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NPT를 넘어 핵무기금지조약으로
2차 세계대전은 원폭 투하 직후 종결되었지만,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무기의 위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 새로운 ‘절멸의 무기’는 전 세계에 씻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전후(戰後) 수습에서 핵무기는 단연 중대 쟁점이 된다. 종전 다음 해인 1946년 결성된 UN(국제연합) 총회의 제1호 결의는 다름 아닌 “핵무기 폐기는 UN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세계 곳곳에서도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반핵운동이 태동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2차례의 원폭 투하와 종전은 전 세계적인 핵 개발 경쟁의 신호탄에 가까웠다. 종전 직후 미국은 핵무기의 생산을 중단하고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으로만 사용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냉전 질서의 형성 속에서 이는 말뿐이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핵실험을 단행하여 핵보유국이 되고, 영국도 1952년 10월 3일 핵실험에 성공한다. 국제 정세의 판도가 핵 경쟁으로 흘러가자 프랑스도 1960년 2월 13일 핵실험을 단행한다. ‘죽(竹)의 장막’ 뒤 중국도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실험을 실시한다. ‘인생은 선착순’이라 했던가. 미국, 러시아(구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 체결 이후 지금까지 이 5개 국가에만 보장되는, 특권적인 핵무기보유국(이하 핵무기국)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장외의 핵 군비경쟁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단적으로 2006년부터 6차례의 핵실험 끝에 ‘사실상의 핵무기보유국’이 된 북한은 ‘핵무기국 지위’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핵무기라는 존재 자체의 비인도성과, 북한의 핵 보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명백히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NPT 체제의 근본적인 불평등함은 이러한 새로운 핵무기 보유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NPT 체제 자체의 결함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움직인 핵보유국들의 역사적 책임도 있다.
이 글에서는 핵 군비 확장과 핵전쟁 위협을 제한하기 위한 사상 최대의 국제적 합의인 NPT의 한계를 검토하면서,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 끝에 탄생한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의의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 반핵평화운동의 현황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그 어디보다도 한반도에서,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함께하면서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전 세계 핵무기의 폐기를 견인할 것을 촉구한다. 지난 75년간 울려 퍼진 “핵무기 없는 세계는 가능한가?”란 물음에, “가능하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1. 핵무기비확산조약 체제의 형성
핵무기 확산을 방지하자는 구상은 국제사회에서 1950년경부터 나와 60년대 초 구체화되었다. 주로 비핵무기국이 핵군축안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미 상당수 국가가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추고 있어 핵무기보유국이 20~30개로 늘어날 수도 있으며, 이에 따라 핵전쟁 가능성이 극도로 높아질 것이란 위기감이 있었다. 1960년 1월 당시 핵잠재능력에 따라 국가를 분류하면, 핵무기 개발에 충분한 기술과 원자로를 가진 가장 유력한 핵잠재국가로는 벨기에,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동서독, 인도, 이탈리아, 일본, 스웨덴, 스위스 등 12개국이 있었다. 경제적·기술적 능력은 있으나 과학 수준이 조금 떨어지는 국가로는 오스트리아, 호주, 덴마크, 핀란드, 헝가리, 네덜란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 8개국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산업자원 및 과학 수준이 부족한 국가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노르웨이, 스페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6개국이 있었다.
이때 핵보유국의 수가 늘면 늘수록 핵전쟁 가능성이 커진다고 본 것뿐만 아니라, 핵확산 과정에서 약소국이나 혁명집단의 손에 핵무기가 들어갈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핵전쟁에서 잃을 것이 별로 없고 다른 수단이 없어 핵의 실전 사용에 끌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 과정이 그러했듯) 역사적으로 지역 전쟁은 강대국 간 경쟁과 결부되기 쉽고, 그러면 그러한 작은 나라나 집단의 핵무기 사용이 전 세계적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미국이 서독에 배치하기로 한 다각적 핵전력 문제로 핵무기의 양도 및 배치에 대해, 미소를 중심으로 한 각 진영 간 의견이 첨예한 대립을 보여 우발적인 핵전쟁 발발 위험이 고조되어 있었다. (다각적 핵전력이란 핵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전함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다국적군이 함께 운용하는 것으로 현재의 ‘NATO식 핵공유’의 전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1950년경부터 진행되어 오던 군축회담을 보면 전면적 군축 교섭에는 진전이 없기 때문에 가장 시급하고 중심이 되는 핵군축 문제라도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여러 핵군축안 중 핵실험 중지, 핵무기 금지나 비핵무기지대 설정 등 쉽게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보다 핵무기국의 수적 증가 방지에 중점을 두고, 이를 하나의 독자적인 조약으로 구체화하자는 아일랜드의 구상을 미국, 영국, 소련 등 핵무기국이 받아 안아 NPT로 가는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미 가장 군축 수준이 낮은 아일랜드 안을 채택한 것이었지만, 핵무기국들이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강대국의 핵기득권이 거의 손상되지 않는 내용으로 굳혀져 갔다. 1964년 중국의 핵실험 성공은 비서구 국가 및 제3세계에서도 핵보유국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미소 간 협상을 서둘러 재개하는 요인이 되었다. 1968년 미영소 3국 간 합의가 UN에 제출되었다. 그 다음 미소가 ‘미소 공동 확산방지안’을 작성하여 3월 UN총회에 회부하였고, 6월 19일 표결로 NPT가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으로 성립되었다. 2년 뒤인 1970년 3월 5일, 발효요건인 3개 기탁국(미국, 영국, 소련) 외 40개국의 비준이 달성되어 NPT가 발효되었다.
2. 핵확산 금지인가, 핵독점인가
① 비확산: NPT에 가입한 비핵무기국은 절대 핵무기를 (개발 혹은 양도를 통해) 획득하지 않는다. NPT에 가입한 핵무기국은 핵무기를 타국 등에 절대 양도하지 않는다. 여기서 핵무기국이란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에 성공한 국가, 즉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5개국으로 규정된다. (이 5개국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영구적인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② 핵군축: NPT는 모든 핵무기의 제거를 촉진하기를 희망하며, NPT에 가입한 핵무기보유국은 핵무기 경쟁중지, 핵군축, 일반적 및 완전한 군축에 대한 교섭을 추구하기로 약속한다.
③ 평화적 핵 이용: NPT에 가입한 핵무기보유국은 (①에 대한 보상으로) 핵 기술의 평화적 사용, 즉 핵발전의 혜택을 핵 비보유국과 공유한다.
명칭대로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인 한편, 국가 발전의 일환에서 핵발전 산업이 필요했던 많은 나라의 요구에 따라 평화 목적의 핵 활동은 장려한다. 그런데 기술 측면에서는 핵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사찰이 중요하다. NPT에 따라 핵의 평화적 사용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즉 핵무기 비보유국(이하 비핵무기국)이 핵발전 기술 및 시설을 무기용으로 전용하고 있지 않은지를 사찰하는 역할은 1957년 UN 산하 독립기구로 설립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맡았다. 핵무기국과 비핵무기국에 각각 다른 의무를 부과하는데, 비핵무기국은 NPT에 가입한 후 180일 이내에 IAEA와 안전조치협정 교섭을 시작해야 하며 교섭개시일로부터 18개월 이내에 안전조치협정을 발효해야 한다.
NPT의 의의는 ‘NPT 체제’라는 말이 널리 쓰일 정도로 전후 국제 정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핵무기국이 수십 개로 늘어날 수도 있었던 상황을 억제했다는 점, 궁극적으로는 모든 핵무기 철폐를 지향하는 조약임을 명시했다는 점에 의미는 있다. 2017년 핵무기금지조약 채택 이전까지 유일하게, 비록 부분적이지만 핵무기의 ‘보유’ 자체를 불법화하는 국제조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계는 더욱 분명하다. 가장 근본적인 한계는 NPT는 핵무기 ‘금지’ 조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핵무기 실험 금지가 조약 전문에 지향으로 제시될 뿐, 조약 본문에는 핵무기의 실험과 사용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없다. 이는 1975년 발효된 생물무기금지협약(BWC), 1997년 발효된 화학무기금지협약(CWC) 등 다른 ‘대량살상무기’를 다루는 조약이 해당 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금지하며 폐기 시한을 명시한 것과 큰 차이다.
여기에 더해 ‘NPT의 불평등성’은, 과연 NPT가 진정으로 핵무기 철폐를 지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공식 핵무기국의 ‘핵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수단인지 끊임없는 논란을 낳았다. 즉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들로의 ‘수평적 핵확산’을 막았을 뿐, 핵무기국의 ‘수직적 핵확산’, 즉 핵무기 수 증가를 막거나 핵군축을 강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핵무기국의 핵군축 의무는 ‘추구하기로 약속’하는 선에 그쳤고, 실제로 잘 실행되지 않았다. 핵무기의 ‘양도’는 금지하면서 여기에서 핵무기의 ‘관리’ 개념을 분리했다. 이걸 통해 미국과 소련이 각각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 기구 등을 통해 자국의 핵무기를 NPT 가입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 배치하고 통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핵무기국의 핵공격이나 핵무기 사용 위협을 제한하지도 못했다. 비핵무기국의 안전 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중대 쟁점이었다. 비핵무기국을 NPT 가입으로 견인하고, 핵개발 욕구를 해소하여 실질적인 핵 비확산 효과를 내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NPT 가입 비핵무기국을 핵무기국의 핵공격이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할 것이란 어떠한 약속도 없이 성안되었다. (다만 NPT 제7조에 “국가의 집단이 각자의 영역 내에서 핵무기의 전면적 부재를 보장하기 위하여 지역적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하여, 이후 세계 각지의 비핵무기지대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비핵무기지대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핵무기국의 안전보장, 핵 불사용 의무는 별도 의정서로 처리되는데, 여기에서도 의정서 서명·비준을 강제할 수단은 없다.)
이러한 점들은 미국 등 핵무기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의 핵개발 욕구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2003년 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실험을 본격화한 북한(1985년 NPT 가입. 현재까지 NPT에 가입했다 탈퇴한 유일한 나라다), 2018년 트럼프 정권이 미국-이란 간 핵합의(JCPOA)를 사실상 파기하면서 핵능력 복원에 나서고 있는 이란(1970년 NPT 가입) 등이 대표적 사례다. NPT 체제는 핵 숭배 이데올로기 자체가 강화되는 데에도 일조했다. 핵무기 보유는 다른 수단으로는 얻을 수 없는 불균형한 ‘국력’과 ‘국격’을 부여한다. ‘핵 주권’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민족국가의 주권이고 강대국의 개입을 물리칠 수 있는 자위수단인데, 이를 미국 등 핵보유 강대국이 NPT 등을 통해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핵무장 유혹을 느낀 것은 미국의 우방국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미국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를 묵인 또는 지원하거나, 핵능력을 적정선에서 제한하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인도의 핵무장과 NPT 비가입을 묵인했다. 각각 아랍 개입력 유지와 대중국 견제가 목적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체제 해소 이전 아프리카의 유일한 백인 반공주의 정권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무장도 묵인했다. (반면 2003년 미국은 이라크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만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이라크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사 결과 대량살상무기 자체나, 개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남한도 197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프로젝트 암호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유명한 핵무장 시도를 한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국의 베트남전 철군, 주한미군 감축, 중국과의 관계 개선 등이 진행되어 미국의 안보 제공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핵확산을 경계한 미국은 박 전 대통령의 핵시설 수입 시도에 중단 압박을 가했다. 1974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은 남한 정부가 미국 정부의 사전 동의나 허락 없이 핵연료 농축과 재처리를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남한은 결국 1975년 NPT에 가입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핵무장 시도가 NPT 가입으로 일단락된 것은 아니었다.)
핵무기의 비확산이라는 목표는 NPT를 명시적으로 위반하진 않는 행동들로도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사실상의 핵무기국’인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한때 핵무기를 가졌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의 핵 기술 및 핵물질은 미국, 프랑스 등 핵무기국이 ‘평화적 핵 활동’ 명목으로 이전한 것이었다. 비핵무기국 중에도 핵무기 개발에 충분한 기술을 가진 나라(서독, 스위스, 캐나다 등)가 많음에도, 비핵무기국의 타국으로의 핵시설·기술 전파에 대한 규정이 없어 이 역시 비슷한 문제를 낳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원자로는 캐나다로부터, 핵연료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려 한 것이 전형적인 예다.
3. NPT 평가회의의 역사와 쟁점
NPT는 10여 년간의 논의 기간 끝에 불평등한 구조의 조약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첫 평가회의부터 핵무기국과 비핵무기국 간의 논쟁 구도가 명확히 확립되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열린 9회의 평가회의 가운데 5번(1980, 1990, 1995, 2005, 2015년), 즉 과반수가 의견차로 최종문서(최종 합의 결과사항을 담은 문서)를 채택하지 못하고 폐회했다.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핵무기국의 군축 의무를 명시한 제6조가 제대로 이행되고 있냐다. 핵군축이 강제성이나 명시적 기한 없이 핵무기국의 자발적인 ‘노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NPT 및 국제 정치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평가를 위한 중대한 기준이 된다. 국제 평화운동은 대체로 핵무기 ‘비확산’은 그 자체가 목표라기보다, NPT 조약 전문에 드러나 있듯, 모든 핵무기의 폐기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채택한다. 하지만 핵무기국은 조약에 명시된 ‘군축’(disarmament)은 적절한 선에서 군비를 제한하고 규제하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보며,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러한 핵무기국 대 비핵무기국 및 평화운동의 갈등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9차례 진행된 NPT평가회의의 주요 쟁점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NPT 발효 이후에도 핵무기가 사라지지도, ‘비확산’되지도 않은 지난 5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1) 냉전 시기 NPT 평가회의
‘핵군축’에 대한 입장차도 평가회의의 주요 쟁점이었다. 그러나 NPT는 애초 포괄적·전면적 군축 논의를 핵군축 문제로 좁혀 등장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핵무기의 영구적 금지를 위한 단계적 조치임을 초기 논의과정에서 명확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핵무기국이 NPT 6조의 ‘핵군축’을 핵군비의 ‘전면 철폐’가 아니라 ‘제한’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만이다. NPT 발효 이후 진행된 1978년 제1차 UN 군축특별총회 최종문서도 핵군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핵무기 체제의 질적 개선 및 개발의 정지, ② 모든 형태의 핵무기 및 운반수단의 생산 혹은 무기급 핵분열성물질의 생산 금지, ③ 가능한 빠르게 궁극적이고 완전한 핵무기 철폐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저장 핵무기 및 그 운반수단의 포괄적이고 단계적인 삭감 실현.
이러한 배경에서 소련 붕괴와 ‘탈냉전’을 겪기 이전의 NPT 평가회의는 주로 핵무기국이 주장하는 ‘교섭의 의무’ 이행이 실질적인 ‘군축의 의무’ 이행으로 이어졌는지 검증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1차 NPT 평가회의(1975)
조약발효 직후인 1970년부터 첫 평가회의인 1975년까지 핵무기국(당시 가입국 중에서는 미영소) 측이 제6조의 의무로 이행하였다고 주장한 군축교섭은 해저핵무기금지조약, 생물무기금지협약,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등이었다. 그러나 비핵무기국은 ① 핵무기의 실질적 감소 ② 핵실험 횟수의 감소 ③ 핵무기의 질적 또는 양적 개발의 중지를 기준으로 보면 과거 5년간 군비축소는 전혀 이행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군비가 증가하였다고 평가했다. 비핵무기국은 ① NPT 가입국이 100개국이 될 때까지 10년간 모든 지하핵실험을 금지하고, ② 나머지 핵무기국도 NPT에 가입하면 영구적 핵실험 중지를 조약화하며, ③ 가입국이 100개국이 되면 핵운반수단과 ‘다탄두 각개목표설정 재돌입 비행체’(MIRV) 전략탄도미사일의 상한선을 각각 50% 삭감하고, (MIRV는 미사일 하나에 여러 핵탄두를 싣고 대기권 밖에서 각각 다른 목표 지점을 동시 타격하는 탄도미사일이다) ④ 이후 10개의 가입국이 더 생기면 다시 한번 (③의) 상한선을 10%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핵무기국의 군축 의무를 세부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핵무기국은 이를 거부하며, 근거로 포괄적 핵실험 금지는 미영소만이 아니라 다른 핵무기국도 포함해야 하고, 전략무기제한에 관한 내용은 미소 간 조약교섭에 대한 월권행위라는 것 등을 들었다.
미소가 최초의 양국 간 군비 관리 합의로 내세운 SALT I의 예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1972년 10월 3일 발효된 SALT I은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 일명 ABM조약과 전략공격무기제한조치에 관한 잠정협정, 일명 SALT 잠정협정으로 구성된다. ABM조약은 ABM(탄도탄요격미사일.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대공미사일로, 잘 알려진 패트리어트, THAAD, SM-3 등이 해당)의 설치 수, ABM용 레이더 설치 기준 등에 상한선을 두었다. 미소 각각의 국토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방어’를 허용하지 않고, 수도권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 방어, 즉 ‘거점 방어’를 위한 ABM만을 인정했다. SALT 잠정협정은 양국의 핵무기 수량과 사용기술(운반수단의 완성도 등)을 대상으로 한, 핵군비의 양적·질적 감축에 대한 합의였다. 양국의 무기 성능의 차이를 고려하여 각각의 (지상발사)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수를 규제하기로 했다.
이러한 내용은 실질적인 무기 감축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ABM 감축은 오히려 낙후한 장비의 대체와 ‘현대화’ 필요성을 상호합의한 것으로, 군비증강으로 이어졌다. 상호 간 무기균형이라는 원칙을 따르다 보니 미국은 약간의 무기 감축을 했으나 소련은 오히려 ICBM, SLBM 등의 수를 늘릴 수 있었다. 또한 양국은 새로운 무기 개발로 전략무기의 수에 상한선을 둔 SALT Ⅰ을 무력화했다. 미국의 MIRV는 미사일 하나에 여러 핵탄두를 싣는 것이라, 핵미사일 배치 수를 늘리지 않고도 공격력을 늘릴 수 있었다. 소련도 빠르게 MIRV를 개발하여, 이 역시 새로운 군비증강으로 이어졌다. 이런 것이 NPT 평가회의에서 핵무기국을 비판하고, MIRV화한 ICBM 감축을 요구한 배경이다.
2차 NPT 평가회의(1980)
지하, 지상, 해저, 우주 등 모든 환경에서, 민간용이든 군사용이든 모든 핵폭발·실험을 금지하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은 핵실험 금지를 통해 새로운 핵무기 개발과 기존 핵무기의 성능 개선을 막기 위한 것이다. 1996년에야 UN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아직도 발효되지 못했다. 발전용 또는 실험용 원자로를 보유한 전 세계 44개국 모두가 비준하는 것이 발효조건이나, 미국, 중국, 이스라엘, 이란, 이집트는 서명만 하고 비준하지 않았으며 인도, 파키스탄, 북한은 서명도 비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차 NPT 평가회의(1985)
4차 NPT 평가회의(1990)
2) 미소 냉전 종식 이후의 NPT 평가회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세계는 종전 이후 40여 년간 지속된 냉전의 해소라는 커다란 전환을 겪는다. 미소는 핵전쟁의 참화 대신, 서로를 겨누던 핵무기를 줄여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1987년, 미소는 INF 체결을 통해 미국과 소련의 사거리 500km에서 5,500km인 중거리 지상발사형 중거리 탄도, 순항미사일 폐기를 합의한다. 이는 1980년대에 부활한 유럽 반핵평화운동의 요구대로, 미국의 퍼싱 Ⅱ와 소련의 SS-20가 유럽에서 철수되는 것을 의미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한 달 뒤인 1989년 12월 3일, 마침내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다. 소련 중심의 군사동맹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되었고, 미국 중심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유럽에 대한 핵무기 공급을 80%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가장 극적이며, 실질적인 냉전의 종식을 상징했던 것은 1991년 12월 26일, 현실사회주의의 종주국이자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의 해체였을 것이다. 이는 냉전이 단순히 종식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이 진행된다. NPT가 지나치게 ‘미소 중심적’이라는 이유로 가입을 거부하던 중국과 프랑스는 1992년, 차례로 NPT에 가입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동맹국들 대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국가들의 대결 구도는 해체되었지만, NPT 내의 핵무기국 대 비핵무기국의 구도는 일정 부분 유지된다.
한편 1990년대 들어, 인도, 파키스탄의 핵무장 문제와 북한의 핵무장, 이란·이라크의 핵무기 개발 의혹 등도 중대한 쟁점으로 떠오른다. 인도는 1974년 ‘웃는 부처’ 핵실험 이후 24년 만인 1998년, 다시 핵실험을 실시하고, 인도와 앙숙 관계의 파키스탄도 그 직후 첫 핵실험을 실시한다. NPT에 가입하지 않고 있던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은 핵무장을 공개적으로 과시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NPT 역사상 최초로 탈퇴를 선언했다가 1994년 북미 간 제네바합의의 타결로 NPT에 일단 복귀한다.
5차 NPT 평가회의(1995)
결론부터 쓰자면 NPT의 무기한 연장이 합의되었다. 핵무기국들은 이를 위해 비핵무기국들에 많은 ‘양보’를 했다.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을 1996년까지 체결하는 것으로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고, 논쟁이 정리되지 않던 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FMCT) 협상도 가속하기로 했다. (FMCT는 무기용 우라늄과 플루토늄 등 핵무기용 핵분열성 물질의 생산을 금지하자는 조약으로, 아직 실질적으로 협상이 타결되지 않았다.) 중동 14개국이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비판하며 제출한, 중동 비핵무기지대 창설 결의안 통과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핵무기국의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못했다. 핵무기국들은 완전한 핵 폐기 일정 제출도 거부했다. 이러한 갈등 때문에 NPT의 무기한 연장은 합의되었으나, 최종문서는 합의되지 못했다.
한편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 협상 시한이 1996년으로 합의되자 중국과 프랑스는 평가회의 폐회부터 조약 체결 전까지 빠르게, 각각 2번, 8번 핵실험을 진행했다.
6차 NPT 평가회의(2000)
비핵무기국에 대한 핵보유국의 안전보장 문제도 역시 제기되었는데, 비핵무기국들은 법적 구속력을 갖춘 소극적 안전보장(NSA, 핵무기가 없는 나라에는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제네바 군축회의에서 다룰 것 등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유일하게 NPT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것이 지적되자, 미국은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려면 이라크의 NPT 위반 문제도 같이 다뤄야 한다고 대응했다.
수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NPT 체제 자체의 위기가 너무 커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공유한 덕분에 2000년 NPT 평가회의는 최종문서 채택에 성공했다. NPT 제6조의 핵군축 의무 및 1995년 합의한 결정사항들을 이행하기 위해 ‘13단계 핵군축 실질조치’가 합의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떠한 구체적 시간표도 포함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실제로 곧 사문화되었다. ‘13단계’에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의 무조건적이고 조속한 발효,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 발효 이전에도 핵 실험 중지 ▲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 협상을 즉각 실시해 5년 이내 조약 발효, ▲핵보유국의 확실한 핵무기 폐기 착수 등 현재까지도 전혀 이행되지 않은 사항들이 담겨있다.
7차 NPT 평가회의(2005)
2000년 NPT 평가회의는 최종 합의 도출에 성공했지만, 그 직후부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2000년 미국 대선의 승자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였다. 부시 행정부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이나 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을 진전시킬 의지가 없었다. 2001년 미국의 핵태세 검토 보고서(NPR)는 북한, 이라크 등을 ‘깡패국가’로 지칭하며 이들에 대한 핵 선제공격 옵션을 채택하고,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초 연두교서에서 다시 한 번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한다. 일방적으로 러시아와의 ABM 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START 협상도 재개하지 않았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도 개시된다.
한편 조속한 NPT 가입 및 IAEA 안전조치 협정 이행을 요구받았던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오히려 핵전력을 계속 강화한다. 북미간 제네바합의가 붕괴하고, 북한은 2003년에는 NPT 탈퇴, 2005년 초에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다. IAEA의 사찰로 이란이 과거에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가동한 사례가 적발되면서 이란 핵 문제도 2003년부터 가시화되었다.
이처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열린 7차 NPT 평가회의는 핵무기국과 비핵무기국 간의 의견차로 인해 어떠한 합의도 이루지 못하며 진행되었다. 미국은 주로 북한과 이란을 제재하기 위해 ▲ 북한 비판 결의안 통과, ▲ 핵무기의 추가적 확산을 막기 위해 (핵무기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발전용을 포함해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금지, ▲ NPT에서 탈퇴할 권리를 없애고 탈퇴 시 제재를 가하는 조항 신설을 주장했으나 실패했다.
3) 최근의 NPT 평가회의
8차 NPT 평가회의(2010)
① 파행으로 치달았던 2005년 평가회의와 비교해서, 핵보유국, 특히 미국과 러시아의 핵군축 노력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 평가가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NPT 평가회의 직전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을 통해 양국이 보유하고 있는 전략 핵탄두를 1,500~1,675개 수준으로 감축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평가회의 개막 당일 미국은 보유 중인 핵탄두 비축량 규모를 공개했다.
② 9·11 테러와 북한, 이란 핵위기 등의 영향으로 ‘핵 테러리즘’의 차단이 강조되었다. 이는 핵확산과 핵 테러리즘의 차단을 ‘핵심 계획’으로 설정한 미국의 2010년 핵태세검토보고서나, 국제 안보에 가장 도전적인 위험으로 핵 테러리즘을 강조한 같은 해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와 같은 맥락이다. 북한과 이란 사례가 다른 나라의 핵개발 의욕을 자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핵보유국은 이탈세력에 대한 단호한 입장과 대처로 강력한 비확산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③ 강력한 비확산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 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과 같은 추가적 조약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조약들이 발효되기 이전에도 핵실험 중지 선언,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핵분열성 물질 신고 등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④ NPT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조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비핵무기국과 반핵평화운동 조직들은 오늘날 핵무기금지조약의 전신인 핵무기금지협약(NWC)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NPT의 한계를 넘어 진정한 핵군축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기타 쟁점으로는 이스라엘, 중동 비핵무기지대 회의, 북한 문제를 들 수 있다. 64개 항의 행동계획을 포함한 평가회의 최종문서는 이스라엘이 NPT에 가입하고 모든 핵시설을 IAEA의 통제하에 둘 것을 강조했다. 또한 중동 지역 내 모든 국가가 참여하여 핵무기와 여타 모든 대량살상무기가 없는 지대 건설을 논의하는 회의를 2012년에 개최할 것을 결정했는데, 행동의 명확한 기한이 NPT 최종문서에 포함된 것은 처음이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NPT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더불어 (인도와 파키스탄을 포함하여) 북한이 비핵보유국 자격으로 NPT에 복귀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핵보유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음을 명시했다.
9차 NPT 평가회의(2015)
① 최종문서 채택 실패에 따라 9차 평가회의의 실질적 결론은 ‘인도주의 서약’으로 남았다. 2010년 8차 평가회의 최종문서에는 “모든 핵무기 사용이 인도주의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올 것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하며 … 각 당사국이 국제 인도주의법을 포함해 적용 가능한 국제법을 따를 필요성을 재확인”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에 9차 평가회의를 위한 2012~2014년 3차례의 사전 검토회의와 2012~2013년 UN총회에서 핵무기의 인도주의적 영향에 관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9차 평가회의에서 대다수 비핵무기국은 핵무기 금지·폐기를 위해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치, 핵무기금지조약의 협상을 촉구했다. 그러한 내용을 담아 오스트리아가 주도한 ‘인도주의 서약’에는 NPT 회원국 절반이 넘는 107개국이 서명하여, 핵무기금지조약에 관한 논의를 진척시키는 큰 동력이 되었다.
② 핵심 쟁점인 핵무기국들의 핵군축 의무 이행 문제에 대해, 2010년 8차 평가회의의 ‘결론과 후속조치를 위한 권고’ 중 핵군축에 관한 조항은 모두 22개였다. 그러나 2015년 평가회의에서는 이 중 5개 정도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이행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핵무기 비보유국들은 NPT 6조 이행을 위한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핵군축과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의 시작을 주장했다. 특히 인도주의 서약에 서명한 107개 나라는 “최종문서에 반드시 진전된 핵군축을 위한 구체적 수단과 핵무기 제거와 금지를 위한 법적 공백을 메우는 의미 있는 과정의 시작”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제기했다.
③ 최종문서 채택 실패에는 중동 비핵무기지대 설립 문제가 직접적 쟁점이 되었다. 중동 비핵무기지대는 1995년 평가회의에서 설립 결의안이 채택된 이래 계속 중요한 문제였다. 이 문제가 2015년 평가회의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 까닭은, “2012년에 중동 비핵지대 설립 회의를 개최한다”는 2010년 평가회의의 합의가 2012년 11월 23일 미국의 연기 성명 이후 회의 개최 날짜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9차 평가회의 최종문서 초안에는 이집트 등 비동맹 그룹의 입장을 반영하여 “2016년 3월 1일까지 역내 모든 국가가 참가하는 중동비핵지대 설립에 관한 회의를 소집”하고 “회의 일정은 연기할 수 없다”고 명시했는데, 미국, 영국, 캐나다 3국은 NPT 가입국도 아닌 이스라엘이 이를 동의하지 못할 것이란 이유로 합의 채택을 거부했다.
한편 한국인 원폭 피해 문제가 최초로 NPT 평가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일본 피폭자들은 매 NPT 평가회의마다 대규모로 참석하여 NGO 행사를 주도한 반면, 일본인 피폭자 수의 1/10을 차지하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이전까지 조명 받은 적이 없었다. 심진태 <한국 원폭 피해자협회> 합천 지부장과 김봉대 <원폭 2세 환우회> 고문은 2015년 NPT 평가회의 사전대회로 열린 국제 NGO대회에서 NPT 당사국 정부 대표자들을 상대로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한 미일 정부의 책임 인정과 진상조사, 사죄와 배상, 아베 정권의 역사왜곡 규탄, 피폭자 문제 해결을 위한 UN의 역할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여러 차례의 NGO 행사에서 “UN은 원폭 피해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핵무기를 폐기시켜야 한다. 핵무기가 있는 한 평화는 없다. 33개국 피폭자 연대를 만들어 미일 정부와 각국 정부를 압박하자”며 원폭피해자의 국제연대를 촉구했다.
4. 2020 NPT 평가회의의 쟁점과 과제
1) 탈냉전 체제의 위기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 시기부터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상대국이 MD 체계와 중단거리 미사일 개발·배치 등으로 INF를 위반하고 있다며 비난을 시작했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합의를 위반’했다며 INF 탈퇴 카드를 던졌다. 이에 이은 양국의 몇 차례 협상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고, 미국이 2019년 2월 탈퇴를 선언, 6개월 뒤 탈퇴 효력이 발생하여 조약이 폐기되었다. 중거리 핵미사일의 생산과 배치를 차단해온 INF 파기로 핵 군비경쟁이 다시 가속화할 우려가 크다. 남은 핵군축 조약은 미러 간 장거리 핵무기 감축을 위한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뿐인데, 2021년 2월 만료 예정이나 이 역시 갱신 전망이 불투명하다. New START까지 만료되면, 세계 1·2위의 핵무기국인 미러 두 나라에 핵무기 보유 상한선이 없어진다.
INF 파기에는 중국의 영향도 크다. 미러 간 조약에 구속되지 않는 중국이 DF-26 미사일을 포함한 중거리 핵전력을 개발·보유하는 것을 미러가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현 주한미국대사 해리 해리스는 태평양사령관이던 2018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다양한 미사일 전력을 보유했으며, 만약 중국이 INF에 서명했었다면 그 미사일 중 95%는 INF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의 입장도 INF 대신 중국까지 포함한, 더욱 실질적인 군축조약을 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상이 실패한다면 중국을 염두에 둔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동아시아에 배치하는 구상도 함께 밝혔다. 미국 중거리 미사일의 유력한 배치지에는 미군 기지가 있는 남한과 일본이 거론될 수밖에 없다.
2) 핵무기의 실전 배치
트럼프 시대 미국은 핵 선제사용 옵션을 유지하며, 핵무기 현대화, 핵무기의 실전배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9년 미 국방부 ‘핵 선제사용 금지 정책의 위험성’ 보고서는 핵 선제사용 금지정책은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공격을 억제할 미국의 역량을 약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핵 선제공격 옵션을 다시 확인했다. 또한, ICBM과 전략폭격기 현대화 등 지상 기반 전략적 핵억제(GBSD)도 꾀하고 있다. 올해 초 미 백악관이 제출한 2021년도 예산안에는 핵무기 및 우주 개발 예산이 대폭 증액되어 있다. 핵무기 현대화에 289억 달러(약 34조 3,700억 원)의 예산을 배정했고, 이를 수행할 국가핵안보국(NNSA)에도 198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했다. 이는 전년 대비 20% 가까이 늘어난 규모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중국과 러시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부 장관 역시 러시아와 중국이 핵전력을 현대화,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도 3대 핵전력인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략핵잠수함(SSBN), 전략폭격기 모두를 현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미국은 2018년 핵태세 검토 보고서(NPR)에 따라 저강도(저출력, 저위력) 핵무기 개발을 통해 핵무기의 실전 사용을 준비하고 있다. 저강도 핵무기란 전략핵무기의 1/100 수준으로 위력을 낮춘 핵무기다. (그렇다고 해도 반경 2km 내를 초토화할 수 있어, 재래식 무기를 기준으로 보면 매우 강력하다.) 언뜻 생각하면 군축 조치로 보이나 실상은 정반대다. 최소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위력의 전략핵무기는 마찬가지의 보복을 당할 우려, 즉 ‘상호확증파괴’(MAD)의 가능성 때문에 실전에서 쉽게 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기의 위력을 낮추는 것은 핵무기 사용의 문턱을 낮춰 ‘실전에 쓸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미 국방부는 지난 2월, 저강도 핵탄두 ‘W76-2’(위력 5~7kt)를 탑재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트라이던트 Ⅱ’(사거리 12,000km)를 핵잠수함 테네시호에 장착해 처음으로 실전배치했다고 인정했다. 잠수함과 군함에서 발사 가능한 해상발사 핵순항미사일(SLCM)도 7~10년 안에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러시아 역시 핵전력 증강 및 실전배치 중이다. 러시아는 2019년 12월 27일, 최대 2Mt 위력의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극초음속 전략미사일 ‘아방가르드’를 러시아 남부의 전략미사일군에 실전 배치했다. 아방가르드는 최대 속도 마하 20 이상(시속 2만 4,480㎞)이고, 사거리는 6,000㎞가 넘는다. 최대 16기의 분리형 핵탄두, MIRV를 탑재할 수 있다. 현존하는 어떤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으로도 막을 수 없는 미사일이라는 게 러시아의 주장이다. INF가 파기되면서 러시아와 미국은 본격적으로 이러한 극초음속무기의 개발과 배치를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 최신 전략핵잠수함 블라디미르호는 2019년 10월 30일 수중발사 ICBM인 ‘불라바’를 시험 발사하여 목표물에 명중에 성공했다. 미사일마다 MIRV가 10기까지 탑재되며, 각 탄두의 위력은 150kt에 달한다. 블라디미르호에는 이런 미사일이 20기까지 실린다.
중국은 2019년 5월, 미국이 INF 탈퇴 선언 이후 제안한 ‘미중러 3자 군축 협상’에 “우리는 중국의 무기를 통제하려는 모든 나라의 시도에 반대하며, 핵 군축 협의를 위한 3자 협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중국은 2019년 한 해 탄도미사일 100발 이상을 시험 발사했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과, 미군의 중국 주변 해역 접근과 서태평양 증강 배치를 차단하기 위한 중거리 미사일 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9년 12월에는 중국의 두 번째 항공모함이자 최초의 독자 기술로 건조된 항공모함 산둥함이 취역했다. 항공모함은 현대해전의 중심으로, 해군력에 결정적 차이를 가져온다. 중국은 항공모함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견제하는 데 핵심전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2018년 말, 2025년까지 핵추진 항공모함 2척을 건조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중국에 있어 군사력 증강 및 현대화는 세계 헤게모니를 놓고 가시화된 미중갈등에 있어서도, 중국의 장기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하게 여겨진다. 2017년 말 시작된 시진핑 중국 주석 집권 2기의 목표는 강군몽(强軍夢)의 실현이며, 이는 2050년 중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는 청사진과 맞물린다.
영국 정부는 핵군축캠페인(CND), 영국노총(TUC) 등 사회운동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소 310억 파운드(약 47조 원)의 비용이 예상되는 트라이던트 핵잠수함 교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트라이던트 핵잠수함은 사거리 12,000㎞의 미사일 8기와 핵탄두 40개를 탑재했다. 브렉시트로 EU 내 유일한 핵무기국이 된 프랑스는 미국 중심의 NATO 대신 프랑스의 핵억지력을 중심으로 하는 EU 차원의 안보를 주장하고 있다. 2020년 2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은 미국의 핵우산을 벗어나 프랑스의 핵우산 아래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3) 핵무기금지조약
5. 핵무기 철폐를 향한 여정
일본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1955년), 영국 CND(1957년) 등 세계의 대표적인 반핵평화운동 단체들이 1950년대에 설립되었듯 대중적 반핵운동의 역사는 매우 길다. 활동의 양상도 중심부 국가의 핵전략 폐기 촉구에서부터 비동맹국가들의 비핵무기지대 창설까지 다양하다. 여기서는 NPT를 대신할 새로운 핵군축조약으로서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탄생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스톡홀름 호소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약 3개월 전인 1950년 3월 19일, 세계대회[는 ‘스톡홀름 호소문’을 채택하고 서명운동에 나섰다. (세계대회는 1950년 11월에 ‘세계평화위원회’로 개칭했다.) 스톡홀름 호소문은 간명한 3줄로 이뤄졌다. ① 위협과 대량살상의 도구인 핵무기의 불법화와, 이를 실행하기 위한 엄격한 국제적 통제를 요구한다. ② 어떤 나라든 핵무기를 통한 선제공격을 하면 비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며 전범(戰犯)으로 간주해야 한다. ③ 전 세계의 모든 선량한 남성과 여성이 이 서명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오늘날 핵무기금지조약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
호소문은 전 세계 시민의 호응을 얻어, 총 2억 7천 명 이상이 서명했다. (시대 상황상 집계가 명확하지 않아 최대 5억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소련 성인 인구 전체가 서명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 활동가들도 동참했다. 스톡홀름 호소문은 핵무기 불법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당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2) 비핵무기지대
비핵무기지대(NWFZ)는 특정한 범위의 지역 전체를 비핵화하는 것을 말한다. NPT 초기 논의의 폴란드 ‘라파츠키 안’처럼 비핵무기지대의 구상은 1950년대부터 있었다. 1957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연대회의’를 계기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가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을 모두 비핵무기지대로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흐루쇼프는 발칸반도와 아드리아해, 스칸디나비아와 발틱해까지 비핵무기지대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NPT는 비핵무기지대 구상에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내용이었으나, NPT 7조는 지역적 차원에서 비핵무기지대를 구성할 권리를 명확하게 인정했다. 이를 기초로 UN 총회는 1975년 비핵무기지대를 위한 네 가지 일반 원칙을 확립한다. 각 지역에서 전면적인 비핵화를 달성하고, 서로의 핵무장을 막는 틀을 형성하는 비핵무기지대는 NPT의 한계를 보완했다. 비핵무기지대가 확산할수록 핵무기국이 핵무기 전략을 축소할 필요도 제기되었다. 아래는 비핵무기지대의 역사와 현황이다.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의 비핵무기지대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의 비핵무기지대들
중남미 틀라텔로코 조약
남태평양 라로통가 조약
동남아시아 방콕 조약
그런데 핵무기국은 이 지대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에 한 나라도 서명하지 않았다. 방콕 조약은 동남아 국가들의 대륙붕과 배타적 경제수역까지 비핵무기지대로 규정했는데, 이것이 미국이 공해로 규정하고 일상적으로 핵무기 탑재 함정을 통행시키는 구역과 겹치기 때문이다. 동남아 국가들이 이러한 해역을 포함한 주요한 이유는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중국보다 미국이 반발했다. 여기에 더해 미중갈등 심화에 따라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도 본격화되면서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아프리카 펠린다바 조약
중앙아시아 세미팔라틴스크 조약
그런데 핵무기국들은 이 지대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쟁점이 되는 것은 조약 12조의 “이 조약은 지대 내 국가들이 다른 국제적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고 있는 권리와 의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이에 따라 세미팔라틴스크 조약 5개국 중 투르크메니스탄을 제외한 나머지가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집단안보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 지역에 핵무기를 배치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논의 중인 비핵무기지대들
4) 핵무기금지협약
이에 따라 1996년 7월 8일, 국제사법재판소는 핵무기의 위협과 사용의 법적 타당성에 대한 권고안을 제출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핵무기 위협·사용은 일반적으로 무력분쟁에 적용되는 국제법 규칙, 특히 국제인도법 원칙과 규칙에 반한다. 그러나 국제법의 현 상황과 재판소가 가지고 있는 사실적 요소에 비추어, 국가존립 자체가 관계되는 극단적인 자위적 상황 하에서는, 재판소는 핵무기의 위협·사용이 적법 또는 위법한지 여부를 결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는 핵무기의 위협·사용이 무력충돌에 적용되는 국제인도법에 일반적으로 반한다고 하면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법이라고 확정지어 명시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국제인도법에 반하지 않는, 예컨대 군사적 표적만 타격할 수 있는 저위력 핵무기의 사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그럼에도 이는 권위 있는 국제 사법기관이 처음으로 핵무기의 위법성을 명시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권고안은 모든 국가가 NPT 6조에 명시된 협상, 즉 일반적이고 완전한 핵군축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결론지어야 한다고 밝혔다.
2009년 UN 총회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안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결의안은 모든 국가가 NPT 6조의 의무를 조속히 이행해야 한다고 재확인하며, 핵무기의 개발과 생산, 실험, 배치, 비축, 전달, 위협이나 사용을 금지하고 완전히 폐기하는 핵무기금지협약을 조속히 체결하기 위해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NPT 6조의 이행수단이라고 밝혔다.
2010년 8차 NPT 평가회의에서 핵무기금지협약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NPT 체제가 지난 40년간 핵무기의 무차별적 확대를 막기는 했으나, 핵보유국의 실질적인 감축을 강제하지 못했다는 비판적 인식이 이미 너르게 공유된 상태에서 많은 호응이 있었다. 그러나 8차 평가회의 최종문서는 핵무기금지협약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지 못했으며, NPT에 제시된 핵군축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데 그쳤다. 평가회의 중 미국은 세계적인 군축을 추진하겠지만 새로운 핵무기금지협약의 형태는 아니라며, NPT 이외의 조약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바로 전 해인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핵 없는 세계’ 선언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NPT 강화’ 대신 핵보유국의 독점적 지위를 포기하고 실질적인 핵군축에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2012년 오바마 행정부는 핵무기 현대화를 위해 30년간 1조 달러 이상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초 핵무기금지협약은 핵무기의 사용, 보유, 개발, 시험, 배치 및 이전을 금지하는 조항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검증 가능한 핵무장의 폐기를 의무화함으로써 핵무기의 해체와 군축을 검증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핵무기국이 여기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 현실에 부딪히자, 2016년부터 비핵무기국과 반핵평화운동 활동가들은 일단 핵무기 금지에 초점을 맞추는 핵무기금지조약(TPNW) 추진으로 방향을 바꿨다. 2015년 NPT 평가회의에서 107개국이 핵무기금지조약 협상을 촉구하는 ‘인도주의적 서약’에 서명한 뒤, 2016년 12월 UN 총회에서 핵무기금지조약 협상 개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2017년 7월 7일 UN총회에서 122개국 찬성, 반대 1(네덜란드), 기권 1(싱가포르)로 핵무기금지조약이 성립하였다. (69개국은 불참했다.)
6. NPT를 넘어서, 핵무기금지조약 체제로
NPT를 대체하는 핵군축조약의 필요성은 반핵평화운동 내에서 준비되던 핵무기 철폐를 위한 새로운 조약과 맞물렸다. 2005년 7차 NPT 평가회의가 대실패로 끝나자, <핵전쟁 방지 국제 의사회>(IPPNW. 1985년 노벨 평화상 수상)는 전 세계 시민들의 핵무기 철폐 운동을 제안하며 시민이 먼저 핵무기 철폐를 위한 조약을 만들고 여기에 각국 정부를 참여케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를 추진하는 국제 연대체의 이름으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의 ICAN을 제안하여 2007년 핵무기철폐캠페인(ICAN)이 결성되었다. 2006년 여름 헬싱키에서 열린 IPPNW 세계총회에서 ICAN 운동이 의제에 올라오자 각 국가의 협회가 이 활동을 IPPNW의 핵심 활동으로 하겠다고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당시 일본 히로시마의 시장이 이 운동에 자극을 받아, ICAN의 첫 번째 파트너로 참여하고 일본 내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핵무기 철폐를 위한 조약 구상에는 참고한 전례들이 있다. ‘대량살상무기’(WMD)란 통상 생물무기, 화학무기, 핵무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생물무기와 화학무기는 각각 생물무기금지협약(BWC, 1975년 발효)과 화학무기금지협약(CWC, 1997년 발효)으로 금지되고, 어느 국가·집단이든 개발·보유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도덕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생물무기 보유국 또는 화학무기 보유국이라고 자랑하거나, 페스트나 소아마비 균이 정당한 공격무기라고 주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NPT 체제에서 유독 핵무기에는 이러한 굴레가 없었다. 생물무기, 화학무기나 대인지뢰(1999년 대인지뢰금지협약 발효), 확산탄(2010년 확산탄금지협약 발효)과 같은 경우, ‘비인도적 무기’, 즉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피해를 남기거나 잔혹함으로 악명 높은 무기들 모두 사라져야 하는 무기라는 여론을 형성하고, 일단 사용을 금지시킨 다음, 실제로 제거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모든 나라가 조약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실제 생산, 거래, 사용에 중대한 견제를 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핵무기금지조약은 2020년 3월 현재, 81개국이 서명, 35개국이 비준했다.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경우, 우여곡절 끝에 협상이 마무리되어 1996년에 가입 서명과 비준을 받기 시작했으나, 모든 원자로 보유국(44개국)의 비준이라는 발효요건을 채우지 못해 현재까지 효력이 없다. 그러나 핵무기금지조약의 발효요건은 50개국의 비준으로, 표결 당시 찬성국 수(122개)나 서명국의 수가 50개국을 훌쩍 넘고 이미 35개국이 비준을 했기 때문에 발효 가능성이 크다. 올해 안으로 추가 비준이 채워져 발효될 전망도 있다.
물론 핵무기금지조약의 발효가 곧바로 핵무기 철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핵무기 공식 보유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과 실질적인 핵무기 보유국(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이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의 핵우산에 포함된 한국과 일본도 북한의 핵무기 위협을 이유로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2017년 10월 10일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핵무기금지조약에 관해 “핵군축이 개별국가의 안보 현실을 고려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핵무기금지조약은 현재 국제 반핵평화운동이 가장 폭넓게 결집한 의제다.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로부터 75년, NPT 발효로부터 50년이 흐르는 동안 핵무기 철폐로 가는 길에서 목표에 가장 가까워진 순간이라는 데에도 주목해야 한다. 핵무기금지조약 추진은 ‘과연 가능할까’란 의문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시작되었지만,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운동을 형성하고 성과를 거두었다. 앞서 생물무기, 화학무기, 대인지뢰, 확산탄 금지 관련 조약도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가입한 것은 아니며, 특히 미국 등 주요 무기수출국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무기도 조약 그 자체 때문에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대중운동을 통해 형성한 국제적 여론과 금지 조약이 견제 역할을 하여 생산과 사용을 실질적으로 막는 것이다.
국제 반핵평화운동의 계획에 따르면, 올 4월 27일 개막하는 10차 NPT 평가회의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국제 NGO 회의를 ‘핵무기 철폐, 기후위기 저지, 사회경제정의 세계대회’로 확대하고(4월 24일~26일, 미국 뉴욕), 실천행동을 4월 24일부터 미국 뉴욕과 각국에서 벌이기로 했다. 세계대회 마지막 날이자 NPT 평가회의 개막 전날인 26일, 뉴욕 시내에서 UN 본부로 행진하여 그동안 전 세계에서 모은 핵무기금지조약 비준 촉구 서명운동을 전달할 계획이다. (서명자 수가 1천만 명을 넘으리라 예상된다.) 한국에서도 한국 및 모든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2019년 말부터 시작되어 진행 중이며, 세계대회 및 NPT 평가회의 참가단도 조직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시작으로 2020년부터 한국의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실현하는 운동을 본격화할 것이다. [2020.03.13. 현재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핵무기 철폐, 기후위기 저지, 사회경제정의 세계대회’는 취소되었다. NPT 평가회의도 연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7. 핵무기금지조약 비준 운동으로 한반도 비핵평화를 실현하자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발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당사자로, 당시 미국의 쿠바 침공을 막기 위해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미국이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를 발견하여 위기가 발발하자 소련에 핵무기 사용을 호소하기도 했다. 어떤 쿠바인들은 “쿠바가 사라져도 사회주의는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 그의 결론은 결국 “모든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의 폐기”였다. 2013년, 그는 한반도 위기야말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로 가장 심각한 핵전쟁 위협이라고 말하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부디 전쟁을 피하는 선택을 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 말대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핵전쟁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바로 한반도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약 만 삼천 여 기의 핵무기 중 상당수가 한반도 주위에 있다. 한반도는 2017년 북미정상의 말 대결과 ‘화염과 분노’로 표현되는 전쟁 발발 위기를 겪었다. 2020년 현재 남북미 대화가 교착된 상황에서 북미 핵대결이 다시 격화되면 이제는 말로 끝날 것이란 보장이 없다. 한반도는 70년 전 이미 수백만 명이 희생된 전쟁의 아픔을 겪었다. 한반도가 다시 전쟁의 포화에 휩쓸린다면, 이번에는 참혹한 핵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핵무기 철폐의 필요는 그 어디보다 이곳에서 절실하다. 지난 세월 핵무기와 NPT에 대한 국내 논의는, NPT의 불평등성과 핵무기국의 핵 독점이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NPT와 핵무기국의 문제는 그 자체로 사실이나, 그것이 남한 정부든 북한 정부든 간에, 이 땅에서 핵무기의 개발과 보유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특히 북한의 핵무장은 세계적 핵확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보다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인류의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억압국가, 피억압민족이 핵무기를 개발, 보유함으로써 강대국의 핵독점과 핵위협을 억지하고 궁극적으로 ‘전 세계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핵무기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세계 각국이 선도적으로 핵무기 금지를 선언하고 강대국의 핵군축 노력을 압박한다는 길이다. 이는 세계 반핵평화운동이 이미 증명한 바다. 우리 사회운동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함께하면서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실현해야 한다. 세계적으로도 분단과 한반도 핵 위기의 당사자이자,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는 한국에서 핵무기금지조약 운동은 파급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바로 우리가 한반도, 동아시아, 전 세계의 핵무기의 폐기를 견인해야 한다.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세계 곳곳에서 극우 포퓰리즘을 포함해 반동적 정치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전 세계적인 핵 확산과 군비경쟁 추세는 반동적 정치운동과 만나 서로를 강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한 조짐은 이미 이곳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파멸을 막는 움직임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