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기,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의 과제」 독자에게 외
「코로나 위기,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의 과제」 독자에게
이소형(노동위원장)
1.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실제 이득을 보는 이들은 자본과 권력입니다. 노동자운동이 이를 막지 못한 것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노동자운동 내부의 개혁을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것은 마치 노동 내 격차의 책임을 전적으로 노동자운동에 덮어씌우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현시기 비판이 내부로 향하는 것이 적절한가요? 이것이 노동자운동의 1순위 과제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오늘날 극단적 임금 격차의 원인은 자본 간 격차로 인한 노동생산성의 격차가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산업별, 기업별로 크게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자본 격차가 이처럼 확대된 것은 한국의 수출제조업 주도의 추격성장이라는 경제성장 전략의 특징과, 민주노총 등 임금 및 고용에 대한 노동조합 투쟁의 역사적 특성이 주요 요인으로 작동한 결과입니다. 일단, 이 지면에서는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 투쟁의 역사적 특성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민주노총 창립 이후 지난 25년은 한국경제가 급격하게 변모하고 이에 따라 노동시장 구조 역시 대대적으로 변화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노조 운동은 과거 90년대 기업별 노조의 임금 극대화 전략을 민주노조의 전형적 투쟁모형으로 고수해왔습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개된 민주노총의 투쟁방식은 이후 정부와 자본의 구조조정 방향을 하층 노동에 집중시켰다는 측면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대우조선, 한국GM과 같은 대기업노조는 민주노총의 대표적인 ‘끝장 투쟁모델’로, 정부 공적자금 투여를 통한 조합원 고용보장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정부와 자본은 압도적 다수의 중소 영세,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소리 없는 해고’를 확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민주노총이 불황이라는 거시경제 조건에서 스스로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확대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업별 노조, 특히 민주노총 소속 재벌·공공기관 노조의 개별적 임금, 고용 방어 투쟁이 민주노총의 전투적 투쟁으로 정당화 됩니다. 이러한 정당화를 통해 노조의 조직된 힘을 정부재정 선취하는 데 사용했고, 결국 이는 압도적 다수인 미조직 취약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노동자운동은 이 사실을 평가해야만 합니다. 대기업노조가 산별노조나 총연맹의 힘을 실리적으로 활용해 일부 조합원만의 이익을 추구한 것입니다.
나아가 현재 민주노총이 양극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도 정확히 지적해야 합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현재까지도 민주노총의 재벌, 공공기관 노조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방어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재벌은 큰 고정자본 투자와 기술혁신을 통해 중소기업에 비해 높은 생산성을 실현할 수 있었고, 독점과 하청을 통해 저임금을 활용함으로써 더 높은 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재벌 대기업노조는 이러한 상황을 활용해 임금을 인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건비가 책정되는 공공부문 노조도 고용안정과 연공급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임금 상승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앞서 평가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민주노총 대기업노조의 투쟁모델은 고용뿐 아니라 임금의 격차도 비약적으로 확대하게 됩니다.
공공기관과 재벌 대기업노조가 국민적 평균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대기업 임금 프리미엄’을 누리면서 임금 극대화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고임금 전략을 모든 노동자의 평균으로 삼고 이러한 투쟁방식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의 이러한 투쟁방식은 내부적으로 전혀 비판되거나 규율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노동자운동 스스로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시장 양극화의 원인을 책임있게 인식하고 비판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입니다.
정부와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의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고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노동조합입니다. 스스로의 역사와 현재를 비판하지 않는 노동자운동은 격차와 불평등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 민주노총은 개별적 기업 노사관계에서 전투성을 획득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집단이기주의 혹은 귀족노조로 인식되면서 고립되고 있습니다. 양극화의 주요한 원인 제공자임에도 책임을 회피하고 급진적 요구와 과격한 투쟁만 앞세우니 노동조합운동의 정당성마저 훼손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노동조합이 무엇을 목표로 투쟁하는 조직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약 개별 노동현장에서 조합원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만이 운동의 목표라면 노조는 한국의 노동시장 문제보다는 해당 기업 경영분석과 노사전문가의 역할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가 제기한 대로 노동자의 생산과 임금이 노동자에 대한 개별적 보상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를 작동시키는 사회적인 변수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조는 경제적 이해집단의 기능을 넘어서 사회 전체를 진보시키는 역할로 발전해야 그 존재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민주노총은 존재 이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극화에 대한 자기비판과 책임을 제1순위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 글은 문재인 정권을 포퓰리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 노동자운동이 하루빨리 이들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민주노총 내에는 지난 사회적 대화 건에서도 드러났듯이 문재인 정권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현장파'적 경향도 존재합니다. 이런 주장과 핵심적으로 갈리는 지점이 무엇일까요?
정권과 자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투쟁에 나서는 것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노동자의 정치투쟁은 체제의 변혁에 도전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이 외연적으로 비타협적 전투성을 표방한다고 해서 반드시 변혁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 현장파계열 의견그룹이 제기하고 있는 반문재인 투쟁은 체제의 변혁성과 전혀 무관합니다. 이들은 현안 대응에서 임금과 고용에 대한 최대치의 보장을 요구하거나 국유화 등 국가 책임을 강조하고, 정권과 자본을 악마적으로 의인화하며 비타협적인 전투성을 계급투쟁의 전형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는 실내용은 계급적 비판에 미달합니다. 대표적으로 정권 초기, 소득주도성장이나 최저임금인상이 실제 노동자 계급 내 임극격차와 저임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도리어 사회, 경제적 갈등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저임금은 무조건 많이 올리면 좋다는 실리적 관점에서 문재인 정권의 잘못된 경제정책 기조에 찬동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또한 현장파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같은 정권의 일회성 포퓰리즘 정책을 철저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정부 정책을 좀 더 왼쪽으로 ‘급진화’ 하는 것이 계급투쟁의 역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규직화’ 요구는 한국사회의 양극화된 노동시장에 대한 해법과는 거리가 먼 해당 기업 내 조합원들의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 정책에 읍소하는 투쟁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글에서 언급했듯이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은 노동자가 지향하는 변혁적인 정치이념과 정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장파계열의 전투적 경제주의 경향은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개혁 의제들에 동조하고, 때로는 이를 실리적으로 활용합니다.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반경제학적 정책의 모순을 인식하고 비판하기보다, 이를 통해 해당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최대치로 얻을 수 있는 투쟁의 명분을 찾는 방식입니다.
현장파류의 이러한 반정권 투쟁은 노동자에게 해악입니다. 포퓰리즘은 소위 목소리가 크거나 영향력이 센 집단을 규합하는 목적이 있어 노동자의 정당한 문제 제기는 정치적 손익계산에 따라 언제든지 배제당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진보로 위장한 포퓰리즘 정책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여타의 이익집단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포퓰리즘 정치를 비판하려면 스스로의 실리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싸움에 비타협적 전투성으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하기 위한 지적, 윤리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가령 인천국제공항 사태에서 노동조합은 젊은 세대와 일자리 경쟁을 하는 집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 정책의 한계를 대대적으로 비판하고, 노동시장 양극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으로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사회, 어디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독자에게
한지원(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1.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가 지금 왜 자유주의를 되돌아보는지 궁금합니다. 글에서는 영국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프랑스혁명은 실패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기존 관점과는 사뭇 다른데, 그렇다면 프랑스혁명과는 어떤 점에서 단절이 필요한 건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오늘날의 모순을 지양하는 중단 없는 운동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요. 19세기 말의 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당대 제도의 결함과 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공산주의 운동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2020년대 오늘날의 모순은 포퓰리즘입니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우리가 그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21세기 자유주의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념을 극대화하는 정치적 내전을 만들어 문제 자체를 잊어버리게 유도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니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적 운동은 자유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다시금 잘 끌어내어, 자유주의에도 미달하는 포퓰리즘 운동을 격퇴하고, 포퓰리즘의 현재 자리를 자유주의의 결함을 해결하는 마르크스주의 친화적 노동자운동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세기의 마르크스주의는, 저 자신도 얼마 전까지 그랬지만, 자유주의가 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현대가 어떤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당연히 결함도 해결할 수 없지요. 가장 극악한 사례는 역시 소련과 중국이겠죠. 자유주의 국가를 부르주아의 통치위원회라고 비판했지만, 결국 사회주의 국가는 어떤 점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자유를 더 확장한 게 없으니 말입니다.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에서도 당의 지배는 법의 지배보다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는데 열등했습니다. 21세기 한국의 변혁 운동도 마찬가지인데요. 한 단체는 얼마 전 추미애 사법방해 사태를 논평하며, 민중의 봉기로 검사들을 “인적청산”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건 계급적인 것도, 그렇다고 자유주의보다 우월한 정의를 세우는 방식도 아닙니다. 조국이 그러했듯, 나에게만 좀 더 평등하고 공정한 검찰/경찰을 만들자는 주장이죠. 조국 자리에 ‘노동자계급’의 대리자임을 자처하는 세력을 가져다 놓았을 뿐입니다.
영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비교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변혁 운동은 민중이 봉기하고, 지배계급을 처형하고,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내전을 벌이는 프랑스혁명을 주목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결과적으로 민주정을 만드는 데 영국보다 한참 뒤처졌는데요. 영국이 명예혁명, 의회주권, 내각제, 선거권 확대로 꾸준하게 발전한 과정과 프랑스가 19세기 내내 혁명과 반동, 공화국과 제정을 반복한 후, 20세기 중반까지도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한 과정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의 이성적 방향과 그 변화를 추진해나가는 감정의 차이가 둘을 이렇게 갈랐다고 생각하는데요. 프랑스혁명에서는 오늘날 포퓰리즘과 비슷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세한 내용은 글을 참조하기를 바랍니다.
2. 이른바 ‘촛불혁명’ 이후,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분기점과 유사하게 한국사회가 퇴행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 탄핵 촛불에서 공백이었던 점은 무엇이고 앞으로 퇴행을 막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사고해야만 하는지 간략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박근혜 탄핵의 공백은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을 중심 의제로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국정농단의 원인은 역시 대통령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촛불은 대통령제 개혁의 방향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만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민주당에게 주면 된다는 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문재인 정부이지요.
앞으로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는 대통령제 개혁을 정치개혁의 맨 앞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대통령 권력을 개혁하는 목표는 입법부의 정상화입니다. 한국식 대통령제에서는 의회가 입법부로 제대로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합리적 입법부와 공정한 사법부를 만드는 것이 자유주의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변혁은 아니겠지만, 변혁을 위한 훈련, 즉 자유와 제도를 만드는 시민의 지식과 윤리를 훈련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마르크스 계급투쟁의 역사법칙을 노스의 ‘폭력과 사회질서’에 관한 이론으로 보완”하셨습니다. 이는 잉여노동을 충분히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이윤율 하락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와, 폭력을 관리하는 제도설계에 대한 설명으로서 신제도주의 개념을 빌려왔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둘의 조합이 설명력을 가진다는 것에 관해서 보충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폭력과 지대의 교환으로 계급 사회의 제도를 설명하는 것은 지배계급 내부의 동역학을 살펴보는데 설명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피지배계급이 수용하는 지배계급의 생각은 헌법, 실정법, 국가기구, 다양한 관습 또는 규범 등을 통해 형성되고 재생산되는데요. 이 제도는 자본축적 법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다만, 마르크스는 신제도주의와 다르게 ‘계급사회’에서의 경제적 제도가 ‘이윤율 하락’이라는 필연적 경향 탓에 점점 더 심각한 곤란을 지속해서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석합니다. 계급사회의 축적법칙이 제도의 변화폭을 제한한다는 점을 파악해야 호황기가 아닌 장기불황 또는 붕괴 시기의 제도개혁 방향을 적합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독자에게
이유미(사무처장)
1. 글의 입장이 2015년 위안부 합의 때 제출한 입장과 크게 다릅니다. 이렇게 입장이 바뀌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질문하신대로 「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은 사회진보연대의 예전 입장과 다릅니다. 사회진보연대는 2016년 1월에 발표한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위해 여성에 대한 전쟁범죄에 면죄부 준 12.28 위안부 협상’(2016.1.8.)에서 2015년 한일합의를 전면 비판했습니다. ‘법적 배상’이 아니라서 수용할 수 없는 협상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한미일 군사동맹을 위해 담합해 버렸다고 진단했기 때문입니다. 정대협과 동일한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가 법적 배상만이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위안부 문제를 일반적 통념과 다르지 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맥락과 해결을 위한 접근방식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협상에 반대하는 피해자와 지원단체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위안부운동의 쟁점을 조사해본 결과 법적 배상만이 피해자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에 대한 피해자들의 입장이 일치하지 않으며, 아시아국민기금과 2015년 합의를 수용한 피해자들의 입장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2015년 합의와 국민기금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위안부운동 단체들에서 법적 배상이 아닌 방식의 해법이 모색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 전문가이자 국민기금 전무이사를 역임했던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의 운동단체들로 구성된 전국행동2010(이하 전국행동)이 2012년에 제안한 해결방안에 주목합니다. 그 내용은 일본 정부가 피해자의 마음에 전달되도록 사죄하고, 정부자금에 의한 보상금을 지급하며, 인도적 지원이라는 관점을 철폐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즉, 법적 배상이라는 기존의 관점과 달라진 것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2014년에 아시아연대회의는 일본 전국행동과 정대협의 공동제안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첫째, 고노 담화의 계승과 발전에 기초한 해결. 둘째,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사죄와 가해 사실 인정. 셋째, 번복할 수 없는 방법에 의한 사죄. 넷째, 사죄의 증거로서 배상. 다섯째, 진상규명 재발 방지. 여기서 와다 하루키 교수는 ‘법적 책임’과 ‘법적 사죄’ 그리고 ‘책임자 처벌’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죄의 증거로서 배상이라는 말은 정부 자금에 의한 배상금 지급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죠(와다 하루키, 『위안부 합의 이후 한일관계』, 제이앤씨, 2016).
그는 이를 기준으로 2015년 합의를 평가하면 기본적으로 제안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하며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2015년 합의가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일본 총리의 공식적 사죄와 반성, 그 이행조치로서 순수 일본 정부 예산 사용이라는 피해자 단체들의 3대 요구에 최대한 근접했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 고노 담화와 아시아 여성기금보다 진전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대협은 기존의 법적 배상이라는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2015년 합의를 반대했습니다.
한편 법적 배상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은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맥락을 사상하고 한국 사회의 성찰을 방기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법적 배상을 받아내려면 일본의 잘못과 한국의 피해를 부각해야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그렇게 단순한 이분법 구도로 나누기 곤란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고통을 당했지만, 한국에 귀국해서도 몸을 버린 여자라는 사회적 멸시와 배척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위안부를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던 토대는 빈번한 여성매매를 가능케 한 식민지시기 공창제도였으며, 식민지 수탈로 인한 빈곤과 차별,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가부장적 질서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한국 사회 역시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성찰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일본의 법적 배상을 강조하다 보니 한국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어떤 성찰과 변화를 모색할지 공론화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전적인 피해자이고 일본은 잔혹한 가해자라는 구도만 선전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성찰할 부분이 있다고 인정하면, 일본을 압박하는 데 불리할 테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서술한 것처럼 법적 배상에 대한 피해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정대협이 완강한 태도를 보이면서 입장이 다른 피해자들을 배제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국민기금 수용 여부를 둘러싼 피해자들 간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갈등을 불사하더라도 정대협이 법적 배상을 고집했던 이유는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피해보상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거사 청산을 한국 사회 개혁의 근본이자 도덕의 근원으로 보는 인식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배상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됩니다. 이는 일제 식민통치가 남북한의 분단과 한국전쟁을 초래했고, 그래서 독재정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만악(惡)의 근원인 일본에 맞서야 사회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역사인식을 전제로 합니다. 민주당 세력 역시 이 같은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2. 정세 인식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중요할까요?
정부·여당은 역사인식을 정치쟁점화하여 지지세를 확대하려고 합니다. 한국사를 친일파와 독립투사, 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이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로 바라보며 반일민족주의를 통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대중적으로 반일감정을 고조시키는 쟁점이고, 문재인 정부는 그러한 점을 활용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회진보연대가 위안부 문제에 주목했던 것은 정부·여당의 역사인식 비판이 정세적 과제라고 판단해서입니다.
역사인식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주관적 역사인식이 동북아시아 평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중갈등과 북한의 핵무장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불안정해지는 상황에서, 각국의 주관적 역사인식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부추겨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가 동북아 비핵지대를 염원하는 반핵평화운동을 건설하지 못하면,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군사적 대응 여론이 높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반핵평화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주관적 역사인식을 지양하는 것은 정세적 과제입니다.
민중운동 또한 과거사 청산을 통한 정의 실현이라는 민주당의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이 필요합니다. 민중운동의 주류관점은 민주당을 친노동, 반독재 민주화 세력이자 과거사 청산의 대의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부·여당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공수처 출범 강행을 비롯하여 검찰총장 징계 시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임에도, 민중운동은 이를 비판하기보다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민중운동이 민주당을 진보세력으로 오판하고 의존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독자적 대안세력으로 거듭나기 어렵습니다.
사회진보연대는 집권 초기부터 문재인 정부의 경제 및 노동정책(대표적으로 소득주도성장론과 최저임금 1만 원)을 포퓰리즘이라 비판해왔습니다. 친노동 정책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죠. 또한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당이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세력이라기보다, 무능과 세력다툼으로 군부독재를 초래한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86세대의 민주화 운동 경력 역시 오늘날 한국 사회에 득이 아니라 독이 되고 있는데, 전대협 시절부터 이어진 반경제학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문재인 정부 경제 및 대외정책에 반영되고 있다고 진단해서입니다(계간사회진보연대 2020년 봄호 특집). 그리고 과거사 청산을 명분으로 반일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민주당의 역사인식을 비판해왔습니다. 그들의 반일(反日)이 결코 한국 사회의 정의 실현과 진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당의 역사인식 비판은 민중운동이 민주당과 발본적으로 결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질문, “모성이란 무엇인가?”」 독자에게
문설희(사무국장, 페미니즘팀)
모성이 어떤 생물학적 기초도 갖지 않는 사회적 감정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은 여성의 삶에 대한 적합한 설명은 아니다.”라고 쓰신 부분이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그렇다면 ‘어떤 생물학적 기초’가 있어서 모성이 생긴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가을호 <페미니즘 읽기>에서 모성을 주제로 한 세 권의 책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모성을 성차의 고유성에 입각한 권리로 이야기하자’는 제안을 드렸습니다. 특히 신화가 아닌 과학으로 모성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탄생』의 균형 잡힌 관점을 독자들께 소개해드렸는데요, 여성의 삶을 현실에 적합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성의 생물학적 기초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성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분류하는 젠더 개념에 익숙해진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모성을 여성억압의 원인으로 규정해왔던 기존의 페미니즘과 상반된 주장이기도 하지요. 아래에서는 성적 차이의 페미니즘의 관점에 입각한 모성 분석이 기존 페미니즘의 한계를 어떻게 보완하는지, 그리고 ‘권리로서의 모성’이 여성해방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보충하여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여성해방과 모성
‘모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즉 모성에 대한 정의는 페미니즘 이론마다 차이를 보입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평등의 전략을 취하는 동시에, 때로 모성의 경험을 여성의 사회에 대한 기여, 여성 교육의 필요성 등의 근거로 활용했습니다. 서평에서 비판했듯이 이는 근대 이행기 탄생한 가족 모델 및 이상화된 어머니상을 수용하며 ‘모성 신화’ 강화로 귀결되었지요. 반면 그 뒤 부상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여성 인생 최고의 성취로 여기는 전통에 도전하면서, 모성을 여성억압의 원인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초창기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경우 인공 자궁을 거론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임신과 출산을 여성의 몸에서 분리해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 자체를 소멸시키고자 했지요.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여성해방과 모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제출됩니다.
아드리엔 리치는 여성억압의 원인은 생물학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남성의 통제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남성이 여성의 재생산 역량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모성이 변형되었고, 제도화된 모성으로 인해 대부분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소외된 노동이자 억압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된 모성 경험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며, 여성의 자기 통제에 기초한 자발적 모성이 해방적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메리 오브라이언의 경우 출산을 여성의 의식적 노동이자 창조적 행위로 규정합니다. 출산이 단지 생물학적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조직되는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생산을 여성의 고유한 역량이자 주체성의 형태로 간주합니다. 인간의 재생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긍정하여 남성에게 독점된 합리적 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여성성을 긍정하는 차이의 전략은 여성성을 부정하는 평등의 전략과 달리, 모성의 경험을 여성해방의 자원으로 삼습니다. 이는 성차의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페미니즘을 현실과 동떨어진 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성적 차이를 페미니즘이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하였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큽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여성의 역할을 긍정하는 보수적 전략과 변별성이 없다는 한계 역시 크지요. 현실 제도의 변혁 없이 모성 경험 자체가 여성해방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제도와 동떨어진 개인의 경험이라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체성과 대립하는 방식으로 여성성이 구성되어온 문화 속에서, 여성의 재생산이 그 자체로 의식적 행위가 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차이 전략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여성이 재생산 역할, 즉 모성의 기능으로 환원되고 의무로서 모성이 확립되어 온 사회제도와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이 필수불가결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 속의 평등에 주목하고 성 간의 차이의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전략적 실천 과정에서 모성은 비로소 성차의 고유성에 입각한 권리로, 여성해방을 향한 열쇠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2. 권리로서의 모성
뤼스 이리가레는 성적 차이의 페미니즘에 입각하여 모성의 권리를 정식화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는 앞서 설명했듯이 모성의 역할과 기능을 긍정하고 찬양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모성의 사회적 기능 수행을 여성의 운명으로 미화하는 ‘모성 신화’와 달리 모성은 여성의 고유성으로서 재생산 역량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성이 모성 기능을 수행하는지, 즉 자녀를 출산하였는지, 몇 명의 아들을 낳았는지 등과는 무관합니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임신·출산이라는 생물학적으로 고유한 특징이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은 그 자체로서 과학적 사실이지만, 여성이 임신상태를 유지하여 출산을 거쳐 어머니가 될 것인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당사자 여성의 결정과 주변 환경 및 사회 제도라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개입합니다. 또한 어머니의 양육행위가 찬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력 재생산 기능을 개별 가족 내 여성의 역할로 전담시키는 제도의 유지·발전을 위해서입니다. 즉 여성이라는 성(性)은 임신·출산이라는 생물학적 특징이 있지만, 그것이 모든 여성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모성 신화’로 환원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모성은 어떻게 권리가 되며, 모성의 권리는 왜 강조되어야 할까요? 이리가레는 여성이 모성 기여에 의해 평가받는 동시에 권리는 부재한 어머니로서, 국가 정책의 관리와 동원의 대상이 되어온 억압적 역사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여성이 모성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모성 기능의 실행 여부와 무관하게 시민이자 노동자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성의 권리는 이러한 여성 해방을 위해 필수적이고도 고유한 여성의 권리가 되는데요, 즉 여성이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통제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모성’이 여성의 자율성을 상징하는 권리로 확립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가레가 제기하는 모성의 권리는 여성이 가족·교회·국가의 간섭 없이 임신 여부와 임신 회수를 결정할 권리를 의미하며, 여성의 육체에 대한 자기 소유의 관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모성이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성별분업과 여성성 통념을 강화하는 제도의 변혁이 동시적으로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모성을 여성권으로 제기하는 것은 양육과 출산의 기능 및 효용성을 중시하는 전통적 입장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됩니다. 여성 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기여로서 모성을 강조하면 그것은 여성의 (어머니가 될) ‘자연적 소명’을 지지함으로써 여성 억압적 성별분업을 고착화하고 여성의 내부적 배제를 심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차의 페미니즘에 입각한 모성의 권리는 임신·출산을 경험한 여성 개인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리가 되는 보편적 권리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여성의 고유한 권리를 매개로 아주 새롭게 재구성하자는 스케일 큰 제안에 해당합니다.
3. 오늘날 여성의 삶에 적합한 페미니즘을 위하여
지난 10월 문재인 정부가 장고 끝에 발표한 ‘낙태죄’ 관련 법 개정 입법예고안은 ‘낙태죄 폐지’를 외치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시대를 역행하는 후퇴안입니다. 정부는 임신중지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던 기존의 법안에 사유와 절차 허용 기준을 추가하여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꾀했다고 선전하지만, 개정안 속의 여성은 여전히도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국가와 사회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형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좋은 엄마’를 가려내는 규범은 이제는 사회경제적 사유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거듭납니다.
이에 문재인 정부의 기만적인 입법예고안을 규탄하며 ‘낙태죄 완전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여성단체, 노동조합, 정당, 종교계, 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의 행동이 이어지는 중이며, 합법적인 인공유산뿐만 아니라 여성의 재생산권리에 대한 요구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최근 방송인 사유리 씨가 ‘자발적 비혼 출산’ 사실을 알리며 뜻밖에 ‘낙태죄’를 언급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그녀의 이야기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낳지 않을 권리’와 ‘낳을 권리’의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대중적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모성 역량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결정(임신중지)을 금지하고 반대로 자율적 모성 역시 선택할 수 없게 하면서, 남성과의 혼인 관계 하에서 배우자의 아이를 출산하는 것만을 허락하는 우리 사회의 여성억압적 구조가 확연히 드러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모성이 어떤 생물학적 기초도 갖지 않는 사회적 감정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은 여성의 삶에 대한 적합한 설명은 아니다”라는 지난 글의 주장은 오늘날 여성의 삶의 현실에 기초합니다. 이는 임신중지 비범죄화 운동 과정에서 다시금 확인되고 있는데요, 모성이 비단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관념에 불과하다면 임신중지 합법화 요구가 임신·출산·양육 전반에 걸친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요구와 결합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곤란함과 낙담은 자본주의 체제가 자기모순으로 인해 작동이 어려워진 시대에 여성에게 부과되는 이중삼중의 압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은 극적으로 악화하여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여성에게는 비난이, 아이를 낳고자 하는 여성에게는 상당한 고난이 뒤따르지요. 여성이 노동의 현장과 삶의 전 과정에서 임신·출산에 대한 자율적 결정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요구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절박한 목소리입니다. 이러한 목소리에 화답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역할이겠지요.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에 적합한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행동하는 실천이 필요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