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중산층 사회』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세습되는 불평등,
노조운동의 혁신으로 해결해야 한다
최근 세대 간 불평등 혹은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을 다룬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세습 중산층 사회』도 일종의 세대 문제를 진단하는 책이다. 책의 부제는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달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약하자면,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세습’이라는 점에서 특수하다는 진단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20대도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계급·성별로 분할된 집단이라는 점, 이들 사이에 사회경제적 조건과 인식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세대 분석에서 보기 힘든 장점이다. 또한 저자는 90년대 세대뿐 아니라 앞선 세대들과의 비교를 통해 세대·계급을 함께 분석하고 있다.
최근의 세대론적 분석, 특히 잘 알려진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와 비교할 때, 20~30대를 하나의 덩어리인 세대 집단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계급적 차이와 성별 차이에 주목한다. 계급적 차이에서는 특히 부모 세대의 부와 사회적 지위가 세습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책의 전반부는 노동시장에 대한 여러 분석을 서술하고 있으나,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청년 세대를 계급·성별로 분해하여 성향을 추적하는 책의 후반부다.
저자는 상위 10% 정도의 중상위층과 중하위/하위 90% 층의 분단에 주목한다. 특히 상위 10%에 대해서는 성공한 586 집단이 자신들의 계급을 세습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교육제도 등을 매개로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30대, 20대의 사회적 인식과 정치적 성향도 달리 나타난다. 부모 세대의 사회적 지위를 세습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하층 노동자·자영업자를 부모로 둔 청년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최근의 세대론적 분석, 특히 잘 알려진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와 비교할 때, 20~30대를 하나의 덩어리인 세대 집단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계급적 차이와 성별 차이에 주목한다. 계급적 차이에서는 특히 부모 세대의 부와 사회적 지위가 세습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책의 전반부는 노동시장에 대한 여러 분석을 서술하고 있으나,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청년 세대를 계급·성별로 분해하여 성향을 추적하는 책의 후반부다.
저자는 상위 10% 정도의 중상위층과 중하위/하위 90% 층의 분단에 주목한다. 특히 상위 10%에 대해서는 성공한 586 집단이 자신들의 계급을 세습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교육제도 등을 매개로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30대, 20대의 사회적 인식과 정치적 성향도 달리 나타난다. 부모 세대의 사회적 지위를 세습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하층 노동자·자영업자를 부모로 둔 청년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90년대생이 처한 조건
20대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진단된다. 진보, 페미니즘, 보수화, 정치적 무관심 등 여러 키워드가 동시에 적용되면서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는 ‘이상한’ 집단이다. 태안화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죽은 김용균이 있는 한편, 인천공항에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정규직 청년 직원들도 있다. 페미니즘 열풍을 주도한 20대 여성은 어느 순간에 트랜스젠더 대학입학을 격렬히 반대하여 기성세대 사회운동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세대 내 계급적, 성별 차이에 주목할 경우 청년 세대의 다양한 모습과 이들에 대한 상이한 접근, 평가가 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20대는 진보적이라고도 보수적이라고도 해석되고 특정한 계기마다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각 집단이 가지는 성격에 따라 각각의 이슈들에 상이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집단의 숫자 × 이슈’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다.
최근 청년 세대의 “문제”로 부각된 사건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 대한 청년 직원들의 반발이었다. 사회공공연구원이 수행한 공공기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러한 성향을 실증한다(『청년조합원에 대한 이해와 노동조합의 과제』, 이재훈 외, 2019).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청년 세대에 공통적인 성향인가? 저자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진입하기가 어려워진 상위 20% 일자리인 공공부문(공공기관)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려면 중산층 이상의 부모 배경이 필요하다. 이들의 ‘공정성’에 대한 입장은 독특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에 기반한 처우가 당연하다고 본다. 물론 그 ‘능력’은 사실 부모들의 지원으로 획득한 것인데, 그것을 인정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이러한 입장은 하위 계급 출신 청년들과는 상이하다.
20대 내부 집단의 분석을 통해 성별 갈등과 성별화된 정치적 입장의 차이도 드러난다. 20대 여성은 어떤 점에서 진보적이고, 어떤 점에서 보수적인가? 이 역시 계급적 차이를 반영한다. 여성 차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중상층 이상의 20대 여성에게서 민감하다. 반면 최근 부각되는 20대 남성의 박탈감이라는 쟁점은 어떤가? 이 역시 중상층 이상 가정 출신의 남성에 집중된다. 이들은 중상층 내에서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20대 남/여의 보수/진보라는 통념도 사회적으로 더 부각되기 쉬운 특정 집단의 입장과 특정 이슈에서 부각되는 사건에 시선이 집중된 결과일 수 있다. 반면 20대 안에서도 중하위 계층 가정 출신의 남/여 청년들의 입장은 이들과도 다르다. 중하층 가정 출신은 남녀 모두 ‘결과의 공정성’에 더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중산층 이상 출신 남/여가 주도하는 쟁점에 냉소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동원될 뿐이다.
이들은 어떤 정치 세력을 지지할까? 저자는 기존 정치 세력들이 이러한 20대의 (분절된) 성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을 확립하지 않은 ‘비면역'(non-immunized) 유권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중상층 청년들의 경우에도 부모세대(586)처럼 민주당 지지 블록을 구성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진단한다. 이들이 확보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경쟁이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에필로그 한 절의 제목은 ‘고도성장의 끝, 세습자본주의의 시작’이다. 한국 경제 상황이 변화하면서 이전의 고도성장기처럼 계급 상승을 기대할 수는 없고, 세습을 통해서 계급이 재생산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 노동시장 분석에서도 이러한 조건을 제시한다. 장기 저성장 상황에서 대기업의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20대 사이의 경쟁은 격화되고 있다. 이제 이 제한된 좋은 일자리를 향한 경쟁에서 누가 ‘승리’하는가가 문제다. 20세기 후반의 급격한 계급 상승을 달성한 586과 일부 대기업 노동자의 경험이 예외적이었던 것이다. 노동운동 측면에서 보면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즉 전노협 결성과 민주노총 창립, 좀 더 연장하면 1997년 총파업에 이르는 시기까지 민주노조 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 저성장 상황에서 이러한 계급 세습은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좋은 일자리가 축소되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중산층도 안정적으로 계급 재생산에 성공하기 어려운데, 중하층 가정 출신에서 계급 상승은 더욱 더 어렵다. 저자는 중상위층이 주도하는 ‘교육 군비경쟁’이 더 치열하게 진행되면서 경쟁이 격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청년 세대의 “문제”로 부각된 사건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 대한 청년 직원들의 반발이었다. 사회공공연구원이 수행한 공공기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러한 성향을 실증한다(『청년조합원에 대한 이해와 노동조합의 과제』, 이재훈 외, 2019).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청년 세대에 공통적인 성향인가? 저자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진입하기가 어려워진 상위 20% 일자리인 공공부문(공공기관)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려면 중산층 이상의 부모 배경이 필요하다. 이들의 ‘공정성’에 대한 입장은 독특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에 기반한 처우가 당연하다고 본다. 물론 그 ‘능력’은 사실 부모들의 지원으로 획득한 것인데, 그것을 인정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이러한 입장은 하위 계급 출신 청년들과는 상이하다.
20대 내부 집단의 분석을 통해 성별 갈등과 성별화된 정치적 입장의 차이도 드러난다. 20대 여성은 어떤 점에서 진보적이고, 어떤 점에서 보수적인가? 이 역시 계급적 차이를 반영한다. 여성 차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중상층 이상의 20대 여성에게서 민감하다. 반면 최근 부각되는 20대 남성의 박탈감이라는 쟁점은 어떤가? 이 역시 중상층 이상 가정 출신의 남성에 집중된다. 이들은 중상층 내에서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20대 남/여의 보수/진보라는 통념도 사회적으로 더 부각되기 쉬운 특정 집단의 입장과 특정 이슈에서 부각되는 사건에 시선이 집중된 결과일 수 있다. 반면 20대 안에서도 중하위 계층 가정 출신의 남/여 청년들의 입장은 이들과도 다르다. 중하층 가정 출신은 남녀 모두 ‘결과의 공정성’에 더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중산층 이상 출신 남/여가 주도하는 쟁점에 냉소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동원될 뿐이다.
이들은 어떤 정치 세력을 지지할까? 저자는 기존 정치 세력들이 이러한 20대의 (분절된) 성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을 확립하지 않은 ‘비면역'(non-immunized) 유권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중상층 청년들의 경우에도 부모세대(586)처럼 민주당 지지 블록을 구성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진단한다. 이들이 확보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경쟁이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에필로그 한 절의 제목은 ‘고도성장의 끝, 세습자본주의의 시작’이다. 한국 경제 상황이 변화하면서 이전의 고도성장기처럼 계급 상승을 기대할 수는 없고, 세습을 통해서 계급이 재생산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 노동시장 분석에서도 이러한 조건을 제시한다. 장기 저성장 상황에서 대기업의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20대 사이의 경쟁은 격화되고 있다. 이제 이 제한된 좋은 일자리를 향한 경쟁에서 누가 ‘승리’하는가가 문제다. 20세기 후반의 급격한 계급 상승을 달성한 586과 일부 대기업 노동자의 경험이 예외적이었던 것이다. 노동운동 측면에서 보면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즉 전노협 결성과 민주노총 창립, 좀 더 연장하면 1997년 총파업에 이르는 시기까지 민주노조 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 저성장 상황에서 이러한 계급 세습은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좋은 일자리가 축소되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중산층도 안정적으로 계급 재생산에 성공하기 어려운데, 중하층 가정 출신에서 계급 상승은 더욱 더 어렵다. 저자는 중상위층이 주도하는 ‘교육 군비경쟁’이 더 치열하게 진행되면서 경쟁이 격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저자의 대안
그렇다면 ‘의식 있는’ (혹은 진보적인) 586 지식인들이 종종 제안하는 ‘세대 간 양보’(즉 586의 양보)는 가능할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부정적이다. 세대 간에 어떤 방식으로 양보할 수 있는가도 불분명할 뿐 아니라, 중상위층의 586이 양보하는 일자리는 결국 이들 자녀에게 기회를 열어줄 뿐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양보한다면, 이를 통해 생긴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청년 일자리는 누가 가져가는가 문제다. 일전에 문제가 된 바 있는 대기업노조의 직접적인 ‘고용세습’ 논란만이 아니라도, 교육 등을 통해 간접적이지만 사실상 자신들의 자녀에게만 좋은 일자리 세습이 가능해진다. 새로 만들어지는 청년 일자리들도 여전히 소수 대기업·공공부문의 좋은 일자리와 그 외 다수의 열악한 일자리로 나누어질 뿐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과정의 갈등은 이러한 분할이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대 간 양보의 방법론으로 흔히 제시되는 연공급 완화 방식의 임금체계 개편에 대해서도 저자는 부정적이다. 한국의 기업들도 인사 노무의 고도화와 연계되어야 하는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준비가 없고, 단순히 명예퇴직을 활용할 뿐이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을 주력으로 하는 노조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노조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수진영도 실상 이들 세대로서 같은 이해관계가 있다. 이 때문에 임금체계 개편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진단한다. 설사 제도개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586세대가 적용받는 것이 아니라 70년대생 이후가 적용받는 체제가 될 것이다. 저자는 다소 극단적(위악적)으로, 세대 간 양보를 실현하려면 현 50대를 명예퇴직·정리해고로 퇴직시킨 후 신입 직원에 대해 직무급을 도입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제시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본다.
입시 제도를 개선한다고 해도 한계가 분명하다. 586세대 중산층들은 교육투자를 통해 어떤 제도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탁월하게 길러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입시 제도 변경을 통해 불평등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이런 조건에서 저자의 대안을 요약하면 첫째, ‘기회의 평등’을 급진화하는 방식이다. 입시제도만이 아니라 교육투자 전체를 혁신하여 중하층 자녀도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공교육을 급진적으로 강화하자는 것이다.
둘째, 사회보장 강화다. 사회보장 강화를 통해 경쟁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위 10%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 강화를 포함한 조세개혁으로 재정 여력을 확보하자고 제안한다.
세대 간 양보의 방법론으로 흔히 제시되는 연공급 완화 방식의 임금체계 개편에 대해서도 저자는 부정적이다. 한국의 기업들도 인사 노무의 고도화와 연계되어야 하는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준비가 없고, 단순히 명예퇴직을 활용할 뿐이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을 주력으로 하는 노조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노조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수진영도 실상 이들 세대로서 같은 이해관계가 있다. 이 때문에 임금체계 개편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진단한다. 설사 제도개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586세대가 적용받는 것이 아니라 70년대생 이후가 적용받는 체제가 될 것이다. 저자는 다소 극단적(위악적)으로, 세대 간 양보를 실현하려면 현 50대를 명예퇴직·정리해고로 퇴직시킨 후 신입 직원에 대해 직무급을 도입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제시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본다.
입시 제도를 개선한다고 해도 한계가 분명하다. 586세대 중산층들은 교육투자를 통해 어떤 제도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탁월하게 길러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입시 제도 변경을 통해 불평등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이런 조건에서 저자의 대안을 요약하면 첫째, ‘기회의 평등’을 급진화하는 방식이다. 입시제도만이 아니라 교육투자 전체를 혁신하여 중하층 자녀도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공교육을 급진적으로 강화하자는 것이다.
둘째, 사회보장 강화다. 사회보장 강화를 통해 경쟁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위 10%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 강화를 포함한 조세개혁으로 재정 여력을 확보하자고 제안한다.
비판: 보수적 대안은 해법인가
물론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대안 제시보다는 분석에 치중되어 있다. 저자도 겸손하게 대안이 뚜렷하지 않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2000년대 들어 사회 계급의 분석에서 좌파들도 주관주의적·의지주의적 접근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저자의 실증적 접근은 참고할 부분이 많다. 다만 이를 통해 어떤 시사점을 얻고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노동자운동과 저자의 입장이 꼭 같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저자가 비판하는 중상위 10%와 중하위/하위 90%라는 구도, 또 이러한 불평등의 세습이 일어나고 있다는 비판, 이에 대한 대안 제시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의 비판이 가능할 수 있다.
먼저 대표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상위 1% 초고소득자 계층의 소득 집중이 진짜 문제라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비정규직까지 연대를 조직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흐린다는 비판이다. 오래된 쟁점이고 많은 좌파들이 선호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상위 1% 초고소득자의 소득은 근로소득 형태를 보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자본소득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CEO의 연봉 등). 따라서 이 문제는 노동소득 격차라기보다는 자본소득-노동소득분배율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노동 대중 사이의 격차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물론 노동소득분배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을 마냥 늘리는 것이 해법인지에 대한 쟁점은 여기서는 생략하자.
물론 이들 10~20% 안에는 자본가 계급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10~20% 중상위층의 소득 집중을 비판하는 것은 상위 0.1~1%의 고소득 전문직·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이윤율’과 거시경제 구조 비판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10 대 90 혹은 20 대 80의 문제는 광의의 임금노동자 사이의 문제다. 경제활동인구 상위 10~20%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양대 노총의 주력이기도 하다. 이들 사이의 격차를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임금노동자 사이에 계급적 단결의 조건이 쟁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소득 상위 10~20%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규모가 상당할 뿐 아니라 이들이 현재 노조운동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는지는 현재 노조운동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질문은에 대하여 노조운동이 “그건 상위 1%의 문제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현재 노조운동의 주류는 그런 명분으로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지대공유제’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조귀동 씨는 조선일보 경제 기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정 언론사 소속이라는 점에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을 정도로 객관적으로 자료를 분석한다. 하지만 대안에서는 또 다른 문제이다. 저자는 계급 불평등을 다루고 대안에서도 사회보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진보적 비판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보수적인 담론이다.
저자는 공정성=‘기회의 평등’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런 가운데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과 복지에 대한 공공적 투자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투자가 인적 자본을 확충하여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볼 것이다. 경쟁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최소한의 사회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 역시 패자부활전(새로운 기회)을 위한 것이다. 이는 온정주의적인 비스마르크적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투자국가의 전망이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저자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하는 대안은 노동시장의 개혁이다. 이미 지난 박근혜 정부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노동시장 개혁을 시도하다가 양대 노총, 특히 공공부문의 격렬한 반대로 좌초한 바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볼 때, 저자는 사회적 합의나 법·제도 변경을 통한 노동시장 개혁은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시장에서 불평등을 축소하지 않고 조세와 사회보장으로, 즉 국가를 통해 격차를 축소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조세와 사회보장을 통한 방법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급적 연대를 통해 자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국가를 통해 사회를 관리하는 방안이다. 이 때문에 노동자운동이 능동적인 대안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이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저자의 회의적인 시각과는 달리 스스로의 운동과 내부 합의를 통해 격차 축소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까지 노동조합운동은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또 격차 축소에 저자가 비관적인 데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격차 축소를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운동은 격차 축소를 위한 능동적인 운동을 시도해야 한다. 일례로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 등이 수용하고 민주노총도 올해 임금인상 요구로 제시한 ‘하후상박 연대임금’과 같은 대안이 있을 것이다. 물론 노조 상층에서 ‘여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를 넘어 현장까지 동의를 형성하는 과정에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노동자운동이 불평등 축소를 통해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를 능동적으로 해나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노사정 기구(경사노위) 참여를 거부한다고 해도 정권과 자본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저자가 비판하는 중상위 10%와 중하위/하위 90%라는 구도, 또 이러한 불평등의 세습이 일어나고 있다는 비판, 이에 대한 대안 제시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의 비판이 가능할 수 있다.
먼저 대표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상위 1% 초고소득자 계층의 소득 집중이 진짜 문제라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비정규직까지 연대를 조직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흐린다는 비판이다. 오래된 쟁점이고 많은 좌파들이 선호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상위 1% 초고소득자의 소득은 근로소득 형태를 보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자본소득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CEO의 연봉 등). 따라서 이 문제는 노동소득 격차라기보다는 자본소득-노동소득분배율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노동 대중 사이의 격차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물론 노동소득분배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을 마냥 늘리는 것이 해법인지에 대한 쟁점은 여기서는 생략하자.
물론 이들 10~20% 안에는 자본가 계급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10~20% 중상위층의 소득 집중을 비판하는 것은 상위 0.1~1%의 고소득 전문직·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이윤율’과 거시경제 구조 비판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10 대 90 혹은 20 대 80의 문제는 광의의 임금노동자 사이의 문제다. 경제활동인구 상위 10~20%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양대 노총의 주력이기도 하다. 이들 사이의 격차를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임금노동자 사이에 계급적 단결의 조건이 쟁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소득 상위 10~20%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규모가 상당할 뿐 아니라 이들이 현재 노조운동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는지는 현재 노조운동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질문은에 대하여 노조운동이 “그건 상위 1%의 문제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현재 노조운동의 주류는 그런 명분으로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지대공유제’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조귀동 씨는 조선일보 경제 기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정 언론사 소속이라는 점에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을 정도로 객관적으로 자료를 분석한다. 하지만 대안에서는 또 다른 문제이다. 저자는 계급 불평등을 다루고 대안에서도 사회보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진보적 비판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보수적인 담론이다.
저자는 공정성=‘기회의 평등’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런 가운데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과 복지에 대한 공공적 투자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투자가 인적 자본을 확충하여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볼 것이다. 경쟁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최소한의 사회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 역시 패자부활전(새로운 기회)을 위한 것이다. 이는 온정주의적인 비스마르크적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투자국가의 전망이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저자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하는 대안은 노동시장의 개혁이다. 이미 지난 박근혜 정부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노동시장 개혁을 시도하다가 양대 노총, 특히 공공부문의 격렬한 반대로 좌초한 바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볼 때, 저자는 사회적 합의나 법·제도 변경을 통한 노동시장 개혁은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시장에서 불평등을 축소하지 않고 조세와 사회보장으로, 즉 국가를 통해 격차를 축소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조세와 사회보장을 통한 방법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급적 연대를 통해 자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국가를 통해 사회를 관리하는 방안이다. 이 때문에 노동자운동이 능동적인 대안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이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저자의 회의적인 시각과는 달리 스스로의 운동과 내부 합의를 통해 격차 축소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까지 노동조합운동은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또 격차 축소에 저자가 비관적인 데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격차 축소를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운동은 격차 축소를 위한 능동적인 운동을 시도해야 한다. 일례로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 등이 수용하고 민주노총도 올해 임금인상 요구로 제시한 ‘하후상박 연대임금’과 같은 대안이 있을 것이다. 물론 노조 상층에서 ‘여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를 넘어 현장까지 동의를 형성하는 과정에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노동자운동이 불평등 축소를 통해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를 능동적으로 해나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노사정 기구(경사노위) 참여를 거부한다고 해도 정권과 자본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남은 쟁점들
최근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청년 세대 문제에 대해서도 입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민주노총의 주력인 대기업·공공부문의 청년 조합원에 대한 접근과 중하층 청년 노동자에 대한 접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공정성’ 담론을 전화하는 가운데 기존 민주노조 운동의 기업별 임금 극대화 관행을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80~90년대 노조운동 세대의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고 청년 세대로 교체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시급한 과제다.)
한편, 중하층 청년 노동자에 대한 접근은 하청·용역·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이 기존의 정규직 노조운동을 모방하여 기업별 임금 극대화를 추구하거나, 중산층을 따라잡으려고 했던 586과 재벌 생산직 노동자들의 운동을 모방할 수 없다는 점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기존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조운동이나 비정규직·특수고용노동자 운동에서 모두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존 정규직노조의 혁신과제와 비정규직 노조 및 조직화 운동에서의 혁신과제가 각각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존 노조운동이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로 새로운 세대가 노동시장에 진출하고 있으므로 각 부문에서 긴급하게 요구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현재 20대에게 ‘불평등’을 세습하고 있는 586세대 혹은 대기업 제조업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한 80~90년대의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체제는 지금은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저자는 꼼꼼한 분석을 통해 이를 다시 확인해준다. 현재 민주노총은 비록 제1노총의 지위를 확보했다고는 하나, 80~90년대 기업별 전투적 경제투쟁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은 2020년대에 이르러 급격히 소진되고 있다.
전노협에서 민주노총 결성과 성공에 이르는 정세와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은 같은 조건에 있지 않다. 이제는 저출산·고령화와 함께 장기 저성장, 노골적으로 말하면 한국과 세계자본주의가 붕괴 과정에 있는 정세이기 때문이다. 1987년의 20~30대 노동자와 2020년대의 20~30대가 처한 정세는 다르다. 변화된 조건에 맞게 혁신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노조운동 안에서 형성된 합의는 아직 거의 없는 것 같다.
한편 노동시장의 격차와 이와 연관하여 노조운동에 주는 시사점만큼이나 여성운동에도 시사점을 주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이 책의 분석을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20대, 30대 여성에 대한 분석은 최근 ‘페미니즘 리부트’ 혹은 ‘영-영 페미니즘’의 유행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남성 일부의 반발도 어떤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렇게 형성된 운동이 최근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거부 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는가에 대해서도 계급분석을 통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정한 성향의 페미니즘 운동의 토대가 되는 (특정 세대)여성 집단의 성향이 어떤 계급적 토대를 갖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드러난 현상만이 아니라 경제적 ‘토대’를 비판할 수 있어야 다른 운동(예를 들어 중하층 계급인 여성 [불안정]노동자를 다른 의제로 조직하기 위한 운동)을 형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60년대생 세대에서 중상위층(586세대)과 중하위층의 분할과 격차가 80년대 후반 이후 몇 번의 계기를 거쳐 확대되고 굳어진 과정을 분석한다. 이는 80년대 후반 이후 남한 경제사 비판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능동적 행위자였던 노조운동 비판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불평등의 누적이 자본 측에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평등 심화와 세대, 계급 간 갈등을 살피기 위해서는 남한 경제사와 함께 노동자 운동사를 함께 비판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 책은 확인시켜준다.
한편, 중하층 청년 노동자에 대한 접근은 하청·용역·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이 기존의 정규직 노조운동을 모방하여 기업별 임금 극대화를 추구하거나, 중산층을 따라잡으려고 했던 586과 재벌 생산직 노동자들의 운동을 모방할 수 없다는 점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기존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조운동이나 비정규직·특수고용노동자 운동에서 모두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존 정규직노조의 혁신과제와 비정규직 노조 및 조직화 운동에서의 혁신과제가 각각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존 노조운동이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로 새로운 세대가 노동시장에 진출하고 있으므로 각 부문에서 긴급하게 요구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현재 20대에게 ‘불평등’을 세습하고 있는 586세대 혹은 대기업 제조업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한 80~90년대의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체제는 지금은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저자는 꼼꼼한 분석을 통해 이를 다시 확인해준다. 현재 민주노총은 비록 제1노총의 지위를 확보했다고는 하나, 80~90년대 기업별 전투적 경제투쟁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은 2020년대에 이르러 급격히 소진되고 있다.
전노협에서 민주노총 결성과 성공에 이르는 정세와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은 같은 조건에 있지 않다. 이제는 저출산·고령화와 함께 장기 저성장, 노골적으로 말하면 한국과 세계자본주의가 붕괴 과정에 있는 정세이기 때문이다. 1987년의 20~30대 노동자와 2020년대의 20~30대가 처한 정세는 다르다. 변화된 조건에 맞게 혁신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노조운동 안에서 형성된 합의는 아직 거의 없는 것 같다.
한편 노동시장의 격차와 이와 연관하여 노조운동에 주는 시사점만큼이나 여성운동에도 시사점을 주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이 책의 분석을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20대, 30대 여성에 대한 분석은 최근 ‘페미니즘 리부트’ 혹은 ‘영-영 페미니즘’의 유행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남성 일부의 반발도 어떤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렇게 형성된 운동이 최근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거부 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는가에 대해서도 계급분석을 통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정한 성향의 페미니즘 운동의 토대가 되는 (특정 세대)여성 집단의 성향이 어떤 계급적 토대를 갖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드러난 현상만이 아니라 경제적 ‘토대’를 비판할 수 있어야 다른 운동(예를 들어 중하층 계급인 여성 [불안정]노동자를 다른 의제로 조직하기 위한 운동)을 형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60년대생 세대에서 중상위층(586세대)과 중하위층의 분할과 격차가 80년대 후반 이후 몇 번의 계기를 거쳐 확대되고 굳어진 과정을 분석한다. 이는 80년대 후반 이후 남한 경제사 비판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능동적 행위자였던 노조운동 비판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불평등의 누적이 자본 측에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평등 심화와 세대, 계급 간 갈등을 살피기 위해서는 남한 경제사와 함께 노동자 운동사를 함께 비판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 책은 확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