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페미니즘인가? ①
* 번역: 김진영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계간사회진보연대》 2019 여름호 김유미의 「페미니즘 열풍, 어떻게 볼 것인가」는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일종의 ‘열풍’이 된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또한 이를 여러 국가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긍정적인 표상이나 낙태권·성폭력 등을 이슈로 한 시위가 나타나는 세계적 현상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세계적 흐름과 한국의 상황을 비교하여 이해한다. 세계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참고한 자료 중 수잔 왓킨스가 2018년 초 《뉴레프트리뷰》에 발표한 「어느 페미니즘인가?」가 있다.
왓킨스는 이 글에서 2008년 이후 세계적 흐름이 된 전투적 페미니즘의 부활을 검토하기 위해 먼저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을 평가한다. 현재 세계 페미니즘 정치의 헤게모니적 형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페미니즘’이다. 왓킨스가 분석한 글로벌 페미니즘의 내용은 크게 ①제도권 정치·경제에서의 자유주의 페미니즘(반차별 접근법과 성주류화 전략), ②학계의 포스트 페미니즘(교차성 이론), ③법률 영역에서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성별 이분법과 엄벌주의)으로 나눌 수 있다. 왓킨스는 글로벌 페미니즘 비판을 토대로, 2008년 이후 라틴아메리카·유럽·중국·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평가한다. 이는 미국 민주당, 뉴욕의 언론들, 할리우드가 주도한 캠퍼스 성폭력 반대 캠페인, 워싱턴 여성행진, 미투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포함한다.
《계간사회진보연대》는 「어느 페미니즘인가?」를, 이번 호를 포함하여 세 차례에 걸쳐 번역 연재한다. 우리 시대 페미니즘 운동에는 이전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고, 그 핵심은 ‘글로벌 페미니즘’ 비판이라는 왓킨스의 주장과 세계 페미니즘 운동의 현황 분석을 한국어로 소개하고자 한다. 원글의 저자 수잔 왓킨스는 현재 《뉴레프트리뷰》의 편집자이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공저, 삼인, 2001), 『페미니즘 –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김영사, 2007) 등이 있다.
* * *
2008년 이래로 분출한 모든 저항 운동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아마도 전투적 페미니즘의 부활일 것이다. 보통 말하는 ‘페미니즘’은 한 번도 사라진 적 없기 때문에 특히 놀랍다. 여성의 권한 강화(Women’s Empowerment)는 국제기관이 오랫동안 외워온 주문이었다. 뭔가 새로운 것이 태동하고 있다는 징후는 2010년 미국과 영국의 학생 시위에, 2011년 스페인 마드리드 푸에르타 델 솔 광장과 미국 뉴욕 주코티 공원의 ‘점령’(Occupy) 운동 캠프장에 이미 있었다. 인도에서는 2012년 죠티 판데이가 집단강간을 당한 사건에 분노하여 대중 집회들이 개최되었고, 페미니스트들의 플래시몹은 힌두주의 근본주의자들이 벌이는 풍속 단속을 방해했다. 2014년 뉴욕 언론들은 미국 대학 캠퍼스 내 성폭행에 반대하는 시위를 대서특필했다. 2015년 브라질에서는 성폭력과 인종주의를 반대하고, 의회의 부패한 지도자 에두아르두 쿠냐 하원의장의 축출을 요구하는 흑인 여성 3만 명이 수도 브라질리아에 몰려들었다. 같은 해 초, 5만 명의 농촌 여성이 ‘데이지꽃 행진’(the March of Margaridas)이란 이름으로 브라질리아로 행진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정폭력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이 마크리 대통령의 급진적 경제개혁에 맞선 시위 선두에 섰다. 중국에서는 2015년에 성폭력 반대 스티커를 베이징 시 대중교통에 부착하려던 젊은 여성 5명이 체포된 것에 대해 200만 명이 온라인 청원에 서명했다. 체포된 이들은 청년페미니스트행동주의(Young Feminist Activism)라는 온라인 단체의 회원들로, 정부 당국은 이 단체 회원들을 지속적으로 체포해왔다.
2017년 1월, ‘99%의 페미니즘’은 미국에서 트럼프 행정부에 반대하는 100만 명의 행진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냈다. 폴란드에서는 집권당 법과정의당이 임신중절을 제한하는 법을 더욱 강화하려 했으나, 대중적인 여성 집회가 이를 막아냈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에서는 가정폭력과 경제적 불안정성에 맞서는 대규모 행진이 개최되었다. 2017년 3월 8일, 이러한 운동들이 3개 대륙에서 집회와 파업으로 한데 터져 나와,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을 급진적 운동의 장에 복귀시켰다. 2017년 10월 미투(MeToo) 운동의 분출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대중적 운동 중 단지 가장 최근의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페미니스트 전략을 갱신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일련의 딜레마에 부딪힌다. 첫 번째로,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진보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평가가 부족하다. 기성 페미니즘이 만들어낸 결과는 무엇이고, 이것들은 여성의 요구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여성이 처한 조건들은 정확히 어떤 과정과 범위로 개선되었나? 세계적으로 젠더 관계에서 어떤 변화가 야기되었으며, 이 변화들은 현재 어디에 서 있나? 헤게모니적인, 그러나 보편적이지는 않은 서구 모델은 20세기 중반까지 정부, 군대, 법조계, 학계, 언론계 등 공적 영역에서 남성의 지배를 수반했다. 대규모 산업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느끼게 되는 모욕감과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각 남성은 가정 영역이라는 사적인 봉토(封土)를 제공받았다. 가정 내에서 남성은 그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고, 테이블과 침대에서 그에게 봉사하는 아내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델은 광범위한 지리문화적 가족 구조와 생산 양식에 의해 전 세계에 확립되었으며, 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보이는 도덕성, 즉 쾌락·포식과 공존하면서 ‘좋은 여자/나쁜 여자’라는 구분을 계급·인종·카스트 불평등 속에 녹여냈다.
많은 데이터들은 1970년대 이래로 세계적으로 수억 명 이상의 여성이 임금노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70개 이상의 국가에서 3차 교육을 받는 여성의 수는 남성의 수보다 많다. 평균적인 출산율은 5명에서 2명으로 하락했다. 남성들은 자기 아버지보다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한다고 말하는 반면, 여성들은 자기 어머니보다 가사노동을 적게 한다. 여론조사를 한 결과 모든 대륙에서 젠더 평등을 선호하는 것이 다수 의견으로 나타났다. 정치영역에서 새로운 여성 지도자 집단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정부를 이끌고 있다. 만약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스트벨트 유권자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지금 백악관에는 그녀가 있었을 것이다. 주류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이러한 기초 위에서 전략 문제에 대응해왔다. 답은 지금과 같은 전략을 좀 더 많이 전개하는 것이다. 여성은 일과 교육 영역에서 중요한 진보를 달성했으나, 성폭력은 여전히 중요한 쟁점이다. 공식 페미니즘(official feminism)의 입버릇에 따르면 “도전할 대상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미 매우 훌륭한 결과를 낳은 프로그램들을, 열정과 재정을 갱신하여 계속 똑같이 진행해야 한다.
퍼즐의 두 번째 조각은 젠더 평등에서의 진전이 세계 대부분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치솟는 현실과 함께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축적의 가속화에 따른 상향이동은 계급 간 격차의 확대와 짝을 이뤘다. 전문직 계층 여성의 증가는 소수의 맞벌이 부유층 가구를 창출함으로써 계급 격차를 강조하는 효과를 냈다. 2008년 이후로 이러한 패턴에 대한 토론이 강화되었고, 주류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공모에 대해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 세 번째 문제는 앞의 문제와 관련되는데, 데이터들은 노동, 재생산, 문화, 정치의 모든 범주를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다루면서 그 범주 내에서 단지 여성의 개선을 측정할 뿐이다. 실제로는 이러한 영역 각각이 심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변화들은 젠더적 특성을 상당히 지니며, 모순적인 방식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생산 영역에서 ‘남성적인’ 러스트 벨트 제조업은 자동화되었거나 몰락했고 아웃소싱되었으며, 선 벨트의 특별경제구역에서 여성화되었다. 경제적 압력의 심화는 확대되는 서비스 부문에서 ‘극단적 여성성’(ultra-femininity), 즉 여성이 가정 내에서 전통적으로 수행한 역할의 경쟁력을 강화한다. 헤게모니적인 남성성은 더욱 지적이고 감성적인 것이 되는 한편, 국제 금융·가상세계·비공식경제의 폭력배화된 지대 등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과시적인 것이 되었다. 재생산의 영역은 낮은 출산율로 극적인 이행을 겪고 있다. 이는 출산과 성의 세계-역사적 단절, 그리고 역시 선례가 없는 여성 대중교육의 확산에 기초한다. 문화는 아이비리그의 ‘매력적인가 아닌가’(hot or not) 게임, 광고와 지인들의 메시지를 비롯해 도처에 존재하는 온라인 포르노물에 의한 성의 재현을 전제로 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변형되었다. 서구에서는 압도적인 이성애 규범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규범적인’ 게이 커플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캠퍼스와 보헤미안적 환경은 포스트-젠더적 공간과 정체성을 키워냈다. 정치, 즉 권력의 영역은 그와 동시에 개방되어 여성과 소수자의 유입이라는, 민주화의 세 번째 물결을 이뤘다. 또한 정치는 단일한 사회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균질화되었는데, 즉 불평등 내부에서 [젠더 간] 동등성이라는 패턴을 재생산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상호 연결된다. 경제적 압력은 젠더와 성적 관계를 악화시키며, 문화와 정치는 모순적 형태로 그것을 보상하려 한다. 이러한 조건을 고려하면 ‘동일한 전략을 더 많이 전개한다’는 계획은 충분하지 않다.
미투 운동을 둘러싼 토론은 페미니스트 전략에 대한 질문을 예각화했다. 목욕가운을 입은 호색한 영화 제작자에 대한 할리우드 클리셰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시대 이래로 익숙한 것이다. 이에 대한 폭로가 거대한 정치적 현상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요인들은 뒤에서 다룬다. 더 넓은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미투는 우리가 현재 시점을 비교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미국에서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에 관한 페미니즘 연구를 개척한 선구자 린 팔리는, 남성의 관점과 여성의 경험에 관한 분석을 통해 성적 괴롭힘의 두 가지 핵심 기능을 규정했다. 성적 괴롭힘이라는 용어는 인종적 괴롭힘(racial harassment)의 유비로서, 1974년 팔리가 직장 생활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코넬대학교에서 소집한 여성 그룹들이 만들어냈다. 남성 상급자에 의한 성적 괴롭힘은 전통적인 ‘여성 직업’(웨이트리스, 상점노동, 타이핑)에서는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다. 비전통적 부문(여성이 경찰, 도매업 관리자, 기술직 제도사 등으로 일하는 경우)에서 성적 괴롭힘은 여성이 이 부문에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행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이 1930~1940년대 출생한 미국 남성에 대한 것이었다면, 반세기가 지난 지금, 여성이 대부분의 직업에서 50%를 차지하고 민간부문 관리직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시대에 자라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까? ‘억압하기’와 ‘가로막기’ 간 균형은 변형되었나? 진전뿐만 아니라 퇴행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나? 괴롭힘은 여전히 직장 규율의 젠더화된 형태로 기능하는가, 아니면 그저 잔여물인가? 그 인종적 패턴은 모종의 변화를 겪지는 않았나?
이러한 질문은 단지 분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교차적인 불안전성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성적 괴롭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막아낼 것인가? 예를 들어 패스트푸드 부문에서 일하는 미국 여성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아프리카계, 라틴계의 1/3은 성적 괴롭힘이 그들의 일을 방해한다고 답한 반면, 백인여성은 1/4만이 그렇다고 말했다. 유색인 여성은 자신이 당한 괴롭힘을 보고하려고 할 경우에 징벌적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확실히 더 높았다. 특히 라틴계 여성은 흑인 여성에 비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괴롭힘을 조용히 참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들의 침묵은 남성의 지배뿐만 아니라 미등록 이주자를 지배하는 제도화된 불안 상태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경제적 압박과 불안정한 시민적 지위가 성적 억압과 결합되어, 신체의 완전성에 대한 권리(rights to bodily integrity)를 약화시키고 두려움을 강화한다. 비교적 관점 역시 국제적 차원에서 페미니스트 전략들을 대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국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직장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괴롭힘인데 반해,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사회운동은 가정폭력에 주목하며, 남부 유럽에서는 경제적·성적 불안전, 이주자의 불안전에 집중한다.
기성 페미니즘의 어떤 측면에 대한 도전이 이뤄져야 하고, 이러한 도전은 무엇에 근거를 두어야 하나? 새로운 페미니즘은 기성 페미니즘을 어느 정도 계승해야 하고, 어느 정도 단절해야 하는가? 이 글은 지금까지 운동을 지배해온 패러다임을 정의하고, 그것이 21세기 중반에도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자 한다. 검토는 국제적 관점으로 진행해야 한다. 단일 국가의 경험을 다른 국가의 사례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보지 않고서 전제로 놓고 연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페미니즘을 분석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 전반적으로 볼 때 글로벌 페미니즘(global feminism)이라는 헤게모니적 형태(가장 영향력이 있는 프로그램, 가장 전문적인 인프라, 가장 거대한 자원을 지닌 페미니즘 정치학)가 실천, 캠페인, 정책결정, 연구의 집합체로 남아 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국제적 차원에서 글로벌 페미니즘은 기준점을 설정하고 법인 기부자와 정부의 해외 지원 부서로부터 세계 곳곳의 여성 프로젝트로 기금 흐름을 조율하는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1995년의 베이징 행동 강령이라는 정교한 프로그램을 수립했고, 그 진행상황을 감시하는 일련의 과정을 정리했다. 현대 페미니즘 전략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이러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글로벌 페미니즘이 실로 헤게모니적 페미니즘이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페미니즘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것과의 관계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동시에 글로벌 페미니즘은 미국의 권력 하에서 번성했고, 실천적으로 미국의 모델과 전문지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글로벌 페미니즘과 미국의 모델을 이해하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를 위해 미국 주류 페미니즘의 특징, 프로그램의 전략적 논리, 미국의 통치 제도와의 접점을 고려해야 한다.
1. 세 가지 관점
1790년대, 1840년대, 1860년대, 1900년대 페미니즘 부상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후반~1970년대의 여성운동은 광범위한 투쟁의 물결 속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운동의 언어와 지평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페미니즘 운동이 부상한 각 시대들마다 지배적인 재생산 체제 특유의 분업, 젠더 역할, 행동규범 내의 갈등이 증가했고, 이는 축적체제 내부의 모순 강화와 중첩되었다. 1960년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전후 호황은 한계에 도달한 반면, 국제좌파의 봉기가 라틴 아메리카부터 인도차이나까지 남반구에서 타올라 ‘혁명 내부의 혁명’으로 공산주의 진영은 혼란에 휩쓸렸다. 미국에서도 민권 운동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젊은 여성들이 냉전의 가부장적 질서가 자신들에게 할당한 역할에 반기를 든 것은 이러한 반란적 분위기를 배경에 두고 있었다. 대학 교육에 대한 접근권은 그들의 미래와 그들의 남자 형제의 미래 사이의 격차를 넓힐 뿐이었다. 반면 새로운 피임 방법은 임신에 대한 공포 없이 성적 실험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노동시장의 확장은 여성에게 재정적, 사회적 독립성의 가능성을 열어주어, 더 이상 남성에게 물질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핵가족의 종말, 양육과 섹슈얼리티의 혁명적 변형의 기운이 감돌 때, 초창기 여성 해방의 폭발적 급진주의가 나타났다. 인간 발달의 역사는 풍부한 체계적 대안들을 제공했다.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들이 북아메리카 이로쿼이 연맹의 성-분리적인 일자형 공동주택과 민주적 집단주의 또는 파푸아뉴기니 트로브리안드 군도 사람들이 향유한 성 해방의 정도에 대해서 세부적으로는 사실과 다르게 생각했더라도, 이러한 사례들이 재생산 관계가 근본적으로 상이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증거라고 주장한 것은 타당했다. 즉 현대 자본주의적 핵가족의 규범을 이루고 있는 사적이고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인 젠더 분업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유연하고 평등주의적인 길도 가능한 것이다. 초기 해방주의 저널 《희롱은 이제 그만》(No more Fun and Games)의 편집자는 “우리 앞에는 철두철미한 사회혁명의 필요성과 과제가 놓여 있다”고 말했다.
컴바히강그룹(Combahee River Collective)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억압 받는 모든 인민의 해방은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정치경제 시스템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 혁명이나 반인종주의 혁명을 함께 수행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해방을 보증하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뿐 아니라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도 현존 구조의 전복을 요청했다. 컴바히강그룹 선언의 작성자 중 한 사람은 “모든 남성-여성 제도는 남성-여성 역할 체계에서 기인하며, 그 모든 것이 억압적이다”, “결혼과 가족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해의 기록들』(Notes from the Second Year)에 실린 케이트 밀렛의 에세이 「성의 정치학」(Sexual Politics)은 “가부장적 소유권적(proprietorial) 가족”의 종언을 촉구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에세이 「사랑」(Love)은, “문제를 창출한 제도의 파괴”와 “사랑이 동등한 자들 간의 감정적 부(富)의 교환으로서 자연적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혁명적으로 재건”하는 것을 논했다. 레드스타킹스선언(Redstockings Manifesto)은 “우리의 이해관계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가혹하게 착취를 당하는 여성의 이해관계와 같다”고 선언한다. 아나키즘적 페미니스트에게 “페미니즘은 여성의 기업 권력이나 여성 대통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기업 권력도 대통령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는 여성의 지위와 전후 질서의 위기에 관한 세 가지의 서로 구분되는 사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여성해방에 앞서 존재했던 가장 영향력이 있는 관점은 반(反)차별과 동등기회 모델로, 일과 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노동부 관료, 여성권 활동가, 노동조합 상근자 중 기성세대가 제안한 이러한 노선을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가 채택했다. 더 많은 여성을 노동시장에 진입시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였다. 존슨 대통령은 여성을 ‘거대한 미개척 자원’이라고 불렀다. 초창기에 이러한 캠페인은 동일임금에 집중했다.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되었다. 민권법 제7장은 일에 있어서 인종뿐만 아니라 성에 기초하여 차별을 가하는 것을 불법화했다. 평등고용기회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 EEOC)도 설립되었다. 이러한 틀이 그들의 주된 초점이 되었다.
여성해방주의자들이 현존 구조의 전복을 주장한 반면, 반차별 접근법은 여성을 구조로 유입시키고자 했다. 반차별 접근법의 전략은 법률만능주의였다. 젠더 관계에 대한 권위는 법원에 넘겨졌다. 직장에서 차별을 경험한 개인 누구나 지역의 평등고용기회위원회에 이를 고발하여, 평등고용기회위원회가 이를 조사하여 차별이 입증되면 고용주와 합의를 시도할 수 있었다. 합의에 실패하면 회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걸 수 있었다. 이 제도 속에서 궁극적 심판자는 미 연방대법원이다. 베티 프리단과 동료들이 평등고용기회위원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1966년 창립한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는 이러한 통합주의적 목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즉 ‘여성이 미국 사회의 주류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닉슨이 1970년대에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 measures)를 통해 반차별 기제를 보충할 때, 그 체계는 교육 분야로 확대되었고, 민권법 제9장(Title IX), 교육부의 민권국( Office for Civil Rights, OCR), 전미여성기구와 그 자매 조직들이 이를 지지했다.
세 번째 전략적 관점은 시카고 대학의 밀턴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집단화된 신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공식화했다. 몽펠르랭회에는 사회문제에 대해 매우 반동적인 관점을 지닌 회원들도 있었지만, 미국 지부는 자신들이 낡은 “장벽들”, 즉 노동조합과 관료적 형식주의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적, 성차별주의적, 동성애혐오적 편견과 적대감에 맞서, 진보의 편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이들은 이로써 자유시장이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하고자 했다. 프리드먼의 제자 중 스타 급인 게리 베커는 『차별의 경제학』(1957)에서 엄청난 양의 한계효용 방정식을 통해서 차별이 그 희생자뿐 아니라 차별을 행하는 자에게도 경제적으로 해를 끼치며, 비차별적 시장이 항상 가장 효율적이라고 증명했다. 베커는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지만, 이 틀이 성차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여성 고용이 경제적으로 이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과 전미여성기구 지도부는 두 가지 핵심적인 문제, 즉 일과 가족이라는 문제에서 수렴했다. 신자유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프리드먼이 설명했듯이 가족은 ‘기본적 사회 단위’이며 사회주의를 막아내는 방벽이다. 보육은 부모의 책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베커가 보기에 핵가족은 아이의 출산과 일상적 양육뿐만 아니라 일련의 ‘상품’(건강, 행복, 존경, 안전, 성적 향유)에 최적의 장소다. 이러한 상품들은 가계 내에서 ‘더 효과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
전미여성기구의 창립문은 여성이 결혼과 모성애를 직장 경력과 결합시킬 수 있도록 보육서비스를 제공하여 도와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반면 여성해방주의자들은 핵가족과 그것이 세대적으로 재주입하는 젠더 규범과의 근본적 단절을 상정했고, 실험적으로 재배열된 공동체와 높은 질의 사회서비스 제공으로 핵가족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전 혁명가들의 집단주의적 실험에 의지했다. 예를 들면 1848년 파리 여성의 공동체 부엌, 유연한 사회적 주택, 공동체 보육, 급진적 페다고지를 위한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설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시했던 비(非)소유적 관계 등이 있다.
전미여성기구와 신자유주의자들은 고용에 관해서 법률만능주의와 반차별 접근법을 선호했다. 여성해방주의자들은 점진주의적 개선을 거부하지 않았다. 《희롱은 이제 그만》의 편집자들은 “고통을 완화하는 ‘개량주의적’ 무언가를 비난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잔혹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개선이 변혁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이 노동력에 진입해야 하는 이론적 근거는 단지 고립되고 단조로운 가사노동과 성적 파트너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탈출하여 개인적 자율성을 얼마간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집단적 조직화를 위한 더 강력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동등기회 페미니스트에게 노동시장 참여는 그 자체로 목적이었다. 고용 사다리의 더 높은 위치는 특히 더 그랬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론적 근거는 효용극대화였다. 동등기회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그들은 동일임금의 입법화를 반대했다. 동일임금은 여성이 저임금으로 경쟁할 자유를 부정하며, 임금이 동일할 경우에 고용주는 여전히 남성을 고용할 것이라는 근거였다. 반대로 비차별적 기업은 더 저렴한 노동이라는 혜택을 누릴 것이다.
1960년대 말, 혁명적 물결이 빠져나가자 이러한 수렴은 더욱 두드러졌다. 연방 당국과 자선재단들은 반차별적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힘을 썼으며, 미국의 페미니즘은 제도를 통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전미여성기구는 보육 문제에 관해 세액 공제와 바우처 시스템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이는 단지 프리드먼이 제안한 것의 변형일 뿐이었다. 부모에게 자신의 보육 패키지를 구매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며, 닉슨 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가족을 우리 문명의 쐐기돌이라는, 그 정당한 위치에 놓는 것’이었다.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 행정부를 거치며 미국 경제가 통화주의적 긴축,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주주 권리 의제, 역외 제조업, 금융 탈규제, 서브프라임 부채 순서로 바뀌어가는 동안, 주류 페미니즘의 대응은 그 속에서 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예를 들어 더 많은 여성이 포브스 500 기업의 상층에 있게 되는 것이나 인사이동에 있어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뿐이었다.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 강경파는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 문제에 관해서는 반차별 페미니스트와 단절했다. 그들이 보기에 차별시정 조치는 정부 규제였고,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신자유주의, 즉 주주들의 의제를 실천하는 기업들은 여성과 소수자의 활발한 승진이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인적자원 부서나 홍보 부서가 보기에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는 추가비용 없이 기업 이미지에 진보적 광택을 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평등고용기회위원회가 요구하는 자기평가보고서는 소송에 대한 보호막이 되었다. 기업과 기관은 자발적으로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를 채택하기 시작했고, 레이건은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세계화와 함께 ‘다양성’은 자본주의적 자산이 되었다. 맥킨지와 같은 경영자문기관은 그런 기치를 받아들였고, 최고경영자들에게 여성을 이사회에 앉힐 것을 권유하며, 신자유주의의 슬로건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이것은 단지 젠더 평등에 바람직한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스마트 경제학이다.’
2. 반차별 모델의 기원
페미니즘 전략으로서 반차별이라는 틀에 관한 놀라운 점은 그 출발점이 여성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원래 반차별 모델은 신대륙에 고유한 인종-계급적 환경 속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종속적 위치에 대항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저항이 점증하자,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사회공학적 프로젝트로서 고안되었다. 주로 흑인 역사학자가 수행한, 풍부하고 상세한 비판적 연구는 민권 운동에 관한 ‘주인의 서사’를 상당히 해체했다. ‘주인의 서사’는 역사 기행, 박물관, 공식적인 의식, 교과서 속에서 경전화(canonized)되어, 미국의 민족적 자기인식에서 주춧돌로 여겨져 왔다. 충격적이거나 불온한 부분은 삭제한 설명에서, 인종주의는 남부의 잔여적인 문제로 묘사되고, 공정한 정신을 지닌 연방 당국과 인내심 많은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법률가들이 이를 교정하려 했다. 연방대법원의 현명한 판결이 여러 이정표를 세워, 교회 주도의 비폭력적 운동이 1964~65년의 민권법이라는 최고의 성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서사는 민권 운동의 재분배 요구(일자리, 주택)나, 북부의 게토들, 남부 흑인의 자기방어를 위한 촘촘한 지역 네트워크, 그리고 더 급진적인 정치적 전통(제3세계 연대, 자결권, 토지개혁 등)을 배제한다. 연방 행정부의 전략적 목적이나 국제적 맥락도 빼놓는다.
1940년대부터 연방 당국은 한편으로는 자유세계의 지도자라는 미국의 지위를 고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인과 남부의 표를 고려하며 민권 문제를 다루었다. 민권법상 평등고용기회위원회의 선구자이자 원형은 전시 공정고용실천위원회(Fair Employment Practices Committee)로, 미국이 대일본 전쟁을 위한 태세를 강화하던 1941년에 프랭클린 D. 로저벨트의 행정명령으로 설립되었다. 1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군대에서의 인종차별 폐지, 호황을 맞이한 방위산업 내 흑인 일자리를 요구하며 워싱턴으로 행진을 진행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일본 군대의 선전은 백인의 식민지배에 맞서 봉기하라는 범아시아주의적 정책을 중시했다.) 국무부는 냉전 시기 민권 개혁을 압박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했다. 정부 관리들은 린치 행위와 여타 인종차별적 잔혹행위에 관한 이미지가 소련과 여타 반식민주의적 언론의 1면 헤드라인에 실리는 것은 ‘국제 공산주의에 선물을 주는 셈’이라고 불평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1954년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을 위헌으로 결정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국제 공산주의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다면적 공격’이라고 불렀다. “국내에서 인간 평등은 자유의 무기다. 그것은 자유세계의 대의를 보장한다.” 1960년대 초반,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에서 백인 경찰이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흑인 초등학생들에게 소방호스로 물을 쏘는 장면이 전 세계 TV 화면에 방영된 후, 케네디는 인종분리 폐지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백악관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의 수준을 높이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그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이렇게 요약했다. “이 문제를 거리 대신 법원으로 가져가자.”
1964년 민권법에 의해 설치된 반차별 시스템은 단기적으로는 극적인 실패로 보였다. 할렘, 와츠, 뉴어크, 디트로이트 같은 북부 게토들에서 봉기가 발발했다. 공식적 평등과 차별에 대한 법률적 금지는 역사적 성과였지만, 계급, 빈곤, 실업, 열악한 학교와 주거라는 장벽, 그리고 이와 결합된 시스템적 인종주의와 경찰 폭력은 그대로 남았다.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소방서는 게토가 불타고 있을 때 수수방관했다. 디트로이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 탱크와 공격형 헬리콥터가 찍힌 TV 화면은 미국의 심장부에서 불타오르는 베트남을 연상시켰다. 필립 랜돌프와 마틴 루터 킹은 10억 달러의 자유 예산(Freedom Budget)을 요구했는데, 이는 게토를 위한 국내 마셜 플랜인 셈이었다. 1967년, 킹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데 나섰다.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은 더 멀리 나아가서, 세계의 반제국주의 투사들과 공동의 대의를 위해 제휴하겠다고 밝혔다. 하노이의 북베트남 당국은 이에 반응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을 ‘제2전선’이라고 불렀다.
닉슨의 양날의 검
1970년, 닉슨은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전쟁을 하는 와중에 야심찬 사회공학적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미국의 ‘흑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목표였다. 이 전략은 ‘통합’과 ‘강압’이라는 양날을 갖고 있었다. 닉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문직 계급의 확대를 목표로, 실업을 감축하고 ‘흑인 자본주의’를 고취하고자 했다. 그 외 나머지 흑인은 강력히 단속했다. 통합 프로젝트는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는데, 기업이 연방기금을 수령하는 대가로 소수자 채용을 하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수행 담당은 노동부로, 기존의 평등고용기회위원회의 반차별 시스템을 기반으로 했다. 연방정부 계약자의 소수자 고용책임의 개요는 린든 B. 존슨 행정부 하에서 고안되었지만, 이 프로그램을 탄탄하게 만들고 여성에게로 확대한 것은 닉슨 행정부다.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라는 용어는 1961년 어떤 젊은 보좌관이 처음 제안한 것인데, 그 당시에는 맥락이 상당히 달랐다. 당시에는 1962년 중간 선거 운동 과정에서 민권 문제에 대한 케네디의 고의적인 얼버무림을 감추는 완곡한 표현으로, 여전히 ‘긍정적’ 느낌을 담고 있었다.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는 연방정부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틀이지만, 닉슨 행정부는 페미니스트의 시위들이 언론 헤드라인을 타자 이를 신속하게 모든 피부색의 여성에게까지 확대했다. 1971년 12월 노동부는 1970년 2월의 원래 법령에 담긴 ‘흑인, 동양인, 아메리카 원주민, 스페인식 성(姓)을 지닌 미국인’이라는 범주에 여성을 포함했다. 노동부는 절차와 이데올로기적 준수를 강조했다. 즉 기업에 여성과 소수자를 고용하려는 선량한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합리적인 대상, 시간표, 고용목표치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을 뿐, 구체적인 결과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 1972년 닉슨은 민권법 제9장 개정안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연방정부의 자금을 받는 모든 교육활동에서 성차별을 불법화하는 것이었다. 노동부 평등고용기회위원회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부의 민권국(OCR)이 법률 준수를 위한 매뉴얼을 발간하고, 제9장의 집행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
한편 닉슨의 사회공학 프로젝트의 억압적 측면은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같이 사회적 ‘전쟁’이라는 수사적 형태를 취했고 무관용이라는 기치 하에 진행되었다. 이는 법무부, 법원, 이민귀화국(INS), 감옥 시스템, 경찰을 통해 작동하면서, 인종 기준으로 목표물을 정하는 대규모 단속과 투옥의 시행으로 이어졌다. 또한 전문직 계급에 진입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병리화를 동반했다. 즉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의 혜택을 취하지 못한 흑인은 자기 자신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흑인 문화를 탓해야 한다는 것이다. 젠더 관점에서 범죄화나 투옥 같은 닉슨 프로젝트의 강압적 측면은, 경찰이 빈곤하며 주변적인 여성, 특히 유색인 공동체에 속한 여성을 목표물로 삼음으로써 분명히 드러났다. 마약 사용자에게는 불임 프로그램이 강요되었고, 자녀가 있는 실업 여성에게는 구직이 의무로 강요되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범죄-사법 시스템의 보호 하에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폭력은 개별적인 범죄자 남성의 품행 문제라는 틀로 재구성되었다.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기보다는 더 엄중한 형벌 선고, 더 직접적인 경찰폭력으로 다룰 문제가 되었다. 이미 경찰의 인종차별적인 대응을 경계하고 있었던 공동체들에서는 여성이 폭력을 저지른 남성을 신고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의무적 체포를 규정한 법률과 강제추방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닉슨이 확대한 반차별 패러다임은 미국에서 대단한 헤게모니를 확보했고, 그 위세에는 미국 헌법 그 자체 말고는 견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인종적 측면에서 양날 정책의 영향은 극적이었다. 한 세대 만에 새로운 아프리카계 미국인 엘리트층이 굳건해졌고, 이들은 정치·기업·언론·교육 분야에서 너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200만 명 이상의 빈곤한 흑인(대부분 남성)은 감옥에서 괴로운 생활을 했다. 젠더 측면에서 반차별 페미니즘 모델의 특유한 기원, 즉 그 모델이 반역적인 소수자 집단을 무력화하기 위해 고안된 전략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은 미국의 여성 의제를 세계 모든 다른 곳의 여성 의제와 분리시켰다. 특히 미국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20세기 초반 부상했던 두 가지의 중요한 ‘국가 페미니즘’(state feminism)과 달랐다. 이러한 국가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Woman Question)에 대한 해답을 현대화한 것이었다.
국가 페미니즘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은 초기 제2인터내셔널의 대중정당 모델에서 부상한 사회민주주의 모델이었다. 이는 육아·음식 준비·주택·교육·보건의료 시설의 집단적 제공, 여성의 완전고용, 넉넉한 출산휴가 등을 통해 여성의 ‘사적인’ 가사노동 영역을 사회화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 전위적인 형태에서 이러한 전략은 이성애 규범적인 핵가족을 모두 폐지하고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지향했다. 이러한 모델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과 국가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실행된 프로그램에,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든 영향을 끼쳤다. 그 후에는 소련을 보고 발전의 아이디어를 얻는 제3세계 신생독립국과 정당들에 수정된 형태로 수출되었다. 여성해방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유럽에서 그러했다. 이러한 확대된 사회적 프로젝트와는 대조적으로, 반차별 모델을 수행하는 데 있어 국가의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소송인과 고용주가 법률 비용을 댈 뿐이다.
또 다른 ‘국가 페미니즘’은 “여성을 개선하고, 인종을 개선하라”는 우생학이었다. 이는 1900년대의 경쟁적인 제국주의적-현대화 프로젝트로부터 부상했고, 초기 출산통제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1950년대부터 미국 현대화 이론 덕분에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거대 제약회사와 록펠러 재단이 후원한 국제가족계획연맹(International Planned Parenthood Federation)이 협력했고, 미국 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가 자금으로 10억 달러를 댔다. 미국은 출산율 하락이 현대화의 결과라기보다는 현대화에 시동을 거는 수단이라고 아시아·라틴 아메리카 내 미국 동맹국들을 설득했다. 이러한 (네루의 용법을 따르면) ‘총력 추진’은 여성의 선택권을 주창하는 해방주의자들과 직접 대립했다. 대규모 불임 시술 캠페인 속에서 제3세계 여성의 몸은 값싸고 효율적으로 스위치를 꺼야 하는 아기 생산 기계로 여겨졌다. 여성들이 약간의 현금 보상을 대가로 비위생적인 조건에서 불임 시술을 받거나, 자궁벽을 뚫는 것으로 악명 높은 달콘 실드와 같은 ‘영구적인’ 자궁 내 장치(IUD)를 설치 받는 일이 빈번했다. (국제개발처는 달콘 실드를 1975년까지 대량으로 구매했다.)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의장 앨런 거트매처는 “일단 이 망할 것이 몸 안에 들어가면, 환자는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IUD의 장점이라고 밝혔다. 인구통제는 반차별 페미니즘의 보완물이었다. 하나는 여성을 번식하는 동물로 다루었고, 다른 하나는 피고용인으로 다루었다. 인구통제는 미국의 해외정책에서 중요한 전선으로 남았다.
3. 제도적 강화
반차별 접근법이 미국 페미니즘에 행사한 영향력은 가시적 결과를 낳았다. 1970년대에는 신용과 모기지 대출(1974), 군대(1975), 직장 임신(1978) 등 여성을 위한 동등기회 조치가 줄줄이 이어졌다. 연방대법원은 피임 합법화(1972), 임신중절 합법화(1973) 판결로 이에 동참했다. 이러한 승리는 자유주의적 지배층의 지원에 큰 빚을 졌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반차별 페미니즘의 제도화를 위해 자금을 제공한 기업 자선재단의 부와 전문성에 빚을 졌다. 조해너 브레너가 지적한 것처럼 이는 미국 페미니즘의 ‘첫 번째 물결’과 ‘두 번째 물결’ 간의 놀라운 차이 중 하나다. 1920년 투표권을 획득한 후 여성권 운동가는 정치적으로 주변화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70년대에 법률적·사회적 성과를 얻은 후 페미니스트의 요구는 ‘점점 더 제도화되고 문화적으로 통합되었으며’, 자주적 운동의 급진적 소요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강력한 ‘여성의 로비’에 의해 억제되었다. 두 번째 물결의 물질적 기반과 영향력은 (그에 조응해서 대학에서 인상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짝을 이루며) 미국 페미니즘의 첫 번째 물결과 구분될 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곳의 운동들과도 구별된다.
노동조합의 관료화 과정과 달리, 여성운동의 제도화는 자기 발생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제도화는 외부로부터 추동되었다. 민권법을 형성하고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에 자금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자선재단들이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 결과 반차별 접근법은 페미니스트 정책의 헤게모니적 형태로 정착했다. 그동안 여성 통합의 목표였던 ‘주류’는, 오랜 경제 하강에 대응하여 프리드먼식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재편되었다. 페미니즘의 후원자 중에 최고봉은 포드 재단이었다. 포드 재단은 사회개혁에 연간 2억 달러를 지출했고, 유망한 수령자를 찾기 위해 전국을 뒤지는 400개 팀을 운영했다. 이미 1960년대에 포드는 급진적인 흑인·라틴계 조직에 수백만 달러를 퍼부었다. 재단 회장 맥조지 번디가 의회에서 설명한 것에 따르면, 이는 재단의 지원이 책임감이 있고 건설적인 프로젝트를 위한 청년 조직을 격려하고, 사회를 붕괴와 불화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번디는 다른 곳에서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자.” 이는 급진적 에너지를 반차별 틀 내에 있는 법률적 프로젝트로 돌려 놓는 것을 의미했다.
번디의 커리어는 자선재단의 정치학에서 하나의 제유(提喩)였다. 자선재단이 추진하는 자선 사업은 모회사에게 주어지는 수십억 달러의 조세 면제에 대한 보상이었다. 보스턴 출신 상류층 애국주의자인 그는, 포드로 이직하기 전에 존슨 행정부에서 매파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미국이 베트남과의 갈등 수위를 높이고 해병대를 도미니카 공화국에 파견하는 것을 지원했다. 번디는 인도차이나를 폭격하는 것과 미국 국내에서 사회개혁을 위한 기금을 지원하는 것 사이에서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했다. 둘 다 미국에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국도시연맹(National Urban League)에 말했듯이, 인종 차별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재정, 정치, 개인적 노력의 수준’은 ‘베트남에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과 완전히 견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포드 재단의 모집 방법은 매우 전문적이었는데, 이는 예수회가 시도했던 방법의 현대판이었다. 포드 재단의 관리자들은 그럴듯한 운동 후보자를 선택하여 가다듬고, 보조금을 신청하라고 초청하고, 일자리·봉급·계약·고위급 지식인의 지원과 같은 문제를 제시한다. 초기 프로젝트가 측정할 수 있는 항목에 따라 성공을 거두면 더 많은 금액을 지출한다.
1970년대 초반 이후로, 포드 재단의 자금이 포드의 의제와 일치하는 페미니스트 반차별 위원회들에 쏟아졌다. 포드의 물질적 지원은 반차별 위원회들에 충분한 자원과 제도적 기반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페미니스트 대표들은 상점 앞의 여성센터, 등사판 소식지, 서점, 탁아방, 폭력을 당한 여성을 위한 쉼터에서, 에어컨이 나오는 워싱턴 DC나 맨해튼의 고층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최고의 대학들의 연구센터들이 이를 지원했다.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주류 페미니스트 조직들로 구성된 집단이 워싱턴 DC에 사무실을 개설했고, 전일제 로비스트들로 스태프를 구성했다.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낳은]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 로비스트들은 운동의 머리와 손이 되었다. 벨트웨이 집단은 정부 관리들에게 로비를 진행하고, 자신들의 멤버를 연방 자문위원회에 집어넣고, 입법자들에게 그들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전미여성기구와 그 지역 지부는 활동가를 반차별 캠페인으로 이동시키는 전달벨트 역할을 했고, 여성운동이 정치적 기득권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다시 설정했다. 헌법에 [성평등] 동등권리 수정안을 포함시키자는 투쟁은 무익했지만 (이 투쟁은 엄밀히 말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 여성의 권리는 수정헌법 제14조에 의해 이미 공식적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이었다.) 전미여성기구는 이 투쟁을 통해 현금과 정치적 인맥을 넘치게 얻었다. 1990년대에 주류 미국 페미니즘에 대한 재단 기금은 연간 6,000만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고, 이들은 자신들보다 급진적인 입장에 비해 훨씬 거대한 이득을 국내외에서 누렸다.
기부자들은 자연스럽게 대가를 요구했다. 후원금을 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집단은 적극적 차별시정조치(개별 여성에 대한 지원, 특히 젊은 여성, 유색인, 빈곤 여성, 또는 빈곤국 출신의 여성이 시스템 내에서 성공을 거두도록)나 사법 제도를 통한 활동(경찰, 법원, 이민국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하도록 조종되었다. 재단 기금과 국가의 지원은 운동 조직의 내부 문화를 재조정했다. 더 광범위한 전략적 토론, 더 급진적인 캠페인과 대중교육 프로그램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비영리단체 지위를 신청하고, 직무해설서를 작성하고, 보험에 가입하고, 준기업적 구조를 채택하는 것과 같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관료적 절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준기업적 구조는 집행국장, 이사회, 전문적 회계사, 홍보, 기금모금자로 구성된다.) 한때의 투사는 봉급을 받는 관리로 바뀌었다. 생계를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보수주의와 자기검열의 강화로 나아갔다. 재단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호했는데, 이는 페미니스트의 실천이 더 깊이 분할되도록 촉진했다. 캠페인 그룹들은 자신들만의 ‘조직적 틈새’, 즉 판매에 유리한 특징을 지니도록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기부자들이 제시한 기금 신청 절차는 초기 여성운동이 목표했던 것처럼 상이한 여성의 공동체들이 한데 모이는 대신, 기금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절차는 훗날 이른바 ‘NGO화’(NGOization)라는 이름 하에서 세계 곳곳에서 친숙해졌다.
학력 증명서
여성 해방의 급진적인 정신은 대학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대학에서 제도화는 다른 경로를 거쳤다. 1960년대 중반부터 여성사 수업이 미국 전역에서 자발적으로 분출했는데, 이는 민권 운동의 흑인사(Black History)와 미시시피 여름학교의 급진적 페다고지의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 1971년 페미니스트출판사(Feminist Press)가 그러한 수업 600개의 목록을 정리했는데, 그 대부분은 여전히 주변적이거나 공식인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도 자선재단의 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흑인학 작업에서 얻은 교훈을 활용하여, 포드 재단은 여성학 영역의 체계적인 전문화를 목표로 수백만 달러어치의 개입을 행했다. 박사 후 과정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금, 최고 대학(스탠포드, 버클리, 웰즐리, 브라운, 듀크, 아리조나)의 여성연구센터에 대한 기금 등이 그 예다. 1975년 포드 재단은 학제간 페미니스트 저널 《징후들》(Signs)의 발간을 조직했고, 1977년 전국여성학협회(National Women’s Studies Association)와 전국여성연구센터(National Centre for Research on Women)의 창립을 지원했다. 포드 재단의 메리엄 챔벌린이 이를 주도했다. 1980년대에 재단은 학부의 핵심 커리큘럼 요소로서 페미니즘의 ‘주류화’(mainstreaming)로 전략을 전환했다. 1990년대 초반, 그 우선순위는 소수자 여성에 대한 통합연구였다. 재단은 일련의 컨퍼런스를 주도하여, 교차성 이론(intersectional theory)의 개시를 위한 조건을 준비했다. 컨설턴트의 보고서는 젠더 연구 영역에 대한 포드의 프로젝트가 ‘그것이 취해야 할 방향으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정확하게 적었다.
제도화의 두 번째 형태이자 대학 기반에 더욱 특화된 형태는 연방 민권법 제9장이라는 우산 하에서 작동하는, ‘동등성, 다양성, 포용’을 위한 학생 지원 조직이었다. 이들은 풍부한 자금 지원을 받고 성장했다. 학생 지원 조직은 리더십, 재원, 법적 전문성, 캠페인 경험(피케팅, 포스터, 티셔츠)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 학생들의 전투성이 낮은 시기 동안 반차별 정치학을 유지시켰다. 이처럼 동료 학생들이 운영하는 작은 관료제는 젠더 연구에 대한 핵심 커리큘럼 요건과 함께, 새로운 학생 집단이 동등기회 젠더 정치의 틀로 유입되도록 보장했다. 동등기회 젠더 정치학은 ‘수돗물 안의 불소’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급진주의적 비공식 커리큘럼도 반차별 모델의 한계 내에서 작동했고, 그러한 모델의 재생산에 기여했다.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행정가들(민권법 제9장 감독을 위한 직원, ‘동등성과 포용’의 관리, 캠퍼스 안전 자문가)은 젠더 정치학에 간부를 제공했다. 때때로 이는 강단 페미니스트들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동시에 페미니즘적 사고는 미국 학계의 관습 내부에서 심오한 문화적 변용을 경험했다. 여성해방의 담대한 주장과 통합 지향적인 야망은 학제적 차별화와 커리어를 지향하는 논문 주제 선택으로 대체되었다. 학력 증명서는 사회운동의 평등주의에는 낯선 것이었던 위계를 구성했다. ‘정책 과목’(경제학, 사회과학, 정치과학)은 인상적인 페미니스트 전문가들을 양성해냈다. 이러한 과목들의 연구는 신고전파 또는 기능주의, 정량분석 또는 정성분석이라는 전통 안에서 구획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인문학, 특히 문학부에서 교육 받은 새로운 세대 젠더 활동가들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은 푸코였다. 이러한 한계의 틀 안에서만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사고가 장려되었고 자금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1990년 무렵 버클리와 UCLA(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는 헤게모니적인 반차별 모델에 대한 두 가지의 중요한 이론적 도전을 행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주류 페미니즘이 가정하는 ‘남성’, ‘여성’이라는 이항의 범주에 열정적인 공격을 단행했으며, 여성의 입장을 대표하여 요구하는 주류 페미니즘의 실천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한 실천은 ‘남성’과 ‘여성’을 생산하는 데 책임이 있는 권력-지식 체제를 확대할 뿐이다. 새로운 페미니스트 정치학은 젠더와 정체성의 물상화(reification)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들의 가변적인 구조를 방법론적 전제조건이자 정치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몇 개월 전, 킴벌리 크렌쇼는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의 관점에서 반차별 법을 공격했다. 그녀는 반차별 법의 단일축(single-axis) 접근법을 문제로 삼았다. 이는 인종과 젠더를 경험의 상호 배제적인 범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요구의 기초로서 그 틀 전체가 다시 사고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집단적인 정치적 행동은 주변화된 사람들을 중심에 두어야 하며, 가장 불우한 사람들의 요구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나머지 이들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눈 여겨 봐야 할 지점은, 이처럼 아낌없는 자금 지원의 결과로 거대해진 미국 페미니즘의 생산물의 규모다. 미국 여성학은 가장 뛰어난 수준의 저작들을 포함한, 엄청난 규모의 학문이다. (여성학 참고문헌 목록은 거의 4,000개 저작의 제목을 언급한다.) 벨트웨이 페미니즘이 구성한 정치적·법률적 전문성(로비, 법률 초안 작성, 기금 모금, 우아한 홍보 또는 신중하게 조정된 제안과 같은 기술의 통달. 의회 절차 또는 사법 절차에 대한 최첨단의 기술, 강한 권력을 지닌 접촉선 명단의 축적)을 세계의 나머지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미국 대학 시스템 내 페미니스트들은 전 세계에 경쟁자가 없을 정도의 연구 인프라를 구축했다. 헌신적인 기관과 센터, 전국 또는 국제 규모의 세미나와 컨퍼런스 개최, 대규모의 경험적 조사의 수행, 정교한 이론적 설명, 비교연구와 기술적 보고서, 거의 48개에 달하는 전문적인 저널의 지원. 미국 외의 다른 어떤 국가도 페미니즘 학문에 3,600만 달러를 지원하지 못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는 540여 개의 젠더와 여성학 연구 과정이 있는데, 캐나다에는 44개, 영국에는 35개가 있으며, 그 외 다른 국가들은 20개를 넘지 않는다. 페미니즘 학문 저널에도 이와 유사한 비율이 나타난다. 미국 43개, 영국 8개, 프랑스와 호주 5개, 캐나다 4개이며 다른 나라들은 이보다도 적다. 이 분야에서 최고의 출판물은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징후들》은 여전히 운동의 지적 중심이며, 《페미니스트 연구》(Feminist Studies), 《젠더와 사회》(Gender & Society), 《페미니스트 경제학》(Feminist Economics), 《히파티아》(Hypatia), 《여성역사 저널》(Journal of Women’s History)이 그 옆에 서 있다. 《국제 페미니스트 정치학 저널》(International Feminist Journal of Politics)은 광범위한 편집팀을 지녔지만, 미국에 기반을 둔 국제연구연합(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으로부터 출현했다.
미국에 가장 근접한 경쟁자는 다른 영어권 국가들이다. 호주는 강력한 동등기회 틀을 지녔지만, 대학 시스템은 훨씬 더 제한적이다. 캐나다에는 사회이론과 연구에 강한, 페미니즘적 지식 생산을 위한 몇 개의 센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작은 주(위스콘신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같은)에 있는 센터의 숫자와 비슷할 뿐이다. 영국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획기적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저작들이 신좌파 문화로부터 나왔는데, 대부분 학계 외부에 있었다. 그 후, 페미니즘 문화 연구와 발전 경제학 분야에서 영국의 전문성이 향상되었지만, 영국 페미니즘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1980년대 독일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여성부가 각 주 차원에서 설립되었지만, 대학 시스템은 페미니즘의 침투를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1990년까지만 해도 교수의 단지 5%만이 여성이었고, 여성학 연구는 대부분 지역과 성인교육 센터에 국한되어 있었다. 좌파, 모성주의(maternalist), 에코페미니즘 이론은 주변부에서 번창했다. (뱅센 지역은 예외로 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2000년까지도 대학과 정부기구 양자 모두 페미니즘 연구와 정책을 대체로 수용하지 않았다. 중동,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에서 젠더 연구는 대개 미국 재단의 자금을 지원 받았다. 요약하면 주류 미국 페미니즘은 부, 제도적 영향력, 학문적 성과의 결합을 향유했고, 다른 어떤 나라의 여성운동도 이와 비교할 수 없다.
게릴라 법률만능주의
초기 여성해방 운동의 에너지가 주로 미국 의회에 의해 길들여지거나 학계 내에서 변형되는 동안, 국가와의 관계를 지렛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한 갈래도 존재했다. 반차별 법들은 젠더 관계의 옳고 그름을 다룰 수 있게 설계된 적이 없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변호사들은 그 법들이 제대로 작동하게 해야 할 과업에 직면했다. 이는 법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끊임없는 소송행동주의를 동반했다. ‘성에 기반을 둔 차별’의 범위를 성적 괴롭힘과 출산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재단의 기금을 받는 변호사들은 차별의 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개별적인 시범 사례를 두고 한 번에 한 판결씩 소송을 치렀다. 그 양대 영역은 고용과 교육이었다.
1970년대 이후로, 법정 판결, 행정부의 개입, 평등고용기회위원회와 민권국의 새로운 규제, 대법원 결정, 의회의 개입은 성차별과 성적 괴롭힘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재해석했고, 고용주와 대학의 책임을 확장했으며, 그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피해를 확대했다. 그 결과로 법률 영역은 영구적인 소요의 상태가 되었다. 미국과 달리, 명시적으로 작성된 법률조항이 해석의 여지를 별로 남기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페미니스트의 행동주의가 법 영역 밖의 형태를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 젊은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소송 주도 활동은 성 관련 법률을 흥미진진하고 번창하는 분야로 만들었다. “성적 괴롭힘의 정의를 확대할 의사가 있을 수 있는 법원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재적 불안정성은 더욱 전투적인 의제의 진전을 위한 급진 페미니즘 법학의 한 조류에 길을 열어주었다. 캐서린 맥키넌은 이를 거의 완전히 공식화했다. 그녀는 페미니즘에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한 ‘서사 이론’(epic theory)을 만들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서사 이론은 사회의 운동법칙들을 총체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여성을 ‘독자적인 집단’으로 만든다. 그녀는 ‘노동’(work)을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 범주로 규정하고, 페미니즘에서의 그 등가물을 ‘섹슈얼리티’로 상정했다. 섹슈얼리티는 젠더의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지고, 조직되고, 표현되고, 지시되는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섹슈얼리티는 성적인 흥분, 상호 즐거움, 또는 성관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섹슈얼리티의 동역학은 위계적이며, 사회적 권력의 체계적 분할을 동반하며, 여성에게 손해를 입힌다. 여기에서 지배와 복종의 성애화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 창출된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 용도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하도록 교육받는다. 맥키넌은 섹슈얼리티가 문화인류학적 실천이며, 그러한 실천은 젠더 불평등이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관점을 단호히 거부했다. 사회화 과정에 의해 억압된 선천적인 충동이라는 프로이트적 모델도 단호히 거부했다. (프로이트적 모델에서는 그러한 충동을 더 크게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맥키넌에 따르면 “섹슈얼리티가 곧 젠더 불평등이다. 한 인격을 사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한 남성의 흥분이 섹슈얼리티의 추동력이다.” 그 증거는 여성이 살아온 경험에 대한 페미니즘적 의식고양을 통해 밝힐 수 있는데, ‘강간, 근친상간, 구타, 성적 괴롭힘, 임신중절, 성매매, 포르노그라피’가 그러한 경험의 전형이다.
이러한 구성의 논리적인 정치적 귀결은 페미니즘적 분리주의와 정치적 레즈비언주의,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완전성을 지니는 소수자 전통이다. 맥키넌은 미국의 반차별 법에서 ‘벽의 균열’을 보았다. 바로 성폭행 이슈를 둘러싼, 특유한 법학적 기회다. 그 목적은 법률이 여성의 지위라는 현실과 대면케 하는 것이었다. 즉 현실은 “성에 기반을 둔 궁핍, 강제되는 의존, 경멸당하고 기아 수준에 처하게 하는 노동으로의 영구적인 격하”인데, 이는 만연한 강간, 체계적인 구타, 성매매와 결합된다. 이러한 ‘여성의 근본적 조건’ 중에서 포르노 산업은 중요한 한 축이다. 자유주의 국가는 ‘남성’이었다. 자유주의 국가는 남성이 여성을 다루듯이 여성을 다루었고, 남성의 관점을 사회의 법률로 강요했다. 미국 헌법의 소극적 자유는 남성의 자유가 현상 유지되도록 보장했다. 평등은 새로운 법학을 필요로 하며, 여성의 관점을 구현해야 한다. 새로운 법학은 ‘특수한 법정 답변서’이며 ‘중립적이지 않다’고 공격을 받을 것이지만, 현존 법률이야말로 특수하고 중립적이지 않은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성폭행 소송에서 증명 책임을 여성에게 우호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남성의 의도에 대한 변호나 여성의 분명한 동의 여부를 배제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는 성차별적 법 아래서 포르노그라피의 금지와 성매매의 범죄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그때나 그 후에나 다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1980년대 미국 여성을 굶어죽을 수준의 임금을 받는 성 노예로 묘사하는 맥키넌의 발언은 설득력이 없었다. ‘인격을 사물로 환원하는 데 대한 남성의 흥분’이라는 성 개념은 문화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빈약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맥키넌의 출발점, 즉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의 노동, 페미니즘에 있어서의 성”이라는 관점은 이중의 오류를 동반했다. 마르크스에게 결정적인 실천은 ‘노동’이 아니라 일상적 생계에 필요한 것(음식, 연료, 옷, 쉼터)을 생산하는 [생산]양식이고, 그 중에서 노동은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이나 기술·자본·언어의 축적도 결정적인 요인이다. 젠더의 등가물은(우리가 그 등가물을 찾고자 한다면) 인간 재생산의 조직일 것인데, 그 조직 중에서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결정적인 측면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임신, 출산, 보육, 아이의 사회화, 젠더화된 자아의 형성도 결정적인 측면이다. 재생산 조직의 시간성(temporalities)과 분업은 생산의 시간성과 분업과 접합된다. 이러한 개념화는 남성-여성 관계에 대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관점, 즉 성폭력이라는 일차적 억압에 의해 양극화된 영역이라는 관점에 반대하며, 협상을 통한 협력과 합동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복수의 적대들을 인식하여, 그 적대들 중에서 젠더가 일차적 분할이 아니라 이차적 분할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여성들 간의 구조적이면서도 인격적인 억압적 관계도 다룰 수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간 억압적 관계에 관해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사회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은 단일한 틀 내부에서 긍정과 부정, 창조와 파괴 양자를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페미니즘에 ‘서사 이론’이 필요하다면, 이와 동일한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즉 위험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포함해야 한다. 타자성의 위험한 매력, 사랑의 다면적인 문제를 말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 법학의 정치적 전개 과정은 대중 사회에서 성 문제를 다루는 미국적 방식의 흥미로운 지점을 비춘다. 한편에는 시장이 있고, 훨씬 더 비중이 적긴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이데올로기화된 규제가 있다. 더 효과적인 홍보 능력을 지닌 안드레아 드워킨과 함께 맥키넌이 진행한 첫 번째 대규모 프로젝트는 국가 수준에서 반(反)포르노그라피 법령을 밀어붙이는 것이었는데, 1986년 연방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캐나다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좀 더 성공을 거두었다. 출판 금지된 첫 대상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성애 잡지 《나쁜 태도》(Bad Attitude)였다. 포르노 산업은 온라인에서 번창했다. 포르노의 구체화된 표현은 이제 과거의 선반 맨 위 잡지나 저속한 ‘성인’ 상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관객에 도달하고 있으며, 10대 초반 청소년들에게 성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포르노그라피는 미국 경제의 나머지를 형성했던 것과 동일한 힘에 종속되어 있다. 즉 세계화, 아웃소싱, 가격 하락, 틈새 마케팅, 개별주문화(personalization), 여성화(feminization) 등이다. 포르노는 여전히 대개 남성을 관객으로 하는 오락이지만, 점점 더 많은 성애물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공급 측면에서 보면, 포르노는 염가 산업으로 남아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샌퍼낸도 밸리는 저작권 침해와 대금 지불 온라인 채팅방(웹캠을 통해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이런 채팅방을 성노동의 상대적으로 안전한 형태로 묘사한다)과의 경쟁으로 위기에 처한 할리우드의 일부다.
급진주의 페미니즘 법학은 문화 전선에서 패배한 후,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더 굳건한 틈새를 확보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민권법 제9장이 정의하는 성적 괴롭힘과 성폭행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소송 행동주의, 점증하는 법원 판결, 행정부의 개입이 결합하여 고소인의 입증 책임은 경감되고 대학의 책임은 증가되었다. 맥키넌이나 앤 시몬 같은 법률 활동가는 제9장 감독 기구를 여성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필요성을 주장했다. 1990년대, 캠퍼스 반(反)강간 캠페인은 이런 법률 활동가의 지지자 또는 성적 강압에 의해 급진화된 여성이 지도했다. 그런 여성 중 일부는 케이티 코에스트너와 같이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녀는 1991년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데이트 강간 캠페인 활동가였다. 다른 페미니즘 경향들(포스트구조주의, 교차성, 퀴어, 녹색, 대안세계화 페미니즘)은 다른 이슈를 발전시키면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본질주의(essentialism)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들에서도 전복적이고 도구주의적인 법률 프로젝트는 어떠한 재분배적 정치경제적 프로그램과도 결합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 역시 미국의 주류적인 패러다임에 충실했다.(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