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어느 페미니즘인가? ②

수잔 왓킨스 | 뉴레프트리뷰 편집장

* 번역: 김진영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4. 세계적 확장

 

미국의 페미니즘적 지도력이 ‘여성의 권리’를 세계적 의제화했다는 신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초기의 추동력은 소비에트 블록과 비동맹 노선을 표방한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왔다. 1970년대 초반 미국 정부는 인도차이나에서의 군사적 패배 [예컨대 베트남 전쟁]과 씨름해야 했고, 여기에 미국 내에서의 경기침체와 정치 위기가 더해졌다. 반면 아프리카와 아랍의 좌파 국가들은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잘 나가고 있었고, 석유 달러의 유입에 들떠 있었다. 1974년 ‘77그룹’(G-77)은 1국가 1표제의 국제연합 총회에서 새로운 다수파로 부상하여, 「신국제경제질서(NIEO)를 위한 선언」을 통과시켰다. [77그룹은 1964년 한국을 포함하여 유엔 내 77개 개발도상국의 연합체로 출범했다.] 이 선언에 따른다면 개발도상국은 다국적기업이 자국 영토 내에서 벌이는 활동을 규제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국적기업 자산의 국유화도 포함되는데, 국유화에 대한 보상은 국유화를 실시한 국가의 국내법에 따라 실시된다. 당연히 미국은 절대 반대했지만, 소비에트 블록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데탕트(긴장 완화) 의제에 대한 77그룹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신국제경제질서를 지지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5년, 유엔 총회는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여성국제민주동맹(WIDF)이 제안한 국제 ‘여성의 해’를 지지했다. 여성의 해는 멕시코시티에서 열릴 ‘세계여성대회’에서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인데, 대회의 목적은, 새롭게 부상하는 경제질서에 여성을 완전히 통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미 국무부의 시각에서 보면 1970년대의 유엔총회는 외교적 전쟁터였고, 그 전쟁터에서 성공이란 피해의 최소화라는 관점에서 측정되었다. 미 국무부 관료는 당연한 것처럼 멕시코시티 대회 준비에 참여했으나, 세계적 젠더 정치에 있어 미국 정부의 우선적 관심사는 여전히 인구통제였다. 미국은 1974년 가족계획에 대한 유엔 회합에 예산 300만 달러를 할당했지만, 1975년 여성대회에는 35만 달러를 지출했다. 멕시코시티 대회는 두 개의 회합을 주최했는데, 두 회합은 미래에 나타날 패턴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공식적인 유엔 정부 간 회의(IGC)였다. 정부 간 회의의 특징은 그런 행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허풍과 가식이었다. 외무부 관료가 정부 간 회의의 대표단을 선택했고, 자국의 ‘여성 주인공’을 진열하고자 했다. 또 하나는 이와 병행하여 열린 문화 포럼이었다. 포럼은 영화 상영, 무용, (테레사 수녀가 주도한) 기도회, 패널 토론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되었고, 6천 명의 참석자를 모았다. 이곳의 분위기는 공식회의보다 좀 더 급진적이었다. 미국 여성운동이 최대 규모의 해외 대표단을 보냈지만, 다른 아메리카 대륙 국가에서도 많은 이들이 참가했다. 당시 멕시코는 더 남쪽에 있는 [즉 중남미] 독재정권으로부터 피신한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가장 두각을 드러낸 연사는 볼리비아 원주민 여성, 도미틸라 바리오스였다. 그녀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이 시위를 벌이던 광부 가족을 학살할 때 살아남았지만, 투옥과 고문, 그에 따른 유산을 겪었다.

 

집회에서 발언 중인 도미틸라 바리오스. 바리오스는 볼리비아의 노동운동 지도자이자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자다. 1964년, 레네 바리엔토스 장군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산노동자 임금 삭감을 강요했을 때, 바리오스는 광산에서 일하고자 하는 여성들과 실업자위원회를 조직하여 싸웠다. 2012년, 그녀가 사망하자 볼리비아 정부는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공식 총회에서는 두 종류의 핵심 문서, 즉 선언적인 권리조약인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과, ‘행동계획’이 채택되었다. 협약과 행동계획 모두 법적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관들은 ‘누적적인 입안, 선택적 적용’이란 접근법을 취했고, 세 블록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즉 77그룹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통한 여성의 해방 프로젝트’, 코메콘이 강조한 ‘평화’, 미국이 내세운 ‘반차별’이 모두 반영되었다. 그 결과물은 약 33페이지에 달하는 구구절절하고 동어반복적인 문서였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로 고통받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여성과 이스라엘의 점령에 처한 팔레스타인 여성에 대해 지지를 요청하며 미국의 외교정책에 저항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미국은 예상대로 반대표를 던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멕시코 행동계획은 신국제경제질서가 제시한 노선에 따라 [‘국제 여성의 해’를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여성과 개발을 위한 국제 10개년’(여성 10개년)을 촉구하며, 보건, 교육, 보육 제공에 초점을 맞췄다. 각국은 이러한 분야에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독할 부서를 설립하고 후속 회의에 진행 상황을 보고할 것이다. 후속 회의는 덴마크 코펜하겐(1980), 케냐 나이로비(1985), 중국 베이징(1995)에서 열릴 것이다. 세계적인 페미니즘 연구 조직체의 뼈대가 세워져 가동될 준비에 들어갔다. 곧 자료수집 센터인 <유엔 여성의 발전을 위한 국제조사와 훈련기관>(INSTRAW)와 자발적 기금인 <유니펨>(유엔 여성발전기금, Unifem)으로, 양자는 뉴욕 유엔본부에 설치되었다. 유엔 직원들은 세계적 연구 프로젝트의 구성요소를 확립하기 위해 여성 이슈에 관한 ‘전문가’ 세미나를 소집했다. 국제노동기구(ILO)나 식량농업기구(FAO)와 같은 유엔 부속 기구도 독자적 연구계획을 세웠다. 미국이 글로벌 페미니즘으로 전환한 것은 멕시코시티 회의로부터 4년 뒤인 1979년이었다. 카터 행정부의 국무장관은 미국 외교관에게 보낸 여섯 문단짜리 전문을 통해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목표는 전 세계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몇 개월 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중앙은행] 의장 폴 볼커가 이자율을 끌어올리면서 세계화된 신자유주의가 공식적으로 도래했다. 1980년대 제3세계 부채 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막이 올랐고, 이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남반구 경제를 개편할 것이었다.

 

백화제방

 

유엔의 ‘여성 10개년’이 개시되자, 비공식 포럼들이 자신의 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부상한 대안 세계화 지향의 세계사회포럼처럼, 규모가 크고 활기가 넘치는 페미니스트 회합이 열렸다. 이러한 회합은 조직적 무질서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뜨거운 국제적 토론을 보여주었고 지속적인 우호 관계와 연락망을 형성하도록 촉진했다. 8,000명의 여성이 1980년 코펜하겐 대회에 참가했다. 1985년에는 13,000명 이상이 나이로비 대학 공원에 모였는데, 대다수는 아프리카 공식 여성단체에서 왔다. 10년 후, 약 40,000명이 베이징 외곽 화이로우에 위치한, 반쯤 지어진 회의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였다. 이러한 회합은 1970년대 후반, 1980년대에 걸쳐 세계적으로 분출한 저항적 여성운동을 촉진하는 데 분명히도 기여했다.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저항적 여성운동은 그 형태와 강조점이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인도에서는 '비상사태' 시대[ 인디라 간디 수상이 일방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1975년 6월 25일부터 1977년 3월 21일까지]가 끝난 후 페미니스트 행동주의가 번창했고, 다양한 사업들, 예를 들어 캠페인, 거리공연 그룹, 잡지, 주 차원과 전국 차원의 회합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에서는 독재에 맞서 지역 여성 그룹들이 조직되었다. 페미니즘적 경향이 학생운동 그룹과 좌파 정당들에서 뚜렷해졌다. 1980년대에 걸쳐, 라틴아메리카 범지역 차원의 '페미니스트 회합'(encuentros feministas)은 섹슈얼리티와 인종, 계급에 대한 열정적인 논쟁의 장이 되었다. 중국의 경우, 1980년대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소요에 페미니스트적 경향이 포함되었다. 또한 <중화전국부녀연합회>를 탈관료화하자는 논의도 존재했는데, 그 조직은 문화혁명기에 ‘부르주아적 편향’이라고 밀려났으나,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이 소생시켰다. 심지어 일본의 경우 혁명적 학생운동과 예술운동에서 성장한 이전의 여성해방 운동이 좌절을 겪었지만, UN의 여성 10개년에 자극을 받아 페미니스트의 시위가 열렸다. 이러한 자율적 운동은 UN 대회를 위해 ‘여성의 진보’를 감시하기 위해 설립된 공식 조직을 종종 통렬하게 비판했다. 인도 페미니스트는 인도 국가여성위원회가 엘리트주의적이고 관료적이며, [정부가 교체되더라도 여전히] 정부의 수중에 있는 노리개라고 비판했다. 네팔에서는 아이쉬와라 왕비가 자신을 <여성서비스조정위원회>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지역 페미니스트의 비판에 따르면, 위원회의 임무는 왕비를 미화하고 외국 NGO 기금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케냐의 경우, 여성국에 등록된 그룹의 수가 10년 동안 6배로 늘어났는데, 이는 남성이 정부 보조금을 얻기 위해 자기 부인을 내세워 위장 단체를 설립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화적으로, 국제적인 페미니즘의 영향력은 대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흘러 들어갔지만,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문화는] 각색되거나, 자의적으로 활용되거나, 때로는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이 삭제되었다. 미국 여성해방의 고전, 『우리의 몸, 우리 자신들』 (Our Bodies, Ourselves, 1970)은 1980년대에 전 세계에 소개되었고, 20세기 말까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판본에서 여성에 대한 의료산업의 행태를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빠졌고, 자가 건강진단과 자위행위에 대한 장도 마찬가지였다.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은 출판사, <페미니스트 프레스>(Feminist Press)는 그 반대 방향으로, 두 가지 아주 야심 찬 문헌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바로 인도와 아프리카 여성들의 ‘소실된’ 저술을 발굴하고 번역하여 여러 권의 책으로 펴내는 프로젝트와, ‘저항하는 뮤즈’ 시리즈란 이름으로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라망어, 히브리어, 베트남어 페미니스트 시집을 내는 프로젝트였다.

 

여성의 얼굴을 한 구조조정

 

[1981년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도 미국 정부의 ‘친페미니스트’ 외교정책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대통령의 딸 모린 레이건은 1985년 나이로비 유엔 여성대회에 참가하는 미국 외교팀을 이끌었다. 이때부터 국제적 조류가 미국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흘렀다. 제3세계 부채 위기는 다수의 G-77 국가가 무릎을 꿇게 했다. [소련] 크렘린에서는 유화정책을 지향하는 셰바르드나제가 그로미코로부터 [외무상 자리를] 인계받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부는 피신 중이었다. 유엔 ‘여성 10개년’의 정점에서, 레이건 행정부는 마침내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외교적 성과를 달성했다. 1975~1985년 동안 열린 3번의 여성대회에서 승인된 행동계획에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넓은 의미의 연속성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로비 대회의 ‘미래지향적 전략’은 [G-77, 소비에트 블록, 미국이라는] 세 블록이 제출한 테마의 순서가 조용히 역전되었다. 즉 이제 반차별 정책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놓이고, 개발과 평화는 그다음이 되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유엔의 장황하고 공허한 희망 사항으로 가득 찬 늪 속에서, 얼마 안 되는, 실제로 실현 가능한 조치는 빈틈없는 계획이 두드러졌고, 모두 신자유주의적 반차별 교본에서 유래했다. ‘신용대출에 대한 여성의 접근권 강화’, ‘여성의 직종 간 이동성 증진’, ‘모두를 위한 신축적 노동시간’이 바로 그러한 조치였다.

여기까지는 아직 '여성의 진보'와 신자유주의적 정책 처방이 정면충돌할 것처럼 보였다. 제3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유엔의 여성 10개년 동안 급격히 악화하였다. 볼커 의장이 시행한 미국 연준의 20% 이자율은 국제자본을 미국으로 다시 끌어들였고, 세계적인 불황을 심화시키고 달러 표시 제3세계 부채의 비용을 증가시켰다. 1980년대 후반까지 아프리카의 수출소득의 25%, 라틴아메리카의 수출소득의 40%가 서구 은행에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실질임금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에서 30% 이상 하락했다. 부채 위기와, 그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둘 다 매우 젠더 차별적 결과들을 불러와, 1970년대의 취약한 성취마저 쓸어내 버렸다.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 하위직에 고용된 여성이 제일 먼저 해고되었다. 연료와 식품 보조금의 삭감은, 제3세계 여성이 기본적인 의식주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음식 준비와 보살핌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IMF의 ‘개혁’ 아래서 여성의 소득이 하락하고, 건강과 영양 상태가 악화하고, 문화적 종속은 더 고착되었다. 따라서 글로벌 페미니즘의 새로운 시스템은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여성이 처한 조건의 악화라는 현실 위에서 구성되는 중이었다.

 

1985년 유엔 대회에 여성의 진보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과제를 맡은 페미니스트 개발경제학자들은 보고서 제출 대신에 IMF와 세계은행이 행한 구조조정이 낳은 결과를 맹렬히 비판했다. DAWN 그룹은 나이로비 대회에서 열린 워크숍과 팸플릿 『개발, 위기, 대안적 비전』을 통해서 비판적 접근법을 정초했는데, 이러한 비판은 세간의 시선을 끈 하나의 사례였다. DAWN은 가장 우수한 학자로 구성된 집단으로, 주로 인도 아대륙, 카리브해, 라틴 아메리카 출신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제3세계 여성의 삶의 경험’을 ‘개발 과정을 이해하는 가장 명확한 렌즈’로 받아들였고, ‘젠더, 계급, 인종, 민족에 따른 다중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래’에 대한 제3세계 빈곤 여성의 열망이 새로운 페미니스트 전략의 기초라고 보았다. DAWN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계(system)라고 명명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 최적의 자원 분배로 이어질 것이란 IMF와 세계은행의 가정을 공격했다. 오히려 다국적기업과의 경쟁으로 인해 소기업들이 몰락했다. 수출 지향적 환금 작물이 국내용 식량 생산을 대체했다. 비공식 부문의 성장으로 생긴 일자리는 불안정했다. 새로운 특별경제구역 내 조립공장에 취업한 아주 소수의 여성에게 일자리는 단기직이며 전제정과 같은 노동규율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는 동안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한, 한층 강화된 군사화와 공적 기금의 군비 지출로의 전환은, 민간인 사상자와 난민 문제라는 측면에서 매우 젠더화된 효과를 낳았다. 또한 이러한 군사화는 남성의 ‘마초이즘’이나 ‘착한’ 여성과 ‘나쁜’ 여성, 가정주부와 창녀라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

 

DAWN의 창립자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혹은 사회민주주의 페미니스트였고, 간디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 경향이었다. 그들의 장기적 제안은 토지개혁, 다국적기업에 대한 통제 강화를 가리켰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시한 단기적 요구는 매우 온건했고, 정통 신자유주의 의제와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DAWN의 주요한 제안, 즉 비공식 부문에 있는 여성에게 신용대출에 대한 접근권을 늘려 그들의 생산성을 높이자는 제안은 세계은행의 귀에 달콤한 음악처럼 들렸다.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원하는 결과를 쉽게 얻었다. 즉 ‘부채에서 벗어나 성장하기’와 ‘인간의 얼굴을 한 구조조정’이 볼커 시대의 디플레이션 정책을 대체했다. IMF 프로그램은 서구의 상품과 자본의 유출입을 막는 장벽을 무너뜨렸다. 비공식 정착지에 소유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에르난도 데 소토의 생각이나, 무담보 소액대출(micro-credit)에 대한 무하마드 유누스의 계획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지역의 금융화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비공식 상업이나 소규모 협동조합과 협력하라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요구는 신자유주의자의 주장, 즉, 제3세계 여성은 곧 신용대출이 주도하는 민간부문 성장을 위한 잠재적인 자원이라는 주장과 수렴할 수 있었다. 세계은행의 관료와 해외원조 조직은 자신의 활동을 평가할 때 ‘젠더 지향적’ 활동이라고 계산에 넣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기 시작했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여파 속에서 기부자의 기금이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여성 NGO는 지금까지 국가가 운영하던 사회서비스를 대체하곤 했다.

 

세계은행의 ‘페미니즘적 전환’은 순수한 신자유주의적 바탕에서 논의되었다. 즉, ‘여성의 권한 강화’(women’s empowerment)는 경제성장 가속할 것이며 출산율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페미니즘은 보충적이거나 주의를 돌리는 역할도 맡았다. 구조조정 아래에서 벌어지는 ‘빈곤의 여성화’나,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빈곤화를 대가로 서구의 채권자가 배를 불리는 현상을 지적하는 비판에 대해, 세계은행은 자신에 부여된 권한에 따라 빈곤과 불평등 (적어도 젠더 불평등) 문제에 신경을 썼다고 보여줄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부터, 세계은행은 자신의 직원을 교육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는데, 국가 프로그램은 ‘[경제]성장에 대한 젠더 관련 장벽’을 파악하고, 여성의 노동력 참여를 장려함으로써 현존하는 분업 체계가 낳은 ‘경직성’, ‘비효율성’, ‘낮은 산출량’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은행은 무담보 소액대출 프로그램이 여성의 ‘권한을 강화한다’고 입증하는 기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여성이 남성보다 계속 이자를 지불하는 책임감을 보였으며, 추가 소득을 자녀에게 지출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세계은행의 의뢰를 받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여성이 빈곤한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이들은 전기, 치안, 물, 위생과 같이 여성 스스로가 제기하는 요구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은행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보고서를 처박아 버리고서 ‘여성의 권한 강화’라는 구호 아래에서 자신들이 선호하는 민간 부문 프로그램을 계속 이어 나갔다. 즉 무담보 소액대출, 토지소유권 부여, 조건부 현금 지원이나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는 베커의 또 다른 아이디어인데, 이는 핵심적으로 여성 유소년에 대한 교육을 장려하는 것을 의미했다.) 서구 기관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자금을 제공했고, 선택된 NGO가 운영했다.

 

글로벌 프로그램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 뒤, 여러 UN 대회들은 사회자유주의적 의제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장이 되었다. 그러한 의제로는 환경(1992년 브라질 리우), 인권(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인구(1994년 이집트 카이로), 젠더(1995년 중국 베이징)가 있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은 더 실험적인 시도로서 국제적 형사사법 체계 수립을 지향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전쟁범죄자 재판을 위해] 뉘렌베르크와 도쿄에 설치된 군사법원을 모델로 했다. 새롭게 등장한 글로벌 페미니스트 전문직 계층은 이와 같은 유엔 비공개회의에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는 새로운 전문직 계층이 두각을 보였는데, 워싱턴의 여성 로비 단체가 갖춘 막강한 자금력이나, 회의를 주선하면서 통달한 경험 덕분이었다. 벨라 앱저그와 그 동료들이 이끈 여성환경개발기구(WEDO)는 유엔에서 가장 큰 단체 중 하나였다. 워싱턴 D.C.의 <의회 여성 코커스>에서 갈고 닦은 전략을 이용하여 WEDO는 1500명에 달하는 국제 대표로 구성된 집단을 동원했다. WEDO는 유엔에서 반(半) 공식 단체가 되었고, 카이로와 베이징에서 채택된 ‘세계 선언’에 담긴 미국의 공식화된 정책에 대한 지지를 동원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95년 베이징 유엔 여성대회에 즈음해서는 미국의 외교적 승리가 확고했다. [러시아 초대 대통령] 옐친 하의 러시아는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거의 내지 못했다. 대회 개최국인 중국은 새로운 국제 질서에 합류한 열정적인 문하생이었다. 여성대회의 주인공이 도미틸라 바리오스에서 힐러리 클린턴으로 대체된 사실은 상징적이었다. 반차별 접근과 ‘주류로의 진입’은장황한 말을 쏟아 내면서,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경제 질서를 통해 여성해방을 추구하자는 제안을 몰아냈다. 베이징 행동강령에서 세계 각국은 ‘여성의 권한 강화를 위한 의제’를 승인했다. 이러한 의제는 ‘무역 자유화와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시장에 대한 접근권의 중요함’을 강조했고, ‘가족이 사회의 기본단위이며, 따라서 가족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베커와 프리드먼은 분명히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틀 속에서 12개 항목의 행동강령은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는 전략적 목표와 행동제안을 규정했다. 즉, 경제(빈곤, 환경, 경제에서 여성의 위치), 정치(인권, 정책 결정, 무력분쟁), 사회(교육, 미디어, 젠더 폭력, 보건, 여성 아동) 분야에서 말이다. 이러한 분야 중에서 성(sex)과 재생산 문제는 빠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미 국무부의 유서 깊은 방식에 따라 성과 재생산 문제는 별도로 관리되었으며, 1994년 카이로 인구 회의에서 합의된 국제 지침을 따랐다.

 

1995년 9월 5일 중국 베이징 제4회 세계여성대회에서, 당시 대통령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 대표로 참여하여 “인간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고, 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다.”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베이징 여성대회의 상징으로 남았다.

 

장황한 내용을 걷어내고 보면, 행동강령의 실행 절은 친숙한 반차별 논리를 신봉했다. 바로 여성을 현존하는 세계적 자본주의 질서로 통합하며, 이를 강제력으로 뒷받침한다는 논리 말이다. 각국 정부는 여러 공식적 조치를 도입한다고 함으로써, 젠더 평등에 관한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데 합의했다. 공식적 조치란 곧 서류상의 동등한 접근권으로, 시장, 자원, 고용, 급여, 상속, 신용, 정치적 의사결정, 교육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말한다. 즉 신자유주의 경제 프로그램에 ‘젠더 관점’을 쏟아붓는다는 뜻이다. 전문직, 관리직 계층의 여성화를 위한 일련의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affirmative-action) 제안이 이를 뒷받침했다. 정부, 언론, 사법부에서 여성의 ‘임계질량’(30%)을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할당제]를 도입해야 한다, 자문 기관들에 여성을 참여시켜야 한다, 여성 ‘전문가’에 대한 글로벌 미디어 안내 책자를 제작해야 한다, 여성 유소년을 위한 리더십과 자존감 훈련을 도입해야 한다 등이었다. 몹시 가난한 여성은 무담보 소액대출과 자가고용 계획의 대상이 되어 도움을 받을 것이며, 가난한 여성의 초중등학교와 대학 입학률을 높이기 위한 인센티브도 도입될 것이다. 한편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처하기 위해서 형사 사법 조치를 활용할 것이다. 즉, 형사적 제재를 더 엄격히 강화하고, 범죄자를 기소하고, 포르노그라피를 범죄화하며,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 관련 법률을 집행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제공(social provision), 즉 구타당한 여성을 위한 피난처, 주거, 위생, 보건의료, 학교, 안전한 교통, 깨끗한 물, 식품과 연료 보조금, 산부인과, 탁아소는 단지 ‘적절하게’ 개선될 것이다. 그렇지만 ‘적절하다’는 ‘예산 제약에 종속된다’는 말의 암호이며, ‘전혀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 대신에 NGO가 참여하여 그 공백을 메웠다.

 

행동강령은 온건하고 긍정적인 문화적 제안을 통해 순화되었다. 예를 들어 남성 유소년 대상 가사 기술 훈련, 비차별적 직업 상담, 미디어의 [여성] 묘사 방식 다양화, 비(非)성차별주의적인 교과서. 또한 행동강령은 마무리에서 앞으로 연구해야 할 의제를 제시했다. 즉, 여성의 부불노동을 측정할 방법, 젠더 폭력의 원인, 보건 정책, 유독성 위험이 특히 원주민 여성에 미치는 영향. 이처럼 많은 분야에서 진보를 위한 메커니즘은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에 관한 교본에서 곧장 끌어왔다. 국가는 달성 목표를 세우고 선의를 입증하라고 재촉을 받았고, 글로벌 기술 전문가는 그러한 목표를 향해 얼마나 진보했는가 감시하도록 돕는 측정법을 고안했다. 이는 데이터를 생산하는 방식이자, 이데올로기적 임무를 수행하는 수단이었다. (최근의 글로벌 이니셔티브인 ‘의제 2030’은 진행 상황을 감시하는 데 쓰이는 17개의 목표와 230개의 지표를 담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 건강(reproductive health)을 위한 1994년 카이로 행동 프로그램도 동일한 전략적 논리를 신봉했다. 카이로 대회에 참석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는 미국 국제개발처 방식의 인구 통제라든가, 구조조정에 따른 보건의료 공급체계의 파괴를 강력히 비판했다. 이들의 대안은 출산 관련 이슈, 즉 모성 건강을 위한 자원 증대, 안전한 임신 중지, [여성의] 요구에 따른 피임수단 제공, 강제 불임시술과 해로운 시술 중단과 같은 이슈를 더 광범위한 사회적, 생태적 요구와 통합했다. 그러나 한 미국 페미니스트가 후회하며 고백한 것처럼, 깨닫고 보니 그들은 종교적 보수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에는 불균형적으로 [많은] 힘을 쏟았지만, 신자유주의 거시경제 정책과 싸우는 데에는 거의 힘을 쏟지 않았다. 그러면서 성적 권리에 대해 미국과 유럽연합의 지지를 얻어내는 대신, IMF의 긴축 프로그램을 위한 기반을 내주었다. 그 결과 유엔 선언 전문(前文)은 건강과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해 흠잡을 데 없는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면서, 구조조정의 악영향을 반성했다. 그런 반면에 행동 프로그램의 실행 장은 장기간 지속하는 피임 프로그램을 위해 다량의 기금을 투입하고, 각국 정부가 비용 효율성을 높이고, 규제를 다시 없애고, 민간부문을 장려하라고 촉구했다. 행동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주목했던 기초적 건강관리, 아동 생존, 산부인과 긴급 진료, 환경 사회 서비스를 위한 기금은 전혀 배정되지 않았다. 재생산 문제를 다루는 통합적인 페미니스트 정치는 제약 회사와 인구통제론자를 지원하기 위한 장식으로 격하되었다. 피임기구 삽입과 불임 시술에 대한 수치적 목표가 여전히 현장에서 정책을 추동했다. (이는 여성의 선택권과 상극이었다.)

 

견고한 방어막

 

주류 미국 페미니즘이 글로벌 페미니즘을 주도했지만,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세계의 다종다양한 페미니즘 간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첫째로, [평등한 고용 기회를 규정한 미국 민권법] 제7조, [연방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성차별 금지를 규정한 미국 교육 개정법] 제9조처럼 법원이 지원하는 시민권 체계와 같은 것이 국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국가에서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에는 미국적 원본을 고취했던 소송문화나 역사적 법률 전통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둘째로,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의 경우에] 신자유주의가 훨씬 더 강력히 도입되었다. 글로벌 페미니스트 프로그램은 자본이 주도하는 발전정책(토지소유권 부여, 빈민가 철거, 노동력 구조조정, 신용 팽창)에 덧붙여진 부가물이곤 했다. 지금까지 자원의 가장 큰 몫이 미 국무부와 월스트리트가 아끼는 두 가지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즉 인구 통제와 소액 금융으로, 제약회사 및 은행과 민관 파트너십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셋째, 외래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외부인들의 특성이 있다. 해외, 즉 노르웨이, 스웨덴, 캐나다, 미국 국제개발처에서 온 기부자는 냉정한 외부자의 눈으로 프로젝트의 잠재성을 평가했다. 여학교 설립과 같이 외부 재단이 후원한 프로젝트는 종종 현지 실정과 잘 맞지 않았다. [지원을 받는] 국가가 프로그램을 ‘소유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서구 모델이 우월하다는 가정이 기정사실처럼 깔려 있었다. 이는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성을 ‘미국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거나, 아니면 지역의 남성 지배를 인정해야 하는 함정에 빠뜨렸다. [또한 그러한 가정은] 페미니즘 그 자체가 ‘신제국주의’라는 가부장적 비난에 힘을 실어 주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 글로벌 페미니스트 관료집단으로 구성된 두껍고 딱딱한 껍질이 마치 요술을 부린 듯 갑자기 나타났다. 세계 정상회담급 회합에서 벨트웨이 페미니스트는 이제 부와 권력의 회랑에서 [즉 중요 사항이 결정되는 상층부에서] 완전히 안락함을 느끼면서, ‘여성의 권한 강화’를 위한 정책 목표를 기안했다. 세계은행, IMF 등 국제 금융기관은 그들이 부과하는 세계화 조치가 페미니즘 의제를 고려한다고 보증하기 위해 젠더 주류화 사업단을 확대했다. 국제 금융기관은 고도로 훈련되고, 서구에서 교육을 받은 페미니스트 전문직으로 구성된 국제적 전문직 층의 지원을 받았다. 국제 금융기관은 [한쪽에 있는] 개발기구와 ‘기부자’(스칸디나비아 지역 해외원조기구 관료, 재단(게이츠, 포드, 록펠러), 투자은행, 법인기업(월마트, 코카콜라, 골드만삭스)와 [다른 한쪽에 있는] 이제 훨씬 더 균질적이며 위계적인 국제·지역·지방 기구를 매개했다. 이러한 국제·지역·지방 기구는 대의명분에 헌신하는 NGO 상근 활동가 수십만 명을 고용했다. 이들이 글로벌 페미니즘의 보병이었고, 이들의 규모가 곧 글로벌 페미니즘의 성장을 증명했다. 그들 아래에 ‘현장의’ 여성이 존재했다.

 

주류 페미니즘은 우파의 저항에 직면했다. (우파는 교황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신정주의적, 가부장적 보수주의의 보루를 말한다.) 그러나 주류 페미니즘은 좌파의 저항에도 직면했는데, 연구자와 지역공동체 활동가가 ‘NGO화’(NGOization)에 반대하면서 더 급진적인 사회적 입장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페미니즘이라는 브랜드는 자선재단, 해외원조기구의 풍족한 지갑이라든가, 강력한 제도적 지원과 같은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존 페미니스트 집단은 총명하고 동정적인 재단 담당자로부터 지원금을 신청하라고 요청을 받는 기쁨을 종종 누렸다. 재단의 모집 담당자가 학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했고, 그 학자들은 비용 전액이 지원되는 국제 회합에 초청을 받고, 각 지역의 시범 프로젝트를 방문했으며, 풍부한 기금 지원을 받으면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수립하도록 독려받았다. 활동가는 하급 관료가 되었고, 자신이 여전히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더 급진적인 프로젝트에 투여할 시간이 없었다. 기부자를 위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법률적 절차를 준수하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기부자가 젠더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매년 NGO 네트워크에 제공하는 수억 달러는, 유엔 관료체제가 자체 운영을 위해 지출하는 440억 달러에 비하면 쥐꼬리만 한 액수였다. 수조 달러에 달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연간 예산과 비교하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반체제적 페미니스트가 낼 수 있는 시간과 돈보다는 훨씬 더 컸다.

 

미국이 해외에서 국제적 젠더 평등을 지지함으로써 얻은 상당한 실적은 세계 보안관이라는 미국의 배지에 윤을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미국의 수많은 전쟁은 여성의 권리라는 깃발 아래 수행될 수 있었다. 반면 미국의 적은 페미니즘의 반대자로 재명명되었다. 잡지 《타임》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여성에게 환희의 날이며, ‘참정권 투쟁 이후로 대중 해방에서 가장 위대한 장관’이라고 묘사했다. [미국과 페미니스트 간] 상호 이익이 기대되었다. 미국 언론은 사설에서 ‘누구보다도 페미니스트야말로 서구는 방어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썼다. 포드 재단은 [중동] 지역 NGO에게 테러리즘에 관한 성명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미국 페미니스트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두고 분열되었다. <의회 여성 코커스>는 거의 만장일치로 침공을 지지했고, <페미니스트 다수 재단>은 미국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일군의 NGO를 이끌었다. 반면 <코드 핑크>와 <위민 인 블랙>은 가장 확고한 반전 단체 대열에 속했다. 《메리디안스》(Meridians)는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유용한 반박 자료들을 기획했고, 비판적 페미니스트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일련의 인상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주류 글로벌 페미니즘은 NATO 군대의 화물열차에 실려 있었고, 도덕적으로 퇴색했다.

 

2010년, 코드 핑크가 미 의회 인사청문회에서 신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 임명을 반대하며 시위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철수하라” “이라크 시민 100만 명의 명복을 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법학도 제국의 살림살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았는데, ‘새로운 세계 질서’ 아래 성장한 국제 형사사법 체계에서 발판을 마련했다.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군사법원 모델에 기초하여 설립된 구(舊)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군사법원은 [과거 군사법원과] 동일한 비판을 받았다. 즉 국제적인 여론 조작을 위한 공개 재판(show trial)으로 기능하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승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도록 승인하며, 관할권 확립을 위한 법률 원칙이나 ‘법률이 없으면 처벌도 없다’는 법률 원칙을 경시했다. 국제형사군사법원는 입법 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바로 범죄를 규정하고 이를 소급해서 적용했다. 이러한 재판의 결말은 정의(正義)가 아니라, [서방이] 원하는 역사 서술을 ‘권위 있게 확정’하는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사례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은 완전무결한 평화의 수호자로, 분리 독립 전쟁은 순전히 ‘세르비아인의 공격성’이 낳은 산물이라고 제시했다. 그 후 설치된 르완다 국제형사군사법원과 상설 국제형사법원도 그와 비슷하게 비난할 수 있었다. 형사법원은 ‘보충성’ 원칙[당사국이 먼저 수사 기소를 하되 진정한 의사나 능력이 없는 경우에만 국제형사법원이 개입한다는 원칙] 하에서 서방 강대국을 관할권에서 배제했고, 법원이 다루는 법률 범주, 즉 ‘침략’, ‘반인도적 범죄’라는 범주는 불분명하기로 악명 높다.

 

그러나 한 변호사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해 말했듯이, 선택적 정의와 순응적인 법률은 급진 페미니스트 법률 행동주의의 특정한 경향에 유리했다. 즉 그들에게 ‘역사적인 기회’로 작용했다. 군사법원과 국제형사법원은 여성에 대한 범죄의 법적 정의(定義)를 새로 고치는 데 훨씬 더 쉽게 활용되었고, 이는 다른 곳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했다. 1998년 르완다의 아카예수가 그 사례다. 이때 법원은 강간이 ‘강압적인 조건 아래 벌어진, 성적 성격을 지닌 신체적 침해’라는 느슨한 정의를 수용했고, 이러한 정의에서는 더는 강제적인 성교(intercouse)가 수반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자 미국 캘리포니아주(2003년)와 일리노이주(2004년)에서도 수정된 정의를 주 법률에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곧바로 뒤따랐다. 르완다 군사법정의 목적이 국제적인 여론조작용 공개재판으로서, 르완다 하급 공무원을 희생양으로 각색하면서, 서방 강대국, 특히 클린턴 행정부에 방패를 쳐주는 것이 아니냐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는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IMF 기금으로 무기를 구매하고 민병대를 훈련한다는 사실을 여러 해 동안 모르는 척했다. 가장 괘씸한 바는, 학살과 강간이 발생하기 수개월 전부터 르완다 유엔평화유지군 사령관 달레어 장군이나 미 중앙정보국(CIA)이 위기를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아루샤 평화협정에 따라 효율적으로 유엔 안전 임무를 수행할 단위의 파견을 막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에 따라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변호사가 여성에게 유리하게 미국 법을 개정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5. 결과들

 

베이징 여성대회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페미니즘의 주요한 성취는 무엇인가? 지식의 뚜렷한 발전이 가장 큰 성과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데이터 수집, 현장 조사, 비교 분석의 확대는 미국 대학 시스템이 보여준 힘에 대한 헌사다. 처음부터 여성 연구가 유엔의 활동 중 핵심이 되도록 밀어붙인 주체는 미국 외교관이었고, 미국의 자원은 그러한 연구가 끝까지 진행되도록 촉진했다. 세계적인 전문가 핵심 그룹을 모으고, 계속해서 의제를 정교화하고, 각국 정부를 재촉했다.

 

모든 제국은 자신이 다스리는 주민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지금까지 어떤 제국도 연구를 젠더 문제로 확대하면서 이 정도 규모로, 이렇게 정교하게 진행한 적이 없었다. 1970년대 여성해방 운동과 함께 폭발했던 독창적인 사상의 광휘와 비교할 때, 이 시기에 이론적으로 탁월한 성취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 페미니스트 프레스가 개척했던, 전 세계적인 문화 복원이라는 비범한 프로젝트가 크게 위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금을 제공하는 조직이 열중했던 연구 주제는 여성 노동과 인구 연구 문제에 편중되었다. 그들은 심리학, 가계 구조, 종교적 관습, 육체의 정치학[개인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치적 권력에 의해 형성된 담론 및 규범], 성과 같은 주제에는 별로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난 30년 동안의 젠더 연구는 역사적인 성취다.

 

글로벌 페미니즘에서 기원했다고 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회 변화는 덜 극적이었으며, 대체로 사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집중되었다. 가장 중대한 변화는 3차 교육[중등학교에 이어지는 대학교육과 직업교육]을 받는 젊은 여성의 증가였다. 부분적으로 이는 중국, 중동, 라틴아메리카 대학 체계의 폭발적 확대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무질서하게 실행되었고, 표준을 저하했다는 호된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그럼에도 교육 확대가 수천만 명의 젊은 여성에게 얼마간 자율성을 제공할 것이며, 가부장적 가족을 넘어서 사회적 지평을 넓힐 것이라는 희망이 존재한다. 정치적 전선을 살펴보면, 중앙정부 의회 내 여성의 총비율이 1997년 12%에서 2017년 24%로 증가했으며, 가장 많이 증가한 사례 몇몇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나왔다. (볼리비아에서는 53%로 증가했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지도자가 얼마나 여성의 이해를 대표하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업, 행정, 정치, 문화 분야에서 글로벌 엘리트의 온건한 여성화가 진척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연줄이 든든한 가족 출신 여성은 교수, 언론인, 법률가, 장관, 판사로서 만만치 않은 경력을 쌓아 올렸다. 젠더 평등이라는 원칙이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는 행동강령의 진전은 오히려 중단되곤 했다. 베이징 여성대회 이후에, 여성 문해율, 임산부 사망률, 초등학교를 마친 여학생 비율의 변화 속도는 그 전 수십 년에 비해 실제로 느려졌다. 빈곤 수준은 나아졌는데, 주로 중국 덕분이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1995년 이후로 빈곤 여성의 영양실조 비율이 상승했다. 중윗값 수준을 살펴보면, 경제적 평등화는 대체로 남성의 ‘하향 평준화’ 과정이었다. 남성 임금이 하락하고 남성 가장 모델이 침식되었으며, 과거에 여성의 벌이가 남편의 벌이를 보충했다면 경제적 압박이 일반화되는 조건에서 여성이 자연스럽게 주요 부양자가 되었다. 여러 차례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여성들은 임금노동이 가져다주는 인격적 독립의 측면에서 약간의 순이익을 얻었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이 젠더 관계에 미친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도 인정한다. 새로운 수출제조업 센터는 위와 유사한 하향평준화 효과를 발휘하였다. 멕시코 북부의 마킬라도라[미국과의 국경지대에 형성된 공업지대], 중국 선전의 폭스콘 공장, 방글라데시 다카의 의류 산업은 극도로 강압적인 노동 통제를 가하고 농촌 여성에게 푼돈을 주면서 수출 주문을 따냈다. 더 나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젊은 남성도 동일한 노동조건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많은 공장에서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한다. 젊은 여성에게는 때로는 폭스콘 대신, 극도로 젠더화된 선전의 유흥산업에서 일하는 것이 더 나았다.

 

중국 선전 폭스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폭스콘은 아이폰 등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대만 제조업체다. 노동자의 상당수는 고향과 가족을 떠나 일하러 온 20대 초반 여성으로, 2010년 한 해에 14명이 자살하여 ‘자살공장’이란 비난을 받았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관해 장기간 조사한 국제적 데이터 세트가 존재하지 않지만, 이러한 폭력은 남성 실업과 강한 상관관계가 있으며(남성 실업률이 높으면 폭력의 발생률도 높다), 전쟁 지역과도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전쟁지역이 확대될수록 폭력의 발생률도 높다). NGO는 가정폭력을 범죄화하기 위한 법률을 계속 요구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는 모순적인 결과를 낳았다. 2006년 브라질의 ‘마리아 다 페냐’ 법이 한 사례다. 이 법은 아내를 구타한 자를 징역형에 처하도록 의무화했고, 지역 당국이 고소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법원을 의무적으로 설립하게 했다. (반면 여성단체가 캠페인을 벌이며 요구했던 여성 피난처의 경우, 자금 제공에 반대했다.) 법률 집행을 페미니스트 운동이 감시한 결과에 따르면, 신고된 폭행 사건의 수가 줄어들었다. 여성이 신고를 주저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원하는 바가 남성이 자신을 때리기를 멈추는 것이더라도, 신고할 경우에 남편이 악명 높은 브라질 감옥에 갇히는 상황을 봐야 하고, 가계의 재정에 재앙과 같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고 그들에게 어떤 국가의 지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페미니즘의 재생산 정책은 강압적인 면도 담고 있었다. NGO의 관심사는 약물을 통해 출산율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반면 교육, 지리적 이동, 경제적 독립과 같이 여성의 자율성을 위한 사회적 조건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적었다. (이러한 사회적 발전은 출산 통제를 긍정적인 선택으로 바꾸는 데 조력할 수 있다.) 거대 제약회사의 연구는 전문가의 관여가 없다면 되돌릴 수 없는 장기 지속형 피임법에 집중했다. 이는 출산 통제권을 여성 자신이 아니라 (주로 남성인) 의료보조원의 수중에 넘겨주었다. <국제가족계획연맹>(IPPF) 웹사이트에는 여성의 선택권(pro-choice)[임신중절 합법화]을 지지한다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수치적 목표가 국제 인구 통제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간다. 게이츠 재단이 후원하며, 69개국이 참여하는 ‘가족계획 2020’이라는 최근 캠페인은 여성 1억 2천만 명을 ‘목표 수치’로 계획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호르몬 임플란트(노리서플, 신노플란트, 자델: 팔에 삽입되는 작은 프로게스테론 막대)나 주사(데포 프로베라, 노리스테라트: 약물을 천천히 방출하기 위해 둔부 근육 깊이 주사한다)와 같은 피임법이 포함된다. 가임 능력을 ‘되돌릴 수 있다’고 광고되긴 하지만, 이러한 피임법은 가임 능력 회복의 장기 지연, 불규칙한 월경, 두통, 혈전증, 체중 증가, 골밀도 감소, 우울증과 같은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다. 나이지리아의 2020 목표는 또 다른 1,350만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인도는 4,800만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 빈곤한 나이지리아 북부에서는 출산 통제가 1차 건강관리를 대체하는데, 그 지역은 1인당 의사 비율이 인구 1,000명 당 0.4명이다. 인도에서는 불임 시술이 여전히 가장 일반적인 피임법으로 남아 있으며, 여성 ‘사용자’의 70% 이상에 시행되었고, 가족계획 기금의 85%를 사용했다. 라자스탄, 안드라 프라데시,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경우에, 무슬림, 불가촉천민, 부족 공동체를 주요 대상으로 삼는 대중 캠페인은 주 할당량을 달성하기 위해 현금 인센티브를 활용하며, 위험천만하게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시술이 이뤄진다. 불임 시술을 받은 여성의 비율은 브라질(42%)과 중국(45%)에서도 높다. 음성화된 임신 중지는 라틴아메리카와 서아프리카에서 임산부 사망(특히 10대 여성)의 흔한 원인이다.

 

무담보 소액대출은 글로벌 페미니즘이 개발도상국 비공식 경제에서 주되게 내세운 ‘여성의 권한 강화’ 정책이었다. 이러한 국가에서 동일 임금과 반차별법은 발 디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무담보 소액대출 모델은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와 그라민 은행이 개척했다. 가난한 남성 노동자에 대한 대출은 높은 채무 불이행률 때문에 위험했지만, 유누스는 그들의 아내의 경우, 관리하기에 ‘더 쉽고’, 순종적이며, 동료 집단의 사회적 압력을 더 잘 수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라민 모델의 원본은 한 마을의 채무자 집단 전체가 구성원 각자의 개별적 대출에 대해 공동으로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중 가장 가난한 구성원이 돈을 갚지 못하면 구성원 전체가 돈을 빌릴 수 없다. 여성은 대출 신청이 허용되기 얼마 전까지, 가입비를 지불하고, 주례모임에 소액 예금을 가져와서 자신의 재정규율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면 여성은 20달러 가량의 대출을 신청할 수 있고, 약 20%의 고정금리로 1년 안에 상환해야 했다. 무담보 소액대출은 게이츠 재단이 “빈곤과 싸우자. 수익을 내가면서”라고 즐겨 말했듯이, 글로벌 페미니즘과 글로벌 금융이 합류하여 100억 달러 가치의 새로운 ‘비우량(서브프라임) 대출의 최전선’을 창출한 곳이었다. 그 논리는 민간 부문에서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를 시행하는 것과 같았다. 즉, 소액대출은 농촌에서 바구니를 짜거나 판자촌에서 재봉하던 여성이 소규모 사업가가 되어 가족의 생활 수준을 높이며,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동시에 채권자에게도 준수한 수익을 안겨 줄 것이다.

 

2010년, 전인도민주여성협회의 여성들이 인도의 중앙은행인 인도준비은행 건물 앞에서 소액금융 규탄 시위를 하고 있다. “소액금융이 초래하는 자살을-살인을 멈추자” “인도준비은행은 소액금융을 규제해야 한다."

 

그러나 무담보 소액대출이 가난한 여성에게 해방적 효과를 발휘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원래의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 모델과 마찬가지로, 방글라데시 무담보 소액대출의 주요 수혜자는 농촌의 프티부르주아 여성이었다. 이들은 하인을 주례모임에 대신 보냈고, 이렇게 대출받은 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며 꽤 많은 수익을 챙겼다. 더 가난한 여성은 분납금을 감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종종 한 NGO에서 돈을 빌려서 다른 NGO에 갚았다. “대출을 받자마자 걱정이 듭니다. 우리는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예요. 돈을 갚지 못하면, 마을 사람들이 와서 괴롭힙니다. NGO 현장 직원도 괴롭힙니다. 남편과 시댁도 화를 낼 것입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압력을 받고 있어요.” 남편이 대출받은 돈을 써 버리고서 아내에게 화풀이하거나, 아내가 더 많은 돈을 빌려오지 못한다고 남편이 때렸다는 여성의 증언이 아주 많다. 높은 상환율은 농촌 여성의 사회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지표라고 증명되었다. 즉, 채무 불이행을 피하기 위한 여성들의 필사적인 노력 뒤에는 부끄러움을 당할 위험이나 가정의 전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담보 소액대출은 현존 젠더 관계에 도전하는 대신, 그러한 관계를 이용하고 강화했다. 이집트 카이로의 한 여성은 씁쓸하게 불평했다. 자기가 동네 가게에 팔려고 채소 피클을 만들기 시작하자, 남편이 피클을 시장 상인들에게 도매하겠다며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도와주겠다고 해놓고, 이제 사업 전체를 좌지우지합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그의 아이를 시중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작은 피클 공장에 속한 노동자입니다.”

 

6. 상쇄하는 힘

 

왜 그 많은 노력이 이렇게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졌을까? 왜 그 이익이 중상위층으로 아주 많이 기울어졌는가? 부분적인 이유를 들자면, 글로벌 페미니즘 프로젝트의 한계는 그 전략적 모델에 새겨져 있다. 즉 현존 질서의 ‘주류로 여성을 편입한다’는, 특히 기업[경영진]과 전문직으로 편입한다는 전략적 모델 말이다. 그러나 그 질서 자체가 끊임없이 유동적이었다. 글로벌 페미니즘을 떠받쳐 온 바로 그 구조와 제도는 [성 주류화 전략을] 상쇄하는 힘의 발전을 더 강력하고 더 광범위하게 주도했다. 사유화는 (동아프리카의 토지소유권 부여로부터, 중국의 부동산이나, 월 스트리트를 위해 수량 완화 정책이 제공하는 자금에 의한 주식 환매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부유한 남성의 수중에 자산을 집중시켰고, 오로지 트로피 부인[대개 부유하고 나이 많은 남자의 젊고 매력적인 아내]만이 그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반차별법은 결코 소유권에 적용된 적이 없다. 반차별 모델 내에서 소유권 제한이란 상상할 수 없다.)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공공부문은 세계 역사로 볼 때 여성의 동맹자 역할을 했다. 세계적으로 보면, 가장 비차별적인 고용이나 최상의 육아휴직 수당은 공공부문에서 찾을 수 있다. 공공부문이 제공할 수 있는 물질적 지원(예를 들어 안전한 주거환경, 매 맞는 여성을 위한 피난처, 무상보육)은 억압적인 가정 내 관계에 대한 가장 폭넓은 대안을 제공한다.

 

글로벌 페미니즘이 수여한 신임장을 과시하는 바로 그 당국이 공공부문을 축소하고 질을 저하했으며, 호황과 불황을 오가는 자본주의의 경기 순응적 긴축정책도 공공 부문에 일격을 가했다. 핵심이 제거된 공공부문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책임을 다시 사적인 가족관계가 맡도록 내팽개쳤다. 1990년대 후반 중국의 작업장 탁아소가 폐쇄되었을 때 사례처럼, 사적인 가족관계에서 재생산 노동의 책임은 다시금 젠더화되었다[여성의 몫이 되었다]. 비공식 [무허가 주택] 빈민가에 사는 여성은 사회기반시설을 전혀 누릴 수 없고, 바로 그런 이유로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특히 날이 어두워진 뒤에, 집 안에만 있게 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밤은 총소리와 도망치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다.” 방글라데시 다카의 의류 노동자는 요금이 알맞은 교통수단이 없어 어두운 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야만 하는 귀갓길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 귀에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요. 어떤 남자도 나를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매우 빨리 걸어야 해요.” “여럿이 같이 다녀도 무서워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죠.” 사람은 많고 소득은 적은 이집트 카이로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도시 지역에서는, 사회적 제공이 없는 상태에서 가족과 친족 관계만이 비공식 경제와 강압적 관료체제를 버티며 살아남기 위한 지원을 제공하곤 한다. 동시에 이러한 가족과 친족 관계는 기존의 윤리적 규범에 부합하는 형태로 젠더화된 의존과 종속 상태를 재생산한다. 즉 이타심, 무급노동, 불평 없이 가정사를 감당하는 책임감이 순종적인 딸, 다정한 어머니, 좋은 아내를 정의하는 특징이 된다.

 

퇴행적으로 젠더화를 야기하는 사유화 정책은 더 큰 장기적 변화, 즉 비공식 경제와 서비스 부문의의 세계적 팽창과 상호 작용한다. 비공식 경제 그 자체가 심하게 젠더화되어, 공식 부문 고용보다 임금 격차가 더 넓고, 성별 기반 분업이 훨씬 더 견고하다. 제3세계 국가들의 도시화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판자촌과 빈민가에서는, 남편과 함께 농촌에서 온 젊은 여성이, 임시직으로 취업한 남성의 임금이 충분치 못하다면, 약간의 돈을 받고 전통적인 가정 내 허드렛일을 닥치는 대로 한다(청소, 세탁, 미용, 요리, 길거리 음식 판매). 1980년대 이래로 성장률과 공식 부문 고용률 수준이 계속 하락함에 따라, 임시직은 반(半)영구화되었고, 임금노동은 젠더화된 분업을 재생산하는 데 그저 기여할 따름이었고, 돈 많은 중년 남성(sugar daddy)[성관계 대가로 자기보다 훨씬 젊은 여자에게 많은 선물과 돈을 안겨 주는 중년 남성]과 상품화된 성은 그 필연적 결과였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성장하는 도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중 특히 미국에서, 젠더 영역의 진보가 편향적이고 인종화된 피라미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반차별이라는 패러다임의 패턴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다. 공식적인 평등 이데올로기와 [중상층] 여성의 상대적 [고]소득이라는 현실은 젠더 관계를 중립화하고 탈정치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문화 산업은 현대 미국 가족(이제는 꼭 이성애이거나 백인일 필요는 없다)이라는 틀 내에서도 [여성이] 개인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전망을 쏟아 냈다. 전문직 계층, 즉 상위 15%에서는 [이미] 1990년대에 임금과 지위의 젠더 격차가 거의 해소되었지만, 그 이후로 진보는 멈췄다. 거의 보편적인 피임은 성관계와 임신 간 연관을 끊고, 인생에서 아이 없이 보내는 기간을 노년기까지 늘렸다. 또한 젠더 유동성을 실험하고, 모성으로부터 단절된 여성의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공간을 창출하도록 촉진했다. 대졸 여성의 합계출산율은 인구 대체 수준[인구 유지 수준] 밑으로 떨어졌다. 보육과 주택이 사유화된 환경에서 아기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예상치 못한 계급적, 젠더적 재각성을 종종 의미했다. 일반적인 사회 경제적 여건이 핵가족의 분업을 재생산하도록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위 15%에게는 이러한 문제가 완화되는데, 새로운 여성 가사노동자층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성 가사노동자 자신은 반차별법에서 배제되었고, 상위 15%는 대양을 가로지르는 ‘돌봄 사슬’을 통해 세계적 임금 격차를 착취했다. 윤리적 규범, 즉 ‘훌륭한’ 여성의 모습에 대한 젠더적 감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가족 내에서 [여성의] 개인화된 책임, 소셜 미디어가 선호하는 젠더적 자기재현, 양자 모두 그러한 규범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게 틀림없다.

 

미국인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중위소득 층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변화가 있었다. 즉 성별 임금 격차는 좁아졌는데, 주로는 남성의 임금과 노동 조건은 하락했지만 여성의 경우 미미하게나마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성별에 따른 직종 분리가 여전히 중위소득 경제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건설, 운송, 정비, 소매업, 패스트푸드, 돌봄 산업, 사무직.) 서비스 부문 노동, 즉 ‘감정노동’에서는 극단적 여성성이 경쟁에서 이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성적 괴롭힘이라는 더 높은 비용을 야기한다. 대졸 여성이 보편적 피임, 교육 확대, 고도의 경제적 자립을 통해 얻은 젠더 중립적 공간은 중위소득 계층에서는 훨씬 더 줄어든다.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에서 미시시피 분지, 애팔래치아, 대초원 지대에 이르기까지, 소위 ‘다른’ 미국 전역에서는 여성의 첫 출산연령 평균이 약 22세지만, 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28세다. 출산율은 ‘다른’ 미국 지역이 약 25% 더 높다. 모든 인종 범주에서, 중위소득 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은 전문직 계층 출신보다 체계적으로 피임할 가능성이 낮으며, 임신했을 때 임신 중지를 할 가능성도 작다.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아이를 낳을 때 기회비용이 더 낮고, 모성의 좋은 면이 더 매력적으로 보여서 그럴 수 있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거나, 임신 중지 시설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중상위층의 ‘다 성장한’ 아이들[부모가 된 중상위층]의 삶에서는 부모[즉 아기의 조부모]의 개입이 주목할 만한 특징이 되었는데, 중위소득 출신 여성의 경우 그러한 개입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보육은 친척이 무급노동으로 맡을 가능성이 높고 (일하는 어머니를 둔 미국 5세 미만 아동의 거의 절반이 그런 상황이다), 나머지는 [보통 자기 집에서 남의] 아이를 돌봐 주는 사람의 집에 맡겨진다. 금융화가 전문직 계층에게 자산의 증가를 야기했다면, 중위소득의 경우에는 금융화가 대체로 부채와 불안을 의미했다. 남성은 그들 일자리의 질이 저하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18년간 이어진 경기침체 내내, 여성은 너무나 열심히 가정 밖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가족의 건강 문제와 생애 위기를 돌보는 최전선에 서 있다. 중위소득 커플의 결별률은 26%로, 대졸자 커플의 결별률인 13%보다 훨씬 더 높다. 중위소득에 속한 커플은 일과 시간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결별의 주된 요인으로 꼽는다. 남성은 여성이 직장에서 생긴 신경질과 짜증을 안고 집에 온다고 불평하고, 여성은 남성이 가사노동과 보육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 둘 다 상대방이 쉽게 화를 내고, 날카롭고, 음울하고,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가장 가난한 부문에서 (불균형적으로 유색인이 많다) 닉슨의 ‘범죄와의 전쟁’은 절대 끝나지 않았다. 연이은 징벌 조치 중에서 클린턴의 ‘노동 연계 복지’(workfare) 법과 가정폭력의 범죄화가 가장 두드러졌다. 노동 연계 복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비혼모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고, 가정폭력의 범죄화는 (미등록 체류 라틴계처럼) 불안정한 공동체에 속한 여성으로부터 실행 가능한 보호책을 빼앗았다. 노동계급에 속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의 경제적 이득은 남성보다 상당히 더 컸다. [2차 대전] 전후 시대에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은 직업적으로 고립된 집단으로서 가내 노예 상태라는 덫에 빠져 있었으나, 1970년대부터는 보건과 교육 분야의 공공서비스 일자리를 찾아 폭풍처럼 뛰쳐나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사회적 돌봄의 사유화를 조건으로 하여 발생했고, 흑인 노동계급 남성이 처한 지위의 불균형적 악화, 그에 수반하여 흑인 여성에게 부과되는 실질적, 심리적 부담의 증가를 전제로 했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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