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한국사회성격 논쟁(상)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
올해 2월 윤소영 선생의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가 발간되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출판된 4부작을 개정하고 합본하면서 여기에 종합토론과 후기를 추가한 것이다. 4부작의 구성은 『한국자본주의의 역사』(2015), 『한국의 불행』(2016), 『위기와 비판』(2017), 『재론 위기와 비판』(2018)으로 『세미나(Ⅰ)』로 합본해 발간되었다. 2018년 12월에 작성된 『종합토론』과 2020년 2월에 작성된 『후기』는 『세미나(Ⅱ)』로 분책해서 발간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책이라 할 수 있고 앞으론 『세미나』로 통칭한다.) 이는 지난 5년간의 연구작업을 총괄하는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작업을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사회성격 논쟁을 재론하며, 한국사의 ‘장기 20세기’를 개관한다.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2006; 개정판 2008)에서 다뤘던 한국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자기비판과 함께 그 결함을 보완한다. 또한 『봉건제론』(2013)에서 다뤘던 한국사회사 논쟁 또한 보충한다. 이런 주제가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대상에 대한 논의라면, 여기에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주체로서 지식인의 역사를 추가한다. 한국사회의 주체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화두가 바로 『한국의 불행』이다. ‘한국의 불행’이라는 표현은 엥겔스의 ‘독일의 불행’(부르주아혁명 실패, 산업혁명 실패)에 빗댄 알튀세르의 ‘프랑스의 불행’과 비슷한 의미로,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에 실패한 한국 지식인이 갖는 결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개항과 망국, 일제 식민지 자본주의, 해방정국부터 한국전쟁,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 북한 사회성격 비판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의 ‘장기 20세기’에 대해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작업의 두 번째 층위는 문재인 정부의 출현이라는 정세적 계기에 대한 개입이다. 『위기와 비판』(2017), 『재론 위기와 비판』(2018)에 이어 이번에 추가된 『세미나』의 2권인 『종합토론』과 『후기』까지 이어진다. 개헌논쟁에 대한 개입이 처음에 관심을 가진 문제였으나, 문재인 정부의 출현을 보면서 ‘역사에 대한 식견이 없는 자가 역사의 주체를 자임’하는 ‘사기극’에 ‘의분(義憤)’이 북받쳤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북한 비핵화 협상에 대해 비판하고, 386세대의 인민주의와 ‘조국사태’에 대해 비판한다. 현 정세에 대한 설명과 한국사의 ‘장기 20세기’에 대한 설명을 교차하면서 “1986-88년 이후의 [현재까지의] 상황이 마치 1945-53년의 해방정국을 슬로우 모션으로 반복하는 것 같다는 판단”에 이른다.
이러한 정세적 개입과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념의 부활을 모색하는 한국사회성격 논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토착화하지 못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경쟁하는 자유주의가 취약하기 때문이고, 그 결과 보수주의와 인민주의가 한국에서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복원 이전에 경제학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하에 ‘역사과학으로서 경제학 비판’의 필요조건으로서 ‘역사학으로서 경제학’을 좀 더 강조하겠다고 밝힌다.
『세미나』는 1994년부터 25년이 넘도록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과제를 수행해 온 과천연구실의 작업에 대한 이해 없이 읽기는 어렵다. 기존 윤소영 선생의 책을 거의 읽어보지 않은 독자라면 우선 『세미나』의 서론이자 결론의 성격을 가진 『종합토론』부터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세미나(Ⅰ)』에 포함된 4부작의 내용을 다시 8가지 주제로 재구성해서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세미나』의 내용을 이해해보고자 한다면 최소한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세미나』를 읽어보는 것이 좋다. 2014년에 발간된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세미나』는 과천연구실 20년의 작업에 대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재에도 유의미한 이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이 ‘안내서’를 가지고 과천연구실의 거대하면서도 일관적인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집단적 연구작업의 세계를 탐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에 대한 독해, 주요 논지를 정리하는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과천연구실의 마르크스주의 일반화라는 작업에 대해 논평이 만만한 작업은 아닐뿐더러, 그 시작은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은 현 정세에 매우 유의미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세미나』는 자본주의는가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는데도 대안 이념과 변혁 전망은 나타나지 않고 반세계화, 인민주의(포퓰리즘)가 득세하고 있는 현 정세의 역설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우선 “한국사회의 객관적 성격과 주체적 성격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기 전에 그 설명의 이론적 토대인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역사동역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역사동역학에 대한 과천연구실의 연구를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세미나』를 참고해 정리해본다. 그리고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의 주요 내용을 『종합토론』에서 제시된 8개 주제를 참고해서 요약한다. 8개의 주제는 ▲한국사회성격 논쟁,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문재인 정부, ▲북한사회주의의 타락, ▲한국의 현대지식인: 반공주의자, ▲한국의 현대지식인: 공산주의자, ▲중국과 일본의 현대지식인, ▲현대경세학으로서 경제학이다. 전반부 4개 주제가 한국사회의 객관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라면 후반부 4개 주제는 한국사회의 주체적 성격으로서 지식인에 대한 분석이다. 이번 여름호에는 일단 한국 자본주의 역사를 정리하고, 다음 가을호에서 한국 현대지식인의 역사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리하겠다.
1.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역사동역학
1994년 결성된 과천연구실은 마르크스주의 위기에 대한 돌파구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연구계획을 제시하고, 그것에 기초해 연구를 진행해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쇄신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을 작동시킴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의미다.
1)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란 무엇인가? 서구에서는 1970년대 말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폭발한다. 스탈린주의의 실패를 레닌주의를 통해 극복하려던 서구마르크스주의, 유로공산주의라는 신좌파의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스탈린주의나 레닌주의가 위기에 처한 원인은 마르크스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알튀세르는 위기를 부정하거나, 침묵하는 구좌파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위기를 인식하고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한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인식에 시차가 있었다. 1980년대에 노동자운동이 성장하고, 한국사회성격 논쟁이 전개되면서 노동자운동과 지식인운동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1987-88년 이후 한국사회성격 논쟁에서 주요 쟁점을 형성한 것은 피디(PD, 민중민주)와 엔엘(NL, 민족해방)의 논쟁이었다. 1988년 창간된 무크지 『현실과 과학』과 1990년 창립된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이하 서사연)를 통해 피디가 체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9-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레닌주의에 기초해 스탈린주의와 주체사상을 비판했던 피디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남한에서는 알튀세르가 지적한 구좌파적 태도인 부정과 침묵 뿐만 아니라 전향과 알리바이라는 특수한 양상이 나타났다. 인민노련(인천민주노동자연맹)의 공개적, 집단적 전향이 상징적이다. 전향은 주류화로 이어졌는데, 전노협을 해체하고 산별노조와 코퍼러티즘을 지향하는 민주노총을 건설한 것이 상징적이다. 엔엘과 피디의 다수가 주류화되면서, 주류화에 찬성하지 않는 상당수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트로츠키주의로 포섭된다. 소련의 붕괴는 스탈린주의의 위기일 뿐, 스탈린의 라이벌로서 박해를 받았던 트로츠키주의는 위기가 아니라는 ‘알리바이적’ 태도다. 이렇게 전향과 주류화, 알리바이라는 남한의 특수한 구좌파적 태도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나 자기비판의 필요성은 인식될 수 없었다. 과천연구실은 이러한 정세에서 알튀세를 계승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한 연구를 한다.
2)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을 작동시켜 일반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론을 일반화한다는 것은 동일한 대상을 새로운 이론적 형태로 분석한다는 의미다. 19세기 영국 경제를 대상으로 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을 20세기 미국 경제에 적용하는 과정에도 일반화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경제적 모순이라는 대상은 동일하지만, 그 대상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의 첫 번째 의미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으로서 경제학 비판의 ‘곤란’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면서 경제학 비판으로서 역사과학을 복권시키는 것이다.
루카치로 대표되는 서구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조류는 철학 비판에서 경제학 비판으로의 마르크스의 지적 전환을 상대화한다. 마르크스주의 문헌학으로 발전하는 인문학적 조류는 『자본』을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기보다는 혁명적 실천을 위한 인간학적·철학적 작품으로 간주한다. 만약 마르크스의 대상이 생산양식 일반이라면, 그 이론은 역사철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대상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역사과학으로 규정될 수 있다. 생산양식 일반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양식을 분석할 때 불가피하게 전제해야 하는 최소한의 보편성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과학이 경제학 비판이라는 형식을 띠는 이유는 고전파 경제학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제학 비판은 고전파 경제학의 결함을 해결한다는 의미다. 고전파 경제학을 완성한 리카도는 가치법칙을 등가교환의 미시법칙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이라는 난제 부딪혀 붕괴하고,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귀결된다. 마르크스는 상품과 화폐에 대한 분석, 가치형태라는 개념을 통해 가치법칙을 부등가교환의 거시법칙으로 설명한다. 전형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리카도의 이윤율 하락의 법칙도 결함이 있는데, 토지 생산성의 하락에서 그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농업이 아닌 산업, 토지생산성이 아닌 자본생산성의 하락을 통해 이윤율 하락의 법칙을 설명한다. 노동력에 대한 분석은 잉여가치의 생산방법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분석한다는 의미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은 역사과학으로서 경제학 비판의 이론적 계보를 설명한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으로서 경제학 비판을 복권시켰다. 브뤼노프는 마르크스의 고전파 경제학 비판을 현대경제학 비판으로 발전시켰다. 폴리는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이 뉴튼의 동역학에서 가속도법칙이라는 정의법칙과 같다는 사실에 최초로 주목한다. 이를 통해 뒤메닐과 함께 전형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한다. 뒤메닐은 이윤율의 운동을 중심으로 경제법칙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아리기는 이윤율 하락설과 결합되는 축적체계론을 제시한다. 이들의 시도는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법칙과 결합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이윤율 하락 경향과 그에 대한 반작용요인으로서 제도에도 주목한다.
윤소영 선생과 과천연구실은 이러한 경제학 비판의 이론적 계보를 그로스만적 전통의 복권이라고 강조한다.
그로스만의 작업은 독일사민당의 붕괴론 논쟁에 개입하는 최후의 시도였다. 상대적 과잉축적으로서 이윤율이 하락이 지속되면, 이윤의 증가가 정지하고, 심지어 감소하는 절대적 과잉축적이 가능한데, 그 국면을 붕괴로 본다. 그로스만은 이렇게 이윤율 하락과 과잉축적의 관계를 해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축적의 반작용요인에도 주목한다. 자본의 구조조정, 특히 내부금융, 수직통합,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에 주목하면서 20세기 미국경제 분석을 상당부분 예비했다. 또한 ‘최후의 반작용요인’으로 증권투자와 자본수출도 지적했다.
일반화의 또 다른 의미는 새로운 대상의 발견이다. 알튀세르는 국가, 정당 등에 관한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으로 남아있다고 지적하며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론의 공백에 주목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경제학 비판을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결합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소외된 의식으로서 환상이다. 이 시기 마르크스는 보편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다고 부당전제한다. 이러한 이론적 약점으로 인해 이데올로기 개념이 포기된다. 그러나 1871년 파리 코뮌을 경험한 이후 마르크스는 경제적 이행이 아닌 정치적 이행, 즉 혁명적 실천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는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도 이데올로기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데올로기는 실천적 의식이라는 긍정적 함의로 전환된다.
중요한 것은 경제학 비판으로서 『자본』의 역사과학과 결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로크의 소유론에 대한 『자본』의 비판, 즉 단순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이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영유법칙으로 반전된다는 비판에 주목해볼 수 있다. 소유권을 비판하는 노동권이다. 경제학 비판이 노동자상태론을 의미한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노동자운동론을 의미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일반론을 발전시킨 발리바르의 역사적 이데올로기론은 엥겔스의 무매개적으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기초한다.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계급 정치에서 물질적인 힘으로 전화된다. 앞서 살펴본 반작용요인으로서 제도는 이데올로기의 현실화, 물질화라고 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반작용요인으로 기능하지 않는 제도도 있다.
3) 체계론·체계사로서 자본주의 역사동역학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통해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역사동역학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역사동역학은 자본생산성·이윤율이라는 원인과 자본 성장이라는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물리학에서 중력의 법칙과 행성 운동이라는 현상과 유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사과학으로서 역사동역학은 물리과학과 달리 구조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려면 자본주의의 ‘구조’로서 생산관계를 지배하는 경제법칙 외에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기능’을 담당하는 자본과 국가의 제도 또한 함께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동역학은 구조와 기능의 결합으로서 체계론이자 ‘체계사’다.
역사동역학은 열역학적 생명론과 유비할 수 있다. 열역학적 생명론에 따르면 생명은 구조(물질)와 기능(생리·생식)을 결합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체계이다. 자본주의 역사 또한 엔트로피법칙으로서 구조(생산양식)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네겐트로피로서 기능(제도)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결합할 수 있다. 이러한 체계론적 관점을 통해 그로스만과 아리기의 구조적 위기론을 체계화할 수 있고, 절대적 과잉축적이 불가능하다고 부당전제하는 뒤메닐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구조-제도의 관계가 논리-역사의 관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 전개의 방법으로서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은 논리와 역사를 결합한다. 특히 특수한 상품으로서 화폐와 노동력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화폐의 본질로서 보편적 등가물에 대한 설명은 단순상품생산의 구조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고, 화폐의 기능으로서 본위화폐에 대한 설명은 단순상품생산의 제도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다. 노동력도 마찬가지인데, 노동력의 본질로서 노동할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에 대한 설명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구조에 대한 논리적 설명인 반면, 노동력의 기능으로서 잉여가치의 생산에 대한 설명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제도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다.
이런 해석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설명이고,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 3권에서 사회구성체를 사회의 경제적 구조로서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경제적·정치적 제도와 이데올로기로 정의했다. 이런 정의에 따라 19세기 영국자본주의나 20세기 미국자본주의에 대해 분석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째 의미의 제도와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장(factory)과 구별되는 기업(firm)의 역사적 형태인 개인기업(enterprise)과 법인기업(corporation)이다. 『자본』에 나온 개인기업에 대한 분석과 비교하여 아리기는 『장기 20세기』에서 미국의 법인기업을 분석했다.
이렇게 생산양식 분석에서 구조-본질과 대비되는 제도-기능과 사회구성체 분석에서 추가되는 또 다른 제도-기능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윤소영 선생은 전자에 대해서는 이론 내부에서 논리와 대비되는 역사라는 의미로 ‘역사적 이론’이라 부른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개념적으로 설명된 역사라는 의미에서 ‘이론적 역사’라고 부른다. (표 참고)
두 번째 의미의 제도는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하는 네겐트로피로 반드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법인기업이 20세기 미국자본주의의 네겐트로피로 기능한 반면, 개인기업이 19세기 영국자본주의의 네겐트로피로 기능한 것은 아니다. 제도가 역기능을 할 때 ‘국가의 실패’, ‘체계의 실패’가 발생할 수 있다. 제도가 구조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된다는 의미다.
봉건제에서는 역기능을 하는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좀 더 일반적인데, 그것이 종교다. 반면 정교분리로 세속화된 자본주의에서 역기능을 하는 제도는 예외적이나 기능부전(오작동)에 따른 등급이 존재한다. 그 결과 노동생산성과 1인당 국민소득으로 측정되는 효율성의 격차가 존재한다. 물론 자본주의에서도 세계전쟁의 원인이 된 독일의 독점화나 세속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아랍세계는 국가와 체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사회성격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자본』 3권 47장에서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을 재생산하는 사회구성체의 변이에 대해 언급한다. 변이란 ‘보편적 유형’, ‘이념적/개념적 평균’을 전제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규범(Norm)/표준(Standard)을 전제한다. 표준과 변이의 차이는 생산양식의 차이는 아니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경제적·정치적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차이다.
표준과 변이는 보편성과 개별성의 관계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성격 논쟁과 한국사회사 논쟁은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와 봉건제적 사회구성체의 보편적 표준에 대한 개별적 변이를 쟁점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즉 미국자본주의라는 보편적 표준에 대한 한국자본주의의 개별적 변이를 추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2. 한국사회성격 논쟁
『종합토론』에 제시된 8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자. 먼저 한국사회성격 논쟁이다. 이번 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로, 나머지 7가지 주제들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1985년의 한국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회고에서 출발해, 논쟁의 쟁점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사회성격 논쟁으로 회귀하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
1) 한국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회고
윤소영 선생은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에서 한국사회성격 논쟁을 구로동맹파업과 함께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부활의 중요한 상징적 사건으로 회고했다. 박현채 선생(1934-1995)은 인혁당 이후 이론 연구를 활발히 전개했는데 『후진국경제론』(1973)과 『민족경제론』(1978)이 그 핵심이었다. 1980년대 종속자본주의론이 주목받는 상황에서 민족경제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박현채 선생은 1985년 『창작과비평』 복간호에서 종속자본주의론에 대해 반비판하는 동시에 민족경제론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신식국독자론)으로 한 단계 발전시킨다.
그런데 1986-88년에 이른바 ‘3저호황’이 출현하면서 신식국독자론 내부에서 자립화-개량화론이 제기된다. 윤소영은 이에 대한 비판으로 독점이 강화되면서 종속이 심화된다는 명제를 제시하며 신식국독자론을 발전시켰다. 「한국사회성격 해명에 있어서 올바른 이론적 입장의 확정을 위하여」(1986)라는 워킹페이퍼와 『창비 1987』의 좌담에서 박현채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논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논쟁은 1989-1991년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3저호황이라는 경제정세와 함께 선거정치의 부활이라는 정치정세가 나타난다. 이 속에서 선거정치를 통해 일반민주주의정부(GD론자)나 민족자주정부(NL론자)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정하는 그룹이 나타난다. 당시 윤소영 선생은 선거정치를 비판하면서 사회민주화를 민중민주주의(PD)로 심화시키자고 주장했다.
윤소영 선생의 신식국독자론에 동의한 후배들이 결집하여 1990년에 서사연이 출범했다. 권현정·김석진 등 서사연의 경제분과가 신식국독자론에 근거한 통사인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시론적 분석』을 집필했다. 이 책은 “‘민족해방(NL)론과 일반민주주의(GD)론에 대한 민중민주주의(PD)론의 이중전선’ 속에서 전자가 주장한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동시에 후자가 주장한 중진자본주의론을 비판하면서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에 따라 신식국독자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였다.
당시에 대한 회고는 이후에 다룰 386세대 지식인 비판과 결합된다. 민중민주파(PD) 내에서 일종의 분업이 있었는데, 박태호(이진경), 윤영상 등은 <노동계급> 그룹을 조직하기로 하고, 윤소영, 서관모 등은 서사연을 책임지며, 고훈석은 새길출판사에서 『현실과 과학』을 출판한다. 그런데 노동계급과 서사연에는 386세대만 있었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나마 서사연에는 서관모나 윤소영 같은 70학번대가 있으나 노동계급에는 없었다. 그래서 70학번대가 지도부를 구성하는 인민노련과 통합을 시도했던 것 같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인민노련은 독점강화-종속완화론을 수용했었다. 그래서 인민노련과의 통합을 비판하며 노동계급을 이탈하는 성원도 있었다.
노동계급은 1990년 조직사건, 서사연은 1991년 공안사건이 발생한다. 서사연 내부에는 이견이 있었고, 『이론』 창간으로 서사연을 개조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윤소영 선생은 서사연 경제분과를 주축으로 모인 과천연구실에만 전념하게 된다. 반면 서사연에 잔류한 이들은 현실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푸코와 들뢰즈의 포스트모더니즘 전도를 자임했는데, 윤소영 선생은 이들이 일본 68세대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추측한다. 1994년 결성된 과천연구실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이론적 작업에 몰두한다.
2)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쟁점
앞서 생산양식, 사회구성체, 사회성격의 개념에 대해 정리한 바 있다. 사회성격 논쟁이란 표준에 대한 변이로서 러시아, 일본, 중국의 자본주의가 가지는 다양한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다. 물론 보편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서 1917년 혁명 이후 사회성격 논쟁이 전개된 것은 러시아자본주의가 표준으로서 보편성을 가진 영국자본주의와 다르고 따라서 영국과는 다른 러시아만의 변혁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제를 레닌은 민주변혁이라 불렀다. 영국과 달리 러시아는 민주변혁이 필요했기 때문에 1905년 제헌의회, 1917년 소비에트(평의회)를 토대로 민중적 민주변혁을 추구했다. 1930년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회성격 논쟁이 전개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논쟁이 없었다.
레닌은 러시아자본주의의 특수성을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군봉제국주의)라고 불렀다. 그런데 스탈린주의자들은 군봉제국주의를 현대제국주의에 미달하는 후진성으로 이해했다. 그 비판자들은 이를 특수성으로 이해했고, 국가독점자본주의 경향론을 제시했다. 이것은 레닌의 『제국주의』에서 독점과 자본수출이라는 표지의 분해로 연결된다. 즉 제국주의가 되려면 독점과 자본수출이 동시에 필요하다. 독점만 가지고 제국주의는 아니다. 식민지에서도 자본수입을 통해 독점이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윤소영 선생의 박사논문의 결론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종속적 재생산과정’ 테제의 핵심이다.
박현채 선생은 1930년대 중국사회성격 논쟁에서 제기된 매판적·봉건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론(관료자본주의론)을 원용해서 신식국자론을 제출했다. 사실 1970년대의 민족경제론은 이미 관료자본주의론을 전제한 것이었다. 또한 박현채 선생과 윤소영 선생의 신식국독자론은 일제강점기 백남운 선생이 제시한 이식자본주의론으로 소급할 수 있다. 일제가 이식한 자본주의의 특수성이 식민지성과 반봉건성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그 특수성이 신식민지성과 (국가)독점성으로 성장·전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군정이 양도한 적산을 이승만 정부가 민간에게 불하하여 재벌이 형성된 것을 설명한 연구가 고 김기원 교수의 박사논문(1989)이다. 또한 독점을 가능케 하는 자본수입에는 화폐자본뿐만 아니라 생산자본의 수입도 포함된다. 금융종속과 기술종속이다. 3저호황의 상황에서 독점강화가 종속완화가 아니라 종속심화로 귀결된다는 것을 기술종속의 심화라는 관점에서 실증한 것이 정일용 교수의 박사논문(1989)이다. 물론 금융종속이 완화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자립화-개량화론이 주장한 독점강화-종속약화론이 아니라 독점강화-종속강화론이 타당하다. ‘3저호황’은 1979-80년 ‘3고불황’의 반전이었을 따름이고, 한국자본주의는 1991-92년의 ‘총체적 난국’을 거쳐 1997-98년 경제위기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3) 한국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자기비판과 확장
과천연구실의 이론적 작업에 주력하던 윤소영 선생의 관심이 다시 한국사회성격 논쟁으로 회귀하게 된 계기는 1997-98년 경제위기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국경제 반세기: 역사적 평가와 21세기 비전』(1995), 사공일의 『세계 속의 한국경제』(1993) 등의 연구성과를 참고했는데, 그 결과 신식국독자론의 가장 중요한 결함이 전두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몰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79-1980년 경제위기로 박정희 정부가 자멸한 것은 1960년대 수출지향공업화와 모순되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때문이었고, 전두환 정부의 출현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통해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4대 개혁은 김영삼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으로 소급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번 『세미나』의 8개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다. (뒤에서 좀 더 다룬다.)
『세미나』는 한국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자기비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론』에서 다뤘던 한국사회사 논쟁 또한 보충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작업은 이번 책의 핵심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현대지식인의 역사로 확장된다. 사회성격 논쟁의 대상이 자본주의라면, 사회성격 논쟁의 주체는 현대지식인이기 때문이다. 8개 주제 중 4개가 지식인의 역사이므로, 뒤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따라서 일단 한국사회사 논쟁을 정리해보자.
4) 한국사회사 논쟁
한국사회사 논쟁의 기원은 일제강점기 마르크스주의자인 백남운 선생이다. 백남운에 따르면 삼국은 노예제였고,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는 봉건제였다. 그는 아시아적 봉건제의 특징으로 『자본』 3권에서 마르크스가 주목한 바 있는 토지국유제와 그 결과로서 지대와 조세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시대구분을 둘러싸고 사회사 논쟁이 전개된다. 이청원은 고려까지는 노예제였고 조선은 봉건제라고 주장한다. 일본 유학생 출신이자 일본공산당 주류인 강좌파와 친화성을 가진 이청원은 아시아적 원시공동체론을 수용해 아시아적 봉건제론을 기각한 것이다. 반면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제학교수인 전석담은 노예제의 부재를 주장하며 원시공동체의 장기적 존속으로 삼국부터 시작된 봉건제로의 이행이 완만하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시아적 봉건제론을 지지한다. (중국을 표준으로 하는 봉건제의 역사동역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봉건제론』이나 이를 요약한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세미나』를 참고할 수 있다.)
해방 이후 1960년대 북한사학계는 고조선은 노예제였고 삼국시대 이후는 봉건제였다는 결론을 도출하지만 아시아적 봉건제론은 견지한다. 1970년대 주체사상이 득세하면서 주체사관이 출현한다.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운동에 주목하는 반면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 개념은 상대화된다. 남한에서는 김용섭 선생이 백남운의 학통을 부분적으로 계승한다.
해방 이후 김용섭 선생은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비판하기 위해 백남운의 사회경제사를 복권시키면서 내재적 발전론을 제창했다. 1988년 조직된 한국역사연구회가 그 작업을 계승하여 1992년 『한국역사』를 출판했다. 『한국역사』는 『한국사강의』(1989)를 대체한 것인데, 후자는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운동에 주목하는 반면 전자는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에 주목한다.
『한국역사』는 백남운처럼 통일신라 이후에 봉건제가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또 전석담의 비판을 수용해 한국사에서는 노예제를 발견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개항 이전의 서술은 생산양식·사회구성체의 진화가 중심이지만 개항 이후의 서술은 정치사·운동사 중심이다. 특히 해방정국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1945-1953년의 역사적 단절을 부정한다. 남북한이 각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진화했다는 민중민주론의 역사관을 ‘반(半)국적 인식’이라 비판하며 민족해방론이 주장하는 ‘자주적 민주정부’에 의한 민족통일론을 수용한다. 따라서 개항 이전의 역사서술이 민중민주론과 친화적인 반면, 개항 이후, 특히 해방·분단 이후의 역사서술은 민족해방론과 친화적이라는 모순이 존재한다. (개항 이전 역사에도 결함이 있는데, 봉건제를 개념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미나』는 이렇게 한국사회사 논쟁을 정리하면서 개항 이후 한국사 ‘장기 20세기’에 대한 개관을 시도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70년 동안 일본에 의해 자본주의가 이식되었고, 또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70년 동안 남한과 북한에서 아주 특이한 형태로 발전해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미 그 종언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한국사의 ‘장기 20세기’ 개괄
앞서 사회성격 논쟁으로 다시 회귀하게 된 정세적 계기가 1997-98년 경제위기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었고, 신식국독자론의 가장 중요한 결함이 전두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몰인식이었다는 평가를 확인했다. 실제 과천연구실은 1998년부터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세계체계론의 시각』(1998),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페미니즘의 시각』(1998),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와 ‘워싱턴 콘센서스’』(1999),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2001) 등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발표했다. 과천연구실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사회운동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했다. 1998년에 출범한 사회진보연대도 그러한 사회운동 중 하나다.
그런데 과천연구실은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세미나』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의 상대화”를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그것은 2007-09년 금융위기로 변화된 경제정세와 그에 대한 논쟁을 반영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로서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강조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미나』는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위기와 비판』, 『종합토론』을 통해 한국자본주의의 역사를 개관하며, 남한경제가 완전히 침몰했다(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미국의 경제학자 아이켄그린이 말하는 ‘중진국 함정(middle-income trap)’과 같은 현상을 의미한다. 다만 마르크스주의는 왜 침몰하는지(‘중진국 함정’에 도달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지양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한국자본주의의 특수한 제도로서 재벌에 대한 비판이 결합된다. 순서대로 자세히 살펴보자.
1) 신자유주의 비판의 상대화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은 20세기 미국자본주의의 역사동역학이라는 맥락에서 결합한다. 20세기 미국자본주의의 성장기를 특징짓는 반작용요인으로서 제도는 법인자본주의다. 189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법인혁명, 관리자혁명, 케인즈혁명을 거치며 형성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으로서 이윤율 하락 경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65년 이후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미국경제의 성장기가 끝나고 불황기로 접어든다. 그런데 불황기에도 일시적인 반작용요인이 작용할 수 있는데, 그것이 금융화다.
금융화로 인해 1981-82년 이후 이윤율이 다시 상승한다. 아리기의 표현에 따르면 실물적 축적에서 금융적 축적으로 이행하는 ‘벨 에포크’(좋은 시절)가 나타난다. 미국경제의 불황기로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성장기의 제도가 해체 또는 변형된다. 우선 케인즈혁명이 역전되면서 적자재정·금융억압이 균형재정·금융해방으로 반전된다.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새케인즈주의 현대경제학이다. 또 관리자혁명도 역전되면서 관리자의 헤게모니가 소유자의 헤게모니로 반전된다. 구조조정은 이러한 제도의 역전에 따른 결과다. 지주회사를 중심으로하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금융세계화의 주요행위자로 기능하게 된다.
금융세계화의 모순이 2007-09년 금융위기로 폭발하며 새로운 경제정세가 전개된다. 금융위기의 구조적 원인은 미국경제에서 이윤율의 하락 추세와 관련된다. 또한 이윤율이 하락하는 불황기에 전개된 금융세계화는 구조적 원인과 정세적 원인을 매개한다. 금융위기의 정세적 원인은 금융세계화 속에서 전개된 금융혁신, 주택시장과 증시를 결합하는 새로운 파생금융상품과 관련된다.
이 과정에서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쟁점이 형성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과천연구실과 역사동역학에서 쟁점이 있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뒤메닐이다.
뒤메닐은 1980-90년대 미국의 이윤율 상승을 새로운 성장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2007-09년 금융위기를 이윤율이 하락하는 국면에서 발생한 실물경제의 수익성 위기가 아니라, 이윤율이 상승하는 국면에서 발생하는 금융의 ‘헤게모니 위기’로 이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위기라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노동자계급이 관리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사회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대신 관리주의라는 새로운 계급적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는 전망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윤소영 선생은 여러 글을 통해서 비판한다. 1980-90년대의 이윤율 상승은 금융화의 효과에 불과하고, 2000년대의 신경제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금융화와 결합된 교통·통신혁명일 따름이다. 또한 관리자는 부르주아지와 구별되는 별도의 계급이 아니며, 따라서 관리주의로 이행이라는 입장도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금융위기를 둘러싼 쟁점은 현재 한국의 정세에도 유의미하다. 불황기 위기관리의 헤게모니가 신자유주의였는데,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정당성 위기는 분명히 나타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논쟁은 부재한 채, 반MB투쟁, 박근혜 퇴진촛불투쟁과 같은 반보수전선이 과잉규정된다.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은 정작 변혁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인민주의(포퓰리즘)만 득세하는 상황이다. 부르주아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약화되면서 위기관리의 위기,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투쟁하는 양계급의 공멸”, 즉 야만의 위험이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등장이다.
이렇게 금융위기에 대한 논쟁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산주의적 이행이라는 전망이 사라진 현 정세가 과천연구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상대화하고, 인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게 한 것이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복원 이전에 경제학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설정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일시적이나마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조차 한계에 도달해 자본축적의 한계, 1인당 GDP로 측정되는 생산성 성장의 한계가 현실화되는 상황을 정세적으로 더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미나』에서 설명하고 있는 한국사의 ‘장기 20세기’를 일별해보자.
2)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자기결함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맹목이지만,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분석은 일관적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까지의 통사는 서사연의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참고하면 된다.) 한국사회성격 논쟁 당시 박현채와 윤소영 선생은 이식자본주의론의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에도 자본주의가 존재했었다고 주장한 반면, 안병직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의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논쟁에서 패배한 후 안병직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고 식민지현대화론으로 전향했다. 최근 『반일종족주의』로 이슈인 이영훈 교수 등은 안병직의 제자들이고 이들이 조직한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이름을 따 낙성대학파라 한다.
『세미나』는 식민지현대화론에 대한 비판을 보충한다. 일제강점기에 현대적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2%)은 나타나지 않았다. 매디슨이 추계한 조선의 1870-1913년, 1913-1950년 성장률은 각각 0.7%, –0.4%다. 전쟁 준비기만 포함하고 2차 세계전쟁기와 그 직후를 제외한 1911-40년의 성장률이 2.3%라는 낙성대학파의 추계는 불합리하다. 한편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근거로 현대화론을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착취나 수탈과 동시에 생활수준이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조선의 생활수준은 필리핀, 대만에 미달했다. 서울대 안병직 교수의 전향이 이론에 대한 무지, 이론이나 운동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비롯했다는 비판도 한다.
또한 한국현대사에 대한 낙성대학파의 폭거가 한국사학계의 정치사·운동사 중심의 연구경향에 의해 조장된 것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사회경제사 중심의 백남운의 학통은 이어지지 못한다. 게다가 민족해방파와 친화성을 갖는 한국사학계 현대사 전공자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야합해 ‘친일파 척결’을 명분으로 ‘과거사 청산’을 주도한다. 이들의 목적은 역사학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이다. 이른파 폴리페서(어용교수)가 한국사학계에서도 광범위하게 창출된 것이다.
해방정국-분단-한국전쟁이라는 단절 이후 남한경제는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신식국독자로 재편된다. 한국전쟁은 식민지경제의 유산을 대부분 파괴했고,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를 거치며 1950년대 미국의 원조물자 특혜 배정과 적산의 민간불하를 통해 신식국독자의 초기조건이 형성된다. 이것이 재벌의 기원이다. 경성방직,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한민당을 조직한 김성수가 아니라 삼성 이병철이 자본가를 대표하게 된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재벌육성정책을 변경하여 삼성이 독점하던 은행을 환수한다. 이렇게 재차 국유화된 은행을 통해 재벌을 통제하는데, 이것이 수출지향공업화의 가장 중요한 정책수단인 정책금융이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정책금융은 수출지향공업화가 아니라 중화학공업화에 결합된다. 이 과정에서 수출에 기여하기만 하면 지원하는 방식에서 산업·기업특수적 정책금융이 실행된다. 이를 계기로 재벌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게 된 것은 경제성장에서 군사안보로 강조점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1968년 구정 대공세(베트남 전쟁), 1969년 닉슨독트린 발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10월유신이 선포되었다. 군수공업화로서 중화학공업화가 강조된 것이다. 경제기획원과 경제수석실이 반대하니까 박정희는 서울공대 출신이자 시발자동차 공장장 출신인 오원철을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기용한다. 박정희를 비판할 때 유신은 거부하면서 중화학공업화는 수용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 유신은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것이고, 남북공동성명은 유신을 위한 것이었다.
중화학공업화의 결함은 기계산업의 취약성인데, 재벌은 완성품 위주의 중화학공업화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품·소재산업이 취약해진다. 반면 일본이나 대만은 중소기업이 중심이 되어 부품·소재산업이 발전한다. (대만과의 비교는 후술한다.) 나아가 첨단기술이 필요한 공작기계산업의 발전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3)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실패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과 하버드대학의 공동연구인 『기적에서 성숙으로』는 남한경제의 자본수익률 추이를 분석하는데,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2001)에서 윤소영 선생의 이윤율 추이 분석과 거의 동일하다. 1972-75년에 급등·급락하다가 1976년부터 하락세를 지속해 1980년에 저점에 도달한다. 그 후 반등해 1987년 고점에 도달한 이윤율은 1992년에 다시 1980년 저점에 도달하는데, 이 다음에도 하락세를 지속하면서 1998년에는 새로운 저점에 도달한다. 이것을 미국의 이윤율과 비교해보면 확연한 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즉 불황기에서 반작용요인(이윤율 하락을 상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금융화가 한국에서는 특수한 형태로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세미나』는 이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1979년 4월의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은 남한 최초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이었다. 개혁의 고통이 가중되던 와중 야당에 대한 탄압도 가중된다. 그런 상황에서 10·16 부마항쟁이 발생한다. 그 대책을 둘러싸고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갈등이 전개되며, 김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다. 나아가 김 부장과 그에 대한 입장이 애매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처단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12·12사건이 발생한다.
전두한 정부는 박정희의 계승이 아니라 박정희의 결함을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1980년 남한경제가 붕괴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화투자조정을 시행한다. 그러나 1986년 3저호황이 시작되던 해에 이를 민간자율의 산업합리화로 대체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중도반단된다. 사실 이러한 개혁에는 경제적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전두환 정부가 저항을 합리화해줄 정치적 정당성을 결여한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정주영과 같은 재벌의 저항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공일의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 정부는 현대 정주영 회장에게 전자산업 진출을 권유하며 자동차산업에서는 탈퇴하거나 제너럴모터스(GM)과 합작하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주영은 현대자동차를 고수했다. 전두환을 조카 취급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 결과 전자산업에 진출한 삼성이 이후 재계 1위로 역전한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3당합당을 통해 문민화를 준비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재개한다. 정주영은 1992년에 대선 출마를 할 정도로 이러한 개혁에 저항한다. 김영삼은 3당합당 끝에 대권 도전에 성공하지만,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실패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3당합당을 통한 문민화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제임스 페트라스는 제3세계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위한 전략인 ‘워싱턴 컨센서스’를 분석한 바 있다. 여기엔 사회적으로 심각한 위기 속에서 국제금융기구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정권이며, 두 개의 ‘계급연합적’ 중도파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는 것이 좋다는 합의가 포함된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장기간 안정적 연정을 하고 있는 칠레 사민당-기민당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이다.
남한에서는 1987년 양김의 분열로 인해 칠레와 같은 연합이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에 대한 지식인 역사, 정치사의 관점에서의 평가는 후술한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2년 만에 복귀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곧이어 김영삼 정부에서 소외된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DJP연합을 형성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로남불’의 원조인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실패는 이렇게 김대중의 (비일관적인) 반대의 영향이 컸다.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실패하면서 결국 남한경제는 “‘복원력’을 상실하고 침몰하기 시작”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1991-92년 이윤율이 이전의 저점인 1979-80년 수준으로 하락한 (‘총체적 난국’)뒤에도 (금융화로 다시 회복한 미국과 달리)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그 귀결이 1997-98년의 경제위기, 이른바 IMF위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재벌개혁과 금융개혁, 한미FTA 추진은 전두환-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계승한 것이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2006; 2008)에서 이미 이러한 평가를 한 바 있다. 심지어 전두환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도 했다. 그런데 『세미나』에서는 추가적인 평가가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전두환-김영삼 정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면서도, 이미 남한경제가 복원력을 상실하고 침몰한 상황에서 추진한 정책개혁이라는 것이다. 즉 이미 적절한 시기를 놓쳤고, 따라서 그 결과는 매국에 유비할 수 있다. 우리은행 제외한 다섯 개 시중은행이 모두 외국인이 지배하고, 실물경제를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조차 외국인이 지배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지시하는 개념이 포스트케인즈주의자 조안 로빈슨의 노동자민족이다.
노동자민족으로 전락해 경제주권을 상실해도 평상시에는 별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주권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주권, 군사주권도 결국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반식민지, 신식민지라 부를 수 있다. 『위기와 비판』에서는 조선망국사에 빗대어 이후 누군가 ‘남한망국사’를 쓴다면 주요 계기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 말한다.
1972-73년 10월유신과 중화학공업화
1979-80년 첫 번째 구조적 위기
1986-88년 ‘3저호황’
1991-92년 ‘총체적 난국’
1997-98년 두 번째 구조적 위기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 타결
4) 재벌의 결함
지금까지 살펴본 남한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핵심을 꼽아보라면 1970년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역사동역학이란 이론을 전제로 하는 평가다. 따라서 “유신독재”라며 박정희를 비난하는 (그러나 중화학공업화는 긍정하는) 민주당식의 평가와는 180도 다르다. 먼저, 1960년대 박정희의 수출지향공업화는 크게 결함이 없으므로 60년대와 70년대를 구분해야 한다. 또한 1980년대 전두환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박정희의 계승이 아니라 오히려 결함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김대중-노무현은 전두환-김영삼보다도 역사적으로 더 큰 실책을 했다. 망국의 원흉으로서 1970년대 박정희를 비판하는 화살이 이를 관통해 김대중-노무현에게 꽂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적 비판은 향후 살펴보게 될 문재인 정부와 386세대,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으로 심화된다.
어쨌든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자본주의의 특수한 결함으로서 재벌의 성장이다. 1970년대 이후 재벌에게는 수익성과 생산성이 중요하지 않았다. 중화학공업화에 진출한 재벌은 수익성과 생산성이 낮더라도 정책금융이라는 특혜를 통해 그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복·과잉투자가 발생한다. 1970년대 강남개발을 비롯한 부동산투기도 중요하다. 급속한 인플레이션 속에 주택·택지가격 급등은 정책금융의 효과를 배가한다.
전두환 정부 이후에도 재벌은 수익성과 생산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순환출자 때문이다. 심지어 1997-98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재벌의 순환출자가 오히려 강화된다. 순환출자를 비판하기 위해 미국의 법인기업과 비교해서 재벌을 비롯한 다양한 기업집단의 지배구조를 분석한 모르크의 연구를 인용한다. 모르크에 의하면 기업집단, 특히 재벌의 지배구조에서 가장 큰 결함은 다단계투자(피라미딩)로 인한 총수 또는 지배주주의 소액지배, 즉 소유와 지배의 괴리에 있다. 나아가 남한의 재벌에 고유한 순환출자는 계열사간 출자를 통해 총수의 출자금을 일부 회수하는 것으로, 최소의 소유로 최대의 지배를 실현하는 최악의 다단계출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터널링’(tunneling)이라 부르는 총수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사익편취행위라는 특징도 나타난다. SK나 LG처럼 지주회사로 전환한 재벌이 있는 반면, 삼성과 현대자동차는 순환출자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재벌의 결함은 무능한 총수가 초래한 위험을 일반주주가 부담하는 것이다.
수익성이라는 관점에서 재벌의 결함은 앞서 살펴본 이윤율 추이로 설명할 수 있다. 1970년대 이윤율의 하락과 1980년 저점, 1980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후 일시적 반등, 1991-92년 총체적 난국 이후 이윤율 추이의 분기는 모두 재벌의 부침과 연관되어있다. 또한 생산성을 무시하는 재벌의 결함에 대해서도 쿠마르-러셀의 생산함수 분석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쿠마르-러셀은 1965년과 1990년이라는 두 시점에서 미국이라는 선도자에 대한 다양한 추격자의 성패를 분석한다. 여기에 대만과 남한은 분석한 앨런, 팀머와 반아르크의 연구를 종합해 비교해볼 수 있다. 미국의 생산함수에 접근하는 것을 추격(catch-up)이라 하는데, 결론만 말하면 독일·일본·대만과 비교해 남한은 생산성 추격에 실패했다.
재벌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얼핏 참여연대나 장하성·김상조 류 재벌개혁론과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동역학을 현실 역사에서 검증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그 결론이 장하성이 과거에 주장했던 ‘주주자본주의’로 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보편성이 한국의 역사와 제도에서 어떠한 특수성으로 나타나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 결론은 또다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이며 정치적 결론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다.
5) 대만과의 비교
보편성과 특수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성격의 표준과 변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학에도 일종의 ‘실험’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비교체제론이다. 비교자본주의론과 달리 역사동역학에서 사회성격을 비교하는 것은 표준(보편성)과 변이(특수성)라는 개념에 근거해있다. 이미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에서 20세기 자본주의의 표준(사회구성체)으로서 미국의 법인자본주의에 대한 서술과 함께 그 변이로서 독일경제, 일본경제를 설명한 바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프랑스경제라는 또 다른 변이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남한과 대만이라는 유사한 변이끼리 비교한다.
남한과 대만은 둘 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다음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적산을 민간불하한 남한과 달리 대만은 국유화를 했고, 그 결과 재벌이 형성되지 않는다. 대만도 남한처럼 미국의 역개방정책(미국이 시장을 개방해주는 것)에 힘입어 수출지향공업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남한과 달리 재벌이 아니라 농촌에 산개한 중소기업이 주역이다. 공기업, 소수의 대기업은 수출이 아니라 내수를 지향했다. 따라서 대만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아니었다. 또한 남한과 달리 외채가 아니라 직접투자에 의존했다.
1973년부터 대만도 석유화학·제철부문과 함께 조선부문의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자동차·조선 등 완성재 중심의 중후장대한 장비산업에 치중한 남한과 달리 1970년대 이후 대만의 전략산업은 중소기업 중심의 전자산업과 기계산업이었다. 중간재 중심의 경박단소한 기술집약산업인 것이다. 실제 남한과 대만의 경제성장 궤도의 분기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다. 결국 남한은 대만보다 미국을 추격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재벌이 없는 대만은 1997-98년 동아시아 위기 상황에서도 위기를 겪지 않았고, 1979-80년에도 경제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2000년대의 대만도 경제성장률이 반토막나는데, 중소기업이 평가절상에 이은 임금상승으로인해 중국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자본주의 역사동역학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성격의 표준과 변이, 변이와 변이 간 차이는 ‘개념적으로 설명된 역사’, ‘이론적 역사’로서 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남한경제와 대만경제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박정희와 장제스를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객관적 성격에 대한 분석은 한국사회의 주체적 성격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세미나』의 핵심적 작업인 한국 현대지식인의 역사는 한국사의 ‘장기 20세기’에 대한 설명, 한중일의 현대지식인에 대한 설명과 종횡으로 교차하면서 다채로운 쟁점을 던져주는 동시에, 문재인정부와 386세대의 인민주의, 북한사회주의의 타락에 대한 정세적 비판으로 수렴된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