 위협성만 강조하며 현재 일본인의 ‘조선멸시’나 ‘식민주의’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은 이전에 조선과 중국에 대한 가해자였고, 지금 다시 가해자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반대 운동 세력은 한반도에 대한 배상의무를 무시하고, “국세를 낭비하는 일조회담 반대”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잘못 받아들여지면 “조선 따위에 돈을 베풀어 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멸시를 증폭시키는 배타적 감정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리하면 한일조약을 반대하려면 일본 자신에 심어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 일조우호계 단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결코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 전체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위에서 언급한 강제동원문제해결과과거청산을위한공동행동과 같은 현존 일본 사회운동 단체까지 면면히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즉 한일 국교 수립이 식민지배 청산이라는 문제의식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는 판단으로 징용노동자, 위안부를 비롯해 식민지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일본 내 법률소송을 지원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그렇다면 이러한 운동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1965년을 전후한 시점에 그들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당연히도 정치적·도덕적 정당성을 지녔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을 밀고 나가서 식민지배 청산이라는 정신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한일협정이 체결되면 안 되었다든가, 나아가 지금이라도 기존 한일협정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협정 체결을 위해 한일관계의 단절도 불사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와다 하루키 등이 추진한 공동서명운동을 다룰 때 다시 언급한다.)
1990년대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경제협력, 한국기업의 베트남 진출이 과거 베트남 파병의 역사를 단죄하는 정신을 배제했으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베트남 관계를 단교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은 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1991년부터 베트남에 총 1.6억 달러 무상원조. 14.47억 달러의 유상원조를 행했다.) 또한, 현재 베트남에서 한국기업 삼성이 노동 착취가 심각하다고 하여, 국교 수립이 남한 자본의 이익만을 추구한 것이고 따라서 국교 수립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곤란하다. 즉 한국과 베트남 노동자의 연대를 통해서 베트남 노동자의 노동권 신장에 기여해야지, 단교와 자본 철수를 주장할 수는 없다.
덧붙이자면 만약 북한이 2002년 평양선언의 사례처럼 한일청구권협정과 동일한 방식으로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면, 그러한 입장에 따라 북일수교를 반대한다거나 수교에 임한 북한을 비난하는 것도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또한 대법원판결을 계기로 반일 민족주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일본 사회운동이 기대했을 리도 없다. 한일 민중연대를 주창하는 모든 사회운동은 일본의 ‘조선 멸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나타나는 맹목적 반일 정서가 한일 민중연대에 분명히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4. 사회운동의 대응 방향
1) 한국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자는 문재인 정부가 대법원판결에 대해 ‘사법부 존중’이라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온전한 사실이 아니다. 공익과 관련된 재판인 경우,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도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 미국도 외교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연방대법원이 국무부의 의견을 듣는 ‘법정 조언자’ 제도가 존재한다. 영국도 외교 문제나 국제법과 관련된 재판을 맡는 경우 외교부에 확인서를 보내 입장을 요청하는 것이 관행이다.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인 외교적 사안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이 정치적 판단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아니, 오히려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일수록 국민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외교적 사안마저 사법부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은, ‘정치의 사법화’의 극단적 형태이며 실제로는 정치의 소멸이다.
문재인 정부가 사법부 존중이라는 원칙을 최고로 중시한다면 왜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기금을 마련하는 1+1 안을 제시했는가. 대법원판결 어디서도 한국기업이 기금 마련에 참여해야 한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사후적으로 대법원판결과 ‘모순’되는 안을 추진한다면, 사전적으로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국내정치적 노력이나 외교적 노력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문제가 지금에 이르게 된 이상, 양국 간 외교적 해결책을 찾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국내언론에도 많이 보도된 일본 지식인집단의 성명서 「한국이 적입니까」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명운동의 발의일은 2019년 7월 25일이다.)
일한기본조약 및 일한청구권협정은 양국관계의 기초이므로 존중해야 합니다. 다만, 아베정권이 상용구마냥 쓰고 있는 "해결되었다"는 말은 결단코 사실과 다릅니다. 일본 정부 스스로가 개인청구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사할린 주재 한국인의 귀국 지원 및 피폭된 한국인에 대한 지원 등, 식민지 지배에 따른 개인의 피해 사실에 대해 공부하며 보상을 해왔으며, 아베 정권과 박근혜 정권 사이에 맺은 2015년의 「일한위안부협의」(다양한 평가가 있으나, 이미 재단은 해체됨)도, 한국 측 재단을 통해서 [일본] 국비 10억을 갹출한 사례가 있습니다. 한편, 한국도 노무현 정권 시절에 식민지 피해자를 대상으로 법률을 제정하여 보상을 진행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참고한다면, 의논과정에서 양국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성명은 1960년대에 일조우호계 단체가 제시했던 입장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한일기본조약이나 한일청구권협정은 양국 관계의 기초이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삼는다는 점이다. 우리 역시 현재 시점에서 이를 전면적으로 무효화하는 것이 과연 양국 국민의 우호 관계 수립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면, 현재 시점에 이르러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해 역사적으로 비판적 평가를 제기하는 것과 이미 체결된 협정을 무효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성명이 현재 갈등에 빠진 문제에 관해 구체적인 해결책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국이 상대방 국가에 대해 자기주장을 펼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한다. 즉 △2015년 ‘위안부 합의’라는 분명한 사례처럼,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기존 주장을 계속 실천적으로 번복했다는 점에서, 이번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도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며, 또한 △한국은 노무현 정부도 태평양 전쟁기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을 위한 법률을 제정해 사실상의 보상을 했다는 점에서 보상 책임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며, 따라서 한국 정부도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성명의 ‘정신’에 동의한다면, 한국 측에서는 한국 내부로부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먼저 찾아야 한다.
그런데 정부에서 말한 1+1 안조차 왜 한국기업이 기금마련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부가 명확한 근거를 말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기업의 기금 출연을 정부가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의 기금 출연은 종종 박근혜 정부 당시 케이 스포츠, 미르 재단에 대한 성금 출연 문제와 결부되어 회자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강제할 근거가 있냐는 쟁점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1+1 안에 대한 국내적 합의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예를 들어 G20을 앞두고 6월 19일에 한국 정부가 재단을 통해서 기금을 만들자는 안을 제시한 후 야당에서 “1+1 안에 대해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했냐”고 질문했을 때, 청와대 비서실장은 “발표해도 될 수준의 합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소송 대리인단은 “대리인단, 지원단을 포함한 시민사회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정부가 제시한 외교적 대안조차 법적 근거나 국내 동의지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며, 국내 여론의 인식을 형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2) 사회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회진보연대가 「반일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는 제목으로 《사회운동포커스》를 발간했을 때, 다른 사회운동 단체들은 이를 비판하는 입장을 제기했다. 한일청구권협정이 식민지배 청산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거나, 피해자의 절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 기관지의 글들을 통해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설명했다. 즉 과거 중국이 배상포기 정책을 시행하거나 북한이 조일평양선언에 합의할 때 국제적 세력관계라는 구조적 제약과 전략적 선택이라는 복합적인 역사적인 맥락이 존재했던 것처럼, 1960년대 한국의 선택도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박정희 정부가 태생적으로 친일적이어서 이런 선택을 했다는 인식은 사실 왜곡에 가깝다.) 또한 피해자 문제에 관해서는 박정희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보상정책을 설명하면서, 피해자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과연 한국 정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인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비판했던 단체들이 모두 현재와 같은 반일 민족주의적 선동에 찬성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사회운동이 현재 국면에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두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현재 국면에서는 맹목적인 반일감정 조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노 재팬’이라는 구호나, 반일 불매운동 분위기의 확산은 실제로 한일 민중연대의 흐름을 창출하는 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조국 전 민정수석처럼 친일파·애국자 이분법이 사실상 지극히 위험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무기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친일파·애국자 이분법이 극단화되면 폭력이나 테러리즘적 분위기마저 조성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는 일본기업 자산의 현금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치 ‘폭풍의 눈’처럼 상대적으로 소강상태로 보이지만, 향후 사태 전개에 따라 어떤 상황이 도래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둘째, 이를 전제로 사회운동은 현 상황과 역사적 사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일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한국 정부가 실행한 보상 정책, △대법원판결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기관지에서 대법원판결을 분석하고, 한국 정부가 취한 보상정책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기실 반일 민족주의 분위기에 분명히 반대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수동적, 소극적이라고 하더라도 문재인 정부의 반일 드라이브에 결국은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셋째, 이번 사태가 극단화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상황, 특히 한일 경제 관계의 단절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숙고해야 한다. 즉 문재인 정부의 반일 드라이브가 야기할 미래의 상황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겨레신문》은 “생존을 위해 자존을 포기하지 말자”는 구호를 내걸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간의 “평화경제로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경제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와 유비할 수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지지자들도,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연합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브렉시트가 영국에 줄 충격은 충분히 인식하면서, 한일 경제 관계의 단절이 한국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한다면 이는 주관적인 희망일 뿐이다.
나아가 ‘부품, 소재의 자립화’를 주장하는 수준을 넘어서,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평화경제’를 일종의 ‘민족경제’로 해석하는 입장도 존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 자유무역 질서로부터의 이탈이 오히려 한국경제의 발전을 추동할 수 있다는 ‘반세계화’적 논리가 무겁게 깔려 있다. 그러나 ‘대안세계화’라는 정신은 노동자운동이 대안자유무역협정을 추구함으로써 동아시아 자유무역 질서에 대한 내적 비판을 통한 내적 개조를 시도하자는 것이었다. 즉 반세계화의 논리처럼 국제 경제 관계로부터 이탈 전략은 불행히도 실행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반세계화는 정책적으로 보호무역주의를 지지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족주의나 보수주의, 심지어 인종주의나 외국인 혐오를 동반할 수 있다. 반면 대안세계화는 자유무역체계 내에서 노동표준의 수립을 위한 노동자 국제연대를 강조하며, 대안자유무역체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현재 한일갈등으로 불거진 사태를 보며,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의 일견 모호했던 차이를 더욱 분명히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회운동이 이러한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동아시아에서 다면적인 충돌을 빚고 있는 쟁점에 관한 합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