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행: 한국현대지식인의 역사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 서평 (중)
지난 호에서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이하 『세미나』)는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한국의 ‘장기20세기’에 대해 설명하는 이론적 기획과 함께, 문재인 정부의 출현에 대한 정세적 비판이라는 층위도 있음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한국사회의 객관적 성격에 대한 설명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한국경제는 선진경제의 생산성을 추격하는데 실패했고, 성장전망을 상실했다. 이윤율의 하락이라는 구조적 위기로 인해 선진경제 전반이 현재 성장이 둔화된 상황이지만, 한국경제는 그보다 훨씬 낮은 생산성 수준에서 성장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지난 서평에서 한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실패와 재벌이라는 문제에 주목했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표준으로서 미국의 법인자본주의에 미달하는 한국 사회성격의 특수성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 다른 층위의 설명과 비판이 더 필요하다. 사회성격의 표준과 변이, 즉 제도의 차이를 만든 주체적 원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 화두가 ‘한국의 불행’이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한국의 불행’이라는 문제설정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한국 지식인의 보수주의와 인민주의를 비판하는 측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의 결함을 해결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의 자기비판 필요성을 제기하는 측면도 있다. 이는 현재 사회운동에 거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386세대 인민주의 지식인과 문재인 정부의 인민주의에 대한 정세적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번 서평에서는 개항 이후 1986~1988년까지 한국 현대 지식인의 역사를 개괄한다.
4. 한국의 불행: 개요
한국사의 ‘장기20세기’에는 크게 세 번의 정세적 변곡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장기20세기’의 시작으로서 개항과 망국이다. 개항 이후 만국공법의 서구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되면서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에 자본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이다. 현대 지식인이 나타나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분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분단과 전쟁이다. 이후 남한과 북한은 각기 다른 정치과정을 걷게 된다. 반공주의자들은 분단 이후에도 친일을 친미로 대체하며 이어지고, 공산주의자들은 단절, 부활, 위기의 질곡을 겪는다. 세 번째는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남한경제의 침몰과 촛불 이후 문재인 정부의 등장이다.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는 이전 서평에서 다룬 바 있다. 남한경제가 침몰하는 가운데, ‘역사를 알지 못하면서 역사의 주체를 자임하는’ 인민주의자가 남한 사회의 주류로 나서며 또 다른 ‘망국’과 ‘해방정국’을 반복하고 있다.
『세미나』는 한국 현대 지식인의 역사를 평가하기 위해, 한중일 지식인의 주체적 대응을 비교한다. 우선 개항과 현대화 과정을 비교해볼 수 있다. 중국의 현대 지식인은 양무운동 → 변법운동 → 신해혁명 → 5·4운동으로 급진화되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라는 변법운동에 성공해 신해혁명이나 5·4운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에 유비하면, 한국(조선)의 경우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은 출현했지만 실패했고, 신해혁명과 5·4운동은 출현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한 것은 중국과 마찬가지인데, 마르크스주의 토착화에도 실패한 것이다. ‘한국의 불행’이란 부르주아 혁명과 마르크스주의 토착화에 모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세미나』는 한국 현대 지식인의 역사를 평가하기 위해, 한중일 지식인의 주체적 대응을 비교한다. 우선 개항과 현대화 과정을 비교해볼 수 있다. 중국의 현대 지식인은 양무운동 → 변법운동 → 신해혁명 → 5·4운동으로 급진화되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라는 변법운동에 성공해 신해혁명이나 5·4운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에 유비하면, 한국(조선)의 경우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은 출현했지만 실패했고, 신해혁명과 5·4운동은 출현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한 것은 중국과 마찬가지인데, 마르크스주의 토착화에도 실패한 것이다. ‘한국의 불행’이란 부르주아 혁명과 마르크스주의 토착화에 모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왜 실패했을까? 윤소영 선생은 문명개화파가 결국 개신교를 수용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지적한다. 중국, 일본과 구별되는 한국 문명개화파의 특수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신해혁명 대신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이 추진되었다. 또한 국망의 경술국치를 전후로 분화된다. 즉 중국처럼 5·4운동으로 급진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반공주의와 공산주의로 분화가 발생한다. 망국의 원인에 대한 인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개신교 반공주의는 친일을 친미로 대체하며 지속된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분화한다. 그런데 진보주의적 반공주의는 인민주의적 반공주의로 퇴화한다. 박정희 정부에서 장준하, 『사상계』로 대표되는 재야가 분화한다. 재야는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기 위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한다. 그러나 개신교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반공주의이고, 재야의 민족주의는 박정희의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일관성이 없었다.
『창작과비평』은 『사상계』를 계승하면서도 분단사관을 주창한다. 분단사관의 인민주의적 한계는 한국사회성격 논쟁을 통해 부각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부활한 공산주의 이념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채 위기를 맞고, 인민주의는 민주당과 시민단체로 계승된다. 유럽의 인민주의가 보수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것과 달리, 남한의 인민주의는 군사정부에 의해 정치로부터 소외된 진보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재야세력을 인민주의적 반공주의로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통상적으로 문재인 정부를 중도개혁 혹은 자유주의로 규정한다. 사회운동 내 활동가들조차 문재인 정부를 중도보수, 중도우파로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기준이 모호하고, ‘민족자주’, ‘통일’ 혹은 ‘진보’를 표방하는 재야세력의 인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미나』가 설명하고 있는 한국 지식인의 역사는 이중적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현 문재인 정부의 주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386세대의 인민주의를 개신교 반공주의라는 역사적 계보 속에서 평가하고 비판한다. 둘째, 분단사관으로 대표되는 인민주의적 역사학이 대중적으로 팽배한 상황에서 망국과 해방정국, 남북한의 역사에 대한 통설적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측면도 있다.
역사인식의 쟁점은 문재인 정부 비판을 다룰 다음 서평에서 살펴보고, 이번 서평에서는 386세대가 인민주의로 변절하게 되는 과정을 한국 현대 지식인의 역사의 맥락에서 정리해보자. 우선 현대 지식인사의 전사에 해당하는 조선 후기의 지식인에 대해서는 『봉건제론』에서 다룬 바 있다. 그리고 『세미나』의 전기 4부작을 요약하는 『종합토론』은 현대 지식인사를 〈한국의 반공주의자〉와 〈한국의 공산주의자〉로 구분해서 서술한 뒤, 〈중국과 일본의 현대 지식인〉과의 비교를 통해 386세대의 인민주의를 비판한다. 이번 서평에서는 〈한국의 반공주의자〉와 〈한국의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부터 1980년대 한국사회성격 논쟁까지 지식인의 역사를 살펴본다. 역사 서술 부분의 일부는 『세미나』에서 기초문헌으로 소개하는 자료를 참고했다.
5. 조선 후기 지식인의 결함: 경세사학의 부재
한국 현대 지식인 역사의 통설은 그 계보를 실학자로 소급한다. 현대 지식인 역사에 대한 박찬승 교수의 정리를 도식화해보면, 실학자, 북학파를 거쳐 개항 이후 척사위정론, 동도서기론, 급진개화론으로 분화한다. 그 기준은 반제반봉건의 문제의식 여부다. 또한 대청사대주의로 흐른 북학파나 일본에 의존한 급진개화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실학파(정약용)와 신채호에 주목한다. 그러나 『세미나』에서는 정약용과 신채호에게서도 신해혁명이나 5·4운동의 가능성, 즉 마르크스주의 토착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비판한다. 경세사학 전통의 단절 때문이다. 이는 이번 현대 지식인사의 설명 방법과 동일하고, 경세학적 전통으로서 자유주의의 부재라는 핵심적 문제의식과 연결되기 때문에 『봉건제론』을 참조해 자세히 살펴본다.
이전 서평에서 다뤘듯,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역사』(1992)는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에 주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경제사관을 계승했으나, 개항 이전 역사에서 봉건제를 개념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러한 결함은 사실 모든 한국통사에서 나타난다. 시대별로 어떤 용어가 등장해도 그것이 한국사에 특수한 것인지, 중국사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것인지 불명확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역사동역학과의 유비를 통해, 봉건제 생산양식과 그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경제적·정치적 제도로서 사회구성체, 그 사회구성체의 표준과 변이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봉건제론』은 봉건제 생산양식의 표준적 사회구성체로서 중국 봉건제의 역사와 그 변이로 한국 봉건제의 역사를 서술한다. 삼국·통일신라는 전국 진한 위진남북조, 고려는 수당, 조선은 송원명청에 해당한다. 즉, 통일신라를 전기 봉건제, 고려를 이행기, 조선을 후기 봉건제로 구분한다.
또한 중국과 한국의 경세사학을 비교하고, 사학사와 경세학사도 비교해서 설명한다. 사학사에서는 왕부지에 주목한다. 왕부지는 원시사회, 분봉제, 군현제로 역사의 진화를 주장했고 그 기준은 생활수준의 상승이었다. 좌구명과 사마천의 사론을 역사평론이 아니라 본격적 역사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물론 인과법칙적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변법운동 시기 강유위·양계초의 사회진화론(삼세진화론)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이대교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과학으로 계승되었다.
경세학사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둘러싼 논쟁의 역사다. 중국 경세학사는 중상주의적 경향을 억제하고 중농주의적 원칙을 견지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전기 봉건제를 특징짓는 토지국유제(영호제)에서 후기 봉건제의 토지민유제(지주전호제)로 이행하면서, 개혁의 쟁점도 토지제도에서 조세제도로 이행한다. 그 핵심은 노동지대를 생산물지대로 대체하는 동시에, 양전을 토대로 인두세를 토지세로 환원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황권주의의 결함이 명백해지면서 군신공치의 신권주의 이념도 강화된다.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에서 최고의 경세학자로 평가되는 구준의 『대학연의보』가 이러한 경세학사를 대표한다. 장거정은 구준의 경세학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행하는데, 양전과 함께 일조편법을 실행한다. ‘토지를 계량하여 화폐를 징수한다’는 의미로 인두세를 토지세와 통합하는 동시에 은납화를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변동에 따라 인두세액이 가변적이라는 단점이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청황조 강희제의 지정은세법이다. 간접세의 비중을 상승시키는 대신 인두세액을 고정한다.
『봉건제론』은 이렇게 토지생산성과 지대율, 영호제와 지주전호제를 통해 봉건제를 개념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식민사관은 한국사에서 봉건제의 결여, 즉 정체론(停滯論)을 핵심으로 한다. 후쿠다 도쿠조는 20세기 초 한국 사회가 일본의 고대사회에 해당하는 10세기경의 후지와라(藤原)시대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조선이 자력으로 현대화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조선은 16세기부터 지주전호제가 발전했고, 왜란과 호란, 양란을 거치고도 16-17세기 동안 토지생산성과 지대율이 상승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17세기 서인과 남인 사이의 붕당정치도 재해석할 수 있다. 붕당정치는 식민사관의 비판처럼 사익을 다투는 당쟁(당쟁망국론 혹은 유교망국론)이 아니라, 서인의 신권주의와 남인의 왕권주의 간 쟁점이었다. 붕당정치기는 조선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쇠퇴와 망국에 대한 식민사관의 대안적 설명 또한 제시한다. 17세기 말 숙종의 환국정치가 붕당정치를 일당독재로 변질시키고, 18세기 영·정조의 탕평정치가 서인과 남인을 사분오열시키면서 붕당 자체가 소멸된 것이 쇠퇴의 원인이다. 이 과정에서 신권주의가 쇠퇴하고 왕권주의가 대두했다. 19세기 조선의 위기를 야기한 외척의 세도정치는 왕권주의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또한 토지생산성과 지대율의 하락은 토지겸병의 심화로 나타나며 농민전쟁이 나타나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폭발하는 와중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조선왕조는 패망한다.
쇠퇴와 망국 과정에서 나타난 조선유학사의 아이러니는 붕당정치의 와중에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거쳐 이이로 이어지는 학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율곡 이이가 『동호문답』에서 역설한 경장(개혁)은 창업기와 수성기에 이은, ‘흙담이 무너지고 기와가 부서지는’ 중쇠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핵심은 지주전호제에 적합한 조세제도의 개혁이다. 그런데 붕당정치의 일익을 담당한 동인은 이이의 경세학과 경장론을 거부한다. 특히 동인의 대표를 자임한 유성룡은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아, 이이로부터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속유(속류유학자)라고 질책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일은 서인도 이황의 수양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이이의 경세학을 상대화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숙종의 환국정치 와중에 서인이 제기한 양전도 남인이 협조하지 않는 등 난맥상을 보이며 실패하게 되고, 삼정이 문란해진다. 결국 지주전호제에 적합한 일조편법·지정은세법과 같은 개혁은 실패한다.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정약용, 신채호의 한계도 설명할 수 있다. 박찬승 교수는 실학자들이 “중세적 생산관계인 지주-전호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균전제, 여전제, 정전제 등 “새로운 생산관계를 지향”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실학자들의 경세학은 조세제도의 개혁을 무시한 채 이상적 토지제도로서 정전제의 부활만 도모한 역사적 복고주의였을 뿐이다.
지주전호제의 출현은 토지가 이미 사유화된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 토지를 다시 국유화해 균전제나 한전제를 통해 정전제를 부활시키자는 주장은 실행가능성이 없다. 게다가 이런 주장이 진보적·변혁적이라는 주장도 불합리한데, 오히려 왕권주의를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와 기호남인(실학파)의 경세학은 결함을 공유한다. 왕권주의적 환국정치-탕평정치-세도정치의 전개는 신권주의적 붕당정치의 소멸과 표리관계에 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사에서 고구려가 정통이나 신라가 정통이냐는 논쟁이 경세사학의 발전을 가로막았는데, 이는 신채호까지 이어진다. 신채호는 식민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강유위·양계초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면서도, 독일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를 채택해 정신적 유기체로서 국수(國粹, 민족정기)라는 민족개념을 고수한다. 그러나 사실상 일선동조론을 부정하는 의미만 있을 뿐, 식민사관의 만선동조론과 같은 주장을 하며, 식민사관의 핵심인 봉건제 결여론을 비판하지 못한다.
정리해보면, 앞서 중국에서 왕부지의 역사적 진화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과학으로 계승된 과정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불행’은 경세사학의 부재라는 조선 후기 지식인(사대부)의 결함까지 소급할 수 있다.
6. 조선 망국과 처변삼사
개항과 망국
개항 이후 지식인들의 관심은 서양 학문의 수용 여부였다. 위정척사파는 서인 노론의 후예로, 이항로와 그의 제자 유인석, 최익현이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위정척사파는 동양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보위하면서 서양의 학문을 사학(邪學)으로 배척했다. 일체의 개혁을 거부한 셈이다. 반면 동도서기파와 문명개화파는 이단적 서인인 북학파의 마지막 거장 박규수의 제자였다. 김윤식, 김홍집 같은 선배급 제자인 동도서기파는 중국 양무운동에 유비할 수 있는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다. 동양의 학문을 형이상학으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형이하학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반면 김옥균, 박영효 같은 후배급 제자인 문명개화파는 변법운동에 유비할 수 있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서도서기인 셈이다.
조선망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는 1880년부터 1904년까지 문명개화파와 동도서기파가 시도한 개혁이 실패한 것이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실패, 독립협회의 해산이 대표적이다. 개혁이 실패한 원인은 고종과 민비가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고종과 민비가 시대착오적 망동을 자행하던 상황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청일전쟁을 유발하면서 조선이 침몰하기 시작한다. 완전한 침몰은 러일전쟁 이후였는데, 보호령인가 식민지인가라는 쟁점은 남아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후에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한다.
개항부터 망국까지 주요 계기는 다음과 같다.
1864년 고종 즉위와 흥선대원군 섭정
1874년 고종 친정
1876년 개항
1880년 황준현 『조선책략』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한일보호조약
1910년 한일강제병합
망국 시기 일련의 망국사가 출현한다. 황현의 『매천야록』, 독립협회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1864년 고종 즉위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당대사를 서술한다. 한편 망국사를 상징하는 박은식의 『한국통사(痛史, 아프고 슬픈 역사)』는 1911년 신민회와 105인사건까지 서술했다.
박은식은 망국의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학식이 없음’(無其學)을 비판했다. 역사와 정세에 무지하여 망국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사기’에 넘어간 문명개화파, 특히 독립협회를 비판했다. 박은식은 신채호와 마찬가지로 민족정기를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중국의 변법운동을 주도한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망국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았다.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다음 다른 나라가 친다’(맹자)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역사의 보편적 인과법칙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기에, 중국에서는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으로 대체된다. 여기서 한국의 문명개화파와 분기점이 발생한다.
중국의 경우
중국의 대응을 우선 살펴보자.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증국번과 이홍장은 태평천국농민전쟁을 진압하는 동시에 양무운동을 추진한다. 한국의 동도서기파와 유사하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한계가 드러난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1898년부터 변법운동을 추진했다. 이 운동 역시 한국의 문명개화파와 마찬가지로 영국, 미국, 일본의 지원을 받은 것인데, 그 근거가 삼세진화론이다. 『춘추공양전』과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결합한 것으로, 전제군주정(거난세)과 입헌군주정(승평세)을 거쳐 공화정(태평세)에 도달한다는 주장이다.
변법운동이 실패한 후 양계초는 그 이유를 역사, 특히 경세사에 대한 무지에서 발견한다. 그 해결책이 망국사의 집필이었고, 일본에 망명해있던 1905년에 『월남망국사』를 베트남 망명객 판보이쩌우와 공저한다. 손문과 함께 ‘혁명삼존’이라 불린 장병린은 변법운동의 부르주아 개혁주의에 실망하여 부르주아 혁명주의로 전환한다. 황제가 아니라 인민을 위한 ‘자치통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현대적 통사를 서술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손문의 신해혁명도 실패하자, 손문은 ‘아는 것이 어렵고 하는 것은 쉽다’라고 개탄한다.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는 무장봉기 외에도 계몽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호응한 진독수가 1915년부터 신문화운동을 추진하고 이를 거쳐 1919년 5·4운동을 전후해 이대교가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한다.
일본의 경우
일본이 현대화에 성공한 이유는 객관적 외압과 주체적 대응의 차이에 주목할 수 있다. 객관적 외압의 강도는 중국이나 한국이 컸다. 그러나 주체적 대응에서는 일본이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현대정치사에서 중요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867년 왕정복고, 이듬해 메이지유신
1881년 의회개설칙유 반포
1882년 이토, 헌법 연구 위해 유럽 출장(~1883년). 입헌군주정 구상
1885년 이토의 주도로 내각제 채택, 45세에 초대 총리 취임
1889년 이토가 기초한 흠정헌법 반포
1890년 양원으로 구성된 의회 소집
1900년 이토가 입헌정우회를 결성하여 정당제 도입
1909년 이토 암살
메이지유신의 쟁점은 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다. 이토는 민족의 형성에서 국가의 역할을 긍정했지만, 오쿠마 시게노부와 후쿠자와 유기치는 그것을 부정했다. 국권을 통한 민권의 발전이라는 이토의 입장은 프로이센을 모델로 하는 것인데, 궁극적 목표는 영국이다. 이토의 암살에도 불구하고 이토의 후예가 군국주의자 야마가타파와 경쟁하면서 1918년 입헌정우회를 중심으로 의원내각제를 실현한다. 이것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다. 보통선거권은 1925년에 도입된다.
영국은 양원제 의회와 정당제를 내각제보다 먼저 채택했지만 일본은 내각제를 먼저 채택했다. 신권(臣權)부터 확립한 것이다. 이를 통해 500년이 걸렸던 영국의 입헌군주정 혁명을 일본은 30~40년 만에 달성한다. 군부 지휘권을 예외로 왕권으로 두었다는 결함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독일처럼 군부가 내각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에게 상주하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 화근이다. 이를 악용해 군부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고 볼 수 있다.
문명개화파의 개신교 수용
한국과 중국은 모두 변법운동에 실패했다. 중국이 왕부지의 진화주의적 역사이론,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을 거쳐 이대교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과학으로 이어진 반면, 한국에서는 문명개화파가 개신교를 수용했다. 문명개화파 내에서 김옥균, 박영효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개신교를 인식했지만, 윤치호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조선 최초의 개신교도, 미국 유학생, 신학전공자다. 윤치호는 감리교파를 선택했는데, 현대화라는 효력·효능·효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반기독교운동(구교)이나 기독교와 관련된 소송 사건(교안)이 별로 없었다. 천도교(동학)는 가톨릭(천주교)에 반대한 것으로 별 효과가 없었다. 한국에서 기독교의 대표는 천주교가 아니라 개신교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개신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을 독점했다.
개신교가 수용되는 과정은 지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884~1885년 미국 감리교파와 장로교파의 교육·의료선교가 서울을 비롯한 기호지방(경기, 호서, 호남)에서 시작된다. 1884년 장로교 앨런이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고, 1885년 감리교 아펜젤러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설립한다. 감리교 스크랜턴 대(大)부인은 이화학당(이화여전)과 상동교회를 설립한다. 1885년 장로교 언더우드는 경신학교(연희전문), 정신여학교, 새문안교회를 설립한다.
한편 1894~1895년 청일전쟁 이후 장로교파가 평안도에 전파된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전개된 1907년 대부흥운동 이후 평안도 장로교파가 개신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선교정책의 차이가 있는데, 교육·의료를 매개로 간접선교에 치중한 기호지방과 달리 평안도 장로교는 기복신앙을 자처하며 직접선교에 치중한다. 이는 유가적 전통의 강약과도 관련된다. 기호지방은 유가적 전통이 강하지만 평안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처변삼사
망국기 의병대장 유인석은 ‘나라의 위기에 생명을 바친다’라는 『논어』의 말씀에 따라, ‘처변삼사(處變三事)’, 즉 ‘국망이라는 변고에 대처한 사대부의 세 가지 행동방침’을 제시했다. 먼저 순의(殉義)는 의리(義理, 올바른 도리)를 위해 순절하는 것이다. 순의를 실천한 대표적 선비는 송병선, 최익현, 홍범식, 황현이다. 모두 서인 노론의 대표자들이다. 특히 황현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순국했다. 조선망국기 위정척사파는 서인-노론의 정통파로서 조선지식인의 주류라면, 북학파(동도서기파, 문명개화파)는 노론의 이단파로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처변삼사에서 나머지 두 가지는 순의와 거의다. 수의(守義)는 의리를 위한 망명이고, 거의(擧義)는 의리를 위한 거병이다. 수의와 거의는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이라 할 수 있고, 망명과 무장투쟁은 슬픔이 아니라 괴로움이다.
독립협회의 후예인 신민회는 경술국치를 전후로 분화한다. 윤치호는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여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다.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에 ‘105인사건’이 발생하며 신민회가 해체된다.
감리교도 윤치호와 장로교도 안창호는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고수한다. 반면 감리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이회영·시영 형제와 이동녕은 독립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역시 감리교도였던 이동휘는 독립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며 연해주로 망명해 한인사회당을 건설한다. 독립의 방법이 무장투쟁인가 공산당 건설인가라는 차이였다.
『세미나』에는 망국 시기 사대부와 왕족을 비교하는 부분도 있다. 조선 망국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왕권주의와 그 적폐로서 고종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이다.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발발한 3·1운동과 그 후의 독립운동에서 조선왕조를 재건하려는 시도는 전무했다. 고종과 그 친족 20여 명은 일본황적에 편입되어 왕공족의 특권을 향수했다.
7. 정치이념과 지식인
『세미나』는 윤치호에서 시작하는 반공주의자와 이동휘에서 시작하는 공산주의자 사이의 갈등에 주목하며 현대 지식인사를 설명한다. 이에 앞서 지식인을 분류하는 기준이 되는 정치이념의 의미와 지식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문과 지역, 학교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선 살펴보자.
자유주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공산주의
『세미나』 2권의 『종합토론』에는 지식인의 역사를 설명하는 기준인 정치이념의 의미를 명확히 정의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사회주의를 반(反)자유주의로 정의하고 이를 다시 봉건적 사회주의, 프티부르주아적 사회주의,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로 구분한다. 봉건적·프티부르주아적 사회주의를 보수주의,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를 진보주의라 할 수 있다. 당시 보수주의는 칼라일, 진보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이 대표한다. 자유주의는 스미스라 할 수 있겠다.
자유주의라는 정치이념의 이론적 근거가 경제학이고, 공산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마르크스 필생의 업적인 경제학 비판이다. 비판은 변증법적 ‘지양’(止揚, Aufhebung/sublation)인데, ‘곤란이나 공백 같은 결함을 해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비판은 반대와 다르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를 지양(비판)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에 미달(반대)한다. 칼라일에게 경제학은 ‘우울한 학문’이었을 따름이다. 진보주의는 자유주의와 친화적일 수도 있지만, 인민주의와 친화적일 수도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진보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현대적 자유주의로 이행을 매개했다. 현대적 자유주의는 페이비언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인데, 그 경제학 이론을 제공한 것이 밀을 계승한 마셜, 피구, 케인스다. 반면 미국적 진보주의는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이 대표하는데, 인민주의와 친화성이 있다.
인민주의와 파시즘
한국에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포퓰리즘으로 쓰기도 하는 인민주의는 혼란이 많은 개념이다. populism을 인기영합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은 근거가 별로 없으므로, 인민주의에 의해 인민(people)이 왜곡된다는 의미로 ‘인민주의’라고 번역한다. 사회운동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처럼 호도되는 라클라우-무페 류의 ‘좌파포퓰리즘’은 인민주의를 하나의 정치이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호소하는 행위, 이데올로기적 호명 양식에만 주목한다. 이로써는 실재하는 역사적 현상을 분석할 수 없다.
과천연구실은 노무현 정부 시절 『인민주의 비판』(2005)을 출판했다. 여기서 인민주의는 하나의 정치이념으로서 보수주의와 구별되고, 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사회주의를 배격한다고 정의한다. 또한 구체적인 역사적 현상으로 분석한다. 인민주의의 기원은 19세기 말 미국과 러시아였는데, 미국에서는 자유주의로 발전했고,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럽대륙에서는 인민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코퍼러티즘과 파시즘으로 변모한다. 전간기 유럽에서 코퍼러티즘과 파시즘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공주의적 대안이었다. 로마 교황청이 개신교적 자유주의도 무신론적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 제안한 코퍼러티즘을 실현한 것이 무솔리니의 파시즘이었다. 히틀러는 이를 나치즘으로 체계화했다.
다양한 형태의 인민주의가 공유하는 특징은 엘리트와 대중의 대립이다. 인민주의는 인민을 ‘엘리트와 대립하는 대중’이라는 의미로 왜곡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인민주의로 타락시키는 것이 데마고그(demagogue, 대중선동가)의 데마고기(demagogy, 대중선동)이다. 니체가 이를 이론화했는데, 하층민의 종교를 추동하는 힘은 ‘원한’(resentment), 즉 분노와 복수로 귀결되는 증오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인민주의는 ‘우리’와 ‘적’을 만들어내는데, 적을 악마화하는 것은 정치적 논리라기보다는 사이비 종교적, 도덕적 성격을 띠며 곤경에 빠진 인민의 원한의 감정에 부합한다.
반자유주의에 보수주의, 진보주의, 인민주의, 공산주의가 있다면, 반공주의에도 보수주의, 진보주의, 인민주의, 자유주의가 있는 셈이다. 이후 반공주의자에 대한 설명은 이 분류를 따른다.
지식인의 형성 과정과 지역적 차이
『세미나』의 현대 지식인사에는 매우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설명과 평가가 있다. 이러한 설명의 방법이 되는 이론과 그 전제가 되는 입장에 대해서도 책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역사학에서 전기의 역할에 대한 이론이다. 전기는 구조의 역사와 구별되는 행위·행위자의 역사다.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구조로서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주목한다. 제도는 구조에 적합한 ‘행동의 규칙’이고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상징하는 ‘행동의 규범’이다. 그런 규칙·규범과 관련된 ‘개인’의 행동에 마르크스주의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전기를 집필할 수 있다.
신민회의 분화, 즉 한국 지식인의 분화는 개인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개인’이란 일상생활의 실망(전망의 상실)으로부터 고양되어 ‘자기보존적 개인’에서 변모된 ‘세계사적 개인’이다. 세계사적 개인이란 헤겔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문학 비판』에서 설명된 바 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면서, 서사시의 객관성과 서정시의 주관성을 결합한 것이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비극의 본질은 운명과의 대결인데, 이를 통해 비극은 역사철학적 개념으로 승격한다. 비극적 영웅은 ‘진리의 순간’으로서 위기와 대결하는 ‘세계사적 개인’, 즉 역사적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개인이다. 물론 영웅과 천재라고 ‘세계사적 개인’인 것은 아닌데, ‘세계사의 행정(行程, 진로)에 진보적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퇴보적 역할을 한다면 간웅(세상을 어지럽히는 영웅)일 뿐이다.
『세미나』는 또한 개인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 집안과 고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앞서 유가 전통이 강한 기호지방과 유가 전통이 약하고 개신교를 받아들인 서북지방 지식인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을 출신에 따른 결정론으로 이해하거나 더 나아가 ‘일종의 봉건의식’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책에도 자세히 나와 있듯, 유가사상(주희의 『소학』)의 군자론은 혈연·지연을 학연으로 지양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학연을 진리로 지양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혈연을 지연으로 지양하지 못하면 가족주의, 지연을 학연으로 지양하지 못하면 지역주의며, 학연을 진리로 지양하지 못한 것이 학벌주의라고 비판한다.
지식인사에서 혈연, 지연, 학연을 살펴보는 것은 이것들을 진리로 지양해가야 한다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학연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가족이나 이웃에서 보고 배운 것이 개인의 지식을 결정한다. 또한 학교 교육이 부실한 상황에서는 학연조차 혈연이나 지연에 지배된다. 예를 들어 앞서 조선사에 있어서 동인편향적 대중사학자의 서인에 대한 증오심은 상상 이상이고, 가문사학이라고 비판한다. 뒤에서 살펴볼 윤치호에 대해서는, 친일파라는 무고에 대해서는 “가문사학이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비판을 하지만, 개신교 개종을 설명할 때는 중인·무인 출신에 서얼이라는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전제로 우연이나 예외는 항상 존재한다. 혈연·지연이 필연적으로 개인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뒤에 이동휘 선생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혈연·지연·학연을 지양함으로써 예외의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생략했으나 1980년대 민중민주파에게 박헌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박갑동 선생에 대한 언급도 자세히 나온다. “영남의 동인 집안 출신이자 일본유학파 출신이면서도 ML파-장안파가 아니라 박헌영 선생과 남로당을 지지한 것은 결국 진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8. 한국의 반공주의자
윤치호의 자유주의적 반공주의
갑신정변의 주모자 중 김옥균은 암살당해 요절했고, 박영효는 생존했으나 친일파로 전락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멸문지화를 당하자 미국으로 망명했고,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갑오개혁에 ‘외신’(외국인 신하)으로 참여해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를 지도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를 공격하자 미국으로 귀환한다.
문명개화파의 후배 격인 윤치호는 박영효나 서재필처럼 친일이나 친미로 경도되지 않으며 문명개화파를 계승, 발전시켰다. 윤치호의 반공주의는 보수주의나 진보주의가 아니라 개신교 자유주의였다. 베버의 독일식 자유주의가 개신교를 ‘자본주의 정신’이라 주장한 것과 비슷한 셈이다. 특히 감리교를 수용한 것은 현대화라는 ‘효력, 효능, 효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감리교의 선교방침은 교육과 의료를 보급하는 간접선교였고, 기호지방에서는 장로교파도 이런 간접선교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반대한 논리도 마찬가지다. 현대화에 ‘무력, 무능, 무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식민지현대화론’도 수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개신교 자유주의로서 ‘개신교현대화론’을 주창했다고도 할 수 있다.
1920년대 공산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 부상하며 기독교 비판이 본격화된다. 그 비판에 대응해 개신교는 1932년에 사회복음이 기독교사회주의로 발전하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목적의 ‘사회신조’를 채택한다.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 감리교파가 주도했다. 반공주의를 교리 차원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윤치호는 유가사상의 귀결이기도 한 ‘조선인의 고질병’ 때문에 공산주의가 유행했다고 주장했다. 그 병은 기생하려는 습관인데, 유가의 가족주의에서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습관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왕권주의의 귀결인 세도정치로 인해 문벌이 부상한 망국사를 조선사 전체로 일반화한 오해라고 『세미나』는 비판한다. 또한 윤치호의 개인적 특성에도 주목한다. 서얼·무관 출신 중인 집안의 윤치호에게 조선에 대한 미련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식민지적 수탈 때문에 공산주의가 유행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병합이 없었다면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100배 이상의 손해를 볼 것’이고, 강제병합 이후 조선의 발전은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발전’일 따름이라고 했다.
『세미나』는 윤치호가 친일파라는 통설에 대해 여러 쟁점을 제기한다. 우선 정설로 평가받는 윤경로 교수의 신민회 연구에서는 105인사건을 통한 신민회 탄압의 핵심을 안창호로 보지만, 2011년 기노시타의 숭실대 박사논문은 탄압의 핵심이 윤치호의 구금이었다고 주장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윤치호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사의 대가인 민경배 교수의 연구를 소개한다. 민경배 교수는 윤치호가 한국 기독교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고, 중일전쟁 후 ‘일시적 용일’은 ‘교회와 민족의 생존’을 위한 ‘상징적 수난’이자 ‘대속적 수모’로 ‘순교자’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해석도 제기한다. 중일전쟁기에 공산주의자가 아닌 한 고노에 후미마루의 대동아공영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일전쟁 초기인 1937~39년과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41년에 총리를 역임한 고노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한다. 그는 영국이 지배해 온 세계경제가 유럽·소련·미국의 블록경제로 해체될 것으로 예상했다. 반공주의자이자 반자본주의자이며, 소련·미국과 전쟁에 반대한 그는 유럽처럼 아시아에서도 일본·만주·중국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윤치호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여운형 같은 사회주의자도 동조했다. 중국에서는 손문의 수제자 왕조명이 반공·반일 대신 반공·친일을 선택했다. 또한 영국 노동당 창시자인 웹 부부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한다. 사회주의를 국가주의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윤치호가 중일전쟁을 지지한 것은 조선이 ‘일본의 아일랜드’에서 ‘일본의 스코틀랜드’로 전환할 가능성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이 확고해지면 조선이 아일랜드처럼 수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처럼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립은 못 해도 자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군국주의가 자유주의를 압살하고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비화하면서 그의 기대는 좌절된다. 윤치호는 1943년부터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소외된 윤치호는 1945년 12월 개성에서 사망한다.
해방 이후 반공주의의 분화
해방 이후 개신교 반공주의는 친일을 친미로 대체하며 지속된다. 친미반공주의의 핵심세력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8년 단정 수립까지 탈북한 중·상층민 개신교도다. 1945년 말까지 절반이 탈북했고, 주요 인사는 이미 8~10월 중 탈북한다. 해방정국에서 단정 수립을 추진한 그들은 적산을 무상으로 불하받았다. 1950~60년대 대자본가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평안도 출신이었다.
특히 흥사단 계열의 장로교도 지식인이 미군정의 핵심을 구성한다. 1913년 안창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창설한 흥사단은 이승만의 동지회와 함께 미주 한인사회를 양분하고 있었다. 흥사단은 1938년 안창호 사망 이후 소멸했다가 미군정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들은 미국 유학 경력, 기독교 인맥, 관서(평안도, 황해도) 지연을 매개로 미군정청 한국인 관료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1947년 11월 당시 흥사단 국내 재적자 141명 중 미군정 관료나 공직자로 재직한 인사의 수만 43명에 이르렀고, 그중 88%인 38명이 관서지방 출신이었다. 특히 하지 중장의 통역관 겸 비서인 이묘묵과 민군정청 인사행정처장을 역임한 정일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정 수립의 주역 중 또 하나는 서북청년회(서청)다. 평안도 장로교도 중에서 구세대가 흥사단이면, 서북청년회는 신세대라고 할 수 있다. 한경직의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35세 이하의 청년을 가입자격으로 해서 1946년에 결성된다. 서청의 활동은 대북첩보·유격활동과 대남테러 활동이었다. 특히 서청 공식 결성 직전에 발생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항쟁, 1948년 4.3 제주항쟁 등에 개입해 테러를 자행한다. 그로 인한 논란으로 이승만이 조직한 대동청년단에 부분 통합된 후,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까지 포함해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면서 소멸한다. 대한청년단 서청의 회원들은 해체되는 과정에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부의 주도세력으로 변신한다. 특히 5.16쿠데타 주역인 육사5기와 9기에 서청 출신이 많다.
흥사단과 서북청년회의 반공주의는 냉전적 성격보다 오히려 열전적 성격이었다. 흥사단은 해방정국에서 보수주의를 대표했고, 미군정의 실세는 한민당이 아니라 흥사단이다. 그러나 반탁운동이 단선과 단정으로 이어지면서, 한민당은 물론이고 흥사단도 이승만에게 이용만 당한 셈이다. 한국전쟁 직후 한민당과 흥사단이 민주당으로 통합되면서 민주당 구파와 신파를 형성한다. 김성수, 윤보선 등은 민주당 구파로 그 마지막 세대가 김영삼이다. 흥사단, 자유당 탈당파로 이뤄진 민주당 신파는 가톨릭교도인 장면을 거쳐 김대중으로 이어진다.
해방정국에서 흥사단과 분리·정립한 또 다른 평안도 장로교파 세력이 장준하와 『사상계』다. 『사상계』는 오락지향적 대중잡지와 달리 이념지향적 고급잡지였다. 냉전기 이데올로기 투쟁을 자임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제시한 잡지다. 1918년 평북 의주에서 출생한 장준하는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일본신학교 예과 재학 중 학병에 지원하고, 우여곡절 끝에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한다. 여기서 탈출학병 제1호인 김준엽과 해후한다. 1945년 말 귀국해서 1950년 백낙준 문교부 장관(신성중학교 선배)의 후원으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1953년 장준하는 백낙준과 미국공보원의 지원을 받아 『사상계』를 창간한다. 편집위원과 필진 대부분을 서북 출신 지식인으로 구성했다. 그 기준은 반공이었고, 친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동인문학상을 제정한 것이 한 예다. 김동인의 아버지 김대윤은 평양의 초대 장로이며, 이복형 김동원은 평양을 대표한 장로다. 단정 수립 후 제헌의회 국회부의장이 된다.) 백낙준의 영향으로 연세대 교수가 주류였는데, 이후 김준엽이 합류하며 고려대 교수도 대거 참여한다. 한신대 김재준과 퀘이커 교도이자 무교회주의자인 함석헌도 참여한다.
친정부적이었던 『사상계』가 이승만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부터다. 미국 MIT 경제학 교수였던 로스토우가 중앙정보국(CIA) 요원이기도 한 밀리칸과 함께 현대화론을 공개한 것이 1957년이다. 중앙정보국은 1958년부터 현대화론에 따라 이승만 정부의 교체를 구상한다. 또한 장준하는 5·16을 환영했는데, 반공이라는 국시를 고수하지 못한 장면정부의 무능이 근거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우위’에 대한 주장은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쿠데타 이데올로기와 유사했고, 흥사단과 마찬가지로 적산불하를 통한 재벌형성을 지론으로 해, 쿠데타 이후 추진된 재벌 중심의 현대화에 친화적이었다.
재야의 인민주의적 반공주의
『세미나』는 장준하의 자유주의 또는 진보주의적 반공주의가 박정희와의 경쟁에 몰두하는 재야운동을 하면서, 인민주의로 전락했다고 평가한다. 초기 쿠데타를 지지했던 장준하가 박정희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대선부터다. 박정희와 윤보선의 경쟁 구도에서 박정희는 여순사건의 관련자로서 공산주의자 전력을 의심받았고, 야권 쪽에서 사상 문제를 제기한다. 『사상계』도 이 문제를 대선 이후에도 계속 가져간다. 장준하에게는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사상계』의 민족주의는 일관성이 없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했는데, 일본 정부의 남북한 등거리외교에 대한 의심과 미국이 남한에 대한 책임을 일본에 전가할 것이라는 염려가 영향을 미쳤다. 즉 친미 반공주의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한 반대의 근거였던 것이다.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도 박정희의 사상 문제를 제기하다가 허위사실유포죄로 수감된다. 이후 옥중출마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 과정에서 『사상계』 동인이 분열하고, 장준하는 정계에 진출하며 1970년에 『사상계』는 폐간한다. 장준하는 1973년 이후 유신반대투쟁에 몰두하다가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추락사한다. 김재규와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이를 계승한 것이 1966년 약관 29세의 서울대 영문학 전임강사 백낙청이 창간한 『창작과비평』이었다. 『창작과비평』의 전성기는 유신시대다. 초창기 시민문학론이 민족문학론으로 변모했고, 한국사학계와 사회과학계의 필진을 확보하게 된다. 황석영 작가, 한국사학자 강만길, 국제정치학자 이영희 등이 필진으로 가담하게 된 것이다. 또한 백낙청이 해직되면서 개신교계 해직교수를 중심으로 한 재야인사와의 교류가 심화한다. 민중사회학자 한완상과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대표적이다.
『사상계』 장준하의 친미반공주의와 민족주의의 모호한 결합은 『창작과비평』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으로 계승된다. 체제라고 규정하는 것조차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는 분단체제론은 한반도 분단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남한의 사회성격을 무시하고 남한변혁론을 부정한다. 『창작과비평』은 강만길을 중심으로 분단체제론을 발전시킨 분단사관을 제시한다. 분단사관의 핵심은 통일국가가 성립하기 이전까지는 분단시대이고, 분단시대에는 통일운동이 모든 사회운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1984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한국근대사』, 『현대 지식인사』를 출판했는데, 사회경제사가 아니라 정치사, 운동사 위주였다.
1985년 한국사회성격 논쟁은 분단사관의 인민주의적 한계를 부각했다. 백낙청은 『창비 1987』(무크 2호)의 좌담에서 분단사관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대안이라고 강변했다. 본격적 논쟁은 사회경제사관의 복원을 주창한 한국사학계 소장 연구자들이 제기하는데, 강만길은 분단사관을 고수한다. 이 논쟁을 계기로 『창작과비평』은 민중민주파에 반대하면서 민족해방파에 가담한다. 이른바 ‘비(非)주사 민족해방파’라고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은 수용하지 못한 인민주의적 민족해방파다.
김재준·문익환·안병무의 반공주의
한국신학대(한신대)의 ‘민중신학’도 역시 ‘비주사 민족해방파’라고 할 수 있다. 한신대 신학과는 현대 지식인의 역사에서 『사상계』나 『창작과비평』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호지방의 장로교파는 감리교파처럼 현대화를 지향해온 것과 달리 평안도에서는 ‘보무적’ 성격(무속신앙과 상보적 성격)을 강화해 기복신앙화한다. 함경도 장로교파는 평안도의 이러한 결함을 비판한다.
상징적 인물이 송창근 목사와 그 후배인 한경직, 김재준 목사다. 북간도 명동학교 출신인 송창근은 예수가 사회적 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북간도에서 이동휘의 공산주의는 물론, 윤치호의 사회복음주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송창근은 일본 아오야마 신학부를 졸업한 다음 미국 유학을 감행한다. 이를 계기로 초교파적 연합교회와 동시에 자유주의적, 중도주의적 신학을 지지하게 된다.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감리교파에 비해 보수적이던 장로교파를 혁신할 희망이었다. 귀국 후 셋은 1935년에 감리교파가 주도한 애빙던 출판사의 『성경주석』(1929)의 번역에 참여한다. 그러나 성경의 축자영감설(글자 하나하나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과 문자무오설(글자 모두에 오류가 없다)을 고수하던 장로교파는 이들에게 사과를 강요하기도 했다.
송창근은 김재준, 한경직과 함께 1940년 한신대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설립한다. 이후 조선신학교는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의 후원으로 천리교 적산을 무상으로 불하받아서 한신대를 설립하게 된다. 한신대는 적산불하의 효시였다. 한국전쟁 와중에 송창근이 납북되고, 1947년 그 후배라 할 수 있는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고, 1953년에 김재준과 한경직이 분열하면서 결국 기장(기독교장로회)과 예장(예수교장로회)이 분리된다. 김재준은 신학을 강조했고, 한경직은 목회를 강조했다.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은 반공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이론이었다. 바르트와 함께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인 니버는 마르크스주의를 ‘종말론적 교조주의’로 규정했는데, 김재준도 원죄론의 입장에서 종말론을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반비판인 것이다. 한경직과 결별한 김재준은 한신대를 책임지게 된다. 김재준은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를 계기로 장준하와 함께 재야의 핵심이 되었다. 그 논리는 앞에서 본 친미반공주의다. 그래서 한경직도 반대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3선개헌에서 다시 분열된다. 한경직은 3선개헌이 친미반공주의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반면, 김재준은 장준하와 유사한 논리로 반대한다. 그러나 김재준은 유신이 시작되자 캐나다로 이민한다.
1970~1980년대 한신대 중심의 재야운동의 상징은 문익환 목사와 안병무 교수다. 유신시대 김재준을 계승한 강원룡 목사는 경동교회,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설립했으나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면서 재야운동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문익환의 반공주의는 10대 시절 북간도 경험으로 소급된다. 문익환이 태어나고 자란 북간도 명동에 1900년대 말 신민회가 개신교를 전파하면서 주민들은 개신교로 개종한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소작쟁의 과정에서 공산주의가 전파되고, 공산주의는 명동을 분열시켰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윤동주와 송몽규의 집안은 소작인의 편에서 공산주의를 수용했지만 문익환 집안은 지주 편에서 개신교를 고수한다. 해방정국에서 반탁운동을 지지한 문익환은 단정 수립 후 유학을 떠나고, 맥아서 총사령부(GHQ)의 군속으로 참전해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장준하의 의문사 이후 재야운동에 참여했고, 남은 생애 19년 중 11년 동안 여섯 차례 투옥된다.
1985년 민통련 의장으로 추대되어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관철함으로써 대선의 패배, 재야운동의 분열을 초래한다. 1989년에 방북해서 재야운동의 돌파구를 발견하려고 시도하지만, 공안정국 속에서 재야운동의 분열을 기정사실화한다. 문익환은 안병무나 동생 문동환과 달리 김영삼 정부를 지지했고, 범민련에서 문익환은 ‘안기부 프락치’설을 제기하자 그에 항의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반공주의자인 문익환이 ‘주사 민족해방파’일 수는 없다. ‘비주사 민족해방파’를 프락치로 고발하는 것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적 수법이었다.
마지막으로 안병무에 대해 설명한다. 안병무는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신학자였고, 김대중을 지지한 재야운동권의 핵심이었다. 또한 한신대의 종합화를 추진했다. 그는 북간도 은진중학교와 일본 유학을 거쳐 1946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해 서울대기독학생회 초대회장을 맡는다. 1953년에는 향린교회를 설립하고, 중앙신학교(강남대)에도 참여한다. 1956~1965년에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70년에 한신대에 부임한다. 1973년에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1975년 문동환과 함께 해직된 뒤에 1984년까지 해직기간 중 민중신학을 구체화한다.
안병무는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오클로스(ochlos), 즉 ‘가난하고 억눌리고 병들고 절망한 갈릴래아의 백성’에서 고유한 민중 개념을 발견한다. 배제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라오스(laos), 즉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의 백성’에 대비되는 것이었다. ‘역사의 예수’를 추구하면서 ‘민중은 스스로를 구원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말년에 안병무는 해방신학처럼 민중신학에서도 공산주의적 경향이 강화하던 상황에서 민중신학의 핵심은 민중이 아니라 신학이라 주장한다. 1986년에 안병무, 문동환이 김수행, 정운영의 사임을 강요하고 경상학부의 해체를 시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77년에 이미 『기독교사상』의 좌담에서 ‘공산당에 빼앗긴 민중’을 탈환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목적이라 공언한 적이 있다.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의 김진호 목사가 민중 개념을 인도 포스트식민주의 역사학의 하층민(서발턴, subaltern)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반공주의자의 역사를 정리해보자. 윤치호로 대표되는 문명개화파는 현대화를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한국의 지식인은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분화한다. 기독교 반공주의는 윤치호의 자유주의적 반공주의에서 해방 이후 다시 분화한다. 흥사단의 보수주의적 반공주의와 『사상계』의 진보주의적 반공주의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단선-단정 수립에 협조한 흥사단은 이승만에게 버림받은 뒤 민주당 신파를 형성하게 된다. 한편 『사상계』와 『창작과비평』의 평안도 개신교도와 한신대 신학과로 대표되는 함경도 개신교도는 재야운동의 핵심축을 이룬다. 그런데 『창작과비평』의 분단사관, 한신대의 민중신학을 보면 이들이 모종의 자유주의 내지 진보주의에서 인민주의로 퇴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인민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것은 1985년 한국사회성격 논쟁이었다.
9. 한국의 공산주의자
이동휘의 반일공산주의
한국 공산주의의 역사는 이동휘에서 시작한다.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강화진위대 대장으로 부임하면서 개신교에 입교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신민회에 가입했고 1911년 105인사건 이후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한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체포된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볼셰비키와 해후하여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가 된다. 당연히 10월 혁명 직후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석방된다.
1918년 영국, 미국, 프랑스가 러시아혁명 전복을 위해 내전에 개입하자 일본군도 연해주로 진출한다. 신민회 계열의 분화가 심화하는데, 이동휘는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과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한 신흥무관학교의 이동녕과 결별한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한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지만, 이동녕이나 안창호의 친미주의와 이동휘의 친소주의의 갈등은 지속된다.
러시아 조선인사회 내에서 갈등이 발생하며 이동휘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분열한다. 러시아로 귀화한 조선인이 중심인 이르쿠츠크파에게 민족해방은 부차적이었다. 게다가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둘러싸고 갈등이 폭발하면서, 1921년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고 이동휘를 지지하던 독립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또한 김구는 이동휘 최측근 김립을 암살한다. 이렇게 이동휘의 시도는 실패하지만, 국내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동시에 소련의 정책도 변화한다. 1921년 내전이 종식되고, 일본군이 철수하며, 1924년 레닌이 사망한다. 1925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한국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소련의 지원도 철회된다.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한다는 코민테른의 결정은 이런 정세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1925년에 조직된 조선공산당에서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은 서울청년회와 화요파의 갈등으로 재생산된다. 게다가 일본유학파인 북풍회그룹까지 가세한다. 조선공산당은 화요파가 주도하다가 검거된 이후에는 ML파가 주도한다. 그러나 1928년 코민테른이 기존 공산당을 해체하고 대중운동을 토대로 공산당을 재건하라고 결정한다.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주역은 화요파 출신 박헌영의 『콤뮤니스트』 그룹과, ML파 출신 이재유가 서울·상해파 출신 이현상, 신진 공산주의자 김삼룡·이관술 등과 조직한 경성그룹이다.
박헌영과 공산당 재건운동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19년 경기고보를 졸업한 박헌영(1900~1956)은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해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한다. 처음에 접촉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아무런 투쟁경력이 없는 그의 가입에 유보적이었기 때문이다. 1921년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1925년 창당 때부터 조선공산당의 핵심이었다. 1929년 코민테른이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를 통합하여 조직한 조선위원회의 핵심이기도 했다. 조선위원회의 기관지가 『콤뮤니스트』여서 ‘국제선’(국제조직)을 『콤뮤니스트』그룹이라 부르기도 했다.
함남 삼수에서 태어난 이재유(1905~1944)는 보성·송도고보를 중퇴하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에 이현상(1905~1953)과 김삼룡(1910~1950)을 만나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했다(경성트로이카). 또 이관술과 경성재건그룹·준비그룹을 조직한다. 이재유의 경성그룹이 박헌영을 지도자로 영입해 1939년 결성한 것이 경성콤그룹이다. 경성콤그룹은 1920년대의 분파투쟁을 지양했다. 결국 화요파 박헌영, ML파 이재유, 서울상해파 이현상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1945년 8월에 재건한 조선공산당도 1920년대 분파투쟁과 관계가 없었다. 1980년대 주사파가 박헌영과 재건파 조공을 종파주의자로 비판한 것은 마타도어다.
박헌영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소련의 대표적 한국학자인 샤브시나의 연구를 인용한다. 샤브시나는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소련의 서울 영사관에서 정무담당 부영사로 부임한 샤브신의 부인이다. 샤브시나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이르쿠츠크파적 편향과 만주파적 편향을 비판한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입장에서는 만주의 무장투쟁보다 국내의 공산당 재건운동이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소련 외교부는 박헌영을 지지한 반면, 소련 군정은 김일성을 지지했다고 증언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보급
국내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메이지 천황을 승계한 다이쇼 천황의 재위기간은 1912~1926년인데, 통설은 1905년 러일전쟁 승전부터 1931년 만주사변 발발까지를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로 부른다. 이 덕분에 일본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가 일본 유학생을 통해 수입되고, 국내에서도 3·1운동을 계기로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데다가 총독부도 문화통치를 표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제시기 한국사회주의지식인 연구』를 쓴 전상숙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1920년대 조선공산당 관련자의 출생지는 절반 정도가 기호지방이었고, 그 과반이 호남지방이었다. 나머지는 영남과 서북이 반분하는데 서북에서는 관북(함경도) 출신이 관서(평안도·황해도)를 압도했다. 호남과 영남의 마르크스주의자는 대부분 지주 출신의 일본 유학생이고, 관북에서는 러시아혁명의 영향과 일제가 시작한 산업화의 영향이 컸다.
출생과 달리 거주지는 서울의 비중이 컸다. 학력, 직업, 생활수준 등에서 조선공산당 관련자의 다수가 중·상층민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즉 대중적 토대의 취약함으로 주로 사상운동에 치중한 것이다. 1930년대 공산당 재건운동 관련자 중에서 중·상층민 출신의 지식인 비중이 감소한 것은 그만큼 대중적 토대가 확대된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세대교체다. 1920년대에는 다수가 1900년대생이었던 반면 1930년대에는 다수가 1910년대생이었다. 1900년대생이 대량으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박헌영, 이재유 등 1900년대생 선배그룹의 일부가 남아 1910년대생을 지도한 것이 공산당 재건운동이었다. 나아가 1930년대생을 가르쳤는데 박현채 선생이나 김용섭 교수다. (1920년대 학병세대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공산당 재건운동이 진행되는 동시에,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향자도 급증한다. 중일전쟁 직전에는 주로 가족 문제와 수형생활의 고통을 인한 ‘행동적’ 전향이 전향 이유의 34%를 차지했다. 행동적 전향이란 사상은 포기하지 않고 운동만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에는 시국 인식으로 인한 이론적 전향이 전향 전체의 46%를 차지한다. 특히 코민테른의 국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런 전향을 정당화한다. 앞서 살펴본 동양 먼로주의로서 대동아공영권을 수용한 것이다. (전향에 대한 논의는 이후 386세대론으로 이어진다.)
백남운과 전석담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사회성격 논쟁에는 강좌파-봉건파(인정식·이청원)나 노농파-자본파(박문규·박문병)의 입장만 있었다. 일본의 1930년대 사회성격 논쟁의 쟁점은 메이지유신의 성격이었다. 강좌파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을 절대군주정이 구조적으로 지배하는 반(半)봉건적 사회로 규정한 반면 노농파는 자본주의적 사회로 규정했다. 강좌파는 변혁의 전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면, 노농파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농파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라 좌파 사회민주주의자였다. 중국에서도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식민지반봉건사회구성체론에 반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사회구성체론을 주장했다. 전자를 농촌파-봉건파라고 불렀고 후자를 경제파-자본파라고 불렀다. 이 논쟁은 자본주의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법을 간과한 것으로, 사회구성체 논쟁이라 부를 수 있다. (생산양식, 사회구성체, 사회성격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전 서평에서 설명했다.)
1980년대 한국사회성격 논쟁이 참고한, 혁명 이후 러시아의 사회성격논쟁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파브로프스키는 레닌의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가 현대 제국주의에 미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시도로프는 이를 비판하면서 러시아 제국주의의 특수성이 군사적·봉건적 성격이라고 주장했다. 시도로프의 군봉제국주의론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단계가 아니라 경향으로 인식하는 발단이었다. 러시아는 산업혁명을 완성하는 동시에 제국주의로 이행했는데, 이때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한 독점의 형성이 국독자적 경향인 것이다. 중국에서도 모택동-진백달이 주장한 매판적·봉건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론(관료자본주의론)이 사회성격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착목했다고 할 수 있다.
윤소영 선생은 백남운과 전석담에 주목한다. 이전 서평에서 살펴본 대로 백남운의 이식자본주의론에 입각해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으로 식민지성과 반봉건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자는 백남운(1894-1979)이었다. 전북 고창 출신 수원 백씨로 그의 집안은 서인 정통파인 노론으로 위정척사파였다.
백남운은 사회사 논쟁(봉건제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의 대가이면서 이식자본주의론을 통해 사회성격논쟁(자본주의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에도 단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해방정국에서 백남운은 재건파 조선공산당에 합류하지 않고 연안파와 함께 조선신민당을 조직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인민주의적 설명은 박헌영의 ‘극좌파’노선과 백남운의 ‘중도좌파’노선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너무 과도한 해석이다. 그런 차이만으로 백남운이 ‘미제의 고용간첩의 두목’이라는 김일성의 무고에 동조해, 박헌영의 숙청에 일조했다고 설명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백남운의 작업을 계승한 동시에 박헌영을 도운 연구자가 해방정국에서 경성고등상업학교(고상)의 교수로 부임한 전석담(1916-?)이다. 황해도 은율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경성콤그룹의 성원이기도 했다. 해방정국에서 일련의 저작을 폭발적으로 발표한다. 윤소영 선생은 한국사회사 논쟁은 상당 부분 정리가 되었으나, 한국사회성격 논쟁은 전석담에 이어 박현채와 자신이 나름 노력했음에도 일천한 상태라고 평가한다. 고등상업학교의 전석담 전통의 단절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월북한 주요 경제학자 25명 중 고상 교수가 6명이나 되기 때문에 1960년대 전반까지 서울대 경제학과의 교수진은 형해화했다고 회상한다. 한국사학사는커녕 한국정치학사에 비견되는 한국경제학사가 없는 것은 그만큼 한국경제학계가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활동가와 연구자
윤소영 선생은 전상숙 교수가 분류한 공산주의자의 세 가지 유형을 인용한다. 전상숙 교수는 ‘행동적’ 활동가, ‘이론적’ 활동가, 연구자의 모델을 각각 이동휘, 박헌영, 백남운으로 설정한다. 여기서 윤소영 선생은 행동적 활동가와 이론적 활동가는 유형이라기보다 활동가가 성숙해가는 단계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마르크스는 연구자의 모델이었고 레닌은 활동가의 모델이었다. 레닌은 당대 러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론적 활동가였다. 이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가 철학(sophia)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episteme)이다. 경제학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을 대표한다. 다음 서평에서 다루겠지만, 애덤 스미스의 이론적 역사로서 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이 역사과학이다. 이론적 활동가로서 레닌의 이론은 경제학이었다. 초기 대표작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1899)이고 후기 대표작은 『제국주의』(1916)이다.
알튀세르가 비판했듯이, 스탈린에게는 경제학보다 철학이 우위였다. 철학에서도 역사유물론(‘사유’)보다 변증법적 유물론(‘변유’)이 우위였다. 변유를 통해 사유를 지배하고, 사유를 통해 경제학을 지배하려던 것이 스탈린주의다. 그러나 철학과 달리 경제학적 이론은 조작할 수 없다. ‘현실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김일성주의)이 극단적 스탈린주의인 이유는 철학인 동시에 경제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이론적 활동가라 할 수 있다. 레닌 같은 천재는 아니나, 진백달이라는 탁월한 이론적 비서의 이론을 수용할 수준은 되었다. 그래서 중국혁명의 이론으로서 관료자본주의론과 신민주주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혁명 이후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 부단혁명론의 관점에서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론가’ 박헌영 선생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 이론가를 숙청한 ‘바보’ 김일성 주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말년의 문화혁명기 모택동은 문제가 많은데, 연안시대부터 대약진운동까지와 달리 문화혁명기에는 이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반유리’(造反有理, 반역은 정당하다)라는 구호밖에 없었다.
『세미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동휘 선생과 박헌영 선생을 비교한다. 이동휘의 행로에는 우연이 많이 작용했다. 우연히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고, 우연히 체포되어 볼셰비키와 해후한 것이다. 이회영·시영 선생과 이동녕 선생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할 때, 막상 무관 출신인 이동휘 선생이 왜 함께 행동하지 않았는지도 확실치 않다. 공산당 건설에 이르는 행로에 우연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휘 선생의 업적을 폄하할 수 없는데,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결합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해방정국과 남로당
『세미나』 1권의 4부작 중 『위기와 비판』이 조선망국사와 ‘남한망국사’를 유비한다면, 『재론 위기와 비판』은 “1986~1988년 이후의 상황이 마치 1945-1953년의 해방정국을 슬로우 모션으로 반복하는 것 같다”는 평가를 제시한다. 이런 역사적 유비가 적절하려면 문재인 정부의 결함에 대한 정세인식과 동시에 망국과 해방정국에 대한 역사인식도 필요하다. 게다가 분단사관이라는 인민주의적 역사인식이 대중화한 상황에서 역사인식 자체가 현재적 쟁점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 비판을 다룰 다음 서평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다만 여기서는 공산주의자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해방정국에서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대해서만 정리한다.
앞서 조선망국에 대해서는, 문명개화파의 개혁 실패에 주목하면서 왕권주의의 귀결로서 고종과 민비가 망국의 원흉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해방정국과 관련해서는 “1945~1953년을 하나의 정세로 인식하면서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부터 1950~1953년 한국전쟁까지 일련의 사건을 민족해방투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한국사회성격 논쟁 당시의 민중민주파의 입장이 여전히 타당하다.
해방정국에서 일련의 사건을 설명하려면 국내외 조건을 결합해야 한다. 도식적으로 정리해보면 1946년 반탁운동, 1948년 단선과 단정의 실현,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 사이의 관계는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즉, 반탁운동 때문에 단선과 단정이 실현되었고, 단선과 단정의 실현 때문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탁운동이 없었다면 단선과 단정의 실현도 불가능했고, 단선과 단정의 실현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발발도 불가능했다. 반탁운동의 와중에 미소 냉전이 전개되면서 단선과 단정이 실현되고, 단선과 단정이 실현된 직후에 중국혁명이 성공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만주에서 개시된 중국혁명에 한국 인민도 참여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민족해방전쟁으로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박헌영 선생의 숙청을 비롯해 남로당이 한국전쟁에 책임을 졌던 것은 1946년 9월 총파업 이후 일련의 투쟁을 남로당이 주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세미나』는 “봉쇄와 냉전에 대한 도전이었던 한국전쟁은 조선공산당, 즉 남조선노동당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쟁”이었고 “남로당은 해방정국에서 탁류의 사나운 흐름에 저항한 한 줄기 청류로서 민족해방투쟁을 주도했고 결국 한국전쟁을 통해 산화했다”고 평가한다.
해방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부활과 위기
해방 이후 공산주의의 역사는 이미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2006, 개정판 2008)에서 다룬 바 있다. 해방정국-한국전쟁이라는 정세에서 벌어진 공개적인 계급투쟁이 분단의 고착화로 귀결했기 때문에, 1950년대 남한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이 소멸하였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4·19와 5·16을 계기로 상황이 얼마간 변화했다. 1964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 이를 상징한다. 인혁당은 최초로 남한에서 토착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하는 계기였다. 기호지방과 영남지방에 생존해 있던 소수의 마르크스주의자가 협력하여 조직했다. 기호파의 대표자가 박현채, 영남파의 대표자가 도예종이었다. 그 후의 당조직 사건들은 성격이 다르다. 대체로 북한의 지도 아래 당조직을 건설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상징하는 두 가지 사건을 언급한다. 1985년에 일어난 구로동맹파업과 한국사회성격 논쟁이다. 구로 동파는 전후 최초의 동맹파업이면서, 노동자운동과 지식인운동이 결합하는 사건으로서 의의가 있다. 한국사회성격 논쟁은 민중후보론을 거쳐 『현실과 과학』, 서울사회과학연구소(서사연)를 통해 민중민주주의(PD)론으로 체계화한다. 그러나 1991년 이후 서사연은 일본 68세대와 비슷한 푸코, 들뢰즈의 포스트모더니즘 전도로 기운다. 소련의 붕괴를 계기로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너무나 빨리 위기에 봉착했고 전향과 알리바이라는 특수한 위기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 대한 평가는 지난 서평에서 자세히 다뤘다.)
인민주의의 주류화
지금까지 개항부터 1986~88년 시기까지 현대한국지식인의 역사를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분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서세동점하 개항이라는 결정적 정세에서 문명개화파는 일본처럼 개혁하는 것에도 실패했고, 중국처럼 마르크스주의를 토착화하는 것도 실패한다. 『세미나』는 여기서 문명개화파가 개신교를 수용했음에 주목한다. 현대 지식인의 역사는 개신교의 역사와 상호작용한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윤치호의 자유주의적 친일반공주의와 이동휘의 반일공산주의가 분화했으나, 양자 모두 남한에서 퇴화한다. 개신교 반공주의는 보수주의적 반공주의의 지지를 받는 박정희와 경쟁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인민주의적 반공주의로 퇴했고, 1980년대 부활한 공산주의는 소련 붕괴 속에서 대규모 전향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인민주의로 전향한다. 이들이 386세대 지식인이다.
박정희 정부 이래 남한 지식인의 좌우파는 인민주의와 보수주의가 대변하는 실정이다. 보수주의는 박정희 대통령을 추종한다. 그리고 재야운동권은 박정희의 대안을 인민주의에서 찾는다. 이러한 역사는 386세대에 대한 현재적 비판으로 이어진다. 386세대는 노무현 정부 이래 ‘주류교체론’을 주장해왔다. 그 주류교체란 군사독재의 보수주의를 재야운동의 인민주의로 대체하겠다는 의미다. 이것은 문민화의 실패를 상징한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최선과 차선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주의와 인민주의가 최악과 차악을 두고 경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실패가 명백해졌음에도, 386세대는 문 대통령에 대한 비이성적 열광의 ‘작전세력’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현역 활동가든, 정치인이든,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이든 386세대 운동권이 문제다.
이러한 역사인식과 비판은 아마 사회운동 전반의 활동가들에게 상당한 충격이 되거나 거부 또는 무시하고 싶은 충동을 줄 것이다. 우선 역사 인식의 차원에서 대부분 재야운동을 중도좌파 내지 중도개혁 자유주의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386세대에 민주노총 등 현역 운동권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 여기엔 민중민주주의(PD)파의 역사적 계승을 자임해 온 사회진보연대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현 정세에서 윤소영 선생과 과천연구실이 던지는 문제의식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386세대는 왜 인민주의자일까? 왜 인민주의로 전향했을까? 인민주의는 현 정세에서 왜 문제인가? 다음 서평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