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0 여름.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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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에서 『공장의 불빛』까지, 1970년대 노동문학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②: 1970년대 노동소설

조유리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오래간만의 연재다. 2019년 가을호에 실린 「해방공간의 『폭풍』,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이어, 이번에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소개한다. 해방기의 좌익 문학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그 흐름이 단절됐다. 1960년대 후반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그제서야 자본주의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황석영의 「객지」(1971년)는 그 시작을 알리는 소설이었다. 그렇지만 해방기와 비교할 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 대신에 1970년대에는 민주노조운동에 발을 디뎠던 참여자의 수기가 다양하게 남아있다. 여기서는 1970년 분신한 전태일이 남긴 수기를 정리한 조영래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1983년),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삼원섬유 노동조합의 활동을 기록한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1984년),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동일방직 노동조합 활동을 증언하는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1984년)을 소개한다. 이 외에도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경험한 노동자가 쓴 다양한 수기들이 남아있으니, 이 글을 계기로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1. 1960~70년대 노동 문제가 부상하다


1960년대 내내 평균 9% 이상 성장한 한국경제는 1960년대 말부터 침체기를 맞는다. 세계 경제의 불황, 기업들의 취약한 재무구조, 외자의 방만한 운용과 관리, 급격한 경제정책 전환의 충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70년 무렵에는 기업 부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한다. 
국제적으로는 1971년 닉슨독트린 이후 동북아 냉전 질서가 해체된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후 철수했고, 남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남북대화가 추진되었지만, 남북은 내부적인 경쟁을 지속하여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을 추진하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이 맞물려 마침내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된다. 정부는 철강, 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를 6대 산업으로 설정하고 대규모 공장을 건설했다. 이 계획은 제1차 유가 인상으로 한동안 축소, 연기되기도 했지만 1976년 중동 건설 열풍에 힘입어 강력히 재추진되었다. 이 정책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 등으로 생산거점을 이동하면서 힘을 받기도 했다.
당시 중화학공업으로 외화수입을 얻기까지는 10년 정도가 소요되리라 예상되었다. 중화학공업화를 계획하던 197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는 1975년까지였기에, 중화학공업화는 유신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외자에 의존한 한국의 경제성장 방식으로 인해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는 동안 외화 획득을 위한 수출경공업, 특히 섬유, 가발, 전자 산업에 대한 통제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1) 황석영의 「객지」

 
운지 간척 사업장의 건설 노동자들은 하루 품삯으로 130원짜리 전표를 받는다. 전표는 임금 계산일 전에는 110원에 현금으로 교환되며, 건설 노동자들은 그 중 40원을 숙박비로, 60원은 하루 식비로 낸다. 남은 10원에 외상을 더해 담배나 술을 사면, 노동자들은 일을 할수록 빚을 지는 상황이 된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늘 쌓여있다. 
일이 험해 다치는 사람이 많은 데다, 현장 감독들은 중간에 적은 임금을 떼먹고 폭력으로 이들을 제압한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집단적인 저항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잠깐일 뿐이다. 주동자들이 해고되고 나면 현장은 늘 그 모습대로 돌아오고, 빈자리는 새 일꾼들로 메워진다. 동혁도 그렇게 빈자리를 메운 ‘신참’ 중 하나였다. 
동혁과 ‘대위’라 불리는 이가 주축이 되어 노동자들의 불만을 모아낸다. 이들은 국회의원 사찰에 맞추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얻어내고자 한다. 사측은 그 전에 경찰을 동원하여 이들의 요구를 무마하려 한다. 무장 경찰이 오자, 노동자들은 산 위에 숨어 파업을 이어나간다.
소장은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우대하면서, 파업 중인 사람들을 회유한다. 두려움에 떨던 노동자들은 소장의 회유에 포섭된다. 동혁은 홀로 산에 남는다.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버린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강렬한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태편 사람들과 동료 인부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승리를 얻는 게]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언제가는 이기고야 말 것이다.] 그는 혼자서 다짐했다.
황석영의 중편소설 「객지」는 1971년 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됐다. 작품은 1960년대 어느 가상의 간척 공사장에서 벌어진 건설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을 그린다. 일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건설 노동자들의 삶은 본격적인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된 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파업을 다루지만 황석영은 그것을 반드시 승리로 연결하지 않았다. 황석영은 노동 현실이 쉽게 개선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를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식에서 우리는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전태일 사건 직후 발표된 「객지」는 산업화 이후 한국에서의 노동 문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주인공 동혁의 현실 인식과 최후의 선택을 따라가 보자면, 자연스럽게 노동의 현실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 낸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게 된다. 
 

2) 『전태일 평전』: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선언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을지로 6가 평화시장 앞길.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해설』이란 책과 함께 타올랐다. 불길은 구호와 함께 이내 사그라들었다. 
전태일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짝사랑을 하기도 하고 출세를 꿈꾸기도 했던 재단사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일한 지 5년여 만인 1969년 6월 바보회를 창립한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통해 노동자에게도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음을 알게 됐다. 바보회는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공부하면서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한다. 조사과정이 업주에게 발각되면서 전태일은 해고되고 바보회는 해체된다. 
이후 전태일은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서를 보내거나 모범업체를 설립해보려는 계획을 세운다. 진정은 무시되고 어떠한 변화도 없자 적극적인 투쟁도 계획한다. 여공들을 바라보는 전태일의 시선이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가부장적이기도 해서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인 여공들을 위하여 전태일은 “나약한 나를 다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온정주의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전태일은 점진적으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식해나간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그의 외침이 1970년대를 관통하는 울림을 남겼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태일은 마지막 외침을 통해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했다.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사실을, 노동자 스스로가 또 학생, 지식인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죽음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전태일이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대학생들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민중’이라 하면 막연하게 농민을 떠올리던 대학생들은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 현실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대 공대의 산업사회연구회를 비롯해 여러 학생그룹은 방학을 활용하여 공장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노동현장으로 진출하는 학생운동가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태일 사건으로부터 2주 만인 1970년 11월 27일,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된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노력에 사회적 여론이 더해진 덕분이었다. 전태일의 생전에 평화시장의 섬유업계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처음부터 노동자의 대중적인 지지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초기 청계피복지부의 활동은 삼동회원들과 어머니 이소선의 선도적인 투쟁에 의해 개척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의 청계피복노조는 노조 가입을 독려하는 플래카드를 하나 거는 일조차 투쟁이었다. 노동조합을 만든 직후인 12월, 청계피복노조가 플래카드를 달자 경찰관이 광고물 단속법 위반을 주장하며 플래카드를 내릴 것을 요구했다. 이소선와 노동조합 간부 12명이 집단 분신 시도로 맞섰고, 청계피복 노사협의회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실무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합원을 확대하고 조합원의 지지를 얻어나간다. 노동교실을 운영하여 조합원들의 활발한 소그룹 참여를 이끌어내고, 다양한 지식인과 연계하여 교육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3) 산업선교, 노동자의 벗이 되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또 다른 한 축은 종교계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노동자의 편에 선 산업선교는 1960년대 말부터 ‘노동조합’이라는 제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68~1969년 무렵, 산업선교의 주된 프로그램은 노동자들이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었다. 이때 산업선교가 교류하고 협력한 노동조합이 바로 한국노총이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계열, 이하 영산)는 평신도 산업선교 교육에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주제로 한 강의를 확대하여 배치했고, 한국노총과 협조하며 노동운동 지도자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인천기독교산업선교회(감리교 계열, 이하 인천산선) 역시 노동 문제 세미나를 개최하여 노동조합 운영과 단체협약 체결에 관한 교육을 진행했다. 나아가 인천산선이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남재민 신부와 연합하여 소그룹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였다. 정부도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했기 때문에 산업선교는 기업체나 중앙·지역의 노동부처와도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산업선교의 노력은 현장 노동자들의 문제를 의뢰받아 이를 해결하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졌다. 영산의 실무자들은 각각 몇 개의 공장을 담당하여 주 1회씩 그룹활동을 지도했는데, 그러면서 편직(스웨터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문제를 의뢰받게 되었다. 영산은 1970년 12월 6일 편직업계를 위한 노사문제 세미나를 개최했다. 곧이어 한국노총 전국섬유노동조합 서울의류지부가 결성되었고, 한영섬유, 다옥편물, 월성섬유, 양양상사, 마산방직 등 구로동 편직공장에 5개 분회가 세워졌다.
 

4) 1970년대, 노동 정책이 변화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경제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급격한 중화학공업화를 시도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정권의 노동 통제 방식도 변화하게 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조합의 활동은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대외적으로는 노사 문제에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며, 한국노총의 상층부를 매수하여 노동을 통제하고자 했다. 1970년대가 되자 박정희 정권은 노동조합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억제하고, 노사갈등을 직접 중재하고자 했다. 때로는 행정적, 법적 수단을 자의적으로 활용하고, 때로는 초법적 조치를 통해 노사관계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1970년 발효된 「외국인 투자업체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은 외국자본의 진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외자기업에서 노조 결성에서부터 쟁의에 이르는 권리를 모두 부정했다. 1971년 12월 17일 국가비상사태선포 이후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12월 27일). 이 법의 제9조 1항은 “비상사태하에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여야 하며, 그 조정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하여 모든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실질적으로 부인했다. 명목상으로 노동조합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한한 것이었다. (동시에 박정희 정권에게 국가보위의 주적은 ‘노동조합 활동’임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이를 반영하여 1973년에는 노동법을 재개정했다. ‘3자 개입 금지’를 통해 산별노조를 형해화했고, 노사협의회를 강화하면서 노동조합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특히 노동자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제한된 상황에서 노사협의회는 노동자의 일방적인 양보를 끌어내는 제도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핵심 대기업과 분규가 잦은 기업에는 노사감독관을 파견하여 문제를 무마하려 했다. 
제도적으로 노동조합의 기능이 약화하자 한국노총은 더욱 더 공세적으로 정권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자, 한국노총은 ‘구국 통일을 위한 영단’이라며 유신을 지지했다. 1974년 긴급조치가 발표되었을 때에도 앞장서서 박정희 정권을 찬양했다.
 

2. 1970년 전반, 민주노조를 만들다


한국노총과 도시산업선교회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사무실을 함께 쓸 정도로 긴밀했던 영등포산업선교회와 한국노총(섬유노조 서울지부)의 관계가 틀어질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김진수 사건이다. 김진수는 영산을 통해 교육받은 노동자였다. 앞서 언급한 편직업계 세미나를 통해 김진수가 일하던 한영섬유에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회사는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었다. 1971년 3월 사측은 깡패를 동원하여 김진수를 폭행했고, 김진수는 드라이버로 머리를 공격받아 병원에 실려 갔다. 김진수가 사망했을 때, 한영섬유 노동자들은 회사의 책임을 물었다.
섬유노조와 한국노총은 한영섬유 노동자들을 배신했다. 이들은 김진수의 죽음이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했다. 한영섬유도 입을 맞추어 김진수의 죽음에 사측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합원들이 농성을 할 때에도 한국노총과 섬유노조는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투쟁 과정에서 산업선교는 한국노총 상급노조가 어용화되었음을 처철하게 깨달았다. 영산은 어용노조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김진수 사건은 이후 진행될 민주노조운동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 동일방직 노조 민주화 투쟁


산업선교가 처음부터 여성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산업선교 회원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산업선교의 주요 프로그램인 노사문제나 조합원 훈련에서는 늘 제외되어 있었다. 인천산선은 1960년대 중반부터 조화순 목사를 중심으로 요리, 꽂꽂이, 뜨개질 등의 여성 소그룹 취미활동을 운영했지만, “가엾은 여공”을 돌보는 수준에 머물렀다. 
1971년 5월 어느 날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산선에서 산업선교회원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여성노동자 이영숙이 “동일방직에서는 남녀를 구별하여 임금인상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조승혁은 (화를 내도록 유도하면서) “여성조합원이 4분의 3이나 되면서 왜 노조지부장과 집행부를 장악하지 못했나? 억울하면 여성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노동조합을 장악하라”고 답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울면서 “왜 목사가 우리에게 욕지거리냐. 두고 보라. 우리가 단결해서 노동조합 장악하겠다”고 했다.
당시 동일방직 노동조합 전체 1,383명의 조합원 중 1,214명이 여성이었지만 10%에 불과한 남성노동자들이 노조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회사의 지원하에 선출된 남성 지부장들은 회사에 포섭되어 노동조합으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었다. 이영숙의 질문을 계기로 인천산선은 처음으로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71년 한 해 동안 165명이 소그룹 15개를 조직했다. 소그룹 활동과 교육프로그램은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노동자들은 의식화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노력 끝에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 주길자가 선출됐다. 
사측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길자가 지부장으로 당선되었을 때, 관리자 한 사람이 말했다. “저 기집애들, 1년도 못해서 손들고 나올 거다.” 이전에 노동조합을 관리했던 남성노동자들은 어용이지만, 노동조합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회의를 진행하는 방법은 좀 더 알고 있었나보다.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운영하게 된 여성노동자들은 회의 진행 방법을 배우고 연습하기도 했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쉽지는 않았다. 주길자가 긴장한 상태로 마이크를 잡고서 사회를 보는데, 동의다, 개회다, 재개회다 하면서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이 쏟아졌다. 극도로 긴장해있던 주길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세 번째 여성 지부장 이총각은 주길자가 겁이 많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당일 사회는 총무였던 이영숙이 봤다.
민주노조는 임금인상이나 노조에서 진행하는 행사 등 다양한 정보를 조합원들에게 충실하게 알렸다.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또 당선된 지부장은 23개 부서의 노동 현장을 돌아다니며 조합원들의 얼굴을 익히고 조합원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려 했다. 그럴 때마다 조합원들은 “지부장님 온다! 지부장님 온다!” 하면서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당시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지부장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아주 큰 격려가 되었다. 
관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남성노동자들도 주길자를 중심으로 한 여성노동자들이 얼마 못가서 고꾸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첫 여성 집행부는 조합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쳤다. 또 그 다음에도 이영숙 지부장을 중심으로 한 여성 집행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2) 원풍모방(구 한국모방) 노조 민주화 투쟁


여성노동자에 대한 초기의 무관심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등포는 경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남성노동자보다 여성노동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대부분의 공장에서 여성노동자가 70~80%였다. 산업선교회원도 여성들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여성실무자를 중심으로 뜨개질, 요리강습, 완구 만들기 등의 취미활동을 하는 데 머물러 있었다. 한국모방 여성노동자들도 1970년 6월부터 샛별, 소띠, 빅토리 등의 소그룹을 시작했고 소그룹은 1년 만에 20여 개로 확대했지만, 사정은 비슷했다.
동일방직과 마찬가지로 한국모방에도 이미 노동조합이 있었다. 최초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은 1963년 9월 28일이었다. 세 번째 시도 만에 힘겹게 만든 노동조합이었지만, 지도부는 사측의 회유에 넘어갔다. 조합비는 간부들의 야유회비 등으로 지출되었고, 1972년에는 섬유노조 본조에 내는 의무금을 장기체납하여 징계를 받기도 했다.
한국모방 여성노동자들의 의식화 교육은 퇴직금 돌려받기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1972년 4월 한국모방을 퇴사한 여성노동자들이 회사 측이 퇴직금과 예수금(은행 대신 회사에 저축해둔 돈)을 주지 않는다며 산업선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영산은 JOC와 함께 퇴직금을 돌려받기 위한 운동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의식화를 위한 소그룹 활동이 시도되었다. (한국모방 노동조합은 유니온샵이었다. 유니온샵은 “단체협약에 조합가입 대상으로 되어있는 직급의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자는 노동조합 가입의사가 있는 사람을 채용하고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시는 채용 할 수 없고 조합가입 대상자가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시는 해고한다”고 규정해 노동조합 조합 가입을 강제한다.)
노동조합을 민주화하려는 흐름이 눈에 보이자, 사측은 지부장 후보인 지동진을 불러 협박하고 퇴사를 강요했다. 노동조합 지도부의 교체를 막기 위해 대의원대회는 계속해서 연기됐고, 회사는 지동진을 전출시키려고 했다. 전출 명령에 맞서 한국모방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을 결행했다. 지도부가 어용이었기에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추진된 파업이었다. 국가보위법이 발동되어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이 금지되어 있던 1972년 8월 9일의 일이었다. 결국 회사는 전출 명령을 철회했고, 대의원대회 개최를 약속했다. 
한국모방 조합원들은 소그룹을 통해 다져온 조직력을 바탕으로 총 대의원 42명 중 여성 대의원 29명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제 대의원들이 지부장을 선출하는 일만 남았다. 사측의 회유와 협박을 피하기 위해 여성대의원들은 대의원대회 날까지 합숙하며 집단적으로 행동했다. 이들은 투표하는 방법까지 치밀하게 훈련을 받아,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는 지동진을 지부장으로 선출해냈다. 어용노조를 축출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킨 것이다.
1973년 한국모방은 부도 위기에 처했다. 수출액은 1970년 이후 매년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방만한 기업운영으로 일반관리비가 매년 증가하여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장 방용운은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부도 위기가 되자 경영진들은 출근을 하지 않았고 채권자들은 회사의 물건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노동조합만이 회사를 지키며 ‘한국모방주식회사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이사진으로부터 회사의 경영권을 위임받아 일시적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망할 것 같은 회사가 그럭저럭 운영이 되자, 사장은 회사를 자기 소유로 유지하고 싶어 꼼수를 부린다. 이 과정에서 사측이 지부장 지동진을 폭행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이후에는 지부장 지동진을 전무로 파견하여 노사공동경영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노사공동경영체제 역시 위기를 온전하게 극복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노동조합의 요구에 따라 공매처분되었고, 원풍산업으로 인수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계속 고용, 미지불임금, 퇴직금 지불, 노동조합 인정 등을 얻어낸다. (비로소 노동조합의 명칭도 한국노총 섬유노조 원풍모방지부가 된다.)
 

3) 『어느 돌멩이의 외침』: 부평수출공단에서의 노동조합 조직화 


인천기독교산업선교회는 노조설립이 제한된 부평의 수출공단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당시 부평수출공단은 외국투자를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972년 말부터 유흥식, 황영환 등은 부평수출공단의 근로기준법 위반사항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는 노동자들의 청원이 있을 때마다 노사문제에 개입했다면, 이제는 도움이 필요한 노동자들을 직접 찾아나선 것이다. 유흥식과 황영환은 몇몇 공장의 청년 12명을 만나 비밀리에 교육하고 훈련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삼원섬유주식회사의 유동우(본명 유해우)였다. 
삼원섬유에서의 유동우의 활동은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977년 1월~3월 월간 《대화》에 연재되었던 수기를 단행본으로 묶어 발간한 것으로 인간으로서 유동우의 성장과정, 또 유동우 주변의 여성노동자들의 성장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가난한 농민의 자식 유동우는 신학교에 등록할 돈을 모으기 위해 삼원섬유에 입사하게 된다. 삼원섬유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의류 제조업체로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각종 불법행위가 횡행한 회사였다. 처음 유동우는 ‘동거’라는 ‘막다른 골목’에 빠져들게 된 노동자들의 신세를 안타까이 여기며, 노동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들을 전도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는 “주말에 특근 안하고 교회 갈 수 있냐”(먹고 사는 것보다 신앙이 중요하냐)는 어느 여성노동자의 물음과 산업선교 실무자 ‘황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 그는 삼원섬유 노동자들과 소그룹 활동을 시작한다.
1973년 11월 중순, 그렇게 조직된 소그룹 동력회와 폭포회가 중심이 되어 <시간 지키기 운동>을 시작한다. 도급제로 운영되던 회사는 편직공들이 경쟁적으로 일찍 출근해 일을 시작하고, 밤 늦게까지 일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생산실적이 좋은 세 사람에게는 상품을 주고, 실적이 나쁜 5명은 해고하는 방식이었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편직공들은 8시 30분 정시에 출근하여 일을 시작하고 점심시간에는 일제히 휴식을 취했다.
생산량이 급격하게 하락하자 회사는 납품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의 주모자를 찾을 수 없었던 회사는 경제적인 방식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새로 따게 된 스웨터 제품의 공임(工賃)을 어이없을 정도로 낮게 책정한 것이었다. 편직공들은 공임을 재조정해달라고 이야기했지만, 회사는 이 요구를 완전히 무시했다. 드디어 12월 1일 아침, 40여 명의 편직공들은 작업거부를 시작했다. 회사는 “공임이 싸면 일찍 나와 일하면 될 것이 아니냐”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편직공들은 더 이상 예전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오후가 되자 편직공 전체 130여 명이 대규모 농성에 들어가 파업을 시작한 것이다. 다음 날도 파업이 이어지자, 회사는 부평경찰서를 끌어들였다. 경찰은 국가보위법을 들먹이며 노동자들을 위협했지만, 노동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편직공임 인상, 횡포가 심한 편직계장과 기사 신현준 교체 등 노동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3일, 회사는 다시 한번 수를 썼다. 서약서에 서약하지 않는다면 현장에 들여보내주지 않겠다고 노동자들을 협박한 것이었다. 서약서의 내용은 1~2일간의 농성의 책임은 편직공들에게 있으며, 앞으로 명령에 불복할 때에는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노동자들은 떼지어 현장으로 밀고들어가 다시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이 다시 출동했고, 근로감독관도 찾아왔다. 회사는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지속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1973년 12월 12일 섬유노조 경기지부 삼원섬유분회를 결성되었다.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 특례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결성된 최초의 외국인 투자기업 노조, 최초의 수출공업단지 내 노조였다. 삼원섬유에서의 노동조합 결성은 삼송물산, 태양공업주식회사, 신한일전기주식회사, 삼연섬유, 세정실업, 세정공업, 평화교역 등 공단 내 19개 노조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 사업장의 민주노조 결성은 부평공단 전체를 변화시켰다. 부평공단의 다른 회사들은 민주노조를 두려워하여 사전에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3. 1970년대 후반 민주노조 운동의 전성기, 그리고 쇠퇴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는 만큼 노동쟁의가 증가하고, 산업이 발전하는 만큼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박정희 정권이 아무리 억압하려 해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동일방직과 원풍모방에서의 노조 민주화 투쟁은 모두 국가보위법이 적용되던 1972년에 이루어졌고, 외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동권을 제한하고 있던 수출산업단지에서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 후반이되자 노동조합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도 강화됐다. 1970년대가 되면 이미 도시산업선교회에는 종교인이 아니어도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 대학졸업생들이 실무자로서 참여하고 있었다. 정권과 국가기관은 이들을 빌미로 삼아 도시산업선교회를 용공단체이자 국제공산당과 관계가 있는 조직으로 몰아갔다. 인천과 영등포의 도시산업선교회에 경찰, 형사, 중앙정보부 직원이 상주하고 있었고, 주요 인물에게는 담당형사를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1978~1979년 무렵에는 민주노조의 주요 간부뿐만 아니라 산업선교회의 실무자들을 잡아가 고문하는 데까지 이른다.
 

1) 반도상사 투쟁과 강화되는 통제


삼원섬유에 이어 부평수출공단에서는 1973년 말부터 반도상사 노동조합 조직화가 시도되고 있었다. 반도상사는 락희그룹(현 LG그룹, 당시에도 락희화학과 호남정유, 금성사를 소유한 한국 유수의 재벌이었다)의 계열사로 1970년대에는 부산동래공장, 부평공장, 춘천공장이 있었다. 부평공장은 국가주도의 수출정책 추진에 따라 준공된 부평공단 안에 설립되었는데 1969년 설립 당시에는 미국 및 일본 수출용 가발 및 청바지 생산이 핵심이었고, 1973년 전후로 가발 수출이 저조해지면서 의류봉제 업종으로 전환했다.
반도상사는 당시 부평공단 내 최대의 기업으로, 임금 수준이나 복지제도가 다른 기업에 비해 미미하게나마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법정 퇴직금을 지키지 않았고, 1973년부터는 노동 강도가 강해지고 상여금이 철회되었다. 특히 노동자들을 잠재적인 도둑으로 보는 ‘검신’(몸을 검사하는 일)에 대한 불만이 컸다. 동일방직에서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반도상사에서는 처음부터 여성노동자를 조직의 리더로 세워 노동조합 조직화를 시도했다. 노동자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빠르게 의식화된 노동자가 바로 한순임이었다. 조리 있게 말도 잘 하고, 이해력도 뛰어났던 그녀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주변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회사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한순임을 중심으로 한 반도상사 노동자들은 1974년 2월 26일, 기습적인 농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한순임은 호소문을 써서 폭행 사원 처벌,  중식 차별 문제 해결, 기숙사 시설 개선, 강제 잔업 철폐, 취업규칙 안내, 임금인상 60%를 요구했다. 영하 15도의 혹한에서 아침 8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지속된 농성으로 반도상사 노동자들은 사측의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조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냉혹한 현실에 맞닥뜨려야 했다. 노조결성을 방해하는 회사의 공작으로, 한순임을 비롯한 노동조합 간부들은 경찰에 연행되고 정보부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치안국에 끌려가 며칠씩 협박을 받기도 했다. 경찰은 산업선교 실무자 최영희의 몽타주를 그려, 최영희는 간첩이고 산업선교회는 공산당 기관이라는 허위선전을 했다. 결국 한순임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산업선교를 용공으로 모는 논리에 설득당하고 만다. 이후 그녀는 여러 회사에서 민주노조를 탄압하기 위한 반공교육 강사로 활용되었다.
한편 삼원섬유 노조의 활동이 부평수출공단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자, 정권은 인천산선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유동우가 대표적 사례다. 공단본부, 경찰서, 노동부, 보안사, 안기부에서 찾아와 유동우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국노총 간부들의 중상모략으로 유동우는 노동조합에서 제명당했고, 유니온샵 제도에 의해 회사에서도 해고당했다. 다른 노동조합의 활동가들도 비슷한 방해 공작과 탄압을 당했고, 인천산선의 조화순이 구속되고 최영희는 구속을 피해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2)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복직투쟁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면서, 이미 만들어진 민주노조에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동일방직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석정남은 동일방직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을 『공장의 불빛』으로 모아 냈다.
 석정남은 1975년 스무 살의 나이로 동일방직 인천공장에 입사했다. 하루빨리 양성공(기술을 익히는 사람)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식시간에 틈틈이 1분에 140보 뛰기, 1분에 15개 실 연결하기를 연습했다. 이 시기 동일방직은 이미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소그룹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석정남은 고향 친구의 권유로 신자도 아니었지만 소그룹 활동을 시작한다. 석정남의 활동은 금새 회사에 알려졌고, 회유와 협박으로 소그룹과 노조 활동에 거리를 두게 된다. 
친하던 소그룹 친구들과 거리가 소원해진지 벌써 1년째. “23일 대회 무효화하라”, “지부장, 총무 석방하라”, “회사는 노조에 개입하지 말라”. 석정남은 퇴근길에 단식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마주하게 된다. 여성노동자들이 남성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 석정남은 다시 그들의 곁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친한 친구였던 순애에게 들은 투쟁의 내막은 이러했다. 
이영숙이 두 번째 여자 지부장으로 당선되자(임기 3년) 회사는 대의원이라도 매수하기 위해 대의원 선거에 개입한다. 선거분위기를 위협적으로 만들어 입후보를 방해하고, 입후보한 여자 대의원의 집에 찾아가 돈을 주면서 매수하려 하기도 했다. 강성례, 김윤자 등 여성 대의원들이 이런 사실을 폭로하며 협조하지 않자, 고두영을 필두로 한 어용 대의원 24명은 대의원대회를 거부하고 야유회를 가버렸다. 동일방직 노조는 섬유노조 본조에 건의하여 회사 측에 야합하여 노조활동을 방해하는 고두영 일파를 징계했다. 고두영 일파는 더 세게 나왔다. 서울지법 인천지원에 징계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오히려 대의원대회 소집권자로 지명되었다. 노조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고두영 일파의 주도하에 1976년 7월 23일 대의원대회가 개최됐다. 지부장과 총무는 사실을 알리는 호소문을 배포했다고 동부경찰서로 연행된 상황이었다. 부당한 대의원대회에 계속 참여할 수 없었던 여성노동자들이 결국 대회장에서 뛰쳐나와 농성을 벌였다.
다음 날 농성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그 유명한 동일방직 ‘알몸 시위’는 72명의 연행으로 끝이 났다. 동일방직은 사고지부가 되어 섬유노조 본조에서 수습위원이 내려왔다. 수습위원에 의해 처리된 (비공개) 단체협약 결과는 참담했다. 회사 간부사원를 조합원으로 포함시킨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다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이총각 등을 중심으로 1977년 2월 5일 명동성당 문화회관에서 동일방직 사건의 내막을 폭로하는 ‘사건 해부식’을 기획했다. 아쉽게도 이 사건 해부식이 진행되지는 않았는데, 대규모 집회를 우려한 노동청의 중재로 노동조합의 자율적 운영을 핵심으로 하는 타협안이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타협안에 따라 구성된 이총각 집행부 1978년 2월 21일 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사측 노동자들은 대의원대회를 3일 앞두고부터 이상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들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이총각 집행부를 용공세력으로 몰아부쳤다. 내친김에 사측은 노동조합 주요 실무자를 쏙 빼놓고 새마을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이 새마을교육의 강사는 반도상사 지부장이었다가 어용화된 한순임이었다.) 노동조합은 소그룹 활동을 통해 조합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사측과 반대편 노동자들의 태도가 괘씸했으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대의원대회 당일, 석정남은 새벽반 근무를 하고 있었다. 사측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석정남은 대의원대회에서의 승리를 확신했다. 한창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려니 순이 언니가 다급히 달려왔다. “똥…… 똥, 밖에 똥…….” 순이 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달려가보니 현장은 난장판이었다. 박성기 등 사측에 매수된 남성노동자들이 투표장을 기습하고, 여성노동자들에게 닥치는 대로 똥물을 퍼부은 것이었다. 곧이어 이들은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고 조합원들을 집단폭행하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는 경찰과 한국노총 본조가 보낸 행동대원도 있었지만 그저 방관하고 있었다.
나아가 전국섬유노조는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하고, 이총각 지부장 및 부지부장 2명, 총무부장 등 4명을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행위자’라는 이유로 제명했다. 앞서 삼원섬유 유동우의 사례에서처럼, 유니온샵 제도에 의해 이총각 등 4명은 회사에서도 해고된 셈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4명의 조합원은 명동성당과 인천기독교산업선교회 등으로 흩어져 집단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무더기로 해고된다. 
해고자들은 이후에도 복직을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지만, 동일방직 민주노조의 역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동일방직의 민주노조를 무력화하는 과정에는 사측 뿐만 아니라 한국노총, 정부기관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해고 직후 해고자 124명 전원은 정권의 요주의 대상이 됐고, 담당 형사가 한 명씩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동부 경찰서는 해고 직후 산업선교회 앞에 임시 파출소를 설치하고 담당 형사를 상주하게 했다. 
한편 이 시기를 정점으로 인천산선과 민주노조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1974년 부평공단에서 19개 민주노조를 만든 이후, 인천기독교산업선교회는 감시와 탄압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76년 즈음부터 시작한 주안공업단지에서의 활동은 성과가 좋지 않았다. 주안공단의 세일산업주식회사, 부평공단의 서광산업주식회사, 동흥물산에서 모두 18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선교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강제사표를 쓰고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런 사건이 반복되자 노동조합 조직화는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3) 방림방적 체불노임 요구 투쟁과 해태제과 8시간 노동 투쟁


1970년대 후반 영산은 남영나이론 임금인상요구 파업, 인선사 노조투쟁, 방림방적 체불노임받기 투쟁, 대일화학 노조 정상화투쟁, 진로주조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 대동전자 노동조건 개선투쟁, 대한방직 연장근로수당 받기 투쟁을 주도했다. 그러나 회사, 경찰, 노동청, 한국노총의 방해로 이 모든 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방림방적은 노동자가 6천 명에 달하는 영등포 최대의 회사였다. 그러나 노동조건은 최악이었다. 회사는 새마을운동을 명분으로 하루 1~2시간씩 무급노동을 시켰고, 폭행과 비인간적인 모욕은 일상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일요일도 없이 작업을 했고, 밤샘노동으로 ‘타이밍’(각성제)을 과다복용하여 중독증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방림방적에는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어용이었다. 영산은 1975년부터 방림방적에서 소그룹을 조직하여 1년만에 소그룹을 40~50개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1977년 드디어 방림방적 노동자들은 250여 명의 연서명을 모아 노동청장과 방림방적 사장에게 요구조건을 담은 진정서를 보냈다. 회사는 서명한 250명을 찾아 탄압하고 처벌했다. 산업선교회는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기 위해 세 차례 공개적인 기도회를 열었다. 방림방적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자, 회사는 노동자들을 더욱 더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산업선교 회원들을 힘든 자리로 부서이동시키거나, 가정에 찾아가 협박을 하기도 하고 해고하기도 하면서 온갖 방법을 통원했다. 노동자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지부진해졌지만, 오히려 지원세력의 활동은 더욱 강력했다. 결국 산업선교회가 미지불된 잔업수당을 받아내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고, 나머지는 보너스 형태로 노동자들에게 지급했다.
1979년의 해태제과 투쟁도 비슷했다. 영산은 6년 동안의 준비 끝에 해태제과에서 ‘8시간 노동’ 요구 투쟁을 만들어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노동자들은 투쟁과정에서 지쳐 나가떨어졌다. 반대로 산업선교회의 활동은 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이 투쟁은 모든 식품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법제화하는데 성공했지만 마지막에 남은 노동자는 15명에 불과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가 노동문제를 이슈화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자, 박정희 정권은 이들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1972년 유신선포 이후부터 영산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1974년에는 실무자 인명진과 김경락을 구속하기도 했지만, 70년대 후반에 들어 산업선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4) YH무역 노동조합의 투쟁


박정희 정권이 두려워했던 민주노조 운동은 결국 박정희 정권을 쓰러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YH무역 사건은 유신체제 해체의 시발점이 되었다.
YH무역은 1966년 장용호와 그의 동서인 진동희가 세운 가발공장으로, YH라는 이름은 용호(Yong Ho)에서 딴 것이었다. YH무역은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에 힘입어 급격하게 성장했다. 1970년에는 수출실적 100만 불, 종업권 4,000명으로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가 되었고 당시 수출 순위 15위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해 장용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YH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용 인터내셔날 상사를 세웠다. YH무역은 동서 진동희가 물려받았다.
이후 진동희 사장은 1973년 대보해운을 설립하고 나아가 문어발 식으로 기업을 확장해나갔다. 미국에서 용 인터내셔날을 세운 장용호는 YH무역이 만든 제품을 수입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대금 결재를 하지 않았다. 이들의 무리하고 방만한 경영은 YH무역 부도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YH무역 노동조합은 1975년 5월 24일에 결성됐다. YH무역 노동조합 간부들은 근로기준법을 잘 몰라 최저기준 이하의 단체협약을 체결하기도 하고, 단체교섭 전에 조합원들의 지지를 모으는 과정을 생략하기도 하는 등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점진적으로 민주노조를 운영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1977년부터 YH무역의 위기는 점점 더 뚜렷해진다. 회사는 6월부터 반복적으로 휴업을 실시하고 인원을 감축했다. 가발 산업이 사양화 되고 있기도 했지만, 노동조합 탄압의 방법으로서 회사가 휴업을 악용한 것이기도 했다. 사측은 임금, 연장수당, 각종 복지비용과 부대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작업을 하청기업으로 빼돌렸다. 노동조합이 이를 지적하자, 회사는 가발을 만들던 노동자들에게 봉제작업을 시키면서 불안정한 작업분위기를 조성하여 노동자들의 퇴사를 종용했다. 나중에는 가발과를 허허벌판인 청산공장으로 이전시켜 결국 노동자들이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다.
본격적인 위기는 1979년에 찾아왔다. 3월 30일 회사는 폐업을 통보해왔다. 노동조합은 YH무역이 특혜금융으로 돈을 융자받은 데다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으면서, 회사를 폐업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4월 13일부터 노동자들은 농성에 돌입했다. 행정관청이 보기에도 ‘선진국 대열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폐업’이란 인정할 수 없었기에 문제는 잠시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회사 정상화 방안이 마련되지는 않았다. YH무역 노동조합과 회사의 협상은 원활하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다시 한 번 폐업을 통보했다. 노동조합은 무기한 농성을 결의하고 8월 9일부터 야당인 신민당 당사로 들어갔다. 경찰이 이 농성을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김경숙) 1명이 추락사했다. YH무역 사건으로 알려진 이 일은 김영삼 의원 제명, 부마민중항쟁, 10·26 사태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종말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하지만 곧 신군부가 들어섰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끝은 원풍모방 노동조합이었다. 원풍모방 노동조합에게 1980년대는 엄청난 시련의 시대였다. 어느 노동조합보다 튼튼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던 원풍모방은 80년대 초반, 정권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탄압을 받았다. 외부 상황이 어려워지자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마침내 1982년, 9.27 사태로 원풍모방 민주노조는 실질적으로 파괴되었다. 원풍모방 노동조합 파괴와 함께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도 막을 내렸다.
 

4.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남긴 것


1978년, 복직투쟁을 하던 중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투쟁을 평가하는 자리를 만든다.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은 그 토론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선자: 우리가 그때 그때 느끼면서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넘어갔던 문제들이 오늘의 토론에서 잘 정리되어지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저들이 말하는 외부세력에 관해서 얘기해 보자. 설사 외부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다 하더라도 결국 실천하고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 결정하고 행해 왔었잖아. 그것을 나는 결코 외부세력의 개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 역시도 JOC에 나가면서 교육도 받았지만 말이야. 
순애: 바로 그거야. 우리들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부세력이란 바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게야. 그 분들도 사실은 우리에게 노동자의 주체적인 힘, 주체적인 판단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글쎄 지금 상태에서 우리가 완전히 주체적인 힘으로 자립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 물론 그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명령을 한다거나 지시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너무 안타까운 거야. 지금까지 어디 좀 모이자 해서 가보면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으례 그런 사람들이 함께 해야만 되는 것 같은 지금까지의 모임 방법, 난 정말 싫어. 그 사람들에게 압도당하고 마는 것 같았어. 
정남: 정말 그래. 우리는 정말이지, 이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이 없다고 수차례에 걸쳐 몇 시간씩 머리를 맞대고 짜내어 토론하고 검토한 결과 이렇게 하자고 굳게 정했다가도 그들의 말 한마디에 그냥 맥없이 계획이 변경되는 거야. 그들이 그 방법은 좋지 않다.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러지는 않지만, 그들의 이론 앞에서 우리가 짜낸 그 방법은 그렇게 어리석고 우습게 보여질 수가 없는 거야. 왜 그렇겠어. 이유는 우리의 의식 수준이 이렇게 싸움에 직접 뛰어들 수 있을 만큼 자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야. 필요악은 아닌 것 같고 필요선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우리가 빨리 더 성장해서 그것까지도 극복해 나가야 되겠지. 
순애: 저들이 외부 세력 운운하는 데는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아. 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야. 남의 이론을 나의 이론으로 받아들인 적도 없었고 남의 이론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거기에 그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아. 나의 피부로 느끼고 가슴으로 느낀 그것만을 내 이론으로 내세우는데 어려서부터 대의원 활동을 해왔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노동조합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반문하게 돼. 더더구나 우리같이 스물 두엇 먹은 여성근로자의 머리로써 말이야. 당장 노사협의를 하려면 회사 간부와 마주 앉아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입장인데, 상대는 적어도 일류대학 출신에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그야말로 엄청난 상대란 말이야. 어릴 때부터 가난한 환경에 찌들고 또한 무식한 우리들이 감히 말 한마디나 무엇을 제대로 요구할 수 있겠어. 그들은 기업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무척 많은 것을 잔뜩 알고 있을텐데 말이야. 그런 그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도 우리의 입장을 주장할 뭔가를 알아야 될 것 아니야.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이 우리보다 유식한 사람들의 도움은 필연적인 것이지. 이러한 문제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나 노동운동적인 측면에서 보나 언젠가는 분명히 극복되어야 해. 난 전부터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결혼을 해서까지도 꼭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송자처럼 난 결혼 안 하겠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우리의 검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때까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참여한다면 그때야말로 완전히 자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웃음) 그때는 우리의 지도자를 우리가 길러내고 우리가 기른 지도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교육도 시키는 거야. 조합비 걷어서 뭐해? 교육시키고 공부시켜서 투자한 만큼 본전 빼는 거지 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쉽게 쓰러지고 고통당하는 것도 선배들의 밑거름이 없었기 때문이야.
글 속에서 ‘외부세력’은 도시산업선교회를 의미한다. 박정희 정권은 도시산업선교회를 용공단체 때로는 국제공산당 하부조직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도움을 받은 여성노동자들을 비주체적인 존재로 간주했다. 석정남 등이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하라>라는 연극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되어 갔을 때에도, 이들은 “누가 시나리오를 써 주었냐”, “그 연극을 기획하는 모임에 조 목사가 있었냐”를 질문 받는다.
1970년대 말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대화는 노동자운동의 주체성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들에게 노동자운동의 주체성이란 단순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체성이란 정세에 대한 객관적 인식,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역량,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단결력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1)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의의와 한계

노동자운동의 발전은 엄혹한 시기 속에서 민주노조를 만들어간 노동자들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 1970년대의 민주적 노동자들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과감히 발을 내딛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민주노조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힘썼다. 
그렇지만 노동자운동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기 운동의 강점과 성과뿐만 아니라 약점과 한계도 반드시 짚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운동은 1970년대 운동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1980대 제시된 평가를 한 번 살펴보자. 아마도 이러한 평가는 1980년대 활동가라면 대체로 공감했을 것 같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합법적 노동조합을 통해 어용노조 상층부와 독립적으로 발전시킨 지속적, 조직적 운동이었고,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대중성과 초보적 계급성을 획득한 유일한 운동이었다. 
민주노조 투쟁은 개별 노동조합 단위의 투쟁으로 조합원의 노동조건 개선과 노조조직 수호를 위한 경제투쟁 차원이었으나 제도개선, 정치투쟁 및 초보적이나 연대투쟁의 단초도 나타났다. 민주노조 조직력의 측면에서는 현장 중심 소모임 활동의 결과로 사업장에 뿌리박은 강한 조직(대중역량)을 구축하였지만 집행부에 대한 조합원의 의존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민주노조의 교육활동은 자체적 일반조합원 교육, 종교 및 노동자교육기관의 지원을 받는 간부 교육, 야학 등으로 이뤄졌다. 교육은 기본적 권리의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구조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민주노조운동은 지식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민주노조의 핵심 간부들이 종교단체 지도와 지원을 받으면서 종교적 세계관이 가지는 한계가 동일하게 드러났다. 
노동자의 권익 개선을 위해서는 합법적 민주노조 건설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했고, 투쟁 역시도 노동조건 개선 목표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경제투쟁을 전개를 통해 정치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합법적 노동조합을 유일한 조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조직보존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현재 시점에 되돌아보면 이런 평가가 너무 ‘박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조직보존주의’라는 평가를 생각해보면, 그 당시 척박한 조건에서 상급단체나 사회단체가 조직, 지원하는 파업기금이든, 해고자기금이든 어떤 제도적 뒷받침도 존재하지 않았다. 1970년대 말 ‘블랙리스트’까지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해고가 되거나 조직이 파괴되면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생업까지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노동조합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전부’였던 셈이다. 
분명히 민주노조운동은 개별 기업단위로 존재했다. 하지만 민주노조는 다른 민주노조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개별 노조의 투쟁에 자발적으로 연대했다. 또 민주노조들은 상급노조인 한국노총과 산별노조에 대한 불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론 흩어져있던 민주노조들은 한국노총을 대체할 민주노조의 중심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10·26 이후 1980년 ‘서울의 봄’에 한국노총 민주화를 목표로 한국노총 대회장을 장악하고 농성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런 흐름은 5월 17일 계엄 확대로 중단되고 말았다.
나아가 당시 노동자운동의 조건을 고려한다면,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사회구조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발전시키고, 노동조합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정치조직을 구상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민주노조운동은 지식인그룹과의 결합이 필요했다. 그러나 1970년대는 지식인그룹 역시 미성숙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식인그룹의 역할을 산업선교의 실무자들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는 1980년대 지식인운동, 특히 학생운동의 각성을 요청하는 셈이었다. 
한편 노동조합이 처한 객관적 사회경제적 조건도 점점 더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 말 경제상황의 악화는 유신통제가 강화되는 조건이 되었다. 경제위기는 사양산업이 되어가는 섬유업종에는 더욱더 치명적이었고, 외화벌이의 핵심이었던 수출경공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 민주노조는 정권의 폭압 속에서 해체되거나, 회사의 폐업과 함께 소멸되는 운명과 대결해야 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1980년대 운동이 몰랐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는 박정희 군부독재에 이어 전두환의 신군부독재가 이어지는 극도로 엄혹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지극히 험난한 상황을 뚫고 나가려면 1970년대 운동에 대해 박정하다 싶을 정도의 평가 속에서 강도 높은 운동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2)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어깨 위에


현장에서 감내해야 했던 부당한 처사와 임금삭감, 해고, 폭력, 공권력의 감시와 구속, 때로는 고문까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이후 세대를 위해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그 값비싼 수업료를 헛되이 날려버릴 수도 있었으나, 70년대를 장식했던 노동조합 실무자들은 그 교훈을 후세대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끈질긴 토론, 평가와 반성 끝에 그들의 활동은 『민주노조 10년: 원풍모방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YH노동조합사』 등의 기록으로 남았다.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의 머리말에서 전 지부장이었던 이총각은 이 책들을 펴낸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가졌던 슬기와 용기를 다하여 투쟁해왔다고 감히 말하겠읍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결과한 고독한 투쟁의 선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부족으로 투쟁의 고차원적 발전을 이룩하지 못할 수는 있었으되 결코 불성실하거나 용기를 잃지는 않았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투쟁의 성격규정에서, 투쟁의 방법론에서 오류가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인정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그 험난한 투쟁을 통하여 한 단계 발전된 투쟁형태의 기초를 이룩함에도 만족스럽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지난 투쟁기록이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애쓰는 노동자와 민중운동가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고 교훈이 되었으면 합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은 1980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광민사 대표 이태복, 서울대생 김철수, 도시산업선교회 간사였던 신철영, 서울청계피복노조의 양승조, YH노동조합의 박태연, 대구경북지역의 김병구, 유해용, 삼원섬유 유동우, 광주의 윤상원, 울산의 하동삼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전민노련은 기존 노조의 민주화투쟁, 미조직 노동자의 노조결성 운동을 바탕으로 산업별 조직체제를 세우고, 한국노총을 대체하는 노조운동의 전국적 센터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 학생운동 등 지식인 그룹과 노동운동의 연대활동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양자의 그룹을 새로운 조직체로 결합시키고자 했다. 전민노련은 노동자와 지식인의 비율을 6대 1로 제한하고, 지식인은 반드시 현장 노동을 하고 있는 자만이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단기적으로는 노동3권의 완전보장, 최저임금제 실시, 8시간 노동제 확보, 기존 노조의 민주화, 미조직 사업장의 조직화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1981년 핵심인물들이 정보기관에 검거되면서 전민노련의 구상은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70년대에 함께 민주노동운동을 했던 동일방직, 원풍모방, YH, 청계피복, 고려피혁, 반도상사, 서통, 콘트롤데이타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건설과 노동운동의 통일적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모였다.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창립된 것이다. 
이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어깨 위에서 80년대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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