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민주노총 총선방침 비판
실패한 전략은 청산해야 한다
정치방침 없는 선거방침
2월 25일 민주노총(위원장 김명환)은 4·15 총선의제로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사회대개혁’으로 불평등·양극화 해소!”를 내걸고 ‘전태일 2법’, ‘불평등·양극화 해소 8법’, ‘21대 국회가 해야 할 21대 입법 과제’를 발표했다. 또 이를 총선 전까지 공론화하고 21대 국회에서 10대 입법과제, 특히 전태일 2법을 최우선으로 쟁취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1월 30일에는 총선방침을 수립했다. “노동기본권과 민생보장, 적폐청산, 특권철폐를 실현하는 진보개혁 국회 쟁취”라는 기조 하에 5개의 진보정당(노동당, 녹색당, 민중당, 사회변혁노동자당, 정의당)을 지지하고, 민주노총 후보를 각 연맹, 산하조직이 심의하여 추천한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정당과의 후보단일화를 추진할 경우 민주노총 후보 자격을 상실한다.
그런데 왜 정치방침은 없을까?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란 정당건설과 같은 정치적 전략, 혹은 ‘배타적 지지방침’과 같은 행동통일을 규율하는 수준의 정치실천을 지칭한다. 선거방침은 정치방침을 실행하기 위해 정세에 맞춘 구체적인 후보전술과 투표방침을 뜻한다. 김명환 집행부는 현재는 낮은 수준의 정치방침조차 대의원대회 논의에 부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정치방침 없는 총선방침을 세웠다.
사실 정치방침의 공백은 현 집행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 낮은 수준의 정치방침도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 민주노총의 현실이 맞다. 지난 2017년의 경험을 상기해보자.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집행부는 민중진영 단일후보를 추대하여 대선에 대응하고, 2018년 지방선거에 선거연합을 추진하여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자는 안을 올렸다. 그러나 원안이 부결되었고, 그 외 4개의 수정안도 모두 부결되었다.
집행부의 안은 35.1%가 찬성했고, 진보진영 출마자 간 합의로 단일화가 이뤄질 경우 민주노총이 구체적인 지지방안을 수립하고, 선거연합정당 창당문제는 일단 유보하자는 안(수정안2)이 48.9%의 가장 높은 찬성률을 보였다. 그 다음 두 가지 방안 모두를 삭제하자는 안(수정안1)이 40.8% 찬성률로 나왔다. 여기서 수정안 1과 2가 그나마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의미를 주목해보자.
표결 결과로 지역과 현장 조합원들의 의견을 해석해본다면 이렇다. 첫째, 현재 또는 당분간 민주노총은 정치방침을 결정할 수 없다. 둘째, 정파의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한 정치세력화 운동을 지속하는 것을 조합원들은 반대한다. 셋째, 민중당, 정의당의 파괴적인 결별의 역사를 민중단일후보로 봉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진보정치 대통합은 ‘선거연합’, ‘진보정치연합’과 같은 어떤 정치 공학적 테크닉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거방침도 무력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지지’라는 투표방침이 진보정당 자체의 득표율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미해지고 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정의당·녹색당·노동당·민중연합당의 정당투표 지지율(8.95%)은 역대 총선 대비 최저 수준이었다. 17~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들은 평균 10% 이상의 정당득표율을 얻었는데, 17대 총선의 민주노동당(13%)과 19대 총선의 통합진보당(10%)에도 못 미쳤던 것이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현재 100만을 넘겨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진보정당에 대한 투표율은 감소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투표지침조차 따르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민주노총 선거방침은 현실적 문제가 있다. 먼저, 상급단위가 선거방침을 어느 수준까지 강제할 수 있느냐이다. 총연맹의 정치방침은 산하조직들에게 몇 가지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의 목록(진보정당 시민경선 참여, 민주노총 후보출마 사업, 지지후보 후원과 세액공제사업과 같이 공식화된 활동 등)을 제시할 뿐, 사실상 각 조직들이 경제적 실리를 얻기 위해 행하는 입법 로비, 정책연대, 조합원 개별 후원사업, 나아가 비공식적 조직투표를 용인한다. 각 조직에서 실행되고 있는 민주당 세력이나 정치권과의 교류는 구체적으로 그 실상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며, 또한 상급단위가 개입하거나 규제할 명분도 없다. 각기 분열된 진보정당에 대한 불신도 한 축으로 존재하지만, 그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진보정당이 노조의 현안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데에서 오는 냉소가 훨씬 크다는 점이다. 민중당과 정의당의 존재가 소수의 명망가·활동가들의 인맥과 친분 이상의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진보정당에 투표해야 한다”는 방침은 조합원 대중들에게 공염불로 들릴 수밖에 없다.
둘째, 선거 시기 정치적인 쟁점들에 대해,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정책적 역량이 취약하다. 특히 지방선거와 총선과 같이 지역적이고 산업적인 정치 쟁점들이 민감하게 제기되는 시기에 노동자운동의 전국적 쟁점들은 지역과 현장에서 사라진다. 민주당이 선도하는 포퓰리즘적 공약들은 지역 발전주의를 동원해 이슈화된다. 여기에다 민주당은 노동조합의 과거 주요한 투쟁에서 제기된 쟁점이나 조직화 의제까지 공약으로 선점하여 노동조합을 적극적으로 흡수한다. 개별 조직들 스스로가 개별 지역적 관심사가 아니라 전국적 관점에서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이해를 바탕으로 쟁점을 제기하고 개입할 수 있는 역량이 전무하다. 결국 자신들의 현안에 대한 해법을 중심에 둘 수밖에 없다.
총연맹과 산별중앙이 조합원들에게 전달하는 선거방침은 매우 당위적 선언에 불과하여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공공기관과 대공장들을 중심으로 한 주요 노조들의 비공식적인 ‘정치행보’는 각 지역 차원의 은밀한 핫이슈가 되어 정치 가십란을 채운다. 민주노총의 정치전략이 불명확하고 정책역량이 취약한 상황에서 기층 산하 조직들은 실리적 판단으로 각자가 정치방침을 대체하는 활동들을 만들고 있다.
정치적 실리주의의 심화
김명환 집행부의 오락가락하는 행보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명환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촛불혁명’ 완수를 위해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와 협력을 약속했고 이는 2017년 11~12월 위원장 선거에서 조합원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집행부는 올해에도 "제1노총이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를 추구하며 주요 정부위원회, 정책기구에서 제1노총 순위변화에 따른 참여비율조정과 위원 추가배정 요구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게 더 많이 ‘읍소하는’ 정책은 사실 가맹, 산하조직들의 정치적 실리에 입각한 ‘솔직한’ 요구를 수용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민주노총은 과도한 정치적 실리주의를 제어하기 위한 일종의 마지노선을 방침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2017년 3월 임시대의원대회 대선방침이 하나의 선례이다. “민주노총은 보수정당을 상대로 한 정책적 견인이 아닌, 조직적인 지지를 금지하고 의제·투쟁을 중심으로 한 대선 대응사업의 성과가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틀이 될 수 있도록 한다.”고 결정했다. 이어진 3월 16일 중집에서는 산하조직이 보수야당에 정당기부금을 제공하거나, 경선에 참여하는 것은 대의원대회 결정사항에 위배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2017년 대선방침은 일종의 최소한의 방파제 역할을 설정하는 궁여지책이었다. 적극적인 정치방침을 수립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산하 조직들이 민주당 지지로 급격히 기우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침 역시 조직적 투표만을 금지할 뿐이고 민주당과의 정책적 연대는 여전히 열어두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개별적인 투표를 강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선거 시기 정책협약을 전제로 한 투표와 지지선언은 많은 기층 가맹 조직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공공운수노조의 경우, 지난 20대 총선(2016년)과 2018년 지방선거에서 “공공부문 법제도 개선과 사회공공성 의제들에 동의하는 제 정당들(진보정당 이외 정당 포함)과 정책협약 체결” 및 “민주정치세력 당선을 위한 20만 조합원 지지 선언” 같은 정치 사업을 진행했다. 보건의료노조 등 주요 산별운동도 이런 방식의 활동을 선거 시기 일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단위 노조별로 조직적인 민주당 경선 참여나 세액공제사업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기도 한다. 노조의 방침에 위배되지만 규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의 정치적 인식과 성향은 매우 각양각색이다. 자기 노조의 사안과 관련된 투쟁 사안 이외의 것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다. 문제는 기층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조직하고 추동하는 중간 매개자인 간부 활동가들의 정치적 판단과 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정파적인 판단과 입장을 중심으로 구획되어 움직이고 있을 뿐 건강한 토론을 전혀 조직하지 않는다.
다시 적극적으로 정치방침을 세우면 되는가?
먼저 진보정당의 이념과 노선의 문제는 심각한 쟁점이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출범 초기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 간의 대립, 2007년 대선 권영길 후보의 ‘코리아연방공화국’ 논란, 2008년 북한 문제를 둘러싼 분당 갈등, 2010년 이후 국민참여당과 통합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에 대한 동요,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에는 ‘민주당 2중대’ 연합노선 등 진보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은 여전히 첨예한 쟁점이다.
이 논란은 현재 정의당과 민중당 등의 이념과 노선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정의당은 공공연하게 ‘민주당 2중대’를 자처하고 있고 민중당은 여전히 퇴행적인 ‘북한식 사회주의’ 노선을 추종한다. 오늘날 정의당과 민중당 등이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심대한 쟁점들을 우회하기 어렵다.
진보정당이 민주당 등의 '개혁 포퓰리즘적 노선'과 분별되는 중장기적인 이념적 전략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진보정당운동은 한반도 핵전쟁 위기를 포함하여 북한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정의당과 민중당 지지가 민주당 지지보다 더 낫다고 설득할 근거는 무엇인가? 정치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정당들에 대해 과거 인맥을 근거로 관성적인 지지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소속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퇴행적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봐야 한다.
진보정당의 이념노선 문제 외에도, 민주노총의 정체된 정치 사업이 발전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과거에는 산별, 지역본부라는 전국조직질서가 진보정당의 대중적 기반이 되었지만 오늘날 진보정당에게 민주노총의 효용가치는 선거 시기 ‘조직투표’ 이외에는 없다. 역으로 민주노총 역시 조합원의 정치적 의식과 관련한 책임과 역할을 모두 진보정당에게 내맡겨두고, 각 노조는 실리적 경제투쟁만 집중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다. 일각에선 여전히 조합원 집단당원 가입 등을 동원하지만 이는 특정 정파들의 생존수단에 가깝다. ‘대중정당 지향’에서 ‘원내정당화 지향’으로 진보정당의 제도적 조건이 변모한 상황에서 정치사업은 더욱 형해화되고 있다.
오늘날 진보정당들을 포함하여 그 어떠한 정파와 활동가조직도 노동대중의 강력한 경제적 실리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유효한 정치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지지 금지, 진보정당 지지”라는 최소 마지노선 방침이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뿌리 깊은 실리주의를 막을 방파제마저 사라져 민주당 지지가 공식적으로 용인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민주노조의 최소한의 정체성은 파괴된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무기력한 상태라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이 상태는 전망이 없다. 그렇다고 한 걸음을 나아가는 것도 곤란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기력과 곤란이 정확히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되짚어봐야 한다. 안타깝지만 지난 민주노총의 25년 역사 속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노동운동의 핵심 전략이 정세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완전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전략의 실패를 인정하자
민주노총은 1996년부터 2010년까지 국민승리21 및 민주노동당 건설, 이를 통한 노동자 후보의 의회진출 및 지방정부 수권이라는 전략과 진보정당에 대한 조합원의 배타적 지지를 정치방침으로 유지해왔다. 이러한 정치방침 하에서 선거 시기 후보전술과 투표방침은 공세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보정당 내부의 분열과 극심한 정파갈등, 정세에 대한 민주노총의 모호한 입장과 수많은 논란들은 기층 조합원들로 하여금 민주노총이 지향하는 정치적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게 했다.
사실 정치세력화는 산별노조와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맥락에서 민주노총이 실행하고 있는 유일한 노동운동 전략이다. 1997년 경제위기에 직격탄을 맞은 대공장, 공공부문 노조들이 강력한 “자기중심적 실리주의” (자신의 이해관계를 전체 노동자의 요구와 맞바꿈으로써 연대를 파괴하는 노선)로 경도되고 있을 때, 민주노총은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기층에서부터 재건하는 방향이 아니라, 정치개혁을 통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라는 길을 채택하였다. 그 결과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축소하는 단결과 연대의 전략이 정당건설과 의회진출를 향한 ‘정치행위’보다 부차화되었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전략은 정확히 ‘정당건설’과 ‘의회진출’ 전략이었고 유일한 실현방안은 선거 시기 유의미한 정당득표였다. 그러나 전략의 실행과정은 정당, 노조, 정파 간의 파괴적인 분열과 갈등의 연속이었고 그 결과 노동자운동의 조직력은 상당히 소실되었다.
전략이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뜻한다. 그렇다면 먼저 정치세력화라는 노동운동 전략이 설정한 목표 자체가 올바른 설정이었는가를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정치세력화의 본래의 목표는 “노동자계급이 이념적, 조직적으로 제 정치세력과 분별 정립하여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현재 시점에서 진보정당의 이념은 퇴행하였고 조직은 분열하였으며 노동자운동의 영향력 있는 세력화는 실패하였다.
한걸음 더 들어가 정치세력화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과연 최선이었는가에 대해 평가해볼 수 있다. 정당건설, 의회진출이라는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 진보정당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조합의 인적, 물적 자원이 모두 정당으로 집중됐다. 기층조직 정치사업 기획은 모두 정당에게 의존하게 됐고, 노조 자체가 아닌 진보정당을 통해야만 조합원들이 정치, 사회적 의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실제 초기 정당설립과 원내진출 시기를 제외하면, 노동자가 계급적 임무를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은 전무했다. 민주노총이 노동자운동의 이념적 방향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정치의 영역을 진보정당운동의 역량 강화에 떠맡기는 동안, 오히려 노동조합 자체의 경제적 실리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사실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진보정당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의회 권력으로부터 자신의 투쟁 현안에 관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것 뿐이었다.
진보정당에 정치의 영역을 맡긴 ‘노동조합의 경제적 실리주의’는 오히려 진보정당의 발전을 제약한다. 2000년대 초반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에 성공하며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 분별되는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2004~2005년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무현 정부의 친노동자성을 기대하며 사회적 교섭을 추진해, 격렬한 논란과 갈등을 촉발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독자적인 정당을 강화해나가자는 정치방침과 친정부적 사회적 교섭을 최우선 전략으로 삼는 전략을 이중적인 목표로 동시에 추구하는 게 가능하겠냐는 문제가 제기됐다.
물론 노사정위원회 등의 교섭전략이 진보정당운동을 강화하는 문제 자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둘러싼 계급투쟁에 있어 응집력 있는 정치적 투쟁전선을 구축하는 것에 실패했던 민주노총은 친정부적인 노선으로 실리적 이득을 챙겨야 한다는 입장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정치전망의 불명확함은 노조와 정당 모두 당시의 집권여당의 정치권력에 의존하는 경향을 만들었다.
문제는 반복되었다. 2010~2011년 김영훈 집행부의 “반MB 민주대연합” 노선과 진보대통합 추진도 사실상 이러한 쟁점이 폭발한 사례이다.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연대를 실질적인 정치 전략으로 삼으면서, 분열된 진보정당의 통합을 추진한다면 대체 진보정당은 민주노총에게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국민참여당을 끌어들인 통합진보당은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사실상 폐기하고 민주당 세력에 의존하여 원내 의석을 거머쥐려는 목적을 가졌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유지해 줌으로써 “민주대연합” 노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치세력화 전략은 그 방법적 측면에서도 근본적 한계와 모순이 존재했다. 근본적 한계란 노동자운동의 이념적 혁신이 없는 정치세력화는 조합원의 강력한 실리주의적 편향을 유의미한 정치적 의식으로 전혀 조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노동자 내부의 심각한 격차를 해소하고, 자본가계급에 도전하는 ‘단결과 연대를 통한 세력화’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향한 분열과 경쟁’은 개별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 실리주의를 더욱 강화해 왔을 뿐이다.
이런 근본적 한계 속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노조의 자기중심적 실리주의가 정당중심의 정치세력화 전략을 추구했을 때, 오히려 기존 정치권력에 종속되는 퇴행을 거듭하면서 정치세력화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멀어진다는 역설이다. 조합원의 실리적 이해를 정당의 의석배분으로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정치세력화 전략은 결국 의회 및 행정부의 정치공학적인 힘의 논리에 종속된다. 그 결과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정치적 입지조차 제약을 받게 된다.
미국 민주당과 미국노총(AFL-CIO)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노조는 정당 정치인에 대한 입법로비에 집중하고, 정치인은 조합원에게 가시적 성과를 제공한다. 입법의 내용이 노동자의 계급 전체에 미치는 영향과는 전혀 상관없이, 노조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을 쇼핑한다. 한편 정당은 노조에게 선거 시기 조직투표를 요구한다. 이렇게 ‘비즈니스적 제휴’가 강화된 결과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 실리주의와 정치권력에 대한 의존성은 강화된다.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에 대한 반성 없이 관성적으로 매달린다면 미국노총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노동조합 스스로 정치세력이 되자
현재 노동조합의 현실은 눈앞의 문제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예를 들어, 지역과 현장에 무의미하게 하달되고 있는 민주노총의 총선방침에 대해 조합원들과 비판적 토론을 하기 어렵다. 또한 실리에 매몰되어 노조의 현안만 챙기거나, 오히려 반대로 소속 정당만 챙기는 기층 조직 간부들의 활동을 평가하고 교정하는 방안도 당장 찾기 어렵다.
문제해결이 곤란에 봉착할수록, 근본적인 전략의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세력화 전략이 노동자운동에 무슨 의미인지부터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과거의 정치세력화 전략은 노동조합이 정치세력으로 발전하려는 목표를 상실하고, 진보정당의 이념, 노선 상실과 노동조합의 실리주의라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은 노동조합 자체가 정치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정치, 사회적 역할은 민주노총 스스로 밝혀야만 한다.
그 방법은 분산되고 개별화된 이해관계를 실리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축소하고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연대전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노동조합 스스로 구조적 위기의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낡은 정치세력화 운동을 ‘청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