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86세대’의 포퓰리즘
86세대론 비판과 재구성
다음으로 문재인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86세대 핵심 정치 엘리트들의 형성과정과 특징을 분석하고, 이를 비판한다. ‘집권 86세대’는 자신들의 운동 경력을 박제된 신화로 만들며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념적 지향과 구체적 정세를 무시하고, 오로지 보수에 대한 반대로써 집권을 추구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집권 86세대’는 세대 간 격차를 방조하고,이를 더 심화시켰다. 노무현 정부보다 문재인 정부에서 반보수 포퓰리즘이 더 심해지고 있는 이유도 집권 86세대의 지위와 무관치 않다.
1. 86세대는 ‘꿀빤꼰대’인가?
1) 86세대 비판의 재부상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라는 사건을 통해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이른바 ‘386세대’가 주목을 받았다. 이후 노무현 탄핵의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386세대는 정치권에 대거 입성했다. ‘386’은 당시 최첨단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만큼 기성 정치를 바꾸는 새로운 주류가 되리라는 기대가 반영되어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능력 없고 과격한 아마추어 같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서, 주로 보수진영이나 386보다 윗 세대의 관점에서 비판이 이뤄졌다. (그 다음 대통령인 이명박이 실용주의를 강조했다는 사실도 상기해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비판의 관점이 바뀌었다. 386세대들은 이제 50대, 즉 ‘586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젠 86세대로 통칭한다.) 이제 86세대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기성세대다. 집권정치인들의 경우 노무현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 또한 기업, 학계, 언론, 지역사회 등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지배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소위 ‘태극기부대’가 아니라, 젊은 세대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86세대에 대한 원망, 심지어 혐오도 종종 나타난다. 좋은 시절에 태어나 ‘꿀만 빨다가 힘든 건 다 떠넘겨 놓고 꼰대질하는 아재들’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86세대와 불평등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학술적 논의도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불평등의 세대』를 쓴 서강대 이철승 교수는 86세대의 응집력 높은 네트워크(“세대의 정치”)가 새로운 “한국형 위계체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386 세대유감』의 저자들 또한 86세대가 시대적 행운을 능력으로 둔갑시켰고, 현재의 헬조선에 적극적 가담 혹은 소극적 방관을 해왔다고 비판한다.
2) 또다른 ‘시선돌리기’
이런 논지를 보수언론이 적극 활용하니까, ‘계급이냐 세대냐’라는 쟁점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는 “조국 사태, 세대가 아니라 계급이 문제다”라는 칼럼에서 “1960년대생이 기득권 세력으로 비치는 것은 그들이 지금 50대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50대가 주도한다.”고 반박한다. 또한 “조국 장관은 386의 대표가 아니다. 그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었다. 사노맹은 일종의 ‘좌파 맹동주의’였다. … 386세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은 더불어민주당의 이인영·우상호·김영춘 의원, 임종석 전 의원 등 다른 사람들이다. 운동권 출신 386세대의 자식 중에는 조국 장관의 경우와 달리 상류층 진입에 실패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다시 반보수 프레임을 만든다. “기득권 세력은 ‘시선 돌리기’의 도사들이다. 계급의 문제를 늘 다른 쟁점으로 물타기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기득권 세력인가?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더 나아가 세대담론이 인종주의, 성차별과 닮았다고 주장하며 ‘386 말하지 않기’를 제안한다. 한겨레는 이 논문을 ‘386담론의 일베화’라는 기사로 보도했다.
성한용 기자의 이러한 주장은 또다른 ‘시선 돌리기’ 아닌가? ‘세대’랑 ‘계급’은 다른 층위의 논의다.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불황기에는 성별 임금격차나 청년고용, 비정규직 문제처럼 노동자계급 내 분할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계급 내 불평등에 주목한다고 정규직 노동자, 남성 노동자를 적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분할을 방치하면 노동자계급의 단결이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것이다. 세대 간 불평등도 이런 측면에서 의미 있는 분석이다.
2. 86세대의 “불로장생”: 세대 간 불평등
그런데 현재의 86세대는 무엇이 다른가? 이것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연령효과를 보정한 코호트(통계상의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 효과를 비교해보아야 한다. 즉 60년대생이 40대인 2000년대의 통계와 70년대생이 40대인 2010년대 통계를 비교해보아야 한다. 최근에 나온 여러 분석들을 소득과 자산이라는 측면으로 분류해 정리해보았다.
1) 소득
첫째, 60년대생은 이전 세대들보다 더 빠른 소득증가를 경험했다. 또한 50대가 된 현재, 이전 세대들이 50대에 도달한 것보다 높은 소득수준에 있다. 그러나 그 이후 70년대생부터는 이러한 경향이 사라졌다.
이철승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60년대생들은 이전 세대들과 비슷하게 20대 중반에 입사해서, 이전 세대보다 빠르게 소득이 증가했고, 더 오래 정점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졸 이하 생산직이나 대졸 이상 사무직 모두에서 나타난다. 50대의 노동시장 상위 20% 점유율이 지난 10년간 크게 증가했다. 2004년 50대의 노동시장 상위 20% 점유율은 11%인 반면, 2015년에는 19%다. 이전 세대보다 더 오래 노동시장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1 참조)
또한 이후 세대들은 근속년수가 짧다. 같은 노조로 조직화된 정규직만을 대상으로 한 비교에서도 60년대 이전 출생 세대들은 70년대 이후 출생 세대들보다 근속년수가 길다. 1960년대 후반 출생의 2000년대 초반 때 근속년수와 1970년대 후반 출생의 2010년대 초반 때 근속년수를 비교하면 11.6년 대 9.7년으로 2년 정도 차이가 난다. 외환위기로 인해 입직시점이 늦어졌거나, 외환위기 이후 이직율이 높아진 것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국회예산정책처 심혜정 과장의 「연령-소득 프로파일(age-earnings profile) 추정을 통한 세대 간 소득격차 분석」 에 따르면 1997년 이전에 노동시장에 진입한 세대의 경우 그 이전 세대보다 생애전체의 소득수준이 뚜렷이 개선되지만, 그 이후의 세대는 정체한다. (그림 2 참조) 그 이유는 1997년 이후 노동시장 진입임금의 상승이 정체되거나 하락했기 때문이다. 진입임금의 정체 내지 하락은 생애주기 전체의 소득커브에 영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즉 연령 증가에 따른 소득상승률도 낮다.
심혜정은 1990년대 이후 대학 진학률의 상승, 청년층의 고학력화 현상을 고려하면 생산성 때문은 아니고, 고용시장의 구조적 변화로 인한 청년층의 고용사정 악화가 원인일 것이라고 추론한다.
2) 자산과 세습
둘째, 자산에 있어서도 60년대생은 1990년대 이후 대규모 아파트 공급과 주택금융화의 혜택을 받았다. 자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상속, 소득과 저축, 자산가격의 상승 등 다양해서 세대 간 비교가 더욱 까다롭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소득이 많으면 결국 자산 증가율도 높을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386 세대유감』이나 『세습 중산층 사회』는 몇 가지 단편적인 통계 자료들을 바탕으로 86세대가 자산을 증식시켜 온 전형적인 경로를 구성한다. 우선 『386 세대유감』에서는 가계순자산 증가 수준을 바탕으로 횡단면적 비교를 한다. 2006년에서 2010년까지 86세대의 가계순자산은 88% 증가한 반면 유신세대(50년대생)는 41% 증가했고, 산업화세대(40년대생)는 9% 감소했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분석은 없는데 사실 40년대생들은 소득이 줄어들기 때문에 자산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6세대와 유신세대의 차이는 주목할만하다. 2006년부터 2018년까지 분석 시점을 늘려보면 86세대 대졸 이상의 가계순자산은 96%, 고졸 이하는 73% 증가한 반면, 유신세대 대졸 이상은 37%, 고졸 이하는 45% 증가했다.
『386 세대유감』의 저자들은 86세대가 1989년 제1기 신도시 개발계획 이후 1991년 주택 200만 호 공급 시기에 분당, 일산, 평촌 등에 입주하면서 수도권 아파트 가격 상승에 가장 많은 혜택을 보았다고 추론한다. 이 시기에 86세대가 사회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도입된 주택청약제도와 주택금융규제 완화의 혜택도 받았다고 본다. (그림 3 참조)
86세대의 주택 자가점유율은 1993년 22%에서 2003년 51%로 증가한다. 나이가 들수록 돈을 모아서 집을 살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이 통계에는 연령효과도 포함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86세대는 아파트를 샀다는 것이다. 1999년 한국노동패널 조사에서 60년대생은 76%가 아파트를 보유한 반면 50년대생은 21%에 불과했다.
조귀동의 『세습 중산층 사회』 또한 86세대가 주택가격, 특히 수도권 아파트 가격의 상승에 가장 많은 혜택을 보았다고 추론하고 있다. 나아가 수도권에 아파트(주택) 2채 정도를 보유한 상위 10% ‘세습 중산층’이 형성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들과 하위 90%의 자산격차가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산은 세습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세습 중산층’ 86세대들이 특정 학군에 밀집하여 자녀들의 교육을 통해 능력 혹은 ‘스펙’까지 세습한다고 분석한다. 학군별 명문대 진학률, 대기업 신입사원들의 부모 학력 등의 통계를 바탕으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86세대 내에도 ‘학번 없는 60년대생’이 있고, 청년 내에도 연애, 취직, 결혼 등 포기하는 것이 점점 늘어나는 ‘N포세대’와 외국어 실력, 유학경력 등 부모가 만들어 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G(lobal)세대’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교육을 통한 세습 문제는 정량화하긴 어렵지만, 기회의 평등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현재 사회적으로 더 예민한 문제이다. 조귀동은 사실상 세대 간 격차보다 세대 내 격차와 그 격차의 세습, 즉 세대 간 이전에 더 주목한다. 그러나 세대 간 격차, 수도권과 지방 간 격차 등 ‘다중격차’를 만들어낸 첫 세대가 86세대라는 점을 지적한다.
3) ‘60년대생의 행운’ 혹은 아이러니
이것은 결국 한국 자본주의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한국 경제가 이전과 다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노동자 간 경쟁이 극단화되며 오히려 자본의 힘이 강해졌다는 식의 현상적 이해를 넘어 한국 자본주의가 1990년대 성장기에서 불황기로 국면이 완전히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외환위기 이후 IMF의 권고에 따라 금융세계화에 편입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윤소영 교수가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2001)』에서 제시한 한국경제분석을 참고할 수 있다. 이 분석은 자본축적의 추세선으로부터 이윤율의 추세선을 도출한다. 1979-80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한국 경제는 중화학공업화에서 신자유주의로 이행한다. 이윤율은 1977-79년 34.9%에서 80년 29.7%, 81년 34.0%에서 82-87년 43.6%로 상승한다. 그러나 1986-88년 3저 호황과 1989년 그것이 끝난 이후 오히려 재벌 체제가 강화된다. 수익성을 무시한 재벌의 과잉투자로 인해 또다시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87년 48.0%까지 상승했던 이윤율은 88-91년 35.8%, 92-94년 27.6%를 거쳐, 95-97년 21.4%로 급속히 저하한다. ‘지각한 88-89년 공황’이라 부를 수 있는 97-98년 공황은 한국 경제의 장기불황을 예고한다고 끝맺는다. (그림 4 참조)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86세대는 대학에서 군부독재 비판에 앞장섰고, 나아가 독점자본주의와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한국이 금융세계화에 편입되며 해외 자본이 유입되고 이를 바탕으로 재벌이 문어발식으로 확장할 때 사회에 진출한 것이다.
‘86세대의 행운’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시작될 때 사회에 진출해, 그 위기의 직격탄을 맞기보다는 성장기의 마지막 혜택을 입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또한 ‘학번 없는 60년대생’을 포함한 ‘60년대생의 행운’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졸 이하, 저임금 생산직 내에서도 세대 간 차이는 다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4) 도덕적 비판을 넘어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386세대 비판은 도덕적 비판에만 머문다. 『386 세대유감』의 저자들은 ‘사회적 기본권’을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불평등 문제를 논의할 때 가장 무난한 답이다. 자유권에서 사회권으로 확장, 정치민주화에서 경제민주화로 이행하자는 논의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이미 86세대가 지난 10년간 야당으로 있을 때 가장 많이 써먹은 논리다. 민주노동당의 무상복지 공약, 민주노총의 최저임금 1만 원 캠페인 등을 민주당의 공약으로 가져간 것이 바로 민주당의 86세대다.
그나마 이철승 교수는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정책 패키지를 제시한다. 노동시장 상위 20%의 임금 억제를 통한 청년 신규 고용, 연금제도 개편, 자산세 증가 등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 정책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철승은 여기서 “386세대의 두 번째 희생”을 요청한다.
이러한 세대적 희생이라는 요청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학번 없는 60년대생’, 특히 수도권에 거주하지 않는 1960년대생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한 정치적 네트워크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이득을 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고향 친구, 학교 동기를 보면 질투를 느끼듯, 오히려 같은 세대 내의 격차에 더 많은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민주화운동에 희생’한 경험을 정치 자산으로 삼는 민주당의 집권 엘리트 86세대들에게는 이런 도덕적 요청이라도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현재 ‘집권 86세대’들에겐, 세대 간 불평등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할 능력이 없다. 그 이유는 ‘집권 86세대’가 형성된 과정과 그 특성에 있다.
3. 문재인정부와 집권 86세대
1) 노무현과 문재인의 세 가지 차이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무엇이 다른가? 첫째, 경제정책에 있어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반경제학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노무현은 삼성경제연구소의 과외를 받고 이헌재와 같은 모피아를 중용하는 등 일정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다. 집권 초부터 재벌·공공부문의 조직 노동자와 대립했다. 철도민영화, 화물연대 파업, 기간제법 제정,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도입 등 임기 내내 민주노총과 강하게 대립했고, 노무현은 “노조의 특혜를 해소해야 한다”며 강경 대응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를 통한 사람중심경제로 3% 성장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양대 노총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분배하면 성장한다’는 주장은 경제학적 근거도 부족하고, 노동자도 좋고 자본가도 좋다는 궤변에 가까웠다. 결국 공정성 시비가 발생하고, 자영업자와 노동자 간, 청년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 갈등이 커졌다. 게다가 경기침체가 깊어지는 등 경기순환에 따른 대응도 실패했다.
비판을 받으니 슬그머니 소득주도성장에서 혁신적 포용국가로 포장을 바꿨다. 그러나 역시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고, 방향이 일관적이지도 않다. 최근에는 거시경제 개혁은 아예 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민주당의 총선 1호 정책이 공공 와이파이 확대였다. 일관적이고 경제학적 근거를 갖춘 대안 없이 임기응변식으로 불만을 달랠 뿐이다. 이런 반경제학적 정책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고, 그 위기를 진지하게 대면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분배를 둘러싼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더 심화시킨다. 장기불황을 인지하고, 그것을 관리하려는 신자유주의보다 더 노동자 민중의 삶에 파괴적일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특징은, 대외정책에서도 주관적 희망에 근거해 비현실적인 민족주의 선동을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 동북아 경제허브를 추진하고 햇볕정책을 계승했지만, 동시에 이라크 파병, 평택미군기지 이전을 강행했다. 집권 후반에는 동북아 경제허브에서 한미FTA 추진으로 선회했다. 이러한 행보는 "미국에 할 말은 한다"기에 노무현에 대해서는 일정한 기대를 했던 반미운동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또한 남북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북미 대화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빅딜이 가능할 것처럼 상황을 호도해 오히려 미국과 북한 양자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작년에는 일본과 갈등도 폭발했는데,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대응을 넘어 지소미아 파기를 선언했다가 미국과 갈등이 더 심해지면서 꼬리를 내렸다. 한일갈등이 정점에 있던 2019년 광복절에는 ‘남북 평화경제’로 일본을 이기겠다는 경축사를 해 비현실적이라는 빈축을 샀다.
이렇게 주관적 희망에 근거한 정세판단을 내리다보니, 전통적 동맹의 신뢰는 잃어버리고, 그렇다고 중국이나 북한에 대한 영향력도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현재 비핵화 협상은 교착상태이며, 일본과의 갈등 역시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민족주의 선동에 매달리고 있다.
북핵문제와 한일갈등은 미국 대선으로 인해 ‘휴전’상태에 있지만, 조만간 더 큰 시한폭탄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와 달리 현재 한국은 대외의존도가 더 심화 되어있다. 또한 미중관계가 경쟁적 갈등 국면이 되면서 고도의 전략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정세의 엄중함에 비해 문재인 정부의 실력은 노무현 정부보다도 취약하다보니, 수동적인 민족주의 감정은 더욱 극대화된다.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의 해법 없는 곤란 속에서 문재인 정권의 세 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반보수 포퓰리즘의 심화다. 반보수 포퓰리즘은 노무현 정권에서 시작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며 지지기반이 취약해진 노무현 정권은 ‘반기득권’개혁을 추진하며 지지층을 동원했다.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하며 친일-군부독재의 과거사를 쟁점으로 삼았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주류’를 공격했다. 그러나 4대 개혁 입법은 극심한 국론분열 속에서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개혁을 추진해보지만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는 발언이 나올 정도로 검찰과 갈등하면서 실패한다. 의회로부터 탄핵 되었으나, 촛불의 지지와 헌법재판소의 기각으로 기사회생한다. 지역구조 해소를 위해서라면 야당과 대연정을 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지만, 여야 모두로부터 고립된다. 결국 임기 말 지지율은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말보다도 낮았고 다시 정권교체를 허용한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원한에 사로잡힌 듯, 철저하게 ‘기득권’을 제압하려고 한다. 제1야당을 배제한 패스트트랙 처리를 통해 의회를 무력화했고, ‘조국사태’는 야당의 지속적인 장외투쟁, 국론분열을 폭발시켰다. 입법부의 약화와 극단적 국론분열은 상호 고소고발로 이어지면서, 검찰의 권한이 강화되고, 위헌소송을 통해 헌법재판소에 정치적 결정이 위임되는 식의 ‘정치의 사법화’가 발생한다. 청와대는 검찰을 악마화하는 동시에 공수처를 신설하고 경찰을 강화하면서 이러한 권력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더욱 강화한다. 국정농단(권력의 사유화)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적된 제왕적 대통령제를 해결하긴커녕, 더 강화하고 있다.
2) 문재인 정부의 집권 86세대
한국도 이런 정세에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주체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현 문재인 정권의 핵심 세력이 바로 80~9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86세대’라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정권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한다. 물론 86세대는 노무현 정권 때도 일등공신으로 나이에 비해 핵심 요직을 차지했으나, 경험이 부족했다. 노무현 대통령 본인도 한미FTA 추진, 야당과 대연정 제안 등 86세대와 다른 자기만의 행보가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을 폐족으로 불렀던 ‘친노’가 부활하기 위해 옹립한 인물이고, 그 과정에서 야당 생활을 거쳐 다시 집권한 민주당의 ‘집권 86세대’들은 이제 50대 586이 되어 정권의 핵심부에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20대 국회의원 128명에 대한 조선일보의 전수조사를 참고할 수 있다. 민주당 주류는 80~87학번이 67명이다. 그 중에도 1987년 항쟁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 세대인 81-84학번이 45명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반면 87년 항쟁을 겪어보지 못한 88-89학번은 2명에 불과하다. 90년대 학번은 10명이고, 최연소가 96학번(1977년생, 당선 당시 39세)이다.
이것은 86세대의 경험과 크게 다르다. 86세대는 자신들이 30대인 2000년 총선에서부터 국회에 들어오기 시작해 2004년 17대 총선에서 대거 진입한다. 이철승 교수의 세대별 국회의원 입후보자 및 당선자 분포를 보면 86세대는 자신들이 30대인 1990년대에 이미 역사상 어떤 30대들보다도 더 많이 공천을 받았고, 40대가 된 2004년, 2008년 총선에서 가장 많은 입후보자 점유율을 차지한다. 또한 당선자 점유율도 50대가 된 2010년대에 가장 높아지는데, 이전 산업화 세대(50년대생)보다 훨씬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다. 21대 선거에서도 86세대가 당선되면 60대가 되는데, 이른바 ‘386퇴진론’에도 불구하고 60대가 높은 비율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 즉 문재인 정부의 ‘비선실세’로 언급되는 이들도 86세대다. 이른바 ‘3철’ 중 양정철, 전해철도 그렇고, 선거운동 참모조직이었던 ‘광흥창팀’도 13명 중 2명(이진석, 탁현민)을 제외하면 모두 86세대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윤건영 국정상황실장(국민대 88학번 총학생회장, 문재인 후보 시절 비서관)과 김경수 경남도지사(서울대 86학번, 이른바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다. 댓글조작 혐의로 구속 중인 김동원(드루킹)은 그들이 실질적 권력서열 2위, 3위라고 주장한 바 있다.
광흥창팀 13명 중 양정철 등을 제외한 10명이 청와대로 들어갔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기소 내용과 각종 언론기사에 언급되는 청와대 보좌진들 대부분이 82-87학번 운동권 출신이다. 전대협 3기 의장인 임종석 전 비서실장(한양대 86학번)이나 사노맹 출신인 조국 전 민정수석(서울대 82학번)은 말할 것도 없고,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고려대 85학번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한병도 전 정무수석(원광대 86학번 총학생회장)도 마찬가지다. 선거개입 사건의 핵심 증거자료인 ‘송병기 업무수첩’에도 언급되어 있는 임동호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임종석, 김경수 등과 술자리에서 울산시장 경선을 포기하는 대신 오사카 총영사를 제안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 후 임동호는 말을 바꿨고,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상황이다. (그림 5 참조)
문재인 정권 첫 정책실장이었던 장하성 교수가 대표적 ‘폴리페서’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이던 시절에는 소액주주운동을 이끌며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주창하다가 안철수 선본에 참여하며 불평등 문제를 강조하더니, 문재인의 ‘삼고초려’를 받고는 소득주도성장론을 이끄는 청와대 정책실장이 되었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과 갈등 끝에 동시에 교체된다.
86세대, 특히 전대협 지도부 출신들이 현재 권력 실세라는 것만 문제로 제기하면 형식적 비판에 머물기 쉽다. 어느 정권에서나 ‘비선실세’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정치 현실로 인해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하던 시절부터 보좌했던 참모들이 공적 지위를 넘는 권력을 행사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포회 출신)’ 이나 박근혜 정권의 ‘십상시’도 그러했다. 형식적 비판은 앞서 살펴본 경제적 불평등론과 비슷하게 “후배에게 기회를 주라”는 86세대 용퇴론이라는 도덕적 비판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머물게 아니라, ‘집권 86세대’의 특징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4. ‘집권 86세대’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1) 반경제학과 민족주의의 근원: 1980년대 학생운동의 자주노선
또한 학생운동의 규모와 사회적 영향력도 극대화된다. 그 정점은 1987년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출범에서부터 1991년 5월 분신정국까지로 볼 수 있다. 전대협은 1992년 6기를 끝으로 1993년부터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전환한다.
보수진영의 악의적인 왜곡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80년대 학생운동이 급진화되고,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자생적인 주체사상파(주사파)가 형성되고 이것이 강력한 영향을 미친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80년 광주항쟁의 비극을 반추하며 대중적인 반미정서가 형성되고, 이런 배경에서 1985-86년경 자생적 주사파가 형성된다. ‘강철서신’의 선풍적 인기가 이를 상징한다. 물론 비주사NL로 불리는 경향이 1985년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 이후에도 전대협-한총련 초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체사상이나 수령론에 대해 의문을 가질 뿐 학생운동의 진로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같은 노선으로 일관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흐름과 쟁점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리는 보론을 참조하라.)
1986-1987년을 경과하면서 NL그룹은 학생운동의 다수파가 된다. 이 과정에서 NL그룹은 야당(신민당)과 재야(민통협 등)의 ‘직선제 개헌론’을 적극 수용한다. 주체사상의 ‘대중노선’에 대한 강조와 반미구국통일전선론에 따라 소부르주아는 물론 민족부르주아지와도 전략적 차원에서 연합할 수 있다는 논리(민주대연합론)가 영향을 미쳤다. 혁명의 주력은 북한(‘민주기지’)이며 남한의 운동은 ‘민주적 자주정부’를 수립해 북한과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선통일후변혁론’도 같은 맥락에 있다.
NL그룹은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조직해 1987년 6월 항쟁에 적극 참여했고, 대선국면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지지(비지) 입장에 선다. 그리고 1988년 전대협을 통해 ‘반미조국통일투쟁’을 추진한다. 그러나 PD그룹은 이러한 통일투쟁이 한창 성장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투쟁과 같은 당면 계급투쟁을 방기하는 ‘소부르주아성’을 지니고, 김대중(평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PD그룹은 선변혁후통일론, 남한 혁명의 독자성을 바탕으로 민중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독자후보론, 독후)를 모색했다.
전대협의 통일운동은 민족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상기시켰으나, 오히려 당시 노동자운동에 역효과를 미쳤다. 또한 구체적인 현실과 맞지 않는 투쟁 슬로건이 제출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으며 1990년대 한총련의 학생운동은 빠르게 쇠퇴했다.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동떨어진 정세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 사회의 변화에도 둔감했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는 NL그룹 내부에서도 나왔다. 예를 들어 범민련 전 사무처장 민경우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전대협의 통일운동은 정세와 어울리지 않았고, 1991년부터 95년까지 매년 정권과 격렬히 충돌했으나, 의미있는 사회적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더 큰 문제는 면밀한 평가와 사색이 없이 경직적인 강박관념에 묶여 정권 탄압에 즉자적으로 대응하면서 학생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집권 86세대’는 전대협 운동을 지도하면서 얻게 된 대중적 명망과 조직적 자산을 바탕으로 정치권에 쉽게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주도했던 전대협 운동의 몰정세성에 대한 역사적 반성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 86세대는 반성은커녕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운동경력을 신화화했다. 자신들의 학생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는 국가기구를 통해 박제화된 담론으로 수렴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경력을 일종의 비판할 수 없는 ‘성역’으로 만들어, 공직 출마와 집권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집권 86세대는 문재인 정권에서도 몰정세적 오류를 반복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세계경제의 장기침체라는 현 정세에 적합하지 않은 담론이라도 가져다 쓴다. 바로 소득주도성장론이다. 또한 증세논의나 연금개혁과 같은 현 상황에 꼭 필요한 논의일지라도 결정을 회피한다. 북미협상에 대한 지나친 낙관처럼, 객관적인 국제정세를 주관적 희망을 투사해서 왜곡한다. 또한 궁지에 몰리면 이너서클과 핵심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반외세’ 민족주의 선동을 활용한다. 이 역시 국제적 분업구조에 기반한 글로벌 가치사슬과 금융세계화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2) 집권 86세대의 정계 진출 과정
첫 번째 경로의 대표적 사례는 이른바 ‘전대협 4인방’(이인영, 우상호, 오영식, 임종석)이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과반의석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해 ‘새천년민주당’이란 신당을 창당한다. 한국 정당사에서 단순히 권력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대통령에 의해 창당된 여섯 번째 집권당이자, 김대중이 주도해서 만든 여섯 번째 정당이기도 했다. 대중적 명망이 있던 ‘전대협 4인방’은 김대중의 ‘젊은 피 수혈론’에 의해 영입된다. 임종석과 오영식은 16대, 우상호와 이인영은 17대부터 당선되기 시작해 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원내대표, 철도공사사장을 역임한다.
이들처럼 바로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한 다수 정치인들은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민주당 당직자, 지역활동 등을 거쳐 2004년 탄핵촛불과 열린우리당 창당 바람을 타고 대거 국회로 입성한다. 조정식, 안민석 의원의 경우 2004년 이후 같은 지역에서 내리 4선을 한다. ‘잘 안 풀리는 경우’에는 기초지자체장, 기초의회로 진출하기도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경로는 정청래, 정봉주처럼 학원사업을 해 돈을 번 뒤 17대 총선에서 들어온 경우도 있으나, 참여연대, 민변, 여연 등에서 활동하다가 19대 총선에 들어온 경우가 더 전형적이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로 인한 2008년 총선 대패 이후, 2011년 ‘안철수 현상’(안철수의 양보로 무소속 박원순의 서울시장 당선)과 계파 간 갈등 속에서 위기를 겪던 민주당이 노동계와 시민단체를 포함하는 야당 통합을 추진(민주통합당)하는 과정에서 영입된다.
민주당 외곽에 있다가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대표적 사례는 85학번 구학련(NL)출신으로 참여연대 정책실장, 사무처장을 역임한 김기식이나 82학번 사노맹(CA)출신으로 한국노동연구원에서 근무했던 은수미다. 김기식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서 조국, 남윤인순 등과 ‘야권 통합’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진영을 규합했다. 이후 남윤인순과 함께 19대 국회에 들어간다. 김기식은 문재인 정부에서 금감원장에 임명되었지만 로비 외유 논란과 거짓 해명으로 ‘내로남불’이 되며 조기 낙마했다. 은수미는 이재명을 이어 성남시장이 되었는데 현재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은 상태다.
‘집권 86세대’는 정계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 당시에 내세웠던 이념이나 급진적 요구를 삭제해갔다. 실제 1990년대는 전향의 시대였다. 우선 86세대의 선배세대라고 할 수 있는 민중당 김문수, 이재오, 이우재 등이 1992년 총선 패배 이후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에 입당한다. NL쪽에서는 민혁당 핵심인 김영환과 홍진표가 1998년 『시대정신』을 창간하며 뉴라이트의 싹을 틔웠다. 이들이 명백한 보수주의로 전향한다면, 민주당의 ‘집권 86세대’는 주체사상이라는 극단화된 스탈린주의에서 모호한 ‘진보주의’로 전향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반미민족주의나 김대중(평민당)에 대한 지지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는 전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비해 이념과 정세인식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임종석과 우상호는 1994년에 청년정보문화센터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한다. 그러나 청년정보문화센터는 한청협(민청련의 후신) 같은 80년대 청년운동이 정체된 이유는 이념에 매달렸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며, 이념색의 탈각과 다양성, 수평적 연대를 강조한다. PC통신을 적극 활용하며 영화, 노래 등 관심사별 소모임에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386들의 ‘네트워크’ 붐은 90년대 들어 200-300개의 조직이 생길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 정계 진출위한 발판 만들기, 몸값 불리기라는 해석도 공존했다.
3) 반보수 포퓰리즘과 ‘주류교체론’
‘주류교체론’은 2001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발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합리적인 메인스트림들이 2002년 선거에서 새로운 판단을 해줄 것으로 믿는다.”) 메인스트림, 즉 주류는 무엇이냐는 논의가 촉발된 것이다.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비주류에서 새로운 주류로 전환하는 상징이 되었다. 2002년에 발표된 홍덕률 교수의 논문(『한국의 메인스트림은 누구인가』)은 집권 86세대가 지금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담론모형을 전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주류를 “사회적, 이념적 지도자집단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그들의 가치관과 이념, 문화”로 정의한다. 비주류는 여기에서 소외되거나 주류에 도전한다. 홍덕률은 멀게는 1987년부터 가깝게는 1998년 정권교체 이후 구주류와 새로운 주류 간 세력교체가 진행 중이라고 주장한다.
구주류는 TK(대구경북), KS(경기고-서울대)출신들이고 경제에서는 재벌, 문화에서는 언론자본이다. 이들은 추종자들을 지연, 학연 등의 연고와 이권 배분을 통해 동원한다. 구주류의 양대 이념은 ‘발전주의’, ‘반공반북주의’이고, 정적들을 억압하는 ‘권위주의’가 파생한다. 이들은 일제, 미군정, 이승만, 군부에 의해 위로부터 형성되었다. 친일, 인권유린 경력으로 역사적 정통성 상실했으나 언론, 학교, 복지재단 등을 소유해서 시민적 리더십의 공백을 대체한다.
반면 새로운 주류는 크게 두 집단으로, 하나는 학생운동세대다. 4.19부터 386까지 모두 언급한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 및 화이트칼라”다. 조직된 생산직, 사무직 노동자로 보인다. 신주류의 특징은 ‘시민적 리더십’ (노사모 등 직접참여), ‘민주주의 확대와 심화’(소액주주, 지방자치, 성평등)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합리적이며, 반부패, 탈냉전과 통일지향, 생태와 복지지향을 가지고 있다.
가히 노무현과 86세대에 대한 ‘용비어천가’라 할 수 있는 이 논문은 주류교체의 완성을 요청한다. 노무현 당선 이후 극심한 사회갈등은 정치적 주류 교체에도 불구하고 경제, 사회적 주류가 온존했기 때문이며, 혼란의 해법은 신주류가 경제, 사회 영역에서도 주류가 되는 것이다. 그 관건은 도덕성과 시민적 리더십의 확보에 달렸다고 전망한다.
홍 교수의 2003년 논문(「한국사회의 세대 연구」)은 이러한 주장을 세대론으로 가공한다. 산업화세대에 맞서 민주화세대와 정보화세대가 노무현을 만들었으나, 이는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반공규율사회’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기득권집단이 교체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2002~2003년 홍덕률 교수의 세대교체론은 사실 이미 1990년대에 86세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서울대 83학번 자민투 출신으로 현재 알라딘 서점 사장인 조유식 씨는 《월간 말》 기자 시절 ‘30대 차세대 대망론’을 보도한다. 30대가 된 86세대들이 ‘희생만 치른 채 60,70년대 학번과 90년대 학번 사이를 부유’한다는 ‘세대적 위기감’ 겪고 있다. 그러나 민주의식, 민족의식이 남달리 발달하고 세계화 정보화의 조류를 타는 첫 세대로서 ‘30대 역할론’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세대와 연대도 필요한데, “40대는 양김에 억눌리지 않고 이성계 역할, 30대는 정도전 역할”을 해야한다는 이광재 씨의 주장을 인용한다. 실제로 이광재는 안희정과 함께 자신이 보좌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며, 노무현정권의 실세(‘좌희정 우광재’)가 되었다.
그러나 홍덕률 교수와 조유식 씨의 전망은 주관적 희망에 불과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무현 정부는 (신주류라 분류되었던) 노동자운동의 거센 저항을 받았고, 경제민주화로 포장된 소액주주운동은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소유권을 강화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 논리였다. 방폐장 선정 문제, 골프장 대량 허가, 천성산 터널 반대, 의료민영화 등 생태와 복지에서도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노무현의 ‘좌파 신자유주의’는 핵심 지지층을 분열시켰다. 정권 말에는 이전 정권과 다름없이 대통령 친인척 및 핵심 인사들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스스로 ‘친노는 폐족’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완전히 고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권이 실패했음에도, 집권 86세대는 반MB투쟁과 박근혜 퇴진 촛불을 거쳐 문재인 정권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친노’는 ‘친문’이 되었고, ‘노사모’는 ‘달빛기사단’이 되었다.
4) 반보수 포퓰리즘의 심화, ‘조국사태’
세계 경제의 객관적 정세에 대한 성찰과 구체적인 한국 사회 개혁 대안이 없기에, ‘86세대의 특징’인 ‘도덕성’과 ‘시민적 리더십’에 더 기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과 박근혜의 각종 비리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며, 이 과정에서 인격적 비난이나 음모론도 서슴지 않는 것을 ‘도덕성’라 부를 순 없다. 또한 네이버, 다음 뉴스를 댓글부대로 장악하고, SNS를 가짜 뉴스로 도배하고, 문재인을 비판하는 정치인들을 집단 린치하는 것을 ‘시민적 리더십’이라 부를 순 없다.
집권 86세대의 행태는 한국적 포퓰리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군사독재라는 직관적 ‘거악’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경제적으로는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는 장기불황 속에서 구조적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 노무현을 선택했다. 노무현은 재벌과 기재부 관료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일부 수행했으나, 계급적 지지기반이 더욱 취약해지면서 신자유주의 개혁도 실패했다.
집권 86세대는 지지층을 동원하기 위해, 반대세력을 수구보수(기득권)로 정의해 주류-비주류라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균열을 발생시킨다. 지식인(엘리트)에 적대하는 대중이라는 표상을 형성한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기보다 반대세력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을 다졌다.
집권 86세대와 문재인 지지자들은 반보수 반기득권 포퓰리즘을 더욱 심화시켰다. 정권을 비판하는 자들에겐 기득권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토착왜구냐’, ‘조중동같다’, ‘군사독재 잔재’와 같은 식으로 과거사와 결합한다. 냉전 시절의 반공주의와 닮았다. 집권 86세대는 빨갱이, 주사파와 같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냉전시대 이분법적 논리라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한 비판에 똑같이 이분법적 논리로 적대화한다.
최근의 검찰개혁과 조국사태는 반보수 포퓰리즘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극명히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권은 경제정책과 대북정책이 궁지에 몰리자, 검찰개혁에 몰두한다. 정권이 끝난 뒤 수사받고 구속되지 않으려면, 나아가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엘리트 기득권에 일정 양보했던 노무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제1야당을 배제하고 패스트트랙을 추진하더니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청와대를 수사하는 검찰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한다.
‘조국사태’와 연이은 청와대의 선거개입 의혹에도 문재인 정권은 책임있는 해명은커녕, 최소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수준의 사과도 없다. (그림 6 참조) 오히려 “정치적 의도가 의심된다”(하명수사 개입 의혹에 대한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의 입장문)는 둥 적반하장의 태도로 일관한다. ‘신주류’ 집권 86세대가 권력에 몰두하고, 진영논리에 갇힐수록, 공동체의 보편적인 가치와 원칙은 사라지고 있다.
5. 세대교체인가, 대안이념 재건인가
1) 한국의 포퓰리즘
‘집권 86세대’는 어떻게 대중적 지지를 얻었을까?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대세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열성지지자들의 역할, 언론매체의 문제, 역사의 정치화 등 보다 풍부한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는 앞에서 살펴본 세대 간 불평등과 ‘집권 86세대’의 관계만 고찰해보고자 한다.
앞서 세대 간 불평등, 즉 ‘60년대생의 행운’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시작될 때 사회에 진출했기 때문임을 확인했다. 위기의 직격탄을 맞기보다 성장기의 마지막 혜택을 입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본질은 86세대 그 자체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다.
이것을 구조적 위기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면, 보편적 대안을 고민하기보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사익을 추구하게 된다. 집권 86세대는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반기득권’이라는 구호로 동원하지만 반경제학적 무능으로 인해 해법은 없다. 재벌체제로 인한 노동자 내부의 격차 확대가 지속된다. 그러나 그 원인을 다시 보수 기득권 탓으로 돌린다.
상대적 고임금과 고용이 보장된 상황에 있는 수도권의 대졸자 전문직, 사무직 계층이나 부산, 울산, 경남의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계층은 ‘정규직 과보호’를 외치는 보수 신자유주의자들보다, 경제적 대안은 없지만 ‘반보수’에 몰두하는 집권 86세대를 선호한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비판적 지지’의 논리가 나타난다.
성장기 끝물에 재벌, 공공부문에 입사한 60년대생 노동자들의 경제적 사익추구와 집권 86세대의 정치적 사익추구가 기묘하게 결합한다. 때로는 서로 견제하지만, 때로는 영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2) 세대교체인가, 대안이념 재건인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86세대를 기득권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86세대가 1990년대에 이미 사용했던 논리다. 게다가 진보를 자임하는 집권 86세대는 세대론적인 비판을 보수적 논리로 치부한다. 따라서 한계적인 도덕적 비판보다는, 객관적인 정세분석을 통해 문재인 정권으로 표상되는 집권 86세대의 ‘진보성’이 파산했음을 평가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를 통해 다음 세대가 대안 이념을 바탕으로 집권 86세대와 단절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2000년대 학번인 필자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80년대 학생운동을 막연히 동경했지만, 노무현 정권의 변절한 86세대 정치인들이 미웠다. 한 86세대 교수님은 학생운동을 한다는 말에 정치인이 되고 싶냐고 묻더니, 내 친구들은 출세하려고 운동했다며 결국 이용당할 뿐이라 걱정하셨다.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순수성을 의심받는 이유가 86세대 때문이라 생각했다.
60년대생은 아니지만 86세대를 대표하는 유시민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을 미워했다. 경제적 객관성과 합리성을 근거로 불평등과 노동자의 아픔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한 술자리에서는 노동자의 권리와 도룡뇽의 생명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친구에게 화를 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대통령 노무현은 비판하지만, ‘바보’ 노무현, ‘비주류’ 노무현은 지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유시민은 자유주의적 지식인에 미달하는 정권의 나팔수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자기의 이익, 자기 진영의 이익을 위해서는 객관성이나 공정성도 무시하는 포퓰리즘과 자유주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의 20대는 자유주의를 잘 몰랐기에, 자유주의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만 있었다. ‘자유주의를 지양하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에도 미달하는 포퓰리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이런 인식의 한계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반보수투쟁에만 몰두하는 것의 문제점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집권 86세대는 자신의 운동경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포장하지만, 그들은 1980년대 민중운동과 학생운동을 대표할 수 없다. 그 시절 이름 없는 수많은 청춘들은 분명 더 자유롭고 평등하며 풍요로운 사회를 꿈꿨으리라. 그러나 포퓰리즘은 정반대의 결과를 만든다. 문재인 정권이 리버럴 진보가 아니라, 타락한 포퓰리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시절의 꿈을 계승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론] 1980년대 학생운동 내 주사파와 NL노선의 흐름
광주항쟁과 반미정서
1980년대 학생들은 광주항쟁 상황을 찍은 비디오를 돌려 보며 정권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반성, 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예를 들어 1984년 광주항쟁 4주기의 한 추모사를 보면 “올해도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와 같은 부채의식이나 “기필코 당신님들의 유지를 굳게 이어 당신님들의 원혼이 고이 잠들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저희들의 맹세”와 같은 헌신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당시를 지배했다. 60년대생은 아니지만 86세대를 대변하는 인물 중 하나인 유시민 작가는 2013년 발간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당시의 자신을 회고한다. 1980년 대학교 3학년으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그는 5월 17일 계엄사령부 합수본으로 끌려가 이리저리 2달간 끌려다녔다. “크게 다치거나 죽지 않은 것은 때로 비겁하게 처신한 덕분이었다”고 회상한다. 고문과 괴롭힘은 김대중과 학생운동의 관계를 만들어 내려는 목적이었고, 자신은 50만 원을 당시 총학생회장인 심재철로부터 받았다고 거짓 진술을 했으나, 이후 ‘무림사건’으로 알려지게 되는 지하조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현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인 심재철은 작년에도 이와 관련해서 유시민을 배신자로 비난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여기에 광주의 비극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문제가 ‘반미감정’의 확산에 크게 작용했다. 1980년 12월 농민, 학생들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영감을 받아 1982년 3월에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데다가 주장의 내용도 크게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부산대, 부산여대, 고신대 등에서 모인 부산지역 대학생들은 미국문화원 문을 깨고, 실내에 잠입, 휘발유를 쏟아붓고, 불을 붙였다. 미국 문화원이 불에 타는 동안 학생들은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전두환의 북폭작전’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미국은 더이상 한국을 소국으로 만들지 말고 한국에서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가 실린 유인물을 뿌렸다. 미국문화원은 전소했고, 이 과정에서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화상으로 인한 중경상을 입었다. 뒤이어 4월에는 ‘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시위’가 발생했다.
주체사상과 자주노선의 결합
1985년 하반기 ‘삼민혁명론’이 다양한 비판에 노출되고, 개헌 투쟁의 목표과 과정을 둘러싼 논쟁이 변혁노선 논쟁으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은 86년에 다시 분화한다. 서울대에서는 ‘민족해방 민중민주 혁명’(NLPDR) 노선의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은 산하 공개투쟁조직으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고 기관지 《해방 선언》을 발간한다. 한편 ‘민족 민주 혁명’(NDR) 노선은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을 결성하고 산하 공개투쟁조직으로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결성하며 기관지 《민족 민주 선언》을 발간한다. 자민투는 “반전 반핵 양키 고 홈” 의 슬로건을 바탕으로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였고, 민민투는 “헌법 제정 민중의회 소집(CA)”을 개헌 투쟁 노선으로 삼았다. ‘구학련-자민투’(NL)와 ‘전민학련-민민투’(CA)로 분화 대립하게 된다.
자주노선이 ‘구학련-자민투’로 체계화, 조직화 되는 과정은 1985년부터 시작된 주체사상의 조직화와 관련이 있다. 1986년 초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작성된 팸플릿이 서울대를 시작으로 수천, 수만 부로 복사에 재복사를 거듭하며 전국의 대학·노동현장·재야운동권으로 퍼져나갔다. 나중에 이 문건들은 책으로 만들어지고 ‘강철서신’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첫 번째 팸플릿이었던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동안 학생운동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KBS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에 대해 주목하면서 “비록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역사의 주인의 민중이기에 남의 일처럼 생각해선 안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지금 청년학생들에게 부과된 가장 크고도 중요한 임무는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이해”하여 굳게 뭉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강철’은 이후 서울대 법대 82학번 김영환이라고 밝혀지게 된다.
오픈서클(학교본부에 등록되어 본부서클이라 부르기도 함) 고전연구회 소속이었던 김영환은 정대화(법대 82학번), 김지연(약대 83학번) 등과 함께 1985년에 단재사상연구회라는 비합법 언더서클을 조직했고 이들은 학생운동 주류를 비판하면서 “한국은 미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신식민지 사회”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안병직 서울대 교수의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예속과 함성》같은 팜플렛의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이른바 자생적 주체사상파(주사파)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학생운동의 반미정서와 자주노선은 1986년을 전후로 주체사상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물론 자주파 전체가 주사파는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80년대 중반 이전에도 반제국주의, 반미를 강조하는 자주노선 운동은 존재해왔다. 그리고 주사파가 확산될 때도 이른바 비주사NL이 존재했다. 주사파 또한 80년대에는 북한의 대남공작사업의 직접적 결과라기보다 북한 방송이나 해외 서적을 스스로 학습하는 방식 등으로 자생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더 크다. 주사파는 김일성주의에 입각해 조선노동당을 전체 혁명의 영도조직으로, 남한혁명에서는 통혁당-한민전을 영도조직으로 채택한다. 또한 수령의 영도가 필수적이라는 ‘혁명적 수령관’을 가진다. 자주파와 주사파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주요한 방침 결정에서 협력적 관계를 형성했다.
애학투련과 전대협
정작 애학투련의 지도부는 재야, 야당과 일정하게 연대하며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 전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애학투련은 기존의 과격한 선도적 투쟁의 오류를 비판하며 대중의 인식과 요구에 맞춰 대중노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오류들을 극대화해서 뼈져리게 느끼게 함으로써 이후 투쟁에 일종의 ‘타산지석’이 되었다.
활동가들의 대규모 공백과 단절 속에서 NL그룹이 1987년 총학생회 다수를 차지하며 1987년 5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이 조직되고 의장, 부의장과 산하 4개 지구별 대표자를 두는 안이 확정된다. 이인영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현 더불어민당 원내대표)이 1기 의장으로 선출된다. 이 때 각 지구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캠퍼스를 정했는데, CA노선의 성균관대를 견제하기 위해 동부로 분류되던 고려대가 북부로 이동해 대표를 맡고, 동부는 한양대가 맡게된다. (참고로 서부는 연세대, 남부는 서울대였다.)
서대협은 87년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 참여하지 못한다. 당시 국본과 연대사업을 담당했던 김성환(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의원)은 신민당 내의 김영삼(YS)계가 친김대중(DJ)계인 재야 민통련에 이어 학생운동 세력까지 국본에 들어오면 친DJ 세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고 기억한다. 서대협은 국본에 참여하진 않아도 모든 일정을 함께했다. 그리고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전날 총학생회장들 모임에서 전국 단위 학생연대조직 건설 논의를 시작한다. 총학생회장 모임과 활동가(“임시 연락대표”) 모임의 이중적 형태를 띤 18개 지구 대표자협의회를 바탕으로, 8월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출범시킨다. 활동가 멤버들은 전대협 산하 “연락사무국”으로 전속된다.
전대협은 NL진영의 일방적 주도로 이뤄졌다. 출범식의 슬로건은 ‘통일의 물결로 굽이쳐라. 내 사랑 한반도여!’였고, 1988년 이후 효과적인 반미투쟁의 일환으로서 ‘조국통일 촉진투쟁’, 즉 ‘반미조국통일투쟁’을 전국적으로 조직한다. 이는 88년 2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투쟁’, ‘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투쟁’,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투쟁’으로 현실화된다.
한편 1989년 이후 민중민주파(PD) 학생운동이 나타난다. 전대협의 NL노선에 대한 다양한 비판세력들이 일정한 이념적 경향을 중심으로 수렴되었다. 또한 기존 CA그룹의 NDR노선은 레닌 초기 노선을 한국에 기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그 한계를 답습해 NL의 개량주의와 철저히 단절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레닌주의적 문제의식을 더욱 급진화했다. PD내부에 여러 정파조직이 존재했는데, 제파PD그룹, AMC그룹, 진학련 정도가 큰 줄기를 이룬다. 한편 CA그룹은 다수는 NL과 PD에 흡수되고, 일부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조직한다. PD노선은 1989년부터 급속히 성장해, 세력 면에서는 NL에 미치지 못하지만 NL-PD의 논쟁 구도를 자리잡게 한다.
전대협의 통일운동은 청년학생의 ‘자주교류’ 요구와 ‘분단올림픽 저지’라는 정치적 슬로건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6·10 학생회담과 공동올림픽 개최를 이슈화했다. 5월 15일 조성만 열사(서울대 화학과 2학년)는 “공동올림픽 쟁취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구호가 담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1989년에는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공안정국이 나타나고, 그 여파 속에서 정부가 학생들의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불허를 밝혔다. 그럼에도 전대협은 비밀리에 임수경 씨의 평양축전 참가를 강행한다.
인민노련, 삼민동맹과 같은 노동자운동과 PD그룹 학생운동은 전대협의 통일운동에 대해 ‘소부르주아적 통일운동’이고 ‘김대중(평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일관된 목표에 있다고 비판한다. 1989년에 임수경 씨의 방북에 대해서도 “노동조합운동을 필두로 계급대중운동이 고양되고 노태우 정부와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전대협의 투쟁은 이를 방기할 뿐만 아니라 공안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또한 “남한 민중의 독자성”이라는 문제도 제기된다. “한국운동이 처한 구체적 현실과 조건에 부합한 것인가, 아니면 북한의 대외정책에 남한 운동을 종속하는 것인가”라는 쟁점이 제기되는 것이다.
전대협은 1989년 3기에 이르러 자체 사무실도 마련하고, 최대 100여 명에 가까운 전업활동가가 중앙 집행국에서 활동하며 강력한 결집력과 영향력을 만들었다. 1, 2기 고려대 출신 의장에 이어, 3기에서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인 임종석(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의장을 맡는데,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은 PD그룹이었고, 고려대도 NL-PD가 비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양대, 경희대, 건국대 등 서총련 동부지구에서 NL은 초강세를 띠었다. 또한 4기에는 송갑석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의장으로 선출되며 지방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렇게 서울 주요 대학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며 평시에 10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만들어진 것이다. 1990년 《시사저널》의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하는데, 1991년 분신정국과 강경대 사망사건을 정점으로 영향력이 꺾이고, 1996년 전대협의 후신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