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1 가을.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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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과 능력주의에 대한 이론적·현실적 검토』 독자에게

김동근 | 조직국장
1. 글을 읽으면서 필자가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너무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주의가 능력주의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자유주의는 능력주의라기보다는 소유에 따른 분배를 정당화하고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핑계로 극단적인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념 아닌가요.
 
자유주의를 자유지상주의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유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주의를 비판한다고 착각하기도 하고요. 원고의 설명을 따르자면, 소유와 정의를 동일시하는 한편 자발적 동의(자유로운 계약)에 따라 이루어진 소유는 무조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로버트 노직의 입장이 자유지상주의입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주류적 경향은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노직과 같은 극단적 입장은 자유주의에서 오히려 소수입니다. 원고에 설명했다시피 자유주의에 기반한 대다수 국가는 자유로운 계약의 예외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단결권을 보장하는 한편,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분배를 보완하는 사회정책을 구사합니다.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계약에 따른 극단적 불평등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물론 현실에서 단결권을 보장하는 정책이나 재분배를 위한 사회정책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 사회에서 자유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많은 경우 타당합니다. 문제는 이 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한 가치 혹은 이념으로 무엇이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점입니다.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발생시키는 부작용을 완화하는 자유주의적 방향, 평등주의(균등주의)가 사회의 중심적 분배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방향, 능력주의의 결함을 비판하면서 생산관계의 변혁을 통해 필요에 따른 분배로 이행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방향을 비교해볼 수 있겠는데요. 이 문제를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2. 평등주의의 의미를 너무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지향하는 가치 중에는 평등도 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에서 평등이 똑같이 분배한다는 의미에서 평등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분배에서 불평등이 커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필자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가 평등주의보다 우월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소유에 따라 생산물이 분배될 뿐 아니라 능력도 대물림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평등주의가 자유주의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아래의 답변에서는 분배에 있어서 평등주의, 즉 사회 전체의 자원을 구성원들이 최대한 똑같이 나누자는 이념을 “균등주의”로 표현하겠습니다. 시민적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각 개인은 평등하다는 것, 그리고 시민적 권리를 누리기 위한 물질적·사회적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대 이념에서 공통으로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겠지요.

불평등을 완화한다는 의미에서 균등주의는 매력적입니다. 특히 소득과 자산 모두에서 불평등이 심각해지는 요즘에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부작용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자유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분배의 원리가 능력주의라면, 불평등의 심화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능력주의의 왜곡도 심각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각 개인의 능력이 완전히 발휘되고 동시에 능력에 따른 보상이 실현되는 자유주의의 이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통한 착취가 상수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불평등이 너무 심각하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더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를 제대로 비판하지는 못합니다.

현실의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균등주의가 실제로 사회의 분배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더 큰 문제입니다. 우선 균등주의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상태에 따라 개인의 필요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여에 따른 분배”라는 정당성과 함께 “노동가치론”이라는 경제학적 근거가 있는 능력주의와 비교하면 균등주의에는 선한 의도를 빼면 근거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능력주의에 근거해서 생산-분배-소비를 조직하는 사회는 실현 가능하지만, 균등주의에 근거해서 생산-분배-소비를 조직하는 사회는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도 어렵다는 말입니다.

제가 좀 냉정하게 말했습니다만, 이런 이유로 균등주의는 사회의 분배원리 혹은 작동원리로 보편성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분석하고 그 한계를 비판했던 마르크스는 이 같은 점을 꿰뚫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분배 원리로서 능력주의가 노동가치론의 입장에서 합리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능력주의가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균등주의가 능력주의만큼이나 불공정한 원리임을 지적하고, (형식적으로 불평등하지만 내용적으로 평등한 원리인) 필요에 따른 분배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문제적 현상(불평등)만을 비판하면서 즉자적 대안(균등주의)을 제시하는 대신, 능력주의의 합리성을 파악하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동시에 근본적 대안(필요에 따른 분배)을 제시했습니다. 마르크스의 분석 중 가장 곱씹어볼 지점은, 의지만으로는 이상적 현실(필요에 따른 분배)로 곧바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하고, 그것이 가능한 조건(생산관계의 변혁을 전제로 한 생산력의 발전과 욕구의 전환)을 진지하게 사고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3. 162페이지에 “청년 세대의 인식이 특별히 왜곡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며, 오히려 연대 의식이 더 높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도 확인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의 인식이 정말 그러한지에 대해 의문이 있습니다. 근무 태도, 업무 성과, 자질과 능력에 따라 임금에 차이를 두어야지 학력 수준에 따라서는 차이를 둘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높았다는 결과도 나오는데, 공공기관 고학력 고스펙 정규직 청년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것과 같이 공공기관 고학력 고스펙 정규직 청년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학력 수준에 따라서는 차이를 둘 필요가 없다”는 내용은 158페이지 “임금 차이를 두어야 할 조건에 대한 생각” 문항인데, 해당 문항에 대한 세대별 답변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 세대 전체의 생각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조사」를 인용한 것이 공공기관 정규직 청년조합원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 특정 세대나 집단의 가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문제를 건설적으로 해결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고, 최소한 신빙성 있는 근거를 토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공기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청년들이 본래부터 우리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고, 인국공 사태에서 공공기관 정규직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이 유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공정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갈등이 능력주의 때문이고, 특히 청년 세대가 능력주의를 가장 깊이 체화하고 있어 문제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능력주의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묘사에 비해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조사」는 해당 주제에 대해 가장 폭넓고 깊이 있게 분석한 최근 자료입니다. 어떤 주장을 하려면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근거에 기반해야 하고, 특히 특정한 의도에 맞추어 조사 결과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능력주의에 압도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대다수가 합리적·상식적으로 생각한다는 점, 두 번째는 여러 사람의 생각과 달리 청년 세대의 인식이 특별히 왜곡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는, 근무태도,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 근속년수에 따라서 임금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답변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근무태도,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가 다르더라도 보상에 전혀 차이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이 다수를 차지한다면 오히려 비정상적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공동의 과업을 수행할 때 성실하게 기여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청년세대의 인식에 대해서는, 청년세대가 특별히 능력·노력에 따른 차등분배를 더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청년세대의 인식이 특별히 왜곡되지 않았고, 청년세대가 오히려 성장보다 복지를 중요시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점을 볼 때 연대의식이 오히려 더 높을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 하더라도 인국공 사태나 건보고객센터 사태에서 공공기관 정규직 청년들의 행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직접고용에 대한 반대를 넘어서 정규직화 자체를 반대하거나, 비정규직 문제를 완화할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과격한 주장도 상당히 있는 데다, 노동시장 전반의 문제를 인식하기보다 공공기관 정규직 일자리 자체의 특권적 성격을 유지·강화하려 하는 경향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치관이 문제라고 평가하면서 “대항 담론”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 정책이나 노동운동의 “제대로 된 정규직화” 요구도 한국 노동시장 전반의 문제를 연대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19년 가을호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평가」에 담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특정 집단의 인식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대항 담론”을 통해 특정 집단의 인식·행동을 제압하거나 교화하려는 방식은 오히려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식이나 가치관이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 조건과 운동 방향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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