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1 여름.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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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과 능력주의에 대한 이론적·현실적 검토

‘반능력주의’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김동근 |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1. 서론

 
‘공정성’이 시대의 화두가 된 듯하다.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질 만큼 파급력이 컸던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학 및 학업 과정에서의 특혜 스캔들, ‘인국공 사태’로 절정에 이른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 자녀의 입시 부정을 시발점으로 한 조국 부패 스캔들, 내부 정보를 이용한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사건, ‘페미니즘의 부상’과 ‘20대 남자 현상’으로 이어지는 젠더 갈등 등은 모두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로 표면화되었다.

가장 첨예한 갈등이 전개된 것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과정에서다. 정책 발표 당시에는 지지와 기대가 높았으나 구체 방안이 논의되고 정규직화가 진행되면서 서울교통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철도공사, 건강보험공단 등 여러 기관에서 갈등이 반복되었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는 기관별 문제를 넘어서 정규직화 자체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핵심 갈등은 전환자의 공공기관 직고용이 정당한가 하는 것이었다. 고용안정성이나 임금수준이 매우 높아 가장 좋은 일자리로 꼽히고 입사 경쟁률이 매우 높은데, 공개 채용 과정을 밟지 않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개별 기관의 기존 정규직을 넘어서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점이 ‘인국공 사태’로 확인되었다. 2020년 6월 22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정규직화 방안이 발표되었고, 바로 다음날 공기업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중단하라는 국민청원이 게시되었는데 단 하루만에 16만5천여 명이 동참한 것이다.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주로 20~30대 청년세대로 이해된다. 정유라가 이화여대 입학과 학업 과정에서 여러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화여대 재학생들은 강하게 반발하면서 교내 집회를 주도했다. 또한,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과정에서 대중의 분노를 가장 강하게 불러온 것은 자녀 입시를 둘러싼 여러 불법이었는데 역시 대학생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에도 공공기관의 젊은 정규직들과 공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세대가 중심이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대부분 공정성 요구가 부정의하다고 비판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대표적이다. “한국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공정성’이 지배적 화두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공정성 담론의 위해적 효과가 이미 충분히 증명된 지금, 더 이상 사회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안 가치를 논하는 것이 시급하다. (…) 공정성 프레임이 손쉽게 작동하는 것을 방지하려면 대항 담론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유통되어야 한다.” 공정성 요구가 ‘담론’ 차원의 문제이고, 사회 분열을 일으켜 위해적이며, 따라서 ‘대항 담론’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국어사전은 공정성을 “공평하고 올바른 성질”로 정의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가 도달해야 할 핵심 가치다. 그럼에도 공정성 담론이 위해적이라는 규정은 (공정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공정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사고가 왜곡되어 실제로는 공정한 사안에 대해서 잘못된 요구를 한다는 뜻이다. 잘못된 요구를 하는 이유로 대다수 논자가 ‘능력주의’를 거론한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체제를 정당화한다. 능력주의가 평등을 대체하면서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는 운동도 능력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능력주의는 분명히 차별이지만 차별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평등’, 더 정확히 말하면 ‘공정’으로 인식된다.”

공정성 담론은 공정하지 않은 객관적 현실 때문에 제기되는 것일까, 왜곡된 사고 때문에 실제로는 공정한 상황에 대해서 잘못된 주장이 제기되는 것일까. 전자라면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후자라면 대항 담론으로 왜곡된 사고를 바로잡거나 제압해야 한다.

한편 능력주의가 공정으로 오해된다고 할 때, 능력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능력주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차별적 이념에 불과한가 아니면 분배적 정의로서 긍정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가. 능력주의가 문제인가 현실이 문제인가. 전자라면 대안적 가치로 능력주의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고, 후자라면 반복된 갈등을 만드는 구조적 조건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문제에 답하기 위해 본 글은 다소 긴 분량에 걸쳐 공정성과 능력주의를 검토한다. 먼저 첫 번째 절, ‘한국인의 사회 인식: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에 압도되었나’에서 한국 사회 구성원, 특히 청년세대가 능력주의에 압도되어 문제가 발생한다는 주장과 그 타당성을 검토한다. 이어서 두 번째 절, ‘공정성·능력주의에 대한 이론적 검토: 능력주의의 대안은 평등주의(균등주의)인가’에서는 공정성과 능력주의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을 살펴보고, 공정성과 능력주의를 둘러싼 쟁점을 분배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검토한다. 추상적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는 만큼 현실 문제를 생산적으로 토론하기 위해서는 다소 길고 어렵더라도 개념에 대한 이론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현실적·이론적 검토를 종합하여, 세 번째 절 ‘한국 사회의 현실: ‘반능력주의’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및 ‘공정성 담론을 부정하는 대신 더 보편적 요구로 확장해야’에서는 공정성 담론에 대한 진보진영의 해석과 대응 방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대안적 방향을 제시한다.
 

2. 한국인의 사회 인식: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에 압도되었나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에 압도되었나

능력주의가 해악이라 주장하는 박권일은 한국 사회가 능력주의에 압도되었다고 주장한다. “능력주의는 한국인의 일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꿀 수 있고 바꿔야 마땅한 사회 제도·법·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피해자 탓하기’와 ‘책임의 개인화’로 귀결시켜 ‘결국 네가 공부 안 해서 그런 거잖아’라는 식의 말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일은 흔하게 목격된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빈민구제나 그들에 대한 복지정책은 자연도태에 개입하는 맹목적인 행위라 비난한 과거의 맬서스주의자들처럼, 오늘날 능력주의자들 상당수는 여전히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에 대한 지원은 부정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인식이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 사회적 분위기다.

능력과 무관하게 부가 대물림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수저계급론’도 한국 사회가 능력주의에 압도되었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박권일은 이렇게 주장한다. 

“2015년 김낙년의 연구는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소위 ‘수저계급론’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그는 논문에서 ‘부의 축적에서 상속이 기여한 비중이 1970년대 37%에서 2000년대 42%로 높아졌다’고 추산했다. 김낙년은 연구와 관련,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만약 상속이 저축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의 축적 경로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축적된 부의 불평등이 높다면 그 사회는 능력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수저 계급론’이 능력주의 사회와 배치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피에르 부르디외라면 대조적인 대답을 내놓았을지 모른다. 부자는 단지 화폐만 상속하지 않는다. ‘능력’까지 상속한다. ‘능력이나 재능 자체는 시간과 문화자본이 투여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에 따라서 교육적 성취의 룰마저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능력주의 시스템, 즉 ‘공정성’을 고집할수록 불평등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즉, ‘수저계급론’은 능력주의 사회에 배치되기는커녕 능력주의 사회에 부합한다.” 

능력보다 상속이 부의 축적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부자가 단순히 부를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까지 상속하는 현실은 분명 문제적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능력을 신장시킬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공정하지 않을뿐더러 그만큼 사회의 발전도 지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저계급론’이 능력주의 사회에 부합한다는 말은 능력까지 상속되는 현실을 사회 구성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는 뜻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청년세대의 특수성?

청년세대가 공정성 요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청년세대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제시된다. 청년세대가 능력주의에 더 깊이 물들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오찬호는 공정성을 주장하는 청년세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20대는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와 어려워진 노동시장의 상황으로 인해 취업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계발에 몰입해 있어 사회적 연대의식이 낮으며 빈약한 공정성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특정 대상에 대한 편견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학력위계주의를 추종하며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간다. 그 결과 20대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괴물이 되었다. 저자는 자기계발 신화와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를 해체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동어반복이다. 이어서 2012년 대선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이 제시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슬로건을 인용하며, ‘능력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구조를 고발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계발만 무작정 한다는 것은 아파할 사람만 자꾸 더 만들어내는 노릇일 뿐이기 때문에, 20대에 대한 조언들은 신중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20대가 공정성 담론으로 상징되는 왜곡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는 얼마나 객관적인가. 예컨대 자기계발 논리에 몰입한 것은 20대만의 특성인가, 20대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특정 대상에 대한 편견이 강화되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학력위계주의는 다른 세대와는 무관한 20대만의 특성인가.

저자가 연구를 시작한 2008년으로부터 13년이 지났다. 당시의 20대는 현재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 되었다. 공정성 담론이 더욱더 부상한 현재, 다시금 20대의 사고에 대한 분석이 시도된다. 동시대의 집단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세대적 특성을 분석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분석은 신중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며, 그러한 특성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객관적 조건과 변화의 방향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설사 자기계발 신화와 능력주의를 신뢰하는 20대의 특성이 문제의 원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깨는 것이 20대 자신만의 책임이 될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공정성 인식

한국 사회가 능력주의에 압도되어 있고, 특히 청년세대의 낮은 연대의식이 문제라는 주장은 얼마나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가. 2018년 한국리서치가 만19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정의와 공정, 한국의 불공정 실태, 불공정 해소를 위한 방안 등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를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 비례할당추출로 조사한 후 주민등록인구를 기준으로 지역별·성별·연령별 가중치를 부여해 결과를 도출했다. 공정성과 관련한 한국 사회 인식을 파악하는 데 현재로서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사 중 하나일 것이다.
 
 
능력·노력별 보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답변이 66%, 적을수록 좋다는 답변이 27%다. 차등분배에 대한 선호가 높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차등 분배의 수준을 구체화해서 질문하기 어려워 “클수록 좋다”와 “적을수록 좋다”라는 양극단의 선택지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세대별 분석에서 20~30대와 나머지 연령층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지 않아 청년세대가 차등분배를 더 선호한다고 볼 수 없다.
 

임금 차이를 두어야 할 조건에 대한 조사에서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 근무태도에 따라 임금에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답변한 비율이 각각 23%, 22%, 43%를 차지하며, 이를 더하면 88%다. 박권일은 이 결과를 인용해 “한국사회의 능력주의 선호가 88%”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응답자가 임금 차이를 두어야 할 조건으로 제시된 것들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시된 조건 각각에 대해 개별적으로 응답한 것이기 때문에 각 문항의 응답 비율을 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를 들면 “자질과 능력에 따라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동시에 “업무성과에 따라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응답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문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근무태도(93%), 자질과 능력(88%), 업무성과(91%), 근속년수(84%) 모두에 대해서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으로, 이는 매우 당연한 결과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근무태도,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가 다르더라도 보상에 전혀 차이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이 다수를 차지한다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일상생활에서도 공동의 과업을 수행할 때 성실하게 기여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자질과 능력 및 업무성과에 따라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보다 “약간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이 3배 정도 많고, 자질과 능력 및 업무성과에 따라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보다 근무태도에 따라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이 2배 정도 많다는 사실이다. (근무태도,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와는 다르게) 학력수준에 따라서는 “차이를 둘 필요가 없다”는 답변이 69%로 매우 높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능력주의가 곧 학력주의라는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학력수준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근무태도,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가 높지는 않다고 인식하고 있다.

부양가족 수, 가정형편에 따라 임금 차이를 두는 것에 반대하는 답변이 높다는 것은 특징적이다. 그런데 이는 질문이 ‘임금’ 차이를 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 이 같은 임금체계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복지 혹은 사회안전망이라는 질문으로 대체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 이 같은 가설은 아래에 서술할 성장 대 복지 문항의 결과를 볼 때 타당성이 있다고 보인다.
 
 

경쟁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답변이 79%로 매우 높지만 동시에 경쟁의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답변도 62%에 이르고, 성장 대 복지에 대한 질문에서 복지를 우선한다는 답변이 56%로 높았으며,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에 동의하는 답변은 93%로 매우 높았다. 특히 성장 대 복지에 대한 세대별 답변에서 20~30대에서 “복지가 성장보다 우선”이라는 답변이 가장 높았다는 점은 “청년세대의 ‘공정담론’이 개별적 생존과 각자도생만을 추구하는 것이다”라는 해석과 배치되는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결

정리하자. 한국사회가 (능력주의로 불리는) 모종의 왜곡된 인식에 휩싸여 있다거나 특히 청년세대가 왜곡된 인식에 경도되어 사회적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능력·노력별 보수차이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비합리적이라는 증거는 없다.

설문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가 능력주의에 압도되어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 구성원의 일반적 인식이 합리적·상식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근무태도,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에 따라 임금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인식이 다수인 것은 노동시장의 현실과 일반의 상식에 비추어 합리적이다. 게다가 각각의 조건에 따라 임금에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보다 “약간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이 다수인 것, 자질과 능력 혹은 업무성과보다 근무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 학력차이에 따른 임금 차이에는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 등은 중요하고 명백한 결과다.

또한 설문조사 결과는 청년세대의 인식이 특별히 왜곡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며, 오히려 연대의식이 더 높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도 확인되었다. 차등분배에 대한 청년세대의 선호는 일반적인 인식과 동일하며, 청년세대는 다른 세대보다 복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각자도생,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 구성원의 일반적 인식이 정상적·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공정성을 쟁점으로 하는 첨예한 갈등이 반복된다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 상황을 왜곡된 공정성 담론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대항 담론을 통해 대응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담론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변화로 인식이 변화되기도 하지만, 인식의 변화로 현실이 변화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장난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정성 요구의 합리적 핵심을 파악하고 이를 인정하면서도 보편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토론하는 것과 공정성 요구가 터져 나오는 현실적 조건을 도외시한 채 단지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3. 공정성·능력주의에 대한 이론적 검토: 능력주의의 대안은 평등주의(균등주의)인가

 

공정성 담론 = 능력주의 = 차별 담론?

많은 사람들이 반복되는 공정성 요구가 불공정한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오히려 차별을 강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공정담론” 같은 말은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공정성 담론은 그 발생 초기부터 명확하게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써 기능해왔다. (…) 한국사회에서 공정성의 기표는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 억울함, 혹은 박탈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손쉬운 수단으로 쓰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는 공정성 담론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공정성 담론이 애초부터 부정의한 의도를 가지고 제기되었다는 뜻이다.

“공평하고 올바른 성질”을 요구하는 공정성 담론이 차별 담론으로 반전되는 것은 공정성 담론이 능력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이런 입장에서 능력주의는 “때로는 측정된 지능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차별하는 체제나 이념을, 때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과나 실적에 따라 차별하는 체제나 이념”으로 정의된다.

능력주의의 해악은 다양하게 지적된다. 능력주의가 시험만능주의·학력만능주의·학벌만능주의로 왜곡되었다는 주장,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정당화하여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다는 주장, 능력주의가 탈락자·소수자·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형태로 발현되어 소수자 우대정책에 대한 반발을 낳고 있다는 주장 등이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공정담론이 문제 삼는 불공정은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불법과 편법이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승마대회에 편법으로 수상한 덕에 이화여대에 특혜 입학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 둘째 능력을 평가하는 유일 잣대로서 ‘시험’에 대한 강조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정규직들을 공격한다. (…) 시험은 능력주의의 자장아래 있는 것으로 ‘정규직’이라는 안정된 일자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차등주의, 권리의 차등을 의미한다. (…) 셋째 소수자 우대정책을 불공정하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세 가지 유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진단이 제기된다. “첫 유형은 어떻게 보면 (…) 차별을 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러나) 학력의 세습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불법과 편법을 깨뜨리고자 하는 목적이나 지향이 ‘능력만’을 유일한 사회적 보상이나 권리를 향유할 기준으로 삼고 있는 점은 동일하다. 둘째 유형에서 특히 능력주의는 차별을 정당화하고 자격에 따른 차등적 권리를 지향한다. 동등한 권리는 ‘노력과 능력의 배신’이라고 여긴다. 셋째 유형은 사회적 소수자집단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가 된다.”

능력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도 광범위하게 제기되는데, 사회적 제도·관습으로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과 이념으로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사회적 제도·관습으로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능력주의가 적용되는 대표적 제도인 대학입시와 입사시험에서 특혜·부정이 발생하는데, 이는 능력주의가 부자·권력자에게 포섭되어 있다는 증거다. 둘째, 특혜·부정이 아니더라도 능력의 계발 자체가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능력주의는 그 자체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계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셋째, 능력을 평가한다는 능력주의의 이상이 현실에서는 시험을 잘 치는 능력에 대한 평가로 변질되었다. 예컨대 공채시험이 업무능력을 정확히 평가한다고 볼 수 없다. 넷째, 능력주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학입시와 입사시험이 평생의 포상을 과도하게 결정한다는 점은 문제다. 다섯째, 능력주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에는 보상의 격차가 너무 크다. 이러한 주장에는 주로 대기업 경영진에게 돌아가는 과도한 보상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이념으로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능력주의는 타고난 재능에 따른 보상의 격차를 정당화하는데,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보상의 격차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노력에 따라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력하는 품성 또한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보상의 격차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능력주의가 능력이 모자란 것으로 평가되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박탈감을 안겨주기 때문에 해악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평등주의 혹은 보편적 권리 담론이 주로 제시된다. 공정성 담론(능력주의)이 조장하는 불평등을 평등 담론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공정성이라는 탈을 쓴 능력주의는 형식적 평등(기회의 평등)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고 실질적 평등(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대항 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것이 공평하다 생각했다. 이런 화법은 결과적으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분명 있다. 학벌주의는 능력주의에 의해 패퇴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에 의해 무너졌어야 했다.” 보편적 권리 개념도 대항 담론으로 제기된다. “공공기관 정규직은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 불안감 없이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권리는 모두의 보편적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공정성을 매개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이 그 자체로 한국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공공부문 기존 정규직의 공정성 요구가 정말 공정성이라는 가치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차별의식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자기 집단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정성으로 포장한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정성 담론은 차별 담론”이라는 주장에도 일정한 진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공정성 담론은 발생 초기부터 명확하게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최순실·조국 자녀의 입시 부정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예컨대 다음과 같은 평가 말이다. “(불법과 편법에 대한 문제제기는) 차별을 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능력만’을 유일한 사회적 보상이나 권리를 향유할 기준으로 삼고 있는 점은 동일하다.”

대학입시와 입사시험이 능력 평가의 도구로 과잉 대표되고 있고, 소수자 우대정책에 대한 저항이 존재하며, 능력주의가 특혜·부정으로 왜곡되고 사회경제적 조건의 차이에 따른 능력의 차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더러 현실의 심각한 불평등(빈부격차)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도 현실에 대한 타당한 지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 모두가 능력주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능력주의가 문제라고 한다면,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일까 아니면 능력주의의 이상이 구현되지 않는 현실이 문제일까.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대항 담론으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사회 운영의 원리로 능력주의를 폐기하고 평등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하고 정의로울까.

능력주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도 문제다. 능력주의를 “차별하는 체제나 이념”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기여에 따라 보상하는 체제나 이념”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유비를 위해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평등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분배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나 이념”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개인이 처한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조건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분배함으로써 차별하는 체제나 이념”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형식적으로 평등한 권리인 능력주의가 내용적으로 불평등한 권리이듯, 평등주의도 형식적으로 평등하지만 내용적으로 불평등한 권리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와 평등주의를 대립시키면서 능력주의가 폐기되고 평등주의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우리의 목표는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의로운 사회 운영 원리를 제시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같은 쟁점을 사고하기 위해 (능력주의 그 자체에만 집중해서 평가하기보다) 여러 가지 사회 운영 원리 중 하나로서 능력주의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다른 원리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정의로운 사회 운영 원리에 대한 논의가 ‘정의론’이라는 주제로 전개되어왔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한 간략한 이론적 검토를 거쳐 공정성과 능력주의를 둘러싼 현실적 쟁점에 대한 평가로 나아간다.
 

정의론: 보편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

현재의 맥락에서 “공정하지 않다”는 표현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를 포괄적으로 ‘정의롭지 않다’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보편적(일반적) 정의와 특수적 정의로, 특수적 정의를 다시 평균적(보상적) 정의와 분배적(배분적) 정의로 나눈다.

보편적 정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올바름, 즉 사회규범을 의미한다. 최근 논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과 부패 스캔들, 안희정과 박원순의 성폭력 사건, 내부 정보를 이용한 LH 직원들의 투기 사건 등에는 보편적 정의가 적용된다. 사회규범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객관적 문제로, 사회적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평균적 정의는 개인 간의 관계에서의 정의, 즉 거래에서 발생하는 손실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등가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자발적 거래의 경우 사기, 비자발적 거래의 경우 절도 등이 평균적 정의가 적용되는 사례다. 이 역시 비교적 명백한 문제로, 가치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

분배적 정의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서의 정의, 즉 권력·재화·명예 등을 나눌 때 적용되는 기준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적 정의를 ‘기여에 비례하는 분배’ 즉 개인의 능력·성과에 따른 사회의 보상으로 규정한다. 공공부문 정규직으로 취업할 자격과 보상 수준을 둘러싼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 기업 내부에서 성과에 대한 보상의 적절성을 쟁점으로 하는 대기업 사무직 노조 결성 흐름 등 ‘공정성’을 키워드로 하는 최근의 사례들 중 다수가 분배적 정의를 둘러싼 문제다. 소위 ‘페미니즘의 부상’과 ‘20대 남자 현상’이라는 키워드로 상징되는 젠더 갈등도 대체로 사회적 자원의 성별 간 분배를 둘러싼 쟁점이라는 점에서 분배적 정의와 관련된다.

분배적 정의를 둘러싸고 다양한 이론이 정의론이라는 형태로 전개된다. 이는 어떻게 사회가 운영되는 것이 정의로운가를 논증하는 객관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 구성원들의 상이한 인식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분배 기준이 정의로운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존재할 때 이를 단일한 방식으로 통일하면서 불일치를 해소할 수도 있지만,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합의할 수밖에 없는 원칙을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배적 정의를 구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분배적 정의와 관련된 기준들

일반적으로 분배의 기준을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각 개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자격에 따라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각 개인이 필요로 하는 몫에 따라 분배),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합리적 개인들이 자유로운 계산 위에서 선택한 바에 따라 분배), 평등한 분배(재화를 언제나 각 개인에게 평등하게 분배)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몇 가지를 확인하자. 먼저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규범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에 따르면 분배적 정의보다 보편적 정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가 보편적 정의에 가깝다고 해서 이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정의롭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소유권이 보장되는 조건에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보장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 같은 체제(사회규범)하에서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는 합법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도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가 무차별적으로 승인되는 것은 아니다. 최저임금제도, 근로기준법 등 노동력 사용에 대한 여러 제한 조치, 마약·총기·장기매매 등에 대한 규제 등이 그 예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본이 노동력을 구매하고, 노동을 투입해서 생산하고, 이를 판매하여 실현하는 과정에서 임노동이 착취된다는 점을 비판하지만, 이 같은 비판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규범에서) 임노동 착취가 불법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음으로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에서 ‘응분의 자격’은 여러 가지 기준으로 채워질 수 있겠지만, 대체로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재능,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결과, 적합한 능력이나 필요한 덕성, 업적이나 기여도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응분의 몫에 해당될 기준들은 일반적으로 ① 개인의 자질(어떤 종류의 인물인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② 업적(어떤 일을 성취했는가?), ③ 기여(사회적 부의 산출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 ④ 노력(어느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는가?)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공정성 담론을 둘러싼 논란에서 자주 언급되는 능력주의는 분배적 정의와 관련해서 보면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분배적 정의와 관련된 기준들을 임금체계와 유비해보면,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는 직무급제 혹은 성과급제, 필요에 따른 분배는 생활임금 혹은 연공급제,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는 연봉제, 평등한 분배는 배급제로 유비할 수 있다. 연공급제의 경우 생애주기에 따라 필요가 상승한다는 주장에 근거한다면 필요에 따른 분배, 근속년수가 길어질수록 숙련이 증가한다는 주장에 근거한다면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라고 볼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두 가지 차원이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직무급제에서도 근속년수가 숙련 증가의 기준 중 하나가 되는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에 무 자르듯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봉제를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와 유비할 수 있다고 할 때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는 보수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현대 자유주의는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인정함으로써 개별 노동자의 약소한 힘을 보완하고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데, 연봉제는 이를 무너뜨리고 고전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를 복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기준들 중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다. 예를 들어 ① 평등한 분배를 절대적으로 적용해서 4시간 노동한 사람과 8시간 노동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분배한다면 사회적 수용성이 없을 뿐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다. 쉽고 편한 일과 어렵고 힘든 일을 비교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평등한 분배는 필요에 따른 분배와도 충돌하는데, 동일한 수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한 경우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②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를 절대적으로 적용할 경우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 평등한 분배와 충돌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를 무차별적으로 긍정할 경우 장기판매와 같은 행위도 정당화된다. ③ 필요에 따른 분배 역시 절대적으로 적용할 경우 역시 다른 기준들과 충돌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특히 필요에 따른 분배를 과도하게 적용할 경우 사회적 자원의 제한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평등한 분배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는 기본적으로 ‘제한된 자원’을 전제하고 있는 반면 필요에 따른 분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에 따른 분배 원칙은 개인이나 집단의 필요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며,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필요의 수준을 합의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미시적으로 볼 때 필요의 수준을 확대하는 것은 해당 개인·집단의 풍요와 안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필요의 수준을 무한정 확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나머지 구성원에게 돌아가는 몫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정의롭지도 않다. 이 같은 측면에서 개별 기업 차원의 전투적 경제주의가 정당하며 다른 영역으로의 낙수효과를 불러온다는 입장의 한계를 파악할 수 있다. ④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는 평등한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와 원리상 충돌하며,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와도 충돌할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분배의 기준들은 각각 정당한 근거와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절대화하거나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다. 따라서 능력주의(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와 평등주의(평등한 분배)를 대립하는 것으로는 현재 제기되는 공정성 요구를 해결할 수 없다. 완전히 평등한 분배는 가능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으므로 결국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와 필요에 따른 분배)를 어떻게, 어느 정도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필요할 수밖에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공정성 논란’을 이 같은 논의로 인식하고 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어가는 계기로 삼거나, 능력주의가 왜곡되거나 극단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을 부각하고 그 대안으로 평등한 분배를 강조하면서 공정성 담론을 부정의한 담론으로 규정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진보주의자 대부분은 두 번째 길을 택하는데, 능력주의와 평등주의를 과도하게 대립시키는 방식은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고 보편적인 해결을 가로막는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능력·성취(업적)를 무시하고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능력·성취(업적)에 선천적인 운과 후천적 노력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공정성 담론을 둘러싼 논란이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능력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에서는 분배적 정의를 둘러싼 입장들을 간략히 검토하고 평가한다.
 

공리주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벤담, 제임스 밀, 존 스튜어트 밀을 중심으로 전개된 공리주의 원칙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된다. 공리주의는 인간을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고, 쾌락에서 고통을 뺀 효용(utility)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쾌락을 늘리는 것은 선, 고통을 늘리는 것은 악이며 이것이 정의의 단일한 기준이다. 또한 공리주의는 사회를 그 사회에 속한 개인들의 물리적 총합으로 보고, 모든 개인의 효용의 총합으로서 효용의 총량 증가를 추구한다.

분배적 정의라는 측면에서 공리주의는 첫째로 정당한 분배의 기준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들 기준을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원칙을 관철함으로써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둘째로 나아가서 분배적 정의라는 개념 자체를 기각한다. 공리주의자에게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효용의 총량 증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리주의자는 빈부격차가 심화되더라도 사회적 부(효용)가 증가한다면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나 필요에 따른 분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공리주의가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하거나 혹은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를 절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과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공리주의는 오히려 사회 전체의 효용 증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거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본다.
 

존 롤스의 정의론

롤스는 공리주의와 달리 개인 도덕의 원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단일한 기준을 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정의 문제에 접근하지 않지만, 여러 정의 원칙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에 그치는 다원주의적 방법론도 거부한다. 롤스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 합의할 수 있는 정의 원칙을 도출하고, 여러 원칙들이 적용되는 우선순위와 적용의 조건을 엄격한 위계적 구조로 정리한다.

공정한 절차를 통한 사회 구성원의 합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특정한 조건하에서 개인들이 사회를 구성(하도록 계약)하는 사고실험을 통해 정의 원칙을 도출한다. 롤스가 제시하는 특정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너무 풍족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 협동이 필요하고 가능한 상태. ②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 구성원들의 상충하는 요구가 존재하는 상태. ③ 각 개인이 지위·계층·자산·능력·지능·체력 등 자신의 조건과 사회의 경제적·문화적·세대적 조건을 모르는 상태. ④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시기심 없으며 서로에게 무관심한 상태. 이 같은 상태에서 개인들이 자원의 분배에 합의하도록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최소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부담 때문에 평등한 자유를 누리는 방향, 공정한 기회를 부여받는 방향,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합의하게 된다는 것이 롤스의 주장이다.

롤스의 정의 원칙들을 재구성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기본적 필요 우선 원칙. 기본권과 기본적 자유를 현실에서 유의미하게 행사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기본적 필요들이 반드시 우선해서 충족되어야 한다. ② 기본권과 기본적 자유의 최대한 평등 보장 원칙. 각 시민의 기본권과 기본적 자유는 최대한 광범위하고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③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의 보장 원칙. 유사한 자질과 동기를 가진 시민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계급·사회적 계급과는 무관하게 정부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권한 있는 직위를 차지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④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 다수가 선망하는 각종 지위들을 둘러싼 경쟁에서 기회가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각 개인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무관하게 동일한 재능과 성취동기가 있다면 동일한 성공의 전망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 ⑤ 차등 원칙. 소득과 부와 권한의 불평등 분배는 모두에게 혜택을 가져다주고 사회적 최소 수혜자들의 처지를 가장 낫게 만들어줄 때 정당하다.

이를 앞서 제시한 분배적 정의와 관련해서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제한된) 필요에 따른 분배를 가장 우선적인 원칙으로 제시하고, 평등한 분배를 다음으로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하되,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는 최소 수혜자의 처지가 개선되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 롤스의 입장은 공리주의와는 분명히 다른데, 사회 전체의 부(효용)가 증가하더라도 빈자의 처지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정의롭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의 주장이 평등한 분배를 절대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닌데,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면서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가 최소 수혜자의 처지가 개선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불평등한 분배도 정의로울 수 있다고 본다.
 

로버트 노직: 최소국가론과 소유권리론

1971년 롤스의 『정의론』이 출간되고 3년 후, 노직은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를 출간하고, 최소국가론과 소유권리론을 통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다.

노직은 로크의 자연 상태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즉 인간은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이 같은 권리가 존중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법·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인들의 자발적 실천으로 자연상태에서 극소국가를 거쳐 최소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노직에게 최소국가의 존재 의의는 타인에게 권리를 침해받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며, 이를 넘어서는 국가의 행위는 어떤 것이라도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노직의 소유권리론은 소유를 정의의 문제로 규정하고, 정의로운 상황으로부터 정의로운 단계를 거쳐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의로운 상황은 “사적 소유를 통해 타인의 입장이 악화되지 않는 최초의 획득”을, 정의로운 단계는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에 따라 이루어진, 타인을 침해하지 않는 모든 행위”로 정의된다. 이 같은 두 조건이 성립한다면 모든 소유는 정당하며, 두 조건이 침해된 경우 이를 교정하기 위한 개입은 정당화된다.

앞서 언급한 네 가지 분배의 기준으로 살펴보면 노직은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를 절대화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설명했다시피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는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에서는 분배적 정의라기보다 보편적 정의에 해당하기 때문에, 노직의 입장은 분배적 정의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와 유사하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사회의 효용 총량 극대화에 개인의 권리가 종속될 수 있는 반면 노직은 소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권리 자체를 정의의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같은 측면을 볼 때 노직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정당화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평가

공리주의가 정의를 사회적 효용 총량의 극대화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위정자(왕 및 귀족)의 사익 추구를 배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정당화했고, 따라서 유럽이 중세적 질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적 의회 제도로 나아가는데 기여했다. 이 같은 점에서 공리주의의 진보성이 확인된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효용 총량 극대화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다는 입장은 소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와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를 종합함으로써 이 같은 한계가 극복되는데, 자유주의 이념은 합리적인 개인들이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사익(개인의 효용 극대화)을 추구하면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가 달성되면서 동시에 사회의 효용 총량도 극대화된다고 본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이를 시장가격론과 한계생산성이론으로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가 반드시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다.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을 일정하게 인정함으로써 자본과 노동의 불균등한 역관계로 인한 부작용을 교정하려 한 것이나, 공정성을 개선하기 위한 개입으로서 사회정책이 발달해온 것 등은 현실 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의 대응을 보여준다. 자유주의가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를 체계적으로 종합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가 비도덕적이라고 규정하거나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를 비판하고 평등한 분배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직의 최소국가론과 소유권리론은 이러한 자유주의 이념을 극단적으로 정당화하는 철학적 논변인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도 일정하게 수용되는 필요에 따른 분배조차 기각하고, 심지어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가 보장되기만 한다면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롤스는 미국 경제가 불황기로 진입한 1970년대에 정의론을 통해 분배적 정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기본적 필요에 따른 분배를 전제조건으로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와 평등한 분배를 차등 원칙으로 종합한다. 능력주의(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를 제한적으로만 인정하면서 평등한 분배를 복권하는 이 같은 입장은 현실에서 심화되는 불평등 문제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롤스의 접근이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첫 번째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없는 도덕적·철학적 논변에 불과해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임노동 착취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적 정의에 대한 비판 없이 분배적 정의를 논하는데 그쳐 현실에 대한 설명력이 없다. 롤스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정의론의 토대가 되는 원초적 입장은 현실과 무관한 사고 실험일 뿐이다. 두 번째로 자유주의가 합리적·이성적·개별적 시민의 권리로서 자유를 전제하는 가운데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를 필요에 따른 분배로 보완한다고 할 때, 롤스의 정의론이 이를 발전적으로 지양하는지는 불확실하다. 롤스는 응분이라는 개념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하면서 평등한 분배의 관점에서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 원리를 수정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가 차등적이므로 응분 자격이 제한될 뿐 아니라 개인마다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재능은 운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응분 자격이 제한된다고 주장하고, 나아가서 노력하는 성품 역시 재능에 포함되기 때문에 응분의 자격에서 노력도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스크주의는 평등주의인가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노동 수익의 공정한 분배”를 명시한 고타 강령에 대해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분배적 정의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비 수단의 그때 그때의 분배는 생산 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 조건의 분배는 생산 방식 자체의 특성이다. (…) 생산의 요소들이 이렇게 분배되면, 오늘날과 같은 소비 수단의 분배가 저절로 생겨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적 정의 및 분배적 정의 개념을 대입해보면, 마르크스는 분배적 정의 이전에 보편적 정의를 규정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제약을 불변의 조건으로 간주하면서 분배적 정의를 다루는 것은 한계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적 정의인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와 이를 보증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분배적 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고 주장한다. “물적 생산 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 수단의 분배가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분배적 정의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같은 글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분배적 정의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언급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 즉 임노동의 착취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가 보편적 정의(사회 규범)인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들은 오늘날의 분배가 ‘공정하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그리고 사실상 그것이 오늘날의 생산 방식의 기초 위에서는 유일하게 ‘공정한’ 분배가 아닌가? (…)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는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를 분배적 정의로 확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개별 생산자들의 개인적 노동 시간은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자신이 제공한 부분, 즉 사회적 노동일에 대한 자신의 몫이다. (…)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 제공에 비례한다.”

마르크스는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능력주의)가 불평등한 권리임을,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생산양식인 자본주의가 가지는 한계임을 인식한다. “이 평등한 권리[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에는 아직도 부르주아적 제한이 들러붙어 있다. (…)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 노동할 수 있다. (…) 이러한 평등한 권리는 불평등한 노동에 대해서는 불평등한 권리이다. (…) 그러나 이와 같은 폐단은,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되는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와 같지는 않다. 첫 번째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즉 임노동 착취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노동자로서 노동으로 사회에 기여한 만큼을 분배받는다. 이 단계에서 각 개인은 능력·성취(업적)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모두 노동자로서 기여하고 분배받는다는 점에서 같다. “이것은 어떠한 계급 차이도 승인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각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불평등한 개인들(만일 그들이 불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개인이 아닐 것이다)이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동일한 관점 아래 놓이는 한에서, (…) 그들은 노동자로서만 간주되고 (…).” 두 번째로, 자본주의하에서 사회경제적 차이 등으로 불평등하게 제약되었던 능력의 발현이 동등하게 보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개인적 분배가 이루어지기 전에 생산된 자원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으로 투입되어야 한다. “(…) 개인에게 분할되기 이전에, 그것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다시 떼 내어진다. (…) 둘째 학교나 위생 설비 등등과 같은, 수요를 공동으로 만족시키게 되어 있는 것(이 부분은 지금이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현저하게 증가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동시에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를 보완하는 필요에 따른 분배 원리도 여전히 필요하다. “셋째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 등등을 위한 기금, 요컨대 오늘날의 이른바 공공 빈민 구제에 속하는 것.”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 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넘치고 난 후에” 능력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명한 문장인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가 이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가 중요한데, 첫 번째로 능력주의가 평등주의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분배로 극복된다는 것, 두 번째로 필요에 따른 분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욕구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살펴본 내용을 분배적 정의 관점에서 정리해보자. ① 마르크스는 생산관계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분배적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명백히 한계적이며, 생산관계의 변혁이라는 문제를 빼놓고 분배적 정의를 진지하게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② 또한 역사적 현실인 자본주의 체제를 고려한다면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며 능력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능력주의의 완성 즉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계급적·사회적 조건하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안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③ 그러나 형식적으로 평등한 권리인 능력주의를 완성하더라도 실질적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평등하지만 내용적으로 불평등한 또 다른 권리인) 평등주의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불평등하지만 내용적으로 평등한 권리인 필요에 따른 분배라고 보았다. “(…) 이러한 모든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권리는 평등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해야 한다.” ④ 능력주의를 발전적으로 지양하고 필요에 따른 분배로 나아감으로써 대안사회를 완성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생산력의 발전 뿐 아니라 욕구의 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롤스의 정의론이 가지는 한계를 고려할 때, 분배적 정의와 관련한 마르크스의 입장이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서도, 대안으로서도 더 타당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보편적 정의는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이고, 이 같은 조건에서 분배적 정의는 주로 능력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것이 노동가치론의 입장에서 보편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또한 분배적 정의를 철학적·도덕적으로 논변하는 것으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무력하다는 점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이행이라는 문제를 사고했다.
 

4. 한국 사회의 현실: ‘반능력주의’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보편적 정의를 훼손하고 분배적 정의에 실패한 민주당은 공정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민주당 박영선은 지난 3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과정에서 20대 지지율이 낮은 이유에 대해 “20대의 경우 과거의 역사 같은 것에 대해서는 40대와 50대보다는 경험치가 낮지 않나. 그러니까 지금 여러 가지 벌어지는 상황들을 지금의 시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6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당 초선 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가 성과를 낸 부분도 많이 있는데 내로남불·위선·오만 프레임에 갇혀 잘 보이지 않는다. 부정적 프레임이 성과를 덮어버리는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도 했다. 보궐선거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강성 지지자들의 공격과 민주당 주요 인사들의 비판으로 힘을 잃었다.

공정성 담론에 대한 민주당의 인식은 진보주의자들의 일반적 인식과 유사하다. 공정성 담론을 제기하는 청년세대가 잘못되었고, 실제로는 공정한 상황에 대해서 잘못된 담론(프레임)이 덧씌워진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확히 그 반대다. 민주당은 집권 4년 동안 보편적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분배적 정의에는 실패했다. 민주당이 다양한 영역에서 반복되는 공정성 요구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를 다룰 수도 없는 이유다.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의 현 상태를 볼 때 앞으로도 민주당은 청년세대를 탓하거나 혹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일관하면서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

6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하지 못한 검찰개혁 등 권력기관 개혁이 아직 완결된 것은 아니나, 방향을 잡았고 궁극적으로 완결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검찰개혁이 성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집권 세력이 공정성 담론의 확산 이유를 오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반발 등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공정성 담론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정성 담론의 부상은 노동시장을 둘러싼 문제만이 아니라 조국 사태와 부동산 가격 폭등, LH 사태 등 보편적 정의 문제를 중요한 계기로 하고 있다.

민주당은 보편적 정의에 어긋나는 행태를 반복했을 뿐 아니라, 문제가 제기되면 사회 규범에 따라 적합하게 처리하는 대신 문제를 부정하거나 규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적반하장으로 보편적 정의를 적극적으로 훼손했다. 조국 부패 스캔들에 대해서는 장관 본인이 몰랐으니 법 위반이 아니라고 우기고, 자녀 입시와 관련한 부정에 대해서는 불법을 인정하는 대신 입시제도의 미비로 문제를 호도했다. 법무부장관 임명자인 조국에게 중대한 사회적 의혹이 제기되어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자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조국 사태의 해결책인 것처럼 행동했다. 사익을 보호하기 위해 보편적 정의를 부정한 것이다. 김경수-드루킹 선거 조작 스캔들, 국회의 비례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선거제도를 일방적으로 개편해놓고 스스로 제도를 형해화시킨 것, 박원순 성추행 사건에 대한 옹호, 울산시장 선거 개입, 정권 핵심 인사가 연루된 라임·옵티머스 사태, 원전 정책에 대한 불법적 개입 등 민주당이 보편적 정의를 적극적으로 훼손한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따라서 보궐선거 결과, 특히 청년세대의 야당 지지율 상승 문제를 능력주의·각자도생·신자유주의·보수화 등의 개념과 연결하면서 청년세대를 비난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타락과 무능, 특히 ‘보편적 정의’를 반복적으로 배반했던 민주당의 행태가 결정적이었다. 동일한 관점에서 공정성 담론의 확산을 민주당의 위선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민주당은 보편적 정의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분배적 정의에도 무능했다. 평등주의적 정책으로 표상되었던 최저임금 인상은 저임금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거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저임금노동자의 고용을 악화시킴으로써 평등주의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역시 이전까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책보다 포괄적이라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낳고 말았다. 부동산 정책 역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고 자산불평등을 완화시킨다는 의도와 달리 오히려 부동산 가격 폭등과 함께 자산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결론적으로 공정담론이 부상한 것은 정세적으로 집권 민주당이 보편적 정의를 의식적으로 무시했다는 점과 함께 분배적 정의에 있어서는 선의가 있었다 할지라도 무능했다는 점 양자에 기인한다. 이렇게 인식했을 때 각자도생의 공정담론에 집착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청년세대가 오히려 복지확대에 더 찬성하는 상황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조건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항 담론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공정성 담론이 가장 첨예한 갈등을 낳았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를 생각해보자.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반발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은 “모두가 평등하게 정규직이 되는 세상이 모두에게 더 좋고, 따라서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지지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에 반발하는 것은 연대의식이 없어서(이기적이라서)”라는 것이다. 청년세대 대다수는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정규직이 되는 세상이 모두에게 더 좋은 것은 자명하지만, 냉정한 현실은 공공무문 정규직이 우리 사회에서 예외적으로 좋은 일자리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올해 초 서울교통공사에서 (정규직화된) 구내식당 조리원을 공개 채용했는데 20~30대 청년들이 대거 몰리며 경쟁률이 11대1에 달했다. 53명의 합격자 전원이 조리사 자격증 소지자였고, 47명이 대학 졸업자였다.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현실과 인식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지지하는 것이 모두가 정규직이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현실적인 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현실은 오히려 비정규직화가 지속되어 정규직이 예외적인 일자리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정부 정책으로 공공부문 정규직화 국면이 예외적으로 열린 것에 가깝다. 정부는 공공부문을 사회 전체적 비정규직을 없애는 마중물로 만들겠다고 했지만 민간까지 포함하는 정규직 고용 원칙 확립을 위한 법제도적 접근은 전무했다. 장기불황이라는 조건에서 민간부문 노동시장이 나아질 전망도 어둡다. 정부, 학자, 노동조합 모두 ‘민간으로의 확산’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현실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그러한 길을 열었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객관적 조건이 진지하게 검토되지도 않았다. 고용안정성 및 임금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부문으로 일자리가 양분된 노동시장 이중구조 속에서 예외적으로 추진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모두가 정규직이 되는 길”이기보다 “예외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전환자 모두가 공기업·공공기관에 직고용되고 기존 정규직과 동일한 임금·처우를 적용받는 것을 정규직화의 원칙으로 내걸었다. ‘인국공 사태’ 등에서 실제로 직고용되는 전환자의 처우가 기존 정규직과 같지 않은데 청년세대가 가짜뉴스에 현혹되어 반발한다는 측면이 강조되었고 이것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노동운동이 “전환 예외자를 최소화하고, 자회사 전환이 아니라 기존 공공기관이 직접 고용하도록 하고, 연공급제 중심의 기존 정규직 임금체계에 편입되어 동일한 처우를 받도록 하는”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을 목표했고, 전환 이후 기존 정규직 임금의 80%까지 추격하는 것을 후속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청년세대의 공정성 요구를 촉발시킨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객관적 조건이다.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평등주의 담론을 널리 퍼뜨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해결 이전에 평등주의 담론이 현실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광범위한 동의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 모두가 공공부문 정규직과 유사한 일자리를 가진다는 이상은 평등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공기관 정규직이 누리는 고임금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연공급제는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임금체계였던 적이 없으며,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조건을 고려할 때 대다수 노동자가 공공기관 정규직과 같은 연공급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연공급제는 고성장 및 인구증가를 전제로 하는데 현실은 성장 둔화와 인구감소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임금수준은 어떨까. 시간제 근로자를 제외하더라도 2,000만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은 550만 명이다. 비정규직 월 평균 임금은 167만 원이고, 공공부문 정규직 월 평균 임금은 452만 원이다. 전체 비정규직 임금을 공공부문 정규직 수준까지 인상하려면 국민경제에서 임금분이 연간 281조 원 증가해야 하며, 시간제 근로자를 제외하더라도 연간 188조 원 증가해야 한다. 한국 경제 전체의 기업이윤을 모두 없애거나 고정자본 투자를 모두 없애는 등 경제 전체의 축소재생산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마저도 비정규직과 비슷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자영업자, 실업자, 무급가족종사자 등은 논외로 한 것이다.

이렇게 노동시장과 거시경제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를 알고 있다. 현실적이면서도 연대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대신 “지금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을 지지하면 결국 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한다면 청년들이 이를 믿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객관적 조건, 즉 장기불황으로 인해 모든 일자리의 상향평준화가 불가능한 조건, 그리고 이러한 제약 속에서 소수의 고임금·연공급제의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일자리와 나머지 대다수 저임금·불안정고용의 일자리라는 격차 문제를 좀 더 연대적으로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없다면 (실현 가능성 없는) 평등주의 담론은 능력주의를 제압하는 대항 담론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비극은 문재인 정부가 아무런 준비 없이 화려한 성과로 치장하기 위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발표할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정부는 무책임하게도 구체적인 실태 파악,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쟁점, 전환 형식과 처우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 초기업적 교섭을 통해 기준과 사회적 합의를 만들려는 의지 어느 것도 없이 기관별 노·사·전문가 협의회로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노동운동은 준비되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발표된 정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업별로 정규직과의 격차 해소를 목표로 하는 비정규직 운동의 경험에 따라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기관별 조건에 따라 전환자 사이에서도 전환범위와 처우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했으며, 민간으로의 확산은커녕 민간으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계기도 되지 못한 채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낳고 말았다.
 

5. 결론: 공정성 담론을 부정하는 대신 더 보편적 요구로 확장해야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국면에서 반복된 공정성 요구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 자체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한 번의 공채시험을 통해 공공부문 정규직이라는 고임금의 안정적 일자리로 진입하는 현재의 구조, 그리고 제한된 일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극한 경쟁을 당연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전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정성 요구는 왜곡된 노동시장 구조 및 분배구조에 대한 문제의식보다는 채용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공정성 담론이 한계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기존 정규직의 반발을 일종의 이기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 비정규직 문제를 완화할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등 과격한 주장도 공정성 요구의 스펙트럼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수용할 수는 없다.

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 능력주의에는 결함이 있다. 예컨대 능력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현실의 조건, 즉 제도로서 능력주의가 특혜·부정으로 왜곡된다거나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가 차등적인 현실, 성취(업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한계가 있어 능력주의에 근거한 보상이 완성되기 어렵다는 점 등이다. 여기에 더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문제(예컨대 일자리 부족)도 있고, 능력주의에 따른 분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과도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따라서 분배적 정의의 기준으로서 능력주의 이념에 정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교육·사회보장·재분배 정책으로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도록 하여 계층 이동성을 실질화하고,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에 더해 필요에 따른 분배 등을 적절하게 적용하는 한편, 응분의 몫을 초과하는 지대를 억제하는 등 여러 장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청년세대의 공정성 요구를 극단화하거나 성별·세대 간 갈등을 오히려 부추기는 세력을 지지할 수는 없으며, 공정성 담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완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대안적인 논의·담론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성 담론이 근거하고 있는 능력주의가 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결함을 교정하면서 동시에 필요에 따른 분배와 같은 다른 기준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총체적으로 분배적 정의를 재구축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현실의 불공정한 구조가 확인된다면 이를 바꾸기 위한 실천도 동반되어야 한다.

이는 청년세대의 공정성 요구가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매도하고, 능력주의라는 원리 자체를 부정하면서 능력주의는 최소화되고 대신 평등한 분배가 최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대항 담론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능력주의를 억압하고 평등주의를 최대화한다는 (심지어 ‘대항 담론’으로) 기획은 사회적 수용성이 없어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필요에 따른 분배가 보완하는 자유주의적 분배적 정의, 그리고 능력주의를 완성하고 나아가서 필요에 따른 분배를 통해 능력주의를 지양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하면, 평등주의는 자유주의보다 더 높은 이상이라 보기도 어렵다. 좋은 일자리가 매우 제한적인 현실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스펙을 쌓아 좋은 일자리에 취직하려는 청년들의 욕구와 노력을 ‘신자유주의적 경쟁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의 내면화’로 규정하고, 능력주의 폐기와 평등주의 강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청년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것이 더 정의롭다고 확신할 수는 있는가.

다시 한 번, 공정성 담론 자체를 부정하고 평등한 분배를 특권화하는 방식은 현재의 갈등에 개입하는 데에도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옳지 않다. 앞서 분배적 정의의 기준들을 검토하면서 강조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인용하고 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공정성 논란’을 (우리 사회의 분배적 정의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불공정한 현실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요구로 받아들여서) 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어가는 계기로 삼거나, 능력주의가 왜곡되거나 극단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을 부각하고 그 대안으로 평등한 분배를 강조하면서 공정성 담론을 부정의한 담론으로 규정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어렵더라도 전자의 길을 찾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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