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기,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의 과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코로나19 감염병 악재와 겹쳤다. 방역, 고용, 사회 안전망 대책들이 긴급하게 실행되고 있으나, 경제위기는 진행 중이다. 특히 저임금, 비정규직, 영세기업 노동자층의 고용 파탄상황은 이제 만성화되고 있다. 코로나 고용위기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대응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양극화된 노동에서 하위 노동을 대변하는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상층의 노동을 대표하는 대기업, 공공기관 중심의 조직이지만, 총연맹의 사회적 협의를 통해 정책적으로 미조직, 취약노동을 구제하는 계급적 연대는 정세적으로 의미가 크다. 여기서 ‘민주노총’이란 87년 이후 자주적, 민주적 노조, 즉 한국노총을 제외한 노동조합운동 총체를 의미하며 ‘총연맹’은 산별노조들이 가입한 행정적 최상위조직을 의미한다.
상반기 코로나 고용위기 노사정 합의는 찬반논란 속에 실패로 끝났고, 민주노총의 안일하고 무기력한 대응은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양극화’ 현상이었다. 민주노총의 주력부문인 공공기관과 대기업 정규직이 느끼는 고용불안의 체감도는 취약 노동자층의 절박한 상황이 마치 딴 나라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정도로 무감했다. 민주노총 내부에도 한계기업의 도산과 폐업, 구조조정으로 인한 투쟁사업장이 속속 발생하고 있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고용은 여전히 노조 밖의 노동에 비해서는 안전하다. 민주노총은 총연맹의 노사정 협의에 ‘해고금지’ 요구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의안을 폐기했지만, 민주노총 밖 다수 노동자는 해고되지 않아도 강제적 실업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경제, 사회, 정치 전반이 위기에 빠져있는데 유독 민주노총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가 않다. 한국 사회 노동자의 대략 5%에 불과한 민주노총 소속의 고임금, 정규직, 대공장의 조직노동이 코로나 고용파탄에 내몰린 취약한 노동계층을 실질적으로 구제하고 대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일각에서는 코로나 경제침체가 K자형 회복 즉 모든 노동자의 소득이 함께 위축됐다가 이후에는 회복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간의 격차가 더욱 확대되는 불평등 심화의 경향을 예측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 노동의 격차가 전개될 양상이다. 민주노총은 K자 상승곡선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을 조직하자고 주장해왔다. 지금 시점에서 민주노총에 변화와 혁신의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 좀 더 분명한 질문과 답이 필요하다. 오늘의 토론을 통해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민주노총은 공공기관과 대기업 중심의 기업별 노조를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역사적, 조직적 결함의 문제를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산별노조와 총연맹이 무력화된 현실에서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이 문제를 관성적으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한 걸음 전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민주노총이 문재인 정권의 포퓰리즘 정치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노동자에게 포퓰리즘은 왜 해악인가, 그리고 포퓰리즘과 단절한 노동자의 정치, 사회운동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990년대 노동자운동의 한계
노동운동을 혁신하자는 주장에는 “기업별 노조 체계 극복과 산별노조·총연맹 강화”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기업노조의 현장 중심성이 상급 단위들의 모든 권한과 위상을 압도하고 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임금인상이라는 분명한 경제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경제 최대 성장기인 3저 호황은 생산성보다 현저하게 낮은 임금을 정상화할 수 있는 계기였다. 경제성장률에 한참 미달한 임금인상률을 상승시키는 것을 목표로 전국적으로 노조 결성과 투쟁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계급적 대응은 한국경제에서 노동조합운동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던 최초의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생산력의 격차에 따른 임금의 격차가 본격화된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기업별 노조라는 조직 형태에 있었다. 관변 어용노조의 관행과 전두환 정권의 초기업 노조 봉쇄라는 억압으로, 민주노조는 처음부터 기업별 노조 체계를 근간으로 삼게 되었다. 이것은 의도하지 않은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자본의 지불 능력 차이에 따라 노조의 조직률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여 대기업노조의 임금인상이 중소기업노조에 영향을 미치는 연대 지향적 임금 투쟁의 효과가 소멸하기 시작했다. 호황의 거품이 꺼지고 이윤율이 하락한 시점부터 본격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중화학 공업 수출둔화로 인해 무역적자와 이윤율 저하가 계속되었으나 재벌들은 금융개방에 따라 해외차입을 늘리고 문어발식 투자범위를 확대해갔다. 이때부터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자본축적과 기술혁신에도 영향을 끼쳤다. 임금인상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기업 외부 노동시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임금인상률이 높은 대기업은 자본 집약적 투자와 아웃소싱을 늘리고, 직접고용을 줄이면서 간접고용을 확대했다. 중소기업은 노동집약적 공정과 대기업 하청으로 편입하게 된다. 재벌 대기업노조의 가파른 임금인상에 대응해 자본은 노동 절약적 기술을 대거 도입했고 중소기업으로 원하청 체계를 발전시켜 분업구조를 형성하였다.
1996년부터는 재벌들의 단기외채가 폭증하고 외환보유고가 한계에 도달하면서 기업들이 부도에 이르렀다. 그런데 1990~96년의 경제 변화의 과정에서 기업별 노조의 임금인상은 정세와 무관하게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자본은 노조의 전투적 경제투쟁을 일정 수용하는 대신 위기에 대응해 재벌체제 중심의 수직하청구조를 완성했고, 금융세계화에 대비하는 자본 운동의 구조적 재편전략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1990년대 노조의 투쟁은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를 확대하여 자본축적방식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지만 계급 내 격차의 축소보다는 각개전투에 집중함으로써 정부정책과 자본의 변화에 조금도 개입하지 못하였다. 초기업 노조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대기업의 임금인상 효과는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제한적으로만 영향을 미쳤고, 자본의 구조변화는 노동운동의 쟁점이 되지 못했다. 대기업노조가 스스로 상대하는 자본의 변화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물론 이 시점에도 계급적 단결을 위한 시도가 계속되었다. 1990년 전노협의 발족과 함께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조가 함께 결집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만약, 전노협이 대기업노조가 참여한 조직으로 힘있게 건설될 수 있었다면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정세를 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적 단결은 정권과 자본의 필사적 탄압으로 저지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의 공동투쟁을 강경하게 진압했고 현장에서의 무자비한 공권력 침탈과 조직 와해 공작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민주노조는 극심한 탄압을 뚫고 연대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당시 정치적, 조직적 열세로 결국 대기업노조가 전노협에 결합하려는 노력은 좌초되었다.
87년 호황기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생산성에 미달한 저임금을 개선하기 위해 기업별 노조를 결성했고 임금인상을 목표로 대중적으로 성장해왔다. 개별 사업장의 시야에서는 당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 인식하기 어려웠던 한계가 있었지만, 경제성장기에 시작된 노조의 임금인상 투쟁은 전투성이 강한 만큼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 기업별 노조 운동은 임금인상 투쟁이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자본의 체계적 대응과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기업별 노조 운동이 임금인상을 지속한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생산성과 임금의 격차를 고착화해 결국 중소기업노조는 전노협과 함께 쇠락하게 되었다. 재벌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노동조합만이 1995년 민주노총 출범을 통해 힘을 보존했다.
민주노총 운동의 결함
민주노총이 걸어온 지난 25년은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에 따라 한국경제도 급격하게 변모한 시기였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IMF 프로그램에 따라 노동시장 구조가 대대적으로 변화하였고 금융 세계화에 편입한 한국경제는 세계적 차원의 변동에 따라 반복적 위기를 맞이했다.
경제적 불안정성이 만성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이었지만 민주노총의 운동은 과거 90년대 기업별 노조 운동의 경제학적 무지와 사업장 내부에만 갇힌 시야를 근본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하지 못했다.
당연히도 1987년 경제성장 시기의 기업별 투쟁의 성공사례가 1995년 이후의 민주노총 투쟁의 전례가 되는 것은 맞지 않았다. 경제성장기 노조는 조직력과 투쟁에 따라 생산성만큼 임금을 인상할 수 있지만, 체제의 구조적 위기에 따른 장기적 경제위기의 상황에서는 기존과 같은 투쟁으로는 임금인상도 고용안정도 지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으로 노조와 타협하기보다 실업을 확산하여 임금을 억제한다. 노동자가 각자도생의 경쟁으로 밀려나면 자본은 이들을 각개격파한다. 기업별 투쟁은 물론이거니와 산업적 대응도 한계적이다.
총연맹이라는 노동조합의 최상층조직은 이러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거시적 경제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경제위기 시기 각개격파된 노동자를 모으고 계급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총연맹은 자본의 운동을 비판하고, 노동시장에 대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물론 개별 사업장을 넘어 총연맹으로 노동조합의 조직적 힘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총연맹이 투쟁을 조직하는 것만으로 거시경제의 변수가 되지 못한다. 정부와 자본이 주도하는 경제, 산업정책에 대해 총연맹 스스로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국민경제의 고용과 실업에 대한 통제, 정부의 재정정책에 대해서도 실효성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역사에서 총연맹이 이러한 역량을 발휘한 적은 없다. 1998년, 2008~09년의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이 중요한 계기였지만 실패로 평가할 수 있다. 1998년은 국가 부도의 위기에 직면해 정부와 자본이 강행한 정리해고, 파견제 법제화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라도 경제·고용정책에 있어 총노동을 관장할 수 있는 정책적 개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총연맹은 반복적인 총파업 선언과 노사정위 참가와 탈퇴를 반복하는 것에 그쳤다.
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개된 민주노총의 투쟁 중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의 사례를 보면 민주노총이 위기 대응에 어떤 공백이 있었는가를 평가해볼 수 있다. 당시 사회적 파장이 컸던 이 두 투쟁 이후 자본과 정부는 구조조정 양상을 변화시켰다. 정리해고 투쟁의 격렬함에 부담을 느낀 자본은 대규모 정리해고 대신 비정규직(하청) 우선 해고와 명예퇴직을 통한 고용조정을 선호했고, 정부는 공적자금을 이용하여 한계기업의 생존과 소속 정규직 노동자의 상대적 고임금을 보장하는 타협을 하였다. 이러한 정부와 자본의 대응방식은 금융위기 이후 “소리 없는 해고”의 확대로 이어졌다. 대우조선, 한국GM과 같은 대기업은 정부의 정책자금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대량해고를 모면했던 반면, 중소기업과 사내 하청 등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당시에도 총연맹은 개별기업별 투쟁을 지원하는 데에만 역량을 집중했고, 불황이라는 거시경제 조건에서 노동자 내부의 임금과 고용의 격차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답하지 못했다.
이 두 번의 시기에서 총연맹은 국민경제 전체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거나, 노동시장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기업별 노조의 대응을 지원하는 기능만 강화했다. 지금의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도 총연맹은 고용위기에 대한 적절한 의제를 제시하거나 총고용정책을 주도적으로 제안하는 대신 개별기업별 투쟁을 지원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앞으로도 총연맹이 경제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 미조직, 취약노동에 대한 계급적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두 가지에서다. 첫 번째로는 세계 자본주의 위기가 한국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을 분석하지 못하다 보니 구조조정, 고용위기 등의 현상을 대처하는 것에 있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개별적 기업 단위의 고용안정 투쟁에만 집착했을 뿐, 장기적으로 자본의 상황과 노동의 주체적 상황에 맞게 총연맹의 고유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87년 이후, 민주노총의 기반이 되어온 기업별 노조의 교섭과 투쟁 중심성이 노동 내부의 격차를 키우는 핵심적 원인이라는 문제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기업별 노조 극복은 여러 혁신과제 중 일부분이었을 뿐, 이를 넘어서지 못하면 총연맹이 유명무실화된다는 적극적인 위기의식이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민주노총은 노동자 계급 전체의 보편적 이익보다, 재벌 대기업과 공공기관 정규직들의 특수한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기업별 노조, 전투적 경제주의의 폐단
오늘날 공공기관과 재벌 대기업노조는 재벌이 누리는 지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민주노총 운동 전반이 고임금극대화 전략을 뒤쫓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별 노조의 특권은 핵심적으로 고임금 문제이다. 기업노조는 조직된 힘을 기업 내 노사관계에만 집중적으로 사용하여 생산성 임금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고임금을 유지할 수 있다. 자동차 산업 등 수출 대기업의 높은 생산력으로 고임금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재벌 대기업 노조들은 기업별 체계를 강력하게 고수하며 “노조 인센티브”를 누리고 있다.
2015년 현대차 노조 정규직의 임금은 한국 자동차 산업 평균임금의 2.2배에 도달했다. 이는 취업자 1인당 GDP와도 1.7배의 차이가 나는데, 현대차와 생산성이 비슷한 이탈리아, 프랑스의 자동차 산업보다 훨씬 큰 격차이다. 대기업 고임금이 국민경제 일반의 생산성 수준을 지나치게 넘어선 현상은 비단 현대차노조뿐만 아니라 대기업, 공공기관 노조 일반에서도 나타난다. 2018년 경사노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은 1인당 GDP의 1.91배로 미국과 일본보다도 높다. 대기업의 임금 프리미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제조업 대기업은 자본투자를 절약할 수 있는 저임금 영역을 활용하면서 고생산성을 유지하고 대기업 노조는 고임금 프리미엄을 누리며 재벌의 지대를 공유한다. 한편 공공기관 노조 역시 국가정책과 정부방침이 보장하는 독점 이익에 대해 연공급 임금체계로 고임금 지대공유를 지속하고 있다.
노동자 평균임금을 한참 초과한 고임금을 총연맹이나 산별노조가 공론화조차 하지 못한다. 대기업노조의 단체협약을 상층에 보고하는 체계는 허술하여 사업장 단위의 임금총액에 대해 산별노조와 총연맹은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기업별 노조의 특권은 민주노총에서 비판받기보다는 오히려 ‘전투적 투쟁성’ 의 전형으로 인식된다. 재벌 대기업, 공공기관의 임금수준을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의 기준으로 삼아 임금극대화 전략을 목표로 전투적 투쟁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지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정책에 대해 ‘제대로 된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투쟁에서도 공공기관의 고임금 수준을 추격하는 임금체계 요구가 쟁점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지불 능력이 없는 중소기업이나 고용유지조차 어려운 비정규직 사업장에서도 그대로 답습된다. 전투적 경제주의 투쟁의 논리는 사용자가 독식한 이윤을 환수하면 고임금 극대화 전략이 충분히 가능하고 노동조합은 임금과 고용의 최대치를 요구하고 수용이 될 때까지 강경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 맞서 민주노조는 사용자가 독식한 이득에 대해 정당한 분배를 쟁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도 타당하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현대차 노조가 전체 노동자의 평균 생산성을 초과하는 과도한 임금을 받고 있다면, 이는 국민경제에서 누군가의 몫을 노조의 힘으로 독식한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불평등의 원천이 아닌가.
민주노총의 임금투쟁에 대한 관점이 여전히 선진국 최고 수준의 임금 격차와 극심한 일자리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노동시장의 객관적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현실적 조건에서 대기업, 공공부문의 임금이 모든 노동자의 평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별 체계로 전개되는 투쟁에서 전체 경제적, 사회적 시각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문제는 다시 기업별 노조 체계인데, 해결책이 있을까?
총연맹이나 산별노조의 규약으로 기업별 노조 교섭권을 중앙으로 집중하는 방법이 있다. 사실 민주노총이 20년 넘게 추구해온 방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금속노조가 십수 년 동안 증명하고 있듯, 기업노조가 상당한 기득권을 내려놓는 문제를 산별노조의 대의로 설득하지 못한다. 기업노조 사용자 입장도 있는데 산별교섭을 해도 어차피 기업별 교섭에서 추가적 임금상승이나 쟁의가 가능해지는 구조에서 이중적 교섭에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산별노조 조합원 다수가 대기업노조 소속인 상황에서 규약 변경조차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상급단위의 규약을 통한 강제가 아니라면 민주노총의 신규 조직을 대폭 확대해 기업별 교섭 단위의 영향력을 과소화되도록 만드는 방법이 있다. 2000년대 민주노총 전략조직사업의 목표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었다. 공급사슬을 분석해 자본과의 교섭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곳을 조직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노동자를 조직하기도 했다. 여기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기업별 교섭으로 경제적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강한 동인이 작동해야만 조직의 양적 확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질적으로 기업별 임금인상이 가능한 곳에서만 노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전반의 체질이 바뀔 만큼 대규모 조직화는 여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이러한 운동적 방식이 불가능하다면 노조법상의 제도변화도 고민해볼 수 있다. 독일처럼 단협 체결권이 산별노조에만 존재하는 제도가 있지만, 우리의 실정에서 이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기업별 단체협약 관행이 수십 년간 굳어진 상황에서 법으로 기업노조를 금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업별 노조가 사라진다고 자동으로 산별노조가 강화되는 것도 아니다. 또 민주노총이 기업노조를 규제하려 했을 때, 민주노총을 탈퇴하는 수단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면 상급조직은 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 결국은 대기업노조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산별노조나 총연맹이 끌려다니는 형국이다.
현재로서는 민주노총의 모든 시도와 노력이 현실적으로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기업별 노조의 경제적 실리주의를 제어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총연맹 조직의 위상과 역량, 모든 것이 유명무실화되고 있다.
총연맹의 힘, 무엇이 남았나
계급을 대표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총연맹의 지도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각 정파는 노선적 개입을 통해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을 실행해왔다. 국민파는 총연맹의 사회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는 노사정 교섭을 강조했고, 중앙파는 기업별 노조를 극복하는 산별노조 완성과 진보정치의 강화를 주장했다. 또한 현장파는 전투적 투쟁성을 강조하며 총연맹이 총파업 투쟁의 지도부의 역할을 강화하자고 주창했다. 한편에서는 민주노총의 대중적 질서를 이른바 ‘자민통’ 노선을 따르는 퇴행적 경향으로 조직하려는 전국회의류의 정파노조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노선적 개입들은 현실적으로 민주노총과 총연맹 혁신의 실효성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국민파와 중앙파는 총연맹과 산별노조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 유럽형 사민주의 모델을 기반으로 노동조합이 사회적 타협체제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제기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사회적 조합주의나 산별노조-진보정당은 코퍼러티즘의 실질적 조건인 강력하고 중앙집중적 노조, 계급 내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조직적 여건이 갖춰져야 자본과 국가의 힘에 대항하는 교섭, 투쟁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총연맹과 산별노조의 지도력이 없으므로 실현도 어렵다.
현장파의 총파업론은 문제를 더욱 미궁으로 빠뜨린다. 1996~19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을 경험 이후, 민주노총의 전투적 투쟁성이 총체적으로 응집해 계급적 단결을 실행할 수 있는 유력한 경로로 제시하고 있으나 실상, 민주노총은 총파업의 위력을 활용하는 것에서조차 실패하고 있다. 기업별 임단투와 산별 투쟁이 총연맹의 구심력을 통해 조정되거나 정세에서 필요한 정치적 공동투쟁에 조직적 합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연맹은 정세 대응을 위해 총파업을 선언하고 있지만, 현안 사업장들의 시기 집중 공동투쟁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총파업 투쟁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것으로 민주노총의 계급 대표성의 문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사실 이런 노선들은 현실적인 문제 이전에 기업별 노조 체계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노동조합의 핵심기능이 사업장이나 산업체계 내에만 한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 대중의 파편화된 이해와 요구를 제각각 충족시키는 활동에 머물 것이고 그 결과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세력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자가 사업장을 넘어서서 산별노조로, 총연맹으로 단결의 힘을 모아가야 한다는 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총연맹이 강화론의 원칙과 상반되게 현존하는 모든 노동조합운동은 경제적 실리주의, 노동자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의 위기의 상황에서 총연맹의 교섭과 투쟁의 역할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현재 총연맹이 어떤 힘과 권한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원론적이고 당위적인 수준 이상의 내용이 없다. 가령 총연맹 주최 집회 일정에 가맹·산하 조직이 얼마나 동원하느냐의 문제, 직선제 도입 이후 총연맹이 전체 조합원 현황을 관장하는 문제 이외에 민주노총이 가맹, 산하조직의 조직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별 임금과 고용을 방어하는 교섭권은 산별 중앙으로도 실질적으로 위임되지 못한다. 단체협약의 적용 역시 개별 기업으로부터 확대되는 것은 어렵다. 다만 민주노총이 조합원 대중에게 표상되는 정체성이 있다면 기업별 투쟁의 비타협적인 전투성을 보증하는 ‘네임 밸류’일 것이다. 기업별 끝장 투쟁으로 공식화된 전투적 조합주의의 강력한 영향 아래 총연맹이라는 구조가 실리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는 기업별 노조와 산별 체계를 총괄하는 민주노총이 어떤 교섭권을 가져야 하는가이다. 기존의 조직구조의 관성대로라면 총연맹 위원장은 노동조합을 대표하지만 어떤 자본과 정권과도 협상할 수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가 실패한 이후 총연맹은 정세에 필요한 현안들에 대한 노정, 노사정 협의를 관장할 수 있는 동력마저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다. 사회적인 교섭 과정 자체를 총연맹이 관장할 수 없게 되자, 산하·산별 조직들은 각자의 필요로 실용적 대응을 하고 있고 이는 조직 내적으로 합의, 소통되지 않은 채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이는 사회적 대화 찬반 논쟁이 일말의 의미가 없는 퇴보였다는 방증이다.
왜 포퓰리즘을 비판해야 하나?
민주노총도 참여하고 있는 진보개혁진영은 문재인의 포퓰리즘 정치의 지지기반이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독자적인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노동조합운동이 스스로 포퓰리즘에서 벗어나 집권세력에 대한 정치적 비판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왜, 무엇 때문에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것인지 아직 노동자운동은 진중하게 토론해 오지 못했다. 오늘의 논의를 통해 노동조합이 정치비판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포퓰리즘은 노동자가 지향하는 변혁적 정치이념과 명확히 다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질서의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단기간의 인기 영합을 위해 대중의 즉흥적 감정을 조장하는 정치행태이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통해 임금노동이라는 자본주의 구조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지향하고 있다면, 포퓰리즘은 선심성 현금 살포를 통해 임금노동체계를 부정하고 단기 지지를 호소하는 전략이다. 한국사회의 포퓰리즘은 386세대에 의해 진보주의로 포장되어 노동자운동을 포섭해왔다.
문재인 정부는 공수처와 검경수사권 조정, 법무부의 강화, 권력형 비리 수사에 대한 사법 방해 등 포퓰리즘 정치를 통해 체제의 최소한의 민주성마저 퇴행시키고 있다. 자유주의에 훨씬 미달하는 민주당과 집권세력의 이념적 결함과 자본주의 경제 근간의 작동원리에 대한 경제학적 무지는 각종 제도와 정책에서 일관성 없고 단기적인 대책을 쏟아내 해당 주체들 간의 갈등과 대립을 촉발한다. 집권세력의 포퓰리즘은 사회를 끝없이 보수/개혁의 진영논리로 나누고 이익추구와 갈등을 벌이는 가운데 끊임없이 지지층을 결집해 지지율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진보, 정의, 개혁, 공정함”과 같은 보편적 시민의식은 혼란에 빠져있다.
포퓰리즘에 가장 취약하고 불리한 집단은 노동자들이다. 포퓰리즘이 나누는 선악의 기준은 옳고 그름과 같은 정의의 가치가 아니라 소위 목소리가 큰 집단, 사회적 영향력이 큰 세력의 지지 여부다. 따라서 노동자가 노조를 통해 사회구조의 부당한 모순을 정당하게 제기한다 해도 이러한 목소리는 정치적 손익 계산에 따라 언제든지 배제될 수도,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스스로 경제적 이익집단으로 전락하여 여타의 세력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 이 시각에도 반복되고 있다.
정치 위기와 노동자의 이익집단화
노동조합 운동이 자본주의적 정치,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는 순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으로 전락한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의 대표적 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을 찬동하며 최저임금 만 원 요구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또 공약 1호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정책에 조응하여 ‘제대로 된 정규직화’ 투쟁을 이어왔다. 민주노총은 정부의 이런 정책들이 보수세력보다 상대적으로 선의의 개혁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저임금과 비정규직, 실업 문제 그 무엇도 개선되지 못했다. 노동자와 자영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취업자와 실업자 사이의 극심한 갈등과 대립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는 정책 결정의 근간이 되어야 할 한국경제의 저성장-인구감소라는 경제위기, 노동시장 양극화와 저임금 구조가 작동하는 자본과 노동의 구조적 특성, 비정규직은 왜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을 무시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단기적으로 충족할 만한 정책으로 지지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는 노동조합이 경제적 실리를 관철하려는 이익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다. 2000년대 민주노총이 저임금과 불완전 취업 노동자의 고통을 대변해 투쟁해온 비정규직 운동은 개별 사업장의 현안을 넘어서는 경제 구조적인 문제로 노동자운동이 체제를 비판하는 사회적, 정치적 의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이 의제를 수용해서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실적 위주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노동조합은 이 문제를 정규직-비정규직 격차라는 사회적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개별 사업장 투쟁을 통해 최대치의 이익을 얻으려는 조합주의적 대응에 매몰된 것이다.
노동자운동이 문재인 정권의 포퓰리즘 정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단호히 분별 정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진보’로 간주하는 관성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범진보, 개혁진영과의 정치적 연대를 실용적으로 활용해왔기 때문에 이런 관점이 발생했다. 민주노총은 진보정당이나 야권연대와 같은 정치방침을 통해 기업별 노조의 실리적 경제투쟁과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범진보 운동의 일부로 조직해왔다. 사업장에 갇힌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 정치적 비판의식이 없어도 기업으로부터 요구를 관철하는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이 역시 민주노총 운동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전투적 경제주의적 경향은 반보수포퓰리즘 개혁 의제들을 활용한다. 이제 공공성이나 노동 개혁, 민주주의와 같은 진보적 의제들은 최대치의 경제이익을 요구하는 투쟁의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최저임금인상이나 정규직화 정책, 공공의료 정책과 같은 포퓰리즘적 정책들에 대해 운동진영은 이 정책들의 경제적, 역사적 맥락에서의 실효성과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가능성 유무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선한 의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추상적 언사의 포퓰리즘 진보개혁 의제들은 개별 노동조합의 현안 투쟁의 명분과 목표가 되다.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합리적 비판이 없으니 노동조합 운동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와 구별되지 못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를 쟁취하는 투쟁의 방향은 포퓰리즘 정책을 더 왼쪽으로 급진화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현실적 개혁 방향이다. 그러나 진보로 위장한 각종 의제에 대해 노동조합이 이익추구 집단에 머물러 있다면 다른 개혁의 방향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업장 내 경제투쟁에 가로막힌 계급적인 정치지향에 기반해 문재인 정권의 포퓰리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반-포퓰리즘 투쟁, 어디에서 어떻게?
오늘날의 주류 사회운동은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기능을 상실했다. 민주노총은 오랜 시간 동안 반보수, 개혁 세력의 일원으로 주류 시민사회단체의 정치적 입장에 부화뇌동했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시민사회운동진영은 박근혜 촛불집회 때의 적폐청산이라는 낡은 구도를 여전히 진보의 출발점으로 인식한다. 문재인 집권 3년이란 시간동안 민주노총은 대통령권력의 비대화, 행정부의 권력독점, 집권세력의 사익추구(부패비리), 의회주의와 법치의 파괴에 대해 전혀 비판하지 못했다.
그동안 민주노총의 사업 방향에는 반보수 개혁진영의 정치적 요구를 관성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검찰개혁을 필두로 한 개혁 이슈들에 대한 인식은 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민주노총 내에서 최소한의 정치토론조차 진행되지 못한다.
문재인 정권의 포퓰리즘 정치에 대해 노동조합이 비판적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이 정치적 입장을 세울 때 참여연대나 민변과 같은 주류 시민운동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검찰개혁, 권력 측근의 비리 의혹, ‘역사보안법’, 강제 징용, 위안부 배상 운동 등의 사회문제에 대해 주류 시민운동의 담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운동 스스로 역사를 인식하고 지식을 학습하며 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권의 포퓰리즘의 결과로 청년세대 집단들이 소위 “공정성”을 제기하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 조국 사태 당시 자녀 입시 비리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촛불집회나 “인천국제공항(인국공) 사태”, 즉 공기업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중단하라는 취업준비생들의 청와대 청원 논란, 그리고 최근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은 기회의 평등, 공정/불공정의 쟁점을 제기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나 진보진영은 문재인 정부의 시각을 공유하며 정부의 피아 구분선을 따랐다. 즉 친정부적 입장과 반정부적 입장 간 진영 논리에 스스로 휘말리면서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지 못했다.
최근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논란이나 의사파업에서, 민주노총을 포함한 진보진영은 문재인 정부의 개혁정책에 찬동했다. 물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노동자나 의사가 제기한 공정과 평등은 매우 협소한 시야에 갇힌 것이었고, 결국 자신의 손익 문제를 따진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이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보수세력의 정치공세로 규정하거나, 또는 사회의식이 부족한 집단이기주의로 치부하는 한, 진보개혁의 진영논리에 갇혀, 비판적 사고가 멈추게 된다. 문재인 정권 개혁에 일말의 진정성이 있다는 환상을 고수한다면, 사태의 돌파구를 열 새로운 대안을 찾을 노력을 방기하게 된다. 공공부문의 제한된 일자리 경쟁이 노동의 양극화에 있는 문제라면, 한국사회 최고의 임금과 고용을 보장받고 있는 민주노총 주력의 기업노조는 인국공 사태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어떤 대안을 세워야 하는가? 절체절명의 코로나 2차 대유행 국면에서 지지율을 높이려 공공의료를 앞세워, 실효성도 검증되지 않는 정책으로 의사집단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정부의 무책임성을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하지 않는가?
나아가 한국 사회 경제, 정치 사회 질서는 누구에게 유리하게 어떤 구조로 작동하고 있는가? 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어떤 문제가 누구의 주도로 해결되어야 하는가? 사업장을 넘어선 정치적, 사회적 투쟁은 왜 민주당과 구별되지 않는 ‘촛불 항쟁’으로 수렴되고 말았는가? 노동조합운동이 포퓰리즘에서 분리되려면, 노동자 스스로 정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사회구조를 올바르게 비판을 하기 위한 지적, 윤리적 질문들이 필요하다.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 연대임금-연대고용
구조적 위기의 시기, 노동조합은 자본주의를 넘어 대안 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적 요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노동조합이 변혁의 이념적 지향을 실현하는 유력한 경로로 연대임금-연대고용을 제기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의 임금 양보, 정규직 희생 강요가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만약 임금 격차를 줄이는 합리적인 해법 수준 정도에서, 고임금 노동자의 도덕적 양심을 촉구하고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단기적으로 구제하는 정책 정도로 연대임금을 사고한다면 이러한 비판은 일견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노동조합운동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 변혁의 구체적인 난제는 생산과 분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다. 생산력 격차에 따른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노동자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이행의 첫 번째 관문일 수밖에 없다. 주지하듯이 지금은 자본 스스로 체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최종적 위기의 시간이다. 자본주의의 취약한 모순에 대해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노조라는 경제적 조직이 변혁을 위해 수행하는 특수한 실천방식으로 연대임금, 연대고용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연대임금은 아름다운 이상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 중 하나의 방법이다. 가령 노조가 연대임금을 통해 원하청 간의 생산성 격차에 따른 임금 격차를 축소한다면, 자본이 하청기업의 저생산성을 해결할 방법을 찾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는 현실적인 힘으로 작동하여 자본이 하청기업에 대해 저임금 단가 경쟁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또 공공기관 고임금 임금체계를 변화시키는 노조의 연대임금은 실업난 속에서 국가에 양질의 일자리 확대정책을 강제할 수 있는 사회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시도들은 체제의 위기를 인식하고 대안적 사회를 준비하는 노동자 계급의 부단한 혁명적 노력이다.
그러나 연대임금-연대고용이 의미가 있다고 해도 누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 정치,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노동자의 시민적 의식이나, 변혁적인 지향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경제적 사익추구 집단에서 과감히 벗어나, 사회변화의 필요성을 함께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정확히 어떤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인가?
우리가 개별 사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해 임금투쟁을 하는 이유는 회사의 이윤을 다수의 노동자가 공동으로 생산했다는 상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노조는 회사에 정당한 이윤 분배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성별, 직종별, 업무별로 다양한 기여도 차이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대항하는 강력한 힘을 모으기 위해 공동요구와 공동투쟁을 조직한다. 연대임금 연대고용은 이러한 민주노조의 경험을 국민경제 차원으로 확대해서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즉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부와 축적에 국민경제에 참가한 모든 노동자가 공동으로 기여한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업별로 존재하는 생산성 격차, 특히 저생산 기업의 존재를 묵인하며 저임금 노동자가 확대되는 현상을 방조한다던가, 반대로 고생산성 부문이 격차 이상의 임금(지대)을 받아 계급 내부의 격차를 스스로 극대화하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지금 시기 연대임금은 재벌 대기업, 공기업 노조를 비롯한 기업별 노조의 임금체계를 변화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업별 노조의 임금극대화 전략은 산별노조와 총연맹의 중앙교섭을 통해 폐기되어야 한다.
금속노조는 제조업의 산업적 평균임금을 중심으로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임금체계 개편을 시도할 수 있다. 제조업 장시간 노동에 대한 임금체계 중 수당, 성과급 체계가 기업별 편차에 따른 격차를 확대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산별노조가 기업별 노조의 임금총액을 관장하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제조업 임금체계를 기본급 중심으로 개편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는 금속산업 최저임금을 매개로 한 통상임금 범위를 확대하거나, 각종 수당과 성과급의 지급방식을 조정하는 방안 등을 검토해 볼 수 있다.
공공운수노조는 공공기관 정규직의 연공급체계가 현재의 저성장, 저인구 시대에 지속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조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속에 따라 가파르게 상승하는 연공급 커브, 피라미드식 임금형태가 공공부문 평균 임금체계로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산별노조 내에서 충분히 합의된다면,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에 있어 연공급 임금체계만을 목표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산별노조가 주도하는 초기업적 표준임금체계를 검토할 수 있다. 연대임금에 대한 조직적인 합의, 공동의 인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임금체계가 임단협의 문제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합원들과 함께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설노조에는 경제위기 시기 고용을 둘러싼 노동자 내부 갈등을 조정하고 보편적 고용기준을 확립하는 제도적 기준을 마련하는 과제가 있다. 건설업의 도급과 임시고용 구조는 고용 그 자체에 대한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극대화한다. 노조로 조직되지 않은 부문에서는 도급(성과급) 제도를 통해 노동력 지출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고(실질적 포섭), 노조로 조직된 부문에서는 고용기회를 두고 노동자 간 경쟁(형식적 포섭)이 분출한다.
건설산업이 경기순환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성격이 있다고 하여도 건설업 자체가 노동력의 집중적인 투입이 감소하는 성숙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건설 수요는 기본적으로 다른 산업의 영향을 받는 파생수요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성장 국면에서 고용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설노조가 현재 포괄하고 있는 노동자의 고용기회 확대만을 사고한다면 산업적 차원의 노동력 공급을 관장하는 힘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직종과 건설업 전체의 조직화를 목표로 해야 하는데, 이는 기존 포괄 조합원 및 직종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극복해야 한다.
현재 코로나 상황에서 연대임금의 노력은 국민경제적 차원에서의 고용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대량실업에 대응하는 노동자 계급의 요구는 전 산업적 고용안정을 목표하는 거시경제 정책에 있다. 총연맹과 산별노조가 사회적 협의를 통해 수행해야 할 일이다. 특히 총연맹이 경제학적 지식을 통해 새로 혁신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코로나 위기, 총연맹 운동의 지향
코로나 고용위기에 대해 민주노총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역할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노총이 왜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상태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앞서 제기한 두 가지의 쟁점, 민주노총의 기업별 노조와 총연맹의 난점, 그리고 포퓰리즘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운동의 정치지향이라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않는 한 앞으로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조의 계급적 단결의 노력이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거대한 정치, 사회운동의 출발지점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다. 위기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우리는 현실의 난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민주노총과 총연맹이 혁신하여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한다.
먼저 민주노총의 정치적, 경제적 지향을 조직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권과 집권세력 및 주류 시민사회단체들의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단호한 비판과 정세 토론이 동반되어야 한다. 민주노총 및 산별노조 강령을 화두로 하여 노동자운동의 변혁적 세계관에 대한 대중적 토론을 준비하자.
둘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이행과정을 의미하는 노동조합의 연대임금, 연대고용 전략을 전면화하자. 기업별 노조의 임금체계 문제에 대한 조직적,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총연맹과 산별노조로 임금교섭의 권한을 확대하고 기업별 노조의 교섭 권한을 제한하는 구조적, 제도적 변화를 시도하자.
셋째, 총연맹의 정책, 교육 역량을 새롭게 강화해야 한다. 총연맹 스스로 사회적 총자본의 운동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질서를 인식하고 경제학적 지식을 학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국민경제의 거시적 지표와 재정·고용정책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연대임금과 연대고용이 가능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생산하고, 기업과 산업별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중앙교섭의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