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노태우정부 전반기, NL·PD 논쟁의 태동

남북한의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역사와 평가②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1955년에 창설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가입국은 소련을 비롯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총 8개국이었다. 각국에서 공산당 정부가 해체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산하는 과정을 보면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알바니아는 이미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의 군사개입에 항의하며 탈퇴했다.)

 

이번 글에서 다루는 1988~1992년 노태우 정부 시기는 그야말로 세계정세의 ‘격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환기였다.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출발점으로 하여 1989~1990년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전환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했다. 1991년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국제연합(UN)에 가입하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되기에 이른다.

 

또 한편으로 1988~1989년 학생운동을 주축으로 통일운동이 강력히 전개되며,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씨가 전격적으로 평양에 방문했다. 그에 따라 민중운동 내에서 통일 논의가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로 부상했다. 이 시기는 민중민주주의 변혁론(PD론)이 정립되고, NL-PD 구도가 형성된 시기이므로 논쟁도 폭발했다.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검토는 물론, 통일을 위한 합작 파트너인 북한 체제에 대한 인식이나, 통일운동이 한국 민중운동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지위 문제까지, 통일과 관련성이 있는 모든 주제가 논쟁의 쟁점으로 올라왔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객관적인 정세 측면에서도, 민중운동의 주체적 변화 측면에서도 다뤄야 할 소재가 매우 많다. 따라서 이번 글은 두 번에 나누어 게재한다. 이번 호는 1988~1989년을 다루고, 다음 호에서 1989년 이후를 서술하도록 하겠다.

 

1. 노태우 정부의 등장과 북방정책의 본격화: 1988~1989년

 

남한은 1984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2,000달러를 상회하고 1986~1988년 3저호황을 맞아 연평균 12.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987년부터는 ‘후진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실시하는 국가가 되었다. 또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북한은 1978~1984년 2차 7개년계획 후 2년간의 조정기를 거쳤고, 1987년부터 시작되는 3차 7개년계획에서는 몇 개 분야를 제외하고는 이전 계획보다 목표를 하향 조정해야 했다. 즉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확연히 가시화된다.

 

한편 소련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등장 이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평화공존’ 정책을 천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6년 7월 28일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이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긴장 완화를 위해서 유럽안보회의와 유사한 전아시아안보회의(All Asian Forum)를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북한이 제안한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을 지지하였고, 남북 간 진지한 대화를 촉구했다. 이러한 원칙은 1988년의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에서도 확인된다. 1988년 선언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핵무기 동결과 해·공군력의 감축을 포함한 7개 항의 평화 제안 외에도 극동 경제특구(합작기업 특별지구) 창설 구상을 제기했다. 즉 소련의 한반도 전략 역시 경제적 목적을 중심으로 삼아 다분히 실용주의적 자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노태우 대통령 집권기, 한소수교가 이뤄지고 한반도 냉전에 실제적 변화가 발생한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중국과의 수교를 통한 서해안 개발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일본 인구의 10배가 넘는 중국과 수교를 통해 한국의 발전 축이 서울-대전-대구-부산 축에서 서울-인천-군산-광주-목포 축으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선 시기 득표를 염두에 둔 공약인 것도 분명하지만, 당선된 후 노태우 정부는 실제로 북방정책을 공격적으로 추구했다.

 

1)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7·7선언)

 

노태우 정부 시기의 외교정책을 ‘북방정책’이라고도 부르는데, 북방정책이란 용어를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전두환 정부 당시 외무장관이던 이범석 씨다. 1983년 6월, 6·23선언 10주기를 맞아 그 개념을 사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6·23 평화통일선언은 북한과의 UN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고 공산권 국가를 포함한 모든 국가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범석 장관이 말한 북방정책의 핵심목표는 중국, 소련과의 관계정상화였다. 북방정책이란 용어는 1971년 미 국무부 한국과장이던 모튼 아브라모위츠가 “대한민국은 북방정책(Nordpolitik)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며 처음 사용했다. 노태우 대통령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북방정책이란 북한의 우방인 중국, 소련과 관계정상화를 이룸으로써 북한의 문을 두드리는 ‘간접·우회전략’이었다. 이는 노 대통령 취임 초부터 강조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민족자존의 새 시대’가 개막했고, 전방위적 외교정책인 북방정책을 전개함으로써 통일로 가는 길을 열겠다고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나, 5월 30일 국회개원식 연설에서도 이와 같은 국정지표를 거듭 부연했다. (1988년 4월에 총선이 치러져 그 유명한 ‘여소야대’ 국회가 개원했다.) 이어서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했다. 7·7선언은 민족공동체의 가치로 자주, 평화, 민주, 복지를 주창하며 6개 항의 정책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체육인, 학자 및 학생 등 남북 동포 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 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둘째,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 간에 생사, 주소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 주선 지원한다.

 

셋째,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 교역으로 간주한다,

 

넷째,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다섯째,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 대결 외교를 종결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으로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여섯째,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또한 우리는 소련,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한다.

 

노 정부는 7.7선언 이후 후속 조치를 단행했다. 대내 조치로는 첫째, 전향적인 외교시책 선언과 해외동포들의 남북한 자유 왕래를 위한 조치, 둘째, 대북 비난 방송 중지, 셋째, 납북·월북 작가의 해방 전 문학작품 출판 허용, 넷째, 남북 이산가족 신청 접수, 다섯째, 북한 및 공산권 자료 공개, 여섯째, 대북한 경제개방 조치, 일곱째, 남북·월북 작가의 음악·미술 작품 규제 해제, 여덟째, 각급 학교 교과서의 북한 관련 내용 개편, 아홉째, 남북 교류 협력을 위한 제도 및 장치의 구비가 담겨 있었다. 또한 대북제의로는 첫째, 남북적십자실무회담 및 본회담 제의, 둘째, 남북교육당국회담 제의, 셋째, 남북정상회담 제의였다.

 

또한 1988년 9~10월 중 개최된 서울올림픽이 끝난 시점인 1988년 10월 19일, 노태우 대통령은 UN 총회 연설에서 ‘동북아 평화협의회’ 창설을 제안했다. 이때 노태우 대통령의 UN 총회 연설은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사례였다. 게다가 한국의 UN 가입 이전의 일이었다.

 

노 대통령은 “동북아 평화협의회는 남한, 북한, 미국, 소련, 일본, 중국이 참여하며, 군사적 신뢰 구축과 안보 증진, 번영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는 그 직전인 1988년 9월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 ‘협상기구’를 제안한 데에 호응하는 성격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또한 이 연설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실현과 주변 4강에 의한 남북한 교차 승인을 제안했다. 이는 그만큼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 추진에 적극적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했다.

 

2) 한국-헝가리 수교: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의 첫 번째 성공사례

 

북방정책 최초의 수교 대상으로는 헝가리가 선택되어 ‘푸른 다뉴브 강’이라는 암호로 추진되었다. 헝가리는 동구권 국가이지만 미국과도 비교적 가깝다는 특징이 있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박철언 씨가 7월 헝가리로 출장을 가는 것으로 시작해, 아주 이른 시간 내인 1989년 1월 공식수교가 이뤄지고, 1989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헝가리를 국빈 방문했다.

 

한국-헝가리 사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972년 박정희 정부 시기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시점만 해도, 헝가리 사회주의노동당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헝가리-남한 관계의 향후 발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적이고 타당한 이해관계에 주목해서 친선 국가들과 의견을 조율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 발전에 종속되게 할 것. 그때까지는 관계설립을 갈음하는 남한의 시도에 대해 비껴갈 것.” 즉 북한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며, 남북관계가 개선되기 전까지 남한과의 관계 수립을 유보한다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1983년 6월에 개최된 정치위원회에서는 남한과의 경제, 스포츠 관계를 허용한다. 실제로 1983년 헝가리 기업(Transelektro)이 리비아 발전소 사업에서 한국기업(대우)과 합작을 원했고, 헝가리 외무성은 이를 승인한다. 또한 1984년에는 헝가리 인사들이 자국 제품의 수출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 후에도 이러저러한 경제교류를 거치며, 1986년 말에는 양국 간 대한무역진흥공사, 헝가리상공회의소 사무소 설치가 논의된다. 그 결과 1987년 12월 부다페스트에 대한무역진흥공사 사무소가 설립되고, 1988년 3월 서울에 헝가리 상공회의소가 설립된다.

 

1988년 5월,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이 31년 만에 특별당대회를 개최한다. 이때 32년간 집권한 야노스 서기장이 퇴진하고 그로스 신임 서기장이 집권한다. 그는 실용주의 외교를 표방했는데, 곧 “헝가리의 국제무대에서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국제 분업에 대한 참여를 대폭 확대한다”는 결의를 끌어냈다.

 

그로스 서기장은 유럽 각국과 쌍무관계뿐 아니라 유럽연합(EC),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한 다자관계도 발전시키며,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홍콩과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정책을 밝혔다.

 

한편 한국과 헝가리의 전면적인 외교관계 수립 과정에는 한국의 대헝가리 차관 공여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돈 오버도퍼는 1988년 7월부터 8월까지 세 차례의 회담에서 한국이 6.25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수교가 이뤄졌음을 밝혔다. (초기 협상에서는 헝가리가 10억 달러 이상을 요구한 반면, 한국은 4억 달러를 제시했다고 한다.) 그 후, 1988년 9월 양국에 상주대표부가 설치되고, 1989년 2월 1일 공식 수교가 이뤄진다.

 

그렇다면 한국과 헝가리의 접근에 대해 북한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평양에 설치된 헝가리대사관의 외교문서를 검토한 논문에 따르면, 이미 1985년 시점부터 북한은 양국 간 경제·문화교류에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85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회의에 헝가리 차관급 인사가 참여한 일이나, 부다페스트 오케스트라가 남한의 초청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북한 정부 인사가 격노를 표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1988년 한국과 헝가리가 서로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하자, 북한은 1988년 9월 19일 자 《노동신문》에서 공개적으로 헝가리를 비난했다.

 

이번 헝가리가 남한과 국가적 관계를 맺기로 한 것은 사회주의를 망신시키고 있으며 사회주의 공동위업에 손실을 가져다주고 있다, 북한은 최근 다수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개혁과 개방 정책이 어디까지나 사회주의를 더 잘하고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사회주의 나라의 개혁과 개방정책이 제국주의 앞잡이들과 손을 잡고 사회주의를 망신시키는 정책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헝가리처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나머지 정치적 입장을 버리면 자기 인민의 운명과 사회주의 공동위업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 북한은 헝가리가 남한과 공식관계를 맺는 것은 막을 수 없게 되었으나, 다른 동구권 국가들이 한국과 수교하는 것을 막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반면 헝가리는 1988년 9월 22일 북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공식 입장을 통보했다.

 

헝가리, 북한이 지난날 우호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가 한국과 쌍무관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대한 입장 변화를 의미하거나 북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관계를 갖기로 한 것은 현실 인정에 기초한 것으로서 한반도 통일에 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민족적 이익에 기초한 현실주의는 국제주의에 부합된다. 한국에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개설되면 한국에 영향을 주어 통일에 도움이 되게 될 것이다. 헝가리의 이번 결정은 동맹국들의 이해와 동의를 받은 것이다.

 

나아가 1989년 2월 1일 한국과 헝가리의 공식 외교관계 수립이 이뤄지자, 북한은 2월 18일 《노동신문》과 《평화신문》을 통해, 한층 더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며 헝가리를 비난했다.

 

헝가리는 괴뢰들을 공식 인정함으로써 교차 접촉, 교차 승인을 실현하려는 안팎의 분열주의자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다. 남조선 괴뢰들이 지금 사회주의 나라들을 뚫고 들어가 교차 접촉, 교차 승인을 실현하기 위한 돌파구를 헝가리에서 열어 놓았다고 환성을 올리며 북방정책을 더욱 집요하게 추진시키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 헝가리 당국자들은 저들만이 현실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은 사실상 통일과 교차 승인이 양립될 수 없다는 초보적 논리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괴뢰들이 던져주는 몇 푼의 달러에 몸을 파는 헝가리의 행동에서는 사소한 민족적 자존심과 계급적 입장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한국은 헝가리와 국교를 수립한 후 파죽지세로 동구권과의 수교를 밀어붙였다. 1989년 11월에는 폴란드, 12월에는 유고슬라비아, 1990년 3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몽골과 수교했다. 그리고 1990년 9월 30일 드디어 소련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한소수교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이에 따라 북한의 대동구권 정책도 강경일변도로 나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 이스턴 리뷰》 1989년 4월 20일 자는 북한 외교관계연구소 강정일과 인터뷰를 보도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몇 푼의 달러를 벌기 위해 자신들의 원칙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앞으로 단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료 사회주의 국가와의 외교단절은 결국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이 동구권 국가들과 연쇄적으로 수교관계를 맺게 될 상황에서 북한이 모든 동구권 국가와 외교단절을 시도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의 체제전환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한국이 동구권 국가들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에, 북한은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3)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과 실무회담 (1989년 2월~1990년 7월)

 

북한 김일성 주석은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한은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고 군사파쇼가 군림하게 되었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1988년 신년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신년사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조국통일 문제는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는 문제도 아니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고 우세를 차지하는 문제도 아니며, 서로 힘으로 승부를 겨루려고 한다면 통일 문제는 어느 때 가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1960년대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할 때 사용했던 논리이기도 하지만, 그 함의가 역전된 것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즉 1960년대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을 때는 통일문제에 관한 남측의 방어적, 보수적 태도를 염려해 이와 같은 논리를 폈다면, 이제는 북한을 방어하기 위해 동일한 논리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둘째, 신년사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와 각계 인사가 참가하는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남북연석회의에서 시급히 다뤄야 할 의제로는 △대규모 군사연습(팀스피릿 훈련) 중지, △다국적 군축회담, △24차 올림픽 남북공동 개최, △비방, 중상 중지 문제를 제시했다. 1988년 신년사 이전에는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주장했다면, 이제는 정당·사회단체 대표자·각계 인사로 구성된 연석회의를 제안했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북한이 제안한 남북연석회의는 남한 정부와의 공식적인 회담을 우회한다는 성격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북고위급회담은 어떻게 개시되었는가? 1988년 11월 16일 북한은 부총리급을 단장, 군총참모장급을 부단장으로 하는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다시 제안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1988년 12월 28일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당국자회담과 이를 위한 차관급 예비회담을 역제의했다. 이때 한국 정부는 남북 간 당면한 신뢰 구축과 긴장 완화를 위해 북측이 제기하는 “실효성 있는 여타 방안들도 함께 토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즉 북한이 제안하는 의제도 토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었다.

 

1989년 1월 신년사에서는 (1988년의 남북연석회의 제안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면서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총재와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을 평양에 초청한다고 밝혔다. (이는 1989년 3~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이어져 정세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이 역시 후술한다.) 그렇지만 북한이 제안한 ‘남북정치협상회의’에 대해 각 당 총재는 거부 의사를 밝혔고, 김수환 추기경도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다.

 

그 후, 1989년 1월 16일 정무원 연형묵 총리는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에 남한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면서 남측의 제의를 수용했다. 그에 따라 1989년 2월 남북고위급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시되었다.

 

2. 노태우 정부의 등장과 민중운동

 

그렇다면 노태우 정부의 등장 이후 민중운동의 상황은 어떠했나? 1988년 민중운동은 1987년 대선에서 정치방침의 분열,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라는 충격 속에서 시작했다. 1988년 12월 31일 민통련의 기관지 《민중의 소리》에 게재된 「88년 평가와 향후 전망」이라는 글을 잠시 살펴보자.

 

1988년 상반기 민족민주운동은 대통령 선거에 대한 패배를 자신의 오류로서 처절하게 반성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입장의 성과적 측면에만 매달려 상호비방에만 급급하였다. 민통련을 중심으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했던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그 시기 주류로서 운동의 대의에 복무하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자기반성을 해야 했고, (…) 다른 입장을 취했던 세력도 패배에 대한 공동책임을 절감하면서, 서로의 오류와 한계에 대한 원인을 심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 현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냉엄하게 천착해야 했다. 그러나 (…) 포용력 있는 대처의 부족으로 총선 이전까지 민족민주운동은 자기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표류를 거듭했다. 이러한 좌절과 분열 속에서 민족민주운동은 총선에 대한 대응 전략을 통일적으로 세우지 못한 채 (…) 대통령 선거 시기의 자기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대중의 지지 성향을 가늠하여 각각 분리되어 총선에 임했다.

 

평가서가 말한 것처럼 1988년 총선에서도 대선 시기의 입장 차이가 대체로 반복되었다. 한편에서는 민중의당, 한겨레민주당이 창당을 준비했다. 특히 민중의당은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와 함께 민중후보 운동을 펼친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 (민중의당은 애초 33명의 후보를 출마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절반 수준인 16명을 출마시키는 데 머물렀고 당선자를 내지도 못했다. 그들은 1988년 5월 16일 민중정당재건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또 한편에서는 일부 재야인사들이 김대중 씨가 이끄는 평민당에 입당했다. 1987년 대선 시기에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던 민통련의 상층인사 일부가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련)을 결성했고, 이들은 재야인사의 의회 진출을 위한 토대를 구축한다고 표방했다. 그에 따라 민통련은 총선 시기 독자적 활동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문건에서 민통련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1988년을 거치며) 대중적 진출은 각 부문과 지역에서 착실히 진행됐다”고 평가했다. 즉 노동자운동에서는 광범한 임금 인상 투쟁과 조직화가 눈에 띄게 진전했고, 그룹별·지역별·산별로 노동조합협의회가 건설되었고 전국노동법개정특별위원회도 결성되었다. 농민운동에서는 수세(水稅) 거부 투쟁,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 투쟁, 의료보험 제도개선 투쟁이 전개되었고, 군 단위 농민회가 건설되었다. 즉 1987년을 거치며 ‘계급대중조직’의 건설이 본궤도에 올랐다는 의미다.

 

1) 한민전의 1988년 투쟁방침

 

한편 1985년 통일혁명당에서 재편했다고 스스로 주장한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은 1988년 정세를 어떻게 보았는가? 한민전의 1월 1일 신년메시지를 보면 미국과 노태우 정권이 2월의 평화적 정권교체(2월 25일 대통령 취임)와 9월의 올림픽 개최를 통해 군정 기반을 강화하고, 미국의 식민지 파쇼통치체제를 영구화하며, 국토분단의 고정화를 꾀할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1988년의 2대 투쟁좌표를 △군부정권의 평화적 정권교체 저지, △1988년 분단올림픽 저지를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현실 조건에서 노태우 당선자의 대통령 취임 저지는 어떻게 가능했나? 또한 ‘분단올림픽 저지’를 실현할 경로는 무엇이었나? 이전 연재에서 소개한 소설 『금단의 땅』의 주인공이자 남한의 자생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인 박채호는 통일혁명당의 강령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에 입각해 있을 뿐, 남한의 구체적인 조건에 대한 고려가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따라서 군부정권의 평화적 정권교체 저지라든가, 1988년 분단올림픽 저지라는 그들의 투쟁좌표가 얼마나 한국 사회 현실에 적합성이 있었느냐는 문제에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이 중에서 분단올림픽 저지는 NL 계열 학생운동의 중심적 구호가 되고 민중운동 단체도 상당 부분 수용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이 문제는 후술한다).

 

실제 1988년 남한의 사회운동은 (민중정당 결성 흐름을 포함한) 총선 대응, 노동조합과 농민회 결성을 비롯해 민중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래서 실제로 1988년 3월 이후, 한민전의 투쟁방침은 대체로 이러한 흐름들을 지지하거나, 특정한 관점에서 강조점을 둘 뿐이었다.

 

예컨대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2월 28일에는 중앙위원회 명의의 ‘전 국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는 2대 투쟁좌표 중 하나인 정권교체의 저지·파탄이 실패함에 따라 군정 종식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광주사태 진상의 완전한 규명과 주범 처벌’을 제시했다. (또한 4월 총선국면에서는 ‘선민주개혁 후총선’과 함께 반여 공세를 통해 민주다수파 국회 쟁취를 위한 반군정투쟁을 촉구했다.) 그렇지만 한민전이 제시한 ‘광주사태 진상의 완전한 규명과 주범 처벌’이라는 투쟁목표는 이미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지속해서 제시된 슬로건이며, 여소야대 국회의 등장과 함께 ‘5공 청산’이라는 과제 중에서 으뜸에 오를 것이었다. 하지만, 1988년 한민전의 2대 투쟁좌표 중 하나였던 ‘분단올림픽 저지’는 여전히 남는 과제였다.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런데 ‘분단올림픽 저지’가 한민전 또는 북한에 그렇게 사활적인 과제였는가? 북한은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 확정 직후부터 극히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서울 올림픽 취소 결정이 내려지기 위해, 그 이전까지 다양한 수준의 정치공작을 꾀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또한 LA 올림픽 이후인 1984년 12월 16일에 북한 올림픽위원회는 IOC에 서한을 보내 서울은 전쟁위험이 상존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지역이므로 선수단의 신변이 보장될 수 없으므로 개최지 변경과 같은 시급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IOC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에 동구권을 포함해 많은 국가가 참여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소련-아프간 전쟁에 대한 항의표시로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했다. 여기에는 서독, 캐나다, 일본, 한국 등 서방국 45~50개국이 불참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 동독, 폴란드, 북한 등 14개국이 불참했다. 바르샤바조약기구 참가국으로는 루마니아만이 참가했다. 따라서 IOC는 서울 올림픽에 사활적 이해를 걸었다. 그래서 IOC는 1985년 2월 1일 남북체육회담을 중재하겠다는 공개서한을 남북에 발송한다. 남한은 한국 측에 불리할 게 없다는 판단 하에 이를 수락했으나, 북한은 “남북 간의 문제에 외세가 개입하면 안 된다”는 명목으로 이를 거부하다가 1985년 7월 7일 체육회담을 수락한다. 이때부터 북한은 개최지 변경보다는 올림픽 남북 분산개최, 또는 공동개최를 주장하게 된다.

 

북한이 서울 올림픽 개최에 정치적 위기감을 얼마나 느꼈는지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남한의 올림픽 개최를 무산하거나 그 의미를 반감시키기 위해 최후까지 여러 수단을 동원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1988년 올림픽에는 북한, 쿠바, 알바니아 등 7개국이 불참했을 뿐이고, 동구권 국가 대부분이 참가했다. 그 이후로 올림픽에 대해 회원국의 정치적 보이콧이 벌어진 사례는 없다.)

 

2)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과 전대협의 통일운동

 

실제 NL 계열의 학생운동은 1988년부터 ‘조국통일운동’을 추진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청년학생의 ‘자주교류’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올림픽 저지’라는 정치적 슬로건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 양상을 살펴보자.

 

1988년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김중기 후보가 유세 중에 「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김 후보는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와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을 위한 남북청년학생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건설준비위원회는 즉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고, 전대협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김중기 씨 본인은 총학생회 선거에서 제헌의회〔CA〕와 ‘NL 좌파’ 연합 선본에 패배했다. NL 좌파는 1987년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나 민중후보 지지를 표방했다. 낙선한 김중기 씨는 6·10 남북학생회담대표단 단장을 맡게 된다.)

 

그 직후, 1988년 4월 16일 서총련(건준위) 주최로 <한반도 평화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국민대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서총련은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고자 하는 세계 각 나라와 평화애호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서한은 서울 올림픽이 “남한에서는 독재정권을 안정화하고” 한반도에서 “민족분단을 영구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남북한 민중의 공동의 염원인 공동올림픽 개최를 전제로 올림픽 참가 의사를 표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수배 중인 김중기 씨는 서울대 총학생회 산하 조국의평화와자주적통일을위한특별위원회(조통특위) 명의의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위원회에 보내는 두 번째 공개서한」을 낭독했다. 서한은 6·10 실무회담을 판문점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또한 전대협은 5월 14일 <6·10 남북한 청년학생 실무회담 성사 및 공동올핌픽 개최를 위한 범시민학생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서총련, 전대협이 주도하여 6·10 학생회담과 공동올림픽 개최를 이슈화한 것이다.

 

한편 5월 15일 조성만 열사의 할복·투신사건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서울대 화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명동성당 구내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주최의 <양심수 전원석방, 수배해제 촉구대회>가 열리는 와중에 유서를 뿌리고 자결을 감행했다. 유서에는 “공동올림픽 쟁취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구호도 담겨 있었다. 그의 자결 역시 통일운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서총련-전대협의 흐름에는 재야운동도 점차 동참했다. 예를 들어 5월 11일에는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등 재야인사 35명은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게 드리는 편지」를 발표했다. 이 편지는 “24회 국제올림픽대회는 남북의 동족이 정치적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남북의 선수들이 함께 참가”하는 일을 위해 “남과 북의 정부가 시급히 협상을 재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편지는 공동올림픽 개최를 직접적으로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24회 국제올림픽대회’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공동개최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실제로 공동올림픽 개최 문제에 대해 어떻게 판단했나?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룬다.) 또한 6월 7일 문익환, 함석헌 등 재야 원로대표 31명은 6·10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NL계열의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이 벌인 다각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10 남북학생회담이나 공동올림픽은 성사되지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6월 2일 정부는 “통일논의의 적극 개방과 활성화를 뒷받침하되 대북한 제의나 접촉의 창구는 정부로 단일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덧붙여 “통일논의는 헌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통일정책의 수행과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민간의 독자제안이 독자행동에 단호히 대응할 것이며, 민간차원의 통일논의도 현행법을 위반하면 처벌하겠다는 엄포였던 셈이다. 이는 그 유명한 창구 단일화 논리였고, 노태우 정부 내내 ‘창구 단일화 대 자주적 남북교류’라는 쟁점이 형성된다.

 

6월 9일 연세대에서 〈6·10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 학도 총궐기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정부는 이를 원천봉쇄했고, 그날 밤 10시에야 연세대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홍우 통일원장관은 같은 날, 6월 9일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북한당국이 남북학생 교류에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점에 유의한다”면서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열어 남북학생 교류의 내용, 방법, 남북왕래 절차, 신변 안전보장 문제를 우선적으로 협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결국 6월 10일 남북학생회담 출정식은 격렬한 시위로 막을 내렸다. 김중기 단장과 통일선봉대를 앞세운 대오가 연세대 교문을 통과하려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이를 저지했다. 이러한 충돌 양상은 노태우 정부에서 계속 반복되는 장면이 되었다. 6·10 학생회담이 무산되었지만, 전대협은 4차 공개서한을 발표해, 8월 8~14일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을 열고 8월 15일 2차 남북학생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이는 또다시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8월 6일 통일선봉대 발대식부터 경찰의 원천봉쇄가 이뤄졌고, 국토순례대행진도 각지에서 무산되거나 투석시위로 발전했다. 8월 15일 연세대 출정식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공동올림픽 개최나 북한의 올림픽 참여 역시 최종 무산되었다. 5월 18일 야권 3당의 총재회담에서 김대중 총재는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 북한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는 의도로 북한을 ‘사실상의 공동개최국’으로 격상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5월 20일 평민당 의원 총회에서 사실상의 올림픽 공동개최를 위해 판문점에서 남북한 정당회담을 여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부-여당은 “책임 있는 정부를 제쳐두고 남북정당 간 직접회담을 시도하려는 것은 북한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오던 바를 수용하는 태도로서 통일에 대한 국론을 분열시키며 종국에는 우리의 대북협상에 대한 입장만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반발했다. 이에 김대중 총재는 남북정당회담을 정식으로 북한에 제안한 것은 아니라고 한 발 후퇴했다.

 

이 와중에 5월 24일 김일성 주석이 시사누 모잠비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면 2개의 한국을 인정하는 셈”이라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되었다. 5월 26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이 남한 국회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남북 국회가 공동으로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면 올림픽에 참가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북한은 올림픽 참가신청 최종시한을 하루 넘겨 9월 3일 올림픽 불참을 발표했다.

 

3) 문익환 목사와 재야의 통일운동

 

문익환 목사는 남북한 교차 승인(북방정책) 문제나 남북올림픽 공동개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이유나는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2009)에서 “문익환은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NL계열의 주체사상파(일명 ‘주사파’)의 노선에 편향되지 않고 남과 북의 입장을 항상 융합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평가했다.

 

당시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 통일운동세력은 (반미통일운동에 역점을 두었던 NL 계열이 다수를 차지하는) 청년학생과 보조를 맞추거나 뒤따라가는 모양새를 보였다. 다시 말해 민통련은 통일운동을 선도해 나갔기보다는 6·10 남북학생회담을 통해 통일운동의 주도권을 쥐었던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후원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민통련 정책실장이던 장기표 씨에 따르면, “민통련 내에서 문화운동 세력들은 학생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주사’적 입장도 수용하였다.”)

 

실제 문익환 목사는 「민족통일에 관한 구체적 제안」(1988년 4월 16일)에서 “UN 동시 가입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며 UN 동시 가입 문제에 대해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한 올림픽 공동개최에 관해서는 (같은 글에서) “특히 1988년에 성취해야 할 일은 남북한 올림픽 단일팀을 구성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여 올림픽 공동개최보다는 단일팀 구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이 올림픽 불참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이 보도된 후, 6월 시점에서는 “88올림픽 공동주최와 단일팀 구성에 반대하는 것은 현 정권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라며 한국 정부의 소극적 자세를 강하게 비판했다. 즉 북한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한국 정부에 대해서 강한 비판적 자세를 취했던 셈이다.

 

문익환 목사는 창구단일화 논리에 대해서 ‘관 주도론’과 ‘다원적 만남의 단일화’를 구분하면서 노태우 정부의 태도는 관 주도론이라는 의미가 짙다고 지적했다. 그는 “관 주도의 통일논의는 분단의 벽만 높이 쌓았다”며 “다각도의 교류가 이뤄진 뒤 그 결과를 관이 나서서 인정하고 협정을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989년 3월 방북을 결행하는 논리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1988년 7월 20일 조국의자주적평화통일을위한민주단체협의회(조통협)가 결성된다. 여기에는 민통련, 민청련, 민운연준비위,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불교본부를 비롯해 총11개 단체가 참여한다. 또한 8월 3일에는 한반도평화와통일을위한세계평화대회를위한추진본부를 구성했다.

 

4) 노태우정부의 7·7선언과 통일운동

 

그렇다면 재야 통일운동은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을 어떻게 보았을까? 선언은 첫 번째 항목에서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체육인, 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 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한다”며 학생운동과 재야의 남북교류 요구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전대협은 7월 9일 성명을 통해 “7·7선언은 본질적으로 한반도의 영구분단에 기본 의도가 있고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망과 통일운동의 성과를 권력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기만적 조치”라고 평가했다. 또한 조통협 역시 7월 20일 발족식에서 “7·7선언이라는 것도 통일을 진정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대중의 통일 염원을 무마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쌓기 위해 정략적으로 내놓은 것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이러한 평가에는 7·7선언이 북한이 제기하는 정치·군사 문제에 관한 의제를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도 담겨 있었다. 결국 전대협이나 조통협의 7·7선언에 대한 평가는 “외세와 결탁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매판세력인” 노태우 정권을 통일의 주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재야 통일운동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10월 19일 노태우 대통령의 UN 연설에 대해서, 조통협의 공동대표 문익환, 이우정, 지선, 이재오, 오영식은 10월 24일 ‘노태우 씨의 UN 연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 역시 7·7선언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이었다. 즉 △국내적으로 실질적인 조치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 평화 문제의 핵심사항인 미국과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 미국의 핵무기·군사기지 철거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동북아 6개국 평화협의회 제안도 통일을 위한 길이 아니다. 따라서 성명은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4개국 교차 승인을 통한 분단 고착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핵 군사기지를 즉각 철거하라, △반공 국시,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5) 인민노련과 삼민그룹의 통일운동론 비판 (범PD의 비판적 문제 제기)

 

한편 전대협·민통련의 통일운동론과 대비되는 비판적 입장도 1988년 무렵부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1988년 10월에 발간된 『기사연리포트』 9호에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기관지 《민주화의 길》 18호(1988년 6월 10일)에 실린 「자주적 평화통일 운동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기관지 《노동자의 길》 30호(1988년 8월 20일)에 실린 「현재의 통일운동론에 대한 우리의 입장」, 민족통일민주주의 노동자동맹(삼민그룹)의 기관지 《노동자의 깃발》 10호(1988년 7월 18일)에 실린 「민중해방을 위한 민주주의 민족통일방안」을 비교하는 글이 실렸다.

 

인민노련은 민청련의 입장이 자본가계급의 통일관, 노동자계급의 통일관과 구분되는 ‘소부르주아적 통일관’이라고 규정한다. 즉 자본가계급의 통일관이 자본주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의 통일관이 노동자계급이 해방되는 세상으로 남북 두 사회를 동질화하는 것이라면, 소부르주아 통일론은 ‘체제와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문제를 바라보자’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민청련은 통일운동이 ‘사상과 이념, 제도의 대립을 해결하는 계급운동’과 명백히 성격을 달리한다고 규정하며, ‘민족자주정권의 주도하에 제반 민주주적 변혁이 완수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도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으로 돌아가는 통일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인민노련은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이 가장 진보적이고 철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존중하던 지식인과 학생들이 이 문제에서만큼은 노동자계급적 관점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1988년 상반기에 진행된 학생운동 주도의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을 제기한다. 즉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요란하게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장개척을 필요로 하는 독점자본의 축적 논리에 충실히 복무하면서도, 국민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려 노동운동 탄압 규탄, 파쇼악법 개폐 요구, 구속자 석방 요구와 같은 민주화 요구와 5공화국 부정 척결, 광주사태 진상규명, 재신임 국민투표 약속 이행과 같은 반정부세력의 공세를 피하고 있다. 그런데 학생운동과 민중운동권이 통일운동에 몰두하고 있음으로 인해, 반파쇼투쟁이라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다는 비판이었다.

 

또한 인민노련은 학생운동이 공동올림픽에 과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비판한다. 예를 들어 서총련의 경우 “88년 올림픽은 민족이 영구분단의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아니면 민족화해와 대단결로 조국통일의 서광 찬 미래를 개척하느냐의 엄중한 기로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인민노련은 이러한 학생의 주장은 웅변적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과장이라고 보았다. 또한, 설사 공동올림픽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활용해 냉전적 반공의식을 깨어 나가고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조금이라도 실현하기 위해서는 힘겨운 투쟁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삼민그룹 역시 민청련의 통일론을 비판한다. 민족통일문제는 “한국민중이 제국주의 사회체제의 사슬로부터 이탈하는 문제이자 현존하는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억압의 근거를 와해시키는 문제다. 그것은 또한 상이한 사회체제를 어떻게 종합시킬 것인가와 아울러 핵심적으로는 어떠한 국가권력을 창출해 내는가의 문제다. 민족통일이란 민중이 명실상부한 지배계급이 되고 민족의 주체로 되는 변화의 과정을 말한다.”

 

『학생운동논쟁사2』에 따르면 1988년 6~8월까지 NL 계열에서 주도한 통일운동에 대한 비판은 인민노련이나 삼민그룹처럼 노동자운동 그룹에서 제기되었을 뿐 학생회담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서건추가 서총련으로 통합되고, 아직 PD 진영이 명확히 등장하지 않았던 사정과 관련된다.” 하지만 1988년 말부터, 총학생회 선거에서 PD진영이 부상하면서 NL 진영의 통일운동을 강력히 비판한다. 즉 ‘단독올림픽 결사반대, 공동올림픽 쟁취 투쟁’이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소부르주아적 투쟁이었다는 쟁점을 제기한다.

 

전대협이 소시민적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목적의식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7년 8월 19일] 전대협의 발족식이 노동자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외곽에서 벌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후에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비판적 지지’로 ‘선거혁명’을 부르짖고, [1988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소선거구’ ‘야권단일화’를 외친 이후, 일관된 과정으로서 ‘통일투쟁’이 자리 잡혀 있다는 것은 이들의 실천이 정확하게 하나의 입장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소부르주아지 사상의 내용이다. 파쇼에 반대하고 그렇다고 민중의 이익에 철저하지 못한 이들은 ‘민족’이라는 빅카드를 내세우며, 민족의 이익, 민족의 이해, 통일해방정부를 부르짖는다.” (인하대 민중민주전선편집부, 《민중민주전선》, 3호, 1988년 12월 5일.)

 

왜 전대협이 소선거구제, 야권단일화를 주장한 것을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에 대한 지지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가. 당시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1988년 2월 8일,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야권단일화를 실현하기 위해 총재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직후 민주당과 평민당(총재 김대중)은 총선 전 양당 통합에 의견을 모았다. 민주당은 무조건 통합을, 평민당은 소선거구제 합의 후 통합을 주장했다. 민주당은 ‘전국구 정당’이므로 중선거구제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으나, 평민당은 호남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소선거구제가 정치적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통합이 무산 직전까지 갔다가 2월 23일 김영삼 전 총재가 소선거구제로의 당론 변경을 수용했고,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게 야권통합 후 2선 후퇴라는 약속을 지켜줄 것을 촉구했다. 실제 3월 9일 민정당이 자신의 ‘소선거구제 선거법 개정안’을 야당의 저지를 뚫고 기습적으로 통과시키면서, 유신 시절 도입된 1선거구 2인 선출 중선거구가 폐지되고 소선거구제가 도입되었다. 당시 야당은 선거제 개편에 동의하면서도 의석 배분 문제로 여당과 대립하는 중이었다.

 

3월 17일 김대중 총재가 사퇴를 표명하자 다시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3월 19일 민주당, 평민당, 한겨레민주당 통합 협상에 전대협 소속 학생 150명과 평민당 지지자 100명이 ‘무조건 통합’ ‘독재타도’ ‘(민주당)최형우 사쿠라’를 외치고, 이 와중에 누군가가 최형우에게 폭력을 가해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소선거구제로 개편한 뒤, 통합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민주당의 제1야당 지위가 위태롭다고 생각했고, 실제 소선거구제로 개편한 뒤에는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볼 때, 전대협은 1987년 대선에 이어 1988년 총선에서도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PD 학생운동에서 볼 때 전대협의 ‘김대중(평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통일운동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었다.

 

종합해보면, 1988년 6~8월 국면에서 인민노련과 삼민투가, 1988년 말 학생운동(이들을 훗날 범PD라고 부를 수 있다)이 제기한 비판의 키워드는 ‘감상적 민족감정’, ‘소시민(소부르주아) 노선’이었다. 즉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혁명론과 통일론을 종합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며, 통일사회에 대한 상이 소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제시된다는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은 통일운동이 고양될수록 더 강도 높게 제기된다.

 

3. 1989년 남북고위급 회담과 방북 러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북한은 1988년, 1989년 신년사에서 한국 정부를 우회하는 남북연석회의,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안했다. 또 한축으로는 1988년 11월, 한국 정부와의 직접 대화를 의미하는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안했고 1989년 1월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을 수용했다. 일종의 ‘투 트랙’인 셈인데, 북한은 실제로 무엇을 우위에 두었나? 어찌 보면 1989년은 투 트랙이 동시에 작동했던 해다.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은 1989년 2월, 3월 초 두 차례 진행되다가,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위한 북한의 초청에 응하는 형식으로 문익환 목사가 전격 방북했다. 게다가 정부가 학생들의 평양축전 참가 허용 문제를 두고 갈팡질팡할 때, 전대협은 임수경 씨의 방북을 단행했다. 그에 따라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이 중단되었다가 10월에 재개되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북한이 남한 정부의 강한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씨의 방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보면 한국 정부와의 대화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1989~1991년 세계정세가 격변하고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정부 간 대화에 무게를 싣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1) 문익환 목사의 방북 (1989년 3월 25일~4월 13일)

 

먼저 문 목사의 방북을 살펴보면, 그 계기는 김일성 주석이 1989년 1월 신년사를 통해 4당 총재와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을 초청한 일이었다. 방북 의지를 지니고 있던 문 목사는 정경모 씨를 통해 1989년 2월 9일 북한의 초청장을 다시금 확인하고 방북을 최종 결단했다. 문 목사는 1989년 1월 21일 설립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고문이었는데, 3월 19일에는 공동의장 이부영, 통일분과위원장 이재오, 고문 백기완, 계훈제와 회동해 입북계획을 전달했다. 그는 왜 방북을 결행했는가? 그는 “나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지만 정치협상을 통해 정치인들이 문제를 푸는 데 돌파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에서 두 번에 걸쳐 김일성 주석과 대화를 나눴다. 이승환 씨는 이때 문익환 목사가 제기한 쟁점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즉 ① 한시적, 과도적 교차 승인 수용, ② 연방제의 점진적, 단계적 추진, ③ 정치·군사회담과 경제·문화교류 병행추진, ④ 팀스피릿 훈련 등의 정세와 상관없이 남북대화 지속, ⑤ 주체사상. 문익환 목사가 보기에 이는 대부분 북한이 양보하고 이해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첫째, ‘통일을 지향하는 과도적 교차 승인’ 문제는 최우선 순위의 질문이었다. 문 목사는 교차 승인이 영구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서, “그것은 군비축소와 긴장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김 주석의 대답은 “교차 승인이나 교차접촉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조선을 만들려는 분열주의책동이기 때문에 절대로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확고한 거부였다.

 

둘째, 문 목사는 남과 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감이 깊을 대로 깊어졌기 때문에 연방제 통일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과 당분간 남과 북의 자치정부가 군사와 외교까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단계를 두고 여건이 성숙한 후 연방정부의 주도 아래 외교와 군사를 점진적으로 통합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북이 주장하는 외교·군사권을 통합한 연방제 통일방안으로는 분단 50년을 넘기지 않는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 말에 김 주석은 “좋습니다. [연방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협상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문 목사는 이 합의를 북쪽이 남한 정부의 ‘체제연합’ 안이나 김대중 씨의 공화국연방제 안에 동의한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래서 자신이 한 일이 북한 통일정책을 전환시킨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남쪽의 통일방안에 북쪽의 동의를 얻어낸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셋째, 정치·군사회담과 경제·문화교류를 병행하자는 문 목사의 주장은 처음에는 예상대로 강하게 거부당했다. 그것은 병행 추진이 항구 분단을 전제로 한 독일식 교류이며, 인민의 통일갈증을 해갈시켜주는 것으로 안 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라는 반론 때문이었다. 문 목사는 “다방면에 걸친 회담과 교류는 정치군사회담에 좋은 압력이 된다”고 주장했다. 김 주석은 “좋습니다. 동시에 추진하도록 합시다”라고 수긍했다고 한다.

 

넷째, 문 목사는 “팀스피릿 훈련이야 하건 말건 남북 간 회담을 중단 없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이것은 대북 핵 선제공격을 포함하는 팀스피릿 훈련의 성격상 북이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문 목사는 북한의 주체사상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북한의 ‘역린’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남쪽에도 통일 장애요인들이 있어서 이걸 제거하려고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합니다. 그것이 곧 민주화운동입니다. 그것은 남쪽에 사는 우리 책임입니다. 그런데 북쪽에 있는 통일 장애 요인은 북에서 책임지고 제거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통일의 저해요인으로 심각하게 문제 되는 것은 주체사상입니다. 이제 주체사상도 그 강조점이 인민에게로 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승환 씨에 따르면, 수령 중심의 유일지배체제, 개인숭배 이데올로기가 통일의 저해요인이니 인민을 중시하는 주체사상으로 돌아가라는 문익환 목사의 ‘행간’은 즉각 읽혔다. 김일성 주석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렇지요. 주체사상도 인민에게서 온 거지요.”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한편 문익환 목사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도 회담을 열었는데, 이때 전민련이 제안한 범민족대회 개최도 논의했다. 북한 허담 위원장도 범민족대회 개최에 동의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문익환 목사와 허담 위원장은 ‘4·2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문익환-김일성 회담과 문익환-허담 회담의 논의사항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중요한 대목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쌍방은 정치, 군사 회담을 추진시켜 대결상태를 해소하는 동시에 이산가족 문제와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을 실현하도록 적극 노력한다.

4.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보였다.

5. 쌍방은 팀 스피릿 합동군사연습은 남북대화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6. 문익환 목사는 교차 승인, 교차접촉에 대한 거부적 입장과 통일 의지를 확인하고, 조평통은 문익환 목사가 주장하는 남북교류와 점진적 연방제 통일제 안이 두 개 한국을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과연 이승환 씨의 평가처럼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북한이 ‘정치·군사회담과 경제·문화교류 병행 추진’이나 ‘연방제의 점진적, 단계적 추진’, 나아가 ‘한시적, 과도적 교차 승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까? 아니면 문익환 목사의 입장은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고, 북한은 점차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인가?

 

하지만 한국 정부는 문익환 목사의 방북 활동에 강경하게 대응한다. “북한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공동성명을 빌어 우리 정부 당국을 배제하고, 우리 사회 내 일부 동조 세력을 부추겨 국론 분열과 사회 혼란을 기도하고 있음을 명백히 한 것으로, 온 국민과 더불어 분노와 개탄을 금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1989년 10월 5일 1심 결과, 재판부는 문익환 목사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2)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둘러싼 민중운동 내 논쟁

 

당시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민중운동 내에서도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99년 시점에 통일맞이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통일맞이) 이승환 사무처장은 “당시 정세에 비추어 봤을 때 부정적인 측면은 없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울산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한참 진행되던 때였습니다. 그 와중에 문 목사님의 방북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됩니다. 즉 노태우 정권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당시에 발전하고 있던 대중운동을 억누르고 탄압하는 데 문 목사님의 방북을 이용한 것이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노동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러한 원망이 노태우 정권으로 가기보다는 문 목사님에게 향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정세에 대한 판단이 정확했는가 하는 부분은 문 목사님에게 엄중히 물어야 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문 목사님의 과감한 방북의 돌파구가 없었다면, 지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지금과 같은 대중적 기반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 객관적으로 보면 얻은 부분이 더 많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문익환 목사 방북을 계기로 노태우 대통령이 좌경세력 척결을 위한 한시적 상설대책기구를 지시함으로써 1989년 4월 3일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사로 구성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발족했다. 공안합수부는 활동한 77일 동안 문 목사 방북 사건 관련자(8명 구속, 26명 불구속) 외에도 이적단체(21명 구속, 3명 불구속), 노사분규 주동과 의식화 배후 조종(60명 구속) 등 317명을 구속했다. 공안합수부가 해체된 이후에도 단체들에 대한 공안탄압은 정권 말기까지도 지속되었고, 존재와 활동이 조금이라도 드러난 조직이라면 거의 한 차례 이상 조직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1989년 시점에 벌어진 논쟁을 살펴보자. 먼저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간했고, 훗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지도자로 알려지게 된 박노해 씨는 4월 15일 「긴급호소」를 발표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미 통일문제는 현실적인 문제로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이미 문목사의 방북사건을 ‘시기’가 어떻든, 당면 임투에 ‘유리’하건 ‘불리’하건 전 국민적인 최대의 쟁점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문제는 언젠가는 우리가 반드시 부딪치고 깨뜨려 나가야만 할 현실적 ‘장벽’입니다. 그 ‘시기’와 ‘장벽’이 지금 우리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이라는 마창노련 소속의 민주노조 간부들조차 문 목사 방북에 대하여 절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다는 우리 노조운동의 상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 현대노동자 투쟁과 임투와 메이데이 행사로 집약되는 민중생존권 투쟁과 문 목사 방북으로 집약되는 통일운동은 결코 별개의 전선이 아닙니다. 이 두 개의 사건, 두 개의 투쟁은 두 개의 꼭짓점이 되어 삼각형을 그리면서 현 정치권력의 심장부로 날카롭게 찔러 들어갑니다.

 

반면 인민노련은 박노해 씨의 긴급호소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분단’ 극복의 핵심적 표현은 바로 분단을 확대재생산해 온 독점자본(국가권력)의 요구를 그 물질적 기초부터 파괴해 나가는 것이라 할 때, 동지께서 우습게 생각한 당면 ‘임투’를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얼마나 과학적 사회주의와 올바르게 결합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난 문 목사님의 방북 사건에 남한 노동자계급의 온 관심을 촉구한 모습은 또 하나의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그리고 마산·창원 민주노조 간부들께서 문 목사님의 방북에 대해 지지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저와 같은 입장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백번 옳은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분들에게 있어서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기초한 통일운동’과 그리고 ‘어떤 혁명적 경로를 통해 통일이 완성되는가’를 명확히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혁명의 전망이 통일의 전망을 규정하는 것이지, 통일운동 그것 자체가 혁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게 아님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는 1988년 학생운동의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 투쟁이나 공동올림픽 쟁취 투쟁 당시에 ‘소부르주아적 통일운동’을 비판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비판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전대협 소속 임수경 씨의 방북(1989년 6월 30일~8월 15일)

 

한편 학생운동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전부터 평양 축전 참가 문제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전대협은 1988년 12월 28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의 학생위원회가 보낸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권유 서한을 받는다.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회는 국제학생연합, 세계민주청년연맹 등 사회주의청년조직이 참여하는 조직이었다.) 1989년 1월 3일 김집 체육부장관은 “축구, 배구, 농구, 권투, 체조, 레슬링 선수단을 축전에 파견하겠다”고 밝혔고, 1월 6일 이홍구 통일원장관은 “정부는 북한과 교류할수록 좋다는 입장”이라며 “전대협의 축전 참가를 막지는 않을 것이나 전대협도 대북답신을 통일원과 협의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전대협은 “현 정권은 남북교류를 분단고착에 이용하려 하는 등 반통일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답신의 전달방식 등 실무 문제는 통일원과 협의할 것이나, 답신의 내용은 독자적으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놀랍게도 정부가 축전 참가를 허용할 의사를 밝히면서, 이 역시 민중운동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축전은 통일운동을 대중운동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나 정부 측에게도 하나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축전 참가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모든 방면에 걸친 사전, 사후 활동이 동반되지 않은 채 이루어진다면 정부는 학생운동을 대북접촉의 한 도구로 이용하거나 또는 좌경세력으로 매도하여 보수대연합 실현의 호재로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서강대 게시판에 붙은 평양 축전 공식 포스터.

 

당국의 평양축전 참가 불허 방침에 항의하여 기말시험 거부 대자보가 붙은 연세대 교문. (‘고이철규 열사 살인진상규명과 총학생회장 석방을 위한 서명’, ‘오늘 6월 12일 시험연기 결의대회’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2차대전 직후 반전, 반제국주의를 주제로 런던에서 열린 국제청년학생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1차 축전은 1947년 체코 프라하에서 80개국이 참석하여 열렸다. 그 후 동독, 루마니아, 헝가리 등 동구권과 오스트리아, 핀란드, 쿠바에서 개최되었다. 198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축전에는 157개국 2만 명이 참여했다. 축전 국제준비위원회는 각국 준비위원회와 국제학생연합, 세계민주청년연맹 등 사회주의 청년조직이 참여했다.

 

즉 정부가 전대협의 평양 축전 참가를 정치적 소재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나아가 전대협의 축전 참가 방침 그 자체를 비판하는 PD 학생운동 그룹의 입장도 제기된다.

 

즉, 파쇼의 실용주의적 통일정책에 반대하며 주한미군, 핵무기, 휴전협정을 통해 분단의 정치, 군사적 대립을 더욱더 초래하는 파쇼정권에 대한 규탄과 전면적 직접교류를 가로막고 정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보법의 철폐를 통해 민중의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당면 투쟁의 과제임이 분명한데, 청년학생축전에 대한 참가의 문제로 또다시 통일투쟁이 교류, 실무의 차원으로 현상화됨은 심각한 문제임이 분명하기에 다시 한 번 과학적 인식과 올바른 투쟁계획의 수립을 촉구한다. (1989년 1월 29일 민중민주주의쟁취를위한학생연합, 「그대, 청년학도여 민중투쟁의 파수꾼으로 우뚝서라」)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전대폅의 축전 참가 방침을 비판하는 글을 보면, ① 축전 참가 자체를 목표로 설정해서는 안 되고 평화, 군축 등 한반도 평화보장이라는 문제와 반제친선·반제평화의 문제가 남한 민중에게 사활적인 문제라는 것을 선전하고, ② 축전 참가는 남한 청년학생의 독자성이 무시되고 북한 청년학생의 대표성에 흡수되는 조선준비위원회의 ‘지역’ 대표가 아니라 남한 민중의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는 축전의 참가 형식의 문제이다. 축전은 세계청년학생들의 공동의 축전이지 평양만의 단독행사가 아닌 것이며 따라서 남한의 청년학생은 평양 측의 초청 없이도 독자적 결의에 의해 참가를 신청해 행동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측의 전대협 초청은 ‘단일한’ 조선준비위원회 산하의 ‘하나의’ 조선학생위원회로 ‘대표’되는 남한 ‘지역’ 학생대표로서의 전대협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내게 된다. 여기서는 당연히 국제적 반제친선의 일익을 담당하는 남한청년학생의 독자성은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 청년학생의 대표성 속으로 흡수되는 형식일 것이다.) 참가형식 문제는 단순히 ‘형식’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남한 민중의 독자성에 관한 문제이다. (고려대 학생회 학술부, 「통일운동의 올바른 위상정립을 위한 제언」, 1989년 6월)

 

두 번째 문제를 자세히 보면, PD 학생운동은 학생운동을 포함해 남한 민중운동의 독자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남한사회에 독자적인 정치운동의 구심이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과 연결될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 남긴 여파 속에서 6월 6일 태도를 바꿔 참가 불허를 밝혔다. 그럼에도 전대협은 비밀리에 평양축전 참가를 강행한다. 선발된 임수경 씨는 6월 21일 일본 도쿄로 출발해, 서베를린, 동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6월 30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녀는 평양축전에 참가하는 동안 북한학생위원회의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1995년까지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투쟁’을 포함하는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또한 7월 20일부터 백두산을 출발, 한라산을 향해 국토를 종단하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그 후 임수경 씨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임수경 씨의 평양축전 참가 역시 민중운동에 큰 쟁점이 되었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 3호에 실린 「임수경 양의 방북과 올바른 통일운동의 방향」(1989년 8월 20일)이라는 글을 보자. 이 글은 우선 방북의 성과로 △대외적으로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지지를 획득했다, △남한에서 통일문제의 주도 세력이 노태우 정권이 아니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선전하는 효과도 있었다, △노태우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통일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선전했다, △반동권력에 성역화된 채 민중의 접근이 금지된 통일문제에 독자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쟁점도 제기했다. △전대협의 통일운동은 ‘민족은 하나, 조국도 하나’라는 식의 통일지상주의이며, 맹목적·감상적 통일론이다. 즉 그런 식의 통일론은 노동계급의 강령이 될 수 없다. △노동자계급에게 통일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목적이 아니라, 착취관계의 소멸을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다. 따라서 통일운동은 계급투쟁의 발전에 봉사해야 하며, 계급투쟁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자주, 민주, 통일 3대영역론은 계급투쟁이라는 전체적인 목적을 위해 통일운동의 방향이나 내용을 배치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통일운동과 계급투쟁을 결합할 수 없다. △따라서 ‘사상, 제도, 이념을 초월한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방안을 선전하는 운동을 넘어서, 통일운동은 민중운동 탄압 분쇄 투쟁에 배치되거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파쇼악법 철폐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

 

학생운동에서는 한층 더 신랄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평양축전 참가는 △반파쇼투쟁 와중에 깃발을 내린 행위이며, △어떠한 방법으로든 축전에 참가하자는 무원칙적 투쟁이며, △적의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평가를 인용해보자.

 

① [1989년 5월 사망한 채 발견된 조선대 학생] “이철규를 묻기 전에 노태우를 타도하고 축전의 도시로 가자”라던 전대협. 그들은 투쟁의 도시를 빠져나가 홀로 축전의 도시로 가버렸다. 그들의 구호는 어느새 “축전 참여로 노를 타도하자”로 변화했다.

 

② 그들은 만일 정부당국이 평축 참가만 보장해 준다면 참가에 따른 주요 문제를 정부에 일임하는 형태가 될지라도 따르겠다며, 정치행사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저들의 자세는 적의 참가 불허방침 속에서 은폐되었다.

 

③ 적들은 문 목사 방북 이후 대중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데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전대협이 제3국을 통해서라도 평축에 참가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더 좋은 먹이를 노리며 참가 허용 방침을 불허 방침으로 전화한 것이다. 여기에 전대협은 적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져 모든 민중세력을 구렁텅이 속으로 잡아끌고 있다. 이에 때맞춰 서경원 의원의 방북이 적시에 드러나도 대중의 레드컴플렉스와 불안 심리가 한껏 자극되면서 국회간첩단 사건이라는 적의 각본이 완성되었다. (《들불》 창간호, 1989년 7월.)

1989년 10월 30일 자 민중운동탄압분쇄와파쇼악법기구철폐를위한학생특위연합준비위(학특연)가 발행한 《노학동맹》. “11월 12일 백만학도 동맹휴업 투쟁으로 총반격의 포문을 열자”, “민중민주 해방투쟁의 새지평을 향하여 총진군”이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1989년 11월 12일 지역별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가 서울대에서 ‘노동악법 철폐와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즉 학특연은 전국노동자대회를 맞이하여 《노학동맹》이라는 정치신문을 통해 동맹휴업을 호소했던 것이다. 각 학교 학생특위는 1989년 하반기 서울대, 고려대를 포함해 서울시내 10개 대학에서 결성되었고, 10월 27일 서울대에서 각 대학 특위의 연합조직으로서 학특연이 발족했다. 이는 PD 학생운동의 등장을 의미했다. PD진영은 기존의 노학연대 개념이 노동조합의 발전에 학생운동에 봉사해야 한다는 소박한 개념에 머물러 있다면서, 이를 넘어 노동자계급의 사상과 방법으로 무장하여 강고한 계급적 동맹관계를 형성하자는 의미로 “민중민주 노학동맹”을 개념화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 비판점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을 필두로 계급대중운동이 고양되고 노태우 정부와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전대협의 투쟁은 이를 방기할 뿐만 아니라 공안탄압의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막 싹이 트기 시작한 계급대중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었다.

 

전대협의 방북은 남한 정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사안이었고, 이는 학생운동의 구체적 실천이 객관적 정세에 실제로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면 정세에 대한 실천적 대응방침을 둘러싼 ‘투쟁노선’은 그만큼 중요성이 높아졌고, 바야흐로 1988~1989년을 거치며 NL-PD 간 치열한 투쟁노선 논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투쟁노선 논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매우 엄밀한 이론적 기초가 전제되어야 했다. 이는 과학적 이론과 투철한 정세분석에 입각한 운동 집단의 등장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주제어
정치 경제 노동 평화 국제 이론 민중생존권
태그
북한 노태우 통일운동 통일정책 사회운동사 NL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