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몰락: 21대 총선 전후 정치 전망
2020년 한국 정치 전망
1. 들어가며: 친문-친박이란 퇴행에 민족사를 맡겨야 하는가?
“친노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廢族)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최측근이었던 안희정 씨가 2007년 12월 말에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말이었다. ‘왕족’이 된 지 불과 3년 반 만의 일이었다. 2003년 말 대통령과 그 지지 세력이 정치개혁을 내걸고 창당한 열린우리당은 명분 없는 정치공세였던 대통령 탄핵소추 덕에 단숨에 2004년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했었다. 1987년 개헌 이후 보수정당이 아닌 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치혁명이라 불릴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오만 속에서 무능과 분열로 일관했고, 결국 2007년 손학규 등의 한나라당 탈당파가 주도한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친노 정치인들은 그들을 폐족시킨 친박에게 통렬하게 복수하면서 부활했다. 친박은 2004년 탄핵 소동에서 당을 지켜낸 박근혜와 그 지지자들이 원조다. 이들은 2007년 대선 경선과 2008년 총선 공천에서 타격을 입었지만, ‘친박연대’라는 선거연대를 만들 만큼 결속력이 있었고 영남지역에서 뿌리가 깊었다. 친박은 2012년 총선과 대선, 그리고 2016년 총선에서 독주했다. 하지만 독주가 오래되면 부패하는 법. 이들은 2016년 총선에서 ‘친박진박 논쟁’으로 선거를 망쳤고, 반성 없이 패권을 일삼다 대통령 탄핵까지 당했다. 그리고 친노 정치인들은 노무현의 영원한 벗 문재인을 앞세워 대선에서 승리해 화려하게 권력 중심부로 복귀했다.
2020년 21대 총선 지형은 15년간 이어진 친노-친박의 연장선에 있다. 친문으로 이름만 바꾼 친노는 더불어민주당의 중심부에 있다. 자유한국당 역시 여전히 박근혜의 총리였던 황교안 대표와 친박의 지지를 받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중심에 있다. 조국 사태로 친문 핵심 86세대 정치인들이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도로친박당’이란 평가를 받는 자유한국당의 무능 덕분에 몰락까지 갈 상황은 아니다. 양당의 하향 평준화 속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낡은 것들은 더욱 낡아가지만, 새로운 것들은 여전히 등장하고 있지 못한 형국이다.
친노(친문)-친박이라는 퇴행적 정치대결 와중에 한국사회는 위험천만한 국제정세와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지나는 중이다.
2007~20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부쩍 성장한 중국과 세계유일의 군사적 경제적 패권 국가인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충돌 중이다. 중거리핵미사일협정 같은 군사적 안전장치들이 해제되고 있고,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서로를 적으로 상대한다. 한반도는 그 충돌의 한복판이다. 핵무기와 경제제재 해제를 동시에 손에 쥐겠다는 북한 정권은 다시 전쟁 위기 상황도 감수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인 일본은 재무장 속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사회 변화 역시 그 속도가 무섭다. 2019년 2% 성장률이 무너질 수도 있는 가운데, 잠재성장률 역시 급전직하하고 있다. 2020년 잠재성장률은 일찌감치 3%대는 무너졌고, 이제 2% 중반대도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반백년의 산업화 추격성장이 문턱에 부딪힌 것이다. 2020~2021년 중에는 사망이 출산보다 많아지는 인구론적 변곡점에 도달한다. 세계 최하위의 출산율에 고령화나 인구감소의 속도는 세계 역사상 존재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대부분의 경제, 사회 제도가 고성장-고인구에 맞춰져 있다. 우리 사회가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친노(친문)-친박이란 정치구도가 이런 민족사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이들에게는 정책결정의 가치 기준이 되는 정치이념이 없는 것은 물론 심지어 정책수단을 실용적으로 능수능란하게 다룰 경제학적 능력도 없다. 집권세력인 친노(친문)가 소득주도성장이란 반(反)경제학을 내세우자, 1980년대 미국의 속류 경제학자들이 만든 공급 측 경제학을 대안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자유한국당의 실력이다. 집권세력이 주관적 대북정책과 반일 민족주의를 앞세운 한일 관계로 국제관계를 혼란으로 밀어넣자, 자유한국당은 태극기부대와 함께 성조기를 휘두르며 종북 타령으로 세월을 낭비한다. 친노(친문)-친박이 대결하는 정치는 민족사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친노(친문)-친박 대결이 재생산될 수 있는 한국사회 정치이념의 역사와 특징을 살펴보며, 2020년 총선에서 정치국면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해본다. 이 글은 특히 친노(친문)의 두 번째 ‘폐족’ 가능성을 개혁세력의 구조적 결함에 주목해 분석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특징은 1970년대 이후 형성된 야당과 재야를 촛불연합으로 불리는 집권연합으로 규합한 것이다. 1970년대 김대중과 장준하, 문익환 관계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계기로 친노(친문)와 참여연대, 민변의 공동 집권 관계로 정리된 것이다. 이들의 몰락은 이전과 달리 세력 전체의 공도동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 혁신에 실패한 보수, 반(反)보수뿐인 개혁
정치정세를 분석하기에 앞서 한 가지 오류부터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신문에서 보는 정치 분석은 대부분이 “개혁 대 보수”의 대결로 정치 갈등을 분석한다. 양당 구도가 오랫동안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굳어진 프레임이다. 하지만 한국사회 정치 이념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이런 구도는 허구적이다.
1)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포퓰리즘
원론적으로 말해 정치는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을 세우고 집행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현대사회의 이상은 자유, 평등, 풍요를 확대하는 것이다. (구속, 차별, 빈곤 같은 반대말들이 이상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만 생각해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는 시민이 구성원인 (민족)국가다. 규칙은 법률로써 정하며, 정해진 절차에 따라 폭력을 독점한 국가권력이 집행한다. 요컨대 현대사회의 정치는 시민의 자유, 평등, 풍요를 확대하기 위해 국가의 법률을 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그런데 자유, 평등, 풍요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확대할 수 있는지를 두고 역사적으로 여러 논쟁이 있었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는 이런 이견들을 대표하는 사상들이다. 20세기 초까지는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발전해나간 자유주의를 두고 보수주의와 사회주의가 비판을 가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사회주의를 두고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반공의 기치로 함께 싸웠고, 소련이 몰락한 20세기 말부터는 사회주의가 논쟁 중심에서 탈락하고, 자유주의, 보수주의가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로 혁신됐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자본주의 위기와 함께 이마저도 힘을 잃고 포퓰리즘으로 통칭되는 정념의 정치가 확대되고 있다.
자유주의는 재산을 소유할 개인의 권리로 시작됐다. 18세기 영국의 고전적 자유주의는 자유를 개인이 국가로부터 재산을 보호할 권리로, 평등을 시장 거래의 동등성으로, 풍요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설정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를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로 확대했고, 평등을 인간은 누구나 천부인권을 가진다는 기본권의 평등으로 확대했다.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는 케인스주의 혁신을 통해 자유방임시장을 국가제도에 의한 성장관리로 변모시키며 자유주의를 현대 경제에 맞게 혁신했다.
현대적 자유주의는 냉전이란 조건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격렬한 투쟁이기도 했다. 케인스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 관리 제도들을 만들었는데,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런 세계 관리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였다. 자유주의는 반공주의를 필요로 했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케인스주의의 실패를 평가하며 자유주의를 한 차례 더 혁신한다. 신자유주의는 재산권 자유의 복원, 금융세계화와 위기관리 중심의 국가제도, 자본가 주도의 풍요를 주장했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같은 일관된 이념이 아니다. 자유주의에 저항한 역사적 반작용이었다. 보수주의 시작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유럽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혐오였다. 이들은 왕을 단두대에 세운 프랑스혁명을 지켜보면서 대중의 정념에 대한 엘리트의 통제, 인간 합리성의 불완전성, 종교, 가족 같은 전통적 가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자유주의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시대의 대세였던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같은 변화를 부분적 또는 점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 들어 보수주의는 현대화된 자유주의로 수렴됐다. 약간의 차이는 사회주의를 자유주의보다 혐오했다는 정도였다. 미국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은 “우리 모두는 케인스주의자다”라고 선언했고, 유럽의 보수당들은 사민당, 노동당과 비슷한 복지정책을 이어갔다. 한편, 신보수주의는 케인스주의 실패에 대한 보수주의의 대응이었다. 이들은 케인스주의 수요 경제학을 기업 중심 공급 경제학으로 뒤집었고, 세계 수준의 관리보다는 미국의 일방적 패권을 강조했다.
사회주의는 재산 소유권 중심의 자유를 비판했다. 프랑스혁명에서 부르주아에게 배신당한 민중들이 그 시작이었다. 비판은 마르크스에 이르러 과학적 사회주의로 수렴됐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임금노동제를 철폐하고, 국가를 소멸시켜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양하자고 제안했다. 사적소유와 임금노동은 착취를 재생산하며 잉여노동의 소유와 처분을 배타적으로 자본가 손에 맡긴다. 노동과정에서 자본가에게 구속되는 노동자는 자유를 누릴 수 없으며, 경제적 풍요에서도 배제된다. 계급 지배의 수단인 국가는 자본가의 소유권을 보호하고 노동하는 시민이 피고용인으로서만 시장에 참여하도록 강제한다.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소련의 개혁 프로그램으로 구현됐다.
하지만 소련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은 사적소유와 임노동제를 국가소유 계획경제와 국가 고용제로 변형했을 뿐이었고, 국가의 소멸을 공산당이 독재하는 국가로 뒤집었다. 소련은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에 미달한 혁명이었다. 결국 소련은 20세기 말 체제 경쟁 속에서 붕괴했다.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가 모두 통치 이념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한 21세기에 세계적으로 확대됐다. 포퓰리즘은 사회변화에 대한 과학적, 이념적 내용이 아니라 대중이 느끼는 현재 불만을 특권화한다. 그리고 악마로 설정된 적을 공격해 대중의 불만을 분노로 증폭시키고, 메시아적 영웅을 앞세워 선과 악의 대결에서 승리하겠다고 약속하며 정치적 지지를 얻는다.
그런데 이런 선악의 진영대결에서는 근거가 아니라 대결 자체만 중요해진다. 내로남불로 불리는 도덕적, 정치적 위선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정치의 한 요소로 격상된다. 또한 자기 진영의 정책이 실현 가능한지, 실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검토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책이 실현되지도 않고, 실현되어도 다시 되돌려지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 격인 남미와 남부유럽이 수십 년간 반복해온 바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미국의 트럼프처럼 세계적 수준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2) 한국의 보수주의
현대 정치이념이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쟁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였다. 남한에서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가 38선 분단과 미국의 신탁통치를 두고 갈등했다. 여러 세력이 통일국가의 건설 방법과 신탁통치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다만 이런 갈등은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와 미군정의 반공주의가 정치의 중심에 서도록 만들었다. 민주적 공화정이나 개인의 자유 같은 자유주의적 지향은 설 자리가 좁았다.
우여곡절 속에서 반탁 세력의 승리,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과 이승만 독재를 거쳐 강경 반공 세력이 집권세력으로 형성됐다. 집권세력의 한 축이었던 한민당은 김성수,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이 중심이었다. 식민 당국에 의해 육성된 기술 행정 관료들이 견고한 지지기반이었다. 참여 세력들은 친일 경력이 있거나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강한 반공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하나의 이념적 집단으로서는 함량 미달이었는데, 반공과 권위주의로 무장했을 뿐 현대 이념의 핵심인 경제에 관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로스토우 모델과 한국 보수의 혁신
보수주의가 한국적 형태로 뿌리를 내린 것은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반공주의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경제 철학을 세웠다. 이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같은 조국 근대화 작업으로 표현됐다.
한국적 보수주의에 경제적 내용을 넣어준 것은 『경제성장의 단계: 반공산당 선언』으로 유명했던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경제학과 교수 로스토우(Walt Whitman Rostow)였다. 그는 단지 학자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아시아 대외정책에도 개입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발이론을 ‘한국모델’로 부르며 미국 행정부와 의회를 설득했고,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직접 개입했다. 로스토우는 모든 사회를 전통적 사회, 과도적 사회, 도약의 과정에 있는 사회, 공업화 과정을 통한 성숙사회, 고도의 대량소비 단계에 달한 사회 등 5단계로 구분하고, 과도적 사회와 도약단계의 사회에서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지도력의 원천으로 군부를 지목했다. 군부는 말하자면 선의의 독재자다. 그리고 한국의 선의의 독재자는 바로 박정희였다.
신보수주의적 혁신의 지체
한국 보수세력은 전두환 정부 들어 레이거노믹스로 불린 신보수주의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신보수주의는 신냉전 대외정책과 물가안정, 규제완화, 감세, 노조억압 등의 시장근본주의적 경제개혁이 핵심이었다. 전두환은 집권 시작과 동시에 물가안정을 위한 긴축을 시행했다. 광주학살을 시작으로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다만, 시장근본주의는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는데, 수출재벌들이 1980년대 중반부터 급성장해 구조조정 대신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을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보수세력이 지체된 혁신을 단행한 것은 김영삼의 3당 합당과 집권당의 탈 군부 재편 이후였다. 로스토우 이론에 빗대자면, 군부 권력의 민간 이양을 통해 ‘성숙사회’와 ‘대량소비사회’ 진입로로 들어선 것이었다. 보수세력은 소련 동구권 해체와 미국 금융세계화 전략에 맞춰 반공-발전주의를 세계화와 규제완화로 변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순탄치는 못했다. 남북관계는 김일성 사망, 북한 핵실험 등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악화됐고, 정경유착-관치금융이 지속하는 상태에서 금융세계화를 추진하다 보니 외환위기가 발발했다.
뉴라이트에서 올드라이트 친박으로의 퇴행
노무현 정부 시기 보수는 ‘뉴라이트 운동’이라는 일종의 사상혁신 운동으로 발전했다. 연달은 대선 패배로 인한 위기의식, 한나라당의 무능함에 대한 실망, 2006년 이후 노무현 지지율 급락으로 자신감 회복 등이 보수세력 사이에서 이들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와 건국의 정통성을 정체성으로 삼아, 작은국가 시장경제와 북한 인권 문제를 전략과제로 내세웠다. 이들은 집권세력이 시장경제와 건국의 정통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하며, 집권세력을 낡은 이념과 대중 선동의 포퓰리즘에 몰입하는 수구 좌파로 규정했다. 기존 보수주의에 대해서도 정부 주도 경제개발과 무조건적 반북만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뉴라이트 운동은 한나라당 소장파, 386운동권 일부, 반독재투쟁을 했던 명망가들, 자유주의적 보수세력 변호사, 교수 등이 합류하며 범보수 연합으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뉴라이트 운동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오히려 퇴행을 거듭했다. 두 대통령은 출발부터 박정희의 유산이었다. 이명박이 대표한 극우파 개신교나, 박근혜가 대표한 반공 개발주의는 모두 뉴라이트가 지양하려던 바였다.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 중 하나인 극우 개신교는 노무현 시기 대중 집회를 조직하기 시작해 이명박 시기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등의 경제 정책은 신보수주의적 시장근본주의보다는 1970년대의 정부 주도 개발정책과 더 친화적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통합진보당 공안사건으로 임기를 시작해, 김기춘, 우병우, 황교안 등의 공안 검사들을 4년 내내 정권 중심부에 배치했다. 반공-발전주의를 역사인식-시장근본주의로 혁신해보려던 뉴라이트 운동은 이렇게 좌절됐다. 결국 박근혜 지지자들은 탄핵 이후 태극기 부대라는 해방 직후 극우파를 닮은 운동으로 타락했고, 자유한국당 내 친박은 기득권만 유지하면 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버티는 중이다.
3) 이념적 뿌리가 없는 한국의 개혁
반공 경쟁
더불어민주당의 뿌리는 이승만 진영을 제외한 나머지 반공 세력들이 집결한 1955년 민주당의 신파이다. 민주당은 한민당 일부(민국당)와 흥사단, 서북청년회 같은 서북(평안도) 출신 ‘반공십자군’들이 주축이었다. 보통 전자를 구파, 후자를 신파라고 부르는데, 구파는 김영삼 세력으로, 신파는 김대중 세력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반공주의를 뿌리로 한 민주당 정치는 신파, 구파를 가릴 것 없이 자유주의보다는 반공의 경쟁자로서 역할이 도드라졌다. 민주당 구파 대부인 조병옥과 신파의 대부인 장면은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파동을 거치면서도 범야권연대에 좌우합작 노선을 걸었던 조봉암 참여를 방해했었다. 심지어 민주당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신익희 급사 후 대선후보가 된 진보당의 조봉암을 정권 교체 가능성이 컸음에도 지지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반독재 이상으로 반공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반공을 두고 이승만과 경쟁했다.
현대적 군주를 선호한 민주당의 최후는 친노(친문)
민주당 신파에서 더불어민주당까지 이어지는 세력이 자유주의에 미달함은 이들이 보여준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자유주의는 이념적으로 소유할 자유와 기회의 평등을, 그리고 정치체로서 의회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혁명을 거친 나라들은 대부분이 정치체제로 의회와 정당이 정치의 중심인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방주의적 전통에서 탄생한 미국 대통령제나 반복되는 혁명과 공화국 몰락 속에서 세워진 프랑스 이원집정제 정도가 예외다. 뒤늦게 자유주의 혁명에 동참한 독일이나 일본 역시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우리나라 같은 대통령제는 오랜 독재 경험이 있는 저개발 국가에만 존재한다.
한국은 제헌의회에서 의원내각제가 채택됐지만, 이승만이 이를 뒤집었다. 그 결과 매우 권위적인 대통령을 둔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시작됐다. 이승만 독재에서 집권세력 외부로 밀려난 한민당의 후예 민국당은 1950년 3월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후 1952년 재차 개헌을 추진했으나 또다시 이승만이 무력으로 국회를 제압해 의원내각제를 통과시키지는 못했다. 의원내각제는 1960년 4.19혁명 이후 비로소 이뤄졌다. 당시 의원내각제는 국회에서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는데,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이 의원내각제란 점에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4.19혁명 헌법은 박정희 쿠데타로 단명하고 말았다.
의원내각제는 박정희 이후 한국 정치에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몇 차례의 내각제 개헌 시도는 정치협상의 명분 정도로만 이용됐을 뿐이었다.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시대로도 불리는 1970~1990년대 한국 정치는 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의 요체인 의회, 정당 정치보다 3김 중 누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는지가 더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개헌 협상 과정에서 의원내각제가 쟁점이 됐었다. 제1야당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가 7개 항의 민주화를 전제로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것이 계기였다. 하지만 이 제안은 신민당의 잠재적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에 의해 거부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벌인 개헌협상에서는 5년 단임 직선제 개헌이 도출됐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단순했다. 세 사람이 모두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 대통령 임기는 짧게, 중임은 금지, 선거는 직선으로 하는 것이었다. 1990년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을 추진하며 의원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었다. 대통령제보다 의원내각제가 권력을 분점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 덕분이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내각제합의문’이 언론이 보도된 이후 내각제는 죽어도 안 된다며 버텼고, 의원내각제 개헌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1997년에는 김대중과 김종필이 선거연합 조건으로 의원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애당초 개헌 의지가 없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이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는 당선 이후 미국식 대통령제와 양당제가 대안이라며 약속을 파기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제는 독립국가와 비슷했던 주정부들(states)이 영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결성한 연합(united of states)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국 연방정부의 권한은 주정부가 할 수 없는 것들에 한정되며, 심지어 미국 의회는 어떤 점에서 의원내각제보다도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양당제의 두 축인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념적 뿌리가 탄탄한 정당들로 반공을 두고 경쟁하며 대통령 배출이 최종 목적인 한국의 정당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김대중의 미국식 대통령제 지향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한 알리바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
정치개혁담론은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아예 반(反)정치 개혁론으로 타락했다. 노 대통령의 정치개혁 프로그램은 당정 분리, 지역주의 청산, 권위주의 청산 등이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정 분리는 행정부 성격을 민의의 정치가 아니라 테크노크라트의 경영관리(management)로 규정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는 21세기에 유행한 신자유주의적 반정치 담론이기도 했다. 더구나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청산 같은 정치문화개혁론은 아예 초점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다. 지역주의는 정도의 차이만 있지 세계 모든 나라에 존재한다. 권위주의는 모든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1인자 경쟁을 하는 시스템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문화개혁으로 해결될 것들이 아니었다. 그는 집권 말기에 들어서는 국회와 선거를 더욱 노골적으로 비난했는데, 그 정점은 2007년 개헌안이었다. 그는 대통령 권력을 안정화하고 선거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자면서 대통령 4년중임제와 전국선거 기간 일치를 원포인트 개헌으로 제안했다. 의회 정치를 약화하고 제왕적 대통령제는 강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덕분에 집권한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의 반(反)의회 정치는 더욱 기괴한 형태로 발전했다. 문 대통령은 출신부터가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 국회의원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국회에 적대적인 발언을 당선 이전부터 자주 해왔다. 당선 후에는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전 집권세력이었던 제1야당 정치인들을 척결 대상으로 몰아붙였다. 문 정부 청와대는 여당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내각까지 상대화해, 청와대에서 직접 여론을 수렴했고, 국무회의보다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를 행정부 중심에 세웠다. 심지어 2018년에 제출된 개헌안은 대통령 권한은 그대로 둔 4년 중임제였고, 2019년을 뜨겁게 달군 검찰개혁도 검찰 권한은 줄이고 대통령 권한은 늘리는 방향이었다.
요컨대 민주당 신파,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범(汎)민주당 세력의 지향은 말하자면 일종의 임기가 정해져 있는 현대적 군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의회와 정당을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를 확대하려 했던 자유주의 계보와 다르다. 노무현 시기부터는 ‘노빠’, ‘문빠’로 불리는 극성 지지자 부대를 이용한 여론 정치도 확대됐다. 친노, 친문이라는 정치 팬덤이 정당까지 대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통령에 반대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을 온라인에서 공격하고, 문자 폭탄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지지자들을 이용해 대중의 정념을 극대화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전형이다.
개혁으로 포장한 포퓰리즘 대중운동
오늘날 개혁으로 불리는 정치진영의 또 다른 뿌리는 재야 지식인 그룹이다. 재야의 원조 격인 장준하의 《사상계》는 1950년대 서북파(평안도)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 공보관 지원으로 설립됐다. 당연히 반공 민족주의가 기본 노선이었다. 서북파 지식인들은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입장 변화에 따라 이승만 지지에서 반대로 입장을 바꿨고, 4.19혁명 이후에는 장면에 대해 반공 정책 무능을 근거로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유능한 반공 지도자로 지지를 보냈지만 65년 한일협정 이후 지지를 철회했다. 그런데 이들이 한일협정을 비판한 맥락은 현재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맥락이었다. 미국이 일본에 한국 지원을 떠넘기려 하고 있고, 일본이 북한과도 수교할 의향이 있어 우려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1970년대 사상계의 후예는 반유신 투쟁에 나섰다.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창비)이 재야를 대표했는데, 창비는 강만길의 분단사관을 역사인식으로 받아들여 “근대화된 민족국가 형성으로서 통일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1980년대 이후 ‘비주사 NL’ 또는 개혁세력의 역사인식 토대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재야세력은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결성했고 1987년 김대중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보냈다. 분단사관과 반공 민족주의가 김대중과 친화적이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김대중이 김영삼에 대한 열세를 벗어나기 위해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재야운동의 나머지와 그들의 후배 격인 386운동권들이 시민단체들을 건설했다. <여성운동연합>(여연)은 반성매매 운동, 는 향락문화 추방운동, <소비자시민연대>는 속임수 바겐세일 근절운동, <공해 추방 운동연합>(환경련)은 공해감축운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토지공개념 법률화와 부동산 과세표준 제정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991년에는 <부패척결-정치문화쇄신 참여와 자치 시민연대>가 40여개 시민단체들의 연대로 건설되어 지자체 선거 시민후보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1994년에는 재야와 연계가 있던 변호사들과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권력 감시”를 내건 참여연대를 건설했다. 참여연대는 이후 재벌 감시로 소액주주운동, 사법 감시로 공격적인 공익소송을 진행하면서 시민운동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민주당 신파로부터 이어지는 범민주당 계열 정당과 개혁을 표방한 여러 시민단체는 1990년대 중반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세계적 대세로 만든 금융세계화가 핵심 내용이었다. 물론 한국적 신보수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적 신자유주의도 일관된 내용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재협상을 내걸고 당선된 김대중 정부는 IMF보다 더 강한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참여연대는 IMF가 요구한 주주권 강화를 재벌개혁이라며 시민들에게 소개했다. 반보수로 성장했을 뿐인 이들은 지금도 일관된 경제 노선을 갖추지 못한 채 소득주도성장 같은 반(反)경제학 노선을 실용적으로 가져다 쓰는 실정이다. 단적인 예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총책임자였던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소득주도성장이 강력하게 비판하는 주주권 중심의 경제개혁을 한국에 들여온 당사자였다.
개혁을 내건 시민단체들은 2000년대 대중운동과 결합해 급성장했다. 2000년 ‘총선낙선운동’,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촛불’, 2008년 ‘광우병촛불’, 2014년 ‘세월호참사 진실규명 촛불’,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이 바로 그런 사례들이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이 어떤 분명한 이념적 지향을 가진 것은 아니었는데, 보수세력에 대한 반대를 제외하고는 이 운동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없고, 또한 이 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도 중요한 제도개혁보다 시민단체들의 정치권 진출이었기 때문이다.
4) 소결: 개혁 대 보수가 아니라 보수 대 反보수 포퓰리즘의 대결
한국사회 정치구도는 개혁과 개혁에 반발하는 보수의 대립이 아니다. 개혁으로 불리는 세력은 태생부터 현재까지 뚜렷한 이념이 없었다. 당연히 일관된 개혁 프로그램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보수와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반보수 정도였다.
서유럽에서 시작되어 미국에서 성숙한 현대 정치이념은 자유주의가 시대변화를 선도하는 가운데 보수주의가 이에 반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자유주의라 부를만한 이념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사회주의(북한)에 대한 혐오의 수준 차이로 정치세력이 갈렸다. 한국에서 개혁이라 불리는 진영은 실은 1950~90년대 집권에 참여하지 못한 반공 진영에 불과했다.
이들은 보수와는 반공주의를 공유하지만, 이념이나 정책적 일관성은 보수보다 약하다. 개혁으로 불리는 진영의 특징은 자유주의보다는 포퓰리즘이다. 미국도 놀랄 정도였던 김대중의 IMF-플러스 구조조정 프로그램, 좌파 신자유주의로 불린 노무현의 정책개혁, 야당과 시민단체의 이명박, 박근혜를 상대한 촛불집회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수많은 공정 정책들에서 어떤 과학적, 이념적 일관성을 찾아낼 수 없다. 대중의 분노와 뒤죽박죽 대안, 그리고 대중의 실망과 분노를 반복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 정치의 특징이며, 이것이 개혁으로 불리는 반보수 진영의 역사다.
3. 21대 총선, 반보수는 차악(次惡)보단 최악(最惡)이다
2020년 21대 총선은 문재인 집권 전반기에 대한 평가가 핵심이다. 강력한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총선 역시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큰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21대 총선은 대통령 임기가 후반기로 진입하는 시점에 열려 더더욱 그런 성격이 강하다.
좀 더 장기 시야에서 21대 총선의 관전 포인트는 촛불연합으로 불린 현 집권세력의 향방이 될 것이다. 세상을 다 가질 것처럼 기세가 높았던 2004년 열린우리당은 권력의 정점에서 곧바로 ‘폐족’의 길로 들어섰다. 과연 촛불연합은 이전과 다를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지가 관전 포인트다.
1) 대통령 지지율과 야권리더십
역대 총선에서는 대통령 지지율과 야당 지도자에 대한 선호도가 핵심 변수였다. 강력한 대통령제 아래에서 총선은 현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의 대결일 수밖에 없다.
역대 총선 결과
김영삼 정부 4년 차에 실시된 15대 총선(1996년)에서는 대통령 지지율 40%에, 여당인 신한국당 지지율이 35%였고, 김대중 정부 3년 차였던 16대 총선(2000년)에서는 대통령 40%, 새천년민주당이 36%였다. 대통령 지지율과 여당 득표율이 비슷했었다. 노무현 정부 2년 차였던 17대 총선(2004년)에서는 노무현 탄핵소추 광풍으로 야당 몰락이 점쳐졌으나, 노무현에 대한 낮은 지지율과 박근혜 야당 대표의 높은 호감도가 맞물려 열린우리당이 가까스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었다.
이명박 집권 1년 차였던 18대 총선(2008년)은 광우병 촛불 여파로 대통령 지지율이 20%대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친노 폐족”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열린우리당이 지지를 잃었고, 박근혜가 잠재적 차기 대권 주자로 있었던 한나라당이 38% 지지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다. 이명박 집권 5년 차에 열린 19대 총선(2012년)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이 최악이었으나, 야당이 대권 후보 난립으로 호감을 얻지 못해 역으로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 박근혜가 있었던 여당(새누리당)이 43%로 과반 의석을 연달아 획득했다. 박근혜 4년 차였던 20대 총선(2016년)에서는 박근혜 지지율이 30%대로 하락한 가운데 실시됐는데, 야당들이 “무능 야당 심판론”과 분열로 지지부진하다 총선 직전 터진 여당의 “친박진박 논란”으로 어부지리를 얻어 가까스로 여소야대를 만들어냈었다.
문재인 정부 집권 3년 차에 열리는 21대 총선은 대통령 지지율이 40~50% 사이에 존재하는 가운데, 자유한국당이 역대급 비호감으로 찍혀 있는 상황이다. 다른 큰 변수가 없으면 20대 총선의 “무능야당 심판”, 야당 분열이란 흐름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리더십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못한 황교안 당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는 19대 총선의 통합민주당 손학규, 박상천 공동대표만큼이나 무기력한 리더십으로 평가받는다.
보수는 또 자멸(自滅)할 것인가? 통합할 수는 있나?
다만, 역대 총선에서 범민주당 계열 정당들이 보수의 자멸적 행태 없이는 성공적 결과를 얻은 적이 없었다는 점 또한 따져봐야 한다. 개혁세력으로 불리는 민주당 진영은 내용적으로 반보수 이상의 내용을 갖춘 적이 없었다. 앞서 본 역대 선거 결과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노무현 말기만큼이나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낮았던 19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이 혁신을 단행했고, 야당들이 지리멸렬 흩어졌다. 박근혜 임기 말기 20대 총선에서는 보수 집권당이 막판에 막장 드라마 같은 공천 파동으로 자멸했음에도 더불어민주당은 새누리당보다도 지지율이 낮았다. 안철수 신당이 없었다면 여소야대 상황도 만들지 못할 뻔했다.
야당의 분열이 어떻게 정리되는지도 총선에 중요한 변수다. 대통령이라는 수장이 있는 여당과 달리 야당의 경우 종종 차기 대권 후보가 난립할 경우 분열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총선은 여당에게 좀 더 유리했다.
18대 총선에서는 선거 직전까지 집권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붕괴하면서,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탈당파, 열린우리당 탈당파 등이 난잡하게 분열했다. 선거 직전 통합민주당으로 합당을 했지만 분열로 인한 상처가 워낙 큰 탓에 범보수 정당들이 218석을 얻는 큰 승리를 거뒀다. 20대 총선에서는 안철수 국민의당이 등장해 야권이 분열됐고, 여당의 자중지란 속에서도 야권이 생각보다 성과가 적었다.
21대 총선 쟁점은 박근혜 탄핵 이후 사분오열된 보수 진영의 통합 여부다.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탄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의원들이 바른미래당을 창당했지만, 바른미래당 일부가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고, 남은 의원들이 또다시 분열해 손학규 당권파와 유승민을 중심으로 한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으로 나뉘었다. 친박 중 강경 박근혜 지지자들은 우리공화당을 일찌감치 창당했다. 자유한국당은 의원 수와 조직 규모로 보수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중도층에게 비호감 이미지로 찍혀 있는 탓에 보수통합을 통해 혁신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절박하다.
현재 상태로 보면 선거 직전에 가서야 수도권 중심으로 일부 보수통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완전한 보수통합은 압도적 우위에 있는 차기 대권 주자가 없어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철회된 영남지역에서는 보수 난립 속에서도 당선이 가능한 자유한국당이 기득권을 내놓을 이유가 더욱 없다. 18대 총선을 보면, 한나라당만이 아니라 이회창이 창당한 자유선진당, 박근혜 지지파가 축출되어 만든 친박연대가 충청과 경북에서 20석을 획득했었다. 이만큼은 아니겠지만 영남 지역에서는 특정 보수 정당의 압도적 우위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보수 정당 사이에서 협상이 어렵다.
보수의 이런 분열은 이명박, 박근혜를 거치며 뉴라이트 운동이 퇴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두 정권은 뉴라이트 운동을 발전시키는 대신 오히려 과거로 퇴행했다. 그리고 전직 두 대통령이 파멸하자, 보수를 뭉치게 할 이념의 부재가 전면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한국 보수에는 로스토우 이후가 없다. 분열은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공천 물갈이라는 꼼수
공천 물갈이도 변수다.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이명박계가 박근혜계와 이회창계를 과거 세력으로 규정해 공천에서 배제했다. 이런 공천 물갈이는 수도권에서 나름 신선하게 받아들여져 선거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통합민주당의 경우 역으로 보수정당에서 온 손학규와 과거 호남 인사들의 복귀로 구태의연함의 극치를 보여주며 수도권에서도 전멸했다. 20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친박계가 기득권을 지키려고 소수파를 쳐내다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9년 11월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인 자유한국당도 외부인사 영입, 20~30% 현직 의원 물갈이 식으로 공천혁신 분위기를 띄우는 중이다. 정책이나 지향에 혁신이 없다 보니 공천 물갈이 식으로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인적 청산 중심으로 지지율이 변동하는 것은 21세기 정치의 특징 중 하나다. 전통적 이념들이 혁신되지 못하다 보니 그렇다. 현직 의원과 현직 대통령이 항상 문제의 원인이 되는 ‘현직의 위기’가 반복된다.
2) 경제사정과 대외관계
경제 사정도 총선에 영향을 미친다. 경제실정은 야당이 집권여당을 비판하는 중요한 레퍼토리다. 하지만 총선 전 경제사정과 선거결과는 의외로 상관관계가 크지는 않다.
17대 총선의 경우 전년도 경제실적이 안 좋았음에도 탄핵 소동에 힘입어 여당이 승리했고, 18대 총선의 경우 세계경제침체로 경제가 빠르기 하강하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집권여당이 의석 과반을 획득했다. 19대 총선에서도 2010~2011년 경기반등 효과가 끝나고 성장률이 곤두박질치던 상황이었으나 박근혜가 이끈 집권여당이 승리했다. 20대 총선은 정부의 과감한 경기부양 효과로 경제성장이 그럭저럭 괜찮았고 집권여당의 지지율이 총선 직전 개헌의석 확보선까지 올라갔지만, 결과적으로 여당이 과반의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경제실적이 생각만큼 강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보수나 반보수나 뚜렷한 경제 노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스토우 반공-발전주의로 이념적 완결성을 그럭저럭 갖췄었던 보수는 신보수주의적 혁신에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노선이 애당초 없었던 반보수는 뒤늦게 신자유주의를 수입하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보수세력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뒤죽박죽으로 가져다 썼을 뿐이었다. 경제실적으로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도덕적 비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경제 이슈는 결과적으로 총선에서 다른 이슈에 밀린다.
한편, 2020년 총선을 앞둔 2019년 경제실적은 매우 나쁘다. 실질 국민소득 증가율을 보면, 2018년 4분기는 0%, 2019년 1분기는 –0.3%, 2분기는 0.2%, 3분기는 0.1%였다. 역대 총선 전 4분기 합계 성장률 중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낮은 수치다. 더군다나 정부가 추진한 소득주도성장론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3년 내내 논란이 많았다. 소득주도성장론은 반보수 집권세력이 사상 최초로 경제이론을 내세워 추진한 정책이었다. 그만큼 좋지 않은 경제실적에 대해 평가를 받을 여지가 이전보다 많아졌다.
진퇴양난에 빠진 대외관계
문재인 정부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남북관계 개선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가장 큰 곤란은 북한 김정은이 세습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 핵무기를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문 정부가 남북관계에 대해 가지는 환상은 둘 중 하나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제 버릴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거나, 아니면 미국이 적당히 북한 핵무기를 용납하고 관계 정상화 수순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낙관하고 있었거나.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바는 둘 다 말 그대로 주관적 환상이었을 뿐이다.
북한이 북미협상 시한을 2019년 말까지로 못 박은 상태라 총선을 앞두고 북한의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같은 극단적 행동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남북관계 경색은 물론이거니와 트럼프의 2017년 ‘분노와 화염’ 같은 일촉즉발의 군사갈등이 재현될 수 있다. 정부와 여당이 총선을 앞두고 출구를 찾아야 하는데 적당한 선택지가 없다.
북미관계가 악화될 경우 보수세력이 최근 주장하고 있는 남한 핵무장론도 힘을 받게 될 공산이 크다. 미국 핵무기를 공유하는 전략은 이미 미국 국방부에서도 거론되고 있는 사안이라 상황에 따라서는 급속하게 탄력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핵공유 전략은 실은 북한 이상으로 중국을 자극하는 것이다. 사드 배치 이상의 중국 측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중국이 핵전력의 현대화를 추구하고, 북한이 지속해서 핵능력을 확장할 때, 일본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이 경우 일본 역시 핵무장 대열에 빠르게 합류할 것이다.
또 다른 화약고인 한일관계는 청와대와 여당이 의도적으로 총선 때까지 내버려 둘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협상도 깬 상태라 법적 배상이 아닌 도덕적 보상 형태로 갈등을 연착륙시킬 수 없다. 자신들이 일으킨 반일 민족주의 운동에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4월 총선에서 어느 한쪽이 압승을 거두지 않는 한 한일관계 조정은 불가능하다. 여당 승리 시 연착륙을 도모할 근거가, 야당 승리 시 수습을 해야 하는 근거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한쪽의 압승이 불가능하다. 이 경우 반일을 앞세운 민족주의 운동도 총선 이후 친일파 척결 식의 반보수만 외칠 수 없을 텐데, 이들이 어디로 튈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한반도가 자칫 20세기 초 발칸반도와 비슷한 꼴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가운데 자충수로 일관한 집권세력이 총선에서 대안을 내놓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집권여당의 총선 승리는 역설적으로 대안 없는 한반도의 상태를 더욱 늪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3) 공정성과 세대 갈등
조국 사태를 계기로 공정성 문제가 사회 이슈로 부각됐다. 공정을 국정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현 정부라 그 갈등이 더욱 첨예하다.
문 정부의 공정은 존 롤스의 공정(fairness) 이론을 차용한 것이다. 롤스의 공정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추론한다. 이런 논리의 결론은 기회의 균등과 상이(相異)의 원칙이 공정이란 것이다. 전자는 잘 알려진 자유주의 원칙이다. 후자는 기회가 균등해도 개인 간 능력 격차로 인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이를 보정하자는 것이다. 공동체 관점에서 가장 하위의 계층이 혜택을 보는 것이 상이 원칙에 적합한 공정의 결과여야 한다. 정부 정책으로 말하자면, 공정거래가 기회의 균등이고, 최저임금 인상이 상이의 원칙인 셈이다.
하지만 롤스가 말하는 무지의 베일은 인간관계를 제약하는 구조를 무시한다. 그 결과 구조의 반작용으로 공정이 실행 불가능해지거나 불공정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최저임금 인상이 시장의 반작용으로 인해 고용 위기로 반전되는 것이 대표적 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시장 내 경쟁력 격차를 반영한 거래를 불공정거래로 규정할 때, 공정거래 정책이 역으로 불공정한 거래를 키운다는 것 역시 그런 예라 할 것이다.
청년세대가 제기하는 공정성은 기회의 균등이란 외양을 가지지만 실은 결과에 대한 불만족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롤스 식으로 말하자면, 무지의 베일 속 선택은 구조의 반작용으로 인해 결과의 불만족으로 드러날 수 있다. 공정이 해결할 수 없는 구조는 특히 저성장-고령화이다. 성장의 혜택은 기성세대가 누리고, 저성장의 비용은 후세대가 지불하는 구조를 공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세대 간 분배를 고려하지 않고 공정을 이야기할 경우 줄어드는 기회를 두고 기회 배분의 공정함을 다투는 결과다. 어떤 배분을 하더라도 결국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은 증가하고, 청년 세대의 불만족도 증가한다.
총선에서는 입시정책이나, 청년일자리 정도로 공정성과 세대 문제를 다룰 것으로 예상된다. 정당들이 청년 국회의원 후보 숫자로 청년 대표성을 높이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실제 세대와 공정성 문제를 다루려면 국민연금, 연공급 임금체계, 정년, 퇴직 후 소득보장, 부동산 자산 등에 대해 전반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이는 ‘무지의 베일’에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저성장-고령화를 “지식의 광장”에서 논의해야 해결될 문제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갈등을 동반한다. 어느 한쪽이 정당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과 분배에 관한 ‘세대 간 회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反)경제학의 여당이 풀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총선 전후 세대 갈등과 여당에 대한 청년층 지지가 더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
4) 정치개혁
검찰개혁 법안이 20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을 경우 검찰개혁이 핫이슈로 총선에 등장할 것이다. 보수/반보수 대결을 검찰개혁 여부로 나누는 것은 여당이 선호하는 바다.
하지만 검찰 개혁은 방향부터 틀렸다. 권력형 비리와 부패 사건에 검찰이 자주 엮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검찰은 사태의 원인보다는 증상에 가깝다. 박근혜 정부도 검찰이 ‘정치’를 한 것보다 대통령이 아무런 견제 없이 검찰을 정치에 사용했기 때문에 사달이 난 것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때도 비슷했다. 대통령이 검찰과 불화를 겪었던 것은 노무현 정부 말기 때의 특수한 사례다. 비극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도 현직 대통령이 전직을 수사했던 악습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검찰개혁의 큰 줄기는 검찰의 권한을 줄이는 것이다. 검찰이 독점한 수사권을 경찰과 조정하고, 고위공직자 비리는 아예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로 넘긴다. 하지만 이런 검찰개혁이 얼마나 범죄 수사와 기소를 공정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검찰의 축소된 권한이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인 공수처는 법무부 산하 기관인 검찰보다도 대통령과 훨씬 밀접한 관계에서 일한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검찰총장도 임명하고 공수처장도 임명하면서 이전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검찰개혁 탓에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은 상대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한국이 저성장 고령화로 대표되는 일본화를 피할 수 없다면, 한국정치의 중요한 요소는 정책적 합리성과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위기를 잘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인사권과 예산권을 독점한 대통령제를 현 상태로 두는 것은 위험하다. 대통령 개인 능력에 민족사의 미래를 맡기는 꼴이니 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결합은 한국정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내각제와 다당제의 조합’은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표출하고 조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대통령제와 다당제 조합은 야당을 ‘들러리’로 만들고 대통령 권력을 더욱 키운다.
요컨대 20대 국회 막바지에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3법은 개혁법이 아니라 실은 대통령제를 강화하는 퇴행적 법이며, 이것으로 개혁 몰이를 하는 여당과 시민단체들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5) 소결: 새로운 것의 부재로 낡은 것이 지속할 21대 총선
2020년 총선 전후 정치정세는 혁신에 실패한 양 세력이 가짜 쟁점을 두고 다투는 형국이다. 집권세력 대부분의 정책이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가운데, 이들은 ‘내로남불’로 책임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조선말에 버금갈 정도로 국제정세를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저성장-고령화 시대에 필요한 일들을 말장난으로 무력화시키고 있고, 제왕적 대통령제만 강화하는 것을 권력기관 개혁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따라서 반보수 진영이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은 한국사회를 더욱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4. 결론: 개혁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개혁세력이 지지한 ‘촛불개혁’은 포퓰리즘 정치의 특징들을 그대로 공유한다. 상대를 악으로 몰아 절멸시키겠다는 적폐청산, 지지자들을 만족시키지만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소득주도성장론, 제도 변화를 위한 국회정치를 상대화하고 대통령과 386정치인들을 적폐청산 영웅으로 만들어 낸 청와대 ‘쇼통’ 정치 등등. 이것들은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포퓰리즘 정치의 특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포퓰리즘 정치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대중의 정치에 대한 환멸을 키워 정치의 토대를 스스로 허물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는 고유의 비합리성으로 인해 경제적 불안정성을 관리하지도 못한다.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같은 전통적인 정치이념들에 비해 포퓰리즘이 퇴행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이런 정치적 불안정성 때문에 총선 전후 다양한 제3세력이 등장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예로 중앙일보나 조선일보는 직간접적으로 친노-친박 양강 구도를 깨는 보수중도의 세력화를 주문한다. 중앙일보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같은 한국판 앙마르슈를 제안했다. 조선일보는 한국당의 표창장 행사를 비난하면서 차라리 당을 해산하라고 사설을 썼다. 생각해보면 박근혜 게이트 때부터 두 언론은 줄기차게 친박의 해산과 중도보수 신당 창당에 힘을 실었다. 현재 친노(친문)와 친박은 서초동과 광화문 집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합리성과 보편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민주노총과 시민단체들은 다시 반보수 전선을 만들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은 지난 2019년 10월 28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 3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정부에게 촛불의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는데, 이들이 말하는 초심은 “수구 적폐세력이 남겨놓은 반민주·반민생·반평화 적폐들을 일소”하고,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촛불 초심이 실현되지 못한 원인을 “자유한국당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촛불 민의를 수용하여 그 죗값을 치르는 대신, 국회 의석을 방패삼아 촛불 민의의 실현을 가로막기에 여념”이 없었고, “학연과 지연, 기득권 의식으로 똘똘 뭉친 법관, 검사들의 저항이 방치되고” 있었던 것에서 찾았다. 문재인 정부 탓은 아니라는 거다.
민주노총을 위시한 시민단체들은 촛불이 가졌던 근본적 한계를 평가하는 대신, 총선을 앞두고 다시금 ‘개혁/보수’의 낡은 전선을 세우려는 전형적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문제는 “적폐청산! 촛불대개혁!”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추진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구한말 망국사로 되돌아가려는 반(反)보수 정치운동
한국 정치구도는 보수와 반보수라는 기형적 구도가 고착화되어 있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라는 현대의 이념들은 해방과 분단이란 한반도 정세 속에서 뒤틀리고 왜곡되어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더욱 문제는 이마저도 혁신이 지체된 채 과거로 퇴행하거나, 포퓰리즘으로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 집권세력은 반경제학, 민족주의, 주관적 국제정세 판단으로 민족사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 사이에 노동자의 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 다음 세대의 자리도 없다.
21대 총선에서는 현재와 같은 여야 보합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경제사정은 여권에 불리하나, 야권의 지리멸렬한 분열과 쇄신 실패가 여권의 약점을 보완해줄 것으로 예상된다.
총선 쟁점은 그야말로 한국사회의 미래와 연관된 위험한 것들이나, 이전투구와 가짜 논쟁 속에서 오히려 쟁점 자체가 희석될 가능성이 있다. 집권여당의 대북정책은 실현불가능하고, 야당의 핵무장론은 위험하다. 세대론과 결합한 공정론은 저성장-고령화 속에 세대 회계 쟁점을 무시한 탁상공론과 이미지 정치로 엉망이 될 것이다. 검찰개혁,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더욱 강화하는데, 이것이 마치 권력개혁인 것처럼 등장해 정치개혁론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개혁으로 불리는 반보수는 포퓰리즘 고유의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몰락할 것이다. 21대 총선이 그들이 정점에서 바닥으로 향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반보수가 문재인 집권 2년 반 간 해놓은 일들은 수습불가 상태다. 총선에서 이들이 망하지는 않겠지만, 뭔가를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하지도 못할 것이다. 민주당과 재야로 나뉘어 반백년을 이어져온 반보수 세력이 문재인 정부에 들어 합쳐졌다. 총선은 이들의 공동집권 전반기에 대한 평가이며, 후반기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혁신에 성공하긴 어렵다. 자신들의 낙후성을 촛불혁명이란 이벤트에 숨기고, 문제점을 보수 탓으로 돌리는 작태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현 상황은 여러 점에서 조선 말기와 비슷하다. 일본이 자유주의 혁신에 나설 때 권력투쟁에만 매몰했던 조선 말 지식인들의 상황이 보수, 반보수 진영의 지도자들 모습과 흡사하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부여잡고 개혁하지 못하는 현 정권은 고종의 대한제국 프로젝트를 반복하는 것이다. 반보수 진영의 반일 민족주의와 대북정책은 현대적 이념이 아니라 종교와 민족주의 감성에 호소한 동학농민운동과 주변정세를 주관적으로 보면서 러시아, 청국, 일본 사이에서 오락가락 한 흥선대원군, 민비의 외교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한 세기 전에도 그랬지만, 현재도 이런 정치 운동은 망국을 앞당긴다.
노동자운동은 하루빨리 이들과 결별해야 한다. 민주노총 현 집행부는 대놓고 친정부 행보를 2년 넘게 이어왔고, 노동조합들은 오랫동안 개혁세력의 일원으로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들에 끌려다녔다. 진보정당운동의 유산 중 하나인 정의당은 현재 민주당 2중대라는 평가를 받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동자운동이 집권세력과 함께 몰락할까 우려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