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0 여름.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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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세계: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

한지원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이 글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정부 대책과 진보진영 내부에서 유행하는 여러 대안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정부 대책은 장기 위기에 대한 고려 없이 회복에 대한 지나친 낙관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류다. 진보진영의 대책들은 시장을 지양하는 노동자의 지적, 윤리적 능력을 키우기보다 전지전능한 정부를 만들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구조적 위기라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을 전제로 하여, 평등한 자유를 추구하는 노동자운동이 경제, 정치적 변화를 어떻게 주도할 수 있을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이런 관점을 공유하며, 코로나19 사태의 전개와 이후 쟁점을 분석한다.
 

1. 2020년 상반기 상황 요약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류의 건강과 경제가 함께 위협받고 있다. 5월 말 현재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공식적으로 37만 명이다. 검사 역량의 한계와 간접적 사망까지 고려하면, 실제 사망자 숫자는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 사정도 감염병만큼이나 위태롭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소비가 급감했고 공장도 멈췄다. 각국 정부는 가계 소득을 지원하고 기업 파산을 막기 위해 천문학적 재정을 쏟아붓고 있다. 그 결과 정부 부채비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이번이 끝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올해 늦가을에 2차 유행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2차 유행은 겨울 독감과 함께 진행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1차 유행보다 방역이 더 어려울 것이다. 독감 환자와 코로나19 환자가 뒤섞이면, 거리두기는 더 강화되어야 하고 병원의 중환자 수용 능력도 지금보다 높아져야 한다. 2차 유행 시기의 경제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암담하다. 봄에 진행된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세계경제가 이미 녹아버린 상태다. 과연 가을에 다시 고강도 거리두기를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하지만 경제 사정으로 거리두기를 완화하면 감염자는 폭증한다. 감염자가 폭증하면 거리두기를 하지 않더라도 경제가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다. 사면초가 상황이다.
세계의 주요 2개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은 글로벌 리더십은 고사하고, 세계적 감염병 대처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막무가내로 자신들의 권력 게임에 올인하고 있어서다. 중국은 감염병 발발 초기에 정보를 감추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키웠다. 지금까지도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중국은 느닷없이 홍콩 보안법을 제정해 세계를 경악시켰다. 시진핑은 코로나19 경제침체로 자본과 여론이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홍콩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트럼프는 가짜 뉴스의 소스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국의 방역 실패를 세계보건기구(WHO) 탓으로 돌리는 등 세계적 협력을 앞장서서 엉망으로 만드는 중이다. 
한국은 감염병 대처에 상대적으로 선방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상반기 경제침체도 선진국 중 가장 덜 할 것으로 예측된다. 2천 년대 두 차례나 있었던 감염병 확산이 방역 체제를 빠르게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대북관계를 고려해 중국 입국을 빠르게 제한하지 않아 초기 방역에 실패했었고, 기획재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 재난지원금 같은 선심성 대책을 남발해 재정 사정을 악화시켰다. 180석을 차지한 집권 여당은 방역까지 정치적 문제로 여기는 포퓰리즘에 빠져 있는데,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집권세력으로 인해 한국 사회 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진보진영에서는 과학적 비판과 대책보다 주관적 희망이 오히려 유행하고 있다. 정부 빚은 상한선이 없고, 구원자 역할을 한다는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 MMT), 정부가 현금을 공평하게 살포하면(즉 보편적 구빈법을 시행하면) 경제가 알아서 잘 돌아갈 것이라는 기본소득론, 국가가 산업을 몰수한 후에 전 국민의 고용을 책임지자는(쉽게 말해 소련으로 되돌아가자는) 국유화론 등이 그런 해법들이다. 그런데, 이 해법들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너무 쉽게 정부를 최종적 해결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정부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인 것도 아니다. 둘째, 과거의 실패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 대안들은 케인스주의의 실패를 더 큰 적자재정으로, 복지국가의 어려움을 더 많은 현금 살포로, 소련의 몰락을 새로운 전위당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과학적 대책과 거리가 멀다.


2. 장기 쟁점

 
일부에서는 백신과 치료제가 곧 개발되고, 경제적 피해도 빠르게 복구될 것이라는 이른바 V자 회복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근거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치료제와 백신 개발 관련 뉴스들은 충실한 과학적 근거보단 제약회사의 주가와 연관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두 자릿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선진국 경제가 곧바로 두 자릿수 회복을 이어갈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되고, 경제가 아무 손상 없이 그대로 복구된다는 비현실적 전제 위에서만 성립된다.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미 경험하고 있듯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야기할 것이다. 관광, 여객운송, 도소매 등은 예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고, 제조업도 기존 과잉설비의 폐해가 가중되어 수익성 낮은 설비들을 대량 폐기하는 글로벌 구조조정 없이는 회복이 쉽지 않아 보인다.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세계는 미증유의 경제침체와 혼란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단기적 어려움보다 체제의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더 심각해졌다는 점이다. 크게 보면 네 가지 정도다. 첫째, 이윤율 저하 경향, 둘째, 정부 부채 문제, 셋째, G2의 몰락 문제, 넷째, 생태적 한계 문제. 이것들을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1) 이윤율 하락의 가속


자본투자로 노동생산성을 향상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와 개별 기업들의 초과이윤을 향한 시장 경쟁이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기술진보와 경쟁은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자본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이를 편향적 기술진보의 모순으로 분석했다. 편향적 기술진보의 모순은 이윤율 하락을 가져온다. 이윤율이 하락하면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본은 금융적 팽창에 이용되고, 투자 부족으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노동인구는 실업과 반실업(비정규직)을 반복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이 금융화란 자본의 방종과 경제적 불평등이란 사회의 타락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윤율 하락을 반전시키는 방법은 자본투자를 줄이면서, 노동생산성은 상승시키는 혁명적 기술진보, 즉 산업혁명밖에 없다. 20세기 이후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2차 산업혁명으로 20세기 초부터 1960년대까지 이윤율이 상승했고, 이후 1980년대까지 하락했으며. 정보통신 혁명으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반짝 이윤율이 상승했다가, 이후 다시 하락으로 돌아섰다. 2007~09년 세계금융위기는 이윤율 하락으로 금융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극단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사실 최근 유행하는 4차 산업혁명론은 자본의 이런 위기감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학은 이윤율 위기를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사면초가에 빠진 경제를 구원하려면 산업혁명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지표로도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노동생산성을 상승시키면서 자본투자를 줄이고 있다는 보고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생산성 상승 둔화와 자본투자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2010년대 경제의 특징이었다. 이윤율 하락으로 실물 투자에 대한 의욕까지 감소하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란 의미다.
한국경제는 기술 모방을 통한 추격성장 전략으로 성장하다 보니, 독립적인 기술진보의 효과가 그다지 없었다. 추격 전략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미국 경제의 성쇠가 한국 이윤율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2차 오일쇼크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실패로 1970년대 말에 이윤율이 한 차례 폭락했고, 1980년대 3저 호황 전후로 이윤율이 소폭 상승했다가, 1990년대 재벌의 비효율적 투자로 이윤율이 다시 하락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이윤율이 폭락했다. 2000년대 구조조정과 세계적인 금융세계화 호황으로 이윤율이 소폭 상승했는데, 2008~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에는 이윤율과 자본투자가 함께 정체 상태에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감소하면서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위기는 더욱 심화했다. 투자된 자본의 가동률이 하락하니 당연히 이윤율은 추가로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이윤율을 재상승 시키려면, 가동률이 낮거나 생산성이 낮은 자본을 대규모로 폐기하는 수밖에 없다. 즉 시장에서 자본가를 대대적으로 숙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은 이러한 자본의 숙청을 표현한다. 하지만 자본의 폐기를 통한 이윤율 반등은 산업혁명 같은 질적 변화와 다르다. 그 효과가 길게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장 경쟁 과정에서 다시 편향적 기술진보의 효과가 나타나며 이윤율이 재하락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본과 달리 인구는 폐기될 수 없어서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실업 문제 말이다. 구조조정 이후 성장이 빠르게 복구되지 못하면, 실업률이 상승하며 경제적 불평등도 커진다.
코로나19 이후 노동생산성 둔화는 자본투자 급감으로 인해 더욱 심화할 것이다. 노동생산성과 자본투자가 동시에 하락하는 것이 자본주의 최종적 위기의 특징이다. 자본의 자포자기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세계경제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경제는 이미 2010년대부터 저성장 상태가 굳어졌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수출이 증가하기 어려워, 가동률이 이윤율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중화학공업이 심각한 생존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2) 지속불가능한 정부 부채


정부는 세입보다 세출이 많아지면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다. 국채는 정부가 발행하는 빚 증서다. 이때 국채를 구매하는 주체는 민간 금융기관들이다. 이들은 국채로 자산 구성의 안전성을 높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9년 말 600조 원의 국채 중 절반을 은행이 구매했고, 나머지를 보험사, 증권사, 연기금 등이 구매했다. 말하자면, 국채 발행은 정부가 국민이 은행에 넣은 예금이나 국민연금공단에 납부한 보험료 일부를 빌려 가는 것이다.
정부는 국채를 두 가지 방법으로 상환한다. 첫째, 세금으로 청산하는 것이다. 둘째, 새 국채로 기존 국채를 대체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경제성장률이 높아 세입이 증가하거나, 아니면 증세 또는 긴축으로 상환기금을 조성해야 가능하다. 후자의 경우 이자 지급이 증가하지 않아야 가능한데, 그러려면 명목 경제성장률이 높거나 시중 이자율이 낮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성장률 상승과 정부 부채 증가가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다. 정부가 경제침체에 대응하다 부채가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저성장 조건에서 정부 부채가 증가할 때의 쟁점은 재정적자가 경제성장을 끌어올리는지 아닌지다. 만약 재정적자 이상으로 국민경제가 성장한다면, 조세 수입으로 적자를 갚을 수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목표만큼 이뤄지지 못하면 정부 부채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한번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선진국 정부 부채는 세계대전 전후로 급증했고, 전후 30년간의 고도성장 속에서 감소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저성장이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지속해서 상승 중이다. 특히 세계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금융시장 부실을 떠안다 보니 정부 부채가 급증했다. 금융위기가 진정된 이후에도 저성장으로 말미암아 정부 부채는 코로나19 사태 직전까지도 증가했다. 한국의 경우 저성장이 굳어진 2천 년대 이후 정부 부채가 지속해서 상승했다. 특히 201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 속도로 인해 OECD 국가에서도 정부 부채비율(부채/GDP) 상승 속도가 최고로 빨랐다.
 
주요20개국의 2020년 정부 부채 비율은 세계2차 대전 막바지였던 1944년과 비슷하거나 더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경제가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빚의 향연'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의 정부 부채는 고도성장, 인플레이션, 패전국 국채 소각 등으로 해결했었다. 현재는 이 세 가지 방법 중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다. (자료출처: IMF)

요컨대, 부채로 경제가 크게 성장한 사례도 없었고, 반대로 긴축으로 부채를 획기적으로 줄인 사례도 없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정부 부채는 경제성장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었다. 
한편, 정부는 국내의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는 법정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정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빚을 청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특성이 정부가 빚을 무한히 늘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란 점에 유의해야 한다. 화폐가 윤전기로 찍어내면 되는 종이 쪼가리는 아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화폐의 본질은 보편적 등가물이다. 보편적 등가물로서 화폐는 국민경제에서 모든 상품의 가치를 측정한다. 관리통화제에서는 화폐의 속성이 중앙은행이 보유한 자산의 가치로써 보장된다. 예로 중앙은행이 1조 달러의 국채를 자산으로 구매하면서 1조 달러 현금을 발행했다면, 1조 달러의 현금은 정부가 그만큼의 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어야 가치가 보존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정부가 지불 능력이 없어 계속 빚을 빚으로 갚는 상황이 되면(즉 정부의 지불 능력이 감소하면), 중앙은행 자산의 실질적 가치가 하락한다. 그리고 부채인 현금의 가치 또한 하락해 버린다. 만약 정부가 이런 상황을 내버려 두고 계속해서 빚을 늘리면, 결국에는 화폐 가치가 속절없이 폭락해 하이퍼-인플레이션 사태가 터지고 만다. 참고로, 대부분의 선진국 중앙은행은 가장 안전한 금융자산인 국채를 자산으로 보유한다.
2020년 주요 20개국(G20)의 정부 부채는 국내총생산 대비 120~130%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추계에 따르면 이는 2차 세계대전 막판이었던 1944년보다 높은 수치다. 세계금융위기 상처가 치유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19로 또다시 정부재정이 직격탄을 맞았다. 세계 각국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GDP의 10~20%에 달하는 대출과 보증을 제공하고 있고, 실업자 지원을 위해서도 여태껏 없었던 액수의 재정지출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화폐 가치의 하락,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는 않고 있는데, 채권·채무 관계로 현금을 대신하는 금융시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신용이 축소되면서 현금이 그 역할까지 떠맡고 있다 보니, 오히려 현금이 부족해 중앙은행이 수량완화(양적완화) 정책으로 금융시장에 현금을 쏟아붓고 있다. 예로 미국연방준비은행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단 한 달 만에 자산규모를 4조 달러에서 7조 달러로 늘렸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 정부는 폰지 재정 상태다. (폰지 사기란 아무런 이익 창출 없이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끝도 없이 신규 국채로 과거 국채를 갚아야만 재정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폰지 재정은 신규 국채 발행이 불가능해지면 곧바로 파산으로 이어진다. 즉 민간이 정부에게 얼마나 더 빚을 내어줄지가 문제란 것이다. 예로 일본은 대규모 민간 저축이 국채에 계속 투자되어, 부채비율이 250%가 넘어도 정부재정이 유지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매년 재정의 약 30%를 국채로 조달한다. 말하자면, 시민과 금융기관의 민족적 투자가 일본 경제를 유지하는 유일한 힘인 셈이다. 
그러면 다른 나라 정부도 일본처럼 부채를 늘릴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우선, 일본 같은 장기 무역흑자를 기록하지 않은 나라들은 국채 상한선이 상대적으로 낮다. 무역적자가 이어지면 대외부채가 증가할 수밖에 없어 민간이 정부에 빚을 대줄 여력이 감소한다. 다음으로, 일본 같은 강한 화폐를 가지지 않은 나라도 국채 상한선이 낮다. 화폐가 불안정하면 민간은 자국 화폐로 표시된 금융자산을 믿지 못한다. 신흥국에서 해외로 자금이 대거 유출되며 화폐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 그런 사례다.
한국의 경우 2000년대부터 무역흑자를 이어가고 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환율 변동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화폐가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못하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중앙은행 자산은 국채가 아니라 미국 증권으로 채워져 있다. 국가 부도 사태를 한번 겪고 나서부터 이렇게 됐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국외증권을 다량 보유하려면 당연히 무역흑자가 유지되어야 한다. 즉, 한국 화폐의 가치는 정부의 지불능력보다 대기업의 수출능력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국내 은행들은 대주주가 외국인이다. 일본 같은 민족적 투자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한국의 정부 부채비율 상한선은 일본, 유럽, 미국 등에 비해 한참 낮다.
앞으로의 세계 각국은 정부 부채의 증가 속에서 아르헨티나와 일본 사이의 어떤 상태에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본 이윤율 하락으로 경제성장을 통한 정부 부채 해결은 불가능하다. 무역수지, 화폐 안정성 등에 따라 상대적으로 조건이 나은 나라들은 일본과 비슷한 상태로 나아갈 것이고, 반대로 상대적으로 조건이 안 좋은 나라들은 아르헨티나와 비슷한 상태로 나아갈 것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 평가받는 장기침체를 폰지 재정으로 꾸역꾸역 버텨낸 나라다. 발전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붕괴하지도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30년간 경제침체를 겪으며 9번 국가 부도를 겪었다. 당연히 발전은 없었고, 사회도 엉망이 됐다.
 

3) 몰락하는 미국과 타락하는 중국


코로나19 사태의 특징 중 하나는 국제적 협력의 부재였다. 중국은 발발 초기부터 정확한 감염병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고,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국제적 대처를 촉구하는데 한참 뜸을 들였다. 미국은 국제적 방역의 중심은커녕 다른 나라 탓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국내에서도 좌충우돌을 반복하다 세계 최대의 감염 지역이 되고 말았다.
국가 간 관계를 조율할 리더의 부재는 앞으로의 세계를 더욱더 위태롭게 만들 공산이 크다. 세계화 시대의 문제들은 대부분 국제적 협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당장 코로나19 감염병부터가 그러했다. 기후위기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경제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사태로 무역이 급감하고 금융자본이 안전자산을 찾아 국제적으로 이동하자, 많은 개발도상국이 곧바로 부도 위기에 처했다.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나라가 5월 중순 80여 국가에 달한다. 국제적 차원의 대책이 없으면 UN 가입국의 40%에 달하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주저앉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질 것이다. 세계 총생산의 약 40%를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이 나서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이 불가하다.
더불어 두 나라의 무책임한 행동은 국제 협력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인류에게 큰 위협이다. 미국의 금융세계화는 무역적자로 유출한 달러를 자국의 금융시장으로 재유입하는 달러 환류가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금융적 지배의 이득을, 대미 수출국은 무역흑자의 이득을 챙겼다. 이런 금융세계화 덕에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경제적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다. 물론 금융세계화를 통한 성장은 계급적으로 상당히 불공평한 것이긴 했다. 미국의 금융 자본가와 수출국의 제조업 자본가들이 수억 명의 신흥국 노동자를 착취하는 동맹을 맺은 것이니 말이다. 초국적 금융자본과 수출 대기업은 엄청난 이득을 봤다. 하지만, 해외에 일자리를 뺏긴 미국의 중산층은 몰락했고, 수출의 낙수효과를 얻지 못한 신흥국 서민들은 빈곤 상태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트럼프는 이런 계급적 모순을 무역전쟁으로 뒤틀었다. 무역적자를 줄이면서 금융적 지배는 그대로 누리겠다는 횡포를 부린 것이다. 당연히 무역장벽이 금융세계화의 대안은 아니다. 무역장벽은 노동자에게 일자리와 풍요를 안겨주지 못한다. 금융적 혼란과 국가 간 갈등만 키울 뿐이다. 무역전쟁은 세계경제의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사태를 외부 탓으로 돌리고 있는 미국은 앞으로도 이런 ‘아메리카 퍼스트’ 반세계화 정책을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몰락과 국제적 혼란을 심화할 뿐이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한 차례 더 도약한 중국은 경제성장의 심각한 내적 모순 탓에 여러 문제를 겪고 있다. 중국 경제의 성격이 이윤율 경제를 지양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이윤율에 민감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무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국식 법인자본주의에 비해서도 열등한 경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2010년대 고도성장은 큰 규모의 국유기업 부채를 동반하며 이뤄졌다. 시진핑은 1인 독재에 대한 국민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고도성장이란 선물을 줄 필요가 있었는데, 당이 지배하는 국유기업이 그 역할을 떠맡았던 탓이었다. 중국 국유기업은 생산성이 낮았다. 그리고 국책 사업에 동원되느라 구조조정에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국책은행은 이런 국영기업의 파산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제공했다. 2018년 말 국유기업의 부채비율은 300%에 육박했고, 부채총량은 국내총생산의 1.5배에 달할 정도로 컸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이 부채가 더 증가했을 것이다. 중국 당국은 이러한 국유기업의 부채를 막대한 외환보유고와 금융시장 통제로 관리할 수 있었다. 외환보유고와 통제된 금융시장이 국책은행 자산의 안전성을 담보했다. 하지만 중국의 자산가들이 애국적 열정을 무한히 가진 사람들은 아니다. 이들이 중국 경제에서 탈출하면, 중국은 언제든지 국유기업 부채위기와 은행 위기가 폭발할 수 있다.
중국 당국은 이들을 막기 위해 여러 수준의 감시와 통제를 늘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대외 금융거래의 중요한 통로인 홍콩에 대해서도 여러 통제 조치가 강화되고 있다. 홍콩의 반정부 세력에 대한 탄압과 홍콩 보안법 제정 등이 그런 시도들이다. 코로나19 이후 경제침체가 더욱 심각해졌으니, 중국의 억압적 통제는 본토와 홍콩을 가리지 않고 커질 것이다. 쇼비니즘적 선동과 대외적 갈등이 국내의 불만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선택될 수도 있다. 중국발 세계경제위기와 군사적 갈등이 코로나19 이후 훨씬 더 고조된 상황이라 하겠다.


4) 가속하는 생태 위기와 자본주의의 임계점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코로나19 감염병은 박쥐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천산갑으로 넘어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후, 인간을 감염시켜서 발발했다. 2003년 사스가 박쥐에게 감염된 사향 고양이에서 유래한 것과 비슷하다. 자연파괴와 새로운 야생동물의 대규모 축산화로 인간과 접촉이 없었던 바이러스들이 점점 더 자주 인간 사회에 퍼지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이런 감염병 창궐이 앞으로 더욱 잦아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인류의 경제성장 방식과 생태계의 수용 가능성 문제를 근본적 고민으로 던져준다. 특히 21세기에는 서유럽의 고도성장에 뒤이어 인구가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아시아가 고도성장을 하고 있어 더욱더 그러하다. 인류의 역사에는 생태계 변화로 몰락한 문명이 수없이 등장한다. 사라진 문명 발상지 상당수가 현재 사막인 것만 봐도 생태계 변화가 문명의 몰락에 미치는 영향을 직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구의 장기 역사를 보면, 생태계 격변으로 멸종한 생물종이 전체 생물종의 99%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21세기의 세계자본주의 문명과 호모사피엔스 생물종 역시 이러한 문명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생태계 변화는 이전과 달리 인간에 의해 촉발되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도구와 불을 사용함으로써 생태계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농경으로 동식물의 인공적 서식지를 조성해 생태계 변화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생태계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농경 확대는 고대문명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18세기의 자본주의 형성과 산업혁명은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적 요소들이 경제적 영역에 포섭되었고, 이윤이라는 척도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고유한 생태적 특성은 자연에 대한 착취를 보편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세기의 녹색혁명(비료와 품종개량), 에너지혁명(석유)을 거치며, 인간은 생태계 복원력을 초과하는 격변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최근 문제가 되는 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 온난화는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격변의 대표적 사례이다. 십수 년 내에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하면, 인류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재앙을 피할 수 없다.
 
현재 지구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80만년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생태계의 수용 능력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경고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태계 파괴를 '신진대사의 균열'이란 개념으로 포착한다. 코로나19 감염병도, 지구 온난화도, 결국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만들어낸 인간적 발전의 자연적 조건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자료출처: https://www.climate.gov)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을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 균열’로 포착했다.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에너지로 노동을 하고, 그 노동으로 자연에 에너지를 주입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에너지 교환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신진대사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신진대사를 뒤틀어 버렸다. 노동과 자연은 상품·화폐의 순환에 포섭되어 동시에 착취된다. 노동은 임금노동제도에서 자연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지급하는 임금과 관계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선 자본은 노동 중 일부를 부불노동으로 착취한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품, 화폐 경제로 재구성해 양자를 동시에 착취하는 체계이다. 기업이 석유를 태워 탄소를 배출하는 생산을 확대해야, 노동자는 생존을 위한 임금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뒤틀린 신진대사 속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멈추기도 어렵다. 자본이 양자에 대한 착취를 중단할 경우 자본축적도 멈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은 환경조건 악화로 인한 이윤율 하락과 인간적 발전의 자연적 조건의 위기를 동시에 초래한다. 토지 오염이나 에너지 고갈로 인한 생산비 증가가 전자의 사례라면, 감염병 창궐이나 온난화로 인한 인간의 생존 위기가 후자의 사례이다. 특히 인류 차원에서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후자인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수십 년 이상 이어지는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흥국의 고도성장은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을 빠르게 심화했다. 중국은 탄소배출량에서 압도적 1위이다. 21세기의 세계적 감염병 발발도 대부분 신흥국에서 시작됐다. 21세기의 생태계 문제는 신흥국 고도성장의 문제와 직접적 연관을 갖는다. 물론 앞서서 자연을 수탈해 이득을 본 선진국이 신흥국의 성장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국이 선진국 수준의 1인당 GDP를 현재 방식으로 달성한다면, 지구가 남아날 수 없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인도와 베트남 등의 인구 대국들이 중국의 뒤를 따라 비슷한 방식으로 성장 중이란 사실도 고려하면 더욱더 그러하다. 선진국과 신흥국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데, 마르크스가 말했던 자본주의의 신진대사 균열은 몇 가지 환경 정책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점에 어려움이 있다. 
코로나 19 이후 세계는 인류의 존재 자체에 위협을 가하는 생태계 문제를 이전보다 더욱 확연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안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점도 이전보다 더욱 확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생태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는 가운데 민족적 갈등이나 인종적 갈등으로 뒤틀릴 가능성이 크다.
 

3. 한국의 대응, 중간평가


코로나19 사태는 세계자본주의의 이윤율 위기, 선진국 정부들의 재정위기, G2의 위기, 자본주의적 생태위기를 크게 심화하거나 해결해야 할 현안으로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것들은 몇 가지 정책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들이 아니다.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해결하는 변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20세기 현실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로 타락해 몰락한 이후 유의미한 변혁적 대안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각국 정부가 연일 쏟아내는 코로나19 대책은 모두 미봉책에 불과하다. 정부 당국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의 정책이 집행되고 있다. 물론, 미봉책에도 수준 차이는 있다. 위기를 더 심화하는 대책과 위기를 지연시킬 수 있는 대책은 엄연히 그 효과가 다르다. 한국 정부는 이 양자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집권세력은 방역에서의 약간의 성과를 가지고 ‘국뽕’을 자극하는 선동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와 제도는 선진국보다 여러모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한국의 위기는 빠르게 확대될 것이다.
 

1)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드러나는 집권세력의 포퓰리즘


올해 초 여당과 그 지지자들이 느닷없이 꺼낸 화두는 ‘박근혜’였다.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 대응 실패가 여당의 정치 소재로 등장했다. 그들은 코로나19 방역 체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당시를 소환한 것이 아니었다. 총선을 앞두고 탄핵당한 박근혜를 이용해 현 정부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집권세력은 이렇게 국난 앞에서도 정략을 앞세웠다. 더구나 이들의 퇴행적 대응은 여기서 그친 것도 아니었는데, 새누리당과 신천지가 연결되어 있다는 음모론을 SNS에 퍼뜨렸고, 대구가 보수 편향적이라 코로나19에 당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서슴없이 꺼냈다. 그들은 코로나19 사태마저도 반보수 전선의 소재로 이용했다.
대북정책을 염두에 두다 중국 입국 규제를 지연한 것 역시 정치공학적 판단으로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한 사례였다. 무증상 감염과 강한 전파력을 가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거리두기’ 말고는 방역 방법이 없다. 우한에서 발발한 감염병의 국내 전파를 막는 것도 “중국과 거리두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전문가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한 입국 규제를 늦췄다. 대북정책 키를 쥐고 있는 중국 당국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이는 정말로 위험한 도박이었다. 자칫 한국도 서유럽이나 미국같이 코로나19 공황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한국이 코로나19 방역에서 그럭저럭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는 이유는 사스와 메르스 방역의 노하우, 미세먼지로 인해 마스크 착용 습관 등이 원인이었다. 정권 덕에 방역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작태에도 불구하고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모든 가계에 지급된 재난지원금은 그야말로 총선용 정책이었다. 기획재정부가 처음 입안한 국민 50% 지급이 70%로 올라가고, 다시 100%로 결정되는 과정은 총선을 빼놓고 설명될 수 없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는 1년 이상 계속될 수밖에 없는 장기전이다. 피해를 보는 계층에 대한 지원 역시 오랫동안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곳에 집중해서, 충분하게 오랫동안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재정전략을 짜는 것이 집권세력의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총선을 며칠 앞두고 기획재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계에 현금 지급을 결정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생존 위험에 처한 가계에는 턱없이 부족한 지원금이, 코로나19 이후에도 별 탈이 없었던 가계에는 쏠쏠한 용돈이 지급됐다. 재정을 이런 식으로 허투루 사용할 경우, 사회적 취약계층 지원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이득을 위한 용돈 지급 정책 탓에 저소득 계층의 생존권 위기가 더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여당은 코로나19 대책이 아니라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적 공작에 몰두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코로나19 대책은 이미 관심사 밖이다. 예로 양향자 의원은 ‘역사보안법’이라 할 ‘역사왜곡금지법’을 제출했는데, 이해찬 대표는 올해 역사 전쟁을 끝내겠다며 법안 처리를 공언했다. 반일, 반보수 쟁점을 역사 해석을 통해 재생산하겠다는 얄팍한 수다. 그리고 청와대는 ‘쇼통’의 달인으로 평가받는 탁현민을 재기용했다. 직책도 이전보다 상승했다. 방역이나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홍보 전문가가 청와대에서 기세를 드높인다. 코로나19 이후 한국사회는 집권세력의 진영 전쟁으로 다시 홍역을 앓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2) 전국민고용보험의 모순


정부의 코로나19 경제대책은 선진국 대부분에서 하는 것들과 비슷하다.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으로 기업이 부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책임지는 직간접적 기업 대출을 확대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직접적 피해를 본 계층의 구제를 위해 여러 종류의 지원금을 만들었다. 또한, 대량해고를 막기 위해 고용 관련 지원을 확대했고,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계층에게도 여러 방식의 지원금을 지급했다. 코로나19 대책은 크기로 보면 2019년 GDP의 14%, 2020년 정부 예산의 48%에 달하는 약 250조 원 규모다. 물론 이 250조 원 모두가 정부가 바로 지출하는 금액은 아니다. 200조 원 가까이가 대출이나 보증, 금융자산 매입 등에 사용되는 일종의 금융투자이다.
다만, 무엇을 해도 ‘쇼’와 ‘말의 성찬’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정부이다 보니, 비합리적인 대책들도 쏟아져 나온다. 대통령은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디지털 인프라와 친환경 사업을 대규모로 진행하는 한국형 뉴딜, 그리고 모든 취업자가 고용보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전국민고용보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두 정책은 한국경제의 심각한 문제들과도 엮여 있어 제대로 된 검토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3주년 연설에서 전국민고용보험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전국민고용보험이 지속 가능한 제도인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이 제도가 지속가능하려면 불완전 취업자가 감소하거나 적어도 증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정부나 경제학자들이 예상하는 바는 이와 정반대이다. 소주성 같은 문재인 정부의 '쇼통'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2020.5.10. YTN뉴스화면 갈무리)

먼저, 전국민고용보험 정책부터 살펴보자. 현재 고용보험 가입자는 2천8백만 취업자 중 절반이 되지 않는다. 갖가지 형태의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자가 너무 많아서다. 한국은 실업부조 제도가 사실상 부재한 가운데, 고용보험의 포괄범위도 지극히 협소하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가 4백만 명 가까이 되고, 아예 가입이 안 되는 자영업자와 특수고용노동자도 9백만 명이다. 고용보험을 취업 ‘완전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한국은 취업자의 절반 이상이 불완전 취업 상태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들 불완전 취업자는 경제위기 때마다 가장 먼저 쓰러졌고, 가장 오랫동안 복구가 안 되었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국민고용보험의 취지는 이들 불완전 취업자에게 어느 정도의 사회안전망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전국민고용보험이 지속 가능한 제도인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 고용보험 성격상 잦은 실업을 경험하는 불완전 취업자는 보험료를 낸 것보다 큰 혜택을 얻는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완전 취업자는 이전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고용보험을 매개로 한 취업자와 실업자 간의 연대라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만약 완전 취업자가 계속 감소하고, 불완전 취업자가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완전 취업자의 보험료가 불완전 취업자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게 증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용을 내는 취업자는 줄고, 혜택을 얻는 취업자는 증가하니, 비용증가는 가속한다. 
즉, 전국민고용보험은 실업이 만연한 사회의 대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불완전 취업자가 감소하거나 적어도 증가하지 않아야 제도가 지속될 수 있다. 그런데 정부나 경제학자들이 예상하는 앞으로의 한국경제는 지금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베이비붐 세대의 계속되는 정년퇴직과 불완전 취업자로의 전환, 저성장 흐름의 고착화, 플랫폼 노동의 확대 등은 하나 같이 모두가 완전 취업의 감소와 불완전 취업의 증가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전국민고용보험은 시작과 함께 문제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따져보면, 전국민고용보험 제도는 사실 발상 자체가 모순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자영업과 특수고용이 다른 선진국보다 많은 이유는 대기업과 공공부문이 적극적으로 고용을 회피한 결과이다. 이 두 부문의 높은 임금과 고용안정은 나머지 부문의 저임금, 불완전 취업을 전제한다. 한국 노동시장은 이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분절되어 있고, 양극화되어 있다. 여기서 전국민고용보험제도는 분절된 노동시장을 보완한다. 하지만 앞서 봤듯 분절된 노동시장이 강화될수록 전국민고용보험제도는 더욱 유지가 어려워진다. 전국민고용보험이 유지되려면 분절된 노동시장이 완화되어야 하고, 분절성이 약화하면 전국민고용보험은 그 필요성이 점점 없어진다. 전국민고용보험은 취지 자체가 자기 모순적이란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19 이후 노동시장 문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그 분절성이라 하겠다. 고용보험 이전에 노동시장의 격차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엄청난 격차와 분절성을 그대로 두고서는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고용보험료를 사용자와 노동자 간에 나누는 방법은 부차적 쟁점이란 점도 확인해 둔다. 사용자가 부담하는 보험료가 높아지면, 시차는 있겠지만 그 비용은 결국 임금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용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급하는 것이 임금인지, 보험료인지가 아니다. 노동력의 사용비, 즉 노동자와 관련된 모든 비용인 인건비만 관심일 뿐이다. 노사 간 보험료 부담의 차이가 국민경제의 분배율 변동의 변수가 되지도 않는다. 고용보험을 어떤 식으로 부과하든지 간에 결국 그 보험비용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노동자가 부담하는 것이다.


3) 전제도, 방법도 이상한 한국판 뉴딜 


뉴딜론이 유행인 이유는 코로나19 사태가 전쟁과 대공황이 있었던 20세기 초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뉴딜은 대공황부터 2차 세계대전 즈음까지 이어진 미국의 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대책으로 뉴딜을 제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첫째, 경제 조건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대공황은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대대적으로 향상되는 가운데 경제제도가 그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반면 현 경제위기는 생산성 둔화와 10여 년 전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감염병이라는 돌발상황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비유하자면 1930년대는 건강한 상태로 감염병에 걸린 것이었고, 현재는 기저질환을 앓다가 감염병에 걸린 것이다. 둘의 처방이 같을 수 없다.
20세기 초 미국은 2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도였다. 제도가 기술발전을 감당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상황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상품이 나오던 시기, 금융시장은 한계기업과 선도기업을 구별하지 못했다. 금융기관들은 투자와 투기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금융감독제도와 화폐제도라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29년 증시 폭락이 방아쇠가 돼 뱅크런이 터졌고, 은행이 부도나면서 경제 전체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루스벨트 정부는 대공황 정책으로 구제(relief)·개혁(reform)·회복(recovery)으로 구성된 뉴딜 정책을 시행했다. 구제는 실업자와 빈곤층을 돕는 것이다. 생존권 위기에 빠진 노동자와 농민이 1910년대 러시아 같은 계급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회복은 생산에 필요한 산업시설이 폐기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루스벨트 뉴딜의 포인트는 개혁이었다. 뉴딜의 핵심은 오늘날 많이 소개되는 정부 주도 대규모 투자는 아니었다. 정부가 새롭게 뭔가를 하는 것보다 19세기 말부터 이어지고 있던 민간의 혁신과 투자를 이어 가는 것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관건은 끊어진 흐름을 잇는 것이었다. 개혁이 바로 그 역할을 했다. 루스벨트는 방종을 일삼던 은행을 규제했고, 금본위제를 비롯한 통화제도 전반을 현대화했다. 그리고 이런 개혁 성과로 1930년대 말부터 다시 2차 산업혁명의 효과가 이어지며 경제가 빠르게 복구됐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코로나19 이전에도 세계 경제는 이미 오랜 생산성 둔화와 천문학적 부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중앙은행은 금융위기 때 풀린 돈을 회수하지 못했다. 기업들은 저금리를 이용해 부채로 사업을 확장했다. 사실 이런 이유로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경기침체가 예상되기도 했다. 20세기 초가 인류사의 도약시기였다면, 21세기 초는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후 가장 형편없는 성장을 기록하던 시기였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뉴딜을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뉴딜은 끊어진 성장의 흐름을 잇는 것이었다. 현재는 이어야 할 이전의 성장이 없다. 뉴딜이 작동할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새롭게 거래해야 할 대상이 없는데 ‘뉴딜’이란 말만 나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태다.
더군다나 현재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뉴딜 정책은 그나마 개혁적 내용도 없다. 문재인 뉴딜 정책은 정부 주도의 몇 가지 디지털 투자, 친환경 투자를 묶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경제는 1960~1980년대 같은 정부 주도 추격성장 경제가 아니다. 정부 주도로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더구나 1930년대 뉴딜의 핵심이었던 제도 개혁은 문재인 정부 뉴딜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4) 제도적 퇴행에 불과한 기본소득론


진보진영 일각에서 이야기되던 기본소득론이 여야 정치인들의 정책 소재가 되면서 국민적 쟁점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다. 정부가 국민 모두에게,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정해진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이 기본소득의 핵심 내용이다. 전국민재난지원금 같은 현금 지급 정책이 실제 시행된 것도 기본소득론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이유 중 하나다.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코로나19 이후와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사회를 묘사하면서 기본소득만이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 모습은 다수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실업자로 내몰린 사회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발상 자체가 난센스이다. 우선, 정부가 충분한 현금을 국민 모두에게 지급하려면, 그만큼 조세를 거둬야 하는데, 그러려면 경제가 충분히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경제가 그만큼 조세를 거둘 만큼 성장했다면, 기본소득이 필요한 실업자가 적을 것이다. 기본소득의 실현 조건은 기본소득이 필요 없는 사회란 것이다. 더불어, 기본소득론자들이 상상하는 미래가 실제 나타나면 기본소득은 정책으로 실현될 수 없다. 그만큼 세금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금을 거두려면 큰 규모의 증세를 하든지, 아니면 기존 복지지출을 대폭 줄여야 한다. 보수적 기본소득론자들은 후자를 고려하는 사례가 많다. 현존하는 모든 복지지출을 다 없애서 그냥 현금으로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지급하자는 주장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경우 빈곤층이 실제 얻는 혜택은 오히려 감소한다.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전자도 마찬가지로 정책을 실행할 이유가 없다. 엄청난 누진적 증세가 가능하다면 복지를 강화하면 될 일이지 굳이 기본소득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것은 그것이 골치 아픈 생산의 문제를 생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퓰리즘 정치인들에게 기본소득은 매력적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금 살포의 매력이라 하겠다. 기본소득은 생산과 소득이 어떻게 연계되는지 무시한다. 하지만, 경제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생산 속에서 소득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몇 가지 경제 이론을 살펴보자.
신고전파는 소득을 생산에 대한 기여로 규정한다. 소득을 높이려면 생산에 더 기여해야 한다. 이것이 생산을 자극하는 인센티브가 된다. 케인스주의는 생산적 투자를 자극하기 위한 소득을 이야기한다. 생산의 주체인 기업이 위험한 설비투자에 나서야 경제가 성장하는데, 정부는 기업이 설비투자 외 딴짓을 못 하게 금융소득을 규제해야 하고, 재정을 이용해 직접 투자에도 나설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윤율 동역학을 통해 생산과 소득의 모순을 분석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이윤은 착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고용을 유발하는 기업 투자는 이 착취가 원천이다. 착취가 줄면 투자가 줄고, 고용이 줄면서, 노동자 소득이 감소한다. 소득을 얻기 위해 착취를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이런 이론을 전제로 신고전파는 생산성에 비례하는 소득을, 케인스주의는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소득을, 마르크스주의는 임금소득의 모순을 혁파할 자본주의적 생산의 변혁을 주장한다.
그런데 기본소득에는 이러한 생산이론이 없다. 오직 분배만 본다. 이는 복지이론에도 미달하는 것이다. 복지이론들은 노동시장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임금(사회보장지출에서 사회보장세입을 공제한 것) 제도를 설계한다. 독일처럼 낮은 시장임금과 높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고, 스웨덴처럼 높은 시장임금과 낮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금을 나눠 주는 것이다. 분배의 대상과 방법만 있지 시쳇말로 “소는 누가 키우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분배 이론이라는 것이다.
 

5) 대안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노동운동의 비합리적 대책들


민주노총 김명환 집행부의 핵심 요구는 해고금지, 전국민고용보험, 전국민재난생계소득 등이다. 고용보험은 정부 약속을 더 빨리 이행하라는 요구고, 재난생계소득 역시 정부 재난지원금을 더 많이 자주 지급하라는 요구다. 해고금지는 대통령이 긴급경제명령으로 모든 기업이 해고를 중지시키라는 요구인데, 어떻게 가능한지는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김명환 집행부의 이런 요구는 진보는커녕 퇴행에 가까운 것들이다. 
우선 해고금지 긴급명령은 실행될 수 없는 요구임과 동시에 발상 자체도 반민주적이다. 올해 상반기 실업은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이 아니라 영세기업과 자영업 부문에 집중되었다. 코로나19 경제위기로 사업의 지속성 자체가 불확실한 부문에서 실업이 대규모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문에서 어떻게 해고를 금지할 수 있다는 것일까? 고용주가 없는 해고금지라는 공허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집행부의 해고금지 요구는 아직 영향을 받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가 불안한 정규직 조합원의 요구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더구나 이것을 긴급명령으로 하라 하니 더욱더 문제다. 법의 집행 기관인 행정부는 전쟁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고서는 법에 근거해 공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법치를 요체로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긴박한 상황이긴 하지만, 국회를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법을 어기는 긴급명령이 나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긴급명령은 이승만이 한국전쟁 시기 십수 차례 사용했고, 박정희가 기업 사채를 해결해주기 위해 한 번, 김영삼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려고 한 번 사용했다. 작금의 정세는 국가기관이 사라진 전쟁 시기가 아니고, 박정희나 김영삼 때처럼 시장제도가 엉망인 상황도 아니다. 더구나 177석 슈퍼 여당이 국회에 있다. 대통령에게 긴급명령을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서 한참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국민에게 1인당 100만 원 씩 수개월에 걸쳐 지급하라는 전국민재난생계소득은 코로나19 사태를 이용한 지대추구에 가깝다. 1인당 100만 원이면 한 달에 50조 원, 넉 달이면 200조 원이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막 질러나 보자는 요구가 아니라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이 돈 대부분은 국채로 조달되어야 할 텐데, 국채 금리가 폭등할 것이고, 환율은 요동칠 것이다. 국가재정 문제만이 아니라 형평성에도 이런 지원방식은 문제가 된다. 지원이 필요한 계층을 판별하기 어렵다고 지원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수십조 원을 퍼붓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공평하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노동자들을 더 촘촘하게 파악해야 할 노총이 자신의 무책임함을 정부재정으로 모면해 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정의당의 코로나19 대책은 전국민재난기본소득과 그린뉴딜이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앞서 두 차례나 말했으니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정의당은 오래전부터 재정확장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반경제학적 관념에 빠져 있었다. 그린뉴딜 역시 이런 경향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그린뉴딜 제안은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그린뉴딜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투자로 일자리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코로나19 구제 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상당한 재정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모험적 투자를 감행하자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또한, 친환경 에너지는 상당 기간 에너지 비용을 높일 수밖에 없는데, 기업 이윤으로 생산이 조직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군다나 대불황에 버금가는 위기 속에서 이런 비용 증가를 감당하는 투자가 어떻게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1930년대 뉴딜은 비용을 절감하는 생산성 혁신 속에서 이뤄졌다. 자본주의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뉴딜을 생태계 복원과 결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이어 가며 그 경제적 피해를 사회 구성원이 최대한 공평하게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다. 뉴딜이나 경기부양은 언감생심이다. 오히려 방역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좌파 진영으로 불리는 단체들은 전반적으로 국유화를 기본 요구로 삼아, 사내유보금 환수나 전국민고용보장제 같은 요구를 함께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기간산업 몰수, 국유화 계획경제, 그리고 정부의 고용책임 등은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핵심 정책들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20세기 소련을 21세기 남한에서 재건하자는 주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본주의만큼이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혁명들에도 있었다. 소련, 중국, 북한 등이 경제성장에서나, 노동자의 민주주의에서나 왜 실패했는지 먼저 평가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4. 결론: 무엇을 할 것인가?

 
정치세력들은 자신의 장기 전략을 코로나19 경제대책에 끼워 넣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지만, 이는 과유불급이다. 단기적으로 코로나19 사태 속 경제는 두 가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 
첫째, 거리 두기 비용을 정부가 감당하는 것이다. 거리 두기 비용이란 시민 생존을 두루 지원하고, 기업이 파산까지 가지 않도록 구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가 소득을 지원하고, 보험을 확대하고, 대출을 이어 가는 것이다.
둘째, 치료제와 백신 개발 때까지 지원을 이어 가도록 재정 여력을 충분하게 확보해야 한다. 재정적자가 이어져 부채가 누적될수록 구제 능력은 당연히 하락한다. 한국은 기축통화국처럼 화폐 안정성이나 정부 지불능력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다. 더구나 무역흑자가 이전처럼 이어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더더욱 화폐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재정적자나 국가부채 상한선이 분명하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같은 무조건 쏟아붓는 정책이 아니라 정확하게 필요한 곳에 충분히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구제 기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재정적자가 커질 수밖에 없는데, 부채를 쌓는 것보다 증세가 바람직할 것이다. 누진적 증세로 소득이 많은 시민에게 더 많은 방역 비용을 걷어야 한다.
중기적으로는 정부 파산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로 불리는 세력은 보통 큰 정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시장을 비판하다 보니, 정부의 역할을 강조해서 그러하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정부 역할이 커지면서 큰 정부론은 이전보다 힘을 더 얻고 있다. 하지만 시장이 답이 아니라고, 정부의 확장이 해답인 것은 아니다.
정부는 경찰, 군대, 사법기관 같은 공권력, 학교로 대표되는 다양한 교육기관,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을 규제하며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경제기관 등을 포괄한다. 경제가 사회의 토대인 만큼 정부의 핵심도 경제를 유지하는 역할이다. 정부는 다양한 기관을 이용해 시장이 생산할 수 없는 화폐와 노동능력이란 특수한 상품을 만들고, 신용, 매매, 소유 등에 관한 규칙을 수립하며, 개별 기업이 하기 어렵거나, 독점할 경우 전체 기업에 손해가 나는 사업들을 직접 수행한다. 경제에서 창출된 잉여노동의 큰 부분이 정부의 이런 역할을 위해 사용된다.
큰 정부의 극단적 사례는 국가자본주의이다. 물론 최근 선진국에서는 국가자본주의를 하자는 요구는 없다. 주로 사회보험, 빈곤층, 보건의료 등에 대한 정부 지원을 독일이나 북유럽 복지국가처럼 키우자는 요구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정부의 확장이 공짜가 아니란 점이다. 정부는 시장에서 창출한 잉여노동을 조세로 거둬 비용을 조달한다. 정부 지출이 증가하려면 노동생산성이 상승해 시장에서 잉여노동이 증가하거나, 무역흑자로 해외에서 잉여노동을 가져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국민경제의 잉여노동이 증가하지 않으면서 정부 지출이 증가하면, 이는 고스란히 정부의 빚으로 남는다.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은 높은 복지지출과 낮은 국가 부채비율을 동시에 달성한 사례다. 반대로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남유럽 국가들은 복지지출만큼 정부 부채비율도 높아진 사례다. 그런데 정부 빚이 세계금융시장이 허용하는 한계치를 넘어서면 그리스처럼 국가 부도 사태를 겪는다. 후세대는 이 빚을 갚기 위해 기존의 복지를 축소해야 한다.
세계 경제가 위기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정부의 확장이 잉여노동의 증가를 동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봐도 세계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에 정부가 대응하면서 선진국 대부분에서는 정부 부채비율이 크게 상승했다. 자칫 선진국 대부분이 남유럽처럼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빚더미에 깔린 정부는 장기간의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 예로 코로나19 확산 과정에서 남유럽이 유독 많은 희생을 치른 것도 정부 부채비율과 무관치 않다. 자본주의 경제는 최악의 경우 아르헨티나처럼 국부가 소실되는 붕괴 상태로 나아가고, 최선의 경우조차 일본처럼 제로 성장이 계속되는 ‘잃어버린 시대’로 진입한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종착지는 아르헨티나와 일본 사이의 어떤 상태일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정부의 빚으로 누적되는 가운데, 21세기의 급진적 변화는 이 빚의 처리 과정을 둘러싼 갈등 과정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무분별한 정부 확장 요구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세력, 다음 세대보단 현재 세대가, 가난한 시민보단 부자인 시민이 정부 빚의 부담을 더 지도록 만들 수 있는 세력, 정부 파산을 막고 지속 가능한 제도를 설계할 수 있는 세력이 변화를 주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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