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김영삼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

왜 통일운동은 1990년대 탈냉전기에 오히려 위기에 빠져들었나?  

임필수 | 계간 사회진보연대 편집장
지난 호는 한반도에서 탈냉전을 거부한 것이 누구인가, 미국과 한국인가 아니면 북한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필자는 1990년대 북한의 식량난, 경제난 역시 북한이 탈냉전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거부하면서 나타난 극단적 사례라고 보았다. 나아가 NL-통일운동은 관성대로 북한의 정치경제 체제를 두둔하면서 한반도 핵 위기와 북한의 경제난을 동시에 발생시키는 북한식 악순환 메커니즘에 대해서 침묵했으며, 이러한 침묵, 몰인식이 1990년대 통일운동의 대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1990년대 김영삼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에는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통일정책을 비교해 보면서,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 김대중 정부는 성공이라는 통념이 과연 정당한 것이냐는 문제도 다뤄보겠다. (다음 호에서 연재의 마지막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대북정책과 통일운동을 다룰 것이다.) 
 

1. 김영삼 정부 시기 통일운동: 1993~1997

 
1992년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가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33.8%,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16.3%를 얻었으며 민중후보(무소속)로 나선 백기완 후보가 1.0%(23만여 표)를 얻었다. 민중운동은 대선방침을 두고 다시금 갈라졌다. 다수파가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으나, 김대중 후보는 지난 1987년 선거의 득표율 27%보다 다소 많은 표를 얻었을 뿐 낙선했다. 백기완 후보의 득표율 역시 미미했다. 민중운동은 또다시 거대한 패배감에 휩싸였고, 김영삼 대통령의 등장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문익환 목사의 생각은 달랐다.
 

1)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통일운동의 인식 차이  

문 목사는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임수경 씨와의 인터뷰에서, 3월 6일 사면조치에 따른 출소 후 “김영삼 정권은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했다. 즉 “김영삼 대통령도 42%의 지지를 받았잖아. 영광스러운 대통령을 만들 때만이 우리도 영광스럽게 살 수 있어. 김영삼 정권 5년이 실패한다면 그건 민족사의 실패야.” 문 목사는 이런 의견이 재야로부터 오해를 받을 소지가 많지만, 오히려 논란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임수경 씨는 기사에서 스스로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당시 재야의 일반적 인식은 김영삼 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문 목사는 1993년 7월의 인터뷰에서도 3월에 밝힌 입장을 재확인하며, “87년 대선에서 통일문제에 대해 부정적·소극적이었던 김영삼 씨가 통일문제에 상당히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국보다 민족이 앞선다고 말한 바나, 북미 긴장이 고조될 때 한승주 외무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북한에 대한 무력제재에 반대한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김영삼 씨가 임기 내에 국가연합을 실현하겠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진전”이라고 덧붙였다. 문 목사는 북측의 ‘단계적 연방제’, 즉 남북 두 자치정부가 군사, 외교 권한을 갖는 통일이 국가연합과 거의 동일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남측의 국가연합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공통점이 있다는 언급을 미리 지적한 것에 다름아니다. 반면 “통일 논의를 관이 독점하고 민의 통일운동을 반국가적인 것으로 탄압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결국은 민의 통일운동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문 목사는 “정부 내에서 개혁과 통일을 거스르려는 수구세력들이 조직화되지 못하도록 김영삼 정부를 밀어줘 힘을 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93년 범민족대회에 대해서도 “문민정부도 들어서고 했으니 정부도 참여하고 보수적인 사람도 같이해 명실상부하게 평화적인 범민족대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 목사의 입장은 조만간 있을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 제안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인터뷰를 볼 때, 1993년 3월 북한의 NPT 탈퇴를 계기로 폭발한 한반도 핵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아마도 6월 북미협상의 결과물인 ‘공동발표문’을 통해 북한이 NPT 탈퇴를 유보하면서, 북한 핵 문제가 조만간 해결되리라는 상당한 낙관론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통일운동 전반이 문 목사와 의견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학생운동의 강경파는 상당한 인식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김영삼 대통령은 3월 18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려 했으나 대학생들이 이를 막기 위해 묘역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남총련)이 주도한 ‘쇠파이프 시위’로 보도되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1993년 11월 2일에는 역시 남총련이 ‘김영삼 정부 최초의 화염병 시위’를 전개했다. (10월 28일은 동두천에서 윤금이 씨가 미군에 의해 살해된 지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남총련은 이에 맞추어 반미투쟁 기간을 설정했고, 1993년 최초의 화염병 시위가 광주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김영삼 정부 내내 강경파가 주도하는 학생운동과 정부 간 물리적 충돌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2) 김영삼 정부 이후 첫 번째 범민족대회 (1993년) 

그렇다면 1993년 범민족대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실제로 전개된 양상을 보면, 기존 범민족대회와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북한은 범민족대회를 북한의 입장을 선전하고 남한 정부에 공세를 가하는 장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한국 정부는 정부 간 공식 대화 제의가 북한의 거부로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범민족대회가, 북한의 정치적 주장을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될까 우려하면서 대회를 불허했다. 실제 북한은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총리회담 개최 제안(5월 20일)이나 핵통제공동위원회 개최 제안(8월 4일)을 모두 거부했고, 미국과의 회담을 추구하는 이른바 ‘통미봉남’ 정책을 구사 중이었다. 

차이가 있었다면 남측 통일운동이 정부와의 직접적 충돌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대회를 합법적, 평화적으로 진행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주한미군 철수와 같이 민감한 주장을 유보하는 대신, 남북이산가족찾기 사업과 같이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업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이는 문 목사의 정세인식을 반영했을 것이다. 반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내 일부를 포함해 강경파는 범민족대회 추진본부가 본연의 범민족대회를 축소,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일부 행사를 취소한 것은 ‘개량주의’라며 반발했다. (한총련은 전대협을 계승하며 1993년에 출범한 조직으로, 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경과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북측의 동향을 보면, 김일성 주석은 1993년 4월 7일 ‘조국의 통일을 위한 전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제시했다. 또한 대남 4대 요구조건으로 ① 외세의존 정책의 포기, ② 주한미군 철수 의지 표명, ③ 외국군대와의 합동군사훈련 중지, ④ 미국 핵우산으로부터 탈피를 내걸었다. 이를 반영하여 4월 29일 범민련과 범청학련의 북측본부는 한국 정부에 4개항에 대한 태도 표명을 촉구하기로 했다. 또한 8월 15일에 4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한편 5월 29~30일 북경에서 열린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에는 남측 대표가 참석하지 못했지만, 범민족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남한 통일운동에서 범민련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분명히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문익환 목사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범민련이 북쪽에 끌려다닌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남측은 서울에서 의장단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공동의장단 회의는 남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경에서 열렸다. 1990년 베를린 3자회담에서 남·북·해외 대표는 명칭에 ‘연합’이라는 표현은 남겨두되 실제로는 협의체 방식으로 운영하자고 합의를 했었다. 그런데 남측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행동은 협의체적 운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문 목사는 이를 계기로 남·북·해외가 함께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한 북이나 해외가 범민련 활동을 남한정부에 대한 투쟁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고도 했다. 북경회의 이후 문 목사는 범민련으로는 안 된다며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게 된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한편 남측의 범민족대회 준비는 7월 3일, 남측추진본부 결성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본격화했다. 준비위는 범민족대회를 앞두고 8월 7일부터 13일까지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통일문화대축전’을 연다고 발표했다. 예컨대 문 목사는 장기복역 중 배운 한의술로 ‘통일한의원’을 열고, 민변은 국가보안법 상담을 하는 ‘통일 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민속놀이 행사나 남북우수영화제를 연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또한 8월 15일 서울에서 개최될 4차 범민족대회에 북측인사가 참가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통일원 장관에게 발송했다. 하지만 7월 29일 관계장관회의에서 범민족대회 불허방침을 밝혔다. 남북대화가 단절되어 있는 상황에서 범민족대회 개최는 시기상조라면서 기존의 대화창구 단일화 입장을 고수했다. 

범추본 준비위는 7월 30일 35개 단체 대표와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에 ‘제4차 93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결성대회’를 열고 범민족대회장으로 문익환 목사를 선출했다. 상임본부장은 강희남 목사가 맡았다. (문 목사가 범민족대회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이번 4차 대회가 처음이었다. 그 이전에는 대회 기간에 항상 감옥에 있었다.) 

범추본 남측본부는 정부와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8월 3일, 범추본은 정부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대회를 평화적으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먼저 정부가 북측 대표의 참가를 끝내 허가하지 않으면 남·북·해외 대표가 참여하는 범민족회의를 제외한 나머지 행사라도 평화적으로 진행할 것이며, 나아가 북측대표와 접촉하기 위해 판문점행을 강행하거나 3국을 통해 접촉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북측본부의 대응은 훨씬 강경했다. 북측은 한완상 통일원 장관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내 실무회담 대표자의 판문점 통과와 신변안전 조치를 취하도록 다시금 요청했다. 실제로 8월 5일 3인의 대표가 판문점에 도착했으나, 한국 정부의 불허로 입경하지 못했다. 8월 5일 북한은 13일에 판문점을 거쳐 범민련, 범청학련 대표 300명을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역시 13일 10시 판문점 앞에 도착해 판문점 통과를 요구하고 집회를 개최했다. 또한 북한 기독교연맹 서기장 고기준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권호경 총무 앞으로 보낸 전화통지문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추진 중인 남북인간띠잇기대회를 4차 범민족대회와 공동으로 개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부의 대응 역시 강경했다. 8월 10일 대검 공안부는 범민족대회를 불법집회, 시위로 규정하고, 추진본부가 대회를 강행할 경우 주동자를 포함한 관련자 전원을 사법처리키로 했다. 또한 검찰은 범추본의 이적성 여부를 면밀히 검토할 것이며, 불법단체로 규정한 ‘범민련 공동사무국’과의 팩시밀리 교류, 불법모금행위도 엄단한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은 연세대 주변에 전의경 173개 중대, 2만여 명을 동원해 원천봉쇄한다고 밝혔다. 

한완상 통일원 장관은 8월 13일 범민족대회 관련 담화문을 냈다. 먼저 “북한측은 냉전적 통일전선전략을 버리고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개선을 위해 책임있는 당국 간의 대화에 성실하게 응해야 할 것”라고 촉구했다. 또한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은 어디까지나 헌정질서에 기초를 두고 실정법 테두리안에서 정당하고 질서있게 추진돼야 한다”고 전제하며, “범민족대회는 순수 민간 통일운동과는 거리가 먼 정치행사인 만큼 정부는 이 대회를 불허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남북인간띠잇기대회는 통일문제 등 정치문제를 협상하자는 운동이 아닌 민간차원의 자발적이고도 평화적인 통일운동”이라면서 허용한 배경을 밝혔다. 

하지만 범추본은 계속 충돌을 피했다. 범민족대회는 장소를 한양대로 옮겨 진행되었다. 범추본은 14-15일 양일간 대회 기간 중 가두진출은 시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으며, 또한 북측본부와의 전화회담이 실정법 위반임을 감안해 취소하고, 그 대신 팩시밀리를 통해 북측 회의 결과를 통보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가두진출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약속대로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공식 폐막식을 갖고 공식일정을 끝냈다. (그런데 대회 후 한총련 소속 대학생 8천여 명은 대학로, 서울역 등지에서 산발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다만 큰 충돌은 없었다.)  

그런데 남측본부가 채택한 결의문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결의문은 한반도 핵 문제에 대해 “핵 문제를 빌미로 한 외세의 부당한 내정간섭은 중지되어야한다”는 언급이 있었을 뿐이다. 이와 비교하여, 1991년 2차 범민족대회의 남·북·해외 결의문을 보면, “우리들은 한반도를 비핵화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여나갈 것이다. 우리나라의 비핵화는 민족의 사활과 관련한 중대한 문제이다”라며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명시되었다. 또한 1992년 3차 범민족대회 서울 결의문에도 “남북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의 조속한 이행”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의 핵 개발 의혹과 NPT 탈퇴 선언이 촉발한 핵 위기 이후 오히려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또한 1993년 남측본부 결의문에서는 “남북합의서 실천은 어떠한 이유로도 유보되어서는 안된다”면서 “남측에서는 남북합의서의 국회동의절차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했으나,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라거나, 남북이 비핵화를 상호 검증하기 위해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개최하라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 즉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이라는 문제는 갑자기 사라진 셈이다. 

한편 범민족대회와 구분되는 기독교 통일운동도 1993년부터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평화통일희년준비위, YMCA, YWCA, 95 민족통일 희년대성회 등 광범위한 기독교단이 참여하는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남북 인간띠 잇기 대회’가 열렸다. 
 
1993년 8월 15일 오후 독립문에서 임진각까지 48㎞ 구간을 손에 손을 잡고 연결한 6만여 명의 ‘남북 인간띠 잇기 대회’ 참가자들이 임진각 망배단에서 북녘땅을 향해 오색 띠를 치켜들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남북 교회 대표자들은 1986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선으로 처음 만났고, 1988년에는 1995년을 ‘평화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1989년부터 8·15 직전 주일을 공동기도주일로 정했다. 그러다가 1993년 4월 19일 한국교회협의회가 남북 인간띠 잇기 대회를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범기독교적인 ‘평화통일 희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대회를 준비했다. 1995년 한라에서 백두까지 잇는 평화의 통일의 인간띠를 만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1단계 사업으로 우선 서울의 독립문부터 판문점까지 총 61km의 길을 인간띠로 잇겠다는 목표로 출발했다. 7월 19일에는 추진본부가 공식적으로 발족했고, 여기에 YMCA, YWCA, 흥사단,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천도교 등 100개가 넘는 민간단체가 참가했다. 대회장으로는 강원용 목사가 선출되었다. 북측과의 협의는 세계교회협의회 채널로 이뤄졌다. 또한, 통일원, 문화체육부, 기독교방송, 한국방송공사가 후원의사를 밝혀 ‘문민정부’의 긍정적 지원을 받았다. 북한은 인간띠 잇기 대회와 범민족대회를 병행해서 추진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어렵게 되자 남북 공동 개최를 막판에 거부했다. 결국 남쪽에서만 46개 개신교 교단과 55개 사회단체, 그리고 여러 종교단체가 참여하는 행사로 진행했다.

실제로 통일원이 발간한 『93 통일백서』는 ‘다양한 민간통일운동의 전개’라는 항목에서 ‘통일의지 확산을 위한 대중행사’로써 인간띠 잇기 대회를 주요하게 소개했다. 이러한 흐름은 ‘범민족대회’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기독교 통일사업이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993~94년 새로운 통일운동체 결성 논쟁 

문익환 목사는 1993년 6월 범민련 남측준비위원회 회의석상에서 통일운동을 대중적으로 새롭게 전개하기 위해 북과 해외에 범민련 해소를 제안하자고 말하였다. 범민족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이러한 제안은 일파만파의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남측준비위는 이 논의를 정리하기 위해 ‘9인 수권위원회’를 구성했다. (8월 범민족대회에서 범민련의 해체와 새로운 통일운동체 출범을 선언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있었으나, 반대 의견이 존재했고 논란은 더욱 커져갔다.)  

당시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이승환 정책위원장은 《월간 말》 1993년 11월호에 기고한 「범국민 통일운동체의 건설을 제안한다」는 글에서 범민련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남쪽 통일운동 세력 내에서 폭넓은 합의가 부족했다. 남측 통일운동의 다수에서는 남·북·해외 상설 통일운동체가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당장 연합적 수준의 조직을 결성하기는 어렵고 회의체 수준에서 시작해 단결의 수준을 높이자는 의견이 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칭이 연합체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1990년 베를린회담에서 협의체 수준으로 위상을 조정하고자 했지만, 1993년 범민족대회가 준비되는 과정에서 북측의 독단이 다시금 드러났다.

둘째, 그러다보니 북측과 직접 연합하는 조직을 감당할 만한 남측 대중조직이 별로 없었다. 그 결과 1차 범민족대회에 참여했던 단체 중 전대협(훗날 한총련)과 전청대협(훗날 한청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범민련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반영해 범민련은 1993년 12월, 단체가입 원칙에서 개인가입 원칙으로 내규를 개정했다.) 

셋째, 범민련 남측준비위 결성 직후부터 불법단체라는 규정과 그에 따른 탄압으로 어려움에 처했고, 이를 대중적으로 돌파하지 못함으로써 범민련은 조직적 대표성보다는 개인적 결단으로 참여한 개별 인사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나아가 범민련을 통한 남북교류가 철저히 봉쇄당하는 것도 큰 문제다. 따라서 한총련, 한청협의 남북교류 사업조차 범민련이라는 틀 밖에서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남쪽의 통일운동 세력을 총망라하는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베를린 3자합의의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는 어떤 경로로 건설되었나? 1993년 9월 15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은 한청협, 한총련이 제기한 새로운 운동체 건설 제안을 논의하기 위해 ‘통일운동조직 강화발전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1993년 7월 1일에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종협)가 결성되었는데,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의 진보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공동대표는 김상근 목사, 지선 스님, 함세웅 신부, 김현 교무였다.) 1993년 10월 23일 전국연합과 종협, 두 갈래로 이뤄진 준비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대표: 박순경)이 결성되었다. 

범민련과 새통체의 갈등을 조정해보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예컨대, 1993년 12월 3일, 홍근수, 윤성식이 주선하여 ‘평화통일의 대단결을 모색하는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새통체를 지지하는 문익환, 박순경, 이창복, 함세웅, 황인성과 범민련을 유지하자는 강희남, 윤성식, 이현수가 함께 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이견만 확인되었다. 강희남 목사는 김영삼 정부가 창구단일화와 흡수통일론을 주장하는 반통일세력이기 때문에, ‘합법’이라는 말을 하면서 통일운동을 할 수는 없다면서 범민련을 사수하며 정통성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나는 범민련 유지론의 주요 논자를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자통) 관련자라고 분류했다. 그렇다면 민자통은 어떤 조직인가? 민자통은 1988년 8월 5일에 창립된 단체이며, 1961년 2월 25일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재건한다고 밝혔다. 1961년의 민자통은 4·19 이후 재등장한 혁신정당 세력이 결성한 단체였으나 5·16 이후 포고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자사료관에는 ‘1988년 민자통 활동가들의 통일운동 및 사회운동 경험’(2014년 수집 구술자료)에 대한 간단한 해제를 볼 수 있다. 이 해제에 따르면, 구술에 응한 민자통의 활동가들은 북한의 지도성이 남한 통일운동의 중핵이라고 보았다. 북한의 지도를 수용하는 방식과 남한의 자율적 운동 전개에 대해서는 구술자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북의 지도성을 인정해야 된다는 입장은 일치한다. 그들은 새통체를 추진한 문 목사를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문 목사가 북한의 지도를 인정하지 않고 ‘느슨한 연방제’를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느슨한 연방제’는 북한이 스스로 제시한 입장이기 때문에 이를 문 목사의 과오로 돌리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즉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실질적으로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자통 인사는 그러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무시했다는 말이다.) 

남한 통일운동에 대한 북한의 지도성은 특정 인물이나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방송을 통해 발휘되었으나, 범민련 발족 이후에는 범민련 공동사무국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1989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1990년 범민련 실무회담 대표를 맡았던) 조성우 씨가 범민련 북측본부를 이기려 했던 태도는 북의 지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이므로 문제가 컸다. 또한 새로운 통일운동체 역시 남한만의 통일운동체이기 때문에 북한의 지도성이 관철될 수 없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이처럼 범민련 유지, 강화론도 완강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입장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 이 와중에 12월 19일 범민련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이 문익환 목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범민련운동은 삼발이처럼 남과 북, 해외 어느 한 쪽이 없이는 정립될 수 없는 숙명적인 일심동체의 운동”이라며 문 목사가 범민련에 남아 계속 활동할 것을 촉구했다. 그렇지만, 문 목사는 “세 지역의 사정이 너무 달라 각 지역의 통일체들이 좀 느슨한 관계로 맺어져서 서로 구속을 덜 받으면서 하나로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범민련과 새통체의 갈등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졌다. 범민련 쪽에서는 새통체 추진 인사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프락치라거나, 안기부의 첩자라며 비난하는 말도 나왔다. 그러다가 1월 17일, 베를린의 범민련 해외본부(의장 윤이상)에서 팩스가 왔는데, “새통체를 추진하는 사람 중에 김영삼 정부 프락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범민련 해외본부 인사가 “문 아무개는 김영삼 정권과 어울려서 흡수통일을 획책하는 스파이”라는 말을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1월 18일 문 목사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다. 1월 18일 점심 식사 중 문 목사는 범민련 소속 진관 스님에게 “내가 그래 스파이냐”하면서 화를 내게 되었는데, 이때 입에 든 음식이 식도가 아니라 기관으로 넘어가면서 급사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범민련과 새통체의 갈등은 문 목사의 사후에도 수그러들 수 없었다. 범민련 해외본부의 윤이상 의장은 1994년 12월 인터뷰에서 문익환이나 장준하에 대해 “결국은 돌 하나 쌓지 못하고 갔어요”라며 문익환의 통일운동을 격하했다.  
 

4) 1994년 주사파 파동 

한편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 중이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발표되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조문 파동’이 벌어졌고, 그에 이어 ‘주사파 색출 파동’이 벌어졌다. 

먼저 조문 파동을 보면,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조문 문제를 두고 국내 언론이 양분되었다. 한편에서는 정상회담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북한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여 조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편에서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조문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김 주석 사망 직후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전군과 경찰에 비상 경계령을 내렸으며, 조문에 대한 어떠한 발언도 모두 김일성 추종세력으로 규정하고 조의 표명과 조문 행위에 대해 사법처리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북한은 《로동신문》 논평을 통해 “남조선 당국이 조문단 파견을 가로막고 조전·조의는 고사하고 애도의 뜻조차 표시하지 않은 것은 상식 이하의 불손하고 무례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에 따라 남북관계는 냉랭해지고, 결국 김 주석 사후 새롭게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전남대 김일성 분향소 사건’이 터져나와 큰 충격을 주었다. 11개 중대가 7월 15일 전남대를 대대적으로 수색하는 과정에서 학생회관의 한 구석방에서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걸린 분향소를 발견했다. 나아가,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14개 대학 총장 오찬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의 발언이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즉,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다. 일부 학생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 가을에 또 이슈를 만들어 나올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와 미군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벌일 것이다. 북에서 이미 지시를 했다.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 사노청,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학생들은 팩시밀리를 통해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주사파의 배후에 사노맹이 있다는 말은 당시 운동 지형에서 상식 밖의 주장이었으므로, 대검 공안부조차 박홍 총장의 발언에는 ‘옥의 티’가 있다고 말했다.) 

전남대 분향소 사건은 학생운동 내에 주사파가 깊숙히 침투해 있다는 박홍 총장의 발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사안으로 비화되었다. 그에 따라 이 사건이 ‘주사파 색출’의 명분을 쌓기 위한 경찰의 조작이냐 아니냐라는 논란이 빚어졌다. 하지만 당시 《사회평론·길》의 취재에 따르면, 오히려 재야나 학생운동가들은 “아마 사실일 것”이라고 보았다. 학생운동 내에서는 주체사상파의 존재가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사안이었다. 

그런데, 여러 활동가를 인터뷰한 그 취재를 잘 보면, 그 시점에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NL 학생운동 내부의 노선 분화와 갈등을 포착할 수 있다. 취재에 따르면 1993년에 “학생운동 내에 주사[주체사상]를 한국화하여 보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를 정리하는 [곧 비판, 배제하는] 대대적인 사상작업이 있었다. 그 결과 올해 더욱 맹종적인 분위기가 득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사를 한국화하여 표현해온 정치집단을 비판하는 문서가 학생 사이에서 돌았다. 그 결과 그 집단은 거의 NL 주류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필자가 문건을 직접 구해볼 수 없으므로 ‘주사의 한국화’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북한이 아니라 한국 상황에 맞게 변형하거나,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뜻일 듯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표현한 ‘정치집단’이 누구인지는 필자가 정확히 알 수 없다. (1994~1995년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한총련, 한청협 내부의 노선 분화나, 심지어 민혁당 내부 논쟁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1994년 6월 17일, 남총련은 ‘UR(우루과이 라운드)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석하려 하면서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밤 11시쯤 광주 송정리역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위치에서 열차를 강제로 세운 뒤 탑승했다. 이들은 새벽 4시에 영등포역에 도착한 후 아침 6시에 홍익대학교 앞까지 진출한 후, 경찰과 충돌하여 40여 명의 경찰을 ‘인질’로 잡고 홍대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이날 홍대에서는 학생과 경찰의 ‘난타전’이 벌어졌다.

확실히 1994년부터 학생운동에서 ‘맹종적인’ 분위기가 더욱 강해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예를 들어 기사는 1994년 5월 조선대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 선언문이나 조통위 선언문은 “주사파 출신 선배들조차 경악시켰다”고 전했다. (이 문제는 뒤의 ‘한총련 혁신 논쟁’에서 다시 다룬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문제를 낳을 것인가? 앞에서 인용한 「문민시대의 화염병 반미 시위 오창규 남총련 의장의 항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나온다. 

(문) 학생운동에 많은 참고자료로 되는 한국민족민주전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에 [방송에서] 했던 내용이 전혀 다른 정세에서도 투쟁방법으로 제시하는 내용으로 나오더라는 예를 들면서, 그것이 얼마나 진지한 고민이 담긴 것들이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답) 한민전은 제가 보기에는 남한 내에 실재하지만 우리의 조건상 이북에 방송국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 내용은 어쩌다 흘러다니는 유인물에 담긴 내용을 통해 접한 경우밖에 없습니다만 원칙이 금방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에 1년 후에도 같은 내용을 방송할 수도 있다고 이해합니다. 

“어쩌다 흘러다니는 유인물”을 보았을 뿐이라고 답했지만, 사실은 녹취록이 조직적으로 유통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1994년 한총련 출범식 직전에 조선대 학교버스를 통해 물품을 운반하다가 잡힌, 출범식 기획위원인 학생 두 명이 한민전 중앙위 명의의 문건을 소지하고 있던 사건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인식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북한의 방송은 무엇보다 북한의 대남정책을 선전하는 매개이며, 따라서 남한 정세의 국면상 변화나 여론지형의 움직임에 대한 고려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정세는 불변’이라는 관점에서 맹목적 투쟁을 ‘원칙’으로 미화하기 시작하면, 한국의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사라지고 ‘정세돌출적’이거나 자기만족적인 투쟁만 배치되기 쉬울 것이다. 실제로 1994년에는 점점 더 정세돌출적인 한총련의 투쟁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언론에 ‘열차 탈취’라고 보도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5) 1994년 범민련과 민족회의의 최종적 분화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 흐름은 1994년 3월 25일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민족회의) 발기인 대회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연합은 민족회의와 범민련의 갈등이 파괴적 효과를 내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즉 ‘전국연합은 범민련의 의의를 존중한다’, ‘대중적 통일운동체(새 통일운동체)와 범민련은 긴밀히 협력하면서 통일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민족회의의 건설이 중단된 것은 결코 아니었고, 1994년 7월 2일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51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때에는 민중정치연합(민정련)이나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과 같은 ‘좌파’ 단체도 민족회의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민족회의는 준비 정도의 취약성과 내부 단체 간 이견으로 8월에 독자적인 행사를 치르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그에 따라 8월에는 범민족대회만 열리게 되었다. 이에 진정추와 민정련, 그리고 21개 총학생회가 범민족대회 불참을 선언하고 8월 13일 ‘진보,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기도 했다.
 
1994년 7월 2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가 시민, 학생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민족회의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1995년 통일 원년을 목표로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는 한반도 평화 실현 운동, 남북합의서 실천 촉구 운동, 남북 민간대화와 교류의 활성화를 실천 목표로 세우고, 남북한 간 군축 실현, 한반도 비핵지대화 운동,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 등을 실질적으로 펴나간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바로 이 1994년 범민족대회가 격렬한 충돌의 장이 되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을 지냈던 민경우 씨는 “2년 후 연대에서의 악몽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주석 사망 이후 공안정국을 주도한 김영삼 정부가 “범민족대회에 타겟을 두고 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범민족대회는 장소를 정하는 문제부터 어려움을 겪었는데, 각 대학 당국이 범민족대회와 통일학교에 대한 불가 방침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대회 장소는 건국대에서 서울대로 바뀌었고, 정부 당국은 대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경찰을 대규모로 배치했다. 대회장 진입부터 경찰과 충돌이 발생했고, 경찰이 학생을 연행하기 위해 학내로 진입을 시도하며 격렬한 충돌이 재연되었다.
 
1994년 5차 범민족대회
1994년 5차 범민족대회는 당국의 대대적인 진압이 있었다. 경찰은 8월 14일 오전 전경 7천여 명의 병력을 교내로 투입, 최루탄을 쏘며 해산에 나섰다. 이에 한총련 소속 사수대 1천여 명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격렬히 저항했고 학생과 경찰 2백여 명이 부상했다. 오후에는 경찰 헬기 5대를 띄워 범민족대회가 열리던 서울대 대학본부 앞 잔디광장에 최루액 4천여 리터를 뿌렸다. 학생들은 이에 맞서 소방 호스를 끌어내 공중으로 물대포를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6) 1994년 한총련 혁신 논쟁   

1994년 6월 남총련의 상경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홍대사태’, 7월 전남대 분향소 사건, 8월 범민족대회의 충돌을 겪으며 한총련 ‘혁신’ 문제가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운동 전반의 관심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총련은 1993년에 출범했기 때문에 1994년이 2기였다.) 당시 언론에 소개된 입장을 살펴보자. 먼저 한총련 2기 의장, 김현준(부산대 총학생회장). 

[질문] 한총련 활동 중에는 공안당국에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는, 국민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는 듯한 투쟁도 있지 않았습니까?
[답] 지난 번 서총련 간부들이 연행됐을 때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학우들이 파출소를 습격했습니다. 이런 유의 즉자적이고 감정적인 대응방식은 우리를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우리는 UR 국회비준 반대 투쟁과 남북정상회담 조기개최 촉구 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투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1학기를 겸허히 반성하면서 한총련을 혁신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PD 그룹의 인식은 어떠했는가? PD 학생운동 그룹에서 ‘한총련 혁신’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 역시 1994년 시점이다. 사실 한총련 결성의 결정적인 계기는 1992년 말 학생회선거였다. 이때 학생회 선거의 제일의 이슈는 1992년 대통령선거 방침이었다. NL 그룹은 범민주단일후보 지지, 즉 김대중 후보 지지를 내걸었고, 범PD 그룹은 민중후보 운동, 즉 백기완 후보 지지를 내걸었다. 학생회 선거 결과, 팽팽한 경합을 보이는 학교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NL 후보가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에서 대거 당선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서 전대협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한총련 결성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1993년 1기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비〔非〕NL, 즉 좌파 대의원은 전체 대의원 1,600명 중 270명 가량이었다. NL만으로 이루어진 간선 대의원이 200명 가량되므로, 직선대의원 중에서는 1,400명 중에서 270명으로 대략 20%를 차지했다.)  

전대협은 말 그대로 대표자, 즉 총학생회장의 협의체다. 반면 한총련은 총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이 당연직 대의원인 연합체다. 형식적으로만 보자면, 협의체는 협의를 통해 참가자가 모두 합의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인다. 그런데 연합체는 대의원대회 구조가 있고, 따라서 다수결 표결로 다수의 의견대로 운영할 수 있다. 앞에서 범민련이 협의체냐, 연합체냐라는 쟁점을 두고 한국 내 통일운동 내에서 의견이 갈렸다고 말했다. 만약 어떤 문제를 두고 남측의 의견이 북, 해외와 다르다고 할 때 협의체라는 규정이라면 남측의 의견에 반해서 어떤 문제를 결정할 수 없겠지만, 연합체라는 규정에 다르면 남측이 반대를 무릅쓰고 다수 의견 형식으로 어떤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다. 그런데 연합체라고 하더라도, 이런 사태가 반복되고 소수파의 상태가 굳어지면 소수파가 빠져나와버리고 연합체가 사실상 와해될 수 있다. 현실에서 보면 범민련이나 한총련이나 모두 이런 과정을 겪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범PD 진영은 한총련 출범 시점부터 ‘개혁’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보통 개혁이라면 출범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러 애초 생각했던 활동과 조직에 어떤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말이 나오는 게 자연스러울 터인데, 한총련은 출범 시점부터 개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왜 그랬나? 
 
1993년 김춘도 순경 사망사건
1993년 6월 12일, 연세대에서 열린 남북학생 예비회담 출정식 이후, 가두 진출과 충돌 과정에서 김춘도 순경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15일 부검을 실시했고, 부검의는 직접적인 사인이 외부에서 가해진 여러 차례의 충격 가운데서 특히 한 차례 강한 충격이 심장과 폐의 손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몽둥이로 맞은 자국, 발로 밟힌 자국이 있고, 흉골에 금이 가있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가해자 검거에 주력했지만, 재판 결과 직접적인 가해자를 밝히지는 못했다.

1993년에도 5월 한총련 출범식을 둘러싼 ‘폭력시위’ 문제가 사회이슈로 부각되었다. 한총련은 5월 27~29일 고려대에서 출범식을 열면서 과거 전대협과는 달리 모든 집회와 행사를 합법적, 평화적으로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5월 29일 서울시내 곳곳에서 쇠파이프가 등장하는 폭력시위가 벌어져 언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총련 대변인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중앙의 통제에 어긋난 일들이 발생했다”, “이것은 중앙의 지침과는 분명히 어긋난 것이었다”고 밝혔다. (즉 이는 한총련 내부에 투쟁방침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비친 셈이었다.) 게다가 6월 12일 연세대에서 열린 남북학생 예비회담 출정식 이후, 가두 진출과 충돌 과정에서 김춘도 순경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14일 한총련은 김춘도 순경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각 대학마다 분향소를 설치해서 고인에 명복을 빌겠다고 밝히기도 했으나, 5~6월 한총련 출범식과 남북학생 예비회담 출정식을 거치며 연이은 폭력시위와 경찰사망 사건은 한총련 출범 시점부터 학생운동의 ‘도덕성’이라는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대표자협의회라는 틀을 넘어 1,600명 규모의 대의원을 지닌 조직으로 외형적으로 팽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대의원대회를 경험해 보니 조직구조가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예를 들어 1993-94년 시점에 한총련 개혁방안의 하나로 ‘중앙집행부 실명 공개’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총련의 구조는 선출된 의장, 위원장, 또는 임원을 주축으로 지도부가 구축되고, 지도부가 집행부서를 임명,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수십 명 규모의 중앙집행부는 의장에 비해 3~4년 이상 나이가 많은 선배급 인자로 구성되어 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대의원대회〔간선제〕로 위원장을 선출했던 민주노총의 구조와 비교해보더라도 한총련의 구조가 기형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즉 대의원대회에서 선출된 지도부가 아니라, 그 통제권 밖에서 스스로 재생산하는 집행부가 실제적인 결정권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낳았다. 이는 곧 의장, 위원장은 매년 바뀌지만, 바뀌지 않는 집행부가 한총련을 실제 좌지우지함으로써 기존의 활동패턴을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였다. 

나아가 범PD 진영이 보기에 1994년 2기에는 더욱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첫째, ‘반미의 대결전 국면, 김영삼정부 타도 선언’이었다. 이미 1993년에 시위 도중 경찰이 사망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는데, 한총련의 YS 타도 선언은 이러다가 학생운동이 무너지는 대형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냐는 큰 우려를 낳았다. 설사 경찰 사망과 같은 극단적 결과는 아니더라도, 정권 타도 선언을 한 만큼 정부와의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한데, 과연 현실에서 대중이 이러한 투쟁의 불가피성을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상황이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나아가 2기는 1기의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 노선에 대해 “학우들의 생활, 학문의 요구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조차 식민지인 남한의 현실에서는 반민족적인 사대매국정권을 갈아엎지 않으면 안 된다. 정권을 바꿔야 무슨 권리이고 따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1기에서 제시한 교육대개혁, 부문계열운동, 민중연대 지평 확대와 같은 문제의식은 사실상 소멸하는 것이었다. 

둘째, 1994년 한총련 총노선은 한총련의 지도이념이 학우 중심 이념이며, 그 정수는 ‘한총련 최고대표자 사상’이라고 밝혔다. 

“한총련 최고대표자는 백만청춘의 자주적 이해와 요구의 유일한 체현자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며 백만청춘의 최고의사의 표현자이며 학우대중에게는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인 활동능력을 키워주는 백만청춘의 유일한 정치지도자 입니다. 대표자를 믿고 삶과 생활, 운명을 의탁하고 믿으면 삶은 개척됩니다.”   

이는 가히 한총련판 수령론이었다. 주체사상이 사람 중심의 이념이고, 그 정수는 수령론이라는 논리구조와 완전히 동일했다. 한총련 의장이 “백만청춘의 유일한 정치지도자”라는 것인데, 사실 4~5학년의 연배로, 나이나 경험으로 볼 때 또래의 친구거나 선후배인 어느 대학교의 어떤 총학생회장이 모든 대학생의 유일한 지도자이고, 대학생이라면 그에게 나의 삶을 의탁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뭐라 비판하기조차 민망한 낯뜨거운 얘기였다. (1994년 한총련 혁신 논란을 거치며 NL 학생운동 세력 중 일부는 ‘최고대표자 사상’을 폐기하겠다고 밝혔는데, 그렇지만 한총련의 의장 옹립 문화가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왜 1994년 시점에 ‘최고대표자 사상’이 제기되었냐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1993~94년을 거치며 범민련과 민족회의의 분화, 주체사상을 한국화하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다. 이런 조건에서 ‘최고대표자 사상’은 아마도 NL 학생운동–통일운동 내의 분화와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아가 한총련 대표자(의장)를 장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NL 내부 분파가 대표자의 권위로 노선 갈등을 잠재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떤 이유든 간에, NL 학생운동 내부의 노선 갈등을 퇴행적인 ‘대표자 사상’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비판과 반비판의 과정을 통해 운동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봉쇄했을 것이다.  

한편 1994년 시점에 <21세기진보학생연합>도 한총련 비판에 적극적이었다. 21세기진보학생연합은 보통 ‘비(非)주체사상파 NL’로 분류되는 ‘관악자주파’ 그룹의 후신인 생활진보대중정치대학생연합(생대련)과, 범PD 학생운동 그룹에 속했던 진보학생연합(진학련), 진보정치대학생연합(진대련)이 1993년에 통합하며 출범한 조직이다. 이 그룹은 ‘NL/PD 대립구도의 극복’을 중요한 방향의 하나로 제시했다. 당시 21세기진보학생연합을 대표했던 강병원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현재 민주당 소속 은평구을 재선 국회의원이다.) 

[질문] 한총련 주류도 ‘일반 학우들의 의식수준을 고려한 대중적 투쟁’을 줄곧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왜 그것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다고 봅니까? 
[답] 92년 대선 후 진보이념의 방황과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학생운동권의 입지가 축소될 것이라고 누구나 인식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한총련 1기는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라는 총노선을 설정했던 거죠. 그러나 그것은 구호로 그쳤을 뿐 구체적으로 실천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총련 2기는 1기의 총노선이 오류였다고 평가하고 ‘생활·학문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라도 투쟁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결국 ‘김영삼 타도’라는 구호까지 내걸었습니다. ‘당위’와 ‘정세의 요구’만을 우선시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요

또한, 그는 “한총련을 포함한 진보진영이 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제 진보진영 전체가 북한에 대한 입장을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 우리는 남한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개혁돼야 한다고 봅니다”라고 답했다. 

그렇지만, 이처럼 다양한 방향에서 한총련 혁신을 주장하는 흐름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1994년 말의 학생회 선거에서 NL 학생운동은 대체로 ‘현상유지’에 성공했다. 선거에서 학생운동 ‘색깔’을 빼고 ‘비운동권’과 유사해 보이는 선거캠페인을 채택하고, 조직력으로 승부를 거는 방식을 채택했다. 실제로 이때 선거에서 ‘비운동권’ 또는 ‘반(反)운동권’ 선본이 약진하기도 했다.  
 

7) 1995년 통일원년과 8·15 민족공동행사, 범민족대회 

통일운동 내부의 갈등은 ‘통일원년’이라고 말하던 바로 그 1995년의 8·15 행사에서 극적으로 표출됐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4월 22일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포함해 140여 개 사회단체가 참가하여 〈8·15 50주년 민족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도 참여했고, <한국민족예술총연합〉(민예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 <한국기자협회〉, <한국프로듀서연합회〉도 참여했다. 

그렇지만 남과 북의 민족공동행사 개최는 여느 해와 다름없이 난항을 겪었다. 북한은 1995년 1월 24일 <정당·사회단체 연합회의>에서 8·15를 남·북·해외가 공동으로 경축하고 이를 계기로 대민족회의를 소집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러한 북한의 제안이 남한 정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고 당국 간 차관급회담을 열어서 8·15 공동경축행사와 남북합의서 이행 문제를 논의하자고 역제안했다. 이때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는 타결되었으나, 1994년 김 주석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갑자기 중단된 후 남북관계는 도리어 조문 시비로 완전히 경색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 정부는 5월 16일 통일관계장관회의를 열어 판문점에서 공동예배를 포함해 공동집회 개최를 남북단체가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일체 허용하지 않겠으며, 인간띠잇기와 같은 대규모 옥외행사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국가보안법 철폐와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경우 단호히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민족회의는 8·15 민족공동행사를 통해 모든 민간통일운동을 단일한 대오로 묶고자 했다. 그러면서 범민련 남측본부가 다시금 범민족대회를 추진할 경우, 대중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범민족대회 개최를 반대했다. 그 근거는, 첫째, 1990년부터 다섯 차례 개최된 범민족대회는 범민련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대회가 아니라 전국연합을 비롯한 여러 단체가 치러낸 공동행사였다. 따라서 범민련이 어떤 행사를 추진한다면 그간 거족적인 행사로 추진되었던 ‘범민족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범민련 내부행사로 추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두 개의 대회, 두 개의 조직으로 통일운동이 분열했다는 혼란을 줄 것이다. 둘째, 민족회의는 전국연합이 충분한 논의를 거쳐 결성된 통일운동 조직이다. 범민련의 성원 다수가 전국연합의 성원이므로, 전국연합의 방침을 존중해야 한다. 

반면 6차 범민족대회를 추진하던 범추본은 8·15 민족공동행사 틀 내에서 범민족대회를 치른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8월 14일 오후까지도 6차 범민족대회 참가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짐으로써 성사 여부가 불확실했다. 그렇지만 14일 밤부터 범민족대회가 열리는 서울대에 집회 참가자가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8월 15일 민족회의 주최로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해방 50주년 민족공동행사’ 도중에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대거 행사장을 빠져나가 서울대에서 열린 제6차 범민족대회에 참가하면서 조직과 행사가 완전히 둘로 갈라졌다. 다만 1995년의 8·15대회는 공권력과의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정부 주도의 해방 50돌 경축 행사가 광화문 일대에서 대규모로 진행되는 조건에서 수만 명이 참가하는 통일행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는 불가능했다. 
한편, 한총련의 다수파는 범민련을 지지했고, 범청학련 축전의 성사를 위해 남한 학생대표를 북한으로 파견했다. 8월 14일 한총련은 범청학련 주최로 15일 판문점에서 열리는 민족공동행사에 남측대표로 참석시키기 위해 가톨릭대 이혜정과 인천대 정민주를 파견했다고 밝혔다. 대학생의 입북은 1989년 임수경, 1991년 박승희와 성용승, 1994년 최정남에 이어 네 번째였다. 그렇지만, 한총련 내부 혁신계열(일명 ‘사람사랑’)이 한총련 다수파인 자주계열의 이러한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반면 한총련 자주계열과 범민련은 범민족대회에 소극적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갈등구조는 점점 더 깊어졌다.

한편 1995년 11월 29일 보안수사대는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을 비롯해 29명의 간부를 연행했다. 이때 구속된 인사는 대부분 70~80대의 고령의 통일운동가였다. 이전까지 범민련의 일부 인사를 구속하거나, 범민족대회를 봉쇄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처럼 범민련의 중앙, 지역의 주요간부를 한 번에 대거 구속하는 사태는 처음이었다. 이는 범민련 자체를 와해시키려는 정부의 시도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김영삼 정부에 대한 범민련-범청학련(한총련)의 태도는 점점 더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8) 1996년 범민족대회와 ‘연대사태’ 

한총련 주류는 혁신 논쟁에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1995년 하반기 전두환·노태우 구속 투쟁(‘연희동 진격투쟁’)을 통해서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96년 4기 한총련은 ‘대선자금 공개, 김영삼 정부 퇴진’을 내걸고 김영삼 정부를 정조준했다. 

1996년 8월 12~20일 연세대에서 열린 7차 범민족대회와 6차 청년학생통일축전은 정부와 NL 학생운동의 충돌이 절정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족회의는 ‘통일운동의 지역화’를 모토로 해서 지역 동시다발 ‘평화통일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서울 대학로의 8·15 대회를 비롯해 약 30개 시군에서 대회를 치렀다. 

당시 정부의 범민족대회 방침이 강경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어느 학교도 범민족대회 개최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7월 말 연세대가 대회 개최를 내부적으로 결의하면서 대회가 본격 준비되기 시작했다.

1996년 범민족대회는 그 이전 대회와 몇 가지 점에서 양상이 달랐다. 첫째, 대회 주최 측은 경찰이 봉쇄한 대회장을 변경하지 않았고, 참가자는 예정된 대로 연세대로 진입을 강행했다. 그에 따라 8월 12일부터 대회장 진입을 목적으로 한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고, 이러한 충돌은 8월 15일까지 이어졌다. 둘째, 경찰은 8월 14~15일 여러 차례 연세대로 진입을 시도하며 대회를 강제 해산하려 했다. 셋째, 대회가 끝난 후 학생 이외의 참가자에 대해서는 귀가를 허용한 반면 학생의 귀가를 막음으로써 학생이 학교 안에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8월 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폭력행위자를 전원 구속해 엄중 사법처리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고, 김우석 내무부장관은 한총련 관련 수배자들을 전부 검거해서 한총련을 와해시키겠다고 밝혔다. 또한 입체진압기술을 개발해서 폭력시위에 대한 진압능력을 높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16일 오전에는 연대 서문을 통해서 600여 명의 학생이 탈출하기도 했다. 연대 학생처가 중개자가 되어 협상을 하여 경찰 측에서 “서문을 열어놓을 테니 개별적으로 귀가하라”고 전달했다는 것이다. 또한 16일 밤부터 17일 새벽까지 경찰병력이 약간의 경비병력만 남기고 경찰숙소로 철수했다. 그러다가 8월 17일 정오경 헬기 7개, 경찰병력 1만 2천 명이 동원되어 학교를 급습하여, 학생들이 이과대와 종합관으로 피신하면서, 그 후 진압이 끝날 때까지 건물 봉쇄가 이어졌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경찰이 잠시나마 개별적 귀가를 허용하는 말미를 주었으나, 한총련이 자기 의지에 따라 농성을 이어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혹자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집행부의 다수는 ‘봉쇄를 뚫고’ 지역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으나, 한총련 의장과 서총련 일부 간부가 연대에 남아 투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농성을 이어가면 김영삼 정부의 폭력성을 국민들에게 폭로할 수 있고, 이로부터 김영삼 정부 타도를 위한 전민항쟁의 불씨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말이다. 그렇지만 필자로서는 그 당시 정황을 정확히 판단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어쨌든 20일에 새벽에 종합관이 최종 진압되어 2,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 김종희 일경이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중태에 빠졌고, 결국 이틀 뒤에 병상에서 사망했다. 1994년 김춘도 순경의 사망 이후, 또 다시 시위 도중 경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편 종합관에서는 오전 10시경 탈출이 시도되어 지도부와 이를 보위하던 사수대는 거의 탈출에 성공했으나 1천여 명이 연행되었다. (이 탈출 전술에 대해서도 훗날 여러 평가가 나왔다. 예컨대 다수의 참가자가 연행되고 지도부가 피신하는 게 적절했냐, 오히려 지도부가 사태의 책임을 지고, 다수 참가자의 귀가를 확보해야 하는 것 아니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는 주로 비공식적인 대화에서 오갔고, 한총련 내부에서 공식적으로는 연대사태에 대한 어떤 비판적 평가도 없었다.)  

최종적으로 범민족대회를 거치면서 연행자가 5,713명에 달했고, 구속된 사람만 465명이었다. 나아가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학생들의 한총련 탈퇴를 적극 유도했다. (김대중 정부로 넘어간 1998년 7월, 대법원에서 한총련이 이적단체라는 확정 판결이 남으로써 한총련의 활동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비쳐지는 ‘연대사태’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연대사태는 그 정치적 파장이 매우 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한편에서는 정부의 과잉진압과 그 밑에 깔려 있는 정치적 의도(보수세력 결집)를 강조하고, 다른 편에서는 한총련의 폭력성과 친북성을 공격하는 논쟁 축이 이미 형성된 상태였다. 

먼저 민족회의나 그에 가까운 입장에서는 한총련의 통일운동이 근본적 결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첫째, 민간통일운동은 엄중한 중립적 3자주의라는 입장을 취해야 하며, 특히 북한에 가서 남한을 비방하는 행위는 통일운동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또한 적화통일 반대를 명시적으로 표방하지 않음으로써 비롯되는 불필요한 친북 시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둘째, 한국사회의 실정을 무시한 과도한 3자연대 운동은 오히려 통일운동의 난맥상을 유도한다. 이런 점에서 한총련이 80년대식 통일운동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학생운동 내에서는 1994년에 이어 다시금 한총련 문제가 화두에 떠올랐고, 이는 1996년 말의 학생회 선거에서 표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대사태를 거치며 학생들은 기존 학생운동 전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강한 반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관심을 모았던 선거는 연세대였다. NL 활동가들은 어려움이 있기는 하겠지만 조직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리라 기대했었으나, 선거 결과는 3위였다. 총유효투표 9,639표 중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4,800여 표를 얻은 반면, 범PD로 분류되는 학생연대 후보가 2,300여 표, NL 후보가 1,500여 표를 얻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한총련 주류는 당선율이 크게 떨어져 전국 총학생회의 절반 정도에서 당선되었고, 나머지 25%에서 범PD 계열이나 21세기진보학생연합이, 또 나머지 25%에서 비운동권이 당선되었다.  

한총련 주류의 경우 선거에 임하면서 “연대항쟁은 김영삼정권의 반통일적, 반민족적, 반민중적 본질을 까발린 승리한 투쟁”으로 규정하면서 “97년 반김영삼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의 전투적 결합을 통해 김 정권을 기어이 권좌에서 끌어내리자”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1995년 말 선거에서는 전·노 구속투쟁의 여세로 전국적으로 80%에 가까운 당선율을 보였으나, 1996년 말 선거에서는 54%로 크게 하락했다.  

한편 NL 학생운동 내에서 ‘사람사랑’ 계열은 주류, 즉 ‘자주계열’과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선본을 꾸렸다. 이미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기관지 《자주의 길》 지면에서 ‘시대정신’을 둘러싼 논쟁이나, 한국사회 성격에 관한 논쟁, 현대적 국민정당과 대선전술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는데, 이러한 논쟁은 곧 학생운동 내에서도 ‘사람사랑’ 계열의 조직적 분리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람사랑 계열은 전투적인 통일운동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하는 통일운동’을 주창했는데, 이들은 1996년 8·15 당시에도 민족회의가 주최하는 대학로 집회에 참여했다.

또한 <21세기진보학생연합>은 연대사태를 “방어적 폭력,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이루어진 전투주의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대안으로 ‘비폭력 직접행동’을 내세웠다.  이들은 출마한 9개 학교 중에서 8개 학교에서 당선되었다. (이들은 ‘교육 소비자주권 운동’과 같은 구호도 내세웠다.)

한편 외형상으로 보면 범PD 계열이 약진한 것으로 보였으나, 좀 더 자세히 보면 선거에서 ‘저항성’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참패하고, ‘변화’를 강조하는 경우 당선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실 1996년 범PD 학생운동의 공동투쟁체인 <전국학생투쟁연합>(전학투련) 역시 이덕인(노점상으로 1996년 11월 변사체로 발견), 조수원(병역특례 해고노동자로 1995년 12월 자살), 김시자(한국전력 노조 산하 한일병원지부장으로 노조전임자 축소와 해고에 항의하며 분신)의 잇단 죽음과 1996년 3월 노수석(연세대), 4월 진철원(경원대), 권희정(성신여대), 황혜인(성균관대), 오영권(여수 수산대) 등 다섯 명의 ‘학생열사’가 잇따르는 국면에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투쟁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전학투련 역시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동원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어찌 보면 그 이유는 전혀 다르더라도 반정권 투쟁이라는 점에서 전학투련과 한총련의 공통점이 있었던 셈이다. 전학투련의 의장을 맡던 서울대 총학생회는 연대사태 직후에 이렇게 말했다. “한총련 주류가 펼쳐온 통일운동의 내용과 방식 모두에 반대한다. 그러나 연대사태는 ‘김영삼 정부의 총보수화’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지금은 사태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민주주의의 기본권을 지켜내는 투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총련 깃발 아래서.” 즉 연대사태 직후 시점까지도 ‘반정권 투쟁’에 더 초점을 맞춘 셈이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1990년대 PD 학생운동에 대한 평가도 정리할 것이다.) 그에 따라 1996년 말 선거에서 PD 학생운동은 반정권투쟁이라는 학생운동의 ‘저항성’을 강조할 수도 있었고, 한총련 연대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학생운동의 ‘변화’를 강조할 수도 있었다. 

학생회 선거 결과만을 두고 보면 PD 계열은 NL과 단독으로 맞붙은 곳에서는 당선되고, 그들 외에 21세기 연합이나 비운동권이 출마한 경우에는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학생의 선택이 반(反)한총련, 반(反)NL 나아가 반(反)학생운동권을 향했다는 뜻이다.  
 

9) 1997년 한총련 출범식과 이석 씨 치사 사건 

1996년에 이어 다시금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의장을 맡은 1997년 5기 한총련은 6월의 출범식에 매우 강한 의미를 부여였다. “10만이 참가하는 출범식을 만들어 한총련의 자존을 국민, 학우들에게 떨쳐야 한다. 그리고 군중적인 투쟁에서도 전술적인 승리를 통해 백만청춘에게 승리적인 위용과 기개를 뜨거운 출범식의 감동으로 안겨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총련 주류 세력은 연대사태와 학생회 선거를 거치며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성대한 한총련 출범식이 조직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라고 보았다. 게다가 군중투쟁의 ‘전술적 승리’를 강조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정권과의 싸움에서 ‘물리력’, 즉 전투력으로도 이긴다는 위험천만한 호전적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5기 한총련은 ‘전민항쟁’ 노선을 채택했다. 이는 1996년 ‘대선자금 공개, YS정권 퇴진’ 투쟁의 연장선에 있었다. 이는 정세인식의 과도함, 즉 ‘투쟁모험주의’라는 비판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1997년 대선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는, 즉 독자 대선후보를 내고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전국연합의 방침에 대한 실질적 거부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실제 대의원대회에서 경희대 총학생회장(사람사랑 계열)이 “한총련은 전체 민족민주운동이 결정한 대선방침을 따를 것이다”라는 수정동의안을 냈지만, 한총련 주류가 현재 대선 논의에 매몰되는 것은 잘못이고 투쟁에 집중해야 한다며 이를 부결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학생운동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전국연합을 포함해 ‘민족민주운동’ 전반이 한총련 주류의 노선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비판과 우려를 던졌지만, 한총련 주류는 전민항쟁과 출범식 사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97년 6월, 출범식이 열리는 한양대를 두고 경찰력과의 충돌이 이어지던 가운데,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일으킬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이석 씨 치사 사건이다. 

이는 6월 3일, 한양대학교 한총련 제5기 출범식장 근처를 지나가던 선반기능공 이석 씨가 프락치로 몰려 구타를 당한 끝에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 실체가 드러날수록 더욱 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첫째, 구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침낭을 감싸고 물을 뿌려 가며 구타를 가했고, 한양대 투쟁국장은 피해자의 코에 최루가스 분말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사실상 고문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또한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은 이를 제지하려는 학생들에게 “지금은 전쟁상황이다. 인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피해자에 대한 폭력을 독려했다고 전해졌다. 둘째, 한총련 지도부가 이 사건의 전모를 축소, 은폐하려고 했다. 경찰은 폭행에 가담한 2명과 조국통일위원장, 정책위원과 조직위원 등 5명이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사건축소를 모의했다고 밝혔다. 한총련 측은 처음 폭행 가담자가 건국대생 2명이라고 말했지만, 검찰은 조국통일위원장 호위대원(건국대 황소대 소속)과 서총련 소속 사수대원 등 모두 15명이 폭행에 가담했고, 조국통일위원장에게 수시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결국 1997년 11월 재판부는 2명에 대해서는 상해치사죄를 적용해 징역 7년을 선고했고, 기소된 다른 학생들도 징역을 선고받았다. 상해치사죄는 처음부터 상해를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에 적용된다.) 

그런데 그에 이어 6월 13일, ‘이종권 씨 치사 사건’도 동시에 진실이 밝혀졌다. 남총련 간부들은 5월 27일 전남대 대강당 옆 잔디밭에서 우연히 이 씨를 발견해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사망했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이석 씨 치사사건 이후, 경찰은 의심을 품고 이 사건을 다시 조사했다. 이종권 씨의 어머니가 그가 대학에 다니는 게 맞느냐는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수상히 여겨, 기지국 조사 결과 전화가 전남대 총동아리연합회실에서 걸려온 사실을 확인했다. 이종권 씨는 전남대 기계공학과 1학년생을 가장한 이른바 ‘가짜 대학생’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남총련 간부들은 그를 프락치라고 단정해 5월 27일 새벽 7시간에 걸쳐 구타를 가했다. 그는 결국 강제로 삼키게 한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으로 사망했다. 남총련 의장(조선대 총학생회장), 정책의원, 기획국장과 전남대 총학생회 오월대장, 투쟁국장이 폭행에 가담했다. 이 사건 역시 고문을 가했고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석 씨 치사사건과 완전히 동일했다. 남총련 의장이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관련자 18명이 모두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전남대 총장마저 교수진을 대표해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했고, 개교기념일 행사도 모두 취소했다.  

문제는 한총련의 전민항쟁, (적과의 대결에서) ‘전술적 승리’와 같은 ‘투쟁모험주의’ 노선과 이석, 이종권 치사 사건이 어떤 필연적 인과성이 있었냐는 것이다. 그러한 필연성을 엄밀하게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당시 한총련의 정신적 분위기에서 프락치로 의심하는 자에 대한 고문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은 전쟁상황이다. 인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조국통일위원장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대한 출범식과 전술적 승리로 한총련의 자존과 위용을 과시하는 것 자체가 학생운동의 목표가 되고, 그를 위해서는 인륜도 유보할 수 있다는 사고구조 말이다.   

이 두 사건이 일으킨 파장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총련, 나아가 학생운동은 1996년 연대사태를 거치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대화보다 물리력을 앞세우는 ‘폭력집단’이라는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각인되었다면, 1997년 사태를 거치면서는 아예 ‘살인집단’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정부의 한총련 와해 시도도 강경했다. 정부는 한총련 탈퇴 시한을 7월 31일로 정했고, 각 학교와 당국의 집계에 따르면, 이 기한까지 전문대를 포함해 전국 206개 한총련 가입 대학 중에서 90여 개 대학이 탈퇴했고, 개인 자격으로 탈퇴한 학생도 백여 명에 달했다. 다만 학생운동에 영향력이 큰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는 정부의 지침에 따라 탈퇴하지 않아, ‘탈퇴를 통한 한총련 와해’라는 정부의 방침이 즉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에 따라 한총련에 남아 있는 총학생회장, 총학생회 간부, 단과대 학생회장, 동아리연합회장 등 1,300여 명은 그들이 한총련 주류파이든, 그에 비판적인 반대파든 간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자가 되었다. 8월 말에 이르면 탈퇴 학교가 148개로 증가했다. 

사실 정부의 압력, 위협에 따라 한총련을 탈퇴한다는 것은 당시 학생운동이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에 따라 PD 계열의 고려대 총학생회는 6월 5일 기자회견을 열어 “한총련 지도부는 유지웅 상경과 시민 이석 씨를 숨지게 한 사태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이를 위해 “한총련은 즉각 임시 대의원 대회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21세기연합 계열의 서울대 총학생회도 “검찰이나 외부의 결정에 떠밀려 한총련 문제를 다뤄서는 안 되며 학생들 스스로 토론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여름방학 기간인 8월 말까지는 탈퇴를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즉 전체 학생의 의견을 묻는 절차를 생략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6월 28일, 한총련은 임시대의원대회를 공고했으나, 7월 2일 의장이 검거되고 경찰이 봉쇄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대의원대회가 무산되었다. 

한총련의 주류적 노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중앙집행부의 전원사퇴와 비상대책기구 구성이나 범청학련의 해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렇기 때문에 대의원대회를 개최할 의사가 있었던 의장의 검거 후에는 집행부 내에서 다시 임시대의원대회를 공고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이견이 표출되었다. 그 결과 한총련의 내적 질서를 통해 사태의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결국 유야무야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그 후 한총련은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즉 한총련 해체의 결정적 원인은 정부의 한총련 탈퇴 공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부적 비판, 개혁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 주류노선의 과오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의 파괴력은 당연히도 1996년 연대사태를 훨씬 능가했다. 1997년 11월에 실시된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이 전체 대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96년, 1997년 연속으로 한총련 의장을 배출한 전남대에서도 비(非)한총련을 내세운 선본이 당선되었다. 새로 당선된 전남대 총학생회는 1998년 5월 13일 한총련 탈퇴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재학생의 44%인 7,691명이 참여해 86%가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 
 

10) 왜 NL-통일운동은 1990년대 탈냉전기에 오히려 위기에 빠졌나?

필자가 보기에 1990년대, 김영삼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는 한총련 방북대표였던 박성희, 최정남, 류세홍, 도종화, 네 명이 1998년 2월, 《월간 말》에 기고한 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은 새로운 세기의 통일원칙이 아니다」로 대체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들은 전대협, 한총련 대표로 방북한 뒤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의 남측 파견대표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1997년 12월 기자회견을 통해 (1996년 한총련 대표로 방북했던) 류세홍, 도종화의 남측 파견대표직 사퇴, 공동사무국 폐쇄, 범청학련의 발전적 해소, 6기 한총련의 기형적 건설 중단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왜 그들은 이러한 입장을 피력했을까. 그들은 북이 남의 통일운동의 분열에서 결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첫째, 초기 범민련은 통일을 원하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세력이 망라되었으나 북은 범민련의 내용과 형식, 연대의 수준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재편, 관철하면서 범민련을 실질적인 연북세력들의 집결체로 축소시켰다. 범민련을 ‘통일의 원칙’처럼 일부가 받아들이게 된 것은 북이 처음부터 범민련을 통한 ‘창구단일화’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북이 주도한 범민련은 결국 통일세력의 결집이 아니라 친북세력과 그 이외 세력 간의 분열과 구별짓기의 과정만을 남겼다. 

둘째, 북한은 1980년대 이후 가중된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북한은 ‘생존과 체제수호’를 선차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구 소련이 3차 인터내셔널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분열시키고 사회주의 운동을 친소운동과 ‘사회주의조국’(소련) 옹호 운동으로 전락시킨 것을 상기해야 한다. 현재 북의 태도는 과거 소련의 예와 거의 차별성이 없다. 

셋째, 북은 자신의 존재근거를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에서 찾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수사적 표현 이상이 아니다. 북은 제네바합의 이후 실천적으로 용미(미국을 용인)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또한 ‘혁명의 경제전략’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수용하며 나진-선봉 수출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북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넷째, 식민지시대에 생성되어 냉전시대에 완성된 북한의 통치이념이 냉전과 북단의 틀을 뛰어넘는 통일체제로 확장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변화된 시대와 환경에 대한 대안 부재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섯째, 남의 통일운동은 북을 통일의 한 주체로 보면서 동시에 북을 북의 ‘체제수호 세력’(즉 북한 정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럴 경우 남의 통일운동과 북의 체제수호 세력은 통일문제를 두고 동상이몽에 빠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러한 단순등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섯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은 새로운 세기의 통일원칙으로서는 부족함이 많다. 통일사회가 분단체제를 지양하는 진보성과 진취성을 내포하려면 자유와 평등이 조화된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원칙과 내용으로 담겨야 한다. 민주주의를 포기한 민족통일은 분단체제가 낳은 비대한 두 정부 간 통합과 협의의 틀을 구성하는 것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일곱째, 냉전분단체제는 가상적인 전쟁 상황을 사회에 강요했다. 극단적인 ‘적과 우’ 논리는 제3세력을 용인하지 않았다. 남쪽의 운동세력은 이러한 적우 논리에 함몰되어 친북-반북, 연공-반공의 논리를 자기검열의 원리로 채택했다. 그렇지만 기존 남과 북의 체제논리로는 통일사회의 길을 열 수 없다. 우리는 적우 논리로 무장한 자기검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대안과 재생산 능력을 지닌 새로운 제3자로서 자신을 정립해야 한다.  

길게는 7년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범청학련 사무국 활동을 했던 이들의 목소리보다 더 절절한 평가가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범청학련 북측본부는 1997년 12월 13일 성명을 발표해서 “이전 사무국 대표들의 철없는 행동”이 “괴뢰안기부의 불순한 모략과 공작놀음”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또한 한총련은 이미 조직의 지시에 불복하는 남측대표들의 처사에 엄중히 경고하고 활동을 정지시켰으며, 범청학련은 한총련과 합의하여 공동사무국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했고, 새로운 공동사무국은 이전보다 더 훌륭히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범청학련 북측본부든, 한총련이든 비판의 목소리라면 모두 ‘안기부 공작’으로 규정한다면 당연히 어떤 비판이든 조금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운동의 내부적 와해를 촉발할 뿐이었다.  
 

2.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비교 

보통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총체적 실패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를 김대중 정부의 성공적인 햇볕정책과 대비시킨다. 예를 들어, 문재인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맡았던 김연철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이 1998년에 제시한 평가를 보자. 남북접촉 회수만 보더라도 전두환 정부 19회, 노태우 정부 82회에 비해 김영삼 정부는 15회에 불과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고위급(장관급) 회담은 한 차례도 성사되지 않았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김영삼 정부 시기 남북관계는 남북합의서 이전 상황으로 후퇴했고, 남북 당국자 간 정치적 불신이 오히려 더 증폭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보면, 첫째, 북한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로부터 제네바합의로 마무리되는 1차 핵위기 국면에서는 오히려 미국보다 더 강경한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 둘째,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국면에서는 북한에 대한 자극을 피했어야 했는데, 지나친 대응으로 남북관계 경색을 야기했다. 셋째, 제네바합의 이후 1995년 대북 쌀 지원을 보면 일본의 쌀 지원이나 지방선거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서두르다 보니, 공조직을 배제하고 졸속으로 협상을 진행해 그 이후 지원 과정의 파행을 낳았다. 넷째,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에서도 미국은 접촉을 통해 북한의 사과를 이끌어 냈지만, 한국은 실질적인 제재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강경기조로 일관해 정치적 소외를 야기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처럼 일관성 있는 정책을 5년간 실행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남북관계는 ‘남북연합’ 단계에 들어서고, 북한에는 핵무기와 핵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가정은 과연 타당한가? 남북관계의 경색은 순전히 남한 정부만의 과오에 기인한 것이고 북한의 태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인가? 

김영삼 정부의 실패와 김대중 정부의 성공이라는 단순한 도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김영삼 정부의 집권 초반에 1차 핵위기가 폭발한 반면, 김대중 정부는 제네바합의가 이행되는 시기에 집권했다. 바로 이런 조건에서 김대중 정부는 ‘정경분리’, 즉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접근법에 기초하여 대북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 말기, 즉 2002년에 켈리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2차 핵위기가 개시되었으나,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호의적인 평가는 이 문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1차 핵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의도적으로 남한을 대화 파트너에서 배제하는, 이른바 ‘통미봉남’을 실행했다. 기실 김영삼 정부는 핵위기 초반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하도록 권장했고, 1994년 미국이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적 타격’을 고려할 때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핵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소외되는 듯한 모습이 언론에 비쳐지는 상황을 참지 못했다. (현 정부에서도 북한 핵 협상은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프로세스를 통해 전개되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한국이 ‘한반도 운전자’다, 즉 이러한 협상을 조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이런 자아도취 식의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김영삼 정부는 점차 북미대화의 진전은 남북대화의 진전을 전제로 한다고 미국 측에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한국 정부의 반응이 가히 신경질적이었고 현명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한이 집요하게 ‘통미봉남’을 추구한 것은 과연 적절했는가, 북한의 노림수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동반되어야 한다.

사실 북한은 김대중 정부 초기에도 남한이 내걸었던 ‘상호주의’ 원칙을 격렬히 비난했다. “상호주의는 주면 받아야 한다는 장사꾼의 논리이며, 속물근성의 표현으로서 언어도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런 연유로 김대중 정부의 집권 첫 해, 정부 간 공식대화는 거의 진척이 없었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허용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계속 시험하고자 했다. 시간이 흘러 김대중 정부가 집권 초기에 내걸었던 대북 원칙을 수정, 폐기한 후에야 남북관계가 급진전하여,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부터 엄격한 상호주의를 수정해서 ‘신축적’ 상호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비공식접촉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바꾸어 당국자회담을 비공식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바로 이러한 신축적 상호주의, 비공식회담이라는 전환을 거치며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세스는 김대중 정부 말기, ‘대북송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근원적 의구심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는 2000년의 ‘비밀합의서’ 문제가 다시금 터져나왔다.) 

한편 김영삼 정부는 남한의 통일운동에 대해서 점점 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정부는 북한과의 공식적인 당국자회담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남한 정부를 배제한 북한 측과 남한 민간통일운동의 직접적인 교류나 공동활동을 사실상 금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북한과의 직접적인 연대(남·북·해외 삼자연대)를 추구하는 범민련, 범청학련(한총련)과 격렬한 충돌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충돌은 김영삼 정부의 민간 통일운동 억압, 탄압이라는 외양을 띠었다. 

이 역시 김대중 정부 시기와 비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와 통일운동의 협력 관계라는 양상은 6·15 정상회담 이후의 상황이다. (그 이전에 NL-통일운동의 강경파는 김대중 정부를 ‘사대매국 반통일 정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비록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남북최고지도자가 합의한 공동선언은 통일운동을 하는 모든 세력과 단체에 어떤 가이드라인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6·15 선언은 통일운동이 강령적 차원에서 6·15 공동선언의 수준을 넘지 않고,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수준에서 위상을 조정하고 활동을 전개하라고 제시했다는 말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북한의 방침 변화가 남한의 NL-통일운동 노선의 변화를 야기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통일운동의 새로운 원칙이 되었다. 첫째, ‘민간통일운동과 정부는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는 각각의 주체임을 인정한다’, 즉 김대중 정부를 파트너로서 적극적으로 승인한다. 둘째, ‘남한의 민간통일운동 세력은 6·15 공동선언 합의 수준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그를 실천하기 위해 하나의 틀로 연대한다’, 즉 ‘범민련을 통한 통일운동의 창구단일화’ 노선을 최종적으로 폐기한다. (그에 따라 범민련 남측본부도 강령과 규약을 6·15 공동선언 수준에 맞게 손질하고 합법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렇다면, 역으로 6·15 선언 이전의 통일운동은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6·15 선언 이전에 범민련을 통한 통일운동의 창구단일화를  추진한 것은 그 당시 맥락에서 정당했고, 그 후 그러한 입장을 폐기한 것은 또 새로운 상황에서 정당한 것인가? 

지금부터 다음 호까지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교, 평가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을 검토해 보겠다. 
 

3.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1992년 12월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정주영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정통성을 내세웠고, 취임 첫 해 80%대의 지지율을 누렸다. 김영삼 정부는 정통성과 지지율을 배경으로 획기적인 대북정책을 펼쳐나가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실제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취임식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호응해 김일성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 이러한 기대를 높였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 역시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있었다. 한완상 교수를 통일원 장관으로 임명한 사실을 보거나(한 장관은 2월 26일 취임식에서 “재야, 학생의 통일논리를 상당 부분 수렴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북측에서 줄기차게 요구하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의 북송을 전격적으로 단행한 사실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한완상 장관 외에도, 한승주 외무부 장관,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덕 안기부장, 권영해 국방장관도 과거 냉전시대의 성향과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3월 7일 공로명 대사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미국과 북한이 고위급회담을 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김영삼 정부 임기 초부터, 이른바 ‘1차’ 한반도 핵위기가 발생했다.
 

1) 1차 핵 위기에서 북미 제네바합의까지  

(1) 1차 한반도 핵위기의 개시 

1차 핵위기는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부터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가 이뤄지는 시기를 말한다. (1차 핵위기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호에서 다루었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생략한다.) 정부가 3월 11일 통일관계장관 전략회의서 이인모 씨의 무조건 방북을 허용키로 결정한 다음 날, 즉 3월 12일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기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이 NPT 탈퇴를 발표하기 전에도, 북한 핵 문제의 해결과 남북 교류협력을 연계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3월 4일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 겨레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며, 북한이 이러한 문제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한 남북한 교류협력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모 씨의 북송 문제는 이미 1992년, 노태우 정부 당시 고위급회담에서 다루었던 문제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판문점 면회소 설치를 제일 조건으로 하고 거기에 북한이 동진호 선원 송환과 이산가족 교환방문 중 하나만 더 들어주면 이인모 씨 송환에 관한 합의를 보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렇지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특보 이동복이 동진호 선원 송환이 합의가 안 되면 이인모 송환도 합의하지 말라는 식으로 훈령을 조작하여 합의가 무산된 것으로 사후에 밝혀졌다. (“92년 남북회담 훈령 조작 … 제2의 이동복 이제 없을까”, 《한겨레》, 2018년 4월 29일) 이인모 씨는 1993년 3월 19일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때 남한이 취한 법적 형식은 ‘장기방문’인 셈인데, 정부는 이인모 씨에게 방북증명서를 발급, 방북토록 했다. 물론 이인모 씨는 북행 후 돌아오지도, 방북증명서의 연장신청도 하지 않아 법률적으로는 ‘불법 북한체류’ 상태가 된 셈이었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부가 임기 초부터 대북 강경책을 구사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3월 15일 북한은 NPT 복귀 조건을 제시하며 교섭을 개시할 용의를 표명했는데, 한국 정부는 북한의 제의를 일정하게 반영하며 교섭의 의지를 보였다. 북한이 제의했던 조건이란 ① 팀스피리트 훈련을 영구 중지하며, ②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 위협을 제거하며, ③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유일한 초강대국(즉 미국)에 복종하는 것을 중단하고, IAEA 사무국이 공정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3월 30일 한승주 외무장관은 북한이 NPT 탈퇴를 번복할 경우 반대급부를 제시했다. 즉, ① 남북한 국가시설에 대한 핵 사찰 확대, ② 팀스피리트 훈련 규모 축소, ③ 북한에 대한 핵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보장, ④ 교역 확대, ⑤ 한미일의 대북관계 개선. 즉 북한이 요구한 팀스피트 훈련의 영구 중단에 대해서는 훈련 규모 축소를 제시했고, 미국의 핵 위협 제거에 대해서는 핵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보장과 한미일 삼국의 대북관계 개선이나 남북 교역 확대를 약속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가 바로 핵심 포인트였다. 즉 북한이 핵프로그램과 무관한 군사시설이라고 주장하는 장소(영변 미신고시설 두 곳)에 대해 IAEA 사찰을 수용한다면, 남한과 미국이 미군기지를 포함해 남한 내 군사시설에 대해서도 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는 제안을 북한이 수용할 것이냐가 핵심 포인트였다. 

또한 3월 말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과 대화 창구를 닫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 시점에 한미 외무장관은 우선 대화를 시도하고 차후 점차 제재의 수위를 높여간다는 ‘점진적 확대전략’을 합의했다. 

나아가 김영삼 정부는 1993년 5월 20일, 황인성 총리 명의의 서신으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총리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자 5월 25일,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부총리급 대통령 특사를 교환하자고 역제안했다. 그 후 남북은 총 13회의 수정 제의를 주고받았으나,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남북대화는 무산되었다.)  

물론 김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더욱 강경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1993년 6월 4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고 말했고, 6월 12일에도 남북정상회담 전에 북한 핵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다시금 천명했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의 핵 사찰 수용에 대한 경제적 인센티브를 약속하기도 했다. 예컨대 6월 23일 한국 정부는 북한이 NPT에 복귀하고 IAEA 사찰에 동의할 경우 기업인의 방북을 전면 허용하고, 남북 상호사찰에 합의하면 경협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영삼 정부의 초기 대북정책을 종합하면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핵위기의 해결책을 찾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많은 논자는 100일 취임 기자회견을 즈음해 한국 정부 내 강경기류가 강화되고, 청와대와 대통령 본인이 이를 주도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곧 한국 측이 좀 더 유연한 자세로 특사교환과 정상회담이라는 기회를 활용했어야 한다는 평가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남한과 북한, 미국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로드맵이라도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것은 남한 정부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다양한 수준의 정부 간 대화와 협상을 통해 중요 의제에 대한 사전 합의를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급 대화에서 직접 담판을 짓는다는, 요즘 표현을 따르자면 ‘탑-다운’ 방식의 외교란 현실에서 거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요즘 식으로 말하면, ‘노딜’ 정상회담이라는 ‘외교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19년 2월 27~28일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떠올려보면 된다.)   
 
(2) 북미협상과 김영삼 정부의 핵통제공동위원회 가동 제안  

한편 북한과 미국은 1993년 6월 2일부터 뉴욕에서 협상을 개시했다. 6월 11일 양국은 ‘공동발표문’을 채택했다. 

양측은 핵확산금지 목적에 부합하게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한 공동선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양국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합의했다. △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의 불사용, 불위협 보장, △ 전면적 핵안전조치의 공정한 적용을 포함한 비핵화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의 보장과 주권의 상호존중과 불간섭, △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 지지. 양국 정부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대회를 계속하고, 북한 정부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기간 동안 핵확산금지조약으로부터 탈퇴 효력을 일방적으로 정지시킨다. 

즉,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소극적 안전보장 조치’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미국은 비핵국가에 대해 핵무기로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 조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이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또한 미국 측이 막후협상을 통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국교 수립을 포함한 모든 관계 개선 협의, △미북 간 협의 정례화, △무역대표 교환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북미협상이 진전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불만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6월 11일 북미 고위급회담(1단계) 공동발표문이 나온 후, 6월 25일, 김 대통령은 영국 BBC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추가적인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면서 “북한이 전쟁준비를 위해 지연전술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7월 1일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도 미국이 북한에 끌려다닌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왜 그랬나? 김 대통령은 북한과 미국이 협상을 진행하는 것을 양해했지만, 김 대통령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신문에서 한국이 빠지고 미국하고 북한만 나오느냐고 공격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김 대통령은 북미협상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남북협상이 북미협상의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9일에 발표된 2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의 합의문은 북핵 문제의 최종 해결방안으로 경수로형 원자로의 제공을 논의했고, 북한이 조속히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협의를 재개한다고 밝히며, 동시에 남북대화도 개시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러한 배경에서 8월 4일, 남측 황인성 총리(남북고위급회담 수석대표)는 핵통제공동위원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8월 9일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에 따라 8월 16일, 미 국무부는 남북대화가 재개되고 IAEA와 북한의 본격적인 대화가 있어야 3단계 북미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3) 남북 특사교환 접촉과 ‘서울 불바다’ 

그 후 9월 1일, 북한이 남북 간 ‘임의의 급’ 특사교환을 제안하면서 5~6월과 유사한 남북 상호 역제안 2라운드가 개시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은 1993년 10월 열렸다. 남한은 핵 문제를 우선적으로 협의,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북한은 핵전쟁연습 중지와 국제 공조체제 포기를 특사교환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며 대립하다가 11월 3일 북한이 4차 실무대표 접촉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북미고위급회담이 개시되기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교환을 주장했던 북한이, 본격적으로 북미협상이 진행되자 남한과의 대화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신호로 읽힐 여지가 컸다. (이른바 ‘통미봉남’.)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1월 23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에 통보한 ‘일괄타결안’을 포함한 ‘포괄적 접근방식’에 대한 반대의사를 집요하게 표명했다. 나아가 김 대통령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북한 핵 문제의 최종적 결정은 우리 손을 거쳐야 한다는 한미 두 나라의 합의는 큰 의미가 있다”며 북한 핵 문제가 한국 주도로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북미는 여러 차례의 협상 좌초 위기를 겪었고, 미국은 북미대화 외에도 군사적 대응조치로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4년 초 클린턴 정부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부대를 한국에 배치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그래서 오히려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패트리어트 한국 배치는 아직 ‘논의단계’라며 제동을 걸었다.)

결국 1994년 2월에야 2차 북미합의가 이뤄졌고(2차합의에는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도 포함되었다) 3월 IAEA 사찰단이 방북했으나, 북한은 또 다시 핵심시설의 사찰을 불허했다. 남북 간 특사 실무접촉도 3월 19일, 그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결렬되었다. (북측 단장 김영수가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라고 발언했다.) 북한은 1994년 5월 5MWe 원자로의 사용 후 연료봉을 인출했고, 6월 13일자로 IAEA를 탈퇴하고 ‘유엔 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미국에서는 주한미군의 무기와 병력을 통상범위(37,000명)에서 최대한 강화하고, 추가적으로 주한미군을 확대하기 위한 하원, 상원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또한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적 타격’(surgical strike), 즉 정밀타격을 고려하면서 대사관과 미군의 가족, 민간 미국인을 서울에서 철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6월 16일 김 대통령은 주한미대사 레이니를 불러 “내가 있는 한 전쟁은 절대로 안 되고 가족 등 미국인의 소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다음 날 새벽 클린턴 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그와 같은 입장을 강력히 전달했다. 

(4) 북미 제네바합의 

한편 북한이 IAEA 탈퇴를 발표한 6월 13일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은 북미대화 재개와 남북정상회담 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한다. 그러면서 극적으로 전쟁위기까지 치달았던 국면이 점차 진정되었다. 7월 3일 3단계 북미회담이 개시되고,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었으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회담이 연기되었다. 

결국 10월 21일 역사적인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를 채택했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 곧 핵무기 개발능력을 동결하고, 40억 달러가 넘는 비용이 투입되는 100㎿ 용량의 경수로 2기를 제공하며, 산업용 중유 50만 톤을 제공한다는 게 그 골자였다. (지난 호에서 설명했다시시피, 영변 핵시설이 동결되었으나, 미신고시설 사찰은 경수로 완공 이후로 미뤄진 셈이었다. 제네바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 완공을 2~3년 앞둔 2002년 시점에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 조기 완공과 조기 사찰을 제안했으나 북한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 후 현재까지 미신고시설 사찰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경수로도 완공되지 않았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이 배제된 듯 보이는 북미대화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김 주석 사망 이후에는 본인이 직접 대북 강경노선을 선도해나갔다. ‘조문 파동’, ‘주사파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또한 김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체제경쟁은 끝났다”,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반드시 수호하겠다”, “통일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닥쳐올 수 있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즉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북한의 붕괴와 흡수통일이 이뤄질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북미 간 최종합의로 나아가던 1994년 10월 8일 《뉴욕 타임즈》와 회견에서도 북미 합의에 반대하면서, 북한이 붕괴 직전이고 지금 북한과 타협하는 것은 북한 정권의 연장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한국에 비해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에 경험이 적기 때문에 북한에 속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대통령은 특별사찰이 연기되고, 남북관계가 직접 언급되지 않는 합의에 반대하고, 선 특별사찰과 후 경수로지원, 남북대화와 북미연락사무소 설치의 병행추진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미국은 한국이 제네바합의를 지지하며 일관성을 유지해달라고 거듭 요구했고, 결국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대통령을 설득하여 김 대통령이 제네바합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95년 3월 경수로 제공을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설립되고, 6월 13일, 한국 표준형 원전이 원자로형이 되고 한국기업이 주계약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한편, 제네바합의가 타결된 후인 1994년 11월, 12월에는 남북경협 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남북교류협력법 상 ‘교역대상자’ 조문을 개정하여 시민단체가 교역의 법적 지위를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단체도 교역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1차 핵위기 시기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을 종합해보면, 초기에는 대북 강경책을 배제하고 남북대화와 북미대화 양자의 경로를 통해 외교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1994년 6월 미국이 검토한 북한 핵시설의 외과적 타격, 즉 군사공격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렇지만, 남북특사 교환이 무산되고 북미대화에 비해 남북대화가 전혀 진척이 없고, 남한이 외교 프로세스에서 소외되는 듯 언론에 비치자 북미대화의 진전에 브레이크를 건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거에 해소할 계기로 1994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되었으나,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수포로 돌아가자 북미협상에 대해서도 계속 불협화음을 냄으로써 미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2)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4자회담 제안의 굴곡 

1995년 7월, 집권 후반부를 맞은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구상을 내놓았다. 즉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여기에 남북한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미국과 중국이 중재자이자 보증자 역할을 하는 ‘2+2’ 구상을 제시했다. 미국 정부 역시 이를 환영했다. 
 
(1) 1995년 쌀 수송선 인공기 게양 사건,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그렇지만, 남북관계는 또 다른 복병을 맞았다. 1995년 6월 27일, 북한에 쌀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수송선 씨아펙스 호가 애초 합의와 달리 북측의 요구로 인공기를 게양한 사건이다. 이에 따라 남한 내 여론이 악화되자, 김 대통령은 미국에서 귀국한 후, 미국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2+2 구상을 폐기했다. (김 대통령은 1995년 10월 15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더 이상 남북 대화는 없다”고 밝혔다.) 
 
사건의 발단은 1995년 5월 북한이 일본 자민당 인사에게 긴급 식량지원을 요청한 일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일본보다 먼저 쌀을 지원하겠다고 나섰고, 일본 측에도 “일본이 북한에 먼저 곡물을 제공하면 한일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강한 어조로 협조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남북 정부 간 대화채널이 모두 끊겼기 때문에 공식회담을 열기 어려웠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를 매개로 해서, 6월 17일에야 어렵게 쌀 회담이 열렸다. 남에서는 이석채 재정경제부 차관이 대표였으나, 북한은 당국회담이 아니라는 의미로 전금철 통일전선부 부부장의 직함을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올렸다. 합의 내용은 한국산 쌀 15만 톤을 북한에 무상으로 제공하며, 쌀 포대에는 어떠한 표기도 하지 않는다(즉 대한민국이라는 표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창구는 남쪽의 KOTRA, 북의 삼천리총회사로 정해졌다. 최종서명은 6월 25일에 이뤄졌고, 그날 저녁 바로 2천 톤의 쌀을 실은 씨아펙스 호가 북으로 출항했다. 한국 정부가 이렇게 수송을 서둘렀던 이유는 바로 6월 27일 지방선거였다. 즉 지방선거 투표일 이전에 첫 번째 쌀 지원을 끝내야 선전효과가 극대화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수송선의 국기 게양 문제가 남북 간 신경전의 소재가 되었다. 국제관례에 따르면, 다른 나라 항구에 입항할 때 가장 높은 마스트에는 입항하는 나라의 국기를 달고 배꼬리에는 선박이 속한 나라의 국기를 단다. 그런데 양국은 이미 쌍방 국기 모두 달지 않는다는 합의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씨아펙스 호 선장은 이런 합의를 알지 못했고, 배에 미리 준비된 인공기도 없었기 때문에 배꼬리에 태극기만 단 채로 북한 청진항에 입항했다. 이에 놀란 북한 당국자가 태극기를 내리라고 요구했다. 옥신각신 끝에, 6월 27일 태극기는 내리고 인공기만 매단 채 내항에 들어가 쌀을 하역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남한 내에서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한 마디로 “쌀 주고 뺨 맞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씨아펙스 호가 부산으로 귀환한 날, 서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은 이러한 김 대통령의 행보에 불만을 품었다.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하게 되자 김 대통령은 한국에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1996년 4월 총선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한국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진지한 제안을 내놓지 않는 한 한국 방문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며 압박을 가했다. 한국은 이를 수용하여, 결국 1996년 4월 16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4자회담을 공식 제안했다.

그렇지만, 남북관계는 또 다시 복병을 맞게 되었다. 1996년 9월, 북한 인민무력성 정찰국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시 인접 해상에서 좌초된 상태에서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영삼 정부는 잠수함 침투 사건을 북한의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대북경협과 KEDO의 한국 측 활동도 중단시켰다. 이때 미국이 개입하여 사태의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북미 양국은 뉴욕에서 열 차례 접촉했고, 결국 북한이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유감을 표시했다.
 
1996년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시 해상에서 초병과 택시기사가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발견하면서 사태가 개시되었다. 북한 잠수함이 동해안 일대에 침투하여 정찰공작을 벌인 후 북으로 복귀를 시도하던 중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잠수함이 좌초하자, 북한군은 해상복귀가 불능하다고 판단, 육로 복귀를 시도했다. 이에 따라 ‘무장공비’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고, 11월 5일 마지막까지 생존한 북한 정찰조 2명을 사살함으로써 작전이 종결될 때까지 49일의 시간이 걸렸다. 북한군 26명은 생포된 1명 외 모두 사망했다. 13명은 국군이 사살했고, 11명은 북한 군 내부에서 처형되었고, 나머지 1명은 사망 추정이다. 남한 군은 전사 11명, 오발사고 1명이며, 민간인 4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도 사망했다.

그 후 4자회담 프로세스가 개시되었다. 1997년 3월 5일 공동설명회를 시작으로 8월부터 11월까지 세 차례의 예비회담이 뉴욕에서 개최되었고, 본 회담은 1997년 12월 9일 열렸다. 4자회담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9년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소실되었다. 

4자회담 1차 본회의에서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장할 수 있는 분과위 구성을 주장했다. 반면 남한과 미국은 안보문제와 관련된 <평화체제 분과위>와 협력문제와 관련된 <긴장완화와 신뢰구축분과위>를 동시에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4자회담의 의제 설정을 둘러싼 대립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개최된 2차 본회담에서도 재연되었다. 남한과 미국은 “남북 당사자가 중심이 되고 미국과 중국이 실효성 있게 뒷받침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주장하고,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협정이 4자회담의 핵”이라는 주장을 고수하면서, 결국 4자회담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영삼 정부의 4자회담과 김대중 정부의 4자회담은 연장선 위에 있고, 따져 보면 그 접근방식이라는 측면에서는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의 노선과도 일치했다.
 
(2) 미사일 회담

한편, 김영삼 정부 시기, 북한과 미국의 미사일회담도 개시되었다. 1996년 4월 20~21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양국 미사일회담이 열렸다. 미국은 북한의 중거리미사일 개발, 수출을 포기하라고 요구했고, 북한은 미사일 개발이 자위권이라고 주장했다. 2차 미사일회담은 다음 해, 1997년 6월 11~13일 뉴욕에서 열렸으나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7년 8월 24일에 열리기로 한 3차회담을 앞두고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 장승길의 미국 망명사건으로 회담은 무기한 연기된다. 그에 따라 미사일회담은 김대중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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