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1 여름.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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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질문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성찰하기

서단비 | 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무처장
현대는 자유주의적 이상과 함께 포문을 열었다. 신분적·종교적 위계질서로 미리 위치가 정해진 신민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타고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으로 구성된 사회는 모든 면에서 중세와는 다른 세상을 요구했고, 보통은 혁명을 통해 역사에 등장했다. 경제는 왕, 봉건영주, 토지귀족의 통제가 아닌, 시장에서 시민의 자유로운 생산과 거래로 추동되었다. 한 국가의 풍요는 지배 권력의 부의 축적이 아닌, 시민의 더 나은 삶을 상징하는 ‘국부’로서 관리되었다. 정치권력은 시민들의 뜻을 가장 잘 대의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분립되었고, 시민은 선거권·피선거권을 행사하거나 직접 결사체를 꾸리는 방식으로 정치적 권리를 행사했다. 개인의 신체와 재산은 개인이 소유한 것으로서, 정당하고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침범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는 온갖 비합리적 요소를 부수고, 개인이 자신의 삶과 가능성을 무한히 꽃피워 나갈 수 있는 사회, 훌륭한 개인들의 합으로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질서가 끝없이 확장되어 가는 역사, 그것이 현대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자기 신체와 재산에 대한 소유권에 기초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현대의 이상은 크게 두 가지 모순에 부딪혔다. 첫 번째로,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할 권리, 노동의 결과물을 소유할 권리가 생산수단을 가진 자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로 시민이 양분된다는 모순이다. 두 번째로, 같은 천부인권을 가진 인간임에도, 여성의 신체와 재산에 대한 소유권, 그에 기초한 경제·정치적 권리와 재생산과 성욕의 권리가 독립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모순이다. 첫 번째 모순은 노동자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로, 두 번째 모순은 페미니즘 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자유주의의 첫 번째 선언에 수많은 사람의 투쟁과 피가 아로새겨 있는 것처럼, ‘그리고 여성도 평등하다’는 두 번째 선언에도 수많은 사람(주로 여성)의 투쟁과 피가 아로새겨 있다. 첫 번째 선언이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 없는 자본주의 착취관계 안에서 오늘날에도 진자운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두 번째 선언도 오랫동안 두 성에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던 성적(性, sexuality, 이하 섹슈얼리티) 실천과 성별분업, 섹슈얼리티의 차별적 위계(여성 성욕이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는 전환, 남성과 여성의 성욕에 관한 이중규범)라는 질서 안에서 진자운동을 하고 있다. 

현대의 연장인 오늘날을 살아가면서 사랑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성찰한다는 것은, 사랑의 토양이 되는 현시대에 대한 이해를 우회할 수 없다. 곧 현대의 등장과 전개, 모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편, 오랫동안 사랑은 남성과 여성이 각자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맺는 관계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 또한 성찰해야 한다. 그밖에 사랑의 주체(성, 계급, 인종 등), 형태, 방법을 두고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질문들은 우선 위 두 지점을 성찰해 보면서 검토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과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사랑이라는 질문을 현대성과 여성과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매개한 관계를 성찰하면서 풀어간다.


낭만적 사랑 이후의 사랑: 합류적 사랑이라는 지향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앤서니 기든스, 1992)
 

현대성의 중요한 특징: 성찰성

기든스는 현대성의 중요한 특징은 ‘성찰성’(reflexivity)이라고 보았다. 현대 이전의 사회는 신분과 종교에 따라 견고하게 구성된 사회규범과 친족 관계가 개인을 강하게 묶어 낸다. 따라서 자기정체성과 자신의 삶을 별도로 규정하고 기획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그 어느 것에도 미리 묶여 있지 않은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을 통해 자기정체성과 삶의 서사를 만들어 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전통과의 단절로 인해 자신과 주위 환경을 계속 성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고도의 성찰성을 요구받는 현대인은 자신을 둘러싼 구조 안에서 사회적 실험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그러한 개인의 실천은 구조의 변동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의 동학인 ‘제도적 성찰성’을 만들어 낸다.
 

현대적 사랑의 모순적 이상: 낭만적 사랑

사랑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그 둘을 매개한다고 여겨졌던 결혼의 변화도 불가피해졌다. 부와 신분의 세습, 경제적 이해관계, 전통적 관습에 기반을 둔 기존의 결혼관은 저물었다. 오로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간의 관계 내적인 요인에 의해 추동되는 순수한 관계로서 사랑, 즉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과, 미래에 대한 자기 서사적 기획으로서 결혼관이 등장했다. 미리 내정된 상대와의 정략결혼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상대와의 연애결혼이 이상화되었다.

부르주아 사이에서 유행한 이러한 사랑과 결혼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성별화된 각본에 의존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친밀성을 제공하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감정의 영역인 가정(사적영역)을 돌보는 여성과, 강인함과 냉정함을 갖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이성과 합리의 영역인 바깥일(공적영역)을 수행하는 남성이라는, 상호보완적으로 성별화된 기대가 여성과 남성에게 주어져 있었다. 여성은 공적영역에 진출하지 않고 사적영역에만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은 임신과 출산, 즉 재생산을 매개로 한 모성의 발명으로 정당화되었다. 독특하고 고유한 자기정체성을 알아봐 줄 수 있는 운명적 상대와의 영원한 사랑을 통해 성별화된 분업에 기초한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두 사람의 서사를 통합하여 미래를 설계하고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결혼이 낭만적 사랑과 현대적 핵가족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의 사랑과 결혼관은 이윽고 대중적으로 확산하여 사회의 지배적 질서가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집과 작업장이 분리되고 임금노동자가 광범위하게 출현하였다. 여성과 남성은 이제 집과 분리되지 않은 작업장에서의 노동의 분업자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둘째로, 임금노동자의 임금 수준이 향상하면서, 노동자 대중도 낭만적 사랑과 핵가족의 성별분업을 얼마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셋째로, 이러한 성별분업에 기초한 핵가족은 자본주의에 적합한 노동자, 즉 건강한 성인 남성 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는 심지어 무급으로 달성되었다. 
 

낭만적 사랑의 균열: 현대의 발전

그러나 순수한 관계와 성별분업이라는 모순적인 조합에 근거한 낭만적 사랑의 이상은, 현대가 진전함에 따라 취약해졌다. 첫째로, 재생산기술(피임, 임신중지, 체외수정 등)이 발달함에 따라 성행위와 재생산이 분리되었다. 성행위 없는 재생산, 재생산 없는 성행위가 가능한 조형적 섹슈얼리티(plastic sexuality)가 등장했다. 이제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재생산과 섹슈얼리티는 직접적인 연관을 갖지 않게 되었다. 재생산과 섹슈얼리티의 필연적 연계, 그에 따라 운명적인 관계의 형태로 여겨졌던 이성애도 더는 특권화될 수 없었다. 둘째로, 과거 여성에게 성행위가 임신과 출산, 그에 수반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의미했다면, 조형적 섹슈얼리티의 등장으로 기술적으로는 성욕을 안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제 남성만큼이나 여성에게도 섹슈얼리티의 능동적 추구가 자기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셋째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확대되면서 남성의 벌이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이 많아졌다. 낭만적 사랑과 핵가족의 전제들이 총체적으로 흔들리면서, 현대는 사랑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받게 되었다.
 

현대적 사랑의 지향: 합류적 사랑

기든스는 낭만적 사랑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간의 순수한 관계라는 현대의 이상에 따라 출현했음에도, 성별분업이라는 모순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현대의 진전에 따라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낭만적 사랑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진정한 개인으로서 서로를 탐색하기보다는, 성별화된 이상을 상대에게 투사하면서 실망만이 놓여 있는 길을 걷게 된다. 성에 따라 역할과 지위가 예정된, 현대에 존재하는 봉건적 질서는 여성의 공모로 얼마간 유지될 수 있었지만, 영원할 수는 없었다. 이제 사랑은 순수한 관계와 민주주의 규범을 결합한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이라는 길을 걸어야 했다. 기든스는 합류적 사랑이라는 전망이 실현될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낙관적으로 전망할 만한 다양한 섹슈얼리티 실천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합류적 사랑은 관계가 외부의 사회적 기준으로부터가 아니라 두 사람의 감정적인 관여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순수한 관계의 이상과, 공적인 영역에서 이미 달성한 민주주의 규범이 결합한 형태의 사랑을 말한다. 여기서 관계와 연관한 민주주의 규범은 자율성의 원칙(타인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강압적 권력으로부터의 보호(타인의 자율성을 폭력과 학대로 침해하지 않는 것), 개인이 자신의 사회활동의 조건 결정에 참여하는 것(결혼 등의 중요한 조건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의무 없는 권리는 없다는 원칙(친밀성은 자동으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주고받는 만큼, 수평적 의사소통이라는 의무를 수행하는 만큼 주어지는 것), 설명 가능성(행동과 판단의 해명을 요구받을 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합류적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남성과 여성에게는 어떠한 역할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공적영역의 메커니즘과 마찬가지로, 유동적 계약이라는 전제와 자유롭고 공개된 의사소통을 통해 결정된다. 성욕의 추구도 사랑이라는 관계 그 자체로 보증되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관능의 기술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중요해진다. 

기든스는 낭만적 사랑에서 합류적 사랑으로의 이행이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여전히 이성애 관계에서는 남성과 여성 간의 경제적 차이, 심리적 차이가 엄존하고 있어 긴장의 소지가 심각했다. 경제적 차이로는,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을 축소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심리적 차이로는, 친밀성의 구조 변동이 있었다. 즉 성별분업을 전제한 핵가족 중심의 배타적 친밀성이 해체되고, 성별분업을 덜어낸 관계 일반의 열린 친밀성으로 옮겨가는 이행에 남성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기든스가 보기에, 가정에 유폐되어 의도치 않게 돌봄 역량을 발달시킬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은 어렵지 않게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라는 이행에 능동적으로 가담한다. 반면, 남성은 지각생이었다. 새로운 질서에 가담하지 못하는 남성들은 과거와 같이 지배와 정복을 특징으로 하는 섹슈얼리티 실천을 고수하면서, 더는 기존 질서에 공모해 주지 않는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고 강박적인 행태를 보인다. 이는 남성의 성폭력으로 드러난다. 기든스는 돌이킬 수 없는 이행에 남성들이 능동적으로 가담하지 못하는 이유는, 친밀성의 능력을 갖춘 여성에게 그러한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남성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의 진전에 따라 사랑-가족 모델의 해체와 대안적 관계로의 이행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기든스는 남성들이 이미 불가능해진 기존의 질서에 여성들이 변함없이 공모해주기를 부질없이 기대하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새로운 질서의 공모자이자 당사자로서 등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기든스는 현대의 진전을 전제로 한 합류적 사랑이라는 틀은 남성과 여성의 성애적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예를 들어, 동성 간의 성애적 관계 등), 성애적 관계를 넘어서 관계 일반에서의 민주주의적 원칙 확장으로 나아갈 해방적 가능성 또한 있다고 보았다. 공적영역에서 민주주의의 특징과 메커니즘이, 합류적 사랑을 매개로 사적영역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든스에게 합류적 사랑은 바로 사적영역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가 보기에 사적영역의 민주화는 절반의 민주화를 이룩한 현대가 더 진전된, 온전한 현대로 나아갈 방법이자 관문이었다.


두 개인의 공존의 조건을 찾아서: 사랑을 둘러싼 혼란과 전망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 엘리자베스 벡 게른하임, 1995)
 

현대성의 중요한 특징: 개인화

벡과 벡 게른하임(이하 벡 부부)은 당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가족의 위기’나 성간 적대는 병적인 개인주의의 확장 때문이라는 관점에 반대하면서, 기든스가 성찰성이라고 보았던 현대성의 특징을 ‘개인화’(individualisierung)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벡 부부가 정의하는 개인화란 다음과 같다. 현대에서 개인의 일대기는 전통적인 계율과 확실성, 외부적 통제와 일반적인 도덕률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개인의 결정에 따라 계속 달라지며 개방적이고, 각 개인에게 일종의 과제로 제시된다. 살아가는 문제에서 개인의 결정과 관련 없는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고, 개인적 결정에 열려 있는 비율이 늘어난다. 표준적인 일대기는 ‘선택의 일대기’로 변형되었다. 가족이나 결혼, 부모 되기나, 섹슈얼리티 혹은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며 무엇일 수 있는지를 더는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의 본질, 예외, 규범, 도덕은 개인마다, 관계마다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의 답은 모든 세부사항에 걸쳐 도출, 협상, 타협,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과거에는 발생하지 않던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개인화라는 현대의 징표는 멈춰 세울 수 없는 것이었다.

벡 부부가 보기에 당시 대두된 가족의 위기나 성간 적대는 개인화가 현대의 진전으로 더 광범위하게, 즉 여성에게도 관철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갈등이었다. 역사적으로 개인화는 중성적으로 전개되어 오지 않았다. 현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오직 남성만의 특권이었다. 19세기 동안 여성의 삶의 범위는 가정 내부로 제한되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물리적·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일이 여성에게 맡겨진 특수한 임무가 되었다. 남편의 걱정거리에 귀 기울이는 일, 가족 간의 다툼을 중재하는 일과 같이 오늘날 ‘감정노동’ 또는 ‘관계를 위한 보살핌’이라 불리는 일들은 여성이 전담하는 일로 여겨졌다. 오늘날 성별분업에 기초한 사랑-가족 모델이 흔들리고, 여성이 도맡아 하던 일을 누가, 어떻게, 왜 할 것인가를 두고 타협과 협상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흡사 전투와 같은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박지의 균열: 낭만적 사랑-핵가족 모델의 균열과 노동시장의 신축화

개인화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구속에서 풀려났다는 말은 곧 개인의 선택이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개인의 일상이 시시각각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현대적 개인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한 근거지로서, 가까운 관계에서의 친밀성이 매우 중요해졌다. 이상적인 대상과의 낭만적 사랑을 통한 결혼과, 성별분업에 기초한 이상적인 핵가족을 꾸리는 것은, 이러한 내적 정박지를 마련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한편, 외적으로는 직장 경력이 자기실현의 정박지로 여겨졌다.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가정과 사회적인 안정을 주는 직장을 가진 개인이 이상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의 진전에 따라 기존의 성별분업을 정당화했던 모든 신화가 무너지고, 특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확대되면서 낭만적 사랑-핵가족 모델은 매우 취약해졌다. 기존의 핵가족 모델은 한 개의 노동시장 일대기(남성)와 한 개의 가사노동 일대기(여성)는 조화시킬 수 있었지만 두 개의 노동시장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 없었다. 한편, 자본주의는 점점 더 고도의 신축성을 가진 노동자를 요구했다. 이는 고용이 항시적으로 불안정해졌으며, 직장을 제외한 가까운 관계(우정, 친족관계 등)는 희생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현대인의 기존 내외적 정박지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신분과 종교 중심의 중세적 질서는 사라졌지만,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질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은 노동시장에서 쉽게 이탈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관계, 최소한의 친밀성의 영역이라도 지키려 노력해야 했고, 이는 두 사람‘만’의 사랑과 가족 내부의 배타적 친밀성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새로운 사랑-가족 모델이 자리 잡지 않은 상황에서 사랑과 가족에 대한 기대와 집착이 증대하여, 기존 사랑-가족 모델의 붕괴로 발생하는 갈등(이혼율의 급증 등)을 더욱 극적으로 나타나게 했다. 다른 모든 사회적 결속과 노동시장의 안정성이 취약해진 상황에서 사랑은 더욱 중요해졌으나,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 놓였다.  
 

관계의 미래: 독신자들의 사회 혹은 가까스로 함께 살기에 성공한 사회

벡 부부는 성별분업에 기초한 낭만적 사랑이 해체될 위험에 직면하여, 남성과 여성이 새로운 대안적 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보았다. 과거, 낭만적 사랑과 핵가족이 그 자체로 곧 구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듯이, 신축적인 노동자가 되라는 노동시장의 요구를 완벽히 체현한 독신 노동자 또한 그 자체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은 관계로부터의 철수가 아닌 새로운 관계의 윤리를 찾아야 했다. 이는 여성의 시계만 거꾸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과거로의 회귀나, 관계에 어떠한 윤리도 규칙도 없는 아노미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일체의 노력으로부터 철수하는 것 모두를 지양하면서 해소해 나가야 하는 문제였다. 현대의 진전으로 주어진 오늘날 상황에 맞게, 기존에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을 대체하는 규범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대안적 관계를 구축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다양한 관계의 방식과 양식을 창조해 낼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사랑에 투영된 지나친, 비합리적인 기대를 감축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함께 살기 위한 공동의 지반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사랑이라는 질문: 오늘날의 공존의 조건을 찾아서

이번에 소개한 두 책에서 세 학자는 사랑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고, ‘현대성’과 ‘가족을 매개한 여성과 남성 관계의 역사적 형태’라는 두 지점을 살펴보면서 성찰의 영역으로 끌어냈다. 이들이 보기에 당시 대두된 가족의 위기나 성간 적대라는 문제는 개별적으로 처치되어야 할 병리적 현상이 아니었다. 현대의 진전으로 나타난 지극히 현대적인 문제이며, 현대에 어울리는 관계의 양식과 규범의 창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인류가 더 나은 현대로 나아가기 위한 성장통이었다.

세 학자의 이러한 접근은 당시 대두된 사회문제들에 대응해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면서 사실상 여성의 시계만 거꾸로 돌리려 했던 신보수주의나, 문제의 원인을 가부장제의 초역사성과 남성성의 본질적 한계에서 찾았던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대별된다. 사랑에 관한 문제는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사랑을 둘러싼 조건에 주목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대라는 불귀(不歸)의 점을 지나 인류가 점점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보았던 세 학자의 낙관과 달리, 현대적 경제체계로서 자본주의, 현대적 정치체계로서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한다. 사랑을 둘러싼 혼란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던 이들의 시도는 왜 어려움에 직면했나?
 

조건의 조건 

세 학자는 사랑과 가족을 둘러싼 변화를 일으킨 조건을 설명하고, 이를 다시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서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원인 분석과 대안 모두에서 조건의 조건을 누락했다. 세 학자는 가족의 위기는 핵가족 모델의 붕괴, 노동시장의 신축화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의 새로운 관계 양식 창출과, 강한 복지정책을 통한 사회안전망 강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체 ‘왜’ 핵가족 모델이 붕괴하고 노동시장이 신축화될 수밖에 없었는지, 대체 ‘어떻게’ 남성과 여성의 새로운 관계 양식을 창출할 수 있고 강한 복지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지는 답하지 않는다. 

먼저, 원인 분석에 있어 세 학자는 당시 유럽과 미국 사회의 지배적 원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던 신자유주의를 신보수주의자와 혼동하고 신보수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주변적 이해에 불과하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기존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동시에, 몇몇 부분에서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와 공명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물밑에는 자본주의가 산업적 축적을 통한 이윤율 달성에 한계를 맞아, 정책적 원리가 산업적 축적에서 금융적 축적으로 넘어가면서 기존의 제도를 모두 뒤집어엎었다는 객관적 조건이 있었다.

두 책이 출간된 199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1970~80년대 경제위기에 대한 대처 과정에서, 케인즈주의 성장관리국가(이른바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국가로의 이행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케인즈주의 성장관리국가는 산업적 축적을 통한 고성장 시기에 자리잡았는데, 금융에 대한 억압에 기초해 재정정책을 중심으로 고용과 성장의 호순환을 안정화했고, 거시적으로 소유·경영·노동의 타협을 제도화했다. 이상화된 핵가족에서의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은 이러한 배경에서 지급될 수 있었던 가족임금을 전제로 한다. 사회정책은 고용, 그리고 고용과 연계한 성장을 매개하여 경제정책과 보완적으로 조합되면서 국가 정책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케인즈주의 성장관리국가는 산업적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고성장이라는 전제가 이윤율 하락으로 위기에 처하면서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산업적 축적에 기초한 성장이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금융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에 신자유주의적 위기관리 패러다임은 화폐정책을 중심으로 금융적 축적을 안정화했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은 사회정책을 분절화하는 방향으로 조합되었다. 고용과 연계된 사회보험은 남아 있었지만, 이제 고용과 성장의 호순환을 전제한 완전고용은 사회정책의 목표가 아니었다. 자연실업률의 인정과 노동자 개개인의 ‘인적자원’으로서의 역량개발에 대한 지원과 보조로 주안점이 옮겨 갔다.

1990년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대두된 ‘가족의 위기’에는 기존의 성별분업과 그에 기초한 사랑-가족모델이 지속할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적 배경(성찰성·개인화의 확대, 성혁명 등)뿐 아니라, 바로 그런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추동하는 조건으로서 경제적 배경이 엄연하게 작용했다. 고성장이 보장했던 가족임금이 해체되고, 국가가 더는 완전고용을 사회정책의 목표로 두지 않으며, 국가 또한 금융을 중심으로 재편된 경제 질서하에서 신축적 노동 관리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다. 사회보험을 제외한 공적지출의 제1목표가 효율성이 되면서, 돌봄과 재생산에 대한 공적지출은 국가 차원의 능동적인 정책대상이 아니라 일차적인 책임의 주체를 가정으로 두고 가정에서의 돌봄과 재생산을 보조하는 수준에 그쳤다. 여성들은 노동자이자 어머니로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 성과학과 성해방운동의 영향으로 여성의 성욕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가 일부 진전되었지만, 그마저도 여성 성욕이 ‘위험’으로 전환하고 가족의 위기에 대항하는 신보수주의의 반격이 낙태권을 공격하면서 시시각각 위협받았다.

다음으로, 대안 제시에 있어 세 학자는 대안의 실현 가능성을 낙관에만 의지했다. 고성장 시기 성장과 고용의 호순환을 전제로 설계된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의 사회복지 정책은 저성장 시기 사회에서는 의지만으로 지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관계의 양식을 창출하는 것 또한 그것을 창출해 나갈 수 있는 개인들의 역량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 예컨대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출현과 전개에 대한 답이 없으면 쉽게 부스러지는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세 학자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바꾸려는 변혁의 정치는 과거보다 중요성과 힘을 상실했고, 당대에도 이미 일어나고 있는 개인들의 각성이 자연스럽게 지속할 것이며, 그것을 반영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정치가 변혁의 정치와 병존하거나 변혁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전망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점점 더 중요해지지만 거의 소멸해버린 변혁의 정치, NGO(비정부기구)의 형태로 행정적 관리의 영역으로 흡수된 라이프 스타일의 정치, 반(反)현대적 가치를 선전하면서도 대중의 열광을 받는 포퓰리즘 정치와 대중을 대안적 방향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운동이라는 현실 앞에서 지나친 낙관이었음이 드러났다.
 

오늘날 공존의 조건을 찾아서

 
사랑이라는 질문에 현대성과 역사적 가족형태라는 분석틀을 통해 진지하게 답하고자 했던 세 학자의 시도는 객관적 조건으로서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를 낙관함으로써 곧 한계를 드러냈다. 우리는 세 학자의 성찰을 참고하면서도, 이들의 낙관이 멈춰 선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가족의 위기와 사랑을 둘러싼 혼란을 초래했던 객관적인 조건들은 변화했는가? 우리는 여성과 남성은 물론 관계 일반에서 대안적인 관계의 양식과 규범을 창출했는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변화의 동력은 유지되고 또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비관적일지라도,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현실에 적합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철저한 비관을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땠으며, 어떻고, 어떠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우리의 지향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가? 우리는 더 공개적으로, 더 많이, 가십을 넘어선 진지한 관심사로서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사랑이 서 있는 토양,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문제와 대안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오늘날, 진정한 공존의 조건은 여기에서부터 만들어 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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