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의 『폭풍』,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기획연재 |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 운동 역사 ①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 운동 역사 연재를 시작한다. 처음으로 소개할 책은 『폭풍: 해방공간의 노동운동 소설선집』이다. 문학평론가 신덕룡 교수가 1945년 8월부터 1948년 정부 수립 직전까지의 노동 현장을 다룬 단편소설을 묶어 1990년 발행했다. 김영석의 「폭풍」(『문학』, 1946년 7월호 수록), 「전차운전수」(『신천지』, 1946년 8월호 수록), 「지하로 뚫린 길」(『협동』, 1946년 10월호 수록), 이규원의 「해방공장」(『우리문학』, 1948년 9월호 수록), 전홍준의 「새벽」(『문학』, 1948년 9월호 수록), 이동규의 「오빠와 애인」, 「소춘」, 홍구의 「석류」, 전명선의 「방아쇠」(『문학』, 1947년 2월호 수록), 강형구의 「연락원」(『문학』, 1947년 2월호 수록), 지하련의 「도정」(『문학』, 1946년 7월호), 안회남의 「별」, 「철쇄 끊어지다」가 포함되어 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안태정, 2002),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임송자, 2007) 등을 참고했다.
1. 이규원의 「해방공장」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패전 사실을 발표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 마지막까지 일제에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하던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정치적 주권의 회복을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1946년 9월 10일 미군정이 실시한 ‘미래 한국 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8,000여 명 응답)’에서 확인되었던 것처럼, 당시 한국인들은 70% 이상이 사회주의 국가를 희망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에 개입했으며, 미군정의 진주에 앞서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자연적인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본 자본과 일본 기술자, 일본 경영인의 급격한 철수는 한국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일본과 갑작스러운 경제단절로 한국의 공업생산은 1939년 5억 5319만 4천 원에서 1946년 1억 3698만 4천 원으로 75.2% 감소했으며, 노동자 총수는 1943년 25만 5393명에서 1947년 3월 13만 3979명으로 47.5% 감소했다. 1946년 실업자 수는 110만여 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생산위축과 동시에 징용, 징병자들이 갑작스럽게 귀국한 정황을 고려한다면 실제 실업자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으리라 추정된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의 실질임금은 37.14(지수 기준 1936년 100)였는데, 이는 해방 직전인 6월 108.88의 1/3 수준에 불과했다.
실업자의 범람과 실질임금의 하락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약화하고 분열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여 자발적으로 공장을 접수하고 직접 운영하는 운동을 조직했다. 이후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공장관리운동을 지지하고, 이를 확장하고자 했다.
단편소설 「해방공장」 줄거리
“안되오. 당신 맘대루 기계를 돌릴 수 없소. 오늘부터 이 공장에서 당신 명령은 통하질 않소. 명령할 권리는 우리들에게 있소.”
1945년 8월 15일 정오. 부평 군수산업단지 주물공장의 노동자들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기계를 세워버린다. 자동차 공장에서도, 제관 공장에서도, 기계 공장에서도, 목형 공장에서도, 포탄 공장에서도, 도장 공장에서도, 그리고 창고와 사무실에서도 일본인들은 더는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일본인들은 즉각적으로 밀회하여 조속히 퇴각할 방법을 궁리한다. 남은 자산을 현금화해 일본으로 송금하고, 남아 있는 설계도면을 불태우며, 공장의 중요한 부분을 폭파하는 그런 일들이다. 한편 조선인들의 반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각각이다. 징병을 피해 공장으로 들어온 노동자들은 누가 붙잡을까 황급히, 그리고 조용히 공장을 떠난다. 일부 남은 노동자들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구와 기계들을 팔아먹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다.
해방 후 사흘째 되는 날, 김용갑, 이달관, 장노야, 조억만 등은 종업원 대회를 조직한다. 이들은 이미 16일부터 일본인 종업원들이 공장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던 차다. 종업원대회 소식을 듣고 노동자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든다.
김용갑이 먼저 사람들 앞으로 나선다. 생전 처음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려니, 며칠을 고민했던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김용갑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다. 저 일본 놈들 때문에 우리는 이 공장에서 죽도록 일해야 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우리는 단결하여 저 일본 놈들에게 대가를 요구해야 한다. 회사해산금 100만 원, 과동금(폐업으로 인한 실직 기간의 생활비) 100만 원, 앞으로 3개월간의 임금 100만 원, 총 300만 원을 회사에 요구하자.
불과 쇠를 다루는 위험한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두 개가 잘린 이달관을 비롯하여 온몸이 불에 데여 꿰맨 상처로 가득한 노동자, 기계 소리에 귀먹은 노동자, 왼팔을 잃고 해고되었던 노동자들이 김용갑의 주장에 동조한다. 제각기 살길을 찾던 노동자들이 하나 되어 환호한다. 300만 원을 받아내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결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위대를 조직하여 공장의 기계를 지키기로 한다.
노동자의 단결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노무계 사무직으로 일하던 박가는 쪼르르 사장에게 달려가 종업원대회 결의사항을 알린다. 공장관리위원들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사장, 공장장, 전무가 사라지고 없다.
조억만의 제안에 따라 공장관리위원들은 사장 집, 공장장 집, 전무 집으로 흩어져 들어간다. 마침내 관리위원들은 사장네 다다미 속에 함께 숨어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다. 사장이며 공장장이며 집마다 몇 가마씩 쌓여 있는 흰쌀을 보고 노동자들은 기아에 시달리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때를 떠올린다. 노동자들은 이전에 체벌 당하던 일, 고문받던 일 등을 떠올리며 사장, 공장장, 전무에게 분풀이한다.
세 사람이 300만 원을 내놓을 생각이 없자, 관리위원들은 그들을 공장으로 끌고 와 방공호에 가둔다. 세 사람은 쇠붙이를 다루는 기계를 보고 움찔움찔한다. 다른 노동자들은 중간 책임자들도 불러와 그동안의 분풀이를 한다.
이틀의 감금 끝에 협상은 150만 원으로 타결된다. 충분한 돈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들의 자발적 협상의 결과였다. 일본인들은 관리위원들에게 공장을 위임하는 증서도 전달한다. 이틀 주야의 감금으로 노동자들의 분풀이는 끝났고, 노동자들은 승리감을 만끽한다.
해방감을 느낄 순간도 잠시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의 관리권을 위임받았지만, 현금은 이미 일본으로 송금되어 회사 장부는 비어있고, 자위대의 노력이 무색하게 공장의 주요 자재들도 뒤로 팔려나간 상황이다. 이대로는 공장을 운영할 수가 없다.
사장에게 받은 150만 원의 용처를 논의하기 위해 2차 종업원대회가 열린다. 김용갑은 ‘한 사람이 이삼천 원씩 나누어 갖고 직장 문을 닫아버릴 것이 아니라, 그 돈 전부를 각 사람이 투자해 공장의 기계를 돌리자’고 제안한다. 지금 해산금을 받지 말고 그 돈으로 공장을 운영해서 월급은 월급대로 받고 잉여금도 분배하자는 거다. 조억만은 “그 일본놈들이 저희들이 없으니 공장도 운영 못한다는 흉을 받지 맙시다. 우리 노동자들의 힘을 보입시다”라며 노동자들을 설득한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다수 보인다. ‘막대한 금액을 관리 위원들이 몽땅 집어 삼키려고’ 그러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노무계 박가는 관리위원들이 무능자며 무경험자라고 힐난하며 반대편을 충동질한다. 그동안 관리위원들이 주야로 예비회담을 했던 터라, 종업원들은 일본인 경영주로부터 받은 150만 원을 운영자금으로 전용하자는 제안을 채택한다.
2차 종업원대회에서 공장관리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소한 후, 기술자인 송찬을 중심으로 새로이 공장자치위원회가 구성된다. 종업원 대회의 결의에 따라 배반자 박가를 포함한 13명은 공장에서 쫓겨난다. 포탄 등을 만들던 공장의 노동자들은 평화산업으로 설비를 개조할 때까지 다른 공장으로 출근하고, 사무실의 불필요한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새 일을 시작한다. 1945년 10월 1일, 공장 정문에는 <팔월공장>이라는 새 현판이 달린다.
해방공간의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운영하다
「해방공장」이 실린 『우리문학』 1948년 9월호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해방공장」의 내용은 한동안 절필하고 일제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이규원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작중 ‘팔월공장’의 배경은 인천 일본육군조병창에 무기와 부품을 납품하던 미쓰비시 제강 부평공장으로 추정되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부평공원이 조성되었다.
소설 속의 내용처럼 해방 직후 일본인들은 공장 기계를 팔거나 파괴하고 자본을 회수하여 자국으로 돌아갔다. 자본주의적 생산체제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공장관리운동을 조직했다. 정치적 신념, 종교의 차이, 노조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스스로 생활 터전 확보를 위해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단결한 것이다. 이는 해방 후 한국 경제의 자립과 재건을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공장관리운동은 국가기관, 조선인 소유 공장에서도 광범위하게 조직되었으나, 공업자본에서 일본인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만큼 일본인 소유 공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해방 직후의 정치·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국면을 창출할 맹아적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공장관리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해방공장」에서도 해산금 요구와 공장관리위원회 조직을 결정한 1차 종업원대회 이후 ‘이상스럽게도 친절한’ 조직자들의 출입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후 김용갑, 이달관, 조억만, 장노야 등은 노동자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두기 시작하고, 이들이 공장으로 투신한 지식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한다. 이처럼 해방 직후에 개별 공장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던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은 조선공산당의 지지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방침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역, 다양한 부문으로 퍼져나갔다.
공장관리위원회는 그 역량에 따라 다양한 수준과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 (일제) 자본으로부터 공장을 접수하고 인수하거나, 2) 공장 파괴와 자재 유출에 맞서 공장을 확보하고 관리하거나, 3)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자본금, 자재와 물품을 마련하고 기술자를 확보하거나, 4) 일본 자본가로부터 퇴직금을 받아내고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거나, 5) 여전히 남아 있는 일본인 또는 조선인 자본가를 퇴진시키는 일 등이 시도되었다. 모든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이 ‘노동자 자신의 공장 운영과 생산의 조직화’라는 분명한 방향으로 조직되거나 체계화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규원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공장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공장, 회사의 운영에 착수하는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공장관리위원회는 노동자만으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노동자와 중간 사무직, 자본가가 결합한 경우도 있었고, 노동자와 중간 사무직으로 구성된 경우, 중간 사무직만으로 구성된 경우, 조선인 중역과 사원으로 구성된 경우 등 다양했다. 일부 기업은 노동자 공장관리를 거쳐 이후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을 지지하고 이를 확대하고자 했으나,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된 공장관리위원회에서 노동자들이 주도권을 확보하고 ‘노동자 공장관리’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가장 급진적인 시도를 한 경우에도 공장관리위원회는 공장과 회사의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제 자본가가 저항하기도 했고, 자금이 없거나 기술자와 경영 능력이 부족하기도 했다. 추상화된 정치지향이나 강령을 지닌 경우도 있었지만, 공장과 회사에 대한 전반적인 운영방침을 세우지 못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 귀결된 경우도 있었다. 소설 속의 ‘팔월공장’은 일본인 경영주를 혼내주고, 자본과 기술자도 확보하여 노동자 중심의 생산관리를 시도했기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노동자 공장관리운동 중에서도 대단히 성공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후 ‘팔월공장’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3부로 기획되었던 소설 중 2, 3부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해방 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군이 인천 육군조병창을 접수했으며, 미군정 하에서 공장자치위원회의 활동이 인정되지 않았던 것을 통해 운영이 쉽지 않았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자본이 철수하고 공업생산이 위축되어 있던 해방공간에서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은 자본가 없이도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흐름은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노력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공장과 회사의 운영은 체계화되거나 제도화되지 못한 채, 미군정에 의해 점차 소멸해갔다. 미군정은 국·공유 재산과 일본인의 사유재산을 모두 미군정에 귀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이는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을 부정한 것이었다.
2. 김영석의 「전차운전수」와 「폭풍」
잠시 시계를 돌려 해방 전 이집트 카이로로 가 보자. 1943년 12월 1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연합 4대국은 이곳에서 전후 한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카이로 회담의 내용에는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에 주목해 ‘적절한 시기에’ 독립과 자유를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노예 상태’라는 언급은 일본의 가혹한 통치방식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국의 역량에 대한 연합국의 판단이기도 했다. 즉 연합국은 한국이 오랜 기간 노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민주적 훈련이 부족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1945년 2월 얄타회담과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에서도 바뀌거나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은 한국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던 연합국의 합의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았다는 것에 주목했지, 그것이 그들의 ‘승인’으로 인해 가능했다는 점은 의식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만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5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만들어 온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인들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주권 정부를 구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 정세는 한국인들의 희망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스스로 독립을 얻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스스로 독립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희망과 무관하게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국내에 세워진 인민공화국과 (그에 훨씬 못 미쳤으나)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한반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세력은 많았으나, 그것을 자임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가지지는 못했다. 한국의 운명은 여전히 미국,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의 손안에 있었다.
1945년 8월 말이 되자 소련은 38선 이북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도착했고, 곧 남한 전역을 점령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들의 점령정책은 한반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정책의 기조는 같았지만, 한국의 분위기를 고려한 양 점령군의 점령정책은 정반대였다. 38선 이북의 소련은 인민위원회를 전면에 내세우는 간접 통치를 선택했다. 38선 이남의 미국은 조선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면 부정하고, 오직 미군정만이 합법적인 통치 기관임을 내세우며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 (물론 미군정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공식적인 전면 부정과 달리, 좌익 중심의 인민공화국은 물리적으로 탄압했고 우익인 임시정부 요원들은 국내 정치에 활용하고자 했다.)
해방 2개월 만에 전국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건설하다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은 해방 직후 급격하게 위축된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반도 경제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생산력은 현저히 감퇴했다. 남한 지역에서 미군정은 공업생산의 회복에 기여하지 못했다. 미군정은 일본인이 기계 시설과 원료 재고를 방매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기술자를 공급하거나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 시켜 공장을 가동할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으며,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을 부정하여 오히려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또 미국은 공업재건을 위한 기계류 원조보다 소비물자 원조에 집중했다.
일제 말 한국의 노동자 총수는 총 212만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8%, 경제활동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 인구에서의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들은 해방 직후 경제적 빈곤, 실업자화, 노동권의 부재에 대응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익 향상을 위해 스스로 활동했다. 이는 노동자 공장관리운동, 해산수당금 요구 운동, 노동조합 조직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은 개별 공장이나 회사, 지역사회의 범위에 한정되어 산업 간의 연계를 모색하거나 전국적으로 통일된 계획을 수립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9월 26일 조선공산당과 선진 노동자들은 산업별 노동조합 형태에 기초하여 전국적으로 단일한 노동조합 중앙조직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준비위원회).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최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결성대회에는 16개 산별노조와 합동노조의 1194 분회, 21만 7073명의 조합원을 대표한 51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전체 노동자 대비 조합원 조직률은 10% 이상이었고, 실업자를 제하고 조합비 부담 가능한 조합원들만 추산한다면 조직률은 6.6%였다.
전평은 출범 당시에는 산업별 단일노조 형태로 시작했으나, 이후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마산, 군산, 광주, 목포, 삼척, 전주, 사리원, 원산, 함흥, 흥남, 평양, 성진, 청진, 진남포, 해주, 신의주에 지역평의회가 설치되었다. 산업별 단일노조 형태와 지역평의회 형태의 이중적 조직구조를 갖춤으로써 전평 조합원들은 더욱 긴밀하게 결속할 수 있었다. 지역평의회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전평은 1945년 12월 즈음에는 223개 지부, 1,757개 분회, 553,408명 조합원으로 확장했다.
한편 전평은 남북 분할점령 상황을 고려하여 1945년 11월 30일에 북조선총국을 설치했다. 이후 북조선총국은 1946년 4월 북조선 노동총동맹, 5월 북조선 직업총동맹으로 개편하면서 전평과 분리된 조직이 되었다. 38선 이남 지역의 노동자 대중조직으로서 전평의 조합원 수는 1947년 4월 26만여 명 정도였다.
전평의 행동강령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로서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유급휴가제, 완전고용제, 사회보험제 쟁취 등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집회·결사·시위·파업의 자유, 단체계약권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노농동맹, 18세 이상 남녀의 선거권·피선거권 보장, 노동자의 공장관리와 인민공화국 지지, 자주독립 등의 정치적 요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강령은 개별 사업장 수준의 요구 조건에도 반영되었다. 즉 현장의 전평 조합원 대중들은 정치적 요구 조건을 전국적 전망 속에서 수용했고, 동시에 전평 중앙은 경제적 요구를 바탕으로 현장 조합원들과 결합했다.
이와 같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에 대한 강조는 전평 결성대회 선언문에도 반복된다. 선언문은 전평의 확대강화가 “각 공장 내의 노동자의 정당한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부절한 투쟁을 전개시켜 그 투쟁과정을 통하여 더 높은 정치투쟁에까지 앙양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며, “만일 노동조합운동을 노동자의 당면한 경제적 이익만을 위한 투쟁으로서 만족시켜 정치투쟁을 무시·억제한다면 이는 곧 조합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그와 반대로 노동자의 일상이익을 무시하고 저돌적으로 정치적 투쟁으로만 지도하려는 대중과 유리된 좌익 소아병적 경향과도 싸워야 할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전평은 조선공산당(또는 남조선로동당)과 역사적, 조직적, 정치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고 활동했다. 동시에 전평은 “조합은 당의 지령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당은 중하고 조합은 경하다는 견해는 철저히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이 당으로서 기능과 독자성을 발휘하고 조합이 조합으로서 기능과 독자성을 충분히 발휘해야만 각기 조직을 확대 강화할 수 있다.”(전국노동자신문, 1946년 3월 22일)고 강조하면서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유지했다.
전평의 조직활동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뉘는데, 1945년 11월 전평 결성 이후부터 1946년 말까지는 민주적 자주경제 건설을 원조하는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산업건설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46년 1월 지령 제6호 <산업건설운동을 중심으로 한 당면투쟁>은 “우리 노동자대중이야말로 진실한 건설자이며 신성한 생산 애호자이며 전투적 애국자라는 견지에서 (……) 산업건설운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해야 하며,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 및 실업자대중을 투쟁에 동원하며 조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래에 소개할 「폭풍」은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을 정책적으로 포기한 이후, 미군정의 관리인 제도를 인정한 상황에서 산업건설운동을 전개하는 전평 노동조합을 보여 준다.
단편소설 「전차운전수」 줄거리
때는 1946년 4월. 이우식은 6년 차 전차운전수다. 일제하에서 우식은 자신이 전차의 태엽 장치가 된 것 같다고 느끼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 전차운전을 해왔다. 그러나 해방을 맞아 더는 그저 전차의 한 개 태엽 장치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감격하며 우식은 전차운전수로의 자부심을 느낀다.
어느 날 우식은 시민의 발로써 고단한 노동을 끝내고 차고지로 들어간다. 그때 우식은 메이데이 포스터를 찢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운전수 김학수라고 추측한다. 그날 퇴근 후 우식은 김학수 집을 찾아간다. 김학수의 집에는 차장 차영선과 인부 박, 운전수 활길동, 쇠돌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학수는 술자리에 함께하면서 이들이 대한독립노동총연맹과 관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후 우식은 차영선에게 친한 척을 하며 그들의 행동을 감시한다. 메이데이 이틀 전, 영선은 우식과의 술자리에 학수를 초대한다. 영선은 우식에게 김학수 패의 명부를 보여준다. 우식은 5~6명인 줄 알았던 김학수 패가 57명이나 되는 것을 알고 곧장 술자리에서 나와 분회에 이 사실을 알린다. 우식은 승무원들을 다시금 전차의 한 개 태엽 장치로 전락시키려는 책동에 분노하며, 조합원의 단결이 필요함을 느낀다.
단편소설 「폭풍」 줄거리
공장장 조헌식은 허구한 날 귀득이를 괴롭히는 것이 일이다. 귀득이가 대한노총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방된 지 10달이 다 되어가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일제강점기 때와 다름없다. “이 공장은 군정청에서 명령하는 거와 일반이다! 알었어? 내 말을 어기는 것은 군정청에서 명령하는 거와 일반이다! 알었니?” 미군정이 임명한 공장장은 분회가 교양반을 운영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목공 황수일을 내세워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의 세를 불리려 한다.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종업 사이렌이 울리고 분회위원 열여섯 명이 목공실에 모였다. 위원장 조한복이 제안한다. “그저께 단오날 한 시간 일찍 작업을 끝냈다고 해서, 그대신 내일 한 시간 작업을 연장하겠다는데 해서 우리는 단연코 그것을 거절해야 할 줄 아는데 동무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분회위원들은 만장일치다. 요구조건은 부위원장 김순희와 분회위원 최정녀의 의견에 따라 ‘시간 외 작업 반대’와 ‘여자 동무를 농락하는 공장장 배척’으로 결정된다. 논의가 끝나고 흩어지는 길에 이두영은 황수일의 뒷모습을 발견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다음날, 비는 멎었지만 바람이 거세다. 두영은 분회위원부터 단속하고 나선다. ‘분회가 튼튼해야 우리도 학대받지 않는다.’ 오전 10시, 휴식 시간이 되자 공장 게시판에는 벽보가 붙는다. [금일 25일 전 종업원에게 광목 배급함. 단 작업성적이 나쁜 직공에겐 배급하지 아니함. -총무과장] 동시에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즉시 대우 개선을 요구하자!’는 분회의 벽 신문도 돌아다닌다.
점심시간. 사람들이 식당에 모이자, 김순희는 걸상에 올라서 사람들을 선동한다. 이를 본 황수일은 사무실로 달려가 총무과장에게 사실을 알린다. 오후 3시, 대한노총에 가입한 25~26명이 운동장에 모여 세를 보여준다. 한편 위원장 조한복과 김순희는 총무과장과 공장장을 만나 연장근로 계획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이내 교섭은 깨지고 공장마다 벽보가 붙는다. [지시 1. 종업시간이 되거든 일제히 작업을 중지할 일. 2. 무슨 일이 있든지 종업시간까지는 작업을 계속할 일. 3. 힘을 다하여 반동패인 대한노동총연맹을 뚜드려 없애도록 할 일. -분회]
오후 5시. 종업시간이 되었지만, 종업 사이렌이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기계는 멈췄다. 각각의 공장에서 분회위원들이 종업원을 이끌고 운동장으로 나선다. 대한노총패가 아무리 폭력을 써도 사백 명 가까운 종업원들의 시위를 막을 수 없다. 작업연장에 반대하는 공장 안에서의 시위는 성공적이었다.
이튿날 노동자들은 작업에 복귀했다. 그런데 경관들이 몰려와 위원장 조한복과 부위원장 김순희를 잡아간다. 동시에 벽보도 붙는다. “똥그랑당은 매국노가 모인 곳이다. 전 종업원은 노동자를 사랑하는 대한노총으로 모이라!”
점심시간에 두영은 분회위원 김명준을 지부로 보내어 분회의 상황을 알리고, 최정녀를 위원장 집으로 보내어 분회의 서류를 자기 집으로 옮기게 한다. 휴식 시간에는 분과 위원들과 몇몇 노동자들을 모아 기숙사에서의 선전 활동을 제안한다. 대한노총이 대대적으로 가입도장을 받을 터이니,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거다. 통근하는 최정녀, 김명준, 방인근, 김복술은 저녁에 따로 만나 위원장, 부위원장 검거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준비하자고 한다.
아홉 시가 넘어 두영의 집에 모인 다섯 명의 분회위원들은 함께 분회위원으로 활동하던 박태석과 안정자가 배신했음을 알게 된다. 한편 공장 기숙사에선 귀득이가 김순희, 조한복을 석방해야 한다고 선전한다. 사감이 귀득이를 끌어내자 분회위원 최수동이 사감을 막아선다. 최수동은 작업이 끝나고 황수일에게 한 대 맞아 마음이 섭섭하던 찰나였다. 여공들도 우르르 몰려와 ‘놓구 말해-’ 하며 소리치자 사감은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다음 날, 공장에는 “됴한복 김슌히 두동무가 석방되기까지 작업 즈지할 일! 대한노총은 퍽력단이다! 사감 공쟝장은 퍽력단 대장이다! 우리는 끄까지 싸호쟈!”는 벽보가 붙는다. 최수동과 강순남이 열정으로 붙인 것이다. 작업시간이 닥쳐와도 종업원들은 작업을 시작하지 않고, 운동장에 모여 일제히 주저앉았다. 공장장은 아직 사장이 나오지 않아 대답할 수 없다며, 일단 작업을 시작하라고 안달이다. 종업원들은 검거된 두 사람이 석방되기 전엔 작업하지 않겠다고 맞선다. 대한노총패가 몽둥이를 들고 와 한쪽을 파헤치지만, 남자 직공들이 막아선다. 공장장과 사감, 수위가 사무실로 들어가고 대한노총패도 사라진다. 노동자들은 해방의 노래를 부른다.
두영이 흥분한 노동자들은 가라앉히고, 노동자가 앞장서서 산업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종업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경찰을 실은 트럭이 사무실 현관 앞에 선다. 경관들은 피스톨을 앞세워 이두영, 김명준, 김간난, 최정녀, 김복술, 최수동, 강순남을 모두 끌고 간다.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귀득이가 공장문을 향해 달려간다. 종업원들도 뒤따라 달려간다. 경관이 피스톨을 겨누지만, 여공들은 트럭 앞을 막아선다. 경관들은 트럭을 버리고 일곱 사람을 결박하여 끌고 간다.
“우리는 공장 안에서 싸우자!” “동무들 석방될 때까지 싸우자!” 공장 안의 종업원들이 소리치기 시작한다. 끌려가는 두영은 공장에 남은 동무들의 단결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폭풍은 더욱더 거세게 불 것이다. 그러나 공장 안의 동무들은 부서지지 않을 증거를 보인다. 공장 문 앞에 모인 사백 명 가까운 동무들은 “노동조합 성공 만세!”를 끝없이 외친다.
전평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다.
2차 세계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임박하자 연합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제를 근본적으로 해체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처리 문제도 대두되었는데, 연합국의 중심이었던 미국은 한반도가 신탁통치 하에 있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은 이러한 입장을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도 다시 확인했다. 한반도를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시킨다는 내용이었다. 1945년 2월, 미국은 얄타회담에서 재차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다른 연합국에 제의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7월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는 카이로선언에 대한 지지가 천명되었다. 국제적 신탁통치라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합의의 연장 선상에서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가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은 1) 한반도에 독립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 이를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하며, 3) 임시정부와 협의해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결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에 그 내용이 국내에 왜곡된 형태로 보도되면서 남한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았다.
우익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였던 송진우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문이 나오기도 전인 12월 27일, 자신이 소유한 동아일보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소련의 요구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라고 보도했다. 김구를 위시한 충칭 임시정부 계열(우익)은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반대 운동을 조직했다. 임시정부 계열은 즉시 회의를 소집해 신탁통치에 대한 철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12월 30일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여, 다음날인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인 반탁대회를 개최했다.
모스크바 결정이 (왜곡되어) 알려진 직후 조선공산당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협정의 결정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일본의 패전 이전부터 한반도의 독립을 합의해 온 연합국의 결정을 존중하면서, 민족적 단결을 만드는 것만이 신탁통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이를 위해 민주주의적 민족통일전선을 견고하게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평도 동아일보 보도 직후인 12월 31일에는 “신탁통치 절대 반대, 반소반공의 음모를 배격하자, 민주주의적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자”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하지만 1946년 1월 1일 전평 허성택 집행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삼상회담에서 결정한 ‘신탁’이란 삼국의 우의적 원조와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며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에 있어서 한걸음 진보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후 1월 5일에는 전평 상임위원회에서 “세심한 검토를 거듭한 결과, 삼상회의의 결정은 비록 즉시 완전 독립이 허용되지 못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실력 여하 즉 민족통일 완성에 의하여 5년 이내 어느 때든지 자주독립이 성립될 수 있다는 보장이 국제법적으로 확정되었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전평 역시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우익 세력, 전평에 대항하여 대한노총을 결성하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계열, 이승만, 한민당 등의 반탁 세력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를 주장하는 좌파세력을 매국노로 몰아갔다. 임시정부 계열은 모스크바 결정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우익 세력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모스크바 결정이 이행된다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까 걱정했다. 내부에서 연합국의 후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적 판단도 제기되었지만 이런 주장은 완전히 배척되었고, 우익 진영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절대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1945년 12월 즈음 우익진영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청년단체인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동맹(이하 독청, 이후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의 실질적인 모체가 됨)을 조직했는데, 이들은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며 신탁통치 배격운동에 참가치 않는 자를 민족반역자로 규정했다. 해방 이후 심각한 실업으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청년들, 어떤 형태로든 신생 국가건설에 참여하고자 했던 정치 지향적 청년들,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독청을 비롯한 우익 청년단체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미군정은 격렬한 반탁운동을 통해 급진 좌익세력이 위축하고 친미적인 우파세력이 확대하고 있다고 봤다. 따라서 미국은 미군정의 통치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그것이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의 미국 입장에 대한 반대일지라도) 반탁운동을 묵인하고 고무했다. 이런 정황을 지켜보던 소련은 <타스통신>과 기자회견을 통해 3상 회의 협상 과정과 내용을 공개했다. 차츰 국내에는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대두되었다.
모스크바 결정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전평은 국제적 차원에서 반파쇼 민주주의 국제노선에 입각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고, 이를 총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미소공위 사업을 촉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전평은 미소공위 사업을 추동하며 노동자를 위한 정부를 만드는 데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평 산하의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안 지지를 위한 대중집회에 대거 참여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우익 세력은 노동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즉시 우익노동단체를 조직하는 활동에 돌입했고 미군정이 이를 지원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이다. 임시정부 세력은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승인받기 위해 이들은 2월 1일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비상 국민회의를 개최했다. 비상 국민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독청 위원장 전진한은 비상 국민회의에 참가하는 노동단체·농민단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전진한은 대한노총과 대한농민총연맹을 임시로 만들어, 각 단체의 대표자 김산과 김헌을 비상국민회의에 참가시켰다.
실체가 없는 조직이었던 대한노총을 실질적인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이후 독청의 주도하에 여러 우익 청년단체의 사람들이 징발되었다. 결국 3월 10일 대한노총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이 당시만 해도 대한노총은 한 개의 연맹체도 없는 이름만 ‘총연맹’이었지만, 우익 청년들을 철도와 영등포 등지의 공장에 취직 시켜 노동자 대중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전차운전수」의 김학수, 「폭풍」의 황수일의 행동이 그러하듯 대한노총은 미군정, 경찰, 우익정치인, 우익청년단의 적극적인 원조를 바탕으로 일관되게 전평타도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전차운전수」의 시간적 배경이 된 1946년의 메이데이까지만 해도 대한노총은 노동자 대중의 기반을 거의 구축하지 못한 정치단체에 불과했다. 전평과 비교하여 메이데이 기념행사 주최를 완전히 실패한 대한노총은 이후 조직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만, 1946년 8월까지만 해도 그 규모가 3000~4000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우익의 비상 국민회의에 맞서 좌익세력은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여할 통일된 조직으로서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전평 역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구성원으로 참가했다. 1946년 3월부터 5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서울에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미묘한 입장 차이로 충돌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반탁 세력을 공동위원회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했고, 미국은 이를 표현의 자유로 보아 공동위원회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1차 미소공위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결렬되었다.
대한노총의 전평파괴활동: 동양방적 인천공장
동양방적 인천공장의 사례는 김영석의 「폭풍」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 소설에서는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현실에서 대한노총은 테러와 폭력으로 전평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22일 일제 강점기에 요정 국일관과 백화점 부녀상회를 경영했던 조선인 자본가 최남을 동양방적 인천공장의 관리인으로 임명했다. 1946년 회사는 노동자들이 메이데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5월 5일 일요일에 근무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노동쟁의가 시작되었다. 5일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자 경영주는 노조 분회 간부 7명을 경찰이 검거하게 했다.
노조 간부가 검거된 틈을 타 회사 측은 노동자들에게 대한노총 가입을 강요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했고, (좌익 계열의 청년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의 도움으로 분회 간부들을 석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회사 측은 다시 대한노총 결성식을 비밀리에 거행하려 하였으나, 전평 조합원들은 이를 저지했다.
이후에도 경영주는 경찰과 일체가 되어 전평 조합원을 검거, 탄압하고 노동자들을 대한노총으로 회유하려 했지만 이런 방식은 번번이 실패했다. 노동자들은 대한노총이 ‘이승만, 김구 일파가 노동자의 단결을 분열시키기 위한 이름만 가진 유령단체’라고 인식했다.
회사는 위원장 윤한수와 조합원 김정애에게 서울 본사로 전근명령을 내렸으나,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하여 해고되었다. 전 종업원은 악질공장장·사무원·사감 배격, 해고자 복직을 걸고 투쟁했다. 5월 25일부터 노동 쟁의가 본격화하자 경영주는 무장경관 헌병을 동원하여 종업원들을 기숙사에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결국 동양방적 인천공장 노동자들은 6월 25일에 파업을 마무리했다.
전평 노동조합이 약해진 틈을 타, 경영주 측은 8월 3일 영등포 대한노총원 및 인천 평양청년회원 700명을 동원하여 대한노총 동양방적 인천공장노조를 결성했다. 대한노총 동양방적 인천공장노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좌익세력을 몰아내는 전위대가 되어 활약했다.
3. 강형구의 「연락원」과 전명선의 「방아쇠」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될 무렵 미군정청 공안부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발표한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사장 권오직과 이관술이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에게 위폐제작을 명령했고, 약 1,200만 원의 위폐가 시중에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사건발표 후 미군정청은 조선공산당 간부 등 16명을 기소하고, 박헌영 체포령을 내리고, 조선공산당 본부를 강제수색하고, 조선정판사를 폐쇄했으며, <해방일보>를 비롯한 좌파 계열 신문을 정간시켰다.
사건이 날조되었다는 조선공산당의 주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을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공산당은 7월 말 신전술(정당방위의 역공세)을 채택했다.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전평 역시 산업건설운동이라는 기존의 협조 전술을 철회하고 미군정의 부당한 노동정책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9월 총파업이 발생한다.
1946년 9월 1일 경성철도국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체계를 월급제에서 일급제로 바꾸고,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경성 철도공장 전평 노동자들은 9월 13일 일급제의 철폐, 임금 인상, 식량 배급 등을 요구하며 태업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항의는 전기 수선상, 건축구, 총신구 등 서울 철도의 다른 부문과 부산 철도로 확산하였다. 철도공장 대한노총 노동자들도 투쟁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 한 대한노총 노동자는 전평 노동조합의 요구 조건에 너무나도 철저하게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평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마침내 9월 23일에 부산 철도노동자들이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24일, 파업은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철도 사업장으로 확산했고, 출판·체신·섬유·전기 노조도 철도노동자와 같은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이에 가세했다.
단편소설 「연락원」 줄거리
파업이 시작된 지 엿새째 날 새벽 3시, 철도 파업단 연락 정보실로 연이어 전화가 온다. 무장경관을 실은 트럭 25대가 경성역을 통과했다는 소식이다. 용산역에서는 수천 명의 무장경관이 도착했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곧이어 통신국이 테러단의 습격을 받았단다. 다급한 소식과 함께 비명과 날카로운 소리가 이어진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무장경관이 참견하는 것은 남조선에서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통신국이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간은 캄캄한 밤이어서, 전화가 끊기면 고립된 직장 파업단들은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없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상부에서는 통신국의 상황을 5분 이내로 알아 오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책임자 인동은 통신국의 상황 파악을 위해 누구를 보내야 할지 난감했다. 이미 사람들을 여럿 보낸 후라, 남은 사람이 몇 안 된다. 옥경은 여자 동무라 포위를 돌파해야 하는 임무를 맡길 수 없다. 유진만을 보내고 싶지만, 인동과 진만은 옥경을 사이에 둔 애매한 관계다. 인동이 내적 갈등을 겪는 동안 상부에서는 재차 명령이 내려온다.
인동은 진만에게 연락 정보실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이 나가려 한다. 그때 진만이 인동을 밀치고 뛰어나가며 소리친다. “이놈아 우리들 앞에 계급의 싸움이 있다.”
미군정, 전평을 대한노총으로 대체하려 하다.
9월 총파업은 경제적 요구들로 시작했지만, 파업이 확산하면서 정치적 요구가 등장했다. 서울 철도노동자들이 노동쟁의를 경고하며 미군정 철도국에 서신을 보냈을 때만 하더라도 이들의 요구는 임금 인상과 식량 배급 등의 물질적인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파업을 통고할 때에 철도노동자들은 이미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은 민주적 노동법을 시행하라는 요구를 제시하고 있었다.
전평의 기관지인 9월 26일 자 《전국노동자신문》에는 미군정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 조선공산당 지도자 검거와 블랙리스트 작성을 비판하는 총파업 선언문이 실렸다. 이 선언문은 식량 배급, 공장 폐쇄 및 대량해고 반대 등의 경제적 요구와 동시에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전평 지도자들의 석방, 박헌영을 포함한 조선공산당 지도자 검거령의 취소, 북한에서와 같은 민주적 노동법 실시, 좌익 신문의 복간 허용, 파업의 자유와 미소 공동위의 재개 등의 정치적 요구들도 제시되었다.
전평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단호했다. 미군정은 이미 7월 23일 법령 97호를 선포하여 대한노총을 후원하고 전평을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었다. 9월 총파업을 계기로 미군정은 대한노총으로 전평을 대체하고자 했다.
대한노총 산하 노동자들 역시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지만, 이와 반대로 대한노총 지도부는 조합원들을 동원하여 파업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파업이 일어난 24일 대한노총 지도부는 곧바로 파업 대책을 협의했고, 28일에는 전평의 총파업 투쟁에 반대하고 직장 복귀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대한노총은 이를 위해 우익 정당들과 극우 청년단들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 뒤 수천 명의 극우 청년단원들이 미군정의 비호 아래 공장에 침투하여 파업을 일으키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였다.
우선 대한노총 철도파업수습대책위원회는 영등포연맹의 용산감투대, 조선피혁,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경성기관구에 돌입하여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로 돌아가라고 대대적인 선전캠페인을 벌였다. 대한노총은 한국의 모든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삐라를 뿌리거나, 철도파업이 공산당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파업은 민중들을 가장 비참한 조건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비난하는 삐라를 뿌렸다.
대한노총, 우익청년단원, 경찰관, 철도경찰은 협력하여 용산역·통신구·보선구·기관구·용품고·경성공장의 파업단을 강제 해산했다. 서북청년단원 700여 명이 서울 철도에 침투하여 파업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정지된 철도 교통을 복구시키기도 했다. 우익청년단원들은 서울 철도 외에도 철도 사업장들, 광산회사들, 섬유 공장들과 다수의 공기업에 침투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파업이 끝난 다음에도 공장에 남았고, 대한노총의 간부가 되어 전평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색출하여 테러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단편소설 「방아쇠」 줄거리
해방의 기쁨도 잠시, 물가가 급격하게 오르자 장현술은 적은 월급으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올해도 들은 풍년이지만 극성스러운 공출로 식량은 부족하고, 배급은 계속해서 밀리고 있다. 현술과 달리 잘난 사람들은 여전히 배부르게 먹고 풍족한 삶을 누리는 듯하다.
생활고를 참지 못한 장현술은 김원식, 최상길과 함께 삼십여 명 직공을 대신해 공장주인과 교섭에 나선다. “저이들 공전 가지고서는 배가 곱하서 견딜 수 없으니 더 생각을 해주셔야 되겠습니다.” 공장주인이 펄펄 뛰며 화를 내니, 현술은 말쑥하여 되돌아간다. 이튿날 공장주인은 순사까지 불러 장현술, 김원식, 최상길에게 동맹파업을 선동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단도리한다.
현술은 이래도 저래도 살아갈 가망이 아득하다고 느낀다. 때마침 현술은 철도국 4만 명이 파업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식량을 배급하라, 월급을 올려라. 간절한 요구들이다. 뒤를 이어 다른 공장들에서도 노동자들이 철도국원과 같은 요구를 내걸고 자기 공장 주인과 싸우기 시작한다. 현술이 일하던 구일철공소의 노동자들도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파업에 나서자고 결심한다.
오늘은 대구에서 큰 모임이 있는 날이다. 아침부터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모여든 사람들을 보니 현술은 가슴이 뻐근하다. 모임이 시작되는 12시가 가까워져 오자 “배곱하 못 살겠으니 식량문제를 해결하시오” 하는 소리가 쏟아진다.
앞의 마이크에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리는 여러분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과 같이, 이 급박한 식량문제를 해결시키기 위해서 하루 사홉씩 식량배급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배급은 어떻게 될 둘 모른다고 무작정 참으로고만 하니, 우리는 이 이상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 끝까지 우리의 요구를 위해서 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굶주린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학생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E 대학 학생들은 노동자를 탄압하는 경관에 맞서 T서를 접수하고, 거리로 달려 나온다.
그러나 대구에는 T서 외에도 D서와 K청이 있다. 그들은 12시가 되기도 전에 총해산을 명령하고 무기를 겨누고 군중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지휘자는 일본놈 밑에 고등계 형사로 있다가 해방 후 주임으로 승진한 L이다. L이 재차 해산을 명령하자 시민들은 악에 받쳐 소리친다. “굶어죽으나 마저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다”
결국 L은 사격 명령을 내린다. 현술은 동무 최상길이 가슴에 총을 맞아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현술은 눈이 벌컥 뒤집혀 이를 갈고 나아간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일반이다.” 이제는 L을 둘러싼 싸움이다.
해고와 테러로 전평이 약화되기 시작하다.
9월 총파업은 전평 간부 및 조합원들이 대량 구속되면서 마무리됐다. 서울에서만 2,200명 이상의 노동자가 검거됐고, 2,000여 명 이상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그런데도 각 현장에서는 9월 총파업으로 줄어든 조합원의 수 혹은 그 이상으로 조합원이 늘었다.
9월 총파업으로 전평의 규모가 급격하게 위축된 것은 아니었지만 전평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에 일상화된 해고와 테러로 전평 노동조합은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잃었다. 또 노동조합의 주요한 활동가들이 검거되거나 피신했기 때문에 전평 노동조합은 조직 중추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제 전평은 전면적인 해고·테러 반대 투쟁에 돌입한다. <해고반대투쟁과 통일전선의 문제>와 <해고반대투쟁의 의의와 그 조직활동의 방법> 등은 “해고반대와 피해고자의 복직투쟁”이 전투력, 조직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이며 “삼상결정의 총체적 실천에 의한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를 축조하는 과업”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대한노총은 전평의 총파업 투쟁을 저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이 계획한 바와는 달리 여전히 대한노총은 노동자 대중에게 쉽사리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파업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지도부가 대량으로 검거된 철도영역에서 대한노총은 어느 정도 조직을 확대할 수 있었지만, 철도 부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한노총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전평 하부조직의 활동가들은 여전히 현장 노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특히 전평은 경남, 경북, 전북, 전남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를 보였다.
대한노총이 본격적으로 조직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47년 3·22 총파업 이후였다. 미군정과 우익집단의 조직적인 테러와 전평 지도자 검거에 반대하여 조직된 3·22 총파업에서 전평은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다.
해방 후 채 2년도 안 된 사이 미소 양군이 점령했던 남북한에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구축되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민중적 기반 위에 전국적 조직을 건설한 좌익 진영을 탄압하고 강력한 억압적 국가기구를 형성했다.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1946년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했고, 이는 이듬해 6월 남조선과도정부로 발전했다. 반면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했고,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1946년 내내 토지개혁 등 이른바 반봉건 민주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를 기반으로 북조선노동당이 창립되었고, 1947년 2월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었으며 행정기관으로서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세계적 냉전도 현실화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의 진주로 해방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3월 12일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 위해 군사와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러나 남북한의 이질화와 세계적 냉전 구도 속에서도 남북의 분단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과 소련은 공동위원회 구두 협의 대상 단체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공동성명 11호를 발표했고, 이를 바탕으로 1947년 5월 2차 미소공위가 재개했다. 문제는 남한 우익 세력이었다. 남한 우익이 터무니없이 자신들의 공위 참여단체 수 및 회원 수를 부풀림으로써 남북한 신청 단체의 좌우 비율이 약간 우파 우세로 기울었다. 좌익이 우세를 유지하리라고 예상했던 소련은 반탁 단체들을 공위협의에서 배제하자고 요구했다.
협상이 난항을 빚자, 미국은 모스크바 결정의 파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남과 북의 인구비례에 의한 유엔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하자고 소련에 제안했다. 예측대로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고, 2차 미소공위는 결렬되었다.
2차 미소공위의 결렬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협상을 바탕으로 한국의 통일된 독립 정부를 수립할 마지막 기회를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소련이 현실적으로 남북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이들의 동의 없이 통일 정부를 수립할 방법은 없었다. 격렬한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이승만 및 김구, 미소공위에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태도를 보였던 한민당이 한반도를 분단과 전쟁으로 이끈 것이다.
통일 정부 수립에 대한 협의가 실패하면서 남북한은 본격적으로 분단 정권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미군정은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전평 간부와 조합원이 검거되고 전평 사무소가 폐쇄되었다. 전평은 한반도의 분단이 굳어지는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 없었다.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8월 하순 전후부터 전평은 미군정을 ‘조선인민의 주적인 미제’로 규정하고, 미군정에 대하여 전면적인 투쟁을 시도했다. 이제 전평은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철퇴시킨 후 남북조선의 총선을 통하여 인민공동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3·22 총파업 이후 전평의 활동은 점차 쇠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초,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겠다는 미국의 정책이 구체화되고 유엔 한국위원단이 내한하자 전평은 이를 반대하는 2·7구국총파업을 조직한다. 2·7총파업에서는 조선해원동맹이 주축이 되었는데, 대한노총 해원노조와 부산지구연맹은 파업주동자를 색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에는 남로당과 전평이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5·8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이미 전평은 와해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대한노총은 전평을 저지하는 활동에서 다시 한번 활약했다. 대한노총은 5·10선거를 선봉에서 지지했고, 단독정부 수립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혼란의 시기, 노동자·민중의 국가를 꿈꾸었던 전평의 시도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러운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기쁘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 전쟁을 위한 수탈이 중단되고, 더는 징용이나 징병을 걱정할 일도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해방으로 한국은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공업생산은 일제강점기의 30% 이하로 하락했다. 쌀값은 올랐지만, 도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일제강점기보다 1/3 수준으로 하락했다. 해외로 징병, 징용되었던 노동자들이 귀국하여 실업자의 수가 100만 명을 훨씬 상회했다.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을 구성했던 미국과 소련은 종전과 함께 한반도를 분할점령했다. 국내 정치세력들은 연합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우익 세력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심대하게 왜곡하며 독단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했다.
정치적, 경제적 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생산을 조직하고 혼란 속에서도 산업 건설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자각했으며, 독립 정부를 구성하는 데 힘을 보태고자 했다. 전평의 주도하에 노동자들은 자본가 없이도 공장을 운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전평 노동자들의 활동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권익을 향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전평을 통해 노동자들은 해방기 그 어떤 세력보다 분명하게 인민의 정치적 지향을 대외적으로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고, 미소공위 사업을 촉진하는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한반도의 향방을 결정할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
1945년 해방을 전후한 국제 정세, 한반도의 경제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이 바로 전평 활동의 조건이 되었다. 또 그 상황이 전평의 급진적인 활동을 제약하고 전평을 소멸에 이르게도 했다. 2019년 바로 오늘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와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역사 속에서 전평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소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